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남북도 = 心 산사 길없는길

高敞 禪雲寺 懺堂庵 (고창 선운사 참당암 )

백련암 2016. 10. 22. 20:11

도솔암으로 향하던 중 참당암의 이정표인 팻말을 보고 이름도 특이한데다 참당암 선원 그리고 지장참회도량이라 쓰여 있는 것을 보고

죄를 뉘우치고 참회하라는 뜻인가 라고 생각하면서 발길을 돌려 잠시 둘러보고 가기로 하였다.


지장참회도량  참당암 = 선원   

삼국시대 검단선사가 창건,   고려, 조선 전쟁 거치며 전각 파괴

고려후기 대웅전 중수 등 부흥기

명부전과 응진전 한지붕 두 가족


선운사에서 도솔암으로 중간 정도 가다가 오른쪽으로 나아가면 약 300m 지점에 선운사 참당암이 있다. 참당암 중앙에 대웅전이 있다.

선운사 산내 암자인 참당암은 신라고찰로 지금은 사격(寺格)이 위축되었으나 본래는 대찰이었다고 한다.

선운사의 산내암자인 참당암은 애초 선운사의 본찰이었다고 한다.

천년의 세월이 흘러 점차적으로 규모가 작아지고 선운사가 산중 중심 도량이 되면서 사세가 기울어지면서 선운사 산내암자로 되었다고 한다.


참당암은 산내 암자 중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본래 참당사(懺堂寺) 또는 대참사(大懺寺)로 불렸던 지장참회도량의 거찰로

도솔암의 천장지장보살과 선운사의 금동지장보살 모두 대웅전에 봉안되어 있었다고 한다.

선운사와 도솔암의 명성에 밀려 사람들에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대웅전, 약사전(지금의 지장전)과 명부전 같은 특이한 기법의 건물이 남아 있고다.


참당암 대웅전은 부재와 치목(治木), 기법 등으로 보아 고창 선운사 대웅전보다 오래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여러 차례 중수를 거쳤으며, 현존하는 건물은 조선 후기의 것이다.


♣♣♣

선운사는 신라 진흥왕이 창건했다는 설과 577년(위덕왕 24)에 검단선사가 창건했다는 두 가지 설이 있다.

선운사 참당암은 581년(성덕왕 28)에 의운(義雲)이 창건했다고도 하고, 백제 말기에 창건하였다는 기록도 있다.


선운사는 삼국시대에 검단선사가 처음 창건했다. 절을 처음 만들 당시 선운산 지역은 도적들이 들끓었는데,

검단선사가 이들에게 소금 굽는 법과 숯 굽는 법을 가르쳐 불교도로 교화시키고 생계도 꾸리게끔 했다고 전한다.

또 연못에 살던 이무기를 내쫓고 연못을 메워 절을 세웠다는 선운사의 창건 설화도 바로 참당암에서 시작됐다고 한다.


*의운화상이 신라 진평왕의 부탁으로 이 건물을 지었다고 하는데 그 내용을 기록한 「참당사고사급법당기(懺堂寺故事及法堂記)」가

 1794년(정조 18)에 간행된 점으로 보아 이 시기에 중건된 것으로 짐작된다.


선운사 참당암 대웅전은 창건 이후 여러 차례 폐허가 되었다가 1329년(충숙왕 16)에 중창하였고.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 때 모든 건물이 불에 탄 것을 다시 세우기 시작하여 1619년(광해군 11)에 중건을 완료했다.

1982년 번와 공사 때 발견된 상량문을 통해 1753년(영조 29)에 다시 중창되었음을 알 수 있다.

중수할 때마다 기존의 부재를 그대로 활용한 것이 특징이다.


참당암 대웅전의 형식은 정면 3칸, 측면 3칸, 다포계(多包系) 맞배지붕이다. 앞면 길이 1,080㎝, 측면 길이 830㎝, 주고 303㎝, 주초 높이 40㎝ 등이다.

