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화이야기=고려외

국립중앙박물관 = 불화와 벽화. 태조이성계어진, 영조임금, 허목, 정몽주, 선죽교, 이제현, 박문수, 도선국사,

백련암 2014. 4. 1. 13:22

 

십육나한 중 다섯 나한(十六羅漢圖) : 조선 19세기 후반

 

십육나한(十六羅漢)이란 부처가 열반에 든 뒤 미륵불이 나타날 때까지 열반에 들지 않고 이 세상에 머물러 불법을 수호하도록

부처에게 위임을 받은 제자들이다. 

최고의 수행자이면서 동시에 깨달음을 얻은 자유로운 존재인 나한들의 모습은 염주를 들고 수행하는 모습으로도 혹은 옷을 풀어헤친

 편안한 모습으로도 그려져 있다.

 

이 나한도에는 십육나한 중2. 4. 6. 8. 10번째 나한이 그려져 있어 여러 점으로 이루어진 십육나한도의 일부임을 알 수 있다.

 

 

약사불 회도(藥師佛會圖) : 조선(朝鮮) 1828年   설법하는 약사불

 

사천왕과 보살 및 제자들을 거느리고 설법하는 약사불을 그렸다. 약사불의 양 옆에는 젊은 제자 모습의 아난과 나이든 제자 모습의 가섭이 있고,

화면 윗부분에는 다시 십대제자를 작게 그렸다. 이들은 출가한 승려이자 부처의 설법을 듣고 깨달음을 얻게 되는 나한이다.

부처의 설법회에는 이처럼 부처의 제자들이 다른 성중들과 함께 참여하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민간(토속)신앙 산신

 

도교와 불교, 유교 등이 들어오기 훨씬 전부터 우리조상들은 해와 달, 북두칠성, 산과 나무, 새와 짐승 등에 신령이 깃들어 있다고

믿었다. 생활 속에서 자연스레 생겨난 이러한 믿음을 민간신앙 또는 토속신앙이라 한다.

민간신앙은 보다 원초적인 기복의 요구에 부응하면서 우리 민족의 생활 속에 깊이 뿌리내렸고 불교· 유교 · 도교등과도 영향을 주고 받았다. 

 

 

화엄경 변상도(華嚴經 變相圖)  : 삼성미술관 리움

 

 

불법을 수호하는 여러 신(神衆圖) 

 

 

영취산에서 설법하는 석가모니불 (靈山會上圖[영산회상도])

 

 

오백 나한도 제145  희견존자(五百羅漢圖, 第 一百四十五 喜見 尊者)  : 고려시대(高麗時代) 1236年

 

 

아미타 삼존벽화(후불벽화) 무위사 벽화들

 

 

전남 강진 무위사 극락보전 동벽과 서벽의 벽화 = 복원 전

 

서벽 = 벽화는 아미타불이 여덟 보살과 함께 죽은 사람을 맞이하러 오는 모습을 그린 아미타내영도(阿彌陀來迎圖)이다.

서방극락정토에서 오고 있음을 상징하기 위해 서벽에 그린것으로 보인다 = 아미타내영도

 

 

전남 강진 무위사 극락보전 동벽과 서벽의 벽화<모사도> = 無爲寺 極樂寶殿 東西壁 壁  = 복원 후

 

전라남도 강진에 있는 무위사 극락보전에는 귀중한 벽화가 많이 남아있다.

이 두점의 불화는 전각 안의 동벽과 서벽에 그려진 것으로 현재 전시되어있는 것은 모사도 이다.

 동벽에 벽화는 대좌에 앉은 본존불이 좌우에 보살과 비구들을 거느리고 설법을하는 모습을 그렸다.

서벽에 벽화는 아미타불이 여덟 보살과 함께 죽은 사람을 맞이하러 오는 모습을 그린 아미타내영도(阿彌陀來迎圖)이다.

서방극락정토에서 오고 있음을 상징하기 위해 서벽에 그린것으로 보인다.

