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경기 = 心 마음의 길을 찾아서

안암동 = 開運寺(개운사) 2

백련암 2016. 8. 30. 12:42

개운사 = 이곳에서는 꼭 뵙고 인사를 드려야 할 분은 노천에 계신 관세음보살님이시다.

 

초파일에 소나무에 핀 연등 꽃들

 

 

개운사 전경

 

 

 

 

석조관음보살상 주변에 핀 진달래꽃

 

 

 

 

석조관음보살입상

 

 

반대쪽의 진달래 꽃

 

 

공양간으로 가는 길목에 피어있는 불두화

 

 

팔을 끊어 믿을을 바친 혜가(慧可)

 

선종(禪宗)의 제 2대조인 혜가 대사(慧可大師, 487~593)는 중국 낙양(洛陽)의 무뢰사람으로 이름은 신광(神光)이고 성은 희(姬)였다.

신광은 어릴 때부터 덕이 있고 책 읽기를 좋아하여 여러 가지 서적을 두루  섭렵하고, 불서(佛書)를 읽다가 문득 출가하기로 마음먹고

32세 때에 낙양 향산사로 들어가 좌선에 몰두하였다. 40세에 은사를 떠나 숭산 소림사에 달마 대사(達磨大師)을 찾아가 법의 가르침을 청하였다.

 

그러나 굴속에 9년 동안 면벽(面壁) 수행을 하면서 법을 전할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신광은 소림굴을 아침저녁으로 찾아가 스승으로서의 예를 갖추어 달마대사를 섬기면서 법(法)을 구하고자 하였으나,

 달마 대사는 묵묵부답으로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옛날에 도를 구하고자 하는 수행자들은 뼈를 깨뜨려 골수를 빼고, 피를 뽑아 주린 이를 구제하고

굶주린 호랑이에게는 내 몸을  내어 주어 굶주린 배를 채우도록 하였는바 나는 도대체 왜 이런 정성을 다하지 못하는가?"

 

그래서 신광은 당(堂) 안에 들지 못하고 뜰에 서서 법을 구하려는 일념으로 뼈를 깎는 수행정진으로 달마 대사의 응답만을 기다리고 서 있었다.

더구나 그날 밤엔  밤새 많은 눈이 내려 몸이 꽁꽁 얼고 무릎까지 눈이 차 올라와도  

혜가는 달마대사가 선정에 든 굴 밖에 서서 꼼짝도 하지 않고 밤을 새우고 서 있었다.

 

달마 대사가 아침에야 내다보니 사람이 밤새 눈 속에 몸이 반 쯤 파묻혀 그대로 서 있는 것을 보고

"그대는 무엇을 구하고자 밤새 눈 속에 파묻혀 꼼짝하지 않고 나를 찾아 왔는가?”하고 물었다. 

"달마 대사님의 법의 가르침을 받아 무명에서 해탈하고자 함이옵니다. 어리석은 중생을 제도 하여 주시옵소서."

 

한참 동안 말이 없던 달마대사는 위엄 있는 목소리로, “부처님의 위없는 도는 부지런히 정진하여 행하기 어려운 일도 능히 행하고,

참기 어려운 일을 능히 참아야 얻을 수 있거늘 너의 보잘것없는 지혜와 아주 작은 공덕만을 가지고 진실 된 법을 구하려고 하느냐!  

천하에 붉은 눈이 내릴 때 나의 제자로 받아들이겠다.”고 하였다.

 

신광은 지체 없이 예리한 칼을 뽑아 왼쪽 팔을 잘라 버리니 땅에서 파초 잎이 솟아나 끊어진 팔을 받쳤다.

"모든 부처님이 이처럼 도를 구할 때는 법을 위하여 본인의 몸을 잊었거늘 네가 오늘 너의 팔을 잘라 네 몸을 버리니

이제는 구하고자하는 것을 얻을 것이다.”

달마대사는 신광에게 혜가라는 법명을 내려 주었다. 그러자 혜가의 잘린 팔이 저절로 붙었다.

 

"부처님의 법인을 들려주소서."  "부처님의 법인은 남에게서 얻는 것이 아니니라.”

"저의 마음이 불안합니다. 스승님께서 제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시옵소서.”    "불안한 네 마음을 가져 오너라. 편안하게 해 주겠다.”

"아무리 마음을 찾아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내가 이미 너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였느니라.”     이 말에 혜가는 깨달음을 얻었다.

 내가 본래 이 당나라에 온 것은 법을 전해 어리석은 이를 제도하고자 함이었다. 

