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주 광탄에 있는 보광사를 가려면 됫박고개를 굽이 굽이 넘어가야 한다. 십여년전에는 숨이 턱에차면서 올라왔던 길을 오늘은 차로 올라가시 너무
쉽게 가는 것이 아닌가 싶다.
고령산은 1634년에 주조한 보광사 범종에는 ‘高嶺山’이라 표기돼 있고, 조선 후기에 편찬된 『양주목읍지』에는 ‘高靈山’ 『한국사찰전서』엔 그 둘의
표기가 모두 실려 있어 높고 신령스럽다는 두 가지 뜻으로 쓰였음을 알 수 있다.
창건 당시 한강 이북의 6대 사찰 중 하나로 꼽혔다는 보광사가 여름이면 수해를 이루는 능선 아래쪽에 숨은 듯 안겨 있다.
봄 · 가을이면 꽃과 단풍으로 천지가 붉게 물든다.
보광사는 신라 진성여왕 8년(894) 도선국사가 창건했다. 고려 고종 2년(1215) 원진국사가 중창하고 우왕 14년(1388) 무학대사가 삼창했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광해군 4년(1622)에 복원했다.
1740년 영조가 대웅보전과 광응전 · 만세루 등을 중수하고, 인근 10여 리 밖의 영장리 능말에 있는
생모 숙빈 최씨의 묘 소령원의 원찰로 삼으면서 왕실의 발길이 잦았다.
당초 고령사였던 절 이름도 이 무렵에 보광사로 고쳐 불렀다고 전한다.
조선 말기 쌍세전과 나한전, 산내에 수구암 등을 지으며 중창했으나 한국전쟁 때 대웅보전과 만세루를 제외한 대부분의 전각이 불탄 것을
1957년 이후 꾸준히재건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숙빈 최씨의 영정과
신위가 모셔져 있고, 어실각 앞쪽에 영조가 심었다는 향나무가 있어 영조의 극진했던 효심이 전해진다.
완고한 신분제사회에서 숙빈 최씨는 왕의 어머니가 되고서도 ‘후궁’의 몸을 면치 못했다.
따라서 영조의 애틋한 효심은 더했을 테고, 소령원에 친필 비문을 적어 세우며 보광사에 혼을 모셔 위로하였으나 어디 흡족함이 있었을까.
그 뒤 ‘염불당’으로 불렸음을 알 수 있고, 1913년 8월 서울의 상궁 등이 시주해 중수했음을 밝히고 있다.
이 무렵 만들어졌을 만세루 마루 앞에 걸려 있는 목어가 근래에 보기 드문 빼어난 수작이다.
사슴의 뿔까지 있어 영락없이 용의 형상을 하고 있다.
지금 걸려 있는 대웅보전 편액은 영조대왕 친필이 확실하다 하나, 광응전 편액은 확인할 바가 없다. 광응전이 없어진 탓일까.
보광사의 내력을 명문으로 담고 있는 1631년(인조 9)에 주조한 범종이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58호로 지정돼 있다.
一柱門(일주문) = 古靈山 普光寺 란 현판이 걸려있다.
일주문(一柱門) = 절에서 나오면서 안쪽의 모습
설법전(說法殿)이란 편액이 걸려 있고 이곳에서 템플스테이를 한답니다.
설법전(說法殿)
영각전(靈覺殿) = 낙골당입니다. 너무 잘 꾸며놓았다.
영각전(靈覺殿) 문의 문향이 다른곳과는 사뭇다릅니다.
인터넷에 찾아보니 문살 문양의 이름이 이렇게 나와 있네요
쌍룡파지여의육주(雙龍把持如意六珠) 문살문양 이라하네요 어느분이 올린것을보고 적어봅니다.
청룡과 황룡이 여의주 여섯 개를 발톱으로 움켜 쥐고 있는데 두 개는 사이 좋게 함께 쥐고 있는 모습이라고 되어있네요
영각전(靈覺殿) 천정에 그려진 그림입니다. 고구려 고분 벽화처럼 천장이 온통 고분벽화로 그려져 있습니다.
영각전(靈覺殿)에 모셔진 아미타불
영각전(靈覺殿) 납골당입니다.
삼족오(三足烏)도 그려져 있습니다.
삼족오(三足烏) 또는 세 발 까마귀는 고대 동아시아 지역에서 태양에 산다고 여겨졌던 전설의 새이다.
해를 상징하는 원 안에 그려지며, 종종 달에서 산다고 여겨졌던 원 안의 두꺼비에 대응된다.
일부에서는 삼족오의 '오'가 까마귀가 아닌 단순히 '검은 새'를 의미한다고도 한다.
