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경기 = 心 마음의 길을 찾아서

조선 3대 능찰인 회기동 천장산 연화사

백련암 2014. 5. 30. 16:33

내가 연화사와 인연이 된것은 조카가 병원에 입원하던 20년전에 큰 수술을 받으면서이다. 당시 우리조카는 16세인 고 1인 학생이였다.

수술을 들여보내고 마음이 불안하여 동생과 근처의 절을 찾다보니 경희의료원과 담장이 같은 연화사를 찾게 되었다.

그 때 간곡하게 절을 하며 기도를 하던 기억에 다시 이곳을 찾았다.

그 때의 조카는 세월이 흘러 시집을 가고 첫 애를 낳으면서 죽을 고비를 넘기고 어제 둘째인 딸을 낳았다.

20년전 나팔관을 떼어내고 시집가서 아기를 갖기가 힘들거라는 소리를 들어 내심 걱정을 하였으나

저렇게 둘 째까지 낳아으니 고마운 일이 아닌가 그래 이 절을 다시 한 번 찾아와 기도할 생각을 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와 보니 예전에 절이 아니었다. 법당도 2층으로 바뀌었고 좀 답답한 마음은 들지만 그래도 부처님이 계신 곳 편하게 마음 먹고 기도하고 왔다. 

 

왕실 사찰인 능찰과 조포사 인 천장산 연화사

당시에는 이 절이 그렇게 이름이 있는 절인지도 몰랐고 역사가 있는 줄도 몰랐다 오늘 갔다오면서 모든것을 알게 되었지만

절 어느곳에도 이 절에 대한 역사를 찾아볼 수 가 없어 인테넷으로 찾아보고서야 알게 되었다.

 

연화사는 일주문을 보면 역사가 깊고 오래된 사찰처럼 느껴진다.

연화사는 조선시대 경종과 선의왕후의 왕실사찰인 능찰이다. 조선왕조에서는 왕릉을 지키는 능찰을 "조포사"라고 불렀다.

조포사(造抱寺)는 "두부를 만드는 절"이란 뜻이다.

보통 왕릉은 산 속에 있기 때문에 제사를 지낼 때 마다 제수로 올릴 두부를 제공해 줄 사찰이 능 주변에 필요했다.

또한 이곳은 연산군의 생모인 "폐비 윤씨의 명복을 빌기 위해 건립한 사찰"이란다.

 

불교를 억압했던 조선시대에서 절을 창건이나 중건하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서 능찰로 지정이 되면서 사찰의 창건이나 중건이 가능해 졌고, 양반의 횡포에서 벗어 날 수 있었다.  

그리고 능찰에는 상궁들의 시주가 많이 이루어졌으며 또한 은퇴한 상궁들이 남은 여생을 부처님께 기도하며 보내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대표적인 능찰로는 =  삼성동 봉은사, 경기 여주 신륵사, 그리고 회기동 연화사이다. 

이 모두가 능이 모여 있는 곳이다.

 

창건

연산군 5년(1499년) 연산군이 생보 폐비윤씨를 위해 창건하였고 (천장산 연화사 삼각상량문)에 따르면, 부처의 청정밥신이

머무는 곳이 연화장 세계이고, 중생의 근본적 자성이  진흙 속에서 피어나는 청정한 연꽃과 같으므로 절 이름을 연화사라 했다고 한다. 

1882년(고종 19년) 임오군란 때 소실되었던 것을 정담 스님이 남화, 완허의 도움을 받아 복원하였다.

이때 궁인 박씨와 상궁 최씨, 김씨 등이 발원하여 탱화를 제작했다.

1884년 10월 작성된 (천장산 묘련사중건기)에는 1870년에 묘련이라는 승려가 불사를 하였으며,  성품이 매우 좋아 사람들이 절 이름을  아예 묘련사로

바꾸었다는 기록도 있다.  1993년 중건 때 (미륵전 상량문)과 1875년 쓰여진 (묘련암 중수기)가 발굴되기도 하였다.

1923년 문성이 산신각을 지어 산신탱화를 봉안 하였다. 1993년부터 산신각과 독성각, 요사, 법당, 미륵전을 해체 보수하였다.

 

1504년(연산군 10년)에 윤씨의 묘를 회릉으로 승격시키고 석물을 조성했다. 지금 회기동이라는 지명은 바로 "회릉"에서 유래되었다고 전한다.

