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남북도 = 心 산사 길없는길

익산 문수사

백련암 2016. 4. 1. 16:01

天壺山 文殊寺(천호산 문수사)

전라북도 익산시 여산면 호산리 69번지, 천호산 자락에 위치한 문수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 17교구 본사 금산사(金山寺)의 말사로서

신라 헌강왕 7년(881년) 혜감(慧鑑)이 청건한 역사를 간직하였고 조선시대의 1차 중건을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오랜 세월 흉폐를 거듭하면서  절 앞마당에 서있는 중건비와 삼성각 옆의 부도가 그 흔적을 말하여줄 뿐이다.

그러나 문수사가 있는 익산  천호산 자락은 예로부터 문수 · 보현 · 관음의 3대 보살이 나투신  성지로 그 위엄이 대단했었다고 한다.

문수사는 문수보살,  백운암은 보현보살,  백련암은 관세음보살을 주불로 모셔 왔다고 한다.

 

1961년 김종대(金鐘大)가 세운 사적비에 따르면 혜감이 창건한 뒤 조선 초에 함허(涵虛)가 중건하였으며, 19세기 후반 허주(虛舟)가 중수하였다.

일제강점기에는 금엽(錦葉)이 중수하였고, 1965년 김종대가 당시 군수 조영호(趙榮浩)등의 도움으로

대웅전과 명부전 · 삼성각 · 요사 등을 중창하였다.

현재는 삼성각에는 산신과 독성 · 칠성을 탱화로 모시고 있다.  그 뒤 1990년 말에 다시 중수하여 오늘에 이른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대웅전과 삼성각 · 명부전 · 요사채 등이 있다.

이중 삼성각은 1994년까지 대웅전으로 쓰이던 건물로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 89호로 지정되었다.

내부에는 목조 아미타불좌상이 있었으나 1990년대 말에 요사로 잠시 옮겼다.

현재의 극락전은 1994년에 새로 지은 것이다. 이때 아미타부처님을 극락전으로 모시었고 협시로 관세음보살 대세지보살을 모시었으며,

1932년에 제작된 후불탱화와 신중탱화가 있다.

 

대웅전에는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을 중심으로 5종의 탱화와 높이 27cm의 목조 독성상 목사자고대등이 있다.

독성상은 조각 솜씨가 뛰어나고, 명부전은 맞배지붕 건물로서

내부에는 지장보살 1구와 시왕상(十王像) · 인왕상(人王像) · 동자상(童子像) 등이 있다.

 

 

문수사 전경

극락전과 뒤로 보이는 삼성각 그리고 요사채이다.

 

 

 

 

極樂殿(극락전)

여산면 호산리 69번지에 있는 문수사의 목조여래좌상 1구는 2002년 12월 14일 익산시 향토유적 제9호로 지정되었습니다.

 

내부에 있는 여래좌상은 극락전에 봉안된 삼존불 중 본존불로서, 원래는 대웅전에 봉안하였으나 극락전을 새로 지어 모시게 되었습니다.

좌우에 있는 협시보살은 최근에 제작한 것이라고 한다.

 

 

阿彌陀 三尊像(아미타 삼존상)과 後佛撑畵

극락전에는 아미타 후불탱화와 신중탱화가 걸려 있는데 2점 모두 2000년에 새로 조성하여 봉안한 것이다.

그 전 극락전에는 1932년에 조성된 아미타후불탱화와 신중탱화가 걸려있었는데,

탱화의 보존을 목적으로 현제 금산사성보박물관으로 옮겨져 보관중이다.

 

 

阿彌陀 三尊像(아미타 삼존상)

아미타불과 좌우 협시로 관세음보살 · 대세지보살이 모셔져 있다.

 

 

木造 阿彌陀如來坐像(목조 아미타여래좌상)

안정감있고 균형잡힌 목조여래좌상은 나무로 된 불상에 칠을 하였는데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 일부 탈락되었으나 보전 상태는 비교적 양호합니다.