한 꽃에서 다섯 잎이 피게 되리니 열매는 자연히 맺으리라.  달마대사가 혜가에게 내린 전법게다.

그제야 입당이 허락되었고, 혜가는 그곳에서 오랫동안 달마의 가르침을 이어받아  선종(禪宗)의 제 이조(第二祖)가 되었다.

혜가대사는 34년 동안 널리 중생을 제도하다가 552년에 제자 승찬에게 법을 전하고, 107세에 입적하였다.

 

 

조리와 속리이야기<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의 전생이야기>

 

아득히 먼 옛날 인도 남쪽에 마열 바빌국이라는 조그만 나라가 있었다. 그 나라에 장나(長那)라는 장자가 마나사라 라는 미인을 부인으로 맞아

아무런 근심걱정 없이 행복하게 살고 있었다. 그러나 결혼 한지 10년이 지나도록 자식이 없었다.

 

그래서 부인이 어느 날 제단을 차려놓고 “천지신명이시여! 아무쪼록 굽어 살피시어 귀한 옥동자 하나만 점지하여 주시옵소서.”

“만일 저희에게 자식을 주신다면 많은 덕(德과) 복(福을) 쌓아 그로 하여금 모든 중생의 의지처가 되게 하겠나이다.”

애원하듯 지극정성으로 기도하면서 빌고 또 빌었다.

그런 기도 덕분인지 그 후로 태기가 있어 옥동자를 낳고, 그 뒤 세 해가 지나 또  아들을 낳게 되었다.


장자는 기쁨을 이기지 못하고 큰 잔치를 베풀어 이웃사람들을 대접하였다. 또 예언가를 청하여 두 아이의 장래 운명을 말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예언가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두 아이의 얼굴을 자세히 살펴본 다음 “두 형제는 지혜롭고 심성이 착하고 고우나

부모와의 인연이 박해서 일찍 부모를 여윌 운명을 타고났습니다.”

그런 까닭으로 형은 조리(早離), 동생은 속리(速離)라고 이름을 지었다. 즉 일찍이 부모를 여윈다는 뜻이다.


세월이 흘러 형은 열 살, 동생이 일곱 살이 되는 그해 삼월에 어머니는 시름시름 앓다가 백약이 무효로 병세는 나날이 악화되어 가기만 했다.

어머니 마나사라는 두 아들을 불러 놓고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조리야!  속리야!  엄마는 아무래도 병이 낳을 것 같지 않구나. 사람이 한번 태어나서 죽음 은 누구라도 피할 수 없는 것이니,

죽는 것은 두렵지 않으나,  어린 너희들을 남겨놓고 떠날 것을 생각하니 가슴이 미어지도록 아프구나,

만약에 이 엄마가 죽더라도 너희들은 형제끼리 서로 의지하고 도우며 착하게 살기 바란다.” 라는 말을 남기고 숨을 거두고 말았다.


두 아들은 식어가는 어머니의 시체를 붙들고 통곡하였다. 장자는 마을사람들의 도움으로 장사를 후히 지내고

두 아들을 더욱 극진히 보살피고 사랑하며 애지중지 키우며 몇 해를 보냈다.

그러다 주위 여러 사람들의 권유와 소개로 새 부인을 맞아 들였다. 새로 들어온 부인은 죽은 부인과 용모가 비슷하여

두 아들도 엄마가 다시 살아온 것처럼 좋아하였다. 새로 온 부인도 두 아이를 불쌍하게 여기고 친자식 이상으로 사랑하며 키웠다.


그런데 다음해 큰 흉년이 들어 들판의 곡식을 하나도 수확할 수 없게 되자, 장나 장자는 집안일을 새 부인에게 맡기고

이웃나라에 가서 식량과 맞바꿀 보물을 가지고 먼 길을 떠났다.

 

장나 장자가 식량을 바꿔 돌아오기로 한 날짜가 지나 한 달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자, 혼자 남게 된 부인은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만일 남편이 돌아오지 않는다면 저 아이들을 장차 어떻게 키울 것인가.

또 앞으로 내가 자식을 낳게 되면 저 두 아이들에게 가문과 재산을 상속해 줄 것이 아닌가. 두 아이는 장차 나에게 큰 장애가 되겠구나.”

이런 생각이 들자 부인은 아이들을 없애려고 뱃사공을 매수하여 두 아이들을 멀리 갖다 버리게 하였다.

