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경기 = 心 마음의 길을 찾아서

2017. 4. 2. 1346년이 된 수락산 천년고찰 학림사

백련암 2017. 4. 7. 01:14

1346년이 된 수락산 천년고찰 학림사

나한기도도량으로 명성이 자자했던 학림사는 신라 문무왕 때인 671년에 원효대사(617~686)가 창건하였다.

이후 고려시대 까지 법등이 꾸준히 이어져 공민왕 시기에는 왕사 나옹스님(1320~1376)에 의해 크게 번성하였다고 전한다.


학림사의 연혁을 말해 주는 가장 오래된 기록은 1881년(고종 18년)에 편찬된 『학림암중수기』이다. 이에 따르면

세월이 흐르면서 절의 창건사에 관한 문서들이 거의 유실되어 창건주나 사적을 알지 못한다고 전한다.

따라서 신라시대 원효대사의 창건기나 고려 때 나옹스님이 주석한 현존 자료는 남아 있지 않다. 다만 스님들이 서울 근교인

청평사(淸平寺), 회암사(檜巖寺) 등지에서 수행 정진하면서 교화활동을 하셨는데 바로 학림사도 그 중의 한 곳이었다고전하고 있다.


조선시대에 와서는 정유재란(1597)으로 큰 화를 입어 소실되었다가 1624년 무공(無空)화상이 폐허로 남아 있던 곳에 법당을 지어

중건하였다고 전하고 있으나  무공스님에 대해서는 그다지 알려진 바가 없다.

하지만 수락산 학도암(鶴倒唵)에 있는 자료에 따르면 1624년에 학도암을 창건하였고  학림사와 밀접한 관계에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881년 9월 당시의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俯事) 김순항(金淳恒)이 쓴 『학림암중수기』따르면 다음과 같다.

1780년(정조 4년) 최백(催伯)과 궤징(軌澄) 스님이 낡고 기운 곳을 바로 잡아 중수하였으나 1830년(순조 30년)에는 주담화상이 고쳐 세웠다.

이후 세월이 흘러 도량이 노화되자 1880년(고종 17년)에는 이를 안타깝게 여긴 영상(營想). 경선(經敾) 스님이 중수의 원을 다시 세웠다.

이에 따라 판관(判官) 하도일(河道一) 의 주선으로  하사금을 이용하여 마침내 새롭게 절을 중수하게 되었다.

또한 경선스님은 화주로서 불사의 중책을 맡았는데 1885년에는 근처 학도암에 초빙되어 불상 1구와 탱화 6점을 새로 조성 하였다.

이에 『천도산학도암개금탱화시주록기』에 따르면 경선스님은 ‘양공(良工) 경선화상’ 으로 탱화를 그리는 스님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후 1918년 4월에는 주지 금운(錦雲)화상이 네 번째로 중수하였다. 이때의 상황을 기록한 연응(淵凝)스님의

『鶴林唵大房與各澱閣重修記[학림암대방여각전각중수기]』를 보면 “전각이 낡고 기울어 거꾸로 무너질 지경에 이르렀고,

이를 보다 못한 금운화상이 발심하여 작은 물건까지도 모두 보시하여 다시 세우니 가히 후세에 귀감이 될 만하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학림사의 연혁에서 빠뜨릴 수 없는 부분이 있다. 바로 덕흥대군묘(德興大君墓)와의 인연이다.

덕흥대군(1530~1559)은 조선 중종의 아들로 이름은 이초(李苕)이다. 30세의 젊은 나이에 병으로 죽어 수락산에 묻히니,

아들인 선조가 1568년 흥국사(興國寺)에 원당을 짓고 덕흥대군의 명복을 빌게 하였다. 이에 따라 흥국사와 내원암(內院唵) 그리고 학림사는

봄, 가을로 덕흥대군의 제(齊)가 있을 때마다 각종 제물을 부담해야 했으며 심지어 묘소로부터 십리나 떨어진 학림사를 묘소의 경내로 지정하였다.


1927년 무렵에는 절이 도정궁(都正宮) 소유가 되면서 전각이 퇴락하고 점차 대중이 줄어드는 등의 고충이 가중되었다.

조선시대 자복사찰(資輻寺刹)은 궁궐의 상궁이 드나들며 왕실의 부귀와 자손창성을 기원하게 되므로 각종 지원과 혜택을 받았지만

이에 못지않은 고충과 폐단을 겪었던 것이 당시 현실이었다.