'삼족오'는 3개의 다리가 달려있는 까마귀를 의미한다. 그 이유를 들자면 여러 가지가 있는데, 태양이 양(陽)이고, 3이 양수(陽數)이므로 자연스레
태양에 사는 까마귀의 발도 3개라고 여겼기 때문이라고도 하고, 삼신일체사상(三神一體思想),
즉 천(天) · 지(地) · 인(人)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경우도 있다.
또 고조선 시대의 제기로 사용된 삼족정(三足鼎)과 연관시켜 ‘세 발’이 천계의 사자(使者), 군주, 천제(天帝)를 상징하는 것으로 분석하기도 한다.
삼족오의 발은 조류의 발톱이 아니라 낙타나 말 같은 포유류의 발굽 형태를 보이고 있다
영각전(靈覺殿) 벽화
인로왕보살과 지장보살이 청용과 황룡이 이끄는 반야선에 왕생자들을 태우고 극락으로 인도하고 계신다.
대리석에 새겨진 연꽃
영각전(靈覺殿)의 벽화로 그려진 보살도
영각전(靈覺殿)의 벽화로 그려진 보살도
미륵보살 입상(彌勒菩薩 立像)
1981년 당시 계엄사령관인 이희성 장군의 시주로 조성하였다고 합니다. 높이 41척이다.
보광사 감로수(普光寺 甘露水)
보광사 감로수는 꽤나 유명하다 물맛이 좋고 약수라합니다. 이 지역사람들과도 이 감로수로 인하여 더욱 돈독해졌다고 합니다.
범종각(梵鐘閣) :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 158호
보광사 범종각에 있는 높이 98.5cm의 중형범종이다. 둥근 형태의 머리 위에는 2마리의 용이 있어 종을 매다는 고리 역할을 하고,
어깨부위에는 꽃무늬로 장식하였다. 몸통은 띠를 둘러 구획을 나누었다. 위쪽에는 사각형의 4개와 유곽과 4구의 보살입상이 교대로 배치 되었다.
아래쪽에는 발톱이 5개인 용과 만든기시를 알려주는 글이 양각되어 있다.
종의 입구로 부터 조금 위쪽에는 파도무늬와 용으로 된 문양을 두었다. 조선 인조 12年(1634年) 설봉자(雪峯子)가 만들었다.
이 범종의 형태는 현등사 종이나 설봉자(雪峯子)의 또 다른 작품인 고려사 종과 양식이 매우 흡사하다.
전체적으로 푸른 녹이 감돌며, 볼륨감과 안정감이 있는 조선 후기 범종이다.
파주보광사숭정칠년명동종 (坡州普光寺崇禎七年銘銅鐘) :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58호 시대 = 조선
보광사 법종각에 있는 높이 98.5㎝의 중형 범종이다.
용뉴의 다양한 모습
만세루(萬歲樓)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사진처럼 조용하고 안정돼 보였는데 지금은 버팀목에 의지해 있는 상태이다.
그 뒤 ‘염불당’으로 불렸음을 알 수 있고, 1913년 8월 서울의 상궁 등이 시주해 중수했음을 밝히고 있다.
이 무렵 만들어졌을 만세루 마루 앞에 걸려 있는 목어가 근래에 보기 드문 빼어난 수작이다.
만세루(萬歲樓)라는 편액과 고령산 보광사(古靈山普光寺)란 편이 함께 걸려있다.
대웅보전 앞에는 다 쓰러져가는 만세루가 뒤쪽의 버팀목에 의지해 아슬아슬 서 있는데, 얼핏 보아도 정면 9칸에 승방이 딸려 있는 이 건물이
본래 누각이었다고는 믿어지지 않는다. 찬찬히 살펴보면 건물은 ㅓ자 평면인데, 동서 ㅡ자로 놓인 큰방채를 잇대어 막음하며 9칸의 승방이 남북 ㅣ자로
놓이는 특이한 구조를 이루었다.
법당에 들 수 없는 상궁이나 부녀자들을 위해 바로 이곳에서 예를 올리게 한 깊은 배려였다고 추측된다.
만세루 앞 뜰에 쌍사자 석등이 한 가운데 있다.
물고기 문고리 예전에는 이곳으로 드나들었다고 한다.
만세루(萬歲樓)
만세루에 걸린 목어는 몸통은 아직 물고기 모양이 조금 남아 있지만 눈썹과 둥근 눈, 튀어나온 코, 여의주를 문 입 그리고 머리에는 사슴의 뿔까지 있어영락없이 용의 형상을 하고 있다.
보광사에서는 이 목어가 꽤나 유명합니다.
