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경기 = 心 마음의 길을 찾아서

수유리 화계사 = 종각, 대웅전, 대방, 삼성각, 천불오백성전, 대적광전, 철항아리, 명부전,

백련암 2014. 4. 28. 12:48

흥선대원군의 친필

 

화계사와 흥선대원군

화계사는 흥선대원군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흥선대원군(이하응)이 화계사와 관련을 맺은 것은 부인(여흥 민씨)의 외가의 원찰인 화계사를

 자신의 원찰인것처럼 자유롭게 출입을 하고 있었던 곳이라 대원군도 자연 이곳을 찾게 되었다.   

 

특히 대원군의 둘째 아들 고종이 왕위에 오르게 된 일화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어느 여름날 대원군이 남루한 차림으로 화계사를 찾았습니다.

서울에서 화계사까지는 10리길이라 화계동구에 도착하였을 때는 갈증이 몹시 심하였다.

너무 목이 마르던 차에 때마침 절 앞 느티나무 아래에 앉아 있는데 동자승이 아무소리도 하지 않고 기다렸다는 듯이

꿀물이 든 사발을 건네 주는 것이었습니다.

신기하게 여긴 대원군은 연유를 물으니 동자승은 그 일은 만인(萬印)이라는 스님이 시켰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는 동자가 대원군을 만인스님에게 안내하였고  대원군은 만인스님을 만나게 되었는데, 만나서 차차 심금을 터 놓게 되었는데 

만인은 대원군의 심중(야심)을 꽤뚫어 보고 있는지라 대원군은 안동김씨의 세도로 부터 왕권을 되찾을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달라고 매달리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만인스님은 망설이다가 인연의 도리는 어쩔 수 없는 것이라 탄식하고

자신이 불가(佛家)의 중죄인이 되어 업보를 면할 수 없을 것이나 시운(時運)이라 하며

자손이 왕위에 오를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충청도 덕산의 가야산 가야사(伽倻寺) 금탑자리가 제왕지지(帝王之地)이니,

남연군(대원군의 아버지)묘소를 그 곳으로 이장하면 제왕이 될 귀한 왕손을 얻을 것" 이라고 한 뒤

혼자말처럼 중얼 거렸습니다.

"대권을 잡게 될 것이나 왕통을 유지하려면 이 성자 만인을 죽여야 할 것이니 그것이 문제입니다. 나무관세음보살!"

 

후에 대원군이 가야사를 찾아 가서 많은 돈을 써서 그 곳 주지를 매수하여 가야사에 불을 지르도록 하였다.

그리고 금탑을 허물고 여러 형제들을 설득하여 그 자리에 남연군의 묘를 이장해 갔다.

 

묘를 이장한지 7년 후에 둘째 아들 재황을 낳았는데 그가 바로 고종(고종)이었고 12살에 왕위에 올랐으니 스님의 말이 꼭 맞는 셈이였다.

대원군은 고종이 보위에 오르자 대원군은  만인대사가 대권을 잡은 뒤 만인을 죽여야 왕통이 유지되리라는 말을 상기했고,

천주교도들의 왕권에 도전하는 무리로 치부하여 박해하였다.

만인 대사가 만인을 죽여야 대권이 유지된다고 한 말은 만인(萬人)을 죽이라는 것이 아니라 만인(萬印) 곧 자기를 죽여야 한다는 뜻으로 한 말인데,

이를 대원군이 오인하여 천주교인들 만 명을 죽인 것이라고 한다.

 

그리하여 왕실의 원찰이었던 화계사에는 흥선대원군과 추사 김정희의 수제자인 위당 신건호(威堂 申觀浩)

몽인 정학교(夢人 丁鶴喬) 등등의 명필들이 쓴 현판이나 주련들이 즐비하게 걸려 있다.

그리하여 대원군은 절 중창을 위하여 시주를 하였으며 화계사 전각 곳곳에 자신의 글씨를 써 놓아 지금도 남아 있습니다.

 

 

범종각(梵鍾閣)

보물 제11-5호인 동종과 함께 범종, 목어, 운판, 법고가 있다. 그리고 수명을 다한 목어의 배판이 다 떨어져 나간 모양으로 매달려 있다.

