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봉사의 유래<역사 문화에 글>
도봉사는 해거스님께서 창건하였다. 968년 고려 제4대 광종 임금은 해거스님을 국사로 임명하고 탐문스님을 왕사로 삼음으로써
고려 국사, 왕사 제도를 통하여 선승들에 의해 정치를 펴나갔다. 특별히 국사(國師)에게는 왕이 제자의 예를 행하고 국사에 구배(九排)를 올렸다.
971년 辛未年(신미년) 10월 21일 원화전에서 광종임금이 대장경을 읽을 때에 선악(禪樂)을 갖추어 법구경을 쓴 깃발이 구름처럼 날리고
나팔과 소라 소리가 우뢰와 같이 진동하며 선종,교종 등 천여 명이 혜거스님을 도봉사로 영접하였다고 고려실록에 전한다.
해거스님에 관한 기록을 보면, 탑비에 새긴 고려국수주부화산갈양사변지무애원명묘각흥복우세혜거국사법위지 광시홍제존자 보광지탑비명병서
(高麗國水州府花山葛陽寺辨智無碍圓明妙覺興福祐世惠居國師法諱智光諡弘濟尊者寶光之塔碑銘倂序)가 알려지면서
스님에 대한 자세한 행장을 알게 되었으며 해거스님(899년-974년)은 75세의 나이로 열반에 드셨다.
이후 고려 제8대 현종 임금은 거란의 침입으로 개경이 함락되어 도봉사로 피난하여 정사를 돌보았으며 왕은 이곳 도봉사에서
끝내 거란과 친조를 하지 않았고 또 6城(성)을 물리치기 위하여 대장경의 제작에 착수, 6천 권의 대부분을 완성하여 해인사에 보관 중이다.
이렇게 천년의 역사가 깊은 도봉사는 그 동안 전쟁과 종교분쟁, 화재로 여러번 소실되어 온 사찰로서 1961년 2월에 벽암스님께서
법당 및 부속 건축물을 복원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대웅전에 모셔져 있는 삼존불상 중앙의 석가여래철불좌상 부처님은 혜거스님께서 모셔온 부처님으로서 현재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151호로
등록되었고 국보로 지정받고자 상신 중에 있다.
도봉사 가는 길 도봉사 벽에는 벽화가 그려져 있다 이렇게 벽화를 그려 넣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도봉사의 글 <도봉사의 유래>
도봉사 사찰은 해거스님께서 창건하였고, 968년 고려 제4대 광종 임금은 해거스님을 국사로 임명하고 탐문스님을 왕사로 삼음으로써
고려 국사, 왕사 제도를 통하여 선승들에 의해 정치를 하였다. 특별히 국사(國師)에게는 왕이 제자의 예를 행하고 국사에 구배(九排)를 올렸다.
971년 辛未年(신미년) 10월 21일 원화전에서 대장경을 읽을 때에 광종임금께서 여주 고달사와 희양산 봉암사와 양주 도봉사, 세 곳은
전통을 지키는 사찰로 규정하라고 교지를 내려 이에 따라 불교 교단을 찬유스님이 머무르는 고달사와 긍양스님이 머무르는 봉암사.
그리고 해거스님이 머무르는 도봉사를 부동을 지키는 특별선원으로 삼았다.
해거스님의 속성은 노씨, 자는 홍소이며 해거스님 말년에 도봉사로 돌아오실 때 승려와 신도가 물결처럼 모여들었고,
절의 스님들이 부처님을 영접하는 선악을 갖추었고, 법구경을 쓴 깃발이 구름처럼 날리고 나팔과 소라소리가 우뢰와 같이 진동하며
선종, 교종 등등 천 여명이 도봉사로 영접하였다고 고려실록에 전해진다.
해거스님의 비문인 고려국수주부화산갈양사 변지무애 원명묘각 흥복우세 혜거국사 법위지광시 홍제존자 보광지탑 비 명 병서
(高麗國水州府花山葛陽寺 辨智無碍 圓明妙覺 興福祐世 惠居國師 法諱智光諡 弘濟尊者 寶光之塔 碑 銘倂序) 가 알려지면서
스님에 대한 자세한 행장을 알게 되었으며 혜거스님(899년 ~ 974년)은 75세의 나이로 열반에 드셨다.
이후 고려 제 8대 현종임금은 거란의 침입으로 개경(開京)이 함락되어 도봉사로 피난하여 정사를 돌보았으며,
왕은 이곳 도봉사에서 끝내 거란과 친조를 하지 않았고 또 6성(城)을 물리치기 위하여 대장경(大藏經)의 제작에 착수,
6천 권의 대부분을 완성하여 해인사에 보관중이다.
이렇게 천년의 역사가 깊은 도봉사는 그 동안 전쟁과 종교분쟁, 화재로 여러번 소실되어 온 사찰로써 1961년 2월에 벽암스님께서
법당 및 부속 건축물을 복원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대웅전에 모셔져 있는 삼존불상 중앙의 석가여래철불좌상 부처님은 해거스님께서 모셔온 부처님으로 써 현재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 151호로
등록되었고 국보로 지정받고자 상신중에 있다.