 

1724년 8월 경종이 죽자 그 이듬해에 회릉 근처에 의릉을 만들고 이 절을 원찰로 삼았다. 회릉은 1950년대 초까지 의릉과 함께 이속에 있었으나,

1955년 서삼릉으로 이전 하였다. 

연산군의 생모이자 인수대비의 며느리, 성종의 부인중 한 분인 폐비윤씨의 묘가 있던자리가 지금의 경희의료원 자리이며

그래서 그 경희의료원 옆으로 한적하게 자리한 사찰이 천장산 연화사이다.

 

 

奉請亡歲月號沈沒事故 犧牲者 靈駕(봉청 망 세월호 침몰사고 희생자 영가)란 위패가 있다.

요즘은 어느 절에를 가나 모두 영단엔 세월호 희생자들 위패가 모셔져 있다. 가슴아프고 안타까운 일이면서도 속상한 마음이다.

 

연화사 지장시왕도 (蓮花寺 地藏十王圖蓮)  :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346호

지장보살과 무독귀왕, 도명존자 등 지장보살삼존을 배치하고 그 좌우로 시왕, 그리고 지장삼존의 아래쪽에 사자, 판관 등을 배치한 지장시왕도이다.

현재 불화에 화기는 남아있지 않으나 불화의 양식으로 보아 1901년에 괘불도 및 아미타불도, 신중도, 천수관음도 등과 함께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본존 지장보살은 투명한 黑色頭巾(흑색두건)을 쓰고 오른손에는 寶珠(보주), 왼손에는 錫杖(석장)을 들고 수미단 위 연화좌 위에 결가부좌하고

있으며 좌우로 무독귀왕과 도명존자가 합장을 한 채 지장보살을 향하여 서 있다.
커다란 신광 좌우로는 홀을 들거나 수염을 쓰다듬는 모습의 시왕들이 본존을 향하여 시립하고 있는데,

시왕의 뒤에는 2벌의 그려진 8曲屛(곡병)이 들러져 있으며 광배는 금박을 붙여 화려하게 장식하였다.

광배를 금색으로 처리하는 수법은 19세기 후반의 서울, 경기지역 불화에 유행하였던 것으로 화계사, 봉은사, 수국사 등의

19세기 후반~20세기 초반 불화에서도 볼 수 있는 특징이기도 하다.
불화의 인물표현에서 특히 주목되는 것은 牛頭獄卒(우두옥졸)과 馬頭獄卒(마두옥졸) 등 인물의 상호에 표현된 陰影法(음영법)인데,

음영법 역시 19세기 이후 서울, 경기지역 불화의 특징 중의 하나이다.

연화사 지장시왕도는 1867년에 19세기 경기지역의 유명한 화승이었던 慶船(경선) 應釋(응석)이 출초한

서울 보문사 묘승전 지장시왕도(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100호) 초를 바탕으로 하여 제작한 것으로,

서울 청룡사 지장시왕도(1868년,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201호), 안정사 지장시왕도(19세기)와 매우 유사하다.

19세기 후반 서울 경기지역 지장시왕도의 도상을 충실하게 계승하고 있는 작품으로서,

채색 및 인물표현에서도 19세기 양식을 충실하게 반영하고 있어 서울 지역 불화유파의 사승관계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이다.

 

 

 

 

대웅전(大雄殿) 지장보살(地藏菩薩)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

 

 

칠성탱화

 

 

현재의 신중단 신중탱

 

20년 전에 본 연화사 신중도 (蓮花寺 神衆圖)  :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345호

 

제석 · 범천을 위시하여 위태천 무리와 권속들로 이루어진 신중도로 서 帝釋梵天天龍圖(제석범천도용도) 도상을 보임.
화면 상단 좌우측에 대칭으로 배치된 제석천과 범천은 둥근 모양 의 머리 광배에 장방형 몸 광배를 구비하고  보관을 쓴 채 두 손으로 꽃가지를

받쳐 들고 있음.
하단에는 두광과 신광을 갖춘 중앙부의 위태천을 중심으로 劍(검) 등으로 무장한 天部(팔부) 八部衆(팔부중) 무리가 자리하고 있으며,

중단과 제석범천 주위로는 일월대신 등 천신들과 幡(번)과 傘蓋(산개)를 받쳐 들고 시중을 들거나 악기를 연주하는

天童 · 天女(천동 천녀) 무리가 그려져 있음.
   다홍 계통의 적색과 하엽계열의 녹색, 하늘색 계열의 청색이 사용됨으로써 화면이 비교적 안정되었으며,

金箔(금박)을 채용하고 의복 주름처리에 바림법을 사용하여 19세기 중엽 이후 화풍 흐름을 잘 보여줌.

