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화이야기=고려외

국립중앙박물관 = 특별 태마전 : 무량수불(無量壽佛) 극락(極樂)에서 만나다.

백련암 2014. 5. 8. 03:31

고사인물도, 장안사(이북) 어화, 원록도, 지옥사자도 4점, 영산회상도, 신중도, 지장시왕도, 지장삼존도, 감로도 2점,  사직사자도, 팔금강도

아미타 삼존도, 흥국사괘불(오늘에 테마), 반야용선도, 흥선대원군초상화, 목은 이색초상화, 민간신앙도, 송시열초상화, 윤집초상화, 강민첨초상화,

대각국사 진영, 척화비,

 

무량수불(無量壽佛) 극락(極樂)에서 만나다. 태마전<국립중앙박물관>

 

 

 

무량수불(無量壽佛) 극락(極樂)에서 만나다. 태마전 주제

고양흥국사괘불 (高陽興國寺掛佛)  :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 189호

우측 세지보살 · 중앙 무량수불인 아미타불 · 관세음보살 삼존불과 중단부분은 우측 아난존자 · 가섭존자이며

하단부분엔 흰코끼리를 탄 보현보살과 청사자를 탄 문수보살이 그려져있습니다.

 

 

고사인물도(故事人物圖) : 조석진(趙錫晉, 1853년 ~ 1920년)  시대 : 조선 19세기,  비단에 엷은 색(絹本淡彩)

 

소림(小琳) 조석진은 조부 조정규(趙廷奎, 1791~?) 밑에서 학문과 그림을 배우며 성장하였다.

영선사(領選使) 일행의 제도사(製圖士)로 텐진으로 건너가 1년 동안 견문을 넓히고 돌아왔다.

1920년네는 고종의 어진도사(御眞圖寫)에 안중식과 함께 화사로 선발되었다.

1911년 이왕가의 후원으로 서화미술원(書畵美術院)이 설립되자 교수로 있으면서, 근대 화가들을 배출시켰다.

 

화면의 오른쪽은 훌륭한 인재를 잘 알아보고 등용할것을 비유하는「백락상마[伯樂相馬]」의 고사를 표현한것으로서 元 시인인

왕운(王惲)의 상마도(相馬圖) 시 구절이 쓰여 있다.

왼쪽은 도연명(陶淵明 365년 ~ 427년)의「귀거래사[歸去來辭]」를 연상하게 하는 그림으로 元 스님 양기(良琦)의 송하연명도(松下淵明圖)에서

인용한 시구가 있다.

 

 

이북 장안사(長安寺)

 

 

물고기(魚圖) : 장준량 작(張駿良, 1802년~1870년)  시대 : 조선 19세기,  종이에 엷은 색(紙本淡彩)

 

원여(遠汝) 장준량은 조선 말기의 도화서 화원 출신인 장한종(張漢宗)의 아들이다. 아버지의 대를 이어 물고기와 새우, 게 등을 잘 그려

동양 제일이라고 일컬어질 정도였다.

해초 사이를 헤엄치는 어미 물고기와 새끼들의 몸놀림, 호기심 어린 눈으로 물끄러미 보는 듯한 눈동자와 표정 등에서 생동감 넘치는 어락(魚樂)의

분위기를 엿볼 수 있다. 오른쪽 위에 주문방식인 張과 백문방인 준량(駿良)이 찍혀있다.

 

 

원록도(猿鹿圖) 원숭이와 꽃사슴  : 작가미상(作家未詳)  시대 : 조선    비단에 엷은 색(絹本淡彩)

 

소나무 위의 원숭이와 꽃사슴을 그린 그림이다.

동물의 움직임을 잘 포착해 냈을 뿐 아니라 세밀하게 묘사하여 표현력이 돋보인다.

흰 점이 규칙적으로 배열된 꽃사슴은 고개를 뒤로 젖혀 나무 위의 원숭이를 올려다보면서 경쾌한 걸음으로 걷고 있다.

흑백 대조를 통해 강조한 원숭이 두마리 중 한 마리는 나무에 앉아 열매를 먹는데 열중하고 있고,

 다른 한 마리는 사슴을 향해 내겨다보며 놀리는 듯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소나무와 사슴은 전통적으로 장수를 기원하는 소재로 자주 그려졌다.