만세루(萬歲樓)의 목어(木魚)
만세루(萬歲樓)의 전체 건물
만세루가 뒤쪽의 버팀목에 의지해 아슬아슬 서 있는데, 얼핏 보아도 정면 9칸에 승방이 딸려 있는 이 건물이
본래 누각이었다고는 믿어지지 않는다. 찬찬히 살펴보면 건물은 ㅓ자 평면인데, 동서 ㅡ자로 놓인 큰방채를 잇대어 막음하며 9칸의 승방이 남북 ㅣ자로
놓이는 특이한 구조를 이루었다.
법당에 들 수 없는 상궁이나 부녀자들을 위해 바로 이곳에서 예를 올리게 한 깊은 배려였다고 추측된다.
만세루의 목어의 또 다른 모습
만세루 앞모습
만세루의 뒤 모습
퇴색된 단청도 고스란히 남아 정감이 가고, 법당 외벽의 벽화를 보면 더욱 친근감이 든다. 법당 외벽을 여느 전각과 달리 흙벽이 아닌 목판으로 대고 벽화를 그렸는데,
그림 수법이나 내용이 여느 벽화에서 보기 드문 부처님 전생담과 연화장 세계이고 약간의 민화풍마저 풍기고 있는 것이다.
◈대웅전 벽화◈
신라 진성여왕의 왕명을 받든 도선국사가 "비보사찰(비보사찰)"로 창건했다는 기록이 전해지는 천년고찰 파주 보광사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대찰이었지만, 근대에 들어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대웅보전, 만세루등 일부 당우를 제외한 많은 건물이 소실되었다.
특히 이 건물에 벽체는 목판벽으로 되어 있고 그 곳에 그려져 있는 아름다운 벽화들이 눈에 띈다.
일반적으로 전각의 벽체는 흙이나 회를 바르는 것이 보통인데, 보광사 대웅보전의 벽체는 모두 판자를 끼워 구성한 판벽이다.
판벽은 회벽에 비해 내구성이 떨어져 그곳에 그려진 벽화들의 수명이 오래가지 않는다. 보광사 대웅전 판벽화는 짧은 내구성에도 불구하고
아름다운 벽화들이 많이 남아있다.
이 판벽화는 동측 면에 위태천도, 기사문수동자도, 금강역사도 등 3점, 북측 면에 용선인접도, 괴석도, 대호도, 노송도, 연화화생도 등 5점
서측 면에 관음도, 기상동자도 등 2점을 포함해 모두 10점이 남아 있다.
대웅전 벽화 동진보살인 위태천신 도
불교의 호법선신인 위태천신을 그린 것으로 단독으로 벽에 그려진 것은 이례적이다.
위태천신은 남방증장천왕의 8장군 중에 한 명으로 부처님의 뜻을 받들어 출가자와 불법을 수호하는 임무를 맡았다고 전해진다.
이 벽화에서는 새 깃털장식이 있는 투구를 쓰고 갑옷을 입고 가슴위치에서 금강저를 가로질러 잡고 있는 당당한 모습으로 표현된다.
퇴색된 단청도 고스란히 남아 정감이 가고, 법당 외벽의 벽화를 보면 더욱 친근감이 든다. 법당 외벽을 여느 전각과 달리 흙벽이 아닌 목판으로 대고
벽화를 그렸는데, 그림 수법이나 내용이 여느 벽화에서 보기 드문 부처님 전생담과 연화장 세계이고 약간의 민화풍마저 풍기고 있는 것이다.
해학적인 문수동자도
기사문수동자도는 왼손에 연꽃가지를 잡은 채 사자를 타고 있는 문수동자의 모습을 묘사하였다.
사자는 큰 덩치에 비해 머리가 작다. 축 처진 귀, 뭉툭한 코, 동그란 눈에 일자로그려진 눈썹이 인상적이다. 등에는 안장을 얹고 줄을 매어 고정했으며,
연화좌를 놓은 안장에는 문수동자가 앉아있다.
금강역사도
금강역사도는 상반신을 드러낸 금강역사가 오른손을 들어 주먹을 쥐고 왼손은 아래로 내려 창을 들고있는 모습으로 그려졌다.
얼굴은 꿈틀거리는 둣한 눈썹 아래로 두 눈을 크게 떠서 노려보고 있으며 콧수염과 턱수염이 모두 그려져 있는 것도 두드러진 표현이다.
목에는 망토를 묶어 뒤로 넘겼고, 드러낸 상반신의 가슴과 두 팔에서 강인한 힘이 느껴진다.
다만 움켜진 오른쪽 주먹과 하반신의 채색이 박락되어 그 위용을 잃어가고 있는 점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용선인접도
반야선 안에는 아미타부처님과 대세지, 관세음보살, 지장보살, 인로왕보살이 타고 계신다.
아마도 왕생자들을 맞으러 가는 모양입니다
龍船引接圖(용선인접도)반야선 세밀도
대호도(大虎圖, 호랑이 벽화)
老松圖(노송도)
연화화생도(蓮花 化生圖) 연화장 세계
노승인 듯 동승인 듯 연꽃 속에서 피어나와 부처님께 합장하는 사람들은 심청이가 환생하듯 극락세계에 왕생하는 사람들이다.