앞면 120㎝ 높이의 석축 기단에 선운사 참당암 대웅전을 세웠다. 앞면 주간(柱間) 폭은 중앙이 440㎝,

좌우의 칸이 각 320㎝로, 네 개씩의 분합문(分閤門)을 달았다.


고주 위에는 다시 주두(柱頭)와 동자주(童子柱)를 올려 용마루를 받치게 하였고, 주두에는 창방보를 걸었다.

앞면의 퇴량(退樑)과 창방보 사이에는 용을 조각한 화반이 끼워져 있다. 이러한 공포(栱包) 형식은 고려 시대의 다른 다포계 건물에서도 보인다.

 그중 하나가 투심조(偸心造)의 잔형으로 보이는 기법인데, 투심조란 출목 선상에 벽체와 평행이 되도록 놓이는 첨자를 두지 않는 것을 말한다.


뒷면의 공포는 앞면과 비교해 1출목 첨자가 생략되었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한 공포는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다.

앞면에 짜인 공포는 전형적인 18세기 다포양식을 보인 반면, 뒷면은 기둥 위에만 공포가 있는 주심포 양식을 취하고 있다.

이는 건물을 수리할 때 고려시대의 부재를 활용했기 때문이다.


천장의 중앙부는 높고 툇간 쪽은 한 단 낮은 층급을 둔 우물천장이다. 천장 아래로 노출되어 있는 부재에는 당초문 초각을 매우 복잡하게 틀어,

무척이나 화려하다. 내부는 우물마루이고, 고주 사이에 후불벽을 형성한 후 그 앞에 불단을 만들었다. 불단에는 삼존불상이 안치돼 있다.

석가여래를 본존으로 관음보살과 세지보살이 협시한 삼존불을 봉안하고 있으며 후불탱화로 1900년에 조성된 영산회상도가 있다.


참당암 대웅전 오른쪽에는 응진전이 자리하고 있다.

내부 불단에는 목조석가여래좌상이 본존으로, 관음보살좌상과 세지보살좌상이 좌우로 안치돼 있다. 삼존불은 1561년(명종 16)에 조성되었다고 한다.

후불탱화인 「영상회상도」는 1900년에 조성되었다.  1984년 11월 26일 보물 제803호로 지정되었다.


♣♧♣

본래 참당사(懺堂寺) 또는 대참사(大懺寺)라 불렸다고한다.

<大懺寺史籍記[대참사사적기]>의 기록에 의하면 ‘신라의 창건으로부터 800여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대웅보전이 세 번이나 넝쿨 속에 들었는데도

약사존상이 훼손되지 않았고, 여러 차례 전란을 겪었는데도 이제까지 보인(寶印)과 화엄(華嚴), 아주(牙籌), 생회대중(會大衆)과 유나(維那),

찰중(察衆)의 금석문이 완전히 유통되었다’고 기록된 것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고려 후기에 이르러 참당암은 큰 부흥을 맞게 된다. 임우상의 <대참사법당기[大懺寺法堂記]>에는

1329년(충숙왕 6)에 대웅전을 중수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고창 선운사 참당암 대웅전은 여러 차례의 중수가 있었음에도 고려시대 건축 부재(部材)의 양식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고려시대의 다른 건축물과 비교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동시에 조선 후기의 빼어난 건축미를 지니고 있다.


*고려시대 흔적남은 독특한 구조*

참당암의 전각들은 모두 독특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보물 803호 대웅전은 1753년에 다시 지어졌는데,

건물의 뒷면의 구조는 고려시대의 흔적이 남아있다.

배흘림 기둥, 주두 밑에 깔린 굽받침, 곡선으로 다듬어진 포작의 재료들에서 고려시대의 기법들이 느껴진다.

초석도 옛 건물의 그대로 사용해서 18세기에 지어진 법당의 기둥배열과 다르다.