 

조리와 속리에게 먹을 것이 많고 경치가 좋은 섬으로 놀러가자고 하여 아이들을 안심시킨 뒤,

배에 태워 남쪽의 한 섬에 도착하여 아이들을 내려놓고 배사공은 빈 배로 돌아왔다. 

처음에는 아이들이 뛰어다니며 놀다가 배가 고파 어머니를 찾아보니 아무도 없는 무인도에 버려진 것을 알게 되었다.


영문도 모른 채 낮선 무인도에 버려진 조리와 속리는 좁은 섬 안을 미친 듯이 뛰어다니며 어머니를 찾았으나 끝내 섬에는 사람 그림자도 찾아볼 수 없었다.

멀어지는 배를 보며 두 형제는 목이 터지도록 어머니 아버지를, 그리고 또 조리와 속리를 싣고 온 뱃사공을 불러보았지만

들려오는 소리는 바람소리와 파도소리뿐이었다.


조리와 속리는 마침내 아무도 살지 않는 무인도에서 추위와 굶주림에 떨며, 밤에는 무서움을 못 이겨 가엾게도

무인도에서 쓸쓸한 죽음에 이르게 되자 아우 속리가 새 어머니에게 속아서 비참하게 죽게 되는 운명을 울면서 한탄하자

말없이 듣고 있던 형 조리는 아우인 속리를 위로하며 다음과 같이 타일렀다.


“속리야! 나도 처음에는 세상을 저주하고 새어머니를 원망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어찌할 도리가 없지 않으냐!

차라리 우리가 다음 세상에 태어날 때는 이 고통을 체험삼아 우리와 같이 비운(悲運)에 우는 사람들을 구원해 주자.

다른 사람을 위로해 주는 것이 곧 우리가 위로를 받는 길인 것을 일찍이 배우지 않았느냐.”

이 말을 듣자 아우도 비로소 형의 말뜻을 알아듣고 밝은 얼굴이 되었다.


이리하여 형과 아우는 하늘을 우러러 보며 거룩하고 크나큰 서원(誓願)을 세웠다.

“우리는 여기서 굶어 죽더라도 내생에는 성현(聖賢)이 되고 보살(菩薩)이 되어 우리와 같이 어려운 처지에 놓인 불쌍한 사람들을 구원해 주겠습니다.”

“세상에는 빈곤하고 병으로 고통 받는 세상의 많은 사람들을 위하여 그들에게 의복과 양식을 주고 온갖 병을 치료해 주겠습니다.”


두 형제는 이렇게 서른두 가지의 서원을 세우고 조리는 속리를  얼싸안고 숨져 갔다.

무인도에서 외롭게 죽어간 두 형제의 얼굴에는 조용하고 밝은 미소가 어려 있었다.

 

어린 두형제가 외롭고 쓸쓸히 죽은 이 섬의 이름이 보타락가산이며 형 조리는 관세음보살이 되고 동생 속리는 대세지보살이 되어

어려운 중생들을 제도하고 그 어떠한 조건도 없이 중생들을 깨달음의 세계로 인도 하였다.

 

 

 

 

부설거사(浮雪居士)

 

부설거사는 신라 선덕여왕 때의 사람으로 속명은 진 광세였다. 그는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재주가 비범하였으며

아이들끼리 놀 때에도 다른 아이들과 달리 어른스러웠다.

 뿐만 아니라 스님을 보면 반가워하고 살생하는 것을 보면 슬퍼하더니 홀연 불국사로 출가하여 법명을 부설(浮雪)이라 하였다.

 

부설은 도반(道伴)인 영희(靈熙), 영조(靈照)스님과 함께 묘적암을 짓고 수행하고 있었다.

그 뒤 문수보살을 친견하기위하여 오대산으로 가던 중

두릉(杜陵, 현 전북 김제군)에 당도하여 불심이 깊은 구무원(仇無寃)의 집에서 유숙하게 되었다.

 

무원의 딸인 묘화는 날 때부터 벙어리였으나 부설을 보고 말문이 열렸다.  또한 그의 법문을 듣고부터 사모하게 되어

부부의 연을 맺지 못하면 죽겠다며 매달리니 부설의 황망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더구나 수행자의 파계시킴을 괴로워하던 딸의 아버지마저 애원을 하니 거절을 하였던 부설은 모든 것을

인연으로 생각하고 묘화의 청을 받아들이기로 하였다.

 

"모든 부처님의 자비방편은 중생을 이롭게 하는 것이다."

