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남북도 = 心 산사 길없는길

고창 선운산 도솔암

백련암 2016. 3. 27. 17:32

선운산도립공원에 있는  도솔암

선운산은 호남의 내금강으로 불리우는 명승지로서 1979년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선운산은 도솔산이라고도 불리우는데,

선운이란 구름속에서 참선한다는 뜻이고,  도솔이란 미륵불이 있는 도솔천궁의 뜻으로 선운산이나 도솔산이나 모두 불도를 닦는 산이라는 뜻이다.

곳곳에 기암괴석이 봉우리를 이루고 있어 경관이 빼어나고 숲이 울창한 가운데, 천년 고찰 선운사가 자리하고 있다.

본사는 선운사로 검단선사가 창건하고 대참사(참당사)는 진흥왕의 왕사인 의운국사가 창건했다고 하나 천오백년 전의 일이고

현재는 도솔암, 석상암, 동운암과 함께 참당암이 있지만 옛날에는 89암자가 골짜기마다 들어섰던 것으로 전한다.

 

문화재로는 금동보살좌상, 지장보살좌상, 선운사 대웅전, 참당암 대웅전, 도솔암 마애불 등이 보물이고

동백나무숲, 장사송, 송악 등이 천연기념물이며, 석씨원류 경판, 영산전목조삼존불상, 육층석탑, 범종, 약사여래불상, 만세루, 백파율사비,

참당암 동종, 선운사 사적기 등이 지방문화재로 백파율사비는 추사가 짓고 쓰고한 추사 글씨 중에서도 대표작이다.

선운산의 경치를 살펴보면 큰 절에서 개울을 따라 올라가면 물줄기가 갈라진 곳에 자연의 집이 있고 우측으로 더 올라가면

여덟가지로 소담하게 벌어진 장사송과 진흥왕이 수도했다는 진흥굴이 있다.

 

 

선운산 도솔암

一柱門(일주문) = 兜率山 禪雲寺(도솔산 선운사)로 현판이 있다.

사찰에 들어가는데 처음 지나는 문이 일주문입니다.  일주문의 명칭은 기둥이 한 줄로 늘어서 있다고 하여 붙여진 것입니다.

일주문의 기둥이 한 줄로 늘어선 것은 세속의 번뇌로 흩어진 마음을 사찰에 들어섬으로써 마음을 하나로 모아 진리의 세계로 들어간다는 상징적 의미,

즉 일심(一心)을 뜻합니다. 바꾸어 말하면 이 언덕에서 저 언덕으로 가는 첫 번째 관문인 것입니다.

이 문을 경계로 문 밖을 속계(俗界)라 하고 문안을 진계(眞界)라 하며, 일주문을 들어설 때 일심에 귀의한다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일주문 안과 밖에서

 

 

 

 

일주문 = 저 문 밖으로 나가면  부처님의 품(진계[眞界])에서 중생의 세상인 속계(俗界 즉 속세)로 가게된다.

 

 

兜率山 禪雲寺(도솔산 선운사)현판

도설이란 미륵불이 있는 도솔천궁을 가르키며, 선운이란 구름 속에서 참선한다는 뜻이다.

현판글씨는 일중 김충현(1921년~2006년)선생 작품이다.

한국근대 서예를 대표하는 일중은 특히 사찰이나 정자의 현판에 글씨를 많이 남겼다고 하며 선운사도 그 중 하나다.

 

 

도솔암

도솔산 도솔암은 마애미륵부처님과 도솔천 내원궁에 지장보살님이 주석하고 계시는 세계에서 유일한 미륵 · 지장도량입니다.

도솔ㄹ암의 정확한 창건사실은 알 수 없으나 사적기에는 선운사와 함께 백제 때 창건되었다는 기록이 전해지고 있다.

이에 따르면 신라 진흥왕이 만년에 왕위를 버리고 도솔산의 한 굴에서 머물고 있었는데 어느날 밤 바위가쪼개지며,

그 속에서 미륵삼존불이 출현하는 꿈을 꾸고 이에 감응하여 중애사 · 선운사 · 도솔사등 여러 사암을 창건하였다는 것이다.

 

진흥왕은 통일신라 이전의 신라의 왕이었는데 당시 백제의 영토였던 이 곳에 신라왕이 머물렀다는 설화는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다.

 

이러한 사실로 볼때 창건사항은 정확히 알 수 앖지만, 미륵삼존의 출현이나 "도솔(兜率)"이라는 이름 등은

도솔암은 미륵신앙을 바탕으로 창건된 사찰임에는 틀림이 없다.

 

특히 도솔암 서편의 거대한 암벽에 새겨진 마애불좌상(磨崖佛坐像)은 고려 초기의 마애불 계통 불상으로 크게 주목받고 있는데,

사람들이 이 마애불을 "미륵불"이라 부르고 있었던 데서도 도솔암과 미륵신앙의 깊은 연관성을 잘 말해주고 있다.