 

 

범종각의 범종의 용뉴(梵鍾閣의 梵鍾의 龍鈕)

 

 

범종과 보물인 동종이 함께 있다.

 

 

범종각(梵鍾閣)

 

 

사인비구 제작 동종 - 서울 화계사 동종 (思印比丘製作 銅鍾-서울 華溪寺 銅鍾) : 보물  제11-5호   시대 : 조선

조선 숙종 때 경기도와 경상도 지역에서 활동한 승려인 사인비구에 의해서 만들어진 조선시대 종이다.

사인비구는 18세기 뛰어난 승려이자 장인으로 전통적인 신라 종의 제조기법에 독창성을 합친 종을 만들었다.

현재 그의 작품 8구가 서로 다른 특징을 보이며 전해지고 있다.

이 종은 종을 매다는 고리 부분에 두 마리의 용을 조각한 것이 특징이다.

종의 어깨 부분과 입구 부분에 넓은 띠를 두르고 있으며, 몸통에는 사각형의 유곽과 위패 모양을 균형있게 배치하여 안정감을 준다.

사실성과 화사함이 돋보이는 수작일 뿐 아니라, 승려가 공명첩을 가지게 되었다는 당시의 사회상을 알려주는 명문이 남아있어,

종 연구와 더불어 사료로서 가치가 크다.

 

 

범종각의 동종(梵鍾閣의 銅鍾) 보물  제11-5호

 

청록빛이 감도는 이 종은 원래 조선후기의 대표적인 승려장인(匠人)인 사인비구(思印比丘)가 경상북도에 소재한 희방사의 종으로 제작한 것이다.

한국종의 특징인 음통(音筒)이 없고 쌍용으로 된 종뉴(鍾鈕) 아래에 구연부(口緣部)가 약간 오므라든 종신(鍾身)이 연결된 형태이다.

종신의 위쪽에는 2단 원문범자(圓文梵字)로 된 상대(上帶)아래에 4개의 유곽(乳廓)과 4개의 위패(位牌)가 교대로 배치되었고, 종복(鍾腹)에는

주성관련 내용을 알려주는 명문(銘文)이 있으며, 아래쪽에는 하대(下帶)가 구연부(口緣部)에 붙어있다.

종뉴는 사실적인 두 마리의 용이 격동적으로 엉키어 있는데, 얼굴 모습과 자세가 당당한 느낌을 준다.

상대는 조선후기의 다른 전통적인 종들처럼『육자대명왕진언(六字大明王眞言)』과『파지옥지언(破地獄眞言)』을 이중원안에

도안화시킨 것이다. 유곽은 사다리꼴로 사인비구만의 특징인 초엽문을 장식한 유곽대와 정삼각형 육엽화문의 종유(鍾乳)로 구성되었으며,

모두 강직한 선으로 고부조(高浮彫)되었다.

 

하대는 가는 줄기에 넓고 가느다란 잎사귀가 휘감긴 넝쿨 사이에 활짝 핀 연화(蓮花)와 바람개비 모양의 화문(花紋)이 구성된 것인데,

매우 가는 선으로 섬세하게 표현되어 생동감이 넘친다.

이 종은 종신 표면의 각 공간 사이에 적절한 균형을 이룸으로써 전체적으로 안정감을 주고 있으며,

특히 유곽대와 하대문양은 이 종을 화사하고 단아한 분위기로 이끌어 준다.

이와 유사한 종으로는 사인비구가 제작한 홍천수타사종(1670년)과 안성 청룡사종(1674년), 통도사 종류종(1686년)이 있다.

이 화계사 종은 조선후기 범종양식 및 주종장(鑄鍾匠) 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

<화계사 표지말의 내용임>

 

   

서쪽에서                                                                                              동쪽에서<용뉴위치가 다름>

 

범종각의 목어(梵鍾閣의 자기수명 다한 木魚)

 

 

범종각의 목어(梵鍾閣의 木魚)

 

 

범종각의 범종(梵鍾閣의 梵鍾)

 

 

 

 

대웅전(大雄殿) :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 65호  시대 : 1870년(고종 7년)

 

이 건물은 1870년(고종 7년)에 지은 것으로, 화계사의 주불전이다. 화계사는 1522년(중종 17년) 근처 부허동에 있던 보덕암을 옮겨 지은 절인데, 

1618년(고종 3년)부터 고종의 생부인 흥선대원군을 비롯한 왕싱의 시주(施主)를 받기도 하였다.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이며 기둥 위는 다포로 공포를 짠 단층 팔작집인데, 이는 19세기 말 목조건축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판벽을 치고 부처의 일생을 묘사한 팔상도(八相圖)를 그린 점도 돋보인다. 안에는 근래에 모신 석가모니와 문수, 보현보살 삼존상을 모셨지만

원래는 아미타 삼존을 모셨었다.