 

실망하며 떠나는 두 도반을 보내며 부설은 새로운 각오를 하였다. 묘화와 혼례를 치른 부설은 아들 등운과 딸 월명을 낳고 살다가

남매가 성장하자 아이들을 부인에게 맡기고, 홀로 초막에서 수도에만 전념하더니 확연 대오하였다.

 

어느 날 옛 도반인 영희, 영조스님이 찾아와 거사를 측은하게 바라보자, 부설은 세 개의 병에 물을 가득히 넣어 줄에 매달아놓고

병을 깨뜨리되 물은 쏟아지지 않는 것으로 서로의 공부를 시험해보자고 하였다.

영희, 영조스님이 병을 치자 병이 깨어지며 물도 쏟아졌으나 부설이 병을 치자 병은 깨어졌으나 물은 병 모양 그대로 매달려 있었다.

 

“참된 법신은 생사가 없이 여여(如如)하다” 부설은 두 스님에게 설법하였다.

 

目無所見無分別 (목무소견무분별) 눈으로 보는 것 없으니 분별이 없고
耳聽無聲絶是非 (이청무성절시비) 귀로 소리 없음을 들으니 시비가 끊어졌네.
分別是非都放下 (분별시비도방하) 분별과 시비를 놓아 버리고
但看心彿自歸依 (단간심불자귀의) 다만 마음부처를 보고 스스로 귀의할지다.

 

게송을 마치고는 좌탈(座脫)하였다. 영희, 영조스님이 다비하여 사리를 묘적봉 남쪽에 모시고 부도를 세웠다.

이후 등운, 월명도 출가하여 깨달음을 얻었으며 묘화부인은 가산을 정리하여 부설사를 세우고 110세까지 살다가 앉아서 입적하였다.

 

부설거사 일가족의 깨달음은 성불에 있어서 승속(僧俗)이 다르지 않음을 보여주었는데

이는 마치 연꽃이 흙탕물에 있으나 물들지 않는 이치와 무엇이 다르겠는가!

 

 

원효대사의 해골물 이야기

 

원효대사(617~686)는 신라말기의 고승으로 압량군(押梁郡) 남불지촌(南佛地村) (지금의 경북 경산)에서 태어났다.

속명(俗名)은 설 서당(薛 誓幢)대사는 출가한 이후 특별한 스승이 없이도 쉽게 경전에 통달하여 이름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일찍이 의상대사와 함께 당나라로 구법의 길을 떠났다. 어느 날 날이 저물어 산중의 무덤사이에서 밤을 보내게 되었다.

원효는 잠을 자다 몹시 갈증이 나서 일어나 물을 찾던 중 바가지에 물이 있어 단숨에 마시고는 다시 잠이 들었다.

다음날 아침 일어나 어젯밤에 마셨던 물을 찾으니 물바가지는 보이지 않고 사람의 해골이 있는 것이 아닌가! 

놀라서 해골을 들여다보니 거기에는 썩은 빗물이 고여 있었다.

원효는 어제 밤에 달게 마셨던 물이 바로 이것이었다는 생각이 들자 갑자기 속이 메스꺼워져 토하고 말았다.

‘모르고 마실 때에는 달콤했던 물맛이 해골에 고인 빗물이었다는 것을 알고 난 후에는 더럽다고 구역질을 느끼다니

모든 것은 마음에 달려있구나’ 이렇게 생각하다 활연 대오하였다.

 

心生則種種法生 (심생칙종종법생)    心滅則髑髏不二 (심멸칙촉루불이)
三界唯心萬法唯識 (삼계유심만법유식)    心外無法胡用別求 (심외무법호용별구)

 

마음이 일어나면 갖가지 법이 생겨나고,            마음이 사라지면 해골의 물과 깨끗한 물이 둘이 아닌 법
삼계가 오직 마음이요 만법이 오직 인식임을        마음 밖에 따로 법이 없으니 어찌 따로 진리를 구하리요.

 

다음날 “이미 道를 구하였으니 당나라까지 가서 법을 구할 것이 없다”라고 하며 의상대사와 헤어졌다.

신라로 돌아온 원효는 세상 사람들에게 불법을 전하며,

요석공주와의 인연으로 설총을 낳은 이후 환속하여 스스로 소성거사(小性居士)라 이르며 대중교화에 나섰다.

 

불쌍하고 배우지 못한 사람들에게도 부처님의 가르침을 쉽게 믿을 수 있도록 했다. 그리고 저자거리를 떠돌며 노래와 춤으로

중생들의 아픔을 어루만져주었는데 이는 중생을 위한 무애(無碍)행이었으며 자비를 실천한 보살행이었다.