 

마애불 좌상이 조성된 이래 이 불상의 가슴 중앙에는 신기한 비결(秘訣)이 숨겨져 있다는 전설이 전하여,

동학농민전쟁 무렵에는 동학의 주도세력들이 현세를 구원해줄 미륵의 출현을 내세워 민심을 모으기 위해 이 비기를 꺼내가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발굴조사에 따르면 이 곳에서 출토된 기와에 "도솔중사(兜率仲寺)"라는 명문이 있어 당시에는 절이름을 중시라고도 불렀음을 알 수 있다.

조선 후기에 들어오면서 도솔암은 상도솔암, 하도솔암, 북도솔암등 세 암자로 나뉘어져 독자적인 이름을 갖게 된다.

 

상도솔암은 지금의 도솔천 내원궁으로서 1511년 지은(智誾) 스님이 중창한 뒤 1694년, 1829년에 각각 중수하고

1705년에 중종을 봉안하였는데, 조선말 이후 내원궁만 남기고 퇴락하였다.

 

하도솔암은 현재 마애불상이 있는 곳으로서 1658년네 해인(海印)스님이 창건하였으며,

북도솔암은 지금의 대웅전이 있는 자리로서 1703년(숙종 29년)에 최태신이 창건하였다.

이처럼 각기 독자적인 암자였던 것이 근세에 와서 북도솔암을 중심으로 하나의 암자로 통합된 것이다.

현재 도솔암의 전각은 대웅전, 나한전, 도솔천내원궁, 요사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도솔암내원궁에는 보물 제 280호인 지장보살좌상이 봉안되어 있으며,

마애불좌상은 보물 제 1200호, 나한전과 내원궁은 각각 문화재자료로 지정되어있다.

 

 

도솔암으로 가는 길목에 도솔교가 있다.

 

 

도솔암으로 가는 길 목에 있는나무 물고기가 나무로 기어올라가는 것 같아서요

 

 

도솔쉼터

 

 

선운산 안내지도

 

 

도솔교

 

 

 

 

 

 

 

 

장승

 

 

선운산 진흥굴

진흥왕은 독실한 불교 신봉자였다. 국사 의운의 청으로 대참사(지금의 참당암)를 지어 우전국에서 보내온 불상을 모시게 하고는 언제나

이곳에 향의를 가지고 있었다.  만년에는 기어이 왕위를 버리고 도솔왕비, 중애공주와 함께 의운국사가 있는 이곳으로 들어와 스스로 법운자라 칭하고

수도를 하는데 꿈에 미륵삼존이 바위를 가르고 나타났다 하여 열석굴이라고도 하며, 현몽에 따라 절을 지어 이름을 중애사라 하니,

도솔암과 중애사는 모두 왕후와 왕녀의 이름을 딴 것이라 한다.

 

진흥굴 앞에서는 사자암이 있는데 사자가 돌아앉아 내려다보는 형국으로 도솔천에 침입하는 마귀를 몰아 낸다고 전한다.

 

삼국시대 불교가 국교처럼 성행했던 신라에서 제23대 법흥왕의 태자로 탄생한 아사달은 어릴 때부터 불도에 남다른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는 어느날 꿈을 꾸었는데, 인도의 왕자로 탄생한 석가모니가 구중궁궐과 애처를 버리고 승려가 되어 몸소 고행을 하여 득도하고 불도를 중흥시켜 

대성인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그후 자기도 이렇게 될 수 없을까 하는 생각에 잠길 때가 한두번이 아니었다.

그는 부친의 대통을 이어 왕위에 오르지 않으면 안될 신라의 법전에 따라 부득이 24대의 왕을 계승하기는 하였으나 나라 일에는 뜻이 없고

오직 불도에만 힘써 오다가 끝내는 왕위를 물려주고 평소 많은 시주와 관심을 가져온 선운사로 수도의 길을 떠났다.

진흥왕은 왕위를 떠나 올 때 왕비와 사랑하는 중애공주를 데리고 선운사를 찾아 삭발하고 승려가 되었다.

 

진흥왕이 맨먼저 찾아온 곳은 지금 선운산의 사자암 앞에 있는 석굴로서 좌변굴이라 불렸는데, 후세에 이 굴의 명칭을 진흥굴이라 고친 것은

진흥왕이 친히 거처하며 수도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진흥왕은 승려가 된 후 이름을 법운자라 칭하고

사랑하는 공주 중애를 위하여 중애암, 왕비의 별호 도솔 이름을 따서 도솔암을 건립하고 이곳에서 일생을 마쳤다고 한다.

 

 

진흥굴앞에 있는 돌탑

 

 

   高敞 禪雲寺 兜率庵 長沙松(고창 선운사 도솔암 장사송) : 천연기념물  제354호

장사송은 고창 선운사에서 도솔암을 올라가는 길가에 있는 진흥굴 바로 앞에서 자라고 있다. 나무의 나이는 약 600살 정도로 추정되며,

높이는 23m, 가슴높이의 둘레는 3.07m이다. 높이 3m 정도에서 줄기가 크게 세 가지로 갈라져 있고,

그 위에서 다시 여러 갈래로 갈라져 부챗살처럼 퍼져 있다.