♣※資輻寺刹(자복사찰)이란  조선시대 초기에 불교를 통제하기 위해 다양한 종파로나뉘어 있던 전국의 사찰을 각 지방별 주요사찰 일부만 남기고

선종(禪宗)과 교종(敎宗) 양종으로 구분하여 통폐합을 하는 과정에서 왕실의 안녕과 국가의 국운융창을 비는 것을 목적으로 선정된 사찰이 자복사찰입니다.

이와 같이 오랜 역사를 뒤로 한 채 낡고 퇴락해진 학림사는 한국전쟁을 겪게 되면서 전각이 소실되고 명맥만 유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를 접한 도원스님이 과거의 역사와 도량을 복원하기 위해 불사를 일으키게 되었으며 뜻을 같이 한 주지 덕오스님이

불사에 박차를 가하여 현재와 같은 도량으로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학림사의 글>



친구와 동생과  함께 오랫만에 절을 찾았다 작년에도 학림사를 가려고 하였지만 동생의 손녀때문에 산을 못올라가 그냥 도안사에 갔다오고 말았는데

이번엔 작정하고 길을 떠났다.  학림사가는 길목에 피어있는 진달래  아직은 날씨가 차서인지 양지쪽에만 진달래가 피어있습니다.



절에 오르는 길 못엔 이렇게 목련도 활짝 피어있습니다



학림암 소개 안내판 이정표





학림사 표지석



1346년이 된 천년고찰 학림사 안내글과 표지석



학림사 가기전에 약사전과 학림사 연혁안내판이 먼저 기다리고 있다. 뒤에보이는 건물은 약사전입니다.

아마도 예전에 여기서부터 학림사가 아니였을까라는 생각도 해봅니다.

이 옆으로 세월의 흔적이 있는 부도탑도 2기가 있습니다. 어느 분의 것인지는 모르지만 쓰레기와 함께 관리되지 않고있습니다.



약사전

이 약사전은 학림사가기 전 조금 떨어진 곳에 있다 왜 절 안으로 들어가 있지를 않고 이곳에 홀로 외로히 떨어져 있는 것일까?

옛날엔 학림사가 여기서부터 절집이 였을까 일주문도 천왕문도 없이 해탈문부터 있다 그렇다면 시작점이 있을 법한데 왜 일까?

약사전이란 비석을 보지못하였으면 그냥 지나쳐 버릴 만큼 우거진 나무숲 사이에 숨어 앉아있다.



藥師殿(약사전)

동방 유리광세계의 교주인 약사여래 부처님을 본존으로 모신 법당이 약사전이다.  약사전은 높은 담장으로 둘러쳐져있어 지붕만 보인다.

그러다 보니 그냥지나치기 쉽상이다.  법당 안에는 약사여래좌상이 모셔져 있다.



藥師殿(약사전)

담장넘어에 전신의 몸에 반을 가린체 숨어앉아 있는 약사전이다.



藥師殿 懸板(약사전 현판)



石造藥師如來坐像(석조약사여래좌상) : 서울 지방문화재 자료 제 32호

약사여래께서는 대개 왼손에 약병이나 약합, 혹은 약단지(무가주)를 들고 있고 오른손으로는 삼계인을 짓고 있다.

약사여래는 서민들의 욕구에 부응하는 현실적이고 기복적인 성격을 많이 간직하고 계신 부처님인데,『약사여래본원경』에 의하면

약사여래 부처님께서 일찍이 "내 몸과 남들의 몸에 광명이 치성하도록 하리라"  "위덕이 높아서 중생들을 모두 깨우칠 수 있게 하리라."

"모든 중생들을 대승의 가르침으로 이끌어 들이리라." 등등의 12대 원을 세웠다고 전해진다.  이와 같은 서원을 세우고 수행하여 부처님이 되신 분이

 바로 약사여래 부처님이므로 예로부터 많은 사람들이 삶의 애환을 약사여래 부처님께토로하고 복락을 기원하였던 것이다.



약사여래 부처님

조선 초기에 조성되었다고 하는 이 약사여래좌상의 상호는 사각형 모양을 하고 있으며 신체에 비하여 머리가 크다.

머리 중앙에는 계주가 있다 목은 매우 짧아서 어깨와 붙은 듯하고 배꼽 아래 부분은 대좌에 들어가 버린 듯 보이지 않는다.

상대적으로 큰 머리 때문에 작아 보이는 손은 가슴 아래 모아지고 있다.

