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화이야기=고려외

국립고궁박물관 = 조선 왕비와 후궁들의 궁중옷과 인장들

백련암 2015. 9. 14. 12:32

특별전을 열며

"오백년 역사를 지켜온 조선의 왕비와 후궁" 특별전은 조선 왕실이 장구한 역사를 이어 오는데 한 축을 담당했던 왕실 여성들의 역할과

위상을 새롭게 인식하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지금까지 주목받은 일이 없는 왕비와 후궁의 다양한 모습들을 이번 전시에서 보여주기 위해 관련된 많은 유물과 사진, 영상 등을 준비하였습니다.

이번 특별전이 각자의 소임과 역할을 다함으로써 조선 왕실 역사의 흐름에서 일정한 역할을 담당했던 왕비와 후궁들을 새롭게 조명하는 기회가 되고,

이들에 대한 기존의 과장된 이미지 뒤에 가려져 있던 새로운 모습들을 발견하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義親王妃(의친왕비) 1907년 이후 = 아래 사진 옷의 주인공.

 

義親王妃 綠圓衫(의친왕비 녹원삼) : 시대 = 20세기 초 대한제국    *소장 = 경운박물관

고종의 다섯째 아들인 의친왕의 부인 김씨가 입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길과 소매 부분은 연두색 도류사(桃榴紗)로 만들었고,

소매 끝에는 홍색과 황금색의 금선단(金線段)을 연결하여 붙였다. 어깨와 도련에는 수복화문(壽福花紋)을 한삼에는 수(壽)자 무늬를 금박하였다.

 

 

純宗과 純宗孝皇后(순종과 순종효황후) 1907년 이후 = 아래 사진 옷의 주인공.

 

순종비 순정효황후가 입었던 황색 원삼    *소장 = 세종대학 박물관

純宗妃 純貞孝皇后 黃圓衫[순종비 순정효황후 황원삼]  : 중요민속문화재 제 49호  시대 = 대한제국(일제 강점기)

 

궁중에서 큰 예식이나 혼례식에 입었던 왕비의 원삼이다. 원삼이란 황후와 왕비, 빈들이 입었던 예복을 말하며,

 이 원삼은 황색의 금직단에 붉은색으로 안을 넣고 그 둘레를 남색으로 선을 둘렀다.

소매 끝에는 다홍색과 남색의 색동과 금직단으로 만든 한삼을 달았다. 황색의 금직단에는 ‘백수(百壽) ’, ‘백복(百福) ’, ‘다남(多男) ’등의

글씨무늬가 있는데 소매와 길의 위아래에도 같은 문양이 금실로 짜여져 있다. 황후의 표식으로 가슴에 흉배를 달고

양쪽 어깨에도 보를 달았는데, 이것은 원삼의 바탕색과 같은 노랑색 바탕의 둥근 원으로 만들어져 있다.

안에는 5개의 발톱을 가진 용을 금실로 수놓고 둘레는 오색의 구름을 수 놓았다.

보통 왕비의 색은 홍색인데, 원삼이 황색으로 되어있는 것은 고종 33년(1897) 대한제국 선포후 왕이 황제로 승격됨에 따라 왕비를 황후라 하고

 원삼도 황후의 황색을 착용하게 되었다.

전 황후 황원삼은 대례복으로 전해오는 유물들 가운데 우리나라에 소장된 것으로는 유일한 예로써 그 가치가 높다.

<문화재청의 글>

 

 

허리대

 

앞판모습

 

뒤판모습

 

   

앞모습

 

    

오조용보                                                                                                           뒷모습

 

 

오조용보

황후의 표식으로 가슴에 흉배를 달고  노랑색 바탕의 둥근 원으로  안에는 5개의 발톱을 가진 오조용보를 금실로 수놓고

둘레는 오색의 구름을 수 놓았다.

 

♣♣♣

순종의 계비 순정효황후(純貞孝皇后 1894년 ~ 1966년)가 있었던 원삼(圓衫)이다. 원삼은 왕비나 후궁들이 입었던 예복으로,

깃이 둥근(圓, 원) 옷(衫, 삼) 이라 하여 붙여진 명칭이다.

둥글게 "희(喜)" 자 무늬를 넣었으며, 가슴과 양쪽 어깨, 등 부분에 용무늬 보를 부착했는데, 원본과 차이를 보인다.

황후가 황색, 왕비가 홍색, 세자빈과 빈(嬪)은 자적색(紫赤色), 왕녀 · 대군부인 · 군부인 등이 녹색 원삼을 착용하였다.

(고궁박물관의 안내글)

 

영친와과 영친왕비 그리고 큰아들인 이진 1922년 

 

영친왕비인 이방자 여사 = 아래 사진 옷의 주인공.