고창 사람들은 이 나무를 ‘장사송’ 또는 ‘진흥송’이라고 하는데, 장사송은 이 지역의 옛 이름이 장사현이었던 것에서 유래한 것이며,

진흥송은 옛날 진흥왕이 수도했다는 진흥굴 앞에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고창 삼인리 도솔암 장사송은 오랫동안 조상들의 보살핌을 받아 왔으며,

나무의 모양이 아름답고 생육상태가 양호하며 보기 드물게 오래된 소나무로서 보존가치가 인정되어 천연기념물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문화재청의 글>

 

 

 高敞 禪雲寺 兜率庵 長沙松(고창 선운사 도솔암 장사송) : 천연기념물  제354호

소나무과의 상록교목으로 나무껍질은 붉고 박편처럼 떨어진다. 꽃은 6월에 피며 열매는 다음해 9월에 흑갈색으로 익는다.

삼인리 소나무는 노거수(老巨樹)로서 높이 23m, 가슴높이의 둘레 2.95m, 가지는 동서로 16.8m 남북으로 16.7m에 이른다.

특히 이 나무는 지상 2.2m 높이에서 줄기가 두 갈래로 갈라졌고, 그 위에 다시 여덟 갈래로 크게 갈라져 있다.

보기에 따라서는 소나무와 같으나 지상 40cm정도에서 가지가 난 흔적이 있어서 반송으로 취급되고 있다.

나무상태가 아담하여 아름답게 보인다. 고창 선운사에서 도솔암으로 가는 길을 한참동안 따라 올라가면 오른쪽에 진흥굴이 있고

그 굴앞 편평한 산자락에 아름다운 모양을 가진 소나무가 서 있는데 그곳 사람들은 이 소나무를 장사송으로 부르고 있다.

생육공간은 충분하고 나무를 보호하는 철책 울타리 안에 장사송(長沙松)이라고 새긴 비석이 놓여 있고,

비석의 뒷면에는 이 나무에 얽힌 전설이 새겨져 있다.

<선운산 도립공원의 글>

 

 

쉼터 선운정

 

 

    

 

 

 高敞 禪雲寺 兜率庵 長沙松(고창 선운사 도솔암 장사송) : 천연기념물  제354호

이 나무는 반송(盤松)으로 분류되어 있으며, 나이는 약 600살 정도로 추정된다. 높이는 23m, 가슴높이의 둘레는 3.07m이며, 높이는 3m

정도에서 줄기가 크게 세 가지로 갈라져 있고, 그 위에 다시 여러 갈래로 갈라져 부챗살처럼 퍼져 있다.

이 나무의 명칭을 "장사송" 또는 "진흥솔" 이라 불려지는데 장사송은 이 지역의 옛 지명인 장사현(長沙縣)에서 유래한 것이며,

진흥송은 옛날 진흥왕이 수도했다는 진흥굴(眞興窟) 앞에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도솔암 밑에 있는 관광상품과 불교용품도 팔고 차도 함께 마실 수있다.

 

 

 

 

도솔암에 도착하였습니다.

 

 

 

 

도솔암 종무실

 

 

도솔암편액이 있는 요사채

 

 

兜率庵 懸板(도솔암 현판)

居巖 金奉官書(거암 김봉관 서)란 글씨와 낙관이 있다.

 

 

요사채 뒷모습

 

 

極樂寶殿(극락보전)

조선후기의 도솔암은 상도솔암, 하도솔암, 북도솔암등 세 암자로 나뉘어져 독자적인 이름을 갖게 되었다.

이 가운데 북도솔암이 지금의 극락보전이 있는 자리로 1703년(숙종 29년)에 최태신이 창건하였다.

도솔암 극락보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다포계의 맞배지붕이고 풍판이 세워진 목조기와집이다.

아미타부처님을 본존불로하여 관세음보살과 지장보살님이 좌우보처로 상단에 모셔져 있으며, 아미타극락불탱이 후불탱화로 모셔져 있다.

 

수미단이나 닫집은 단청칠이 되어있지 않음에도 화려하고 웅장하다. 천정은 우물반장이고, 마루는 우물마루이다.

이외에 금어비구 동원(東園)이 조성한  칠성탱, 금어봉화(奉華), 소현(所賢), 창엽(昌燁) 등이 조성한 독성탱, 신중탱 등이 있다.

 

 

極樂寶殿(극락보전)

 

 

좌측 지장보살,   중앙 아미타불   우측 관세음보살

아미타부처님을 본존불로하여 관세음보살과 지장보살님이 좌우보처로 상단에 모셔져 있으며,

아미타극락불탱이 후불탱화로 모셔져 있다.

 

 

七星撑畵(칠원성군)  =  금어비구 동원(東園)이 조성한  칠성탱이 있다.

 

 

獨聖撑畵(독성탱화)

금어봉화(奉華), 소현(所賢), 창엽(昌燁) 등이 조성한 독성탱화

 

 

神衆壇(신중단)

금어봉화(奉華), 소현(所賢), 창엽(昌燁) 등이 조성한 신중탱화

 

 

甘露水(감로수)

 

 

    

 

 

安心堂(안심당) 도솔암 현판이 걸려있는 요사 뒷편으로 나 있다.

