※무량수전이 없어도 부석사는 부석사,
바다에 떠 있는 부석 그리고 중국을 마주보는 절의 위치가 오히려 더욱더 사실감을 높게 합니다.
서산에 가면 부석사가 있다. 부석사하면 우리는 흔히 영주 부석사를 떠올린다. 간혹 서산 부석사에 와서 무량수전을 찾는 이들도 있다고 한다.
서산 부석사와 영주 부석사는 사찰명만 같은 것이 아니다. 사찰의 창건설화도 의상대사와 선묘낭자에 얽힌 이야기로 내용이 같다.
부석사 전면 바다에 부석도 보인다. 어찌된 일일까? 자못 궁금증을 자아낼 수 밖에 없다.
서산 "부석사,는 경북영주의 부석사와 이름이 같아 혼동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이곳 부석사는 영주에 부석사처럼 유명하거나
규모가 큰 사찰은 아니지만, 그 창건설화와 역사는 영주의 부석사와 똑같이 전해지는 쌍둥이 절이다.
주경(宙耕) 스님은 올해로 10년 째 부석사 주지 일을 맡고 있다.
1986년 수덕사로 출가해 설정(현 방장) 스님을 은사 스님으로 모셨는데, 법명을 내리며 하신 말씀이 "우주를 갈아엎는 큰 일꾼이 되라"는
것이었다 한다. 해인사 승가대(1989~92년)에서 수학할 때는 입승(立繩ㆍ학생회장)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입승이란 목수들이 쓰는 먹줄을 의미하는 용어로 학인승들의 규범을 세우고 화합에 앞장서야 하는 자리라고 한다.
안면도 가는 길을 따라 가다보면 ‘부석사’라고 쓴 이정표를 만날 수 있다. 서산 부석사는 677년(문무왕 17) 의상대사가 창건한 절이다.
영주 부석사가 676년 의상대사에 의해 창건되었으니 그 1년 후 지어진 셈이다. 영주 부석사에는 선묘설화가 내려오는데, 의상대사를 흠모한 선묘라는
여인이 용이 되어 절의 창건 방해세력들을 무찌른다는 내용이다.
큰 바위를 세 차례나 공중에 들었다 놓았다 반복하며 겁을 주었고, 거기서 ‘뜬 바위’라는 뜻의 ‘부석(浮石)’이 유래되었다.
서산 부석사에도 선묘설화가 있다. 다만 그 바위는 영주 부석사처럼 무량수전 왼편에 있지 않고, 절에서 내려다보이는 바다에 있다.
서산 주민들은 이 바위를 검은녀라고 부르는데, 항상 바다에 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 바위는 간만의 차이에도 관계없이 눈에 보이는 것이 항상 떠 있는 것처럼 보여, "검은녀"라고 부르게 됐다고 한다.
우리는 이 대목을 놓칠 수 없다. 의상대사와 검은녀, 서산이 삼국시대에 중국을 오가는 뱃길의 출발점이였다고 한다면 서산과 영주 부석사가
공통으로 갖고 있는 창건설화와 더 부합되는 지리적 위치를 갖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산길을 따라서 굽이굽이 올라가다 보면 도비산 중턱에 부석사가 길게 누운 소 형상으로 자리잡고 있다. 마당에 서면 눈앞에 바다가 펼쳐져 보인다.
스님이 가리키는 손끝을 따라서 자세히 보니 부석이 보인다. 의상대사가 절을 짓고 있을 때 일부 주민이 절 짓는 것을 방해하자 용의 화신인
산더미 만한 바위가 공중에 떠서 주민을 호통치다가 절 앞에서 정면으로 내려다보이는 천수만 앞바다에 떠 있으면서 부석사 공사를 지켜보았다고 한다.