 

대사는 존경받던 고승이요 세계적 저술가로서 80여부 200여권의 방대한 저서를 남겼다 (현재 20부 22권이 남아있다.)

또한 불교계의 여러 편견으로 비롯되는 논쟁들을 서로 화합하여 회통시키는 화쟁사상을 주장했던 위대한 사상가이기도 했다.

원효대사!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 우리들이 만나고 싶고, 닮고 싶은 보살의 한분이시다.

 

 

 

 

강을 건내준 인로왕 관세음보살

 

비사오강은 작은 강이지만 배가 없으면 도저히 건너지 못하는 험한 강이었다.

그리고 그 강의 뱃사공은 뱃삵을 선불로 주지 않으면 누구를 막론하고 절대로 건네주지 않았다.

그래서 보타산(寶陀山)에 향을 올리러 가는 사람들은 돈이 없으면 보타산을 눈앞에 두고서도 건너가지 못하고 탄식만 할 뿐이었다.

 

하루는 매우 궁해 보이는 스님 한 분이 배를 타려 하자 뱃사공은 뱃삯을 선불로 내라고 하였다. 스님은 간곡하게 청하였다.

“우리같이 가난한 사람에게 무슨 돈이 있겠는가?  배를 타지 못하면 범음동에 가서 관세음 보살의 성상을 못 보니 제발 태워 주게.”

 

"스님만 못 가는 것이 아니라 누구를 막론하고 돈을 안 내면 갈 수 없습니다.

”내가 지독한 너의 배를 안 탈 터이니 걱정 말고,  내가 강을 건너가나 못 건너가나 두고 보아라."

스님이 강가의 모래를 한 주먹 주고 강물에 뿌리니 그것이 날아가 커다란 배 한척이 갑자기 생겨났다.

 

그리하여 스님은 돈이 없어 강을 못 건너던 모든 사람들을 배에 태우고 범음동에 가서 예배를 올렸다.

그리고는 온데 간데가 없었으므로 사람들은 관세음보살이 신통력을 나타낸 것이라고 말하였다.

모래를 날려서 배가 되었으므로 그 강을 그때부터 비사오강(飛沙澳江)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비사오강은 인도 남쪽 해안에 있는 보타락가산(寶陀落迦山) 기슭을 흐르는 강이다.

 

반야용선에 등장하는 인로왕보살은 죽은 자의 영혼을 맞이하여 극락세계로 인도하는 보살이다.

인로왕보살에 대한 신앙은 전통적인 불교신앙의 형태라기보다는 민간신앙의 바탕위에서 불교적 신앙형태로 정리,  발전되어진 보살로서

신라시대에 이미 민중들 사이에 극락왕생의 정토신앙이 상행하였으므로  적어도  이때에는 인로왕보살의 개념이 자리잡았을 가능성이 크다.

 

전반적으로 인로왕보살은 영가천도의식에 바탕을 두고 불화상에 등장하여 극락세계의 인도자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으며.

관음보살, 지장보살과 함께 극락인도의 3대 신앙으로 자리잡고 있다.

 

 

물병을 든 백의 관음

 

정병(淨甁)은 원래 인도(印度)에서 수행자(修行者)들이 마실 물을 담던 수행도구의 하나로 물병을 말하는 것이다.

물병은 물병이되 오염된 물이 아니라 사람이 마실 수 있는 깨끗한 물을 담은 병으로, 그 물은 단순히

목마른 자의 목만 축여주는 물이 아니라 병든 사람의 몸을 치료해주고 마음의 병까지 치료해주는 감로수(甘露水)인 것이다.

 

5세기 초에 관음보살이 버드나무가지와 맑은 물을 중생에게 받은 후, 그들의 병을 치료해 주었다는 내용이 실린

『청관세음경(請觀世音經)』이 중국에 알려지면서, 정병은 수행자의 수행도구에서 부처님 전에 깨끗한 물을 바치는 공양구로

그 의미와 기능이 확장되었던 것으로, 정병은 관세음보살의 지물이자 상징인 셈이다.

지물(持物)은 부처, 보살, 신중상이 권능과 지혜를 드러내기 위해 손에 들고 있는 물건을 말한다.

 

관음보살은 정병을, 지장보살은 석장과 여의주를, 문수보살은 경책을 지물로 들고 있다.

사천왕도 역시 지물을 들고 있는데 동방지국천왕은 칼을, 남방 증장천왕은 비파를, 서방 광목천왕은 용과 보주를, 북방 다문천왕은 탑을 들고 있다.