 

 

전남 강진 무위사 극락보전 동벽 벽화  = 복원 전

 

동벽 =  벽화는 대좌에 앉은 본존불이 좌우에 보살과 비구들을 거느리고 설법을하는 모습을 그렸다.= 삼존불화 :

 

 

전남 강진 무위사 극락보전 동벽 벽화  = 복원 후 

 

동벽 =  벽화는 대좌에 앉은 본존불이 좌우에 보살과 비구들을 거느리고 설법을하는 모습을 그렸다.= 삼존불화

 

 

백의 관음도(후불벽화 뒷벽) :무위사 벽화들

 

 

예빈도(禮賓圖) : 당(唐)나라 706年 =<복제>  = 외국사신 맞이 벽화

 

중국 산시성 시안시 건릉 장회태자묘(中國 狹西省 西安市 乾陵 章懷太子 墓[중국 협서성 서안시 건릉 장회태자 묘])

중국 당나라 고종(高宗)과 측천무후(則天武后=측은 한국식으로 칙임)의 아들인 장회태자(章太子)

이현(李賢 : 654年~ 684年)의 무덤벽화에서 확인된 그림이다.

신라 사신으로 추정되는 인물이 그려져 있으며, 당시 옷차림과 신발의 모습을 복원하는데 필요한 자료이다.

 

 

태조 이성계의 어진(太祖 御眞) = 조선시대 고종 9년 1872년. 국보 제 317호(복제품)

 

어진(御眞)이란 왕의 초상화를 일컫는 말로, 이 어진은 태조 이성계의 초상화이다. 조선시대에는 국초부터 전주 경기전 등

전국 여섯 곳에 태조 진전(眞殿)을 설치하여 태조의 초상화를 봉안하였다.

기록상으로는 태조의 초상화가 26축 제작되었다고 하나 현재는 경기전의 초상화가 유일하다. 이 초상화는 태종 10년(1410년)

전주부에 봉안한 것을 영조 39년(1763년) 한 차례 수리를 거친 후 고종 9년(1872년)에 새로 모사(模寫)한 것이다.

 

 

경복궁 근정전 닫집, 어좌, 일월 오봉도(日月五峰圖)

 

닫집(唐家)은 본래 존귀하고 신성한 분과 그 형상에 먼지 ·  비바람 ·  태양 빛등이 직접 닿지 않게 하기 위하거나 신성하고 위엄스럽게

보일 목적으로 건물 안에 설치한 작은 집이다. 당가(唐家), 운궁(雲宮), 보개천장(寶蓋天障)이라고도 하였다.

왕궁의 정전(正殿= 즉위나 책봉 등 가장 중요한 행사를 거행한 건물), 왕실의 사당, 사찰 법당의 닫집을 더욱 정성을 들여 만들었다. 

 

이 닫집 모형은 조선의 정궁(正宮= 가장 크고 으뜸으로 삼은 궁궐)인 경복궁 근정전의 닫집을 축소한 것이다

 

어좌의 뒤에 설치된 병풍은 다섯 봉우리의 산과 바다 ·  태양 ·  달 등을 그린 그림으로 이름을 일월오봉도(日月五峰圖) 또는

일월오악도(日月五嶽圖)라고 불렀다.

닫집과 어좌 그리고 장식 및 문양과 일월오봉도(日月五峰圖)는 절대적이고 영원한 왕 ·  왕권 ·  왕조를 상징한다. 

 

 

 法旨(법지) : 보물 제 1376호  시대 : 고려 1275년 - 1308년  소재지 = 송광사 복제품  *원날 불교계에서 준 티베트문 문서*

 

원나라 뷸교계에서 작성하여 준 문서로 일종의 통행증이나 특혜문서로 추정된다.  당시 원나라의 일반적인 공문서처럼 티베트 문자로 작성된 이 문서는

그 정확한 내용을 알 수 없으나, 두 나라의 불교계 교류를 엿볼 수 있는 귀한 문서이다.

 

 

 

 태조 왕건의 청동 상

 

 

太祖 肖像(태조 초상)  : 시대 : 日帝 强占期(일제 강점기) 1918年   소장 = 개성왕씨 종친회  사진영인

 

일제 강점기에 간행된『開城王氏族譜[개성왕씨족보]에 실린 고려 태조의 초상화이다.