사적기가 현재 남아있지 않아서 창건연대를 명확히 알 수 없으나 태안 마애불, 서산 마애불, 보원사지 등과 함께 백제의 사찰이 아니였을까 조심스럽게
추정해 볼 수 있다. 품고 있는 얘기가 많은 사찰이다. 휙 보지 말고 자세~히 보자. 언젠가는 그 역사의 비밀을 풀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부석사(浮石寺) = 충청남도 문화재재료 제 195호, 소재지 = 충남 서산시 부석면 부석사길 243
부석사는 신라 문무왕 17년(677)에 의상대사가 지었으며 그 뒤 무학대사가 보수하였다고 전한다.
경내에는 극락전을 비롯하여 같은 건물로 연결된 심검당, 무량수각 등의 건물이 있으며, 극락전 앞에 안양루가 서해를 향하고 있다.
◎고려시대 건축양식을 보이고 있는 건축물이다.
서산 휴게소에 들려 볼일을 보고 간단하게 식사를 하고 돌아봤다. 여행중에 휴게소에 쉬면서 주변을 돌아보고 먹거리를 즐거는 재미도 솔솔하다.
이렇게 그림과 사진 전시도 그 중 하나이다.
요즘은 자기 일상을 즐기는 사람들이 많아 휴게소도 옛날 같지 않고 시대의 흐름에 맞춰 아웃도어 가게들이 많이 들어섰다.
사자문(獅子門)
入此門內莫存知解(입차문내막존지해)란 글이 써 있다. = 혹시 나름해석 : 곧 이곳에 들어서면 마음이 고요하며 깨닫게 된다 란 뜻
부석사에서는 금강역사가 사자상으로 조성되어 있다. 입을 크게 벌리어 "아"하고 소리내는 사자는 "나라연 금강" 이며
입을 굳게 다물고 있는 사자는 "밀적 금강"인 것이다. 그리고 사자문 기둥에는 위와 같이 "入此門內莫存知解(입차문내막존지해)"라고 쓰인
조그만 편액이 달려 있다. 이 글에 뜻은 아래에 적혀있다.
다른 사찰은 일주문이라고 있는데 이곳은 일주문은 없고 사자문이란 현판이 걸려있는 문이 있다. 아마도 이곳이 일주문이 아닐까 생각해 봤다.
부석사 입구에는 사자문이 있어 이문을 통과하여 계단을 올라야 절 마당으로 들어설 수가 있다.
이 문이 사자문으로 편액이 된 것은 문 앞에 사자가 지키고 있기 때문인데 이는 다른 사찰에서는 금강문이나 천왕문에 위치한 금강역사를
대신하고 있는 것이다.
입을 굳게 다물고 있는 사자는 "밀적 금강"인 것이다. 그래서 이곳에 있는 사자는 "밀적 금강" 인 것이다.
사자문(獅子門) 入此門內莫存知解(입차문내막존지해)
入此門內莫存知解(입차문내막존지해)란 = 경내로 들어 올 때에는 알음알이를 버리라는 뜻으로
깨달음의 세계로 가기 위해서는 알음알이를 내려 놓을 줄 알아야 한다. 는 것을 우리에게 일깨워 주고 있는 것이다.
소뿔의 형상을하고 있는 바위
조계종 제7교구 본사인 수덕사의 말사로 677년 의상이 창건하고 조선시대 무학스님이 중창하시고,
근대에는 한국선불교를 중흥시킨 경허, 만공대선사들께서 이도량에 머무시며 수행정진하였다.
인중지룡<人中之龍>을 길러낸 곳이ㄹ라는 "목룡장<牧龍莊>"과 지혜의 검을 찾는곳이라는 "심검당<尋劍堂>" 현판은 경허스님의 글이고,
부석사 큰방에 걸려있는 "浮石寺" 현판은 만공스님께서 70세 나이에 쓰신글이란다.
소뿔의 형상을하고 있는 바위
큰 법당인 극락전을 중심으로 이어져 있는 목룡장과 심검당 큰방은 누워있는 소의 모양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앞면에서 보면 雲居樓(운거루)란 편액이 걸려있는 건물임
雲居樓(운거루)
운거루 옆 나란히 있는 건물로 "도비산 다원" 팻말이 붙어있는 찻집 신도회에서 운영한다고 한다.