 

英親王妃 紅圓衫(영친왕비 홍원삼) : 중요민속문화재 제 265호.    시대 = 20세기 초 대한제국(일제 강점기)  

영친왕비 이방자(李方子, 1901년~1989년)가  착용했던 원삼이다. 홍색 비단에 금실로 구름과 봉황무늬를 직조했고,

가슴과 등, 양어깨에는 용무늬 보를 부착했다.

원삼의 안감은 원형의 수(壽)자 무늬의 둘레에 박쥐무늬가 있는 황색 수복문단(壽福紋段)을 사용하였다.

(고궁박물관 안내글)

 

 

 

 

英親王妃 紅圓衫(영친왕비 홍원삼)

 

용보 = 가슴과 등, 양어깨에는 용무늬 보를 부착했다.

 

 

경국대전에 규정된 내명부에 대한 기록,  經國大典內命婦條[경국대전내명부조]  : 시대 = 조선 현종 9년(1668년)

소장 =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내명부는 조선 시대에 궁궐에서 거주하던 여관(女官)들의 총칭이다, 내명부는 내관(內官)과 궁관(宮官)으로 구분되었는데,

내관은 왕이나 세자의 후궁들을, 궁관은 상궁과 궁인들을 의미한다.

 

 

황후의 예복 翟衣(적의) : 중요민속자료 제 67호   시대 = 대한제국 20세기 초

황후의 예복인 적의를 꿩문양과 이화문을 그려 넣은 것이다. 꿩은 황후의 상징이며, 이화문은 대한제국의 황실을 상징한다.

대한제국은 황제국을 선포한 뒤 황제 황후 황태자 황태자비 친왕의 예복을 황제국 중국과 동등하게 하여 자주독립국가의 위상을 드높이고자 하였다.

순종의 비인 윤황후와 영친왕비의 적의가 실물로 남아 있다.

 

 

황후의 예복 翟衣(적의) : 중요민속자료 제 67호   시대 = 대한제국 20세기 초

 

 

 

 

 

 

 

 

 

 

 

왕실여성의 위계

왕비는 내명부의 수장으로서 위로는 왕실 어른들을 섬기고 아래로는 내명부 지도하여 왕실의 권위와 질서를 확립했다.

내명부는 품계를 받은 궁중 여성들을 말하며, 그 안에서도 정 1품 빈(嬪),  종 1품 귀인(貴人), 종 2품 소의(昭儀), 종 2품 (淑儀),

정 3품 소용(昭容), 종 3품 숙용(淑容), 정 4품 소원(昭媛), 종 4품 숙원(淑媛) 까지는 왕의 후궁 층으로 내관(內官)이라고 하였다.

세자의 후궁은 종 2품 양제(良娣), 종 3품 양원(良媛), 종 4품 승휘(承徽), 종 5품 소훈(昭訓)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왕비와 세자빈, 후궁들은 왕실 내의 엄격한 위계 질서 아래 있었으며 각각의  지위에 따라 요구되는 역할도 다르고

거주하는 곳과 입는 것, 먹는 것 등에도 차등이 있었다.

예를 들어 조선 왕실과 대한제국 황실의 여성들이 왕실에 크고 작은 의식이 있을 때 입었던 예복인 원삼(원삼)의 경우

"황후가 황색, 왕비가 홍색, 세자빈이나 빈(嬪)은 자적색(紫赤色), 왕녀 · 대군부인 · 군부인 등이 녹색 원삼을 착용하였다.

 

 

왕비와 황후가 공식 업무에 사용한 인장

내교 인장 · 소내교 인장(內敎印章 · 小內敎印章)  : 시대 = 조선 ~ 대한제국

조선 시대 왕비와 대한제국기 황후가 사용했던 인정이다. 크기에 따라 내교인과 소내교인으로 구분되며 전서(篆書)로

"내교[內敎]" 라는 인문[印文]이 새겨져 있다. 손잡이 모양은 사자로 판단된다.

 

 

왕세손빈이 공식 업무에 사용한 인장  : 內音印章(내음인장)  :  시대 = 조선

세손빈이 사용했던 인장이다. "내음[內音]" 이라는 인문[印文]이 새겨져 있으며, 손잡이에는 사자의 모습이 표현되어 있다.

 

 

왕세손빈이 공식 업무에 사용한 인장  : 內音印章(내음인장)  :  시대 = 조선

 

 

왕세손빈이 공식 업무에 사용한 인장  :  內音印章 · 小內音印章(내음 인장 · 소내음 인장) : 시대 = 조선

세손빈이 사용했던 인장이다. 크기에 따라 "내음인[內音인]" 과 소내음인[소내음인]으로 구분되며 재질은 놋쇠이고 전서(篆書)로

 "내음[內音]이라는 인문[印文]이 새겨져 있다.   손잡이에는 사자로 판단된다.  