이 그림은 본래 대한제국기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된다.

 

영조 임금의 초상화(英祖 御眞) = 대한제국(大韓帝國 광무 4년(1900년)  寶物 제 932호 (복제품)

 

조선 제 21대 임금인 영조 제위(1724 ~ 1770년)의 초상화이다. 영조의 51세 때 모습을 그린 것으로, 오른쪽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인데 머리에는 입금이 쓰는 익선관을 쓰고, 양어깨와 가슴에 용을 수놓은 붉은 색의 곤룡포를 입고 있다.

이 초상화는 영조 20년(1774년) 장경주와 김두량(張敬周, 1710 ~? 와 金斗樑, 1696~ 1763년)이 그린 그림을 광무 4년(1900년)

당대의 일류 초상화가들이 보고 그린 것이다.

 

 

 공민왕 부부 초상화(恭愍王 夫婦 肖像畵) : 시대 : 조선 복제품

 

고려 제 31대 공민왕(재위 1351년 - 1374년)과 원나라 출신 왕비 노국대장공주(?-1365년) 부부의 초상화이다.

무신도의 색채가 깉은 이 그림은 누가 언제 그린 것인지 알 수 없다. 그림에서 공민왕은 복두를 쓰고 둥근 깃에 소매가 넓은 단령포 차림이다.

노국대장공주는 화려한 관과 웅장한 소매 폭, 길게 늘어뜨린 치마 등에서 왕비의 위엄이 느껴진다.

 

 원나라 출신의 왕비인 노국대장공주(?-1365년) 세밀도

 

고려 제 31대 왕인 공민왕(恭愍王) 세밀도

 

 허 목 조선 중기의 문신 학자

남인으로 17세기 후반 2차례의 예송(禮訟)을 이끌었으며 군주권 강화를 통한 정치·사회 개혁을 주장했다.

본관은 양천(陽川). 자는 화보(和甫)·문보(文父), 호는 미수(眉叟)·대령노인(臺嶺老人).

아버지는 현감 교(喬)이며, 어머니는 임제(林悌)의 딸이다. 1615년(광해군 7) 정언옹(鄭彦翁)글을 배우고, 1617년 현감으로 부임하는 아버지를 따라

거창으로 가서 정구(鄭逑)의 문인이 되었다.

1624년(인조 2) 경기도 광주의 우천(牛川)에 살면서 자봉산(紫峯山)에 들어가 학문에 전념했다. 1636년 병자호란으로 피난하여,

 이후 각지를 전전하다가 1646년 고향인 경기도 연천으로 돌아왔다. 1650년(효종 1) 정릉참봉에 천거되었으나 1개월 만에 사임했고,

이듬해 공조좌랑을 거쳐 용궁현감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1657년 지평에 임명되었으나 소를 올려 사임을 청했다.

그뒤 사복시주부로 옮겼다가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예론에 관한 허목과 송시열의 논쟁, 예송(禮訟)◈

현종 대에는 인조의 계비(繼妃)이자 효종의 모후(母后)인 조대비(趙大妃)가 상복을 입는 기간을 두고 두 차례에 걸쳐 예송논쟁이 있었다.

예송은 표면적으로는 복상(服喪) 기간에 관한 것이었지만, 그 이면에는 학파 간 예론에 대한 해석의 차이가 있었다.

이는 정치세력 간의 대결로 이어져 정치권력이 교체되기도 하였다.

허목과 송시열은 각각 남인과 서인의 예론을 이론적으로 뒷바침하는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현종 1년(1660년) 효종이 죽자, 인조의 계비인 조대비의 복상 문제가 제기되었다. 당시 집권세력인 송시열을 비롯한 서인은 기년복(朞年服, 만 1년상)을

주장하였고, 허목 등 남인은 자최삼년(齊衰三年)을 주장하였다.

1차 예송에서는 서인의 주장이 채택되어, 남인은 큰 타격을 받고 허목도 좌천되었다.

이후 허목은 삼년설을 이론적으로 뒷바침하는 글을 지었다.