 

조선후기 서울 근교 사찰, 특히 왕실 원찰에서는 대방을 갖추는 경향이 나타난다. 이는 염불당과 주지실, 부엌과 누마루를 결합한 건물인데,

화계사 대웅전 앞쪽에도 대방(大房)이 있다. 

 

화계사 현판과 주련의 글씨에는 흥선대원군과 같은 댱대 명필들의 솜씨가 잘 발휘되어 있다. 

<화계사 팻말의 내용임>

 

 

화계사대웅전 (華溪寺大雄殿) :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 65호 <문화재청 글>

 

화계사는 조선 중종 17년(1522)에 신월스님이 지은 절이다.

원래는 고려 광종(재위 949∼975) 때 법인대사가 삼각산 부허동에 보덕암을 짓고 이어져 내려오던 것인데, 신월이 지금의 자리로 옮겨 크게 짓고

화계사라 이름지었다. 그 후 광해군 10년(1618)의 큰 화재와 오랜 세월로 인해 건물이 퇴락하자, 고종 3년(1866) 흥선대원군의 시주로 다시 지었다.

1933년 조선어학회 주관으로 한글 맞춤법 통일안을 위해 이희승·최현배 등의 국문학자 9명이 기거하며 집필한 곳이기도 하다.

석가모니를 중심으로 양옆에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을 모시고 있는 화계사 대웅전은 고종 7년(1870)에 새로 지었다.

앞면 3칸·옆면 3칸 규모이며,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집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면서 장식을 겸하는 공포가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놓은 다포양식 건물이다.

화계사 대웅전은 내부천장의 장식이나 기타 다른 건축부재의 장식들이 모두 조선 후기의 양식을 보여주고 있는 목조건축물이다.

 

 

대웅전 현판글씨는 명필인 몽인 정학교(夢人 丁鶴喬)가 쓴 글씨이며 주련은 위당 신관호(威堂 申觀浩)의 작품이다.

대웅전 좌우측 벽에는 석가모니의 일생(팔상도)을 표현한 벽화가 그려져 있습니다.

 

 

= 주련=

毘盧海藏全無跡(비로해장전무적) = 비로자나의 법해에는 완전한 자취가 없고

               寂光妙士亦無踪(적광묘사역무종) = 적광묘사 또한 아무런 흔적이 없다네

              劫火洞然毫末塵(겁화동연호말진) = 겁화가 훨훨 타서 털끝마저 다 해도

              靑山依舊白雲中(청산의구백운중) = 푸른 산은 옛과 같이 흰구름 속에 솟았네

 

그는 高宗시절에 형조, 공조, 병조판서를 지낸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의 수제자이었으며, 해인사,표충사,해남 대흥사 등에 여러 글씨를 남겼다.

이 대웅전 주련에 나오는 글은 중국 송나라 보제(普濟)스님이 집록한 어록체의 선종사(禪宗史) 사서인 "오등회원(五燈會元)" 17권에 나오는 내용이라네요.

 

 

대웅전(大雄殿)

 

 

대웅전 신중단

 

 

대웅전 석가모니와 문수보살,  보현보살 삼존상

 

후불탱화 = 는 1875년에 화산이 조성한 것으로 주불은 석가모니불이 아니고 아미타불입니다.

아미타불 주변으로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 보현보살 문수보살 지장보살 등과 사천왕 십대제자 등이 그려져 있습니다.

 

 

종무소와 대방으로 쓰고 있는 이곳은 학서루(鶴棲樓)이다.

학서루(鶴棲樓) 편액은 흥선대원군의 글씨로 대방 안쪽에 걸려 있습니다.

 

이 대방 뒤의 마루에서 대웅전을 향해 예배 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 놓은 것이 서울 주변 왕실 원찰의 공통된 조영방식이다.