 

 

수빈 박씨를 "綏妃[수비]"로 봉하는 인장

純祖 生母綏嬪 朴氏 金印[순조 생모수빈 박씨 금인]  :  시대 = 대한제국 1901년(광무 5년)

순조의 생모 수빈(綏嬪) 박씨(1770년~1822년)의 인장이다. 1901년(광무 5년) "수비[綏妃]"로 높여 봉해질 때 옥책과 함께 올린 것으로

"현목수비지인[顯穆綏妃之印]"이라는 인문(印文)이 새겨져 있다.

 

 

신정황후의 회갑에 올린 옥보 = 翼宗妃 神貞王后 玉寶[익종비신정왕후옥보] : 시대 = 조선 1868년(고종 5년)

대왕대비 신정왕후[神貞王后]의 60세 생일에 맞추어 "숙렬[肅烈]"이라는 존호[尊號]를 올릴 때 만들어진 옥보이다.

 

 

숙의방에서 사용한 인장 = 淑儀房 印章[숙의방 인장]  :  시대 =  조선

숙의방은 "숙의[淑儀]"로 임명된 여성의 생활에 필요한 물자와 사후의 제사를 담당했던 곳으로 그곳의 인장이다.

숙의가 누구인지는 명확히 알 수 없다. "숙의방[淑儀房]"이라는 글자가 전서(篆書)로 새겨져 있다.

 

 

숙의방에서 사용한 인장 = 淑儀房 印章[숙의방 인장]

 

 

선희궁에서 사용한 인장 = 宣禧宮 印章[선희궁 인장] : 시대 = 조선

영조의 후궁이자 사도세자의 생모인 영빈(暎嬪) 이씨(1696년 ~ 1764년)의 제사를 담당했던 선희궁에서 사용한 인장이다.

영빈은 1788년에 "선희(宣禧)"라는 묘호(廟號)를 받았다.

 

 

선희궁에서 사용한 인장 = 宣禧宮 印章[선희궁 인장]

 

 

영빈방에서 사용한 인장 = 暎嬪房 印章[영빈방 인장]  :  시대 = 조선

영조의 후궁인 영빈(暎嬪) 이씨(1696년 ~ 1764년)의 생활에 필요한 물자와 사후 제사를 담당했던 영빈방에서 사용한 인장이다.

"영빈방(暎嬪房)"이라는 글자가 전서로 새겨져 있다.

 

 

영빈방에서 사용한 인장 = 暎嬪房 印章[영빈방 인장]  :  시대 = 조선

 

 

정빈방에서 사용한 인장 = 靖嬪房 印章[정빈방 인장] : 시대 = 조선

영조의 후궁 정빈(靖嬪) 이씨(생몰년 미상)의 제사를 담당한 정빈방에서 사용한 인장이다. 원래 이소원방(李昭媛房)으로 불렸으나

1725년 이씨가 정빈에 추증되면서 이름이 바뀐것으로 추정된다.

 

 

정빈방에서 사용한 인장 = 靖嬪房 印章[정빈방 인장]

 

 

정빈방에서 사용한 인장 = 靖嬪房 印章 文[정빈방 인장문]

 

 

    

순화궁에서 사용한 인장 = 順和宮 圖書印章[순화궁 도서인장]  :  시대 =  조선

헌종의 후궁인 경빈(慶嬪) 김씨(1832년~1907년)의 처소에서 사용한 인장으로 "순화궁도서[順和宮圖書]"라는 인문이 전서로 새겨져 있다.

경빈은 1847년(헌종 13년) 후궁으로 간택되어 순화(順和)라는 궁호를 받았다.

 

 

순화궁에서 사용한 인장 = 順和宮 圖書印章文[순화궁 도서인장문]

 

 

의인방에서 사용한 인장 = 宜嬪房 印章[의비방 인장]  :   시대 = 조선

정조의 후궁 의빈(宜嬪) 성씨(?~ 1786년)의 생활에 필요한 물자의 입출을 담당한 의빈방에서 사용한 인장으로

"의빈방(宜嬪房)"이라는 인문[印文]이 새겨져 있다. 아들인 문효세자가 세자로 책봉되면서 의빈에 진봉[進封]되었다.

 

 

 

   

가순궁에서 사용한 인장 = 嘉順宮 圖書印章[가순궁 도서인장]  :  시대  =  조선

정조의 후궁 수빈(綏嬪) 박씨(1770년 ~ 1822년)의 처소에서 사용한 인장으로 "가순궁도서(嘉順宮 圖書)"라 새겨져 있다.