경내로 막 발을 들여 놓는 순간 노천 부처님이 맞아주신다.
뿌리탑 안내
1. 불가에 탑을 쌓기 시작한 것은 부처님 당시 가섭불의 사리를 모시기를 위하여 흙을 빚어 올린 것이 탑의 시초이며,
석가세존께서 열반하신 이후 8개국에서 부처님의 사리를 나누어 탑을 세워 탑안에 사리를 모시고 부처님을 기리고 봉공하였고,
2세기경 아육왕이 8개국에 분산 되어 모셔있던 사리를 다시 나누어 8만 4천의 탑을 쌓았다고 전해진다.
2. 본 탑 안에는 부처님의 진신사리 3과를 모시고 있는데 부처님을 기리는 뜻과 불교의 근본인 씨앗을 심어주신 석가세존의 사리가 모셔져 있어
뿌리탑이라 이름 하였다.
3. 사리 3과를 모시게 된 동기는 한국외국어 대학교 부총장(최장성교수)의 노고가 있었다. 1982년 3월 28일 태국국립사원 왓벤짜마버핏
(Watbenchamabopit)의 종정 프라풋타부니웡(Prabuddhamunjwong)을 초빙해 모시고 전법법회를 원각회에서 모신 후
태국에서 부처님 진신사리 3과를 모시게 되었다.
4. 뿌리 탑 건립 내용의 뜻은 다음과 같다.
오온(五蘊)이 다 공함을 비춰보아 일체 고액을 도탈하였다.(照見五蘊 皆空度 一切苦厄)
다시 말해서 色(색) · 受(수) · 想(상) · 行(행) · 識(식) · 오온(五蘊)이 다 공(空)한 줄을 분명히 알면
마음의 모든 고난이 없어져 지혜가 밝아지고 해탈한다는 뜻이다.
5층은 오온을 뜻한 것이고 기단이 둥근 것은 공을 뜻한 것이고 4방으로 쌓은 것은 모두라는 뜻을 표현한 것이며,
탑 머리 상층에 연화 바탕 위에 삼층은 佛(불) · 法(법) · 僧(승) 三寶(삼보)를 모시고,
그 위에 사부대중이 항상 부지런히 닦아 법륜이 회전하여 최고봉의 여의주는 해탈을 성취한다는 뜻을 간직하고 있다.
둥근 기단 위에 1층에는 동쪽 관세음보살, 남쪽 석가모니불, 서쪽 아미타불, 북쪽 지장보살을 모시고 그 속에 부처님 사리 3과를 모셨고,
그 주위에 16 나한을 모셨다. 난간은 십이지신이 탑을 옹호하고 있으며 좌향을 정확히 세웠다.
탑돌이는 苦(고) · 集(집) · 滅(멸) · 道(도) 四諸(사제)의 뜻을 담아 오르내리게 했다.
전면은 석굴암 부처님을 상징해 모셨으며, 전면 부처님은 석가여래좌상이다.
석굴암 부처님을 상징해 모셨으며, 전면 부처님은 석가여래좌상
석굴암 부처님을 상징해 모셨으며, 전면 부처님은 석가여래좌상
관욕불(灌浴佛) 아기 부처님
대웅전(大雄殿) 다른 곳에 대웅전과는 조금 다르다.
지붕 용마루에서 부터 시작하여 용이 온통 절을 에워싸고 있다.
후불탱화가 없고 법륜이 모셔져 있다.
지장보살 석가모니불 관세음보살이 모셔져 있다.
지장보살 석가모니불 관세음보살이 모셔져 있다.
신중단(神衆檀)
칠성도(七星圖)
도봉사 철불좌상 지정 :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151호 시대 = 고려 초 10세기
소재 : 도봉1동 494-2(도봉사내)- 도봉사 대웅전에 봉안되어 있는 철불좌상은 일제강점기(1937년경)에 일본인이 보관하고 있었던 것을
광복직후 서울시 종로구 청운동에 있는 자명사에 모셔졌으나 도시계획으로 자명사가 철거됨에 따라 이 곳 도봉사로 모셔왔다고 한다.
흔하게 볼 수 없는 철불인 점과 좌고가 1m가 넘는 중형 불상인점, 각부의 양식이 옛 형식을 보이고 있는 등
귀중한 철조여래좌상으로 문화재로서 가치가 있어 2002년 8월 16일 서울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지장보살입상(地藏菩薩立像) 철조여래좌상(釋迦牟尼佛坐像) 관세음보살입상(觀世音菩薩立像)
도봉사 철불좌상(道峯寺 鐵佛坐像)
도봉사 대웅전 정중앙에 본존불로 모셔져 있는 높이 118cm 거대 불상은 서울지역에서는 보기 드문 고려시대 초기 철불로서 같은 시기
장신(長身) 계열의 대표적 불상으로 평가되고, 손모양은 부처가 악마를 누르고 깨달음에 이르는 순간(항마촉지인)을
상징하는 모습으로 표현되고 있으며, 이는 불상 얼굴에 어려 있는 심오(深奧)한 표정과 잘 어울린다.