원숭이는 재치 있고 꾀가 많으며 나쁜일을 물리치는 벽사(辟邪)의 동물로 알려져 있다.

 

 

사직사자도(四直使者圖)지옥사자 중 일직사자와 시직사자  : 시대 : 조선 19세기

네 사자중 위의 그림은 시직염마사자도(時直閻魔使者圖)이다.

 

사자(使者)는 사람이 죽었을 때, 염라대왕을 비롯한 여러왕들이 파견하는 전령(傳令)으로 명부신앙과 관계가 있다.

사직사자도(四直使者圖)에 그려진 네 사자는 수륙재와 같은 큰 의식에서 법회가 열린다는 소식을 시방세계에 전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화면에는 방제(旁題)가 있어 각 사자의 존명을 알 수 있는데, 검은색의 말과 함께 서 있는 존상(尊像)이 일직지행사자(日直知行使者),

흰 말과 함께 도끼를 든 존상이 시직염마사자(時直閻魔使者)이다.

 

 

사직사자도(四直使者圖)지옥사자 중 일직사자와 시직사자  : 시대 : 조선 19세기

네 사자중 위의 그림은 시직염마사자(時直閻魔使者)이다.

 

사자(使者)는 사람이 죽었을 때, 염라대왕을 비롯한 여러왕들이 파견하는 전령(傳令)으로 명부신앙과 관계가 있다.

사직사자도(四直使者圖)에 그려진 네 사자는 수륙재와 같은 큰 의식에서 법회가 열린다는 소식을 시방세계에 전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화면에는 방제(旁題)가 있어 각 사자의 존명을 알 수 있는데, 검은색의 말과 함께 서 있는 존상(尊像)이 일직지행사자(日直知行使者),

흰 말과 함께 도끼를 든 존상이 시직염마사자(時直閻魔使者)이다.

 

 

사직사자도(四直使者圖)  :  시대 : 조선 19세기,  붉은색 말과 함께 도끼를 든 존상이 월직공행사자(月直空行使者)

 

사자(使者)는 사람이 죽었을 때, 염라대왕을 비롯한 여러왕들이 파견하는 전령(傳令)으로 명부신앙과 관계가 있다.

사직사자도(四直使者圖)에 그려진 네 사자는 수륙재와 같은 큰 의식에서 법회가 열린다는 소식을 시방세계에 전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화면에는 방제(旁題)가 있어 각 사자의 존명을 알 수 있는데, 색의 말과 함께 서 있는 존상(尊像)이 연직사천사자(年直四天使者),

붉은색 말과 함께 도끼를 든 존상이 월직공행사자(月直空行使者)이다.

전반적ㅇ니  채색은 원색의 붉은 색과 청색이 두드러지며, 섬세한 필선과 묘사가 돋보인다.

 

 

사직사자도(四直使者圖)  :  시대 : 조선 19세기,   청색의 말과 함께 서 있는 존상(尊像)이 연직사천사자(年直四天使者),

 

사자(使者)는 사람이 죽었을 때, 염라대왕을 비롯한 여러왕들이 파견하는 전령(傳令)으로 명부신앙과 관계가 있다.

사직사자도(四直使者圖)에 그려진 네 사자는 수륙재와 같은 큰 의식에서 법회가 열린다는 소식을 시방세계에 전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화면에는 방제(旁題)가 있어 각 사자의 존명을 알 수 있는데, 색의 말과 함께 서 있는 존상(尊像)이 연직사천사자(年直四天使者),

붉은색 말과 함께 도끼를 든 존상이 월직공행사자(月直空行使者)이다.

전반적ㅇ니  채색은 원색의 붉은 색과 청색이 두드러지며, 섬세한 필선과 묘사가 돋보인다.

 

 

영산회상도(靈山會上圖)영취산에서 설법하는 석가모니불 : 시대 : 조선 1749년

 

영산회상도(靈山會上圖)는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영취산(靈鷲山)설법모임에 참여한 보살(菩薩)과 성문중(聲聞衆), 사천왕(四天王) 등을 나타낸 불화이다.