대한광무 5년인 1901년 수화원 漢峰應作(한봉응작)을 위시하여 德月應□(덕월응□),大恩頓喜(대은돈희), 啓恩奉法(계은봉법), 寶山福珠(보산복주),

普庵亘法(보암선(긍)법), 錦雲正基(금운정기), 漢谷頓法(한곡돈법), 漢溟漢□(한명한□), 淸庵雲照( 청암운조), 在謙(재겸), 斗三(두삼), 昌旿(창오) 등

12명의 화승들이 동 참하여 조성.

- 동참 화승들 가운데 奉法(봉법), 亘法(선법), 頓法(돈법), 斗三(두삼), 昌旿(창오) 등은 남양주 흥국사를 중심으로 큰 활약상을 보였던

19~20세기 경기지역의 대표 화승 慶船堂(경선당) 應釋(응석)과 교류를 가졌던 화승들로서 주목됨.

구도, 형태, 필선, 채색 등이 깔끔하게 처리되었으며, 특히 세부묘사가 정교함.

 

 

연화사 천수관음도 (蓮花寺 千手觀音圖) :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344호

 

이 불화는 漢峰 應作( 한봉 응작), 寶山 福柱(보산 복주), 淸菴 雲照(청암 운조), 大凡(대범), 奉典(봉전), 海梵(해범) 등이 조성한 천수관음도로서,

1901년에 괘불도, 신중도, 지장시왕도, 칠성도 등과 함께 일괄 조성되었다.

바다 가운데로 솟아오른 연화좌 위에 앉아 있는 천수천안의 관음보살은 버들가지가 꽂혀 있는 淨甁(정병)과 經冊(경책)을 받쳐 든 4臂(비[팔])와 함께

40臂(비)를 갖추고 있는데, 광배 안에는 천개의 손과 천개의 눈을 가득 그려넣어 자비로운 관음보살의 구제력을 형상화하였다.

천수관음은 천 개의 자비로운 눈으로 중생을 응시하고 천 개의 자비로운 손으로 중생을 제도하는 보살로, 千手千眼觀音(천수천안관음)이라고도 한다.

이 관음은 인도 힌두교의 多面多臂(다면다비)의 神像(신상)에서 기원하였는데, 4~5세기에 이르러 인도에서 밀교가 발달함에 따라

힌두교의 다면다비상의 독특한 이미지는 불교에도 영향을 주어,

천개의 손에 천개의 눈으로 모든 중생들이 원하는 것을 두루 보고 구제해준다고 하는 천수천안관음이 탄생하였다.

천수관음의 형상에 대해서는 『千光眼觀自在菩薩秘密法經[ 천광안관자재보살비밀법경]』(唐 蘇縛羅釋[당 소박라석])에

“11면의 얼굴에 40개의 손이 있고 각 손바닥에는 눈이 하나씩 있으며, 11면은 각각 菩薩相(보살상), 百牙出上相(백아출상상), 忿怒相(분노상),

暴笑相(폭소상), 如來像(여래상)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하였다.

 

연화사 천수관음도에는 연화대좌 좌우로는 합장을 한 선재동자와 龍角(용각)을 든 용왕이 관음보살을 향해 서 있다.

여기에서와 같이 천수관음도에 선재동자가 묘사된 것은 『화엄경』入法界品(입법계품)에 의한 것으로, 선재동자가 여러 선지식을 찾아

菩薩行(보살행)과 菩薩道(보살도)를 묻는 도중 28번째로 보타락가산에 머물고 있는 관음보살을 찾아가 청법하는 장면을 표현한 것이다.  

 

한편 이 천수관음도에서 선재동자와 상대하여 용왕을 묘사한 것은 조선후기 수월관음도의 도상을 따른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연화사 천수관음도는 고려시대 이래 천수관음도의 전통을 잇고 있는 한편, 조선후기 이래 수월관음도의 도상을 계승하였음을 보여준다.

연화사 천수관음도의 도상은 이후 대산사 천수관음도(1925년)로 계승되었다.