 

 

정몽주 초상(鄭夢周 肖像) :  시대 = 조선 고종 17년(1880년) 복제품  이 한철 그림  고려 충신 정몽주으 초상화

고려 말의 학자이자 충신인 포은 정몽주(1337년 - 1392년)의 초상화이다.

 

조선 고종 17년(1880년) 궁중 화가이던 희원 이한철이 개성 숭양서원에 있던 초상화를 옮겨 그린 것이다.

정몽주는 이색으로부터 "우리나라 이학(성리학)의 시조"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성리학에 대한 조예가 깊고 정확하였다.

또 그는 우왕 때에 왜구의 횡초가 극심하자 단속을 요청하는 일본사행을 충실히 수행하고, 세공 문제로 악화되어 있던 몀과의 관계 회복에도

기여하는 등 정치적으로 큰 활약을 하였다.

정도전 등 급진파 신진사대부들과 달리 이성계 일파에 끝내 협조하지 않은 채 죽음을 맞음으로써 흣날의 선비들에게 충절의 상징이 되었다.

 

정몽주의 단심가

정몽주가 고려에 대한 충절을 담아 노래한 시이다.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이시는 고려를 향한 마음은 변하지 않는다는 내용입니다.

 

이 시를 읽고난 이방원은 정몽주의 뜻이 확고하다는것을 알아채고 그를 죽이기로 마음 먹는다.

 

이방원의 하여가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하여 백년까지 누리리라

이시는 고려면  어떻고 조선이면 어떠하냐 우리도 함께 살아보자는 뜻입니다.

 

라는 내용을 시조로 정몽주에게 보냅니다. 이 시에 답가가 정몽주의 단심가입니다.

 

善竹橋(선죽교) : 경기도 개성(북한 : 황해북도 개성시 선죽동)

선죽교는 고려의 충신 정몽주가 최후를 맞은 다리이다. 이 다리 일부에 띤 붉은 색깔을 정몽주가 살해 당할 때 흘린 핏자국이라고 믿어왔다.

이 다리 인근에 정몽주를 제사지내는 숭양서원(崧陽書院)이 있다.

일화

1391년(공양왕 3년) 인물추변도감제조관(人物推辨都監提調官)이 되어 인재 선발을 주관하였고, 바로 안사공신(安社功臣)의 호를 더하였다.

그 뒤 《대명률 大明律》·《지정조격 至正條格》 및 본국의 법령을 참작, 산정하여 새로운 법령인 신률(新律)을 제정, 공표하여 법질서를 확립하려고 힘썼다.

1392년(공양왕 4년) 명나라에서 돌아오는 세자를 마중 나갔던 이성계가 사냥하다가 낙마하여 황주(黃州)에 드러눕게 되자

그 기회에 이성계 일파를 제거하려 했으나 이를 눈치 챈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이 이성계를 그날 밤 개성으로 돌아오게 함으로써 실패하였다.

이성계는 이방원에게 정몽주를 자기 세력으로 끌어들일 것을 지시했다.

이에 이방원은 정몽주를 자택으로 부르자 정몽주는 정세를 엿보러 이성계를 병문안하러 왔다. 그때 정몽주와 이방원이 주고 받은 시조가

바로 《단심가》(丹心歌)와 《하여가》(何如歌)이다.

이방원은 하여가를 통해 정몽주를 이성계의 세력으로 다시 끌어들이고자 하였으나, 정몽주는 단심가로 이를 거절하였다.

그의 오랜 벗이었던 정도전 역시 계속 그를 찾아 도와줄 것을 요청하며 설득했으나, 그는 종묘와 사직을 엎을수 없다며 협력을 거부하였다.

 

정몽주의 마음을 돌이킬 수 없다고 판단한 이방원은 그를 제거하기로 결심하였다. 정몽주 역시 이 암살계획을 변중랑이라는 심복부하로부터 입수하였다.

그는 자신의 문하생과 동문수학한 이색의 문하생들을 사주하여 이성계, 정도전 등에 대한 탄핵을 계속하게 했다.

