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남북도 = 心 산사 길없는길

고창 선운시 = 동백꽃으로 유명한 그 곳

백련암 2016. 3. 30. 18:58

 

 

 

 

 

兜率山 禪雲寺(도솔산 선운사)

선운사는 전라북도 고창군 아산면 삼인리 도솔산에 자리한 대한불교 조계종 제24교구 사찰이다. 도솔산은 선운산(禪雲山)이라고도 하며,

조선 후기 선운사가 번창할 무렵에는 89개의 암자와 189개에 이르는 요사(寮舍)가 산중 곳곳에 흩어져 있어 장엄한 불국토를 이루기도 하였다.

도솔산 북쪽 기슭에 자리 잡고 있는 선운사는 김제의 금산사(金山寺)와 함께 전라북도의 2대 본사이다.

 

선운사의 창건에 대해서는 신라 진흥왕이 창건했다는 설과 백제 위덕왕 24년(577)에

고승 검단(檢旦, 黔丹)선사가 창건했다는 두 가지 설이 전하고 있다.

그러나 당시 이곳은 신라와 세력다툼이 치열했던 백제의 영토였기 때문에 신라의 왕이 이곳에 사찰을 창건하였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따라서 시대적ㆍ지리적 상황으로 볼 때 검단선사의 창건설이 정설인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검단스님의 창건과 관련해서도 여러 가지 설화가 전해오고 있다. 본래 선운사의 자리는 용이 살던 큰 못이었는데 검단스님이 이 용을 몰아내고

돌을 던져 연못을 메워나가던 무렵, 마을에 눈병이 심하게 돌았다. 그런데 못에 숯을 한 가마씩 갖다 부으면 눈병이 씻은 듯이 낫곤 하여,

이를 신기하게 여긴 마을사람들이 너도나도 숯과 돌을 가져옴으로써 큰 못은 금방 메워지게 되었다. 이 자리에 절을 세우니 바로 선운사의 창건이다.

검단스님은 "오묘한 지혜의 경계인 구름[雲]에 머무르면서 갈고 닦아 선정[禪]의 경지를 얻는다" 하여 절 이름을 '禪雲'이라 지었다고 전한다.

 

또한 이 지역에는 도적이 많았는데, 검단스님이 불법(佛法)으로 이들을 선량하게 교화시켜 소금을 구워서 살아갈 수 있는 방도를 가르쳐주었다.

마을사람들은 스님의 은덕에 보답하기 위해 해마다 봄ㆍ가을이면 절에 소금을 갖다 바치면서 이를 '보은염(報恩鹽)'이라 불렀으며,

자신들이 사는 마을이름도 '검단리'라 하였다.  선운사가 위치한 곳이 해안과 그리 멀지 않고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곳에서 염전을 일구었던 사실 등으로

미루어보아, 염전을 일구어 인근의 재력이 확보되었던 배경 등으로 미루어 검단스님이 사찰을 창건한 것임을 알 수 있다.

 

 현존하는 전각은 대웅보전과 관음전영산전팔상전명부전산신각만세루천왕문이 있고, 대웅보전 앞에는 6층 석탑과 괘불대

당간지주석주 등이 있으며,   산내암자로는 참당암(懺堂庵)ㆍ도솔암(兜率庵)ㆍ동운암(東雲庵)ㆍ석상암(石上庵) 등 네 곳이 있다.

 

선운사 대웅보전은 보물 제290호로 지정되어 있고, 영산전목조삼존불상ㆍ육층석탑ㆍ범종ㆍ만세루ㆍ백파율사비 등이 지방문화재로 등록되어 있으며,

이외에도 사내에 있는 선운사박물관에는 금동지장보살좌상(보물279)을 비롯한 고려불상, 조선시대 탱화, 석씨원류』ㆍ『선운사 사적기

문화재가 전시되어 있으며, 경내의 동백나무숲ㆍ장사송ㆍ송악은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一柱門(일주문)

사찰에 들어가는데 처음 지나는 문이 일주문입니다.  일주문의 명칭은 기둥이 한 줄로 늘어서 있다고 하여 붙여진 것입니다.

일주문의 기둥이 한 줄로 늘어선 것은 세속의 번뇌로 흩어진 마음을 사찰에 들어섬으로써 마음을 하나로 모아 진리의 세계로 들어간다는 상징적 의미,

즉 일심(一心)을 뜻합니다. 바꾸어 말하면 이 언덕에서 저 언덕으로 가는 첫 번째 관문인 것입니다.

이 문을 경계로 문 밖을 속계(俗界)라 하고 문안을 진계(眞界)라 하며, 일주문을 들어설 때 일심에 귀의한다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저 문 밖으로 나가면  부처님의 품(진계[眞界])에서 중생의 세상인 속계(俗界 즉 속세)로 가게된다.

 

 

 

 

一柱門(일주문) = 兜率山 禪雲寺(도솔산 선운사) 현판이 있다.

도설이란 미륵불이 있는 도솔천궁을 가르키며, 선운이란 구름 속에서 참선한다는 뜻이다.

현판글씨는 일중 김충현(1921년~2006년)선생 작품이다.

한국근대 서예를 대표하는 일중은 특히 사찰이나 정자의 현판에 글씨를 많이 남겼다고 하며 선운사도 그 중 하나다.

 

 

    

禪雲寺(선운사)라고 쓰여진 다리 옆에는 진리의 말씀이 쓰여있다.

 

진리의 말씀

홀로 행하고 게으르지 말며 비난과 칭찬에도 흔들리지 말라,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와 같이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과 같이

흙탕물에 더럽히지 않는 연꽃과 같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숫타니파타 = 도솔산 선운사

 

 

天王門(천왕문)

사찰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많은 문을 거쳐야 한다. 그 순서를 살펴보면 일주문, 금강문, 천왕문, 해탈문, 불이문 순서이다.

그 중 천왕문에서는 네 분의 사천왕을 봉안하고 있다. 사천왕(四天王)은 인도의 고전인<리그베다>에 등장하는 천신으로 불교에 귀의하여

불교의 수호신이 되었다.

수미산 정상에 위치한 도리천 제석천의 명을 받아 수미산(須彌山) 중턱에서 각각 그들의 권속들과 살면서

동남서북의 네 방위를 지키며 불법 수호와 사부대중의 보호를 맡게 되었다.

 

사천왕과 그 부하 권속들은 천하들 두루 돌아다니면서 세간의 善惡을 늘 살핀다고 한다. 그리고 그 결과를 매월 8일에는 사천왕의 사자(使者)들이,

14일 태자(太子)가, 15일 사천왕 자신이 제석천(帝釋天)에게 보고하는 것이 임무의 하나가 되고 있다.