이 불화는 漢峰 應作(한봉 응작)가 수화사가 되어 寶山 福柱(보산 복주), 淸菴 雲照(청암 운조), 大凡(대범), 奉典(봉전), 海梵(해범)와 함께 조성하였다.

응작은 19세기 후반 서울 경기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한 화승으로 연화사를 비롯하여 봉원사, 청룡사 등의 불화를 제작하였다.

그는 초기에 대은당 돈희, 보산당 복주, 청암당 운조, 대범, 봉전 같은 화승들과 함께 작업 했는데,

서울 경기지역의 대표화승인 경선당 응석의 초본을 이용한 작업을 하는 등 서울지역의 화풍을 두루 섭렵하여 자신의 작품세계를 형성하였다.

이 불화의 본존인 관음보살의 둥글고 살이 많은 듯한 얼굴표현이라던가 단정한 이목구비에서 응석의 영향이 엿보인다.

이 천수관음도는 고려~조선시대 천수관음도의 도상을 계승한 작품으로서, 19~20세기 서울·경기지역 불화의 흐름 및 화승의 활동을 연구하는데도 중요하다. 천수관음도는 서울지역 뿐 아니라 전국적으로도 매우 드물게 남아 있다.

 

고려시대 천수관음도로 유일하게 전하는 삼성미술관 리움소장 천수관음도와 1532년에 조성된 일본 지코지(持光寺[지광사])소장 천수관음도 역시

11면에 40개(또는 42개)의 손 각각에 지물을 들고 있어 경전의 내용을 충실하게 반영하고 있다.

중국에서도 일찍이 천수관음도에 『화엄경』적 요소가 결합되었으며, 앞에서 서술한 삼성미술관 리움소장 고려 천수관음도 및

일본 지코지소장 천수관음도(1532년)에도 선재동자가 그려졌다.

 

 

상성각(三聖閣)

 

 

삼성각 안에 부처님 칠성단인것 같은데 손에 법륜이 없다. 그리고 연화사에는 부처님이 모셔져 있어 잘모르겠다.

 

 

뒤 탱화는 칠성탱화이다.

 

 

산신 탱화 = 산신할아버지와 앉아있는 호랑이의 익살스런 모습이다. 웃음이 절로 난다.

용맹스럽고 눈에 불이 이글거리고 감히 범접할 수 없어야 할 호랑이가 이렇게 순하고 익살스러운 모습은 지금 것 본적이 없다.

산신할아버지 역시 얼굴 가득 미소를 머금고 계신다.  

 

 

독성탱화

1880년 제작된 독성탱화가 있다. 비단바탕에 채색한 것으로 보존이 잘 되어있다.

 

 

무애당(無礙堂)

 

 

 

 

대웅보전(大雄寶殿)

 

 

공덕비(功德碑)

 

   

공덕비들

옛 상궁들이 탱화조성이나 사찰 중건에 동참한 공덕을 기리기 위해 공덕비를 세웠다.

오른 쪽 비는 문공제 창자선 송덕비라 되어있어 뭔지를 알겠으나

왼쪽은 청신녀 송씨△△△ 사리△비 라 쓰여있다 왼쪽것은 마모가 심해 글을 잘 알아볼 수가 없다.

 

 

반야문(般若門)

연화사 안쪽에서 일주문을 바라보면 반야문이라는 현판이 있다.

 

 

일주문에 연화사란 현판이 써 있다.

 

일주문(一柱門)

 

◈찾아가는 길

지하철 1호선 승차 → 회기역 하차하여 1번 출구로 나간다. →  바로 앞에서 마을버스 1번 승차 → 경희의료원 앞 하차<종점> → 도보 3분 → 연화사도착

지하철에서 나와 연화사까지 도보 15분이상 걸림.  도보로 가기는 길이 좀 복잡하니 마을버스를 타는 것이 쉽다.

지하철에서 나오면 바로 마을버스가 있음 → 1번 마을버스는 회기역에서 경희의료원까지만 다니는 것 같다.

경희의료원에서 내려 장례식장쪽으로 나와 우측을 바라보면 바로 연화사 일주문이 보인다. = 지름길

장례식장쪽으로 나오기 싫으면 경희의료원앞에서 하차하여 다시 도로쪽으로 나오면 이정표가 있다. 이정표가 잘 되어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