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경기 = 心 마음의 길을 찾아서

화계사 = 일주문, 부속건물, 비림, 큰스님사리탑들, 화계사 전경, 동국대 백상원, 주변경관, 관음도전시등

백련암 2014. 4. 28. 12:05

화계사는 삼각산 자락 울창한 숲속에 자리잡고 있는 사찰입니다. 1522년(중종 17년)에 신월선사(信月禪師)가 창건하였는데

원래 고려 광종시절, 법인대사 "탄문"이 지금의 화계사 근처인 부허동에 보덕암(普德庵)을 지었고 이것이 화계사의 시초입니다.

 

그 후 1522년에 보덕암의 신월선사(信月禪師)가 서평군(西平君) 이공(李公)과 헙의하여 보덕암(普德庵)이 있던 부허동 남쪽의 화계동 쪽으로 이전 했는데

법당 3채와 스님들의 요사 50칸을 옮겨짓고 화계사(華溪寺)라고 고쳐 불렀답니다.

창건된 지 채 100년이 되지 않은 1618년(광해군 10년) 9월에는 화재로 법당과 요사가 모두 전소되는 비운을 겪기도 하였지만 1619년

도월스님이 대원군 가문의 시주를 받아 중창불사하였답니다.

 

*화계사에서는 외국스님들을 많이 뵐 수 있다.

근래에 화계사는 국제 포교의 중심 사찰로도 해외에 널리 알려졌다. 일찍이 화계사 주지를 지낸 숭산스님은 1966년 일본에 이어 이후

40여년간 세계 32개국 130여 곳에서 한국불교를 알리는 데 온 힘을 다했다.

벽안의 제자 무량스님과 현각스님 등 그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들이 5만여 명에 이른다.

이에 화계사 대적광전 4층은 불교를 공부하기 위해 우리나라로 온 외국인 승려들의 선방으로 사용되고 있다

 

 

일주문 = 삼각산 화계사(三角山 華溪寺)라는 현판이 걸려있음

현판에는 "삼각산화계사 무인 초춘 무여(三角山華溪寺 戊寅 初春 無如)라고 되어 있는데 무여가 누구인지는?...

 

일주문현판

 

동국대하교 백상원

옆으로보이는 예쁜 건물을 동국대학교 백상원입니다. 즉 동국대학에 재학중인 스님들의 기숙사입니다.

 

 

 

 

 

 

 

 

화계사 안에서 밖을 내다본 일주문

 

400년이 넘은 느티나무

 

 

화계사 오탁천의 유래

 서울시 강북구 수유1동 487번지에 위치한 화계사 옆에는 ‘오탁천(烏啄泉)’으로 불리는 약수가 있다.

이 우물은 예로부터 피부병을 고친다는 영험이 전해지고 있다.

 

구한말 흥선대원군도 이곳에 와서 피부병을 고쳤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까마귀가 쪼아서 만들었다는 이 우물에 얽힌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보자.

 

"까마귀가 부리로 쪼아 영험한 우물을 파다." 

어머니 피부병 고치려 애쓰다가 죽은 아들,  까마귀로 환생해 병 치료하는 우물 파 효도

 

“아이고 가려워라. 도저히 견딜 수가 없구나.”

옛날 한양 화계사 아랫마을 무너미골(水踰洞)에 몹쓸 피부에 걸려 고생하는 늙은 할머니가 살았다.

할머니는 어느 날 삼각산으로 나무를 하러 갔다가 그만 발을 헛디뎌 넘어지면서 이상한 약초가 몸에 닿았다.

그런 일이 있는 뒤로 몸이 가려워지기 시작했다.  “며칠 있으면 깨끗이 낫겠지 뭐.” 할머니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며칠을 지냈다.

그런데 가려움증을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심해졌다. “왜 이러지? 그냥 피부병이 아닌 것 같아.”  

그 물집은 더 큰 많은 곳으로 옮기면서 점점 더 커지지 시작했다. “이거 안 되겠어. 무슨 치료 방법이 있을 거야.” 

 

할머니는 자신의 아들을 찾았다.   "애야, 잠깐 방으로 들어와 보거라.”   "예, 어머니. 무슨 일이라도 있는 겁니까?” 

 “응, 사실은 말이다. 요 며칠 전 산에 갔다가 발을 헛디뎌 넘어졌는데 그 후부터 온 몸이 가렵고 물집이 생기지 뭐냐.” 

효성이 지극하기로 유명했던 아들은 깜짝 놀랐다.  

“아니, 어머니. 그런 일이 있었으면 진작 제게 말씀을 해 주셨어야지요. 어디 봐요.”