남녀내외법이 극심한 시절이어서 왕실 여자들은 절을 찾아와도 법당에 들어가지 못하고 대방에서 불공을 드려야 했습니다.

 

 

삼성각(三聖閣)

 

 

삼성각의 칠성단의 칠원성군(三聖閣의 七星圖)

 

 

삼성각의 산신상과 산신도(三聖閣의 山神坐像과 山神圖)

 

 

삼성각의 나한도(三聖閣의 羅漢圖)

 

 

천불오백성전(天佛五百聖殿)

 

내부에 봉안된 오백나한상은 최기남이 관직에서 물러나 금강산 신계사 화엄각에서 20년 동안 조국 광복을 위한 기도를 하면서 조성항 것으로

여주 신륵사에서 모셔 오던 것을 이곳으로 옮겨와 대웅전에 봉안해 오다가 최기남의 가족이 천불오백전을 짓고 봉안하게 되었답니다.

 

 

천불오백성전 나한들.

천불오백성전(천불오백성전)은 오백나한을 모신 전각이다. 나한(羅漢)은 최고의 깨달음을 얻은 성자를 가르키는 말입니다.

최고의 깨달음을 얻었으므로 부처나 보살 못지 않게 공양을 받을만한 위치에 있다고 합니다. 

흔히 "오백나한전" 혹은 "나한전", "응진전" 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화계사에는 특이하게 천불오백성전이라고 현판이 걸려있네요.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또 새로운것을 보고 가게 되네요 다음에 와서는 스님한테 한번물어봐야겠습니다. 

 

여주 신륵사에 봉안했던 것을 1964년 이곳으로 모셔왔다고 하네요^^..  

 

   

 

 

천불전에 모셔져 있는 진영

 

 

천불오백성전의 관세음보살(天佛殿의 觀世音菩薩)

 

 

대적광전(大寂光殿)

 

= 주련 =  

靑山疊疊彌陀窟(청산첩첩미타굴)  =  첩첩쌓인 푸른산은 아미타불 전장이요  
滄海茫茫寂滅宮(창해망망적멸궁)  =  망망대해 푸른바다 부처님의 적멸보궁
物物拈來無罣碍(물물염래무가애)  =  두두물물 일체 것에 걸림 없다면  

幾看松亭鶴頭紅(기간송정학두홍)  =   푸른솔 위 홍학두를 보게 되리라.  

報化非眞了妄緣(보화비진료망연)  =  보, 화신이 참이 아닌 망연된 인연인줄 요해하면 
法身淸淨廣無邊(법신청정광무변)  =  청정한 법신은 가이 없이 넓네. 
千江有水千江月(천강유수천강월)  =  천강마다 물이 있다면,  청강마다 달이 떠 오르고, 
萬里無雲萬里天(만리무운만리천)  =   만리 하늘에 구름이 없다면,  청청 하늘은 만리에 뻗네.

 

♠해석♠

보신불이나 화신불만이 우리와 인연 있는 부처님이 아니라 청정한 법신은 법계 어디에도 가득해서

우리가 항상 접할 수 있는 곳에 계신다는 것을 일깨우는 내용이다.

보신이나 화신이란 부처님을 삼신(三身)으로 나눠 부르는 이름이다. 섬신은 법신 화신 그리고 보신을 말한다.

 

보신이란 과보와 수행의 결과로 주어진 불신을 뜻한다.   화신이란 응화신, 변화신, 응신이라고도 하는데

중생을 교화하기 위해 여려 형상으로 변화하는 불신을...

법신이란 자성신(自性身), 법성신(法性身)이라고도 하는 진리 자체를 의미 한다.

 

이 주련은 이같은 불성의 형상이 진정한 인연이 아니고 우주에 가득찬 법성이 중요한 인연임을 강조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형상으로 나타나 보이는 것에 대한 집착보다는, 우주법계에 두루 존재하는 법서을 깨우쳐 아는 것을 참된 인연이라고 보는 것이다.