수빈은 1787년(정조 11년) 후궁으로 간택되면서 가순궁[嘉順宮]이라는 궁홀르 받은 것으로 보인다.

 

 

 

 

 

 

가순궁에서 사용한 인장 = 嘉順宮 자령印章[가순궁 도서인장]  :  시대  =  조선

정조의 후궁 가순궁[嘉順宮] 수빈(綏嬪) 박씨(1770년 ~ 1822년)의 사용한 인장으로 "가순궁자령(嘉順宮 慈令)"이라 새겨져 있다.

"자령[慈令]"은 대비의 명인 자교[慈敎]와 빈의 명인 내령[內令]에서 따온 것으로 보인다.

 

 

가순궁에서 사용한 인장 = 嘉順宮 자령印章[가순궁 도서인장]

 

 

 

경수궁에서 사용한 인장 =  慶壽宮印章[경수궁인장]  : 시대 = 조선

정조의 후궁 화빈[和嬪] 윤씨(?~ 1824년)의 생활에 필요한 물자의 입출을 담당한 경수궁에서 사용한 인장으로

"경수궁[慶壽宮]"이라 새겨져 있다. 화빈은 1780년 후궁으로 간택되어 "경수[慶壽]"라는 궁호[宮號]를 받았다.

 

 

경선궁에서 사용한 낙인 = 慶善宮 烙印[경선궁낙인]  :  시대 =  대한제국

고종의 후궁 純獻皇貴妃[순헌황귀비, 1854년~ 1911년)의 처소에서 사용한 낙인(불에 달구어 사용하는 도장)으로

"경선궁[慶善宮]"이라 새겨져 있다. 순헌 황귀비는 1900년(광무 4년) "순빈[淳嬪]"으로 봉해지면서 "경선[慶善]"이라는 호를 얻었다.

 

 

영빈방에서 사용한 인장 =  寧嬪房印章[영빈방인장]  : 시대 = 조선 18세기

영빈방에서 출납되었던 공문서에 사용된 도장이다. 영빈방은 숙종의 후궁 영빈[寧嬪] 김씨(1669년 ~ 1735년)의 생활에 필요한

물자의 입출을 담당하고 죽은 뒤에는 제사를 지내는 기능을 했던 곳이다.

 

 

영빈방에서 사용한 인장 =  寧嬪房印章[영빈방인장]

 

 

영빈방의 토지 관리인 임명 문서 =  導掌許給文[도장허급문]  : 시대 = 조선 1755년(영조 31년)

영빈방에서 이춘휘(李春輝)를 경상도 김해 소재 토지의 도장(導掌)으로 임명하는 내용의 문서이다.

도장은 궁방전(宮房田)의 수세(收稅)와 운영을 위임받은 사람으로, 궁방에 일정한 공이 있는 사람이 임명되었다.

 

 

김귀인방에서 사용한 인장 = 金貴人房印章[김귀인방인장]  :  시대 = 조선

숙종의 후궁인 귀인(貴人) 김씨(?~1735년)로 추정되는 인물의 생활에 필요한 물자 및 사후의 제사를 담당했던 김귀인방(金貴人房)에서

출납되었던 공문서에 사용된 도장이다. 1710년 무렵 제작된 것으로 여겨진다.

 

 

김귀인방에서 사용한 인장 = 金貴人房印章[김귀인방인장]

 

 

 

김귀인방의 토지 관리인 임명 문서 = 導掌許給文(도장허급문 : 시대 = 조선 1711년(숙종 37년)

김귀인방[김귀인방]에서 이상건(李尙健)을 배천(白川, 백천)지역 전답(田沓)의 도장으로 임병하는 내용의 문서이다.

도장은 궁방전의 수세(收稅)와 운영을 위임받은 사람으로, 궁방에 일정한 공이 있는 사람이 임명되었다.

 

 

왕실에서 공급하는 물품을 규정한 책 = 度支定例[탁지정례]  : 시대 = 조선 18세기 후반

탁지정례는 각 궁(宮)과 각 사(司)에 조달할 물품을 규정하기위해 만든 책이다. 정조 대에 편찬된 것으로 2책으로 구성 되었으며,

각각 자전(慈殿)과 인수궁(仁壽宮)에 대한 진배(進排) 물종과 액수, 상납담당관청이 적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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仁穆皇后(인목황후) = 아들을 잃고 서궁(西宮)에 유폐되다.

선조의 계비인 인목황후(仁穆皇后, 1584년~ 1614년)는 정명공주(貞明公主, 1603년~ 1685년)와 영창대군(永昌大君, 1606년~1614년)의 생모이다.