지물은 지물을 들고 있는 불보살의 서원과 깨달음을 상징하는 것으로, 지물을 들고 있는 분을 알아볼 수 있게 해 주는 것과 동시에

지물을 들고 있는 것을 보면 그 분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 알 수 있는 것이다.

 

정병은 일반적인 병의 형태와는 달리 물을 담는 주구(注口)와 물을 따르는 첨대(尖臺)로 이루어진 독특한 형태를 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특히 고려시대 때 청자와 청동으로 만든 수많은 정병이 제작되어 불교 의식에 사용되었는데,

고려 시대 이전에도 관세음보살이 한 손에 정병을 든 모습으로 표현된 것을 많이 볼 수 있다.

 

관세음보살은 대자대비(大慈大悲)를 근본서원으로 하는 보살로 관자재보살(觀自在菩薩) 광세음보살(光世音菩薩),

관세음자재보살(觀世音自在菩薩), 관세자재보살(觀世自在菩薩)이라고도 하고 흔히 관음(觀音) ,관세음, 관음보살이라 약칭한다.

범어로는 아바로키테스바라(Avalokitesvara)이고 관자재, 관세음, 광세음, 관세음, 자재, 관음 등으로 한역 된다.

 

이 그림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오탁악세(五濁惡世)에 물든 사바세계(娑婆世界)의 중생(衆生)들이 관세음보살이 들고 있는 정병이나

버드나무가지는 상징적인 의미로 관세음보살의 대자대비를 통해서 구원(救援)받고 싶은 마음을 표현 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며,

부처님의 세계에서는 관세음보살을 내세워 고통받는 중생들을 구제하여 이상적인 불국토를 실현하기 위한 방편(方便)으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산신각에 그려진 백호

 

 

 

 

 

 

학륵나 존자의 벽화이야기

  

마나라 존자(摩拏羅 尊者, 제 22대 祖師)는 인도 나0국 상자재왕의 둘째 왕자였다. 30세에 바수반두 존자를 만나 출가하였다.

마나라 존자가 월씨국(月氏國)에 들어갔을 때였다 鶴勒那 尊者(학륵나 존자)가 물었다 저에게 무슨 인연이 있어서 학떼가 저를 따릅니까?

 

마라나 존자가 말하기를 너는 제 4겁 중에 일찍 비구였다 용궁에서 공양 초청이 왔을때 너의 모든 제자들이 함께 따라가고자 하였다.

그러나 네가 보니 500재중가운데 묘공(妙供)을 받아 먹을 만한 사람은 한 사람도 있지 않았다.

 

이때에 대중들이 말하기를 스님께서 항상 설법하시되 먹는 것에 평등해야 법에 평등한 것이다,

하셨지만 지금 그렇지 않습니다. 어찌 성인이리요? 하였다.

 

너는 곧 공양 초청에 응하게 하였다 네가 여러 나라에 몸 받아 나고 죽는 동안 그 500제자들은 減福(감복)해서 날 짐승이 되었다.

그래서 학 떼가 쫓아 따른 것이다. 학륵나 존자가 말하기를 무슨 방편으로 저를 해탈하게 할 수 있습니까? 하였다

 

 마라나 존자가 말 하기를 내게 무상법보(無上法寶)가 있으니, 너는 마땅히 들어 미래에 벗어나라 하고 계송을 읊었다.

 

심수만경박(心隨萬鏡轉) : 마음은 만경따라 따라 굴러도,

전처보융유(轉處寶融幽) : 구른곳 진실로 융숭 깊다.

수류인득성(隨流認得性) : 흐름따라 자성을 알아차리니

무희역무우(無喜亦無憂) : 기쁨도 없거니와 근심도 없다.

이때에 학 떼가 게송을 듣고 울음소리를 내고 날아가 버렸다

 

※자기 分에 맞는 공양이 아니면 오히려 감복(減福)한다.

 

 

 

 

 

 

독성존자

 

 

십우도의 부분 벽화입니다

심우(尋牛): 소년이 소를 찾아 나서고 있습니다.

 

 

기우귀가(騎牛歸家): 소 등에 걸터앉아 피리를 불며 집으로 돌아갑니다.

 

 

망우존인(忘牛存人): 소는 보이지 않고 사람의 모습만 있습니다.

 

 

벽화로 몇 부분만 심우도가 그려져 있다

인우구망(人牛俱忘): 사람도 소도 없어지고 단지 둥그런 원(圓)만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