 

1392년 봄 이성계 일파가 역성혁명을 준비함을 감지한 그는 이성계가 병으로 은신한 것에 의문을 품고 사람을 보내 이성계의 주변을 살핀다.

이성계와 정도전 등을 제거하려 하였으나 이성계가 병을 이유로 물러나자 정몽주 역시 병을 핑계로 조용히 있다가 그해 4월 이성계가 병을 빙자한 것의

여부를 확인하러 이성계를 방문한다.

 

1392년(공양왕 4년) 4월 4일 새벽 그는 악몽을 꾸었는데, 자신이 죽을 수도 있음을 예상하였다.

그날 아침, 조상들의 제단 앞에 절하고 부인과 두 아들을 불러놓고 '충효를 숭상하는 우리 집의 가문이니 조금도 낙심 말라'는 유언과

새 조정에서 주는 벼슬을 거절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고 집을 나섰다.

 

4월 4일 저녁 정몽주는 낙마로 부상당했다는 이성계의 문병 겸 동태를 살피기위해 이성계의 집을 방문, 정황을 살피고 귀가하던 중,

개성 선죽교에서 이방원의 문객 조영규와 그 일파에게 암살당했다.

일부 전설에 의하면 그가 이성계 집을 방문한 것은 이방원이 계략을 써서 그를 초청한 것이라고도 한다.

이때 이미 이방원은 심복부하 조영규를 시켜 쇠뭉치를 꺼내어 선죽교 다리 밑에 숨었다가 정몽주가 지나갈 때 쳐서 죽여버려라 하고 지시하였고,

정몽주는 변중량을 통해 이 정보를 입수했었다.

조영규와 무사들이 나타나자 그는 분위기가 이상함을 감지하여 말을 타고 이성계의 자택을 떠났으나,

돌아오면서 친구 집에 들려 술을 마신 후 말을 거꾸로 타고 마부에게 끌라했다.

말을 끄는 사람이 정몽주 선생이 술이 취해 그러는 것이 아닌가 하고 의아한 눈치로 물으니

"부모님으로 부터 물려받은 몸이라 맑은 정신으로 죽을 수 없어 술을 마셨고 흉한이 앞에서 흉기로 때리는 것이 끔직하여 말을 돌려 탄 것이다."

하고 답하였다고 한다.

그 말을 이해 못한 마부는 말을 끌고 선죽교(善竹橋)를 향했다. 선죽교를 넘으려 할 때 궁사가 말 혹은 정몽주를 저격하여 넘어트렸고,

마부가 쓰러지자 순간 조영규가 이끄는 고여(高呂), 조평(趙評) 등 5~10여 명의 괴한이 나타났다.

정몽주는 이들이 비열하게 숨어서 사람을 공격함을 질책하고 말을 달렸으나,

부상당한 채 도망치는 정몽주를 쫓아가 철퇴 또는 몽둥이와 철편으로 때려 죽였다.

 

이때 그가 조영규, 고여, 조평 등의 철퇴에 맞고 흘린 피가 개성 선죽교의 교각에 일부 묻었는데, 후일 백범일지에 의하면 1945년이후 김구(金九)가

선죽교를 방문할 때까지도 그 흔적이 있었다 한다.

이후 선죽교 돌 틈에서는 대나무가 솟아 그의 충절을 나타냈다는 전설이 있으며 이후 이 다리는 원래 선지교라고 하였으나 다시 선죽교로 이름이 바뀌어졌다.

 송도에 내려오는 한 전설에 의하면 정몽주가 선죽교 근처에서 사망하지 않고, 피습을 당한 뒤 개경부 태묘동까지 부상당한 상태로 피를 흘리며

피신해왔으나, 그의 뒤를 따라온 이방원의 자객에 의해 살해되었다는 전승도 전한다. 당시 그의 나이 향년 56세였다.

 

암살직후

그는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고, 자손들에게 자신의 묘비를 세울때는 반드시 고려의 관직을 적으라고 유언을 남겼다.

1392년 4월 정몽주는 역적으로 단죄되고, 수급과 시신은 바로 이방원의 수하들에 의해 베어져 개경의 저잣거리에 매달려졌다.