머리는 오른쪽으로 들어 소라모양을 한 나발이며, 부처님의 정수리에 볼록 튀어나온 부분인 육계는 조금 낮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사각형의 넓적한 얼굴과 오뚝한 콧날, 넓적한 콧망울, 굳게 다문 입 등은 조선 후기 17세기 불상의 특징을 지니고 있습니다.

수인은 무릎 위에서 손가락을 마주 잡고 있는데, 이러한 현상은

일반적인 석가여래상이나 아미타여래상의 모습과는 다른 것이어서 구분하기 어렵습니다.

 

신체는 안정감있고 균형잡힌 불신을 보여주며,

양어깨에 걸친 통견의 법의가 양쪽 팔에 걸쳐서 결과부좌한 무릎 아래까지 흘러내리고 있습니다.

가슴 가운데에서 무릎까지 넓은 군의와 군의대가 있고 주름지듯 겹쳐진 옷자락도 눈에 띕니다

 

수인은 무릎 위에서 손가락을 마주 잡고 있는데, 이러한 현상은

일반적인 석가여래상이나 아미타여래상의 모습과는 다른 것이어서 구분하기 어렵습니다.

 

 

神衆檀(신중단)

극락전에는 아미타 후불탱화와 신중탱화가 걸려 있는데 2점 모두 2000년에 새로 조성하여 봉안한 것이다.

그 전 극락전에는 1932년에 조성된 아미타후불탱화와 신중탱화가 걸려있었다.  현재 금산사성보박물관에 있음

 

 

극락전 내부에 그려져 있는 지장보살

 

 

觀世音菩薩(관세음보살)

천변만화하는 형태를 띠므로 보문시현(普門示現)이라고 하며 33신(身)이 있다고 한다.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과 함께 아미타불의 협시(脇侍)로서 태장계(胎藏界) 만다라의 중대(中臺) 팔엽원(八葉院)의 서북방에 거처하면서

동시에 연화부원(蓮華部院)의 주존불이기도 하다.

 

왼손에 들고 있는 연꽃은 모든 중생이 본래부터 갖추고 있는 불성(佛性)을 나타내고,

 그 꽃이 핀 것은 불성이 드러나서 성불한 것을 뜻하며,

아직 피어나지 않은 꽃봉오리는 번뇌망상에 물들지 않고 장차 피어날 불성을 각각 상징한다.

 

『법화경(法華經)』 보문품에 나오는 ‘관음’은 “고통에 허덕이는 중생이 일심으로 그 이름을 부르기만 하면

즉시 그 음성을 관하고 해탈시켜 준다..”라고 되어 있다.

 

불교에서 구원을 요청하는 중생의 근기에 맞는 모습으로 나타나 대자비심을 베푸는 보살.

 

 

관세음보살은 자비를 상징하는 보살로서 보관의 정수리에 아미타불의 화현을 모시고 다니며,

연꽃, 감로수병 등을 손에 들고 있는 모습으로 십일면 또는 천수천안의 모습도 있습니다.

 

아미타불의 현신으로 보는 이의 정신 수준에 따라 33가지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중생을 위험으로부터 구제하는 보살로 ‘모든 곳을 살피는 분’이나 ‘세상의 주인’이라는 뜻을 가졌다. 일반인에게 가장 친숙하며 널리 숭상된다.

모든 중생이 해탈할 때까지 자신은 성불하지 않겠다고 맹세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관세음보살의 공덕과 기적은 〈관음경>, 〈법화경〉 등 많은 불교 경전에 나타난다.

이 경전들은 대중들 사이에 널리 보급되어 있는 경전이기도 하다.

 

우리나라에서는 6세기 무렵 백제와 신라에서 신앙의 대상으로 뚜렷한 모습을 보이게 되었다.

통일신라 초기에는 주로 현실적인 이익을 위한 성격을 띠지만, 관세음보살이 서방정토에 왕생하는 것을 돕는다고도 보았다.

고려 · 조선을 거치면서 대중과 가장 친근한 신앙으로 정착되었다.