객승이나 혹은 절에서 종사하시는 분들의 요사채인것같다.

 

 

安心堂(안심당)

 

 

壽光殿(수광전) = 위패가 모셔져 있는 전각이다.

 

 

壽光殿 懸板(수광전 현판)

 

 

 

 

아미타불과 후불탱화

 

 

 

 

용화선을 타고 인로왕보살의 인도로 극락으로 가는(반야용선)

 

 

반야용선에 타고 극락왕생하는 영생자들

 

 

 

 

羅漢殿(나한전) :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 110호     시대 = 조선

선운사의 산내암자인 도솔암에 있는 법당이다. 정면3칸 측면1칸에 맞배지붕으로 되어 있으며,

현존하는 건물은 건축수법으로 보아 조선 말기에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나한전 내부에는 흙으로 빚은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가섭과 아난이 협시하였고, 1910년 용문암에서 옮겨온 16나한상을 모시고 있다.

 

도솔암은 선운사의 산내암자로서 대웅전 서쪽 150m정도 떨어진 곳에 있으며, 원래는 여섯 도솔암이 있었으나 현재는 상하 2개의 도솔암만 남아 있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조선시대 도솔암 용문굴에 이무기가 살면서 주민들을 괴롭혔는데, 이를 쫓아내기 위해 인도에서 나한상(羅漢像)을 모셔와

이곳에 안치하자 이무기가 사라졌다고 한다.

그리하여 이무기가 다시 나타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이무기가 뚫고 간 바위 위에 나한전을 건립하였다고 한다.

<문화재청의 글>

 

 

羅漢殿(나한전) :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 110호     시대 = 조선

도솔암 극락보전에서 마애불로 가는 길에 있는 법당이다. 현존하는 건물은 건축수법으로 보아 조선말기에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나한전 내부에는 흙으로 빚은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가섭과아난이 협시하고, 1910년 용문암에서 옮겨온 16나한상을 모시고 있다.


도솔암은 선운사의 산내암자로서 대웅전 서쪽 150m정도 떨어진 곳에 있으며, 원래는 여섯 도솔암이 있었으나 현재는 상하 2개의 도솔암만 남아 있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조선시대 도솔암 용문굴에 이무기가 살면서 주민들을 괴롭혔는데,

이를 쫓아내기 위해 인도에서 나한상(羅漢像)을 모셔와 이곳에 안치하자 이무기가 사라졌다고 한다.

그리하여 이무기가 다시 나타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이무기가 뚫고 간 바위 위에 나한전을 건립하였다고 한다.

<도솔암>

 

 

    

나한전 앞에 있는 3층 석탑

 

 

나한전과 삼층석탑

 

 

 좌측 아난존자   중앙 석가모니불   우측 가섭존자

흙으로 빚은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가섭과아난이 협시하고, 1910년 용문암에서 옮겨온 16나한상을 모시고 있다.

 

 

나한전에 흙으로 빚은 석가모니불

 

 

흙으로 빚은 아난과 1910년 용문홤에서 옮겨온 16나한상들

 

 

흙으로 빚은 좌측 아난존자   중앙 석가모니불   우측 가섭존자

 

 

흙으로 빚은 가섭과 1910년 용문암에서 옮겨온 16나한상들

 

 

나한전 천정

 

 

나한과 후불탱화로는 나한들의 일과가 재미있게 그려져 있다.

 

 

각각의 그림이 모두 다르다 = 나한과 후불탱화로는 나한들의 일과가 재미있게 그려져 있다.

 

 

나한과 후불탱화로는 나한들의 일과가 재미있게 그려져 있다.

 

 

같은 그림은 없다.

 

 

 

 

 

 

 

 

 

 

兜率天內院宮 懸板(도솔천내원궁 현판)

 

 

    

도솔천 내원궁으로 오르기전 일주문을 지나 계단길을 오르면 도솔천 내원궁이 나타난다.

 

 

내원궁으로 들어가는 문(일주문) 계단이 쪼금 높고 가파르다 쉼엄 쉬엄 가다보니 하늘 궁에 닿아있었다.

 

 

禪雲寺兜率庵內院宮(선운사도솔암내원궁)  :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 125호    시대 = 조선

선운사는 도솔암을 비롯한 4곳의 암자를 포함한 사찰이다.

도솔암 안의 내원궁은 험준한 바위 위에 세운 법당으로 상도솔암이라고 부른다. 조선 중종 6년(1511)과 숙종 20년(1694),

순조 17년(1817)에 다시 지었다.  이 건물은 거대한 바위 위에 세웠기 때문에 기단없이 편편한 곳에 자리잡아 원형 주춧돌만 두었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으로 꾸몄다. 기둥은 둥근기둥을 사용하였고, 벽선에 亞자형 2짝 여닫이문을 달았는데,

가운데 칸과 양 옆칸은 그 간격을 다르게 하여 예불 공간을 크게 하였다.