텅 비어 있으면 남에게는 아름답고 나에게는 고요합니다. 찾집에 쓰여있는 글귀
안양문(安養門)
안양이란 : 극락이라는 뜻이니 극락으로 들어가는 문이다.
극락전(極樂殿)
이곳은 극락세계의 부처님이신 아미타불을 모신 법당이다. 미타전(彌陀殿)이라고도 하며,
아미타불은 그 광명이 끝이 없어 백천억 불국토를 비추고, 그 수명이 한량없어 백 천억겁으로도 셀 수없다 하여 무량수전(無量壽殿)이라고도 하는데,
한 나라의 임금의 지위와 부귀를 버리고 출가한 법장비구가 48대원을 세워 수행하여 아미타불이 되었다고 합니다.
보통 극락전 내부에는 주불인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을 협시보살로서 봉안합니다.
그러나 서산 부석사는 아미타부처님과 좌우보처로 지장보살과 관세음보살이 모셔져있다.
地藏菩薩(지장보살) 阿彌陀佛(아미타불, 중앙) 觀世音菩薩(관세음보살)
아미타부처님과 좌우보처로 지장보살과 관세음보살이 모셔져있다.
아미타부처님은 복장물(腹藏物)에서 숙종 15년(1689년) 왕자 균이 태어날 때 서원을 세워 제작된 것이다.
1905년 풍양 조씨의 묘 조성때 옛 용봉사가 파괴되면서 부처님도 방치되어 있다가 이 곳으로 옮겨 모셨다.
극락세계를 주관하는 아미타불로 좌우 보처없이 불단에 안치하였다. 갸름한 얼굴에 반개한 눈, 이마에는 백호, 삼각형의 높은 육계는 소라형으로
중심에 계주를 장식하였다. 통견(通肩)의 옷주름은 형식적으로 늘어져 있고 결가부좌한 다리는 둔중한 느낌을 준다.
뒤에는 아미타후불탱(阿彌陀後佛幀)이 걸려 있다.
地藏菩薩(지장보살) 阿彌陀佛(아미타불, 중앙) 觀世音菩薩(관세음보살)
阿彌陀佛(아미타불, 중앙)
地藏菩薩(지장보살) 觀世音菩薩(관세음보살)
地藏菩薩(지장보살)
지장보살은 대비원력을 상징하는 보살로서 스님과 같은 모습으로 삭발한 머리에 두건을 둘렀으며 육환장을 들고 있는데,
이 육환장의 정수리 부분에는 아미타불의 화현을 모시고 있다.
치성광 여래
민간신앙을 흡수하여 부처님으로 승격시키고 칠성의 주존을 치성광여래로 모시며 그림으로 도상화한 것이 칠성탱(七星幀)이다.
화면 중심에는 치성광여래가 연화대좌에 앉아 자리를 잡고 있으며, 양쪽에는 일광보살과 월광보살이 협시를 이루고 있다.
그리고 좌우에는 일곱 분의 성군(星君)이 배치되어 있다. 전체적인 색채는 적색과 청색이 주류를 이루며 녹색을 가미하여 그려져 있다.
신중단(神衆檀)
불법을 수호하는 여러 선신(善神)을 도상화한 그림을 신중탱이라 한다.
많은 신들을 배치하여 그리므로 다양하고 복잡한 구도를 보이는 이 신중탱은 일반적으로 제석(帝釋)과 위태천을 중심으로
주위에는 무장을 한 신중들을 배치한다.
이단 구도로 상층에는 보살이 일렬로 늘어서 있으며, 하단에는 제석을 중심으로 무장한 팔부중을 배치하여 그렸다.
법당 내부
법당 예불용 범종 단조롭게 느껴지나 여느 법당종과는 다른 범종이다.
흔히보는 용뉴와는 사뭇다른 새의 모양을 하고있다. 부리가 있고 목으로봐서는 용같기도 하고
부석사에 오면 이 像들이 난 참으로 정겹게 느껴진다. 그리고 자꾸 웃음이 난다.
