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선대원군의 친필
화계사와 흥선대원군
화계사는 흥선대원군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흥선대원군(이하응)이 화계사와 관련을 맺은 것은 부인(여흥 민씨)의 외가의 원찰인 화계사를
자신의 원찰인것처럼 자유롭게 출입을 하고 있었던 곳이라 대원군도 자연 이곳을 찾게 되었다.
특히 대원군의 둘째 아들 고종이 왕위에 오르게 된 일화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어느 여름날 대원군이 남루한 차림으로 화계사를 찾았습니다.
서울에서 화계사까지는 10리길이라 화계동구에 도착하였을 때는 갈증이 몹시 심하였다.
너무 목이 마르던 차에 때마침 절 앞 느티나무 아래에 앉아 있는데 동자승이 아무소리도 하지 않고 기다렸다는 듯이
꿀물이 든 사발을 건네 주는 것이었습니다.
신기하게 여긴 대원군은 연유를 물으니 동자승은 그 일은 만인(萬印)이라는 스님이 시켰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는 동자가 대원군을 만인스님에게 안내하였고 대원군은 만인스님을 만나게 되었는데, 만나서 차차 심금을 터 놓게 되었는데
만인은 대원군의 심중(야심)을 꽤뚫어 보고 있는지라 대원군은 안동김씨의 세도로 부터 왕권을 되찾을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달라고 매달리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만인스님은 망설이다가 인연의 도리는 어쩔 수 없는 것이라 탄식하고
자신이 불가(佛家)의 중죄인이 되어 업보를 면할 수 없을 것이나 시운(時運)이라 하며
자손이 왕위에 오를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충청도 덕산의 가야산 가야사(伽倻寺) 금탑자리가 제왕지지(帝王之地)이니,
남연군(대원군의 아버지)묘소를 그 곳으로 이장하면 제왕이 될 귀한 왕손을 얻을 것" 이라고 한 뒤
혼자말처럼 중얼 거렸습니다.
"대권을 잡게 될 것이나 왕통을 유지하려면 이 성자 만인을 죽여야 할 것이니 그것이 문제입니다. 나무관세음보살!"
후에 대원군이 가야사를 찾아 가서 많은 돈을 써서 그 곳 주지를 매수하여 가야사에 불을 지르도록 하였다.
그리고 금탑을 허물고 여러 형제들을 설득하여 그 자리에 남연군의 묘를 이장해 갔다.
묘를 이장한지 7년 후에 둘째 아들 재황을 낳았는데 그가 바로 고종(고종)이었고 12살에 왕위에 올랐으니 스님의 말이 꼭 맞는 셈이였다.
대원군은 고종이 보위에 오르자 대원군은 만인대사가 대권을 잡은 뒤 만인을 죽여야 왕통이 유지되리라는 말을 상기했고,
천주교도들의 왕권에 도전하는 무리로 치부하여 박해하였다.
만인 대사가 만인을 죽여야 대권이 유지된다고 한 말은 만인(萬人)을 죽이라는 것이 아니라 만인(萬印) 곧 자기를 죽여야 한다는 뜻으로 한 말인데,
이를 대원군이 오인하여 천주교인들 만 명을 죽인 것이라고 한다.
그리하여 왕실의 원찰이었던 화계사에는 흥선대원군과 추사 김정희의 수제자인 위당 신건호(威堂 申觀浩)
몽인 정학교(夢人 丁鶴喬) 등등의 명필들이 쓴 현판이나 주련들이 즐비하게 걸려 있다.
그리하여 대원군은 절 중창을 위하여 시주를 하였으며 화계사 전각 곳곳에 자신의 글씨를 써 놓아 지금도 남아 있습니다.
범종각(梵鍾閣)
보물 제11-5호인 동종과 함께 범종, 목어, 운판, 법고가 있다. 그리고 수명을 다한 목어의 배판이 다 떨어져 나간 모양으로 매달려 있다.
범종각의 범종의 용뉴(梵鍾閣의 梵鍾의 龍鈕)
범종과 보물인 동종이 함께 있다.
범종각(梵鍾閣)
사인비구 제작 동종 - 서울 화계사 동종 (思印比丘製作 銅鍾-서울 華溪寺 銅鍾) : 보물 제11-5호 시대 : 조선
조선 숙종 때 경기도와 경상도 지역에서 활동한 승려인 사인비구에 의해서 만들어진 조선시대 종이다.
사인비구는 18세기 뛰어난 승려이자 장인으로 전통적인 신라 종의 제조기법에 독창성을 합친 종을 만들었다.
현재 그의 작품 8구가 서로 다른 특징을 보이며 전해지고 있다.
이 종은 종을 매다는 고리 부분에 두 마리의 용을 조각한 것이 특징이다.
종의 어깨 부분과 입구 부분에 넓은 띠를 두르고 있으며, 몸통에는 사각형의 유곽과 위패 모양을 균형있게 배치하여 안정감을 준다.
사실성과 화사함이 돋보이는 수작일 뿐 아니라, 승려가 공명첩을 가지게 되었다는 당시의 사회상을 알려주는 명문이 남아있어,
종 연구와 더불어 사료로서 가치가 크다.
범종각의 동종(梵鍾閣의 銅鍾) 보물 제11-5호
청록빛이 감도는 이 종은 원래 조선후기의 대표적인 승려장인(匠人)인 사인비구(思印比丘)가 경상북도에 소재한 희방사의 종으로 제작한 것이다.