법당의 앞모습은 조선시대 양식을 보이면서 뒷모습은 고려시대의 양식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지장기도도량] 도솔암과 [지장참회도량]참당암이라 쓰여진 이정표가 삼거리에 표시되어 있다.



    

글이 다 지워져 □□참회란 글 밖에 모르겠고 하나는 南無阿彌陀佛(나무아미타불)이란 글이 새겨져 있다.



高敞 禪雲寺 懺堂庵 大雄殿(고창 선운사 참당암 대웅전) : 보물  제803호     시대 = 조선

선운사에 속해 있는 암자인 창당암의 대웅전이다. 선운사는 신라 진흥왕이 절을 세웠다는 설과 백제 위덕왕 24년(577) 고승 검단선사가 지었다는

두 가지 설이 전한다.  조선 선조 30년(1597) 정유재란 때 모든 건물이 불에 탄 것을 다시 세우기 시작하여 광해군 11년(1619)에 끝을 맺었는데

그 뒤로도 여러 차례 수리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선운사에는 원래 많은 암자가 있었으나 지금은 동운암 · 석상암 · 참당암 · 도솔암만 남아 있다.

고창 선운사 참당암 대웅전은 의운화상이 신라 진평왕의 부탁으로 지었다고 하는데 여러 차례 수리를 거친 것으로 지금 있는 건물은 조선시대의 것이다.

규모는 앞면 3칸 · 옆면 3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다. 이를 다포 양식이라 하는데

앞면에 짜인 공포는 전형적인 18세기 다포 양식을 보이고 있는 반면, 뒷면은 기둥 위에만 공포가 있는 주심포 양식을 취하고 있다.

이는 건물을 수리할 때 고려시대의 부재를 재활용한 것이라 짐작한다.

고려시대 다른 건축물과 비교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되는 건물이다.

<문화재청의 글>



석가여래를 본존으로 관음보살과 세지보살이 협시한 삼존불을 봉안하고 있다.

후불탱화로 1900년에 조성된 영산회상도가 있다.



세지보살                                                                     석가여래불                                                          관세음보살



법당 삼존불과 상단(수미단)과 천정무늬

上壇(상단) : 법당의 어간문에서 바라볼 때 정면에 가장 높은 단상을 설치하고 그 중앙에 부처님을 모시는데 이 단상을 상단이라 하고,

부처님과 보살상을 모셨기 때문에 불 보살단(佛菩薩壇)이라고도 하며 혹은 줄여서 불단(佛壇)이라고 합니다.

이 상단에는 그 절의 주불 불상과 후불탱화를 모시는 것이 통례입니다.



천장의 중앙부는 높고 툇간 쪽은 한 단 낮은 층급을 둔 우물천장이다.

천장 아래로 노출되어 있는 부재에는 당초문 초각을 매우 복잡하게 틀어, 무척이나 화려하다.





本尊인 釋迦牟尼佛(본존인 석가모니불)



협시인 大勢至菩薩(대세지보살)

아미타불(阿彌陀佛)의 오른쪽에 협시(脇侍)하는 보살.

  협시보살 · 대세 · 세지(勢志) · 득대세지(得大勢志)보살 등으로도 불린다. 마하살타마바라발다(摩訶薩馱摩婆羅鉢多) · 마하나발(摩訶那鉢)

등으로 음사하며, 왼쪽의 협시불인 관세음보살과 함께 아미타삼존불(三尊佛)을 이룬다.


서방 극락세계에 있는 지혜 및 광명이 으뜸인 보살이다.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에는 지혜의 빛으로 널리 중생을 비추어 삼도(三途)를 떠나

무상(無上)한 힘을 얻게 하고, 발을 디디면 삼천세계와 마군(魔軍)을 항복시키는 큰 위세가 있다고 하였다.

그 형상은 정수리에 보병(寶甁)을 이고 천관(天冠)을 썼으며, 염불하는 수행자를 맞을 때는 항상 합장하는 모습이다.