부석사 삼층석탑(浮石寺 三層石塔)
부석사 삼층석탑(浮石寺 三層石塔)
연꽃 봉우리가 앉혀있는 상륜부 세밀도
용왕각(龍王閣), 산신각(山神閣), 선묘각(善妙閣) = <三聖閣>
산신각(山神閣)
이 산신탱은 호랑의 변화신인 산신을 중심으로 반드시 호랑이와 함께 그리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림의 중심에는 백발의 늙은 산신이 복건을 쓰고
한 손에는 파상선을 들고 소나무 아래 앉아 있다.
그 옆에는 항상 따라다니는 호랑이가 포효하고 양쪽에는 동자가 천도복숭아를 공양하고 있다.
용왕신(龍王神)
선묘낭자(善妙娘者)
의상대사와 당나라 처녀 선묘낭자의 애뜻한 사랑이야기
못이룬 사랑 용이 되어
신라 제 28대 임금, 진덕여왕 4년 서기 650년<복흥사>라는 절에 의상대사라는 승려가 있었다. 의상대사는 큰 뜻을 품고 당나라에 들어가
지장사에서 지엄법사라는 노(老)스님을 스승으로 모시고 열심히 공부(불도)를 하였다.
나이 많아 시작한 공부지만 얼마나 열심히 공부를 하였는지 의상대사는 스승으로부터 칭찬을 많이 들었다.
이때, 지장사 아랫마을에는 젊고 예쁜 "선묘낭자"라는 처녀가 살고 있었는데, 이 낭자는 신라에서 온 의상대사를 흠모하게 되었다.
그러나 의상대사는 이러한 사실도 모르고 열심히 공부하여 마침내 문무왕 1년에 시라로 돌아가게 되었다.
의상대사가 고국으로 돌아간다는 말을 들은 낭자는 떠나기 전날, 의상대사를 찾아와 사랑을 고백하였고
이에 의상대사는 불도를 닦는 사람으로서 불가함을 설명하자 물러갔다.
다음날, 의상대사가 배를 타려고 하자 그 낭자가 어느새 승복차림에 "결혼은 못하더라도 스님 곁에서 나도 불도를 배우겠다"고 말하자
의상대사는 다시 점잖게 꾸짖으며 집으로 돌아갈 것을 권하였다.
하지만 아무리 애원해도 의상의 마음이 움직여지지 않을 것을 안 낭자는 죽을 것을 결심하고 깊은 바다로 풍덩! 뛰어들고 말았다.
의상대사는 자기 때문에 죽은 낭자를 생각하며 몹시 괴로워하고 있는데, 죽은 낭자가 용이 되어 의상대사가 탄 배를 따라 신라까지 오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는 의상대사가 가는 곳마다 숨어 따라 다니고 있었다.
어느날, 의상대사는 자기 때문에 죽은 여인을 생각하고 그 여자의 혼을 위로하기 위하여 절을 세우기로 작정하고 절터를 찾았다.
"당나라의 그 낭자를 위해 아담한 절을 창건하여 그의 넋을 위로하리라"
의상대사는 이곳저곳 절터를 물색하다가 서산군 부석면 도비산 중턱에 절을 짓기로 하였다.
"산수가 수려하고 앞에 바다가 탁 트였으니 그 낭자가 좋아할 것 같아!" 의상대사는 좋은 곳에 절을 짓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하였으며,
그 때가 문무왕 10년이 되는 해였다.
그러나, 그곳 동네 사람들은 도비산에다 절을 짓는 것을 반대하였다. 동네 사람들이 반대하는 데도 의상대사는 절 짓는 일을 계속했으며
사람들은 거의 다 지어가는 절을 쇠스랑을 들고 쫓아와서 부수어 버리려고 하였다.
동네 사람들이 흥분하여 절에 불을 지르려고 할 때 갑자기 큰 바위가 공중에서 둥둥 떠오더니 바위가 큰 소리로 말하는 것이었다.
"모두 듣거라, 너희들이 절 짓는 것을 계속 방해하면 이 바윗돌로 너희들 머리를 부수겠다 지금 당장 물러들 가거라!