천장의 구조는 우물 정(井)자 모양으로 천장 속을 가리고 있는 우물천장이며, 지장보살좌상(보물 제280호)을 모시고 있다.

<문화재청 글>

 

 

兜率天內院宮 懸板(도솔천내원궁 현판)  =  가로현판이 아닌 세로현판이다.

 

천인암(千仞岩)이라는 기암 절벽과 맑은 물이 흐르는 깊은 계곡 사이에 자리한 내원궁은 고통 받는 중생을 구원한다는 지장보살(지장보살)을 모신 곳으로,

상도솔암이라고도 부른다. 거대한 바위 위에 초석만을 세우고 만든 이 건물은 작은 규모이지만 매우 안정된 느낌을 준다.

이 내원궁은 통일신라 때부터 있었다는 말도 전하나, 현재의 건물은 조선 초기에 짓고 순조 17년(1817년)까지 몇차례 보수한 것이다.

 

 

 

험준한 바위 위에 세운 법당으로 상도솔암(上兜率庵)이라고도 한다.

조선 중종 6년(1511년)에 지은(智誾)스님이 중창하고 숙종 20년(1694년)에 3창(三創), 순조 17년(1817년)에 4창(四創)하였다.

거대한 바위 위에 세워졌기 때문에 기단 없이 편편한 곳에 자리를 잡아 원형초석만 두었는데,

기단이 없어 건물이 낮아지므로 하인방(下引枋)의 높이만큼 되는 장초석(長礎石)을 사용하였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에 기둥은 두리기둥을 사용하였고, 벽선에 아자형(亞字形) 2분합문(二分閤問)을 달았다.

규모는 작지만 겹처마에 8작지붕을 올려 안정된 느낌을 주고 있다.  이 내원궁에는 금동지장보살좌상(보물 제 280호)을 봉안하고 있다.

 

 

좌측 벽면에는 반야심경이 쓰여있음

대승불교 반야사상(般若思想)의 핵심을 담은 경전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널리 독송되는 경으로 완전한 명칭은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摩訶般若波羅蜜多心經)’이다.

 

그 뜻은 ‘지혜의 빛에 의해서 열반의 완성된 경지에 이르는 마음의 경전’으로 풀이할 수 있다. ‘심(心)’은 일반적으로 심장(心臟)으로 번역되는데,

이 경전이 크고 넓은 반야계(般若系) 여러 경전의 정수를 뽑아내어 응축한 것이라는 뜻을 포함하고 있다.

 

『반야심경』은 수백 년에 걸쳐서 편찬된 반야경전의 중심 사상을 270자로 함축시켜 서술한 경으로

불교의 모든 경전 중 가장 짧은 것에 속하며,  한국불교의 모든 의식(儀式) 때 반드시 독송되고 있다.

 

 

우측에는 츰부다라니가 쓰여있다.

 

지장십륜경에 나오는 진언입니다.

지장신앙의 3대 경전인 지장보살본원경, 지장보살십륜경, 점찰선악업보경 중에 지장보살십륜경에 나오는 다라니로서

다음과 같이 석가모니께서 다라니에 대해 설명하십니다.

 

"이 진언은 기억력을 키워주며, 불법을 지키려는 뜻을 잊지 않게 해줍니다. 수명을 늘려주며, 신체를 키워 주며, 병이 없게 해주며,

몸에 힘이 넘치게 해줍니다.  명성을 떨치게 해주며, 살림살이를 늘려주며 친구를 늘려주며, 제자를 늘려줍니다.

계율을 청정하게 지키게 해주며, 부처님의 가르침을 많이 듣게 해 줍니다. 지혜의 재물을 보시하게 해 주며, 오묘한 선정에 들게 해 주며,

굴욕을 잘 참아내는 힘을 키워 주며, 방편을 늘려 줍니다.  깨달음으로 이끄는 진리의 광명을 키워주며,

대승의 바른 길에 나아가게 해주며, 진리의 밝음을 키워 줍니다. 중생들을 성숙시키는 일을 도와주며, 대자대비를 키워줍니다.

모든 좋은 일을 키워주며, 부처님의 명호가 온 누리에 가득하게 해주며, 진리의 비가 온 누리를 빠짐없이 적시게 해줍니다.

모든 대지의 정기와 자양분을 키워주며, 모든 중생이 일을 잘 성취하도록 정기를 키워줍니다.

이 진언은 모든 지혜를 힘 있고 예리 하게 하여 번뇌의 적을 쳐부숩니다. 이 진언은 모든 존재의 티끌 번뇌를 씻어주고,

전쟁이 치성한 시대를 종식시키며, 흐리고 악한 뜻을 맑게 해주고,  오염된 땅과 물과 불과 바람을 맑게 해 줍니다.

이 진언은 흐리고 나쁜 맛을 맑게 해 주며, 흐리고 나쁜 기운을 맑게 해주며, 모든 소원을 충족시켜 주며, 모든 농사가 잘 되게 해줍니다.