本尊인 釋迦如來(본존인 석가여래)

불교의 창시자. 대웅전에는 현세불인 석가모니불상이 모셔져 있다.



협시인 觀世音菩薩(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은 자비를 상징하는 보살로서 보관의 정수리에 아미타불의 화현을 모시고 다니며 연꽃, 감로수병 등을 손에 들고 있는 모습으로 있다.



七星檀(칠성탱화) 옆으로 羅漢(나한)이 모셔져 있다.

칠성단(七星壇) : 수명장수신(壽命長壽神)인 칠원성군(七元星君)을 모신 제단.

신중단 또는 산신, 칠성이 모셔져 있는 곳을  중단이라고 한다. 중단(中壇) : 우리의 민속신앙에 의해 칠성과 산신이 모셔져 있기도 합니다.



神衆檀(신중탱화)

중단(中壇) : 호법을 발원한 선신들을 모신 신장단(神將壇)을 중단이라 합니다. 여러 신장님을 모신 단상이기 때문에 신중단(神衆壇)이라고 합니다.

제석천이나 사천왕, 재범천 등의 천상 성중과 천, 용, 야차, 건달바, 아수라, 긴나라, 가루마, 마후라 등 팔부신장 등을 모신 곳입니다.



山神撑畵(산신탱화)와 遇隱堂(우은당)大禪師(대선사)의 眞影(진영)이 모셔져 있다.



懺堂庵銅鐘(참당암 동종) :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 136호     시대 = 조선

선운사 참당암 대웅전 안에 있는 입 지름 50㎝의 조선시대 범종이다.

종을 매다는 용뉴는 용이 네발을 종에 대고 웅크리고 있는 형상이다. 어깨부위에는 둥근 원으로 띠를 두르고, 원안에 범자를 양각하였다.

몸통 위쪽으로는 직사각형으로 외곽을 두른 보살입상을 4면에 주조하였고, 그 사이에는 사각형 모양의 유곽을 배치하였다.

유곽의 테두리는 빗살무늬로 장식하였고, 내부에는 꽃모양을 한 4개의 유두가 있다.

보살상 아래쪽으로는 간격을 두고 굵게 두 줄의 테가 돌려져 있고, 그 사이에 명문판이 불규칙하게 주조되어 있다. 입구 부분에는 빗살무늬를 새겼다.

<문화제청 펌>



懺堂庵銅鐘(참당암 동종) :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 136호     시대 = 조선

<문화재청 펌>



참당암 지장전. 예전에는 약사전으로 불렸으나 지금은 선운사 지장신앙의 핵심전각으로 자리하고 있다.


참당암은 산내 암자 중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본래 참당사(懺堂寺) 또는 대참사(大懺寺)로 불렸던 지장참회도량의 거찰로

도솔암의 천장지장보살과 선운사의 금동지장보살 모두 대웅전에 봉안되어 있었다고 한다.

선운사와 도솔암의 명성에 밀려 사람들에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대웅전, 약사전(지금의 지장전)과 명부전 같은 특이한 기법의 건물이 남아 있고다.



약사전(지금의 지장전) 같은 특이한 기법의 건물이 남아 있다.



지장전 마루밑에 핀 상사화



지장전에 모셔져 있는 약사여래라 불리는 석조 지장보살

모습으로 보아서는 지장보살 같은데 손에 구슬을 들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약사여래처럼 합을 들고 계신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두건을 쓰고 계신것으로 생각하면 지장보살이 맞느 것 같다, 그러나 내 생각일뿐...



禪雲寺藥師如來佛像(선운사약사여래불상) :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 33호     시대 = 조선

선운사 참당암 약사전안에 있는 이 불상은 높이 80cm이며 무릎의 폭은 50cm이다. 머리에 두건을 썼으며 이마에는 목이 좁은 띠를 둘렀다.