그 위엔 칠보로 장엄한 보궁(寶宮)이 떠 있으니 불보살은 필시 중생구제의 발원으로 내려왔음을 짐작하게 한다.
觀音圖(관음도),
법당 외벽 한 면에는 3명의 남자가 수월관음과 동자가 있는 통바위를 힘겹게 지고 가는 모습이 재미있게 그려졌다.
세밀도
수월관음도
기상동자도
보광사대웅보전 (普光寺大雄寶殿) :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83호 시대 = 조선
고령산 기슭에 있는 보광사는 통일신라 진성여왕 8년(895)에 왕명으로 도선국사가 지은 사찰이다.
고려 고종 2년(1215)과 우왕 14년(1388)에 다시 지었으나, 임진왜란(1592)으로 모두 불타 없어졌다. 조선 광해군 14년(1622)에 다시 지었으며,
그 후에도 여러 차례 수리를 하였고 새로 건물을 짓기도 하였다.
영조(재위 1724∼1776) 때에는 영조의 생모 숙빈 최씨의 복을 비는 절로 삼기도 하였다.
보광사 대웅전은 앞면 3칸·옆면 3칸의 규모로,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화려한 팔작지붕집이다.
양쪽 옆면과 뒷면은 모두 두꺼운 나무판으로 벽을 만들었는데, 보통의 벽이 회벽인데 비해 특이하며 양 옆벽에는 벽화가 그려져 있다.
앞면 3칸은 모두 4짝의 문을 달았으며 이 문들은 모두 열어서 들어올릴 수 있도록 짜여졌다.
지붕 처마를 받치면서 장식을 겸하는 공포가 앞·뒷면에는 각 칸에 3구씩, 양쪽 옆면에는 각 칸에 2구씩 배치되었다.
그 수법이 매우 정교하고 화려하게 조각되어 조선 후기의 장식적인 성향을 잘 보여주고 있다. 또한 정면의 기둥 위에는 용의 형상이 조각되어 있다.
내부에는 문수보살상과 보현보살상이 모셔져 있다. (문화재청 글)
대웅보전(大雄寶殿)
이때 매만져진 것으로 볼 수 있으며, 궁중의 여인네들이 불사에 동참했음을 기록하고 있다.
만세루와 마주보고 있다. 주춧돌에 맞춰 자연스럽게 깎아 세운 배흘림기둥, 그 위에 안초공1)을 두어 창방과 평방 머리를 감싸고 있으며,
공포 밖으로 나온 쇠서에는 활짝 핀 연꽃과 봉오리를 조각했다.
정면 한가운데 영조대왕의 친필로 알려진 ‘大雄寶殿’(대웅보전) 편액이 기교 없이 단아하고 강건하다.
대웅전 안에는 중앙에 석가모니불, 동쪽의 약사여래불(합을 들고계심)과 보현보살, 서쪽의 아미타불과 문수보살이 모셔져 있다.
삼존불 좌우로는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상으로 보이는 보살상이 자리해 있다.1898년(고종 35) 대웅보전이 중창되던 때 조성된 본존불 후불탱화
영산회상도와 치성광여래삼존탱을 감상해볼 만하고, 여느 절에서는 보기 드문 화조화(花鳥畵) · 초충도(草蟲圖)가 동양화풍으로 그려진 법당 안의
천장그림도 특별하다. 대웅보전은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83호이다.
영조대왕의 친필로 알려진 ‘大雄寶殿’(대웅보전) 편액
영조가 심었다는 향나무
어실각 앞쪽에 영조가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담아 직접 심었다고 전해지는 300년된 향나무가 있다.
어실각(御室閣)
조선 제 19대 숙종(肅宗)의 후궁이며 영조의 생모 숙빈최씨(淑嬪崔氏) 동이(同伊)의 위패를 모신 전각이다.
숙빈 최씨는 7세에 궁에 들어가 궁녀가 된후 숙종의 승은을 받아 숙빈에 봉해지고 1694年(肅宗[숙종] 20年)에 영조를 낳았다.
어실각은 1740년(영조 16년) 보광사를 숙빈 최씨(淑嬪崔氏)의 묘소인 소령원(昭寧園)의 기복사찰로 삼으면서 건립되었다.
건물은 정면, 측면 모두 1칸 규모의 사모지붕 건물로 어실각(御室閣) 안에는 숙빈 최씨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어실각 앞쪽에 영조가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담아 직접 심었다고 전해지는 300년된 향나무가 있다.
어실각(御室閣)과 향나무
일년에 딱 한번만 문이 열린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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