머뭇거리고 있는 사람은 내가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하고 산이 흔들리도록 큰 소리로 꾸짓는 것이 었다.
동네사람들은 혼비백산 쫓겨가면서도 이것이 어찌된 일인지 알도리가 없었다.
의상대사는 생각하기를 "저 바위는 당나라 낭자가 용으로 변하여 그 용이 다시 바위로 변하여 나를 도와주는 거야!
"의상대사는 새삼, 죽은 낭자가 가엾다고 생각되었다.
바위는 흘쩍 날아가 절에서 바로 보이는 바다에 떠 있으면서 절 짓는 공사를 지켜보고 있었다.
사람들은 이 돌을 물 위에 떠 있다해서 "부석(浮石)"이라고 이름을 지었으며 절이름도 "부석사(浮石寺)"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선묘낭자(善妙娘者)
용왕각(龍王閣), 산신각(山神閣), 선묘각(善妙閣) = <三聖閣>
거북바위 옆에는 소원을 비는 종이 있네요. 종을 3번 치고 소원을 빌어보세요
이 종은 법당종을 축소시킨것이네요.
산신각 좌측으로 돌아가면 산신각이 올라가도 남을 만큼 큰 바위가 있는데 이 바위는 거북바위입니다.
어떤분들은 이 바위가 부석이 아니겠느냐는 의견을 내기도 하는데. 우리 부석사의 부석은 분명히 바다위에 있습니다.
석불(石佛)
이번에 가서 보니 바위에 인위적으로 석불을 만들어 놓으셨다. 그런데 정감은 가지를 않는다.
기계로 정갈하고 깔끔하게 깍아놓고 다듬었지만 너무 깔끔해 정이 안간다고 할까 노천에 계신것인데 거친면이 하나도 없다.
석불의 정면과 옆면모습
설법전(說法殿)
전에 없던 건물이다. 오랫만에 와보니 스님께서 많은 일을 해 놓으셨네요 주지(주경)스님의 부석사에 대한 애정이 그대로 곳곳에서 묻어난다.
설법전(說法殿)에 모셔진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坐像)과 해상용왕(海上龍王立像) 남순동자 상(南巡童子 立像)
관세음보살은 대자대비의 상징이신 분이다.
현대 판 관음입상(觀音菩薩立像)
이 관음상은 예술적으로 모셨다 성모마리아상 비숫하게 생기셨다고 생각하고는 자세히보니 아니였다.
길상사에 있는 관음상과는 전혀 다른 여전사 스런모습과 인자함이 함께 보인다. 너무 멋있었다. 언제 어디에서나 나타나실것만 같음이 보인다.
금시조(金翅鳥) 혹은 가루라(迦樓羅)
불경에 나오는 신화적인 상상의 새이다, 금빛 날개를 달고 있으며 입에서 불을 내 뿜고 용을 잡아먹는다고 한다.
신령스런 새 사천하(四天下)의 대수(大樹)에 내려 용을 잡아먹고 양 날개를 펴면 336만리나 된다고 한다.
그 날개는 금색이다. 대승경전에서는 천룡인부중(天龍人部衆)의 하나이고 밀교에서는 범천(梵天) · 대자재천(大自在天)이
중생을 구하기 위해 이 새의 모습을 빌려 나타난다고 한다.
또는 문수의 화신이라고도 한다.
용을 잡아먹는다는 가루라(금시조) 이야기
본생담의 금시조와 판다라 용왕과 나형행자의 이야기는 부처님과 사리불 그리고 데바닷타의 전생이야기다.
옛날 범여왕이 나라를 다스리고 있을 때 500상인들이 바다로 나아갔으나 파선돼 단 한사람만 카란비야의 항구로 돌아왔다.
그는 거기서 알몸으로 행걸하면서 항구를 돌아다녔다.
사람들은 그를 보고 욕심이 적고 만족할 줄 아는 사문이라면서 카란비야의 나형행자(裸形行者)라는 이름으로 존경심과 공양을 올렸다.