한국종의 특징인 음통(音筒)이 없고 쌍용으로 된 종뉴(鍾鈕) 아래에 구연부(口緣部)가 약간 오므라든 종신(鍾身)이 연결된 형태이다.
종신의 위쪽에는 2단 원문범자(圓文梵字)로 된 상대(上帶)아래에 4개의 유곽(乳廓)과 4개의 위패(位牌)가 교대로 배치되었고, 종복(鍾腹)에는
주성관련 내용을 알려주는 명문(銘文)이 있으며, 아래쪽에는 하대(下帶)가 구연부(口緣部)에 붙어있다.
종뉴는 사실적인 두 마리의 용이 격동적으로 엉키어 있는데, 얼굴 모습과 자세가 당당한 느낌을 준다.
상대는 조선후기의 다른 전통적인 종들처럼『육자대명왕진언(六字大明王眞言)』과『파지옥지언(破地獄眞言)』을 이중원안에
도안화시킨 것이다. 유곽은 사다리꼴로 사인비구만의 특징인 초엽문을 장식한 유곽대와 정삼각형 육엽화문의 종유(鍾乳)로 구성되었으며,
모두 강직한 선으로 고부조(高浮彫)되었다.
하대는 가는 줄기에 넓고 가느다란 잎사귀가 휘감긴 넝쿨 사이에 활짝 핀 연화(蓮花)와 바람개비 모양의 화문(花紋)이 구성된 것인데,
매우 가는 선으로 섬세하게 표현되어 생동감이 넘친다.
이 종은 종신 표면의 각 공간 사이에 적절한 균형을 이룸으로써 전체적으로 안정감을 주고 있으며,
특히 유곽대와 하대문양은 이 종을 화사하고 단아한 분위기로 이끌어 준다.
이와 유사한 종으로는 사인비구가 제작한 홍천수타사종(1670년)과 안성 청룡사종(1674년), 통도사 종류종(1686년)이 있다.
이 화계사 종은 조선후기 범종양식 및 주종장(鑄鍾匠) 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
<화계사 표지말의 내용임>
서쪽에서 동쪽에서<용뉴위치가 다름>
범종각의 목어(梵鍾閣의 자기수명 다한 木魚)
범종각의 목어(梵鍾閣의 木魚)
범종각의 범종(梵鍾閣의 梵鍾)
대웅전(大雄殿) :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 65호 시대 : 1870년(고종 7년)
이 건물은 1870년(고종 7년)에 지은 것으로, 화계사의 주불전이다. 화계사는 1522년(중종 17년) 근처 부허동에 있던 보덕암을 옮겨 지은 절인데,
1618년(고종 3년)부터 고종의 생부인 흥선대원군을 비롯한 왕싱의 시주(施主)를 받기도 하였다.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이며 기둥 위는 다포로 공포를 짠 단층 팔작집인데, 이는 19세기 말 목조건축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판벽을 치고 부처의 일생을 묘사한 팔상도(八相圖)를 그린 점도 돋보인다. 안에는 근래에 모신 석가모니와 문수, 보현보살 삼존상을 모셨지만
원래는 아미타 삼존을 모셨었다.
조선후기 서울 근교 사찰, 특히 왕실 원찰에서는 대방을 갖추는 경향이 나타난다. 이는 염불당과 주지실, 부엌과 누마루를 결합한 건물인데,
화계사 대웅전 앞쪽에도 대방(大房)이 있다.
화계사 현판과 주련의 글씨에는 흥선대원군과 같은 댱대 명필들의 솜씨가 잘 발휘되어 있다.
<화계사 팻말의 내용임>
화계사대웅전 (華溪寺大雄殿) :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 65호 <문화재청 글>
화계사는 조선 중종 17년(1522)에 신월스님이 지은 절이다.
원래는 고려 광종(재위 949∼975) 때 법인대사가 삼각산 부허동에 보덕암을 짓고 이어져 내려오던 것인데, 신월이 지금의 자리로 옮겨 크게 짓고
화계사라 이름지었다. 그 후 광해군 10년(1618)의 큰 화재와 오랜 세월로 인해 건물이 퇴락하자, 고종 3년(1866) 흥선대원군의 시주로 다시 지었다.
1933년 조선어학회 주관으로 한글 맞춤법 통일안을 위해 이희승·최현배 등의 국문학자 9명이 기거하며 집필한 곳이기도 하다.
석가모니를 중심으로 양옆에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을 모시고 있는 화계사 대웅전은 고종 7년(1870)에 새로 지었다.
앞면 3칸·옆면 3칸 규모이며,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집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면서 장식을 겸하는 공포가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놓은 다포양식 건물이다.
화계사 대웅전은 내부천장의 장식이나 기타 다른 건축부재의 장식들이 모두 조선 후기의 양식을 보여주고 있는 목조건축물이다.
대웅전 현판글씨는 명필인 몽인 정학교(夢人 丁鶴喬)가 쓴 글씨이며 주련은 위당 신관호(威堂 申觀浩)의 작품이다.
대웅전 좌우측 벽에는 석가모니의 일생(팔상도)을 표현한 벽화가 그려져 있습니다.
= 주련=
毘盧海藏全無跡(비로해장전무적) = 비로자나의 법해에는 완전한 자취가 없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