 

현재 이 사천왕은 천왕문에 많이 봉안되지만, 달리 불보살의 후불탱화에도 외호신으로 묘사되고 있다.

사천왕(四天王)은 손에 지니고 있는 지물(持物)이 경전에 따라 각각 다르게 나타나서 사찰마다 차이가 난다.

 

 

北方 多聞天王(북방 다문천왕)       지물 = 탑, 창(방)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재복 부귀를 맡아 불법을 지키겠다는 서원을 세움.  어리석음의 어둠 속에서 방황하는 중생을 인도한다.

 

북방을 지키는 다문천왕(多聞天王)은 달리 비사문천왕(毘沙門天王)이라고도 하는데,

항상 부처님의 도량을 지키면서 부처님의 설법을 듣는다 하여 다문이라고 하며, 그의  권속으로 야차와 나찰을 거느리고 있다.

 

 

 

 

    

사천왕의 발 밑에 깔린 생령좌(生靈座)들

 


北方 多聞天王(북방 다문천왕)

지물로는 왼손에 창(혹은 방)을, 오른손에는 불탑(佛塔)을 들고 있다.

 

다문천왕은 수미산 중턱의 북쪽 영역을 관장하는 천왕(天王, Deva)입니다. 범어로는"(Vaiśravana, 비사문천[毘沙門天])"라고 하며,

"Vai(비)"는 두루(遍, 普)의 뜻을 가지고,  "Sravana(사문천)"는 듣는다는 뜻으로, 두루 많이 듣는다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

수미산 북방을 지키면서 부처님의 설법을 가장 많이 들었다고 하는데서 그 이름이 유래되었다고 합니다.

다문천왕은 권속으로 야차(Yaksa), 나찰(Raksasa)을 부리며,

야차는 행동이 민첩하고 가벼우며 음악과 환락, 음식, 오락, 바람을 주관하며, 숲속이나 묘지, 골짜기에서 산다고 하고,

나찰은 '두려운 존재'라는 뜻으로 혈육(血肉)을 먹고 탐내는 존재라고 합니다.

 

 

西方 廣目天王(서방 광목천왕)     지물 = 용, 여의주

나쁜것을 물리치고 불심을 일으키며 불법을 지키겠다는 서원을 세움,  악한자에게 고통을 주어 불법에 마음을 일으키게 한다.

 

서방에는 광목천왕(廣目天王)이 수호하는데, 말 그대로 눈을 부릅뜨고 입을 크게 벌린 형상을 함으로써 웅변으로 인간의 선악을 살피고

나쁜 것을 물리치고 있다.  그의 권속으로는 용(龍)과 비사사(毘舍闍)등이 있다.

 

  

 

 

    

 사천왕의 발 밑에 깔린 생령좌(生靈座)들

 


 西方 廣目天王(서방 광목천왕) 

지물로는 용이 등장하는데 용은 하늘에서 구름, 비, 천둥 등을 부리는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광목천왕은 수미산 중턱의 서쪽에 주처(住處)가 있는 천왕(天王, Deva[신])입니다. 범어로는 "Virupaksha(비루빡샤[광목천왕])"라고 하며,

그 뜻은 이상한 눈, 추한 눈을 의미를 가진 것으로, 한문으로는 추목(醜目), 악안(惡眼)이라고도 하며, 일반적으로는 광목천왕이라고 불려 집니다.

광목천왕은 고대 인도에서 시바(Siva) 신의 화신으로서 세 개의 눈을 가진데서 유래하며, 그 권속으로 여러 종류의 용(龍)과 부단나(富單那) 등이 있으며,

부단나란 냄새나는 귀신, 아귀를 말하고, 때로는 열병을 앓게 하는 귀신이라고도 합니다.

 

 

南方 增長天王(남방 증장천왕)     지물 = 칼

만물을 소생시킴.  만물을 소생시키며 덕을 베풀겠다는 서원을 세움,

 

남방을 지키는 증장천왕(增長天王)은 불자들의 지혜와 복덕을 늘려주고 이익을 증장(增長)시켜주는 임무를 띠고 있다.

구반다와 폐려다 등 무수한 귀신을 거느린 증장천왕은 온 몸이 적육색이며 노한 눈을 특징으로 삼고 있다.

 

 

    

사천왕의 발 밑에 깔린 생령좌(生靈座)들

고창 선운사의 사천왕상 생령좌는 "음탕한  여인"으로 표현되는데  이 여인은 행패가 심했던 지역 관리의 얼마나 관리들의 횡포가 심했으면

사또 앞에서 아양을 떨며 수청들던 여인을 사천왕 발 밑에 두고 고통받는 모습을 보며 대리만족을 할까나...

 

일설에는 사찰의 불사하러 간 목수의 부인으로 바람을 피운 여인이라고도 한다.

 

이 여인의 모습을 자세히 보면 사천왕의 다리에 눌려 있으면서도 반성의 빛은 보이지 않는다.

한 쪽 눈은 감고 다른 눈은 크게 뜬채 입을 씰룩거리며 쪽진 얼굴을 돌려 원망하는 눈초리가 역력하다.

잘못을 하고도 감히 반항하는 듯한 모습은 해학적이며 재미있는 표정이다.

 

 

 

 

南方 增長天王(남방 증장천왕) = 지물로는 왼손을 펴서 보검을 잡는다고 한다.

증장천왕은 수미산 중턱의 남쪽을 관장하는 천왕(天王, Deva)입니다. 범어로는 "Virudhaka(비루다카[증장천왕])"라고 하며,

그 뜻은 자꾸 늘어난다,  확대된다는 의미를 가진 것으로, 그래서 한문으로 증장(增長)이라고 합니다.

 

증장천왕은 그 권속으로 굼반다와 프레타를 부린다고 합니다. 굼반다는 배가 매우 부른 모습으로 표현되어 욕심이 매우 많은 아귀라고 하며,

프레타는 죽은 사람들의 영혼을 부리며 보통 6악도(六惡道)라고 불려지는 중생들이 거처하는 아귀를 의미합니다.

 

 

東方 持國天王(동방 지국천왕)   지물 = 비파를 연주한다.

부처님의 정법을 받들어 삼악도를 조장하겠다는 서원을 세움, 착한이에게 복을 주관하시고, 악한이에게 죄와 법을 다스림

 

 

    

사천왕의 발 밑에 깔린 生靈座(생령좌)들

 


지물 = 비파를 연주한다.

 

 

東方 持國天王(동방 지국천왕)

지물로는 비파(琵琶)를 든 것으로 표현되어 있다.  대체적으로 보면 조선 후기의 사찰의 형식에서는 비파를 들고 있다.