이 진언은 모든 부처님께서 가호하시며 모든 보살님들이 가호하고 따라서 기뻐하십니다."

 

◈츰부다라니의 해석과 공덕◈

다라니의 거룩한 힘 중생고통 멸해주고,     다라니의 거룩한 힘 싸우는 곳 화합하며,  

다라니의 거룩한 힘 악한생각 고쳐주고,     다라니의 거룩한 힘 흐린 영육 밝혀주며,  

다라니의 거룩한 힘 탁한 것을 맑혀주고,      다라니의 거룩한 힘 삿된 기운 바꿔주며,

 다라니의 거룩한 힘 온갖 희망 채워주고,      다라니의 거룩한 힘 모든 사업 이뤄주며,  

다라니의 거룩한 힘 부처님과 보살님의      신묘한 가피력을 모두 입게 해주시네.

 

지장보살 대다라니 펼쳐지고 베푸는 곳 가피구름 몰려오고 가릉빙가 법음들로 가득하게 장엄 되네 우담바라 꽃비오고 공덕향기 넘쳐나니

 만 중생 들 기뻐하네, 높고 높은 부처님이 지장보살 대 원력을 찬탄 하네, 지장왕은 거룩한 대장부요 크나크신 스승이라

허공들이 일체 것을 수용하듯 지장왕도 일체중생 수용 하네, 한량없는 모든 복덕 두루 갖춰 중생에게 기쁜락을 베푸시고 모든 고통 없애주네,

끝이 없는 자비광명 가지가지 꽃비 내려 내 앞에서 공양터라  천상에의 제석천왕 부처님전 나아가서 지장왕의 참 공덕을 찬양하네,

지장보살 대성인은 칠보들이 가득담긴 창고이고,  걸림 없고 두렴 없는 부처님의 음성이며 중생들을 인도하는 보살들의 으뜸이라

겁 많은 자 위하여서 의지처 되고 밝은 달 같으셔서 길을 밝히며,  모든 생명 갈무린 대지와 같고 미혹들을 깨뜨림은 금강과 같네,

공덕가피 중생에게 능히 베풀고 온갖 갈등 물과 같이 흘려보내며 타는 번뇌 더위에는 얼음산 되고 중생의병 고치기는 의사와 같네,

하룻 동안 지장보살 이름 부르면 많은 세월 다른 보살 부른 것 보다 공덕들은 뛰어나서 속 성취 되네, 중생들이 과거세에 악업 때문에

전쟁질병 굶주림에 고통당할 때 능히 와서 모두 다 건져 주시네,  미한중생 어리석은 수레를 타고 서로서로 돌아가며 해치더라도

지장보살 공양하고 찬탄 하는 자 인욕심과 자비심에 머물게 하네,  복된 공덕 닦는 것을 즐거워하고 옳고 바른 인생관을 구하올 때에

그 소망들 모두다 이루게하네,  자식 얻고 의식주를 구하올 때에 지장보살 공양하고 찬탄하면은 구하는바 모든 소망 이루어지리,

여러 가지 번뇌갈등 덮힌 바 되어 열 가지의 악업들을 행 한자라도 지장보살 공양하고 찬탄하면은 번뇌악업 모두 다가 소멸되리라.

부처보살 염라왕에 옥졸들까지 가지가지 모습으로 나타나시어 어리석은 모든 중생 성숙케 하네

지장보살 참 공덕과 위신력들을 어찌 다 말로 표현 할 수 있으랴 그리하여 저희모두 지극한 정성으로 지장보살님께 엎드려 절합니다.

나무 남방화주 대원본존 지장보살 마하살. 나무 남방화주 대원본존 지장보살 마하살. 나무 남방화주 대원본존 지장보살 마하살._()_

 

高敞 禪雲寺 兜率庵 金銅地藏菩薩坐像(고창 선운사 도솔암 금동지장보살좌상) :  보물  제280호     시대 = 고려

 

고창 선운사 도솔암 금동지장보살좌상(高敞 禪雲寺 兜率庵 金銅地藏菩薩坐像)은 청동 불상 표면에 도금한 불상으로 선운사 도솔암에 모셔져 있다. 

머리에는 두건(頭巾)을 쓰고 있는데, 고려 후기의 지장보살 그림에서 보이는 양식이다.

이 보살상은 선운사 금동보살좌상(보물 제279호)과 두건을 쓴 모습, 목걸이 장식, 차분한 가슴표현 등에서 서로 닮았지만,

이마에 두른 띠가 좁아지고 귀를 덮어내리고 있지 않으며 용모 등에서 수법이 다르다.

일반적으로 지장보살은 다른 불상들과 달리 머리에 두건을 쓰고 있으며, 지옥에서 고통받는 중생을 구제한다는 의미를 가진다.

둥근 얼굴은 단아한 인상이며, 목에서 어깨로 내려가는 선은 부드럽다. 상체나 하체 모두가 균형을 이루고 있으며,

띠를 매고 배가 들어가는 등 사실적으로 표현하였다.