연꽃 좌대는 상하 대칭을 이루며 앙련과 복련이 새겨져 있다.(신체 높이 : 77cm, 어깨너비 53cm, 좌대높이 42cm 이다.) 



石造藥師如來坐像(석조약사여래좌상) : 서울 지방문화재 자료 제 32호

뒤에는 후불탱이 아닌 금색으로 쓴 약사경이 쓰여 있다.



石造藥師如來坐像(석조약사여래좌상) : 문화재 자료 제 32호     시대 = 조선

약사전 내부에 모셔진 ‘석불좌상(서울시 문화재자료 제32호)’은 약사여래불이다.  약사여래불은 중생들을 질병으로부터 보호하고, 생명을 지속해주는 존재다.

특히 학림사 약사전은 병을 치료하는 데 탁월한 효험이 있다고 여겨져 많은 사람들이 찾는다.

보통 ‘불상’ 하면 금빛으로 화려한 얼굴을 떠올리지만, 약사전 석불상은 이와는 매우 다른 토속적인 모습이 두드러진다.

이는 조선시대 석불조각에서 나타나는 특징으로, 네모난 얼굴에 감은 눈과 옅은 미소로 편안하게 불자들을 반긴다.



한산과 습득

한산(寒山)과 습득(拾得)은 중국 당나라 때의 사람들로 스승 풍간선사(豊干禪師)와 함께 국청사(國淸寺) 에서 살았다.

그들은 모이면 손뼉 치며 웃고 떠들고, 때로는 이상한 행동을 하기도 하고, 때로는 대중에게 거침없는 말을 하여 당황하게 하였으나

모두 불도의 이치에 맞는 말을 하였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국청사에 숨어사는 성인이라 하여 국청삼성(國淸三聖) , 국청삼은(國淸三隱) 이라 불렀다.

세분은 곧 불보살의 나투심이니 풍간스님은 아미타불의 화현이고 한산은 문수보살, 습득은 보현보살의 화현이라고 한다.

그러나 당시의 사람들은 그들의 말과 행동을 미치광이로 생각하고 멸시하였다.


풍간선사는 국청사에서  대중양식에 쓸 방아를 찧고, 길을 나설 때에는 호랑이를 데리고 다니므로 사람들이 두려워했다고 한다.

한산은 그가 살고 있는 곳의 지명을 따라 부른 이름이었다. 평생 신을 신지 않았으며, 베옷을 입고 숲과 동굴에서 잠을 잤다.

때때로 국청사에서 밥을 얻어먹고 남은 것은 대통에 넣어 한암(寒山)의 바위굴로 돌아갔다.

달을 보고 웃고 바람을 보고 중얼거렸기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을 받았는데 그때마다  개의치 않고 큰소리고 웃었다.


어느 날 스님들이 가지를 굽고 있는데 한산이 와서 가지 꼬챙이를 들고 한 스님의 등허리를 내리쳤다.

스님이 머리를 들자 그 꼬챙이를 들고 물었다.  “이것이 무엇이냐?"   “이 미친놈아”

그때 한산이 옆의 스님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모두가 큰스님들인데도 똑같이 절의 소금과 간장만 낭비하고 있구먼”


습득은 풍간선사가 길에서 울고 있는 아이를 주어다 길렀다고 하여 습득이라 하였다.  그는 공양간에서 그릇을 닦거나 불을 때며 심부름을 했다.

그리고는 대중들이 먹고 남은 밥과 반찬 등을 모아 두었다 한산이 오면 주었다.


어느 날 고두밥을 쪄서 멍석에 말리는데, 습득에게 지키라고 하였다.

습득은 고두밥을 지키다가 잠이 들었는데 깨어보니 새들이 날아와서 먹어버리고 말았다.

습득은 사천왕이 있는 곳으로 달려가서,  “스님들의 공양을 먹어버린 새도 못 지키는 주제에 어찌 감히 절을 지킨다고 할 수 있겠는가!” 라고 하면서 

막대기로 사천왕을 힘껏 때렸다.  그때 주지스님의 꿈에 사천왕이 나타나서 “스님 습득이가 저희들을 마구 때립니다.”라고 하였다.

깜짝 놀란 주지스님이 일어나 사천왕에게 가 보았더니 습득이가 사천왕을 때리고 있었다.


당시 그 고을의 자사인 여구윤(閭丘胤)이 심한 병을 앓고 있었는데, 좋다는 약을 다 써보았으나 차도가 없었다.