 

지국천왕은 수미산 중턱의 동쪽 영역을 관장하는 천왕(天王, Deva)으로서 『아쇼카왕경』이나 『방등대집경』에 의하면,

수미산을 다스리는 제석천 또는 부처님이 지국천왕으로 하여금 동방(東方)에서 불법(佛法)을 지키라고 명령하여,

나라를 지키고 백성을 편하게 할 것을 맹세하였다고 해서 그 이름이 유래된 것이다.

고대의 인도 베다 등 고문헌에서는 지국천왕이 그 권속으로 음악신인 '간다르바(乾達婆)'를 부린다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四天王의 生靈座(사천왕의 생령좌)◈

싯다르타 태자는 이제 출가수행자 보살이 되어 무상보리를 얻고자 보리수 나무 밑에 풀을 깔고 자리를 잡았다.

"여기 이 자리에서 내 몸은 메말라 가죽과 뼈와 살이 다 없어져도 좋다. 저 깨달음을 얻기까지는 이 자리에서 결코 일어나지 않으리라!"

이렇게 마구니를 내쫓고 깊은 명상에 들어 새벽녁 샛별이 반짝거릴 적에

드디어 보살은 모든 미혹의 번뇌를 일순간에 다 끊어버리고 무상보리의 정각(正覺)을 얻게 되었다.

이때 싯다르타 태자가 앉았던 자리는 길상(吉祥)이라는 목동이 풀을 베어서 부처님이 앉으시도록 자리를 만들어 바쳤는데

길상이 바친 풀로 만든 자리라 해서 길상좌(吉祥座)라고 부른다.

 

부처님이나 보살, 천인이 앉거나 서있는 자리를 대좌(臺座)라고 하며 대좌는 불상을 조성하는데 있어 장엄뿐 아니라

실용적인 면에서 꼭 따라야하는 중요한 요소의 하나이다.

 

이후 대좌는 불상의 종류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는데 연화좌(蓮花座)를 비롯해 사자좌(獅子座), 상현좌(裳懸座), 암좌(岩座),

운좌(雲座), 조수좌(鳥獸座), 생령좌(生靈座) 등이 있다.

이중에서 특이하게도 불보살님을 받드는 대좌에 아귀, 축생이 등장하기도 하는데 이를 생령좌(生靈座)라고 한다.

사찰 내에서 생령좌를 쉽게 접할 수 있는 곳은 천왕문 사천왕상의 대좌이다.

사천왕이 밟고 있거나 앉아있는 것이 대부분 생령으로, 천왕문을 통과하지 못한 생명체이다.

 

고통스럽고 괴로운 표정을 짓고 있는 생령들은 사람의 마음속에 악(惡)을 형상화 한 것으로

자신의 죄로 인해 다음 생에 사천왕의 발 밑에 깔리는 고통을 받지나 않을까 삼가 자신의 마음을 이곳에 견주어 보라는 의미인 것이다.

이러한 생령좌는 여러 가지 모습으로 나타나곤 한다.

 

 

♣♣♣天王門(천왕문)

천왕문은 불법을 수호하는 외호신(外護神)인 사천왕(四天王)을 모신 건물입니다. 사천왕은 고대 인도의 종교에서 숭앙했던 신들의 왕이었으나,

부처님께 귀의하여 부처님과 불법을 지키는 수호신이 되었습니다. 사천왕들은 수미산 중턱의 동서남북 네 방향을 지키면서 불법을 수호한다고 한다.

 

일주문을 통과하면서 지닌 일심(一心)이 구도자 앞을 가로막는 숱한 역경에 의하여 한 풀 꺾이게 됩니다.

이때 수미산 중턱에 자리한 사천왕은 사찰을 지키고 악귀를 내쫓아 청정도량(淸淨道場)을 만들고, 사람들의 마음을 엄숙하게 하여

사찰이 신성한 곳이라는 생각을 갖게 하며, 또한 심신이 지친 구도자의 마음속에 깃든 번뇌와 좌절을 없애 다시 한 번 힘을 내서

수미산 정상까지 오를 것을 독려하기 위해 세워졌습니다.

 

사천왕을 모신 건물인 천왕문의 좌우에는 금강역사(金剛力士)가 지키고 있습니다.  

 

그리고 천왕문을 들어서면 대개 좌우에 사천왕을 두 분씩 모시게 되고, 중앙은 출입통로가 되는데 오른편에 모셔진 사천왕 중에서

자신의 팔의 방향으로 왼쪽이 동방지국천왕(東方持國天王), 오른쪽이 남방증장천왕(南方增長天王)입니다. 

또 왼편에 모셔진 사천왕 중에서 왼쪽이 서방광목천왕(西方廣目天王), 오른쪽이 북방다문천왕(北方多聞天王)입니다.

 

 

사찰안에서 본 천왕문

 

 

선운사 전경

 

 

 

 

高敞 禪雲寺 동백나무 숲(고창 선운사 동백나무 숲)  :  천연기념물  제184호

동백나무는 차나무과에 속하는 나무로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일본 · 중국 등의 따뜻한 지방에 분포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남쪽 해안이나 섬에서 자란다. 꽃은 이른 봄에 피는데 매우 아름다우며 꽃이 피는 시기에 따라

춘백(春栢), 추백(秋栢), 동백(冬栢)으로 부른다.

고창 삼인리의 동백나무숲은 백제 위덕왕 24년(577) 선운사가 세워진 후에 만들어 진 것으로 나무의 평균 높이는 약 6m이고, 둘레는 30㎝이다.

절 뒷쪽 비스듬한 산아래에 30m 넓이로 가느다란 띠모양을 하고 있다.

고창 삼인리의 동백나무숲은 아름다운 사찰경관을 이루고 있으며,

사찰림으로서의 문화적 가치 및 오래된 동백나무숲으로서의 생물학적 보존 가치가 높아 천연기념물로 지정 · 보호하고 있다.

대웅보전과 삼성각 뒤로 동백나무가 빼곡히 들어차 있다. 4월 초쯤 핀다고 한다.

 

 

高敞 禪雲寺 동백나무 숲(고창 선운사 동백나무 숲)  :  천연기념물  제184호 = 표지석

 

 

高敞 禪雲寺 大雄殿(고창 선운사 대웅전)  : 보물  제290호     시대 = 조선

선운사는 도솔산 북쪽 기슭에 있는 절로 신라 진흥왕이 세웠다는 설과 백제 고승 검단선사가 세웠다는 두가지 설이 전한다.