양 어깨를 감싸고 있는 두꺼운 옷은 배부분에서 띠매듭을 지었고, 다리에는 간략한 몇 가닥의 옷주름을 나타내고 있다.

앉은 자세는 오른발을 왼무릎에 올린 모양으로 발을 실감나게 표현하였다. 오

른손은 가슴에 들어 엄지 손가락과 가운데 손가락을 맞대고 있으며,  왼손은 배에 들어 작은 수레바퀴 모양의 물건을 잡고 있다.

고려 후기의 불상양식을 충실히 반영하고 있는 이 보살상은 우아하고 세련된 당대 최고의 작품이다.

<문화재청의 글>

 

 

高敞 禪雲寺 兜率庵 金銅地藏菩薩坐像(고창 선운사 도솔암 금동지장보살좌상) :  보물  제280호     시대 = 고려

오른손은 가슴 부분에 들어 엄지와 중지를 맞댄 중품인(중품인)을 취하고 왼손은 가슴과 배 중간쯤에 들어 법륜(法輪)을 잡고 있는데,

이는 육도중생을 구제한다는 의미로서 보주(寶珠) · 석장(錫杖) · 법륜(法輪)등의 지물을 들고 있는 지장보살의 일반적인 특성을 표현한 것이다.

앉은 자세는 오른발을 왼 무릎에 올린 모양으로 발을 실감나게 표현하였다. 어깨나 소매 · 무릎등에 몇 가닥의 간단한 주름만을 표현하여,

상에 나타난 선묘는 유려하게 휘어지는 맛과 함께 단순 · 명쾌한 특징을 지니고 있다.

이 보살상은 고려 후기의 불상양식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우아하고 세련된 당대 최고의 걸작이라 할 수 있다.

 

도솔천 내원궁(兜率天 內院宮)에 봉안되어 있는 고려 후기의 금동지장보살좌상으로 높이는 96.9cm이다.

대좌(臺座)와 광배(光背)가 없어지고 불신(佛身)만 완전하게 남아 있는데, 상체가 늘씬하고 당당하여

고려 후기의 장곡사 금동약사여래좌상(보물 제 337호)이나 문수사 금동불좌상과 흡사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길상좌(吉祥坐)를 한 탄력적인 하체나 부드럽고 단아한 어깨선, 상 · 하체의 비례등이 전체적으로 균형잡힌 형태를 지니고 있다.

머리에는 두건을 썼는데, 이마를 감싼 후 귀 뒤로 넘겨서 어깨까지 천을 늘어뜨린 모습이다.

 

이러한 형태의 두건을 쓴 지장보살(被巾地藏[피건지장])의 모습은 고려시대에 널리 유행하였던 도상적 특징으로 현존하는 많은

고려불화에서 그 예를 볼 수 있다.  얼굴은 둥글고 단아한 인상을 주고 있으며, 전체적으로 미목구비등을 세부적으로 꼼꼼하게 표현하였다.

양 귀에는 만개한 화문(花紋)을 따로 연결하여 귓볼에 묶은 이식(耳飾)을 착용하고 있어

고려시대의 일반작인 보살상이 원형 고리에 길게 늘어뜨려 매달고 있는 것과는 사뭇 다른 특이한 형태라 하겠다.

<도솔암 글>

 

 

禪雲寺 兜率庵 金銅地藏菩薩坐像(선운사 도솔암 금동지장보살좌상)

신묘장구대다라니를 하고 계시는 스님

 

地藏菩薩坐像(지장보살좌상)

고려후기의 불상 가운데 최고의 걸작으로 꼽히는 이 불상은 사후세계의 주존인 지장보살을 조각한 것이다.

크기나 형태는 대웅전에 모신 보살상과 비숫하지만 조각수법은 훨씬 사실적이다.

균형 잡힌 얼굴은 단정하면서도 우아한 인상을 주며 어깨의 곡선도 부드럽게 처리되어 유연한 모습을 보여준다.

승형(僧形)으로 표현되는 일반적인 지장보살과는 달리 두건을 쓰고 있는 점은 고려시대에 널리 유행하던 형식이다.

 

 

    

山神閣(산신각)

도솔천 내원궁의 뒤편에 자리한 산신각에는 특별한 산신이 모셔져 있다.

산신각의 주인공은 도솔암을 비롯한 선운사, 참당암 등 도솔산 내의 사암(四庵)을 창건한 검단선사와 의운국사이기 때문이다.

이 두 분의 스님은 도솔산에 살고 있던 도적들을 교화하고 가난한 중생들에게 삶의 터전을 마련해주어 삶의 길을 열어 주셨다.

이처럼 지역민에게 한없이 자애로웠던 두 스님을 열반후에도 도솔산 산신으로 남아 중생들의 염원과 기도소리를 듣고

소원을 성취해 주시는 성현으로 남아 계신다.

산신이신 두 성승의 무릎에 안기듯 버티고 있는 호랑이의 모습 역시 위엄이 있다.

산신각에 앉아 탱화를 바라보면 호랑이 눈에서 생명력을 느낄 수 있다.