할머니는 나이가 들도록 장가도 가지 않고 자신을 돌보는 아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있었다.

“됐다. 며칠 더 있으면 나을 거다. 내가 괜한 말을 꺼냈나 보구나.”

 

아들은 걱정이 됐다. 안되겠다고 생각한 그는 할머니에게 다시 말했다.

“어머니. 병을 그대로 두면 더 키우게 됩니다. 그러지 마시고 저에게 한번 보여 주세요.” 

는 수 없이 할머니는 벽으로 몸을 돌려 웃옷을 벗어 아들에게 보여주었다. 

“어머니, 안되겠어요. 상처가 너무 심해요. 짓무른 상처가 너무 커요. 이 정도가 되면 무척 가려웠을 텐데, 어떻게 가려움을

참으셨어요?”  아들은 은근히 걱정이 되었다.

상처를 치료할 약도 별로 없었거니와 하루하루 산에 나무를 해서 양식을 구해 먹는 어려운 처지여서

좋은 약을 구하기란 하늘에 별 따기보다 어려웠다.

 

아들은 밤늦도록 하늘을 쳐다보며 궁리를 해 보았지만 뾰족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무슨 방법이 있겠지. 오늘은 늦었으니 자야겠다.”

다음날 아침 아들은 평소보다 한 시간 더 일찍 일어났다. 좀 더 많은 시간동안 약초를 구해 볼 작정이었다.  

“어머니, 오늘 좀 늦을 거예요. 제가 삼각산에 가서 어머니 상처를 치료할 약초를 찾아 볼게요.”   “...”

할머니는 아무 대답을 하지 않았다.  

“산에 가거든 조심하거라.”   네, 어머니. 걱정 마세요. 이래 봐도 30년 동안 산을 다닌 아들 아닙니까.

어디에 무엇이 있는 것쯤은 다 알아요.”

 

일찍 삼각산에 올라 온 아들은 화계사 부처님을 찾았다. “부처님, 저희 어머니가 산에서 피부병을 옮아 고생하고 있습니다.

부디 산신님께 부탁해 피부병을 치료할 수 있는 약을 찾게 해 주세요.”

 

아들은 호미를 걸망에 챙겨 넣고 산길을 올라갔다. 한참 산길을 올라가는데 수염이 하얀 노인이 나타났다.

“젊은이, 산에 가시는가 보오.”   예, 어르신. 사실 저의 어머니께서 피부병에 걸려 고생을 하고 계셔서 삼각산에 오르려던

  참이 었습니다. 그럼 이만….”

 

아들이 길을 떠나려고 인사를 하는데 노인이 길을 막았다.

“이 보오. 피부병에는 석창포가 제일이오. 삼각산에 이 약초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소.”  

아들은 눈이 확 트였습니다. “석창포라고요. 어떻게 생겼습니까?”

“으음. 생긴 것은 꼭 창포같이 잎이 넓고, 매끈하오. 만져보면 보들보들하니 이것을 뜯어 끊인 물로 상처를 씻으면 분명 상처가 아물 것이오.

 

이 식물은 습기가 많은 곳에 자라니 웅덩이에 물이 고인 곳을 집중적으로 찾아 보도록 하시오.”

노인의 말에 아들은 다시한번 고마운 마음을 전하고 산으로 올랐다.

하지만 바위가 많은 삼각산 어느 곳에서도 석창포라는 식물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  

“정말 석창포가 있기는 한 것일까?”

아들은 석창포를 찾다가 저녁이 다 되어서 산을 내려왔다. 다음날 아들은 아무리 산을 뒤져 봐도 석창포는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간 어느날 밤 아들의 꿈에 노인이 나타났다.

 

“너는 효심이 지극하고 마을 어른들께 예의를 잘 지킨다는 칭찬이 자자하더구나.

그래서 내 특별히 너에게 너의 어머니 피부병을 고칠 수 있는 장소를 일러 주겠으니 잘 듣거라.”

“감사합니다. 도사님.” 

이후 노인는 아들에게 그 장소를 일러 주었다.

 

“이 절을 내려가면 화계사라는 절이 나올 것이다.

그 절 오른쪽 느티나무 아래 나뭇잎들을 걷어 보면 거기에 어머니의 피부병을 고칠 수 있는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야.” 

다음날 일찍 아들은 화계사 옆 느티나무 아래로 내려가 주변을 살펴보니 커다란 바위가 하나 나왔다.

그 위에 우물이라는 뜻의 정(井)자가 보였다. 

“이 밑에 약수가 있을 거야. 그 물을 어머니가 드시면 피부병이 나을 거야.”  그러나 아무리 파도 샘물은 나오지 않았다.