그러나 이 영산회상도(靈山會上圖)에는 세 부처와 네 보살의 일곱 존상만이 등장하는데,

이러한 표현은 "영산회(靈山會)" 의식에 사용된 괘불화의 도상과 관련이 있다.

18세기의 영산회 의식에서는 괘불화에 의식의 주존인 석가불과 다보불(多寶佛), 아미타불과 문수 · 보현보살,  관음 · 세지보살이 결합한

칠존의 형식이 등장하였다.

 

이 영산회상도(靈山會上圖)는 의식집에서 유래한 도상이 후불화(後佛畵)로도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는 예로 주목된다.

 

 

   

보살들의 세밀도 아미타불, 세지보살, 관세음보살, 문수보살, 보현보살

 

 

신중도(神衆圖)  :  시대 : 조선 18~19세기 = 불법을 수호하는 여러 신들

 

신중도(神衆圖)는 부처와 불법을 수호하는 여러 신들(神衆)의 모습을 나타낸 그림이다.

화면의 위쪽에는 제석천(帝釋天)과 범천(梵天)을 중심으로 일궁천자(日宮天子)와 월궁천자(月宮天子), 주악천인(奏樂天人)들이 둘러싸여 있고,

아래쪽에는 위태천(韋駄天)과 무장신(武將神)들이 그려졌다.

이와 같은 신중도는 조선시대 사찰의 주(主) 전각에 봉안되는 예배의 대상이었으며 19세기부터는 불교 일상의례가 보편화되면서 신중을 중단의례(中壇儀禮)

로 예경(禮敬)하게 되면서 불전의 중단에는 신중도를 걸었다.

 

 

 지장시왕도(地藏十王圖)  :  시대 : 조선 1714년 = 지장보살과 지옥의 시왕

 

지옥에서 고통받는 중생들을 구원하는 지장보살(地藏菩薩)과 죄의 경중(輕重)을 가리는 열 명의 심판관인 十王을 함께 그린 지장시왕도이다.

화면의 중앙에는 지장보살(地藏菩薩)과 도명존자(道明尊者), 무독귀왕(無毒鬼王)의 지장삼존(地藏三尊)을 , 그 주위에는 시왕 등을 배치하였다.

 

조선 후기에는 불전(佛殿) 내부를 삼단(三壇)으로 구성하고 각 단에 대한 의식을 올렸다. 특히 17~18세기에는 죽은 사람의 명복(冥福)을 기원하는

천도(遷度)의식의 비중이 커지면서 중단의식으로 지장보살을 예경(禮敬)하게 되었고, 불전(佛殿)의 중단에는 지장시왕도가 걸리게 되었다.

 

 

지장삼존도(地藏三尊圖) : 시대 : 조선 1876년 

 

지옥에서 고통받는 중생들을 구원하는 지장보살(地藏菩薩)과 지장보살의 협시(脇侍)인 도명존자(道明尊者)와 무독귀왕(無毒鬼王)을 표현한 지장삼존도이다.

불화의 조성연유는 적은 화기(畵記)에 의하면 이 지장삼존도는 지장전(地藏殿)이나 명부전(冥府殿)에 봉안하지 않고

관음전에 봉안하였다고 한다.

특히 시주자가 왕실 인물인것으로 미루어 보아, 왕실어른을 위한 특별한 기도처에 지장보살도와 관음보살도를 함께 봉안하여

극락왕생을 기원하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감로도(甘露圖) 감로를 베풀어 아귀를 구해냄  :  시대 :  조선 1649년

 

감로란 "단 이슬" 이란 뜻으로, 부처가 내린 천상의 음료이다. 화면 아래에는 억울하게 죽은 수많은 영혼의 전생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져 있고,

위에는 일곱 부처가 감로를 베풀어 이 영혼들을 구제하는 모습을 묘사하였다.

화면 가운데에는  영혼의 극락 천도를 비는 의식 장면과 음식을 차린 단을 그렸다.

조선 후기에는 여러 재난으로 죽은 사람을 위무(慰撫)하여 극락에 가기를 바라는 천도(遷度)의식이 성행하였다.