연흥부원군(延興府院君) 김제남(金悌南)의 딸로 1600년(선조 33년)에 의인왕후(懿仁王后)가 사망하자 1602년 19살에 왕비로 간택되었다.

인목왕후는 1608년(선조 41년) 왕위에 오른 광해군이 1613년(광해군 5년) 영창대군과 그 측근들을 제거하고자 일으킨

사건(癸丑獄事[계축옥사])으로 아버지와 아들을 잃고, 자신은 1618년(광해군 10년)에 폐위되어

정명공주와 함께 서궁(西宮)인 경운궁(지금의 덕수궁)에 유폐되었다가 1623년(광해군 15년)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폐출되면서

대비로 복위되었다. 인목왕후는 1632년 49세의나이로 당시 왕실의 가장 어른으로서 한 많은 생을 마감 했다.

 

인목왕후의 유폐 생활은 조선 3대 궁중문학의 하나인『癸丑日記[계축일기]』에 잘 묘사되어 있다. 

대비의 입장에서 바라본 광해군과 영창대군을 둘러싼 궁정내 권력 투쟁,

계축옥사와 인목왕후의 서궁 유폐 등에 관한 비극이 섬세하게 서술되어 있다.

 

 

癸丑日記[계축일기]

1613년(광해군 5년)에 광해군이 영창대군을 죽이고 모후(母后)인 인목왕후를 서궁에 유폐시킨 사건 등이 인목왕후 편의 시각에서 서술된 작품이다. 

조선 궁중문학을 대표하는 세 작품『계축일기』 『인현왕후전』『한중록』가운데 창작시기가 가장 빠른 작품이다.

이본(異本)으로 낙선재본(樂善齋本)과 한글본『서궁일기[西宮日記]』가 있는데, 낙선재본은 행방을 알 수없고『조선역대여류 문학』에

영인되어 전해지고 있다.

『癸丑日記[계축일기]』와『西宮日記[서궁일기]』는 작품의 내용과 서술 시점이 거의 같다.

작자는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으며 인목왕후 측근 나인, 혹은 인목왕후나 정명공주일 가능성이 제시되고 있다.

 

 

   

仁穆皇后(인목황후)의 서궁(西宮) 생활을 기록한 일기 = 西宮日記[서궁일기]  : 시대 = 조선

『癸丑日記[계축일기]』의 이본으로 궁중 실기문[實記文]이다. 인목왕후 폐비사건이 시작되었던 1613년(癸丑年)을 기점으로

궁중이 비사(秘事)를 기록한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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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만장한 삶의 주인공들

인목왕후, 인현왕후, 혜경궁 홍씨

처음부터 왕실의 일원으로 태어난 공주와 옹주 그리고 간택을 통해 책봉도니 대다수 왕비들 그들의 의지와 무관하게 덩치적인 존재인 수밖에 없었다.

이들은 왕위 계승 과정에서 빚어진 권력 투쟁에 휘말려 남편과 부모를 잃기도 하고 자신이 서인으로 강등되거나 사사되기도 했다.

왕실 여성은 영광스러운 자리에 있으면서도 그 자리로 인해 비극적인 삶을 살 수도 있는 운명을 가지고 있었다.

선조의 계비 인목왕후 김씨(1584년~1632년)와 숙종의 계비 인현왕후 민씨(1667년~ 1701년), 그리고

사도세자의 부인이자 정조의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1735년 ~1815년)는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파란만장하고도 비극적인 삶을 살았던 대표적인 왕실 여성들이다.

이들의 비극적인 삶은 각각『계축일기』,『인현왕후전』,『한중록』이라는 대표적인 궁중문학 작품들에 투영되어 있다.

 

인목왕후가 쓴 한시 = 仁穆王后 御筆(인목왕후 어필)  : 보물 제 1220호  시대 = 조선   소장 = 강릉 오죽헌 시립박물관

인목왕후(1584년~1632년)가 서궁에 유폐되었을 때 쓴 한시(漢詩)로 친필이 아닌 모본(摹本)이다.

인목왕후는 대북파(大北派)의 위세에 시달리던 자신을 늙은 소에 비유하고, 광해군을 그 늙은 소에 채찍을 가하는 주인에 비유했다.

왼쪽 하단에 숙종이 남기 발문이 있다.

 

老牛用力已多年 : 노우용력이 다년 = 늙은 소 힘써서 일한지 수년에

 領破皮穿只受眠  : 영파피천지수면 = 목이 부서지고 가죽이 닳아 다만 잠자는 것을 바랄 뿐

犁杷己休春雨足 : 리파기휴춘우족 = 쟁기와 써래도 한가하고 봄비도 족하건만

主人何若又加鞭 : 주인하야우가편 = 주인은 어찌하여 또 채찍을 가하여 고통을 주는가

 

 

숙종이 남기 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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仁顯王后(인현왕후) =  두번의 換局(환국)으로 善(선)의 化神(화신)이 되다.