오히려 단단한 바위만 나왔다. 아들은 점점 지쳐갔고 건강했던 몸은 뼈만 앙상하게 남았다.

“저 사람 저러다간 죽겠어. 쯔쯧.”   어머니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약수를 파던 아들은 그만 힘이 빠져 죽고 말았다.

 

이 소식을 듣게 된 어머니는 이 세상 모든 것을 잃은 듯했다.

“아이고, 아들아. 나는 세상 살 만큼 살았는데 왜 나를 두고 네가 먼저 가버렸느냐?”

아들을 땅에 묻은 뒤 어머니는 자신도 죽을 각오를 하고 아들이 우물을 파던 곳으로 갔다.

그런데 그곳에서는 까마귀가 계속 우물을 파고 있었다.

까마귀는 몇 번 바위를 쪼고 난 뒤 위를 쳐다본 뒤 다시 바위를 계속 쪼고 있었다.

 

“아들아. 네가 죽어서라도 이 어미의 병을 고치려고 까마귀로 환생을 했구나. 엉 엉.”  죽으려고 우물터에 갔던 할머니는 아들의

   지극한 효성에 감동을 받았다.  

그래서 도저히 아들을 따라 죽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어머니는 매일 까마귀로 환생한 아들을 위해 먹을 것을 갖다 주었다.

그러던 어느 날 까마귀가 우물 밖으로 날아 올라왔다.

 

“왜 그러느냐, 아들아. 무슨 일이 있는 것이냐?”

까마귀는 나뭇가지에 앉아 잠시 무슨 소리를 낸 뒤 삼각산으로 훌쩍 날아가 버렸다.  

그러자 우물 안에서 갑자기 무슨 소리가 들여왔다.    쏴아, 쏴아, 쏴아.”    

우물에서 물이 콸콸 쏟아지고 있었다. 할머니는 이 약수를 먹고 피부병을 깨끗하게 고쳤다.

 

이런 일이 일어난 뒤부터 마을 사람들은 이 우물을 까마귀가 바위를 쪼아서 만들어진 샘이라는 뜻에서 오탁천(烏啄泉)’이라

불렀다. 몇년 전까지 오탁천은 수유동 주민들이 즐겨 찾는 약수터로 자리했으나 요즘은 오염으로 인해 ‘음용불가’ 판정을 받아

옛날 영험이 잊혀져 가고 있다.  

 

   

옹달샘 오탁천약수

 

       

옹달샘 오탁천약수

여기오탁천 옹달샘을 이용하시는 여러분들께 알립니다.

옹달샘은 노인분들께서나 몸이 불편하신분께서 많이 애용하시니 몸이 건강하고 젊은 분들께서는 다른 샘터를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이런 팻말이 붙어있네요

 

화계사 오탁천(烏啄泉) / 한도훈

 

한평생 꽈당당 넘어지며 살아도

쪼로롱 오탁천(烏啄泉) 옹달샘

한 바가지 생명수로

목축이면 그만이리

삼각산 오탁천(烏啄泉)에 뿌리 둔

오백살 느티나무 굴헝에서

붉은 여우 안식처 삼아

해탈하고

바위굴 속 서리서리 묻어 둔

화계사(華溪寺) 풍경소리

입술로 닦고 닦아

바위 시렁에 올려놓으면

텅빈 내 가슴 푸른 물이 들까

봄 되어 제비꽃 속에 코박은

동전만한 햇살 받으며

까마귀 부리로 바위 쪼아

솟은 샘물로

말갛게 얼굴 씻는 한 처녀

전생에 눈먼 소리꾼으로 살다

개천(開天)해서

쑥대머리 한 가락쯤 흉내낼지 몰라

낙수물 떨어지는 이 시간에...

 

**오탁천은 까마귀가 부리로 바위를 쪼아 물이 콸콸 솟게 해 피부병을 낫게 했다는 전설이 서려 있는 약수터임.

 

   

삼각산 화계사 사적비명(三角山 華溪寺 事跡碑銘) = 화계사의 역사가 적혀 있다.

 

 

삼각산 화계사(三角山 華溪寺)중건비와 기념비들

 

 

 

 

 

 

고봉 큰스님 추모탑

고봉 대선사는 1890년 9월 29일 대구에서 태어나셨다. 정혜사, 백운사, 건봉암 조실로 전법을 지도 하던 중 숭산행원선사를 법제자로 삼으셨다.

6.25 동란시 공주 마곡사 은적암에서 선회를 열어 선자를 거양하시고 이어 아산 봉곡사, 대전 복전암, 서울 미타사 조실로 계셨다.