그러나 가장 오래된 조선 후기의 사료에는 진흥왕이 세우고 검단선사가 고쳐 세운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선운사 대웅전은 신라 진흥왕 때 세워진 것으로 전하며, 현재 건물은 조선 성종 3년(1472)에 다시 지은 것이

임진왜란 때 불타 버려 광해군 5년(1613)에 다시 지은 것이다.

앞면 5칸·옆면 3칸의 규모로,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만든 기둥위의 장식구조가 기둥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으로 꾸몄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으로 옆면에는 높은 기둥 두 개를 세워 간단히 처리하였다.

전체적으로 기둥 옆면 사이의 간격이 넓고 건물의 앞뒤 너비는 좁아 옆으로 길면서도 안정된 외형을 지니고 있다. 건물 뒤쪽의 처마는 간략하게

처리되어 앞뒤 처마의 모습이 다르며 벽은 나무판으로 이루어진 널빤지벽이다.  안쪽 천장은 우물 정(井)자 모양을 한 우물천장을 설치하였고

단청벽화가 매우 아름답다.    *조선 중기의 건축답게 섬세하고 장식적인 구성과 빗살 여닫이문이 화려한 건물이다.

<문화재청의 글>


 

高敞 禪雲寺 大雄殿(고창 선운사 대웅전)  : 보물  제290호     시대 = 조선

이 대웅보전(大雄寶殿)은 5여래(오여래 = 아미타불 · 석가모니불 · 비로자나불 · 노사나불 · 약사여래불)

6보살(육보살 = 대세지보살 · 관음보살 · 문수보살 · 보현보살 · 일광보살 · 월광보살)을 모신 선운사의 중심 법당이었으나

정유재란(1597년)때 피해를 입어 지금은 중앙에 비로자나 부처님과 좌우로 약사여래부처님 · 아미타부처님인 삼존불만 모시고 있다.

현재의 대웅보전은 조선 광해군 5년(1613년)에 건립된 것으로 맞배지붕의 아름다움을 자랑하고 있고,

법당 내부 천정에는 수많은 용들이 구름 속에 몸을 감추고서 선운사를 수호하고 있다.

<선운사 글>

 

※▶丁酉再亂(정유재란)

1597년 임진왜란 중 화의 교섭 결렬로 왜군이 전라남도 화순 지역을 포함한 조선 전역을 다시 침입한 전쟁.

 

조선과 강화가 결렬되자 1597년(선조 30년) 일본은 14만 1,500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다시 침략하여 남해 · 사천 · 고성 · 하동 · 광양, 구례를 거쳐

남원을 점령한 후 좌, 우군으로 나누어 좌군은 남쪽으로 우군은 충청도로 북진했다.

9월 권율 · 이시언의 조명 연합군은 직산에서 일본군의 북상을 막았고, 삼도수군통제사에 복귀한 이순신 역시 12척의 함선으로

300여 척의 일본수군을 명량에서 대파하였다. 수륙 양면에서 몰린 일본군은 패주하여 남해안 일대에 몰려 있었다.

 

1598년 1월 권율 지휘하의 조선군은 울산의 가토군을 공격했고, 각 지역에서 일본군 잔당들을 섬멸했다.

11월 이순신 휘하의 수군이 노량에서 일본의 퇴로를 차단하여 해전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이 노량해전을 끝으로 일본과의 7년에 걸친 전쟁은 끝나게 되었다.

 

 

高敞 禪雲寺 大雄殿(고창 선운사 대웅전)  : 보물  제290호     시대 = 조선

내부는 통칸으로써 불벽(佛壁)을 한 줄로 세워 그 앞에 불단을 만들었으며, 불단 위에는 흙으로 빚은 소조(塑造) 삼세불을 봉안하고

삼존 사이에는 근래에 조성된 보살입상을 협시로 세웠다.

삼존은 중앙의 비로자나불을 주존(主尊)으로 하여, 왼쪽에 아미타불과 오른쪽에 약사불을 모셨다.

삼존불상 뒤의 후불벽화는 1688년(숙종 14)에 조성한 것으로, 중앙의 비로자나불회도를 중심으로 좌우에 아미타회상도 · 약사회상도가 각각

자리 잡고 있다.  천장에는 사실감이 돋보이는 커다란 운룡문(雲龍紋)이 그려져 있고,

안쪽 천장에는 우물 정(井)자 모양을 한 우물천장을 설치하여 구름ㆍ학ㆍ연꽃 등으로 장엄하였다.

내부 벽에는 산수ㆍ비천ㆍ나한 등을 벽화로 장식하였고, 닫집과 중앙의 불단 등은 비교적 간략하고 단순한 모습이다.

 이 건물은 미술사적으로 조선 후기의 뛰어난 건축기술과 조형미를 지니고 있다.

<선운사 문화재>

 

뒷모습 = 건물 뒤쪽의 처마는 간략하게 처리되어 앞뒤 처마의 모습이 다르며 벽은 나무판으로 이루어진 널빤지벽이다.

 

 

阿彌陀佛(아미타불)

 

 

中央 毘盧遮那佛(비로자나불)

 

 

藥師如來佛(약사여래불)

 

 

高敞 禪雲寺 大雄寶殿 塑造 毘盧遮那佛坐像(소조비로자나삼불좌상) : 보물 제290호

고창 선운사 소조비로자나삼불좌상((高敞 禪雲寺 塑造毘盧遮那三佛坐像)의 형태는 넓고 당당한 어깨,

긴 허리, 넓고 낮은 무릎으로 인하여 장대하고 웅장한 형태미를 보여준다.

이러한 장대하고 웅장한 형태미를 갖춘 대형 소조상들은 법주사 소조비로자나삼불상,

귀신사 소조비로자나삼불상, 완주 송광사 소조석가여래삼불상 등 17세기 전반기 각지의 대표적인 사찰에서 조성된다.

 

대형의 소조불상의 조성 목적은 이전 시대와 달리 새로워진 불교계의 위상을 한껏 드러내고,

전란으로 소실된 불상을 빠른 시간 내에 재건하고자 하는 의지가 담겨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이 비로자나삼불상은 양대 전란 이후 재건불사 과정과 당시 달라진 시대적 분위기를 직·간접적으로 대변해 주는

매우 귀중한 작품으로 평가된다.

<선운사 글>

 

 

高敞 禪雲寺 塑造毘盧遮那三佛坐像(고창 선운사 소조비로자나삼불좌상) : 보물  제1752호     시대 = 조선

고창 선운사 소조비로자나불좌상의 형태는 넓고 당당한 어깨,긴 허리, 넓고 낮은 무릎으로 인하여 장대하고 웅장한 형태미를 보여준다.