 

大勢至菩薩(대세지보살)

아미타불(阿彌陀佛)의 오른쪽에 협시(脇侍)하는 보살

협시보살 ·대세 ·세지(勢志) ·득대세지(得大勢志)보살 등으로도 불린다. 마하살타마바라발다(摩訶薩馱摩婆羅鉢多) · 마하나발(摩訶那鉢)

등으로 음사하며, 왼쪽의 협시불인 관세음보살과 함께 아미타삼존불(三尊佛)을 이룬다.

서방 극락세계에 있는 지혜 및 광명이 으뜸인 보살이다.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에는 지혜의 빛으로 널리 중생을 비추어 삼도(三途)를 떠나 무상(無上)한 힘을 얻게 하고,

발을 디디면 삼천세계와 마군(魔軍)을 항복시키는 큰 위세가 있다고 하였다.

 

그 형상은 정수리에 보병(寶甁)을 이고 천관(天冠)을 썼으며, 염불하는 수행자를 맞을 때는 항상 합장하는 모습이다

 

 

大勢至菩薩(대세지보살)

 

 

文殊寺大雄殿(문수사 대웅전) :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 89호

문수사는 천호산 기슭에 있는 절로 통일신라 헌덕왕 7년(815)에 혜감대사가 세웠다.

대웅전은 앞면 3칸·옆면 1칸 규모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으로 꾸몄다.

안쪽에는 나무로 만든 아미타여래좌상 1구, 탱화 5점, 목조사자상 1구 등을 모시고 있다.

 

 

文殊寺大雄殿(문수사 대웅전) :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 89호

"문수사 대웅전"이 지금의 삼성각이다 이 건물은 1994년 문화재로 지정될 당시 하나의 건물을 한쪽은 대웅전으로,

다른 한 쪽은 삼성각으로 각기 다른 용도로 사용하였는데, 대웅전 이름으로 지정되었던 것이다.

이후 절에서 1994년에 보수를 하고 나서 삼성각으로만 사용하고 있다.

원래 상성각에는 목조로 조성된 아미타여래좌상 1구와 목조 독성상이 봉안되어 있었는데, 독성상은 근래에 분실되었으며,

아미타여래좌상은 신축된 극락전에 봉안하였다.

 

현재 내부에는 산신상과 함께 칠성탱 · 독성탱 · 산신탱이 사진으로 봉안되어 있다. 산신탱화는 화기를 통해 1914년에 그린 것임을 알 수 있으며,

독성탱화는 "임자사월일(壬子四月日)"이라는 간기만을 적고 있으나 양식적 특징으로 보아 1912년에 해당되는 것으로 보인다.

칠성탱은 1936년에 제작된 것이다.  이 3점의 불화는 극락전의 2점의 탱화와 함께 금산사성보박물관에 보관 중이다.

 

 

독성탱화는

"임자사월일(壬子四月日)"이라는 간기만을 적고 있으나 양식적 특징으로 보아 1912년에 해당되는 것으로 보인다.

 

 

칠성탱은 1936년에 제작된 것이다.

 

 

山神撑과 山神像(산신탱과 산신상)  

  이 3점의 불화는 극락전의 2점의 탱화와 함께 금산사성보박물관에 보관 중이다.

산신탱화는 화기를 통해 1914년에 그린 것임을 알 수 있다.

 

 

삼성각 천정

 

 

 

 

문수사 장독대

 

 

비구니 스님들이 계시는 만큼 항아리들이 정갈하다.

 

 

고종 44년(1907년) 화재로 본전(本殿)이 소실되고

오직 일영당(日影堂) 충운(忠雲)과 막무당(莫武堂) 월영(月影) 두 대사(大師)의 부도만 남게 되었다.

 

 

막무당(莫武堂) 월영(月影) 부도 와  일영당(日影堂) 충운(忠雲) 부도

 

 

일영당(日影堂) 충운(忠雲) 부도

 

 

막무당(莫武堂) 월영(月影) 부도

이부도는 기록에 의해 쓰고 있지만 모두가 마모가 되어 막무당 월영이란 글씨를 찾으려해도 보이질 않는다.