숙종(肅宗, 재위 1674년~ 1720년)의 계비인 인현왕후(仁顯王后, 1667년~ 1701년)는 인경왕후(仁敬王后, 1661년~ 1680년)가 사망하자

1681년(숙종 7년) 15살의 나이에 왕비로 간택되었다. 인현왕후는 여양부원군(驪陽府院君) 민유중(閔維重)의 딸로 당시 실세였던

서인(西人) 집안 출신이었으나, 왕자를 낳지 못해 숙종의 총애가 왕자 윤(昀, 후의 경종[景宗])을 낳은

희빈 장씨(禧嬪 張氏 1659년~1701년)에게 쏠렸다, 1689년(숙종 15년) 왕자 윤의 세자 책봉 문제로 이를 반대하던 서인이 대거 제거되자

기사환국[己巳換局], 인현왕후는 폐위되고 희빈 장씨가 왕비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이후 1694년(숙종 20년) 남인이 주도한 역보 사건으로 서인이 다시 득세하면서 갑술옥사[甲戌獄事] 인현왕후는 왕비로 복위되었다.

그러나 입궁 후 원인 모를 질병에 시달리다가 35세의 나이에 요절하였다.

왕비에서 폐서인, 또 다시 왕비로 복위된 인현왕후의 삶은 통칭『仁顯王后傳[인현왕후전]』이라 불리는 궁중 소설에 기록되어 있다.

이 소설에서 인현왕후는 권모술수에 능한 희빈 장씨와 대비되어 유교적 덕목과 인품을 갖춘 인물로 그려지나,

궁중 암투 속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던 왕실 여인의 숙명을 보여준다.

인현왕후의 왕비 복위시 제작한 금보 = 肅宗妃 仁顯王后 金寶[숙종비 인현왕후 금보]

 

 

인현왕후의 왕비 복위시 제작한 금보와 옥책 

 肅宗妃 仁顯王后 金寶 · 寶筒 · 寶盝 · 玉冊[숙종비 인현왕후 금보 · 보통 · 보녹 · 옥책]

1989년(숙종 15년) 기사환국(己巳換局)이후 폐위된 인현왕후가 1694년(숙종 20년)에 복위된 후 제작된 것이다.

금보에는 "왕비지보[王妃之寶]"라고 새겨져있으며 왕비로 책봉하는 형식이지만 실제로는 복위되면서 만든 것이다.

 

 

인현왕후의 왕비로서의 삶에 대한 이야기 = 閔中殿行狀錄 券之單[민듕뎐행장녹 권지단] : 시대 = 조선 1881년(고종 18년)

『인현왕후전』의 여러 이본 중 하나로 뒷장에는 인현왕후의 폐위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려

고문을 받고 귀양을 가다 죽은 박태보의 이야기가 수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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惠慶宮 洪氏(혜경궁 홍씨)   =   파란만장한 삶을 책으로 엮다.

영조의 아들 사도세자(思悼世子)의 비이자, 정조(정조, 재위 1776년~1800년)의 생모인 혜경궁 홍씨(1735년~ 1815년)는

영의정(領議政, 홍봉한[洪鳳漢])의 딸로 14살에 세자빈으로 책봉되었다.

1762년 사도세자가 영조의 노여움을 사서 뒤주에 갇혀 죽은 후, 혜경궁 홍씨는 아들 정조가 효장세자의 양자로 입적되고,

자신의 친정인 풍산 홍씨 집안과  정조 간에 대립이 생기는 것을 비롯해, 정조 사후에 정순왕후(貞純王后, 영조 계비(1745년~1805년)가

수렴청정을 하게 되며 정치적 보복까지 당하는 등 파란만장한 궁궐 생활을 하게 된다.

혜경궁 홍씨는 정조가 왕위에 오른 뒤 궁호가 혜빈(惠濱)에서 혜경(惠慶)으로 격상되었고,

정조가 승하한 후 15년을 더 살다가 81살에 별세 하였다.

그리고 1899년 사도세자가 장조(莊祖)로 추존됨에 따라 혜경궁 홍씨도 헌경왕후(獻敬王后)로 추존되었다.

혜경궁 홍씨는 일명『閑(恨)中錄[한중록]』이라는 자전 회고록(自傳 回顧錄)을 통해 자신이 직접 겪은 파란만장한 삶을 기록으로

남겼으며,『閑(恨)中錄[한중록]』은 조선 3대 궁중문학 중 작가가 확실한 작품이라는 점에서 그 중요성이 매우 크다.