자사는 일찍이 국청사에 계시는 풍간스님의 명성을 들어온지라 그를 찾아갔다.

풍간스님은 병세를 듣고 깊은 골짜기의 깨끗한 물을 떠다가 그의 몸에 뿌리니 씻은 듯이 병이 나았다.

자사는 감사한 마음에 보답을 하려했다.   “스님의 크신 은혜를 갚고 싶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국청사에 계시는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을 찾아가서 물어보시오”

자사는 국청사 경내의 많은 전각과, 누각들을 돌아보며 찾아보았으나 보살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다리도 아프고 목이 마른 자사는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공양간으로 들어갔다.

마침 불을 때고 있던 불목하니 두 사람은 자사에게 공손히 물을 떠드렸는데  그들의 생김새가 매우 볼품없고 우스꽝스러웠다.

보살들을 찾으려다 지친 자사는 풍간선사에게 다시 와서 조금은 짜증 섞인 말로  “아니 어디에 보살님들이 계시다는 말씀입니까?”

풍간선사는 웃으면서,  “허허 이미 만나 뵙지 않았습니까?”   놀란 자사는 갑자기 공양간의 두 사람이 생각나서 벌떡 일어나 뛰어나갔다.


한산과 습득은 자사가 헐레벌떡 뛰어 들어오는 것을 보고  “풍간이 쓸데없는 말을 했군. 그가 바로 아미타불이라네

그리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려 나갔다.

자사는 얼른 말에 올라타고 채찍을 힘껏 치며 뒤를 쫒았으나 그들과 점점 멀어져 갔다.

드디어 두 사람은 바위굴 속으로 들어가 버리고, 얼마 후 자사도 말을 몰아 굴속으로 들어가려는데 돌문이 닫혀버렸다.


성인을 알아보니 못한 자사 여구윤은 못내 안타까웠다. 그리하여 대나무, 돌벽, 절이나 인가의 흙벽 등에 써놓은 세 분의 시를 모아

『삼은집(三隱集)』이란  책으로 엮었는데 그것이 오늘날 『한산시(寒山詩)』로 전해 오고 있다.



조리와 속리이야기<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의 전생이야기>

아득히 먼 옛날 인도 남쪽에 마열 바빌국이라는 조그만 나라가 있었다. 그 나라에 장나(長那)라는 장자가 마나사라 라는 미인을

부인으로 맞아  아무런 근심걱정 없이 행복하게 살고 있었다. 그러나 결혼 한지 10년이 지나도록 자식이 없었다.


그래서 부인이 어느 날 제단을 차려놓고 “천지신명이시여! 아무쪼록 굽어 살피시어 귀한 옥동자 하나만 점지하여 주시옵소서.”

“만일 저희에게 자식을 주신다면 많은 덕(德과) 복(福을) 쌓아 그로 하여금 모든 중생의 의지처가 되게 하겠나이다.”

애원하듯 지극정성으로 기도하면서 빌고 또 빌었다. 그런 기도 덕분인지 그 후로 태기가 있어 옥동자를 낳고,

그 뒤 세 해가 지나 또  아들을 낳게 되었다.  장자는 기쁨을 이기지 못하고 큰 잔치를 베풀어 이웃사람들을 대접하였다.

또 예언가를 청하여 두 아이의 장래 운명을 말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예언가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두 아이의 얼굴을 자세히 살펴본 다음 “두 형제는 지혜롭고 심성이 착하고 고우나 부모와의 인연이 박해서

일찍 부모를 여윌 운명을 타고났습니다.” 그런 까닭으로 형은 조리(早離), 동생은 속리(速離)라고 이름을 지었다. 

즉 일찍이 부모를 여윈다는 뜻이다.


세월이 흘러 형은 열 살, 동생이 일곱 살이 되는 그해 삼월에 어머니는 시름시름 앓다가 백약이 무효로 병세는 나날이 악화되어 가기만 했다.

어머니 마나사라는 두 아들을 불러 놓고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조리야!  속리야!  엄마는 아무래도 병이 낳을 것 같지 않구나.

사람이 한번 태어나서 죽음 은 누구라도 피할 수 없는 것이니, 죽는 것은 두렵지 않으나, 

어린 너희들을 남겨놓고 떠날 것을 생각하니 가슴이 미어지도록 아프구나,

만약에 이 엄마가 죽더라도 너희들은 형제끼리 서로 의지하고 도우며 착하게 살기 바란다.” 라는 말을 남기고 숨을 거두고 말았다.