1961년 8월 19일 세수 72세 법랍 51세레 삼각산 화계사에서 입적하셨습니다.

 

◈배움을 게을리 하지 말라◈   / 고봉선사의 『겁외가』 중..

 

세상 공부는 많이 배우고 기술을 익혀 학력을 인정받음으로서 안으로는 인격을 형성하고 밖으로는 생활의 도구를 장만하는 것이지만

불교 공부는 마음을 깨달아 세상을 편안하게 사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라 오히려 아는 것도 잊어버려야 하는 수가 있다.

 

그러나 세속에서는 필요 없는 중이라고 하여 세속 공부를 하지 말라는 말은 아니다.

견성공부를 하는 데는 문자, 비문자가 필요가 없으나

중생을 제도하는 데는 그들의 수준과 근기를 알아야 하므로 방편을 익히지 아니하면 안 된다.

 

그러므로『화엄경』10 바라밀 가운데는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 지혜 다음은 원(願) 방편, 힘(力), 지(智)가 있나니

곧 중생을 위한 원이요, 방편이며, 중생을 위해 기르는 힘이고 지혜다.

10 바라밀 중 제 6지는 본성을 깨닫는 지혜이고, 제 10 지혜는 후득지로서 갖가지 기능을 익히는 지혜이다.

 

옛날 고산 지원법사가『치문』의「면학편」을 지었는데 "배움은 가히 게을리 하지 못할 것이고 道는 가히 여의지 못할 것이다.

道가 배움을 말미암아 밝아지기 때문이다." 하였다.

 

범부의 배움이 게으르지 아니하면 현인에 이르고 현인의 배움이 게으르지 아니하면 서현에 이른다.

남산에 대나무가 있어 베어 쓰면 곧으므로 화살로 쓸 수 있지만, 만일 대를 베어 갉고 촉을 박고 깃을 달면 그 듦이 더욱 깊이 된다.

 

공자님의 제자 안연이 아주 머리가 좋았으나 출중하게 되지 못한 것은 게으른 탓이었다.

강한 것은 부드러운데서 배우고 부드러운 것은 강한데서 배운다.

따라서 남녀, 음양, 노소, 강약이 모두 상대적 개념 속에서 서로 배움을 게을리 하지 않나니

그것이 곧 인류의 역사요, 사랑이요, 정치, 경제, 사회, 문학이다.

 

누구나 하루에 글자 한자를 배운다면 1년이면 365글자가 되고 착한 말 한마디 씩을 배운다면 365마디가 될 것이다.

이렇게 10년 20년을 계속하면 마침내 만자(萬字) 천선(千善)이 되어 이 세상의 모든 언어를 어느 것 하나 섭렵하지 못하는 것이 없게 될 것이고

선 또한 행하지 못할 것이 없게 될 것이다.

 

고소 경덕사 운법사는 공부하는 사람의 탁마 과정을 10가지로 적어 훈계하였는데

첫째 계정혜(戒定慧) 삼학(三學)을 익혀야 보리 즉 깨달음을 얻는다 하였고,

둘째 공부하고자 하는 자는 하심 하여야 좋은 벗과 스승을 만나게 된다 하였으며,

셋째 스승을 잘 선택하여야 바른 법을 익히고,

넷째 익히고 외워야 기억할 수 있다 하였고,

다섯째 부지런히 써서 전해야 공든 탑을 이룬다 하고,

여섯째 시(詩)를 알아야 말이 정미로워지고,

일곱째 널리 보아야 전거를 대고,

여덟째 일을 겪어야 확실성 있는 지식이 생기고,

아홉째 좋은 벗을 만나야 조사의 풍을 배우고,

열째 마음을 관해야 성불하게 된다. 하였다.

 

옥(玉)이 있으나 닦지 아니하면 그릇을 이루지 못하고, 사람(人)이 있으나 배우지 아니하면 道를 알 지 못한다 하였으니

열심히 배우고 익혀서 성현의 道를 이루기 바란다.

 

고봉 경욱(高峰景煜, 1890년 - 1961년)선사

조선 세조시 사육신 가운데 한 분인 박팽년의 후손으로 15세에 사서삼경을 독파하고, 1911년 9월 상주 남장사로 입산했다.

1915년 4월 팔공상 파계사 선실에서 좌선 중 홀연히 오도견성 하였다.

 

1922년에는 충남 예산 덕숭산 정혜사에서 만공 대선사로 부터 전법 입실 건당(建幢)하고 이어 청풍납자(淸風衲子)로 운수행을 할 때

광복운동에 연루되어 일경에 피납 되어 1년 6개월간 고생을 하였다.