영혼은 불법도량(佛法道場)에 초청하여 음식을 공양하는 시식(施食)은 의식을 통해 극락정토에 왕생할 수 있도록 한다는 의미를 지닌다.

 

 

감로도(甘露圖) 감로를 베풀어 아귀를 구해냄 : 시대 : 조선 18세기

 

감로도의 화면 가운데에는 바루(鉢)를 든 아귀(餓鬼)의 모습이 크게 표현되었고, 영혼의 극락 천도를 비는 의식장면과 음식을 차린 단이 생략되었다.

아귀는 중생이 받는 고통을 나타내며, 부처가 내리는 감로(甘露)를 그릇에 받아 먹음으로 써 윤회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

 

화면 상부 중앙에는 구름을 타고 내려오는 일곱 부처가, 좌우에는 영혼을 이끌어 극락세계고 인도하는 아미타삼존(阿彌陀三尊)과

인로왕보살(引路王菩薩)이 묘사 되었다.

 

화면 하부에는 고통 받는 중생의 모습이 더욱 확대되어 재난(災難)의 여러 모습을 나타내었다.

 

 

 사직사자 도(四直使者 圖) 지옥의 네 사자 : 시대 : 조선

 

사자(使者)는 사람이 죽었을 때, 염라대왕을 비롯한 여러왕들이 파견하는 전령(傳令)으로 명부신앙과 관련이 있다.

이 불화는 네 명의 사자를 그린 사직사자도(四直使者道)로 각각의 존명은 연직사천사자(年直四天使者), 월직공행사자(月直空行使者),

일직지행사자(日直知行使者), 시직염마사자(時直閻魔使者)이다.

이들은 수륙재와 같은 의식에서 법회가 열린다는 소식을 시방세계에 전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현전하는 사직사자도 중 연대가 가장 올라가는 예로, 사직사자 모두를 한 폭에 그려 주목이 된다.

 

 

 팔금강도(八金剛圖) : 시대 : 조선 19세기 중  적성화금강(赤聲火金剛)이다.

 

팔금강도는『금강경[金剛經]을 지키는 여덟 신을 그린 불화이다.

팔금강은 금강경을 수지(受持) · 독송(讀誦)하려할 때 마음을 다하여 부르면 어디서든 나타나 옹호해 준다고 하는 호법신이다.

팔금강은 칼이나 창, 금강저, 바위 등 무기를 들고 호위하는 자세로 표현되는데, 화면에는 황수구금강(黃隨求金剛)과 적성화금강(赤聲火金剛)이 그려졌다.

조선후기의 팔금강도는 사찰에서 의식을 시작하기에 앞서, 도량(道場)을 수호하기 위해 청해진 수호신들로 번(幡)의 형태로 제작되었다.

 

  팔금강도(八金剛圖) : 시대 : 조선 19세기 중  황수구금강(黃隨求金剛)이다.

 

팔금강도는『금강경[金剛經]을 지키는 여덟 신을 그린 불화이다.

팔금강은 금강경을 수지(受持) · 독송(讀誦)하려할 때 마음을 다하여 부르면 어디서든 나타나 옹호해 준다고 하는 호법신이다.

팔금강은 칼이나 창, 금강저, 바위 등 무기를 들고 호위하는 자세로 표현되는데, 화면에는 황수구금강(黃隨求金剛)과 적성화금강(赤聲火金剛)이 그려졌다.

조선후기의 팔금강도는 사찰에서 의식을 시작하기에 앞서, 도량(道場)을 수호하기 위해 청해진 수호신들로 번(幡)의 형태로 제작되었다.

 

 

아미타 삼존도(阿彌陀 三尊圖) : 시대 : 조선 1888년

 

아미타불(阿彌陀佛)과 관음 · 세지보살의 아미타삼존을 중심으로 가섭 · 아난존자를 함께 묘사한 불화이다.

아미타불은 극락세계에서 연화대좌 위에 앉아 있으며, 아미타 구품인(阿彌陀 九品印)의 손모양으로 설법하고 있따.