기록이 없어 제작연대와 제작자를 정확히 알기는 어려우나 이 불상은 옷을 입는 방식에서 오른쪽 어깨를 들어내고
왼쪽 옷깃이 어깨 위에서 세모꼴로 나란히 세 번 크게 접힌 점
왼손 팔목 안쪽의 타원형 주름, 대의(大衣, 설법을 할 때 입는 겉옷) 아래 군의(裙衣, 속옷)을 묶은 숭각기 띠와 무릎 앞에서
부채꼴 모양으로 퍼져나간 옷자락 등에서 고려 초기 불상의 전형적 특징이 잘 드러나 있어
고려시대 철불의 형식적 특징과 그 변천과정을 알려주는 중요한 문화재 이다.
산신과 독성(현재 전각이 없이 노천에 계신다.)
땅에서 솟아나오는 용
貧者一燈(빈자일등) = 가난한 사람이 밝힌 등불 *貧女一燈(빈여일등)이라고도 함.
빈자일등(貧者一燈)은 현우경<賢愚經>에 나오는 고사이다. 한자의 본래 뜻은 ‘가난한 사람이 밝힌 등불’을 뜻하며,
참다운 마음과 정성이 깃든 보시의 중요성을 비유하는 말로 쓰인다.
석가모니가 사위국(舍衛國)의 어느 정사(精舍)에 머물고 있을 때의 일이다.
가난한 어느 여자가 공양하는 한 등잔불은 큰 부자가 공양하는 만 등잔불보다 더 훌륭하다는 말.
옛날에 부처님이 아사세왕의 청장을 받아 왕궁에서 설법하고 밤이 되어 기원정사로 돌아가려 할 때에, 왕은 대궐에서 절까지 가는 길에
수만 개의 등불을 켜서 공양하였다. 그때에 한 노파가 왕이 이렇게 공양하는 것을 기뻐하여,
자기도 거리에서 구걸하여 얻은 돈 2전을 가지고 기름을 사서 등불 하나를 켜서 공양하였다. 이 한 등불은 왕의 수만 개 등보다 광명이 유달리 밝았고,
새벽이 되매, 수만 개의 등은 다 꺼졌으나, 이 한 등만은 더욱 불빛이 빛났다.
그때에 부처님께서는 목련에게 “이 노파는 일찍 80억 부처님께 공양하였으니 30겁 후에는 부처가 되어 ‘수미등광여래’ 라고 이름하리라”
하신 데서 기원한 말이다.
貧者一燈(빈자일등) = 가난한 사람이 밝힌 등불 *貧女一燈(빈여일등)이라고도 함.
빈자일등(貧者一燈)은 현우경<賢愚經>에 나오는 고사이다. 한자의 본래 뜻은 ‘가난한 사람이 밝힌 등불’을 뜻하며,
참다운 마음과 정성이 깃든 보시의 중요성을 비유하는 말로 쓰인다.
옴 불심
極樂精舍(극락정사) = 극락전
아미타불 삼존상
극락정사 앞에 서 있는 탑 옴 마니 반메 홈이라는 범어가 써 있음.
세존응화 2524년 경신 4월 초 2일조성(世尊應化 2524年 庚申 四月 初 二日 造成) 정면
탑이 조성된 날자와 년도가 탑신 맨 아래 받침돌에 새겨져 있다.
뒷면 괸세음보살
등인가?...
道峯寺 寺跡碑(도봉사 사적비)
한 편에 있는 공덕비들
경내 매점에 비취되어 있는 부처님의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 찍어왔다.
쳐다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편해지며 무심 삼매에 들어있는 듯한 모습에 매료되었다. 표정이 너무 편안하고 행복해 보인다.
도봉사치성광여래삼존도 (道峰寺熾盛光如來三尊圖) :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 349호 시대 = 조선
중앙에 치성광여래 ․ 일광보살 ․ 월광보살을 화면 가득 배치한 삼존 형식의 구도 및 적, 녹, 청을 주조색으로, 지물인 여의에 금이 장식된
이 치성광여래삼존도는 서울시에서 연대가 올라가는 치성광여래삼존도에 속하며 형태,
필선 등 각 세부묘사 등이 당시 불화와 비교하여 완성도가 높은 편이다.
또한 보존상태도 좋을 뿐 아니라 제작연대와 봉안처 및 화승의 이름 등이 명확하게 밝혀져 있어 자료로서의 가치가 높아
유형문화재로 지정하여 보호하는 것이 좋을 것으로 판단됨.
◈찾아가는 길
지하철 1호선 의정부행을 타고 도봉산역에서 하차하거나 7호선 도봉산역을 이용하여 도보로 산행 길에 오르는 길이 있다.
도봉산역에서 매표소까지는 도보로 20여분 거리이며, 도봉산 매표소에서 도봉사까지는 30분정도 소요된다.
도봉산 매표소에서 조금 더 올라가면 도봉사로 가른 길과 천축사로 가는 길이 갈라지니 확인 잘하고 갈 것 도봉사는 왼쪽 다리를 건너면 된다.'서울 경기 = 心 마음의 길을 찾아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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