 

 

 

혜경궁 홍씨의 회고록 = 泣血錄[읍혈록]

혜경궁(惠慶宮) 홍씨(1735년~ 1815년)가 쓴 회고록인 통칭『閑(恨)中錄[한중록]』의 이본 중 하나이다.

읍혈록[泣血錄]은 "피눈물의 기록"이란 뜻이다.

 

 

혜경궁 홍씨의 회고록 = 閒中漫錄[한듕만녹] : 시대 = 조선

혜경궁 홍씨가 쓴 회고록인 통칭『閑(恨)中錄[한(한)중록]』의 20여종의 이본 중 하나이다.

한글 필사본으로『고종실록』에는 한줄옥이 읍혈록과 한중만록[閒中漫錄]으로 언급되어 있는데 이와 동일한 명칭의 필사본이다.

 

 

혜경궁 홍씨가 짓고 쓴 한시 = 惠慶宮 洪氏 漢詩[혜경궁홍씨 한시]  : 시대 = 조선

혜경궁 홍씨가 희수(喜壽)인 77세에 지은 친필 칠언절구 한시로 사도세자에 대한 그리움을 담고 있다.

시의 처음과 끝에 희수 낙관과 "혜경궁[惠慶宮]"이라고 명시된 낙관이 각각 찍혀 있다.

 

故人誰共一樽開  : 고인수공일준개 = 고인(사도세자)은 지금 누구와 한통 술을 마시는가.

往事己成孤枕夢  : 왕사기성고침몽 = 지난 일은 이미 외로운 베개 밑에 꿈이 되었네.

邪說豈留君子耳  : 사설기류군자이 =  사악한 이야기는 어찌 군자의 귀에 머물겠는가.

閑愁難近達人眉  : 한수난근달인미 = 한가한 시름은 달인의 눈썹에 미치기 어려워라.

 

 

故人誰共一樽開  : 고인수공일준개 = 고인(사도세자)은 지금 누구와 한통 술을 마시는가.

往事己成孤枕夢  : 왕사기성고침몽 = 지난 일은 이미 외로운 베개 밑에 꿈이 되었네.

 

 

邪說豈留君子耳  : 사설기류군자이 =  사악한 이야기는 어찌 군자의 귀에 머물겠는가.

閑愁難近達人眉  : 한수난근달인미 = 한가한 시름은 달인의 눈썹에 미치기 어려워라.

 

 

혜경궁 홍씨를 황후로 추봉하는 옥보 = 惠慶宮洪氏皇后追封玉寶(혜경궁 홍씨 황후추봉 옥보) :

시대 = 대한제국 1899년(광무 3년)

혜경궁 홍씨를 "의황후(懿皇后)"로 추봉하면서 만든 어보이다.

고종이 직계 5위의 왕과 왕비를 황제와 황후로 추봉할 때 혜경궁 홍씨도 황후로 추봉되었다.

 

사도세자의 무덤에서 출토된 묘지 = 思悼世子永祐園址 出土墓誌(사도세자영우원지 출토묘지)  : 시대 = 조선

영조가 지은 사도세자(思悼世子)의 묘지(墓誌)로 사도세자의 첫번째 무덤인 영우원(永祐園) 터에서 발견되었다.

사도세자의 탄생부터 죽음까지 기록되어 있다.

 

 

사도세자의 무덤에서 출토된 묘지 = 思悼世子永祐園址 出土墓誌(사도세자영우원지 출토묘지)

 

 

사도세자의 무덤에서 출토된 묘지 = 思悼世子永祐園址 出土墓誌(사도세자영우원지 출토묘지)

 

 

영조의 육상궁 참배 감회글을 새긴 현판

戊寅菊秋誕日 朝晝夕行禮後紀懷懸板[무인국추탄일 조주석행예후기회현판]  : 시대 = 조선 1758년(영조 34년)

1758년(영조 34년) 9월 13일 영조가 육상궁(毓祥宮)을 참배하고 쓴 글이 새겨져있는 현판으로, 재실(齋室)인 풍월헌(風月軒) 서쪽에 걸려있었다.

영조는 65세 생일을 맞이하여 육상궁에서 작헌례(酌獻禮)를 거행하였다.

 

 

수빈 박씨 사당 건립에 관한 의궤 = 顯思宮別廟營建都監儀軌[현사궁별묘영건도감의궤] : 시대 = 조선 1824년(순조 24년)

순조의 생모 수빈(綏嬪) 박씨(1770년 ~ 1822년)의 사당인 경우궁(景祐宮)을 짓고 신주를 모신 과정을 기록한 의궤이다.