이러한 장대하고 웅장한 형태미를 갖춘 대형 소조상들은 법주사 소조비로자나삼불상, 귀신사 소조비로자나삼불상, 완주 송광사 소조석가여래삼불상 등

17세기 전반기 각지의 대표적인 사찰에서 조성된다. 대형의 소조불상의 조성 목적은 이전 시대와 달리 새로워진 불교계의 위상을 한껏 드러내고,

전란으로 소실된 불상을 빠른 시간 내에 재건하고자 하는 의지가 담겨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이 비로자나삼불상은 양대 전란 이후

 재건불사 과정과 당시 달라진 시대적 분위기를 직 · 간접적으로 대변해 주는 매우 귀중한 작품으로 평가된다.

또한 대좌의 밑면에 기록한 묵서명에서 불상의 조성과정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비로자나, 약사, 아미타라는 삼불상의 존명을

분명히 적시하고 있어 비로자나 삼불상의 도상연구에 기준이 된다.

그리고 1633년이라는 정확한 제작시기와 17세기 전반기의 대표적 조각승 무염과 그의 문하승(門下僧)에 의해 제작되었다는

정확한 조성주체가 밝혀져 있고, 대형의 상임에도 불구하고 조각적 · 종교적 완성도가 높은 우수한 작품이다.

<문화재청 글>


 

    

청사자 = 지혜의 문수보살                                                                                 흰코끼리 = 대행 보현보살

대웅보전 뒤에 그려진 벽화이다.

 

 

禪雲寺六層石塔(선운사육층석탑)  :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 29호     시대 = 조선

선운사 대웅전 앞마당에 자리하고 있는 고려시대의 석탑이다.

기단(基壇)을 1층으로 마련하여 전체의 무게를 버티게 하고 그 위로 6층의 탑신(塔身)을 올려 놓았다.

기단의 네 면과 탑신부의 각 몸돌은 모서리마다 기둥모양을 새겼다. 얇아 보이는 지붕돌은 밑면에 5단씩의 받침을 두었고,

처마는 양끝에서 가볍게 들려있어 경쾌한 멋이 흐른다.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이 대체로 잘 남아 있다.

전체적으로 탑신의 2층 몸돌부터 급격히 줄어들고, 3층 지붕돌 역시 2층에 비해 폭이 좁아져 비례감이 조금 떨어진다.

옛 백제지역의 탑으로서, 지붕돌 등에서 백제탑 양식이 보이고 있어 지방적인 특색이 잘 담겨진 고려시대 전기의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문화재청 글>

 

 

觀音殿(관음전)

대자대비의 상징인 관세음보살을 모신 법당입니다. 한 사찰의 주불전인 경우에는 원통전(圓通殿)이라고 하는데, 

 관세음보살이 모든 곳에 두루 원융통(圓融通)을 갖추고 중생을 구원해 주기 때문에 원통전이라고 하며,  관세음보살을 모신 전각이 부불전의 성격을

띨 경우에는 관음전(觀音殿)이라 하는데,  중국에서는 관세음보살의 자비를 강조하여 대비전(大悲殿)이라고도 합니다.

 

관음전 내에는 왼손에 연꽃이나 감로병을 들고 연화좌 위에 앉은 관음상을 안치하는 것이 상례이나 버들가지를 들고 있는

양류관음, 보관 위에 11면의 얼굴이 있는 십일면관음, 그리고 해수관음, 백의관음 등을 모시기도 합니다.

그리고 관세음보살의 협시가 되고 있는 남순동자(南巡童子)와 해상용왕(海上龍王)은 조각상으로 봉안합니다.

 

 

千手天眼觀世音菩薩(천수천안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은 자비를 상징하는 보살로서 보관의 정수리에 아미타불의 화현을 모시고 다니며 연꽃, 감로수병 등을 손에 들고 있는 모습으로

십일면 또는 천수천안의 모습도 있습니다.  이곳 선운사에는 십일면 천수천안 관세음보살이 모셔져 있습니다.

 

 

靈山殿(영산전)

영산회상의 모습을 재현하였다 하여 영산전이라 하며, 석가모니부처님의 제자로 아라한과를 성취한 성인인 나한을 모신 건물이라 하여

나한전(羅漢殿)이라고도 하고, 응진전(應眞殿)이라고도 합니다.

중앙에 석가모니불을 모시고 좌우에 10대 제자 혹은 16대 아라한을 모신 법당입니다. 500나한전도 있습니다.

 

 

禪雲寺靈山殿木造三尊佛像(선운사 영산전 목조삼존불상) :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 28호     시대 = 조선

전라북도 고창군 선운사의 영산전 안에 모셔진 목조금박(木造金箔)의 석가여래좌상과 아난 · 가섭 협시보살입상이다.

가운데 있는 여래좌상은 신체에 비하여 머리가 크며, 얼굴은 사각형에 가깝다. 목 아래에는 3개의 주름이 좁게 표현되었고,

옷은 양 어깨를 덮고 있으며 옷주름은 간략화되었다. 가슴은 넓으며 가슴 밑에 아랫도리 윗자락이 직선으로 표현되었다.

16각의 난간을 두른 나무로 된 연꽃무늬 대좌(臺座)에 모셔져 있다.

양쪽의 협시보살은 화려하게 장식된 관(冠)을 쓰고, 손에는 연꽃을 들고 있다.

목조이기 때문에 딱딱한 느낌을 주나 목조불로서는 희귀한 우수작이다.

 

 

禪雲寺靈山殿木造三尊佛像(선운사 영산전 목조삼존불상) :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 28호     시대 = 조선

釋迦如來坐像(석가여래좌상)



    

석가모니불을 좌상을 주존으로 제화갈라보살과 미륵보살 입상이 양쪽에서 협시하고 있다.



미륵보살과 부처님제자들인 16나한 좌상들



제화갈라보살입상과 16나한 좌상들

 

 

靈山殿(영산전) 벽화들

 

 

 

 

 

 

 

 

靈山殿(영산전) 벽화

 

 

冥府殿(명부전)

지장보살의 대원력이 살아 숨쉬는 전각으로서 명부전(冥府殿)이라고도 하며 지장보살을 주불로 모시기 때문에 지장전이라고도 합니다.

지장보살의 좌우에는 도명존자(道明尊者)와 무독귀왕(無毒鬼王)을 협시로 봉안합니다.

 

그리고 대부분 우리나라 사찰은 유명계(幽冥界)의 심판관인 시왕(十王)을 좌우로 모시기 때문에 시왕전(十王殿)이라고도 합니다.