화면이 가로로 길게 장황되어 있고, 대좌가 연꽃 줄기에서 솟아나며, 관음 · 세지보살의 앉은 자세 등에서 19세기 이후 불화의 특징을 엿볼 수 있다.

 

 

 흥국사 괘불(興國寺 掛佛) : 시대 : 조선 1902년, 경기도 고양 흥국사

 

서방 극락세계의 부처, 무량수불(無量壽佛)을 중심으로 관음 · 세지보살, 아난 · 가섭존자, 어린아이 모습인 문수 · 보현보살을 그린 아미타괘불화이다.

무량수불의 정상 계주와 두 보살의 보관에서는 상서로운 기운이 발하여 오색 구름이 피어 오르고,

가운데 부처는 오른손을 길게 내밀어 극락에 왕생할 자를 맞이하고 있다.

20세기 초반 서울과 경기지역을 중심으로 극락세계에 가기 위한 방법으로 무량수불을 생각하며 이름을 부르는 염불(염불)이 성행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아미타신앙이 유행하고 아미타괘불화가 다수 제작되었다.

이 괘불은 순비(淳妃) 엄씨(嚴氏)가 고종(高宗)과 왕실의 안녕을 위하여 기원한 왕실발원 불화로,

근대기 괘불의 양상과 그 안에 담겨진 불교신앙을 살필 수 있다.

 

 

 삼존상 세밀도 = 세지보살 · 무량수불(無量壽佛)인 아미타불 · 관세음보살

 

 

 

 괘불의 중단부분 세밀도 아난존자 · 가섭존자

 

 

 하단 세밀도 흰 코끼리를 탄 보현보살과 청사자를 타고 있는 문수보살

 

 

반야용선 도(般若龍船 圖) : 극락으로 가는 배.  시대 = 조선 19-20세기

 

불교의 세계관에서 죽음은 단절이 아닌 또 다른 세계로 가는 끊임없는 과정이다.

이 불화는 죽은 사람들이 배를 타고 극락으로 가는 모습을 그린 반야용선도이다.

이 배는 망망한 바다를 건너 죽은 사람들을 극락으로 데려다 준다. 배의 옆머리에는 인로왕보살(引路王菩薩)이 길을 인도하고 있으며, 

 배 안에는 아미타삼존과 지장보살이 왕생자(往生者)들을 함께 태우고 극락으로 향하고 있다.

19~20세기 아미타신앙의 성행과 함께 극락으로 왕생하고자 하는 바람을 표현하였다.     

 

 

가봅시다. 가봅시다 좋은 곳으로 가봅시다.

세상 사람들일랑 그대로 두고 극락으로 가봅시다. 

극락이라 하는 곳은 온갖 고통 전혀 없어  황금으로 따이 되고 연꽃으로 대(臺)를 지어 아미타불 주인되고 관음(觀音) 세지(勢至) 보살되어

중생구제 마흔아홉 소원 세우시고 연꽃대좌 아홉 놓으시어 지혜의 배를 내여 오네!

= 왕생가(往生歌) 중에서 =

 

 반야용선 도(般若龍船 圖) : 극락으로 가는 배

 

 

 이하응(李昰應 像) 초상 :  작가미상(作家未詳) : 보물 제 1499-2호,  시대 : 조선 1869년 경, = 비단에 색(絹本彩色)

이하응 초상 일괄 - 금관조복본 (李昰應 肖像 一括 - 金冠朝服本) = 보물 제 1499-2호

 

고종의 아버지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이하응(1820년~1898년)은 금관조복(金冠朝服)과 서대를 착용하고 상아홀을 든 모습이다.

이 관복은 문무백관이 조하(朝賀)나 의식 때 입는 예복으로 서울 역사박물관에 소장된 초상과 유사하여 1869년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된다.

얼굴은 마치 현미경으로 피부를 관찰한 듯 잔붓질을 반복하여 피부의 질감과 입체감을 표현하였다.

피부의 이러한 표현은 채용신(蔡龍臣, 1850년~1941년)등 이후의 초상화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잔붓질로 반복되는 선묘를 통해 얼굴을 그리기 때문에 이전에 선염을 가하여 입체감을 꼬한 초상화와는 다른 느낌을 준다.