그의 시신은 역적으로 몰려 방치되다가 우현보(禹玄寶)와 송악산(松嶽山)의 중들에 의해 수습되어 승려들이 염습한 뒤

개경 풍덕(豊德)에 가매장되었다가 후일 경기도 용인으로 이장되었다.

 

그의 죽음을 놓고 이성계이방원을 비토했다는 전설도 전한다.

그에 의하면 이성계는 아들 이방원에게 “우리 집안은 본디 충효로 세상에 알려졌는데, 너희가 마음대로 대신을 죽였으니

나라 사람들이 내가 이 일을 몰랐다고 여기겠는가?  부모가 자식에게 경서를 가르친 것은 그 자식이 충성하고 효도하기를 원한 것인데

네가 이렇게 불효한 짓을 감히 하니 내가 사약을 먹고 죽고 싶은 심정이다.”라며 책망하였다고 한다.

 

傳 恭愍王 筆 廉悌臣 肖像畵(전 공민왕 필 염제신 초상화) : 보물 제 1097호  시대 : 고려 말 복제품

 

문신이자 공민왕의 장인인 염제신(1304년- 1382년)의 초상화이다.  일명 = 공민왕의 개혁을 도운 염제신의 초상화

 염제신은 공민황의 친원파 숙청을 원나라에 납득시키고, 공민황 19년(1370년)에는 오로산성 공격에 성공하는 등 많은 공을 세웠다.

이에 공민왕은 그의 초상화를 직접 그려 하사하고 그 딸을 비로 들였다.

이 그림이 그 때 하사한 초상화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림의 품격 등으로 보아 공민왕의 작품일 가능성은 있다.

 

 

 이 제현 초상(李齊賢 초상) 복제품 :  국보 제 110호  시대 : 원나라 1319년

 

고려 후기의 문신이자 유학자인 이제헌(1287 - 1367년)의 초상화이다. 이제헌이 33살이단 1319년에 왕위에서 물러난 충선왕(재위 1298년, 1308년- 1313년)과

함께 원나라 절강 지방을 유람하던 중 충선왕이 진감여(陳鑑如)라는 원나라 화가를 시켜 그린것이라 한다.

다른사람에게 빌려준 후 그림의 행방을 알지 못하던 이제현은 21년 후에 우연히 그림을 다시 보게 되자 그 감화를 시로 읊었다.

그림의 윗부분에 이제헌이 지은 시와 원나라 문장가 탕병룡이 지은 그림에 대한 찬이 함께 쓰여 있다.

 

 

이 제현 필 수렵도(傳 李齊賢 筆 狩獵圖) 복제품 :  시대 = 고려 14세기  비단의 색

 

고려 후기 학자인 이제현의 작품으로 전해지는 그림이다. 맑은 설경과 말 탄 인물의 생동감이 잘 표현되었다.

그림에 그의 서명과 함께 "이제현인[이제현인]" 이라는 인장이 찍혀 있고 공민왕 무렵 화풍의 요소가 많은 데다.

이제현이 원나라에 오래 머물며 중국 화풍의 명작을 모으고 유명 작가들과 널리 접촉하였던 만큼 이제현의 작품일 가능성이 적지 않다.

 

 

어사 박문수 초상화(朴文秀 肖像畵) : 朝鮮後期, 寶物 제 1189호 (복제품)

 

암행어사의 대명사로 알려진 박문수(朴文秀. 1691~ 1756년)의 붉은색 관복을 입은 반신상의 초상화다.

박문수는 조선 영조 때의 문신으로 경종 3년(1723년) 병과(丙科)에 급제한 후 암행어사로 활약 하면서 부정한 관리들을 적발하여 가난한 백성을 구제하는데

힘 썼다.  그는 영조 4년(1728년) 이인좌(李燐佐)의 난 때 전공을 세워 경상도 관찰사에 발탁되기도 하였으며, 영조가 탕평책을 실시할 때

사색(四色)의 인재를 고루 등용해야함을 강조하였다. 

 

 

여러모양의 마패

 

 

道詵國師(도선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