그 후 정혜사, 백운사, 서봉암 등의 조실로 지도 중에 숭산행원 선사를 법제자로 맞이 하였다.

 

한국 전생 때에는 공주 마곡사 은적암에서 선회를 열어 선지를 거양하시고 이어 아산 봉곡사, 서울 미타사 조실로 계셨다.

그 후 1961년 8월 19일 서울 삼각산 화계사에서 입적하시니 세수 72세 법랍이 51세이시다.

 

<출처 : 법보신문>

 

 

숭산대종사 사리탑(崇山大宗師 사리탑) 1927년 8월 1일(生) - 2004년 11월 30일(拙)

이곳 화계사는 숭산스님이 살아생전에 머무시던 곳이다..

그리고 2004년 11월 30일 오후 5시 20분, 화계사 염화실에서 세수 77세, 법랍 57세로 원적에 드셨다.

 

 

숭산당행원 대종사 비명(崇山堂行願 大宗師 碑銘)

 

 

 

 

화계사 사찰 경내로 들어가는 문

 

 

화계사 대방(大房)인 학서루(鶴棲樓)의 뒤쪽인 대적광전(大寂光殿) 쪽에서 본 모습

대웅전과 명부전을 제외한 명필 현판들이 이곳에 다 몰려있다.

 

 

 

 

   

위당 신관호(威堂 申觀浩)의 글씨                                                             석파 이하응(石坡李昰應)의 예서체 글씨임

화계사라는 편액이 두 군데에 달려있다. 글 하나는 위당 신관호(威堂 申觀浩)의 글씨입니다.

위당 신관호(威堂 申觀浩)는 조선 후기인 1864년(고종 1년) 형조 병조 공조판서를 역임 하였다.

추사(秋史)의 수제자로써 특히 예서를 잘 썼으며, 문장도 뛰어나고 묵란(墨蘭)을 잘했다고 합니다. 

 

두개의 현판중에 또 하나는 흥선대원군인 석파 이하응(石坡李昰應)의 예서체 글씨임

화계사라는 현판이 걸려있고 다른 이름은 없습니다. 그런데 유리문으로 비쳐 나오는 저 안에 계신분은 관세음보살좌상과 자세히는 안보이지만

작은 부처상들이 모셔져 있습니다.

현판이 없으니 함부로 들어가 볼 수없어 그냥 지나갑니다. 그러면서 생각해봅니다. 혹시 이 관세음보살상이 옛날에 화재로 소실된

관음전에 모셔져 있던 관음상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잠시해 보았습니다.

 

유리문 안에 계신 관세음보살

 

자세히는 모르는데 예전에 대웅전 왼쪽에는 본래 관음전이 있었다고 합니다. 1974년에 화재로 소실되었다고 합니다.

관음전 안에는 자수관음상이라는 특이한 유물이 전해져왔다고 하는데 이 자수관음상은 1875년에 왕실에서 내린 것이라 합니다.

 

 

보화루(寶華樓)화장루(華藏樓)편액 

 

보화루(寶華樓) 

이 대방 뒤의 마루에서 대웅전을 향해 예배 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 놓은 것이 서울 주변 왕실 원찰의 공통된 조영방식이다.

보화루의 현판글씨는 추사의 수제자 위당(威堂) 신관호(申觀浩, 1810년 - 1898년)가 쓴 것이다.

 

화장루(華藏樓)편액 = 영선군 박춘광(永宣君 朴春江)의 글씨이다.

 

이 외에도 활해도화(活海道化) 편액 흥선대원군의 예서체로써 대방의 안쪽에 걸려있다.

 

 

 

소원지

 

 

예전 숭산스님 생전에 계실 때 기거하시던 곳이랍니다.

 

 

여기 너무 예쁘다. 보기만 해도 행복함이 느껴지는 곳

 

 

화계사 전경

 

 

화계사 계곡

 

 

 

 

◈류 상선화가님의 관음도 전시

일주문과 경내로 들어서는 문 사이 공간에서 전시를 한다.

 

 

 

 

 

 

 

 

 

 

 

 

 

 

 

 

 

 

 

 

 

 

◈찾아가는 길

지하철 = 1호선은 동대문역, 2, 5호선은 동대문 역사 문화공원에서 4호선으로 환승 → 3번출구로 나옴 → 바로 마을버스 정류장있음

            이 곳에서 마을버스 강북 02번을 타고 한신대 입구, 화계사 입구라는 방송이 나오면 하라하여 보면 길 건너편에 한신대있음

            여기서 한신대쪽으로 건너와  화계사 표지팻말이 가르치는 쪽으로 보면 눈에 화계사 일주문이 보임 = 찾아가기 쉬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