 

 

대적광전의 수미단에 모셔져 있는 부처님 비로자나불, 노사나불, 석가모니불

 

 

천백억화신 석가모니불 좌우보처 보현보살 문수보살

 

 

청정법신 비로자나불 좌우보처 문수보살, 대세지보살

 

 

원만보신 노사나불 좌우 보처 대세지보살 관세음보살

 

 

청정법신 비로자나불 좌우보처 문수보살, 대세지보살

 

 

대적광전의 신중단 신중도

 

 

지장보살과 지장보살 시왕도 탱화

 

 

대적광전에 모셔져 있는 지장보살

 

 

대적광전(大寂光殿)의 예불 종

 

 

도림선사와 백락천의 천장화 =  대적광전에 벽화가 아닌 천장에 그림이 그려져 있다.

 

당나라의 백락천(白樂天) 이라고 하면 유명한 시인이요, 뛰어난 경륜을 지닌 정치가이기도 하다.

그가 본래 학식과 총명이 뛰어난데다 벼슬이 자사(刺史)의 지위에 올라 자뭇 그 우월감에 충만해 있을 때 였다.

한 때 그가 항주(抗州)의 자사로 부임한 후의 이야기이다.

 

하루는 그리 멀지 않는 사찰에 도림선사(道林禪師; 741년~824년)라고 하는 이름난 고승이 살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내가 한 번 직접 시험해보리라

작정하고 선사가 머물고 있다는 절로 찾아갔다.

 

도림선사는 청명한 날이면 경내에 있는 오래된 소나무 위에 올라가 좌선(坐禪)을 하곤 하였다.

마침 백락천이 도림선사를 찾아온 날도 나무 위에서 좌선하는 중이었다.

백락천이 나무 아래 서서 좌선하는 스님의 모습을 올려다 보니 아슬아슬한 생각이 들어 선사의 거처가 너무 위험합니다.』 하고 소리치니,

선사가 아래를 내려다보며 자네가 더욱 위험하네』하고 말하는 것이었다. 

듣고 있던 백락천이 어이없어 하면서『나는 벼슬이 자사에 올라 강산을 진압하고, 이렇게 안전한 땅을 밟고 있거늘 무엇이 위험하단 말이오?』 라고

대꾸하는 것이었다.

 

선사는 그가 학문과 벼슬에 자만이 대단하다는 것을 알고 이 기회에 교만한 마음을 깨우쳐주기 위해 곧 바로 쏘아 부쳤다.

티끌같은 세상 지식으로 교만한 마음만 늘어 번뇌가 끝이 없고, 탐욕의 불길이 쉬지 않으니 어찌 위험하지 않겠는가.』

 

백락천은 자기의 마음을 환하게 꿰뚫어 보는 듯한 눈매와 자기가 자사라는 벼슬에 있음을 알면서도 당당하게 자기 할 말을 다하는 기개에 눌려

제가 평생에 좌우명을 삼을 만한 법문 한 귀절을 듣고 싶습니다. 하고 애초에 선사를 시험하려 했던 불손한 태도를 바꿔 공손한 자세로 가르침을 청했다.

『나쁜 짓을 하지말고(諸惡莫作)  착한 일을 받들어 행하라(衆善奉行)』

 

이같은 대답에 대단한 가르침을 기대했던 백락천은 그거야 삼척동자라도 다 아는 사실이 아니요. 하고 신통치 않다는 듯이 말하니 

선사는 침착한 어조로 다시 말했다. 『삼척동자도 다 아는 사실이지만 팔십 노인도 행하기는 어려운 일이네.』

 

이 말을 들은 백락천은 비로소 깨달은 바가 있었다. 알고 있는 것만으로는 아무 쓸모가 없다.

그 가르침을 실천하여 인격화되지 않으면 아만과 번뇌만이 더할 뿐 진리의 길에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한다는 것을…...

 

그리하여 당대의 문장가 백락천은 그 자리에서 도림선사에게 귀의하여 불법의 수행을 돈독히 하였다고 한다.

오늘날까지 많은 사람의 심금을 울려 주고 있는 백락천의 명문(名文) 시구(詩句)들도 지행합일(知行合一)의 인격에서 울려 나오게 된 것이 아닐까. 

 

 

   

대웅전과 명부전 앞 난간에 있는 청동 항아리<드므>

 

이 청동 항아리는 홍대비(1904년)가 내린 놋물드므(유수옹) 1벌이라고 합니다.