 

 

이색 상(李穡)  : 작가 미상(作家未詳) 보물 제 1215호   시대 : 조선 1711년[비단에 색(絹本彩色)] 

1955년 한산 이씨대종회에서 기탁함

 

목은(牧隱) 이색(1328年~1396年)은 고려 말의 학자로서, 성리학을 연구하고 발전시키는데 공헌하였다.

조선 개국 후 태조 이성계가 한산백(韓山伯)에 책봉했으나 사양하였다.

이색의 초상화는 현재 원본을 옮겨 그린 전신상 넉 점과 반신상 한 점이 전해진다.

이 초상은 목은 영당본으로서 양각이 좁고 긴 타원형으로 처진 사모와 관복은 고려말의 형식을 잘 보여준다.

교의에 앉아 공수자세를 하고 왼쪽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다. 얼굴은 갈색 선으로 윤곽을 나타내고, 이마와 코, 뺨 등에 붉은 색을 가하였다.

1711년 개모하여 임강서원에 봉안되었던 것으로 권근(權近)의 찬문과 후손 이정기(李廷夔)의 글이 적혀있다.

 

 

上  우측 = 洛南軒 養老宴圖(낙남헌 양로연도)낙남현에서 노인들에게 양로연을 베푸는 장면

 

8폭 병풍으로 된《화성능행도가운데 윤 2월 14일 정조가 낙남헌에서 영의정 홍낙성을 비롯한 노인 관료 및 화성의 노인들에게 양로연을 베푸는 장면이다.

어좌 앞 마루에는 노대신과 관원들이 앉아 있도 섬돌 앞뜰에는 왕이 내린 비단 손수건을 지팡이 머리에 메고 앉은 서서노인(士庶老人)들이 있다.

 

上 좌측 = 漢江舟橋還御圖(한강주교환어도) 한강에서 배다리로 건너 환궁하는 장면

8폭 병풍으로 된《화성능행도가운데 화성에 가서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베풀고 돌아오는 장면이다.

행차의 마지막 날인 윤 2월  16일 노량진에서 배다리를 건너 환궁하는 모습이다.

 

하 = 華城 親幸班次 圖(화성 친행반차 도)  : 시대 : 조선 후기 = 정조의 화성행차 그림

정조 19년(1795년) 정조가 어머니 혜궁궁 홍씨(惠慶宮 洪氏, 1735年 - 1815年)와 함께 화성행궁(華城行宮)에 행차한 과정을 그린 그림이다.

정조는 어머니의 회갑과 자신이 즉위한 지 20년 되는 해를 맞이하여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이 있는 화성(顯隆園) 현륭원(顯隆園)에서 회갑연을 베풀고

아울러 신도시 화성의 백성들을 위로하고자 하였다.

이 그림은 1797년에 간행된《원행을묘 정리의궤[園幸乙卯 整理儀軌의 반차도이다.

 

◆정조의 화성행차 주요장면

화성능행도는 정조가 1795년(정조 19년) 윤 2월 8일 부터 16일까지 8일간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모시고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소 현릉원에 행차하여

어머니의 회갑연을 베풀었던 일을 그린 것이다.

이해의 화성능행외 모든 과정은《원행을묘 정리의궤[園幸乙卯 整理儀軌》에 정리되어있다.  이 화성능행도는 의궤의 행렬 반차도와는 다르게 

행차의 중요한 장면을 8폭의 그림으로 남기고 있다.

 

 

 上 좌측 = 漢江舟橋還御圖(한강주교환어도) 한강에서 배다리로 건너 환궁하는 장면

 

 

 上  우측 = 洛南軒 養老宴圖(낙남헌 양로연도)낙남현에서 노인들에게 양로연을 베푸는 장면

 

 

 하 = 華城 親幸班次 圖(화성 친행반차 도)  : 시대 : 조선 후기 = 정조의 화성행차 그림

 

 

조선 후기의 위궤

 

의궤란 =  조선시대 왕실과 국가의 중요 의식 과정을 기록한 책이다. 주요의식으로는 국왕의 혼인을 비롯한 세자의 책봉, 왕실의 잔치와 장례,

궁궐의 건축 등이 있으며 이러한 행사가 끝난 뒤 임시기구인 도감(도감)을 만들어 편찬하였다.