판다라 용왕과 금시조 왕도 그에게 문안하러 왔다.
어느 날 금시조 왕이 나형행자에게 “대덕님 우리 일족들이 저 용을 잡으려하면 우리들은 대개 죽고 맙니다.
저들에게 어떤 비밀이 있으니 저들을 사랑하는 체하여 그 사정을 물어 봐줄 수 있겠습니까?” 그는 그런다고 승낙했다.
용왕이 와서 예배하자 그 까닭을 물었으나 용왕은 “우리들의 비밀을 말하면 우리일족은 모두 파멸하고 말 것”이라며 세 번 거절하였다.
나형행자의 집요한 물음에 용왕은 남에게 말하지 않는다는 약속을 받고 비밀을 말하였다.
“우리는 큰 돌을 삼키고 아주 무거운 몸으로 누워 있다가 금시조가 오면 이빨을 내어 금시조를 물고 늘어집니다.
금시조는 우리들의 머리를 잡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너무 무겁기 때문에 들어 올리려 애쓰는 동안에 조수(潮水)가 밀어닥쳐
물속에서 죽는 것입니다. 만일 그들이 우리의 꼬리를 붙잡아 거꾸로 추스르면 삼켰던 것들을 다 토하게 해
거뜬히 들고 갈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나형행자는 금시조 왕에게 말하여 금시조 왕은 판다라 용왕을 잡아서 공중으로 날았다.
판다라 용왕은 슬피 울며 살려 달라 빌면서 말하였다.
“금시조 왕이여! 어머니가 그 아이를 사랑하는 것처럼 그렇게 그대도 나를 보아다오.”
금시조 왕은 그를 살려주며 “육지에서나 물에서나 내 보호 밑에서 마치 의사가 병자를 대하는 것처럼 그와 같이
나는 너의 의지하는 곳이 되리라” 하고 용을 놓아 주었다.
판다라 용왕은 나형행자를 찾아 갔다. “너는 선량한 벗을 속였다. 네 머리가 깨어져 일곱 조각이 되라.”
나형행자의 머리는 일곱 조각으로 쪼개지면서 땅이 갈라지고 지옥에 떨어졌다.
이러한 경전의 이야기를 사찰의 공포 출목에 조각하여 부처님의 전생담 이야기를
금시조인 가루라와 판다라 용왕의 조각으로, 부처님의 이야기를 더욱 실감나게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사실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용과 봉황의 일반적인 모습으로 볼 것이나 부처님 전생담의 이야기를 알고 보면
판다라 용왕과 가루라의 표정이 재미나 보인다.
설법전(說法殿)
금종루(金鐘樓)
금종루(金鐘樓)
용맹스런 암표범같이 보이데 왜 여기에다 만들어 놓았을까요? 이런모습은 한번도 본 적이 없어 써 넣을 수가없네
이 종각을 지키는 것일까?
금종루(金鐘樓)
금종루(金鐘樓)
금시조인지 용인지....
금종루(金鐘樓)
큰 법당인 극락전을 중심으로 이어져 있는 목룡장(牧龍莊)과 심검당(尋劍堂) 큰방은 누워있는 소의 모양을 하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심검당 아래의 약수는 우유(牛乳) 약수라고 하고, 법당 옆의 큰 바위는 소뿔의 형상을 하고 있다.
법당 건너편 개울 아래에는 소가 마실 물이 흐르는 구수통(여물통)이 있는데,
이 구수통에 물이 계속 넘치면 부석사에서는 먹거리걱정이 없다고 한다.
마을에 전하는 이야기로 100여 년 전에 부석사 약수가 끊어져 이상하게 여겨 스님들과 마을 사람들이 부석(검은여)에 가보니 누군가 몰래
무덤을 썼기에 주인을 찾아 무덤을 파고나니 다시 약수가 솟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부석사와 부석(검은여)간에 신령스러운 기운이 통하는 것을 알았다고 합니다.
심검당 아래의 약수는 우유(牛乳)약수
수월관세음이 모셔져 있는 연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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