 

 

아마도 이 두 곳에 부도가 있었던 것을 위로 올린것 같다.

 

 

원효대사의 해골물 벽화이야기

원효대사(617~686)는 신라말기의 고승으로 압량군(押梁郡) 남불지촌(南佛地村) (지금의 경북 경산)에서 태어났다.

속명(俗名)은 설 서당(薛 誓幢)대사는 출가한 이후 특별한 스승이 없이도 쉽게 경전에 통달하여 이름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일찍이 의상대사와 함께 당나라로 구법의 길을 떠났다. 어느 날 날이 저물어 산중의 무덤사이에서 밤을 보내게 되었다.

원효는 잠을 자다 몹시 갈증이 나서 일어나 물을 찾던 중 바가지에 물이 있어 단숨에 마시고는 다시 잠이 들었다.

다음날 아침 일어나 어젯밤에 마셨던 물을 찾으니 물바가지는 보이지 않고 사람의 해골이 있는 것이 아닌가!

놀라서 해골을 들여다보니 거기에는 썩은 빗물이 고여 있었다.

원효는 어제 밤에 달게 마셨던 물이 바로 이것이었다는 생각이 들자 갑자기 속이 메스꺼워져 토하고 말았다.

‘모르고 마실 때에는 달콤했던 물맛이 해골에 고인 빗물이었다는 것을 알고 난 후에는 더럽다고 구역질을 느끼다니

모든 것은 마음에 달려있구나’ 이렇게 생각하다 활연 대오하였다.

 

心生則種種法生 (심생칙종종법생)    心滅則髑髏不二 (심멸칙촉루불이)

三界唯心萬法唯識 (삼계유심만법유식)    心外無法胡用別求 (심외무법호용별구)

마음이 일어나면 갖가지 법이 생겨나고,            마음이 사라지면 해골의 물과 깨끗한 물이 둘이 아닌 법

삼계가 오직 마음이요 만법이 오직 인식임을        마음 밖에 따로 법이 없으니 어찌 따로 진리를 구하리요.

 

다음날 “이미 道를 구하였으니 당나라까지 가서 법을 구할 것이 없다”라고 하며 의상대사와 헤어졌다.

신라로 돌아온 원효는 세상 사람들에게 불법을 전하며,

요석공주와의 인연으로 설총을 낳은 이후 환속하여 스스로 소성거사(小性居士)라 이르며 대중교화에 나섰다.

불쌍하고 배우지 못한 사람들에게도 부처님의 가르침을 쉽게 믿을 수 있도록 했다. 그리고 저자거리를 떠돌며

노래와 춤으로 중생들의 아픔을 어루만져주었는데 이는 중생을 위한 무애(無碍)행이었으며 자비를 실천한 보살행이었다.

 

대사는 존경받던 고승이요 세계적 저술가로서 80여부 200여권의 방대한 저서를 남겼다 (현재 20부 22권이 남아있다.)

또한 불교계의 여러 편견으로 비롯되는 논쟁들을 서로 화합하여 회통시키는 화쟁사상을 주장했던 위대한 사상가이기도 했다.

원효대사!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 우리들이 만나고 싶고, 닮고 싶은 보살의 한분이시다.

 

 

자장율사의 벽화 이야기

선덕여왕때 깊은 산중 자장율사가 정진하고 있었습니다. 나무 열매 풀 뿌리로 허기를 달래고 흐르는 물로 갈증을 면하고

그리하여 자장율사는 하루가 다르게 정진에 깊이를 더해 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선덕여왕의 명으로 신하일행이 나타나서 자장율사에게 말하기를 나라에서 정승으로 삼으려고 부르십니다.

자장율사는 이미 출가한 몸인지라 국사(國事)에 나아갈 수 없는 형편임을 전해주시오, 하고 그들을 돌려 보냈다.

그러나 선덕여왕은 뜻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그때 마다  신하 일행은 자장율사를 찾아가서 왕명(王命)을 전하였으나, 여전히 성과가 없었습니다.