정당(正堂)과 건물배치도 감실 등의 채색 도설이 실려 있다. 혼궁(魂宮)인 현사궁(顯思宮)에 모셔져 있던 신주를

 지금의 서울시 종로구 계동에 새로 경우궁을 지어 이봉(移奉)하였다.

 

 

왕을 낳은 후궁의 제가 의례를 정리한 책 =  宮園式例[궁원식례] : 시대 = 조선 1753년(영조 29년)

영조가 숙빈(淑嬪, 최씨1670년~1718년)의 사당인 육상궁(毓祥宮)과 묘소인 소령원(昭寧園)에서 행해지는 여러 의식을

국가전례로 정착시키기 위해 구윤명(具允明, 1711년~1797년)등에게 명하여 1753년(영조 29년)에 제작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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喪葬禮(상장례)  =  죽음을 애도하는 가장 권위 있는 의식

조선시대 왕비의 상장례(喪葬禮)는 흉례(凶禮) 중에서도 가장 권위 있고 규모가 큰 의례로, 국왕에 준한 국장(國葬)으로 거행되었다.

의례서에서도 왕과 왕비의 상장례 항목을 별도로 구분하지 않았고, 특별히 언급해야하는 내용은 "내상(內喪)"이라 표기하는 정도였다.

왕비의 상장례를 담당한 국장도감(國葬都監[장례행사]), 빈전도감(殯殿都監[염하는것), 산릉도감(山陵都監[묘자리) 등의

임시기구 또한 국왕의 경우와 동일하였다.

『국조오례의』등에 수록된 절차에 따라 최고의 예로 지낸 왕비의 상장례와 달리, 후궁의 상장례는『주자가례』에 근거하여

사가례[私家禮]의 예장(禮葬)으로 진행되었다.  후궁의 상장례 절차는 뚜렷한 규정이 없었기에 생전의 지위에 따라 달라질 수 있었고,

왕비의 국장에 비해 매우 간략했다. 그러나 인조 때 부터는 국왕의 생모인 빈(嬪)의 상장례가 국가 의례로 격상되어 특별하게 치러졌다.

 

코끼리모양 술동이(象尊[상존])와 소모양의 술동이(犧尊[희존])

 

코끼리모양 술동이(象尊[상준])

봄과 여름 제사에 앙제(앙제, [흰술])와 명수(명수, [맑은 물])를 담는 제기로 준소상 차림에 사용되었다.

소모양의 술동이(犧尊[희준])

봄과 여름 제사에 예제(醴齊, [단술])와 명수(明水, [맑은 물])를 담는 제기로 준소상 차림에 사용되었다.

 

 

"毓祥宮[육상궁]" 명문 은제주전자 =  銀製酒煎子[은제주전자]  : 시대 = 조

육상궁(毓祥宮)에서 의례 시 술이나 물을 담았던 주전자이다.

굽다리에 "육상궁 무인중동신조 중이십이냥육전[毓祥宮 戊寅仲冬新造 重二十二兩六錢]" 이라는

명문이 있어 사용처를 확인할 수 있다.

 

 

철인왕후 신위를 부묘한 과정을 기록한 의궤   소장 = 문화재청

哲仁王后祔廟都監儀軌(철인왕후부묘도감의궤) : 시대 = 조선 1880년(고종 17년)

철종비 철인왕후(哲仁王后, 1837년~1878년)의 신위를 종묘(宗廟)에 모신 과정을 부묘도감(祔廟都監)에서 기록한 의궤이다.

이 부묘례(祔廟禮)는 초상(初喪) 이후 약 26개월 만인 1880년 7월 6일에 거행되었다.

 

 

순명황후의 장례식 행사를 그린 그림 = 純明后 發引班次圖(순명후 발인반차도) : 시대 = 대한제국 1904년(광무 8년)

1904년(광무 8년) 11월 28일 순종비 순명효황후(純明孝皇后, 1872년~1904년)의 장례식 때 원소(園所)로 향하는 상여행렬을 그린 반차도이다.

목판으로 윤곽선을 찍고 그 위에 채색을 하여 제작하였다.

 

 

· 왕후에게 존호를 올리는 행사를 기록한 반차도 = 上尊號冊寶詣闕班次圖(상존호책보예궐반차도)

시대 = 조선 1888년(고종 25년)

문조비 신정왕후(神貞王后) 헌종비 효정왕후(孝定王後), 고종비 명성황후(明成皇后)에게

각각 "창복[昌福]", "장소[莊昭]", "원성[元聖]"이라는  존호(尊號)를 올리는 행사를 기록한 반차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