도감에는 일방, 이방, 삼방 등이 담당한 업무 내용을 정리하였고 필요한 경우 도설과 반차도(반차도) 같은 그림 자료를 정리하였다.

정조 대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기록한원행을묘 정리의궤[園幸乙卯 整理儀軌]》나 화성 건설에 관한 기록인《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등의

일부 의궤는 활자본으로 제작되었다.

 

 

잔치 

 

 

 

잔치

 

 

 

임진왜란

 

 

 민간신앙

 

도교와 불교, 유교등이 들어오기 훨씬 전부터 우리 조상들은 해와 달, 북두칠성, 산과 나무, 새와 짐승 등에 신령이 깃들어 있다고 믿었다.

생활 속에서 자연스레 생겨난 이러한 믿음을 민간신앙 또는 토속신앙이라 한다.

민간신앙은 보다 원초적인 기복의 요구에 부응하면서 우리 민족의 생활 속에 깊이 뿌리내렸고, 불교 · 유교 · 도교 등과도 영향을 주고 받았다.

 

 

 서인의 지도자 송시열(宋時烈)의 초상화(肖像畵) :  시대 : 조선 19세기(복제품)

 

조선중기 대표적인 학자이자 정치가인 송시열(宋時烈, 1607년~1689년)의 초상화이다.

송시열은 병자호란 이후 청나라를 공격하자는 북벌론(北伐論)을 주장하였다.

그는 서인의 지도자로서 효종(孝宗)이 죽은 뒤에 일어난 예송논쟁(禮訟論爭)에서 남인과 대립하였고 천하에 적용되는 예(禮)가 동일하다는

예론을 옹호하였다.  

 

 

 병자호란 때 저항한 윤집(尹集)의 초상화(肖像畵) : 시대 : 조선 후기 (복제품)

 

병자호란 때 척화론을 주장한 삼학사 중 한명으로, 병자호란이 끝난 후 홍익한, 오달제와 함께 청나라에 인질로 갔다가 순절한 윤집의 초상화이다.

 

 

 姜 民瞻 肖像(강민첨 초상)  : 보물 제 588호,  시대 = 조선 12년(1788年) 복제품

 

고려의 명장 강민첨(963年 ~ 1021年)의 초상화이다. 강민첨은 문신관료 출신이면서 군 지휘권을 맡아서 현종 10年(1019年)에

강감찬과 함께 10만 거란군을 격퇴하였다.

문종(재위 1046年 ~ 1083年)은 그 공을 기리기 위해 강민첨의 초상화를 그려 공신각 에 모시게 하였다.

이 초상화는 조선 정조 12年(1788年)에 박춘빈이 옮겨 그린 것으로, 그 모본이 문종 때의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고려의 초상화와 복식 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

 

 

大覺國師 眞影(대각국사 진영)

 

의천(義天: 1055년 ~ 1101년 10월 5일)은 고려시대의 왕족 출신 승려이다. 자는 의천, 이름은 후(煦)이며, 호는 우세(祐世),

흔히 대각국사(大覺國師)라고 부르는데, 그것은 시호이다.

 

고려 문종(文宗)의 넷째 아들로서, 어머니는 인예태후(仁睿太后)이다.  

대한불교천태종을 세운 한국 천태종의 중흥시조로서, 대한불교천태종에서 3대 종조 가운데 한 사람으로 추앙받고 있다. 송악 출신이다.

 

◀출생과 출가▶ 

고려 제11대 왕인 문종과 그 왕비 인예왕후(仁睿王后)의 넷째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11세되던 해에 부왕 문종이 왕자들을 불러 "누가 출가하여 복전(福田)이 되겠는냐."고 물었을 때, 그가 스스로 출가를 자원하였다 한다.

1065년 5월 14일에 경덕국사(景德國師)를 은사로 삼아 출가하여, 영통사(靈通寺)에서 공부하였다.