이마에 백호가 있고 얼굴은 균형이 잘 잡혀 있으며 양볼은 상당히 살이 쪄 있다. 양귀는 눈썹꼬리 윗부분에서부터 어깨 바로 위까지 내려와 있다.

눈썹은 초승달처럼 가냘프게 처리되어 있고 눈은 반쯤 뜨로 이쓰며 눈꼬리는 위로 치켜 올라가 있다.

콧날은 오똑하며 어깨는 곡선으로 처리되어 있어서 유연한 느낌을 준다. 오른손은 배쪽으로 구부려 엄지와 인지 및 장지로 보주를 들고 있고,

왼손은 무릎위에 가볍게 올려 놓았다. 발은 결가부좌를 하고 무릎과 다리위에 덮여진 의상의 주름은 매우 두껍게 되어 있다.


보물 제279호 금동보살좌상과 제280호 지장보살좌상 등과 유형이 같은 것으로 약사여래상이라기 보다는 옥제 지장보살좌상이라함이 옳을 듯 하다.



지장전 안 석조지장보살좌상, 광배를 제외하고 온전히 남아있는 불상으로 조선 초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문둥병 낫게 해준다는 영험 전해져*

명부전 뒷편의 지장전은 한때 약사전으로 불리기도 했다. 석조 지장보살이 문둥병을 낫게 해준다는 소문이 나 약사보살로 불린 듯 하다.

하지만 지금은 선운사 삼장지장신앙의 인장 지장보살로 지장신앙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응진전과 명부전은 한 지붕 두 가족이 되어 있다.

3칸은 응진전 4칸같은 3칸은 명부전이다.



응진전 하면 부처님과 아난과 가섭존자로 알고 있는데 이곳은 두 분의 모습이 다르게 되어 있다.

법당내에는 많은 나한이 모셔져 있다.



응진전에 모셔져 있는  삼존상



釋迦牟尼佛



    



응진전의 나한상들



나한상들



응진전의 나한상들



응진전의 나한상들





응진전 삼존상



응진전과 명부전



명부전 지장보살과 무독귀왕, 도명존자 그리고 시왕들



중앙에 지장보살과 함께 협시인 무독귀왕 도명존자

 


명부전 시왕들



명부전 시왕들



명부전 시왕들과 인왕상



명부전 시왕들과 인왕상



명부전에 있는 염라대왕 탱화



대웅전옆에 나란히 있는 건물은 응진전과 명부전을 한 건물에 둘로 나뉘어져 사용하고 있는 건물이다.


대웅전 바로 옆의 명부전도 특이한 형태의 전각이다. 가로로 긴 형태의 명부전은 지붕은 낮고 기둥간의 간격도 일정하지 않아 의아하게 생각되지만

명부전과 응진전의 한지붕 두가족임을 알게되면 고개가 끄덕여진다.

총 6칸의 건물이지만 각 3칸씩 응진전과 명부전으로 사용하고 있다. 좌측 3칸 응진전은 기둥 간격이 우측 3칸 명부전 보다 기둥 간격이 좁다.

법당의 성격에 맞추어 자유롭게 계획한 것이다. 이 또한 재목하나라도 아끼려는 고인들의 지혜가 엿보이는 대목이다.



대웅전과 응진전, 명부전 그리고 그 앞에 있는 삼층석탑



    

참당암 삼층석탑 받침을 새로 만들어 탑을 앉쳤다. 사진에서 보았던 예전 모습이 더 정겹게 느껴진다.



참당암 종무소



종무소 앞에 나무



지붕을 잇고 있다 아래서 진흙을 반죽해 올려 던져주면 받아서 갈고 기와를 얻는다.





수각인데 물이 다 말라 있다.



수각이였나 봅니다.





꽃무릇이라고 부르는 상사화





주변엔 아직 상사화가 피어 있습니다.



어느새 지붕은 다 이어지고 옆에 감나무가 흐드러지게 감이 열려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