시왕(十王)은 지옥에서 죄의 경중을 정하는 10위의 왕으로 진관대왕, 초강대왕, 송제대왕, 오관대왕, 염라대왕, 변성대왕, 태산대왕,

평등대왕, 도시대왕, 오도전륜대왕을 말합니다.

 

 

無毒鬼王(무독귀왕)   地藏菩薩(지장보살)   道明尊者(도명존자)

지장보살은 대비원력을 상징하는 보살로서 스님과 같은 모습으로 삭발한 머리에 두건을 둘렀으며 육환장을 들고 있는데,

 이 육환장의 정수리 부분에는 아미타불의 화현을 모시고 있습니다.

지장보살의 좌우에는 도명존자(道明尊者)와 무독귀왕(無毒鬼王)을 협시로 봉안합니다.

 

 

十王들(시왕들)

시왕(十王)은 지옥에서 죄의 경중을 정하는 10위의 왕으로 진관대왕, 초강대왕, 송제대왕, 오관대왕, 염라대왕, 변성대왕, 태산대왕,

평등대왕, 도시대왕, 오도전륜대왕을 말합니다.

 

 

十王들(시왕들)

시왕(十王)은 지옥에서 죄의 경중을 정하는 10위의 왕으로 진관대왕, 초강대왕, 송제대왕, 오관대왕, 염라대왕, 변성대왕, 태산대왕,

평등대왕, 도시대왕, 오도전륜대왕을 말합니다.

 

 

山神閣(산신각)

 

 

 

 

 

    

 검단선사(왼쪽)와 의운스님(오른쪽)

선운사 창건에는 세 가지 설이 있는데 577년 백제의 검단선사 창건설, 신라의 진흥왕 창건설, 그리고 신라의 의운스님 창건설 등이다.

이를 반영하듯 선운사 산신각에는 도솔산 산신으로 검단선사와 의운스님이 나란히 호랑이와 동자를 중앙에 두고

좌우로 배치된 1915년에 그려진 불화가 있다.


이 보다 앞선 1910년에 이홍구(1879~1944)가 지은 <선운사풍경가>에는 ‘두 노인이 부채를 들고 호랑이를 기대고 있는데 신령이 강림한 듯하다.

검당선사와 의운국사의 진영이다’라고 했는데, 검당선사는 검단선사의 다른 이름이다.

1915년에 그려진 불화 속의 두 스님은 이홍구가 1910년에 보았던 그림 속의 스님들과는 달리 지팡이를 들고 있다.


백제 위덕왕 때인 577년에 검단선사가 선운사를 창건했다는 설화는 소금 제조법과 관련되어 있다.

검단선사는 용이 사는 연못을 돌과 숯으로 메워 선운사를 창건했고, 인근 마을의 도적떼를 교화시켜 천일염 제조법을 가르쳐

새로운 삶의 터전을 마련토록 했다.  이들은 봄가을로 절에 소금을 갖다 바쳐 이를 보은염(報恩鹽)으로 불렀고,

자신들이 사는 마을도 검단선사의 은혜를 기리기 위해 검단리라고 했다고 전한다.

 

梵鐘閣(범종각)

종(鐘)이나 사물(四物 ; 목어, 운판, 범종, 법고)을 갖추어 놓은 건물이다.

사찰에서는 뭇 생명을 구제하기 위하여 아침저녁 예불 때마다 불전사물을 쳐서 소리를 울립니다.

 

범종(梵鐘) : 쇠를 녹여 만든 큰 종으로 지옥중생을 제도하기 위해서 친다고 합니다.

⊙법고(法鼓) : 쇠가죽으로 만든 북으로 축생을 제도하기 위해서 친다고 합니다.

⊙운판(雲板) : 청동으로 된 판을 구름 모양으로 만든 것이며 허공중생을 제도하기 위해서 친다고 합니다.

뭉게구름 모양의 운판은 그 소리가 허공을 떠도는 고독한 영혼을 천도하고 하늘을 날아다니는 날짐승을 구제한다고 하는데,

그 이유로 운판에는 하늘을 상징하는 구름이나 해와 달, 또는 용이나 비천상, “옴마니반메훔” 같은 진언이 새겨져 있습니다.

보살상이나 연화수 보살에게 귀의하여 극락왕생하기를 바라면서 이 진언을 외우면 죽은 후에 육취(六趣)에 들어가지 않고

윤회를 벗어날 수 있는 공덕을 쌓게 된다고 합니다.

⊙목어(木魚) : 나무를 깎아 잉어 모양으로 만들고 속이 비게 파내어 불사에 쓰이는 도구로 수중(水中)중생을 제도하기 위해서 친다고 합니다.

 

 

禪雲寺梵鐘(선운사범종)  :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 31호     시대 = 조선

전라북도 고창 선운사에 있는 조선 후기의 범종으로 높이 103㎝, 입 지름 93㎝이고, 종을 매다는 고리인 용뉴를 포함한 전체 높이는 129㎝이다.

용뉴는 2마리 용으로 만들었다. 한국 범종의 특징인 소리의 울림을 도와 준다는 용통이 없는 대신, 종 윗면에 1개의 구멍을 뚫었고,

어깨부분에는 2줄의 선을 돌렸다. 선 안쪽으로 글씨를 새겼는데, 조선 순조 18년(1818)에 다시 만든 것임을 알려준다.

몸체 중앙에는 3개의 돌출된 선을 둘러 위와 아래로 구분해 놓았다. 윗부분에는 꽃과 덩굴로 장식한 4개의 사각형 유곽대를 만들었고,

그 안에 가운데가 돌출된 모양의 유두를 9개씩 두었다. 유곽과 유곽 사이에는 두 손을 마주 잡은 채 서 있는 보살을 양각하고,

머리위로 8개의 작은 원을 만들어 원안에 범자를 하나씩 새겨 넣었다.

3줄의 선 아래에는 42인의 이름으로 보이는 기록이 있고, 그 아래로 2줄의 선을 둘렀다.

이 종은 신라와 고려 종에서 보이는 유곽과 유두를 가지고 있지만, 용통이 없고 2마리 용으로 만든 용뉴,

몸체 가운데와 종 입구 위에 두른 횡선이 있는 조선 종의 모습을 하고 있다.

<사진 - 문화재청  퍼옴>



八相殿(팔상전)

영산전 뒷편 석축 위에는 팔상전이 산신각과 나란히 서 있다. 팔상전은 석가모니의 행적 가운데

극적인 여덟 장면을 그림으로 나타낸 팔상도 탱화를 모셔 놓은 곳이다.