 

 

 도솔산 내의 사암(四庵)을 창건한 검단선사와 의운국사

 

 

 도솔산 산신각의 검단선사와 의운국사

 

 

 

 

高敞 禪雲寺 東佛庵址 磨崖如來坐像(고창 선운사 동불암지 마애여래좌상)  :  보물  제1200호,     시대 = 고려

선운사 도솔암으로 오르는 길 옆 절벽에 새겨진 마애여래좌상으로, 머리 주위를 깊이 파고 머리 부분에서 아래로 내려가면서 점차 두껍게 새기고 있다.

평판적이고 네모진 얼굴은 다소 딱딱하지만 눈꼬리가 치켜 올라간 가느다란 눈과 우뚝 솟은 코, 일자로 도드라지게 나타낸 입술 등으로

얼굴 전체에 파격적인 미소를 띠고 있다.  목에는 3개의 가느다란 주름이 있기는 하지만 상체와 머리가 거의 맞붙어서,

상체 위에 머리를 올려 놓은 것처럼 보인다. 상체는 사각형인데 가슴이 넓고 평판적이어서 양감없는 형태를 보여주고 있다.

옷은 양 어깨를 감싸고 있으며 옷주름은 선을 이용해 형식적으로 표현하였고, 평판적인 가슴 아래로는 치마의 띠매듭이 선명하게 가로질러 새겨져 있다.

무릎 위에 나란히 놓은 두 손은 체구에 비해서 유난히 큼직하고 투박하여 사실성이 떨어지는데 이는 월출산에 있는 마애여래좌상과 비슷한

고려 특유의 마애불 양식이다. 층단을 이루어 비교적 높게 되어 있는 대좌는 상대에 옷자락이 늘어져 덮여 있으며,

하대에는 아래를 향하고 있는 연꽃무늬를 표현하였다.

이 불상은 고려 초기의 거대한 마애불 계통 불상으로 크게 주목받고 있으며,

특히 가슴의 복장에서 동학농민전쟁 때의 비밀기록을 발견한 사실로 인해 더욱 주목받고 있다.

<문화재청의 글>

 

 

高敞 禪雲寺 東佛庵址 磨崖如來坐像(고창 선운사 동불암지 마애여래좌상)

도솔암 서편 칠송대(七松臺)에 새겨진 높이 13m, 너비 3m에 이르는 거대한 마애불상이다.

전설에 의하면 백제 위덕왕(재위 554년~597년)이 검단선사(黔丹禪師)에게 부탁하여 암벽에 불상(마애불[磨崖佛])을 조각하고

동불암이라는 공중누각을 짓게 하였는데, 조선 영조때 무너졌다고 한다.

불상은 낮은 부조로연화대좌 위에 결가부좌한 모습이며, 머리는 뽀쪽한 육계가 있다.

 

방형(方形)이 가까운 평면적인 얼굴에 눈은 가늘고 눈꼬리가 치켜 올라갔으며, 우뚝 솟은 코에 앞으로 내민 일자형의 두툼한 입술이 소박하고

익살스러운 미소를 띤 것처럼 보인다. 귀는 어깨에 닿을 정도로 길게 늘어져 있고, 목은 표현하지 않아서 상체 위에 머리를 올려놓은 것 처럼

표현되어 있다.

 

상체는 방형에 가슴이 넓고 평면적이며, 결가부좌한 넓은 하체에 손과 발 역시 체구에 비해 큼직큼직하다.

투박한 두 손은 활짝 편 채 아랫배에 가지런히 붙여져 있다.

불의(佛衣)는 통견(通肩)으로 두꺼운 편은 아니나 옷주름선이 선각으로 형식화되어 있고, 평평한 가슴 아래로 선명하고 단정한

군의(裙衣)의 띠 매듭이 가로질러 새겨져 있다. 대좌는 비교적 높은 2단으로 되어 있는데,

상대(上臺)에는 옷자락이 늘어져 덮여 있고 하대(下臺)는 간략한 연꽃문의 연화좌로서 전반적으로 마멸이 심한 편이다.

 

광배는 표현되지 않았고, 가슴에는 사각형으로 큼직하게 복장(服藏) 구멍을 나타내었다. 머리 위에는 사각형의 구멍이 여러 개 뚫려 있고

부러진 서까래가 꽂혀 있는 것도 있는데, 이는 불상을 보호하기 위해 지붕만 있는 누각 형태의 목조 전실(前室)을 마련하였던 흔적으로 보인다.

이 불상은 고려 초기의 거대한 마애불 계통 불상으로 크게 주목받고 있다. 사람들은 이 마애불을 미륵불이라 부르고 있는데

불상의 배꼽에 신기한 비결(秘訣)이 숨겨져 있다는  전설이 전하여, 동학농민전쟁 무렵에 동학의 주도세력들이 미륵의 출현을 내세워

민심을 모으기 위해 이 비기를 꺼내가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高敞 禪雲寺 東佛庵址 磨崖如來坐像(고창 선운사 동불암지 마애여래좌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