1065년(문종 19) 왕사(王師) 난원(爛圓)이 의천의 머리를 깎아 승려가 되게 하였고, 그 뒤 영통사(靈通寺)에 있었으며,

13세에 우세(祐世)의 호를 받고 승통(僧統)이 되었다. 그해 10월 불일사(佛日寺)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그는 어려서부터 영특하였는데, 승려가 된 이후에도 학문에 더욱 힘을 기울여 대승과 소승의 경·율·론 삼장(三藏)은 물론,

유교의 전적과 역사서적 및 제자백가의 사상에 이르기까지 섭렵하지 않은 바가 없었다.

 

◀승려 활동▶

1084년(선종1) 송나라 정원(淨源) 법사의 초청을 받고 왕에게 송나라에 가서 구법(求法)할 것을 청했으나 왕이 말리므로 남루한 옷차림으로

몰래 제자 수개(壽介)만 데리고 1085년 송나라로 떠나자 왕은 크게 놀라 관리와 제자 낙진(樂眞) · 혜선(慧宣) · 도린(道隣) 등으로 수행하게 했다.

 

송나라 철종(哲宗)이 영접하여 계성사(啓聖寺)에 있게 하고, 화엄(華嚴) 법사 유성(有誠)으로 하여금 상종하게 하여, 현수(賢首) · 천태 양교의

판교동이(判校同異) · 유묘(幽妙)의 뜻을 문답하였다.

상국사(相國寺)의 원조선사흥국사 서천(西天)의 삼장(三藏) 천길상(天吉詳)을 찾아보고 주객원외랑(主客員外郞) 양걸(楊桀)을 대동하고

송나라 서울을 출발 금산(金山)의 불인(不印) 선사 요원(了元)에게 들리고, 항주(伉州)의 원공(源公) 법사를 찾아

혜인(慧因)에게 《화엄소초(華嚴疏鈔)》의 의심되던 것을 물었다.

 

그때 선종이 귀국을 청하자 자변(慈辨) 대사에게 천태종의 경론을 듣고, 천태산 지자(智者)대사의 부도(浮圖)에 예배, 발원문을 지어

천태종을 본국에 중흥할 것을 맹세했다. 또 영지(靈芝)의 대지(大智) 대사에게 계법을 받는 등 고승 50여 명을 만나 법요를 문답하였다.

 

1086년(선종 3) 왕과 왕후의 영접을 받고 환국하여 석전(釋典)과 경서 1천 권을 바쳤으며, 흥왕사에 있으면서 그곳에 교장도감(敎藏都監)을 두게 하고,

요나라 · 송나라 · 일본에서 경서를 구입하고, 고서를 수집하여 《속장경》 4천 7백 40여 권을 간행하였다.

1094년(선종 11) 흥원사(興圓寺)의 주지로 있었고, 그 후 해인사 · 흥왕사에 있다가 국청사(國淸寺)가 새로 세워지자 주지를 겸하고

처음으로 천태교를 강하였다.

 

 

척화비(斥和碑)  : 조선 고종 8년(1871년)

 

19세기 후반의 조선은 안으로 세도 정치의 폐해에 항거하는 농민들의 봉기와 밖으로 제국주의 열강의 문호 개방 요구에 직면하였다.

어린 국왕 고종을 대신하여 실권을 장악하고 있던 흥선대원군은 병인양요(1866년)와 신미양요(1871년)을 겪은 후

전국에 척화비를 세우고 외세의 침입에 대항할 것을 선언하였다.

이 척화비는 서울 종로에 세워졌던 것으로  임오군란(1882년) 이후 철거되어 묻혔다가 1915년 보신각 이전 시 발굴되었다.

 

 

= 해석 =

서양 오랑캐들이 침범하는데 싸우지 않는 것은 화친하는 것이니, = 洋夷侵犯 非戰則和[양이침범 비전칙화]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팔아먹는 것이다. = 主和賣國 [주화미국]

우리 자손에게 길이길이 경계하노라  = 戒我萬年 子孫[계아만년 자손]

 

丙寅作 辛未立[병인작 신미립]

병인년(고종 3년(1866년) 만들고 신미년 고종 8년(1871년)에 세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