釋迦如來 坐像(석가여래 좌상)

팔상전에는 석가여래좌상 1위만 모셔져 있다. 근래에 새로 조성한 것이라한다. 본존 뒤의 후불 탱화 역시 1901년에 조성된 것이다.

후불탱화 양쪽으로 팔상도가 배치되어 있다. 

1706년의 중건 때 함께 봉안한 팔상 탱화가 있었으나 현존하지 않고, 현재는 1900년에 새로 조성된 팔상 탱화중 6점이 남아있다고 한다.



八相圖(팔상도)로는  兜率來儀相(도솔래의상), 毘藍降生相(비람강생상), 四門遊觀相(사문유관상), 踰城出家相(유성출가상),

 雪山修道相(설산수도상), 樹下降魔相(수하항마상), 鹿野轉法相(녹야전법상), 雙林涅槃相(쌍림열반상) 등이다.



八相殿 羅漢像들(팔상전 나한상 들)

 

 

禪雲寺萬歲樓(선운사만세루) :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 53호     시대 = 고려

도솔산 북쪽 기슭에 위치한 선운사는 진흥왕(재위 540∼576)이 처음 짓고 검단선사가 다시 지었다고 한다.

조선 성종 3년(1472) 극유에 의해 10여 년에 걸친 공사로 건물이 189채나 되는 큰 규모의 사찰로 성장하였다.

다른 사찰과는 달리 독특한 배치를 보이는데, 천왕문과 바로 연이어서 만세루와 대웅전이 위치하고 있다.

또한 문과 만세루와 대웅전의 중심선 축이 전체 배치의 한쪽 부분에 치우쳐 있는 것 역시 일반적인 방법은 아니다.

만세루는 앞면 9칸·옆면 2칸 규모의 강당 건물로, 지붕 옆면이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집이다. 천왕문을 들어서면 바로 보이는 만세루는

뒷면의 대웅전과 마주보며 개방되어 있어 설법을 위한 강당으로서의 기능을 효율적으로 활용하도록 하였다.

기둥들은 모두 자연 그대로의 둥근 기둥을 사용하였으며, 특히 모서리 기둥은 큰 자연목을 껍질만 벗기고 다듬지 않은 채 그대로 사용하였다.

넓은 평면에 비해 높이가 낮은 누 형식이며 불규칙한 형태의 부재료들을 사용한 것은 당시 목재가 부족하여 남은 재료를 사용하였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전체적으로 원목을 다듬지 않은 채 사용하여 단순한 구조와 장엄한 형태를 보이고 있으나,

내부공간의 처리는 조형적으로 잘 정리되지 않은 듯한 느낌을 준다.

<문화재청의 글>


 

禪雲寺萬歲樓 懸板(선운사만세루 현판)

만세루는 불법을 배우는 승려들의 강의실이다. 백제 위덕왕 24년(577년)에 검단 선사가

선운사를 짓고 남은 목재를 사용하여 지었다는 설도 있고  또 고려시대의 건물이라는 말도 있다.

 

그러나 지금의 건물은 19세기 말에 보수된 것이다, 이 건물은 비대한 자연목을 껍질만 벗기고 다듬지 않은 채

그대로 사용하여 소박함과 함께 넉넉한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다.

<선운사 글>

 

 

행사가 있었나 보다 강당 앞쪽으로 향로가 놓여있다.

 

 

만세루 천정에는 황용 청용의 용 두마리가 있다. 선운사는 용이 꽤 많이 그려져 있거나 조각되어 있는 것 같다.

 

 

禪雲寺萬歲樓(선운사만세루)

 

 

수각과 조사

 

 

석조

 

 

이 또한 탑이라 해야겠지?... 기단도 있고 탑신도 있고 옥개도 있으니...

 

 

選佛場(선불장)

선불장 뒤로 돌아가면 공양간이 있다.

 

 

選佛場(선불장)으로 들어가는 문 뒤쪽에 있는 건물은 공양간이다.

 

 

祖師殿(조사전)

조사는 한 종파를 세운 분이나 후세에 존중을 받은 큰스님이나 절의 주지스님의 영정을 모신 건물입니다.





         



선운사 템플스테이 교육장인것 같습니다.

 

 

 

 

선운사 종무실과 신도회사무실이 함께 있다.

 

 

불교용품전 건물입니다. 밖에서 보니 너무 예쁘서...

 

 

경내에서 본 불교용품전은 너무 지저분하다 뭣을 저리 많이 부쳐놓았는지……

 

 

地藏寶宮(지장보궁)

성보박물관으로 들어가는 문이다.  박물관에는 지장보살과 신중단외  특별한 물건은 없다.

 

 

 

 

聖寶博物館(성보박물관)이란 현판이 걸려있고 그 옆으로 地藏寶宮(지장보궁)이란 현판도 같이 걸려있다.

이 안에는 보물 제 279호인 금동지장보살좌상이 모셔져 있다.



高敞 禪雲寺 金銅地藏菩薩坐像(고창 선운사 금동지장보살좌상)  :  보물  제279호     시대 = 조선



金銅地藏菩薩坐像(금동지장보살좌상)  :  보물  제279호     시대 = 조선



七星幀(칠성탱)

 

 

高敞 禪雲寺 金銅地藏菩薩坐像(고창 선운사 금동지장보살좌상)  :  보물  제279호     시대 = 조선

<선운사 문화재란에서 퍼옴>

 

고창 선운사 금동지장보살좌상(高敞 禪雲寺 金銅地藏菩薩坐像)은 신라 진흥왕대에 창건하고 광해군 5년(1613)에 재건한 선운사에 있는

불상으로 청동 표면에 도금한 것이다.  머리에 두건(頭巾)을 쓰고 있으며, 이마에 두른 굵은 띠는 귀를 덮고 배에까지 내려오고 있다.

선운사 도솔암에 있는 선운사지장보살좌상(보물 제280호)과 같은 형태의 불상이다.

넓적하고 살찐 얼굴에 눈 · 코 · 입이 작게 묘사되었다. 굵게 주름진 삼도(三道)가 표현된 목은 짧아서 움츠린 듯한 느낌을 준다.

가슴은 당당한 모습이지만 두꺼운 옷에 싸여 몸의 굴곡은 나타나 있지 않다. 오른손은 어깨까지 들어 엄지와 중지를 맞댈 듯 굽혔고,

왼손은 배에 붙여서 엄지와 중지를 약간 구부렸는데 비교적 사실적으로 표현되었다.

옷은 무겁고 장식적이며 어깨의 2단으로 된 주름, 그 아래의 띠매듭, 팔의 세로줄 주름 등은 형식적이다.