거듭되는 권유에도 거절당하자 신하는 칼을 뽑아 들고 왕명을 어길 참인가, 아니면 순순히 입궐(入闕)하여 그동안의 잘못을 뉘우치고 

왕명을 받들것인가  그러나 자장율사는 얼굴표정을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오령 일일지계이사(吾寧一日持戒而死) : 내 하루를 계를 지키다 죽을지라도

불원 백년파계이생(不圓百年破戒而生) : 백년을 파계하고 살기 원치 않노라,   

하고 읊은 다음 엎드려 목을 내밀었답니다. 

 

신하가 어찌 할 수가 없어 입궐하여 선덕여왕에게 전후 사정을 고하자 선덕여왕은 자장율사가 수도에 전념토록 적극 후원을 아끼지 않았으며,

후일에는 왕궁에 모셔다가 대승경론을 강설하도록 하는가 하면,  대국통(大國統)으로 삼아 계율을 맡아 처리하도록 하여

불교계의 기틀을 다지도록 하였다고 합니다.

 

 

冥府殿(명부전)

수리중이라 내부를 볼 수 가 없었다.

 

 

문수사 삼성각(전라복도 문화재 자료 제89호)

정면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법당 내부에 목조아미타불 좌상이 모셔져 있었는데 1990년대에 극락전으로 옮기게 되었다.

이 삼성각은 1994년까지 대웅전으로 쓰이던 곳이다.

 

 

 

문수사의 축대가 오랜세월을 말해주고 있다.

 

 

요사채 뒤로 대나무가 푸르게 울창한 숲을 이르고 있다.

 

 

요사채

 

 

 

 

해 묵은 나무들에서 어렴풋이 문수사의 세월을 느낄 수 있을 것같다.

 

 

天壺山 文殊寺 事跡碑(천호산 문수사 사적비)

내용

익산시 여산면 천호산(天壺山) 아래에 위치한 문수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 17교구 본사 금산사(金山寺) 말사로 전라북도 지정 전통사찰 제 49호이다.

신라 헌덕왕 7년(815년) 혜감(慧鑑)대사가 창건하였으며, 여러 차례 흥망성쇠를 거듭하다가 조선 정조 원년(1399년) 함허(函虛)선사가 중창하였다.

고종 26년(1889년) 허주(虛舟)대사가 중수(重修)하였으나 고종 44년(1907년) 화재로 본전(本殿)이 소실되고

오직 일경당(日影堂) 충운(忠雲)과 막무당(莫武堂) 월영(月影) 두 대사(大師)의 부도만 남게 되었다.

 일제강점기에는 금엽(錦葉) 스님이 전각(殿閣)을 재창(再創) 하였으나 세월이 지나 기둥이 무너지려하므로 1965년 주지 종대(鐘大)스님이

본전(本殿)을 개건하였다. 그 후 1994년 주지 원공(圓空)스님이 정부및 지자체의 지원(支援)과 신도들의 시주공덕(施主功德)으로 쓰러져가던

명부전(冥府殿)을 다시 짖고 대웅전(大雄殿)을 보수하였으며, 1996년 도량을 확장 정비하여 선방(禪房)과 요사채를 지었다.

1997년 낡은 인법당(因法堂)을 헐고 그 자리에 지었다.

 

 

회향문

願以此功德 普及於一切 我等與衆生 當生極樂國 同見無量壽 皆共成佛道

원이차공덕 보급어일체 아등여중생 당생극락국 동견무량수 개공성불도

2013년 11월 일  주지 원공합장

 

 

명부전과 공양간

 

 

文殊寺 重建碑(문수사 중건비) 

  뒷면에는 功德主芳名記(공덕주방명기)가 쓰여 있다.

 

 

文殊寺 重建碑(문수사 중건비)

앞면 : 천년의 역사를 알 수 있는 것은 이 중건비에 쓰여져있는 글 뿐이다.

 

 

 

백구 두마리가 문수사 입구를 지키고 있어 낯선 사람을 보면 본성적으로 짖어본다.

잠시 그러다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