전각이 나무로 지어졌기 때문에 화재에 대비해서 소방용으로 놓아 둔 것입니다. 이런 놋항아리는 창덕궁의 인정전, 선정전, 대조전 것과 같다고 합니다.

 

 

명부전(冥府殿)

 

 이곳에는 지장보살과 저승의 심판관인 명부 시왕을 모신 전각입니다.

이 곳에 모셔진 지장보살과 시왕들은 황해도 배천군 강서사(江西寺)에 있던 지장보살과 시왕상을 1877년에 옮겨와 봉안하기 위하여 지는것이다.

그리고 대원군의 지시에 의해 화계사 지장전에 모셔졌다고 합니다.

화계사는 당시 왕실의 적극적인 후원을 받고 있던터라 왕명에 의해 나라에서 가장 뛰어난 지장보살과 시왕상을 옮겨 모시도록 했답니다.

 

 

= 주련 =

地藏大聖威神力(지장대성위신력) = 지장대성의 위신력은

恒河沙劫說難盡(항하사겁설난진) = 항사하 겁 동안 설하여도 다하기 어려워라

見聞瞻禮一念間(견문첨례일념간) = 잠깐만 우러러 뵙고 예배하여도

利益人天無量事(이익인천무량사) = 한량없는 인천을 이롭게 하시네

 

 

명부전(冥府殿) 현판

 

1878년(고조 15년)에 초암스님이 화주가 되어 조대비(인조의 계비이자 헌종의 어머니)의 도움으로 중건한 것입니다.

명부전의 현판 편액과 주련의 글씨는 흥선대원군의 친필이라고 합니다. 흥선대원군 또한 추사 김정희의 제자이다.

현판은 흥선대원군이 추사체(秋史體)로 쓴 것이며, 낙관부에 "대원군장(大院君章)", "石坡(석파, 흥선대원군의 號)라 되어 있다.

 

 

서울 화계사 목조지장보살삼존상 및 시왕상 일괄 : 보물  제1822호    시대 : 조선

 

"서울 화계사 목조지장보살삼존상 및 시왕상 일괄(서울 華溪寺木造地藏菩薩三尊像및 十王像一括)"은 지장보살, 도명존자, 무독귀왕의 지장삼존상과 시왕,

판관, 사자(使者), 동자, 인왕 등 총 25점으로 이루어져 있다.

모든 존상이 주존 지장보살상과 동일한 조각양식을 갖고 있어 영철(靈哲)등에 의해 조성된 것으로 판단된다.

당당한 신체와 율동적인 옷주름 묘사 등에서 수연(守衍), 영철로 이어지는 수연파의 작풍을 볼수 있고,

지장보살상을 비롯한 여러 존상에서 코가 높고 콧날의 윗부분이 양 미간의 높이에 비해 유난히 돌출되게 조각된 것은 영철 조각의 특징으로 보인다.

비록 일부 동자상을 잃었지만 명부전 내부의 주요 존상들은 대부분 남아있어 조선 후기 명부전의 구성을 잘 보여주는 예이다.

뛰어난 작품성과 함께 조성연대, 조각가 및 봉안사찰과 이안사찰등에 관한 명확한 기록이 남아 있어

조선 후기 불교조각사 연구에 매우 중요한 불상군으로 평가된다.

 

2001년 윤사월에 주지 성광스님이 명부전 내부 보수불사와 기와불사를 하였으며 지장보살 개금불사와 도명존자 무덕귀왕상, 십대왕상을

비롯 판관, 수문장상 등을 보수 불사하였다.

 

지장보살 후불탱화

후불탱화는 1815년에 그려졌고 시왕각부탱화는 1878년에 조성되었다. 지장보살과 시왕상을 옮겨 봉안한 후에 새로 그려 모신 것임을 알 수 있다.

 

 

◈찾아가는 길

지하철 = 1호선은 동대문역, 2, 5호선은 동대문 역사 문화공원에서 4호선으로 환승 → 3번출구로 나옴 → 바로 마을버스 정류장있음

            이 곳에서 마을버스 강북 02번을 타고 한신대 입구, 화계사 입구라는 방송이 나오면 하라하여 보면 길 건너편에 한신대있음

            여기서 한신대쪽으로 건너와  화계사 표지팻말이 가르치는 쪽으로 보면 눈에 화계사 일주문이 보임 = 찾아가기 쉬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