특히 다리의 평행적인 옷주름 처리, 넓은 가슴의 수평적인 아랫도리 자락 등의 표현은

세조 12년(1467)에 만든 원각사탑(圓覺寺塔)에 새겨진 불상의 모습과 유사하다.

두건을 쓴 모습, 네모지고 원만한 얼굴, 형식적이고 수평적인 옷주름 처리 등으로 보아 조선 초기에 만들어진 보살상으로 추정된다.

<문화재청의 글>

 

 

高敞 禪雲寺 金銅地藏菩薩坐像(고창 선운사 금동지장보살좌상)  :  보물  제279호

<문화재청 퍼옴>

 

선운사에 봉안되어 있는 조선 초기의 금동지장보살좌상으로 높이는 1m이다.

머리는 고려시대 지장보살상에서 폭넓게 나타나는 두건(頭巾)을 쓴 모습이며, 두건을 묶은 좁은 띠가 이마를 두른 후

귀를 덮고 양 가슴부분까지 내려와 있다. 

이 보살상은 선운사 도솔암에 봉안되어 있는 고려 후기의 선운사지장보살좌상(禪雲寺地藏菩薩坐像, 보물 제280호)과

목걸이 장식이나 밋밋한 가슴표현 등이 유사하지만, 머리가 크고 하체가 빈약하여 신체비례가 부자연스러운 점,

목이 짧고 어깨가 올라가 움츠린 듯한 자세, 간략한 장식과 형식적인 옷주름 등은 고려 보살상의 양식에서 벗어난 것으로

조선 초기의 양식을 반영하고 있다.

 

선운사지장보살좌상과 함께 그 예가 드문 지장보살상의 하나로, 조선시대 지장신앙의 양상을 보여주는 귀중한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

이 지장보살상은 일제강점기에 도난을 당한 적이 있는데, 이때 영험함을 보인 사실로 인해 더욱 널리 추앙받고 있다.

1936년 어느 여름에 일본인 2명과 우리나라 사람 1명이 공모하여 보살상을 훔쳐간 뒤, 거금을 받고 매매하여 일본으로 건너가게 되었다.

그런데 이때부터 지장보살상이 영이(靈異)를 나타내기 시작하여, 소장자의 꿈에 수시로 나타나서

"나는 본래 전라도 고창 도솔산에 있었다.  어서 그곳으로 돌려 보내달라"고 하였다.

소장자는 다소 이상한 꿈으로만 생각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으나, 이후로 병이 들고 가세(家勢)가 점점 기울게 되자 꺼림칙한 마음에

보살상을 다른 이에게 넘겨 버렸다.  그러나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지장보살이 소장자의 꿈에 나타났으나 그 역시 이를 무시하였고,

집안에 우환이 끊이지 않게 되자 다시 또 다른 이에게 넘기게 되었다.

 

그후 여러 사람의 손을 거치면서 이 보살상을 소장한 사람들이 겪은 일들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으며,

마지막으로 소장하게 된 사람이 이러한 사실을 고창경찰서에 신고하여 모셔갈 것을 부탁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당시 선운사 스님들과 경찰들이 일본 히로시마로 가서 모셔오게 되었는데, 이때가 도난당한 지 2년여 만인 1938년 11월이었다.

 

당시 잃어버린 보살상을 다시 모시고 온 사실을 기념하기 위해 찍은 사진에도 사건에 대한 개요가 간략하게 기록되어 있다.<아래사진>


 

 

 

 

 

聖寶博物館 懸板(성보박물관 현판)

 

 

박물관 앞 마당에 모셔져 있는 보살상 그러나 이마 부분을 보면 부처상같기도 하다.

 

 

 

 

禪雲寺 碑와 浮屠林(선운사 비와 부도) 

 

 

 

 

불탑이 부처님의 사리를 봉안한 불의 묘탑이라는 성격을 갖고 있다면 부도는 고승의 사리를 모신 조형물로 '붓다(Buddha)'가 어원입니다.

 

부도와 탑을 비교해 보면 양자가 사리를 봉안한다는 면에서는 같지만 그 형태는 매우 다른 모습을 띠고 있습니다.

또 건립 위치도 탑이 사찰의 중심위치인 법당 앞에 세워지는데 반해,

부도는 사찰 경내의 변두리나 아주 멀리 떨어진 곳에 세워지며 이를 부도전이라 일컫습니다.

 

오늘날에 전하는 부도는 수도 없이 많지만 대표적인 것으로서 쌍봉사 철감선사 부도,  법천사 지광국사 현묘탑,  여주 고달사지 부도,

봉암사 정진대사 부도가 있으며,

 부도 전으로 유명한 곳은 해남 대흥사 부도전과 달마산 미황사 부도 전 그리고 월정사 부도전이 유명합니다.

*위의 사찰에 가는 길이 있다면 한 번쯤 살펴보고 오심이 어떨까 하는 마음에 올려놓습니다.

 

 

 

 

 

 

 

 

 

 

禪雲寺 白坡律師碑(선운사백파율사비)  :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 122호     시대 = 조선

 

 

 

 

禪雲寺 白坡律師碑(선운사백파율사비)  :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 122호     시대 = 조선

비명 = 華嚴宗主白坡大律師 大機大用之碑(화엄종주백파대율사대 대기대용지비)

백파율사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조성한 이 비석은 선운사 입구로 들어서서 오른쪽 숲 속의 부도 밭에 세워져 있다.

조선 철종 9년(1858)에 건립한 것으로 비명(碑銘)은 조선시대의 대명필가인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의 필적이다.

조선조의 억불정책에도 불구하고 오랜 침체기를 헤치며 조선후기 불교의 참신한 종풍(宗風)을 일으킨 화엄종주(華嚴宗主)

백파율사의 업적이 적혀 있는 이 비석은, 네모난 받침 위에 몸통을 세우고 지붕돌을 씌운 모습으로 되어 있다.

 

 

비림으로 들어가는 문

이곳은

 

詩雲契紀蹟碑(시운계기적비)

시운계기적비는 어느해 선비들이 시운계라는 시계詩契를 만들고 그 행적을 기록한 비석(紀蹟碑)이었다.

 

비석의 서문 역시 한편의 시로 바위에 새겨져 있었으니 …

청산녹수(靑山綠水)는 만고에 한 빛인데 인생백년은 고해에서 벗어나지 못하니 어찌 개탄할 일이 아니겠는가.

시운계 제공(諸公)은 지우난붕(芝友蘭朋)으로서 성기상구(聲氣相求)하여 춘화추월(春花秋月) 양진가절(良辰佳節)에 산수풍경을 찾아볼가(까)

 

 

禪雲寺 白坡律師碑(선운사백파율사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