두 아들은 식어가는 어머니의 시체를 붙들고 통곡하였다. 장자는 마을사람들의 도움으로 장사를 후히 지내고

두 아들을 더욱 극진히 보살피고 사랑하며 애지중지 키우며 몇 해를 보냈다.

그러다 주위 여러 사람들의 권유와 소개로 새 부인을 맞아 들였다. 새로 들어온 부인은 죽은 부인과 용모가 비슷하여

두 아들도 엄마가 다시 살아온 것처럼 좋아하였다. 새로 온 부인도 두 아이를 불쌍하게 여기고 친자식 이상으로 사랑하며 키웠다.


그런데 다음해 큰 흉년이 들어 들판의 곡식을 하나도 수확할 수 없게 되자, 장나 장자는 집안일을 새 부인에게 맡기고

이웃나라에 가서 식량과 맞바꿀 보물을 가지고  먼 길을 떠났다.

장나 장자가 식량을 바꿔 돌아오기로 한 날짜가 지나 한 달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자, 혼자 남게 된 부인은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만일 남편이 돌아오지 않는다면 저 아이들을 장차 어떻게 키울 것인가.

또 앞으로 내가 자식을 낳게 되면 저 두 아이들에게 가문과 재산을 상속해 줄 것이 아닌가.

두 아이는 장차 나에게 큰 장애가 되겠구나.” 

이런 생각이 들자 부인은 아이들을 없애려고 뱃사공을 매수하여 두 아이들을 멀리 갖다 버리게 하였다.


조리와 속리에게 먹을 것이 많고 경치가 좋은 섬으로 놀러가자고 하여 아이들을 안심시킨 뒤,

배에 태워 남쪽의 한 섬에 도착하여 아이들을 내려놓고 배사공은 빈 배로 돌아왔다.

처음에는 아이들이 뛰어다니며 놀다가 배가 고파 어머니를 찾아보니 아무도 없는 무인도에 버려진 것을 알게 되었다.


영문도 모른 채 낮선 무인도에 버려진 조리와 속리는 좁은 섬 안을 미친 듯이 뛰어다니며 어머니를 찾았으나

 끝내 섬에는 사람 그림자도 찾아볼 수 없었다.  멀어지는 배를 보며 두 형제는 목이 터지도록 어머니 아버지를,

그리고 또 조리와 속리를 싣고 온 뱃사공을 불러보았지만 들려오는 소리는 바람소리와 파도소리뿐이었다.


조리와 속리는 마침내 아무도 살지 않는 무인도에서 추위와 굶주림에 떨며, 밤에는 무서움을 못 이겨 가엾게도

무인도에서 쓸쓸한 죽음에 이르게 되자  아우 속리가 새 어머니에게 속아서 비참하게 죽게 되는 운명을 울면서 한탄하자 

 말없이 듣고 있던 형 조리는 아우인 속리를 위로하며  다음과 같이 타일렀다.

“속리야! 나도 처음에는 세상을 저주하고 새어머니를 원망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어찌할 도리가 없지 않으냐! 

차라리 우리가 다음 세상에 태어날 때는 이 고통을 체험삼아 우리와 같이 비운(悲運)에 우는 사람들을 구원해 주자.

다른 사람을 위로해 주는 것이 곧 우리가 위로를 받는 길인 것을 일찍이 배우지 않았느냐.”

이 말을 듣자 아우도 비로소 형의 말뜻을 알아듣고 밝은 얼굴이 되었다.


이리하여 형과 아우는 하늘을 우러러 보며 거룩하고 크나큰 서원(誓願)을 세웠다.

“우리는 여기서 굶어 죽더라도 내생에는 성현(聖賢)이 되고 보살(菩薩)이 되어 우리와 같이 어려운 처지에 놓인 불쌍한 사람들을 구원해 주겠습니다."

“세상에는 빈곤하고 병으로 고통 받는 세상의 많은 사람들을 위하여 그들에게 의복과 양식을 주고 온갖 병을 치료해 주겠습니다.”


두 형제는 이렇게 서른두 가지의 서원을 세우고 조리는 속리를  얼싸안고 숨져 갔다.

무인도에서 외롭게 죽어간 두 형제의 얼굴에는 조용하고 밝은 미소가 어려 있었다.

어린 두형제가 외롭고 쓸쓸히 죽은 이 섬의 이름이 보타락가산이며 형 조리는 관세음보살이 되고 동생 속리는 대세지보살이 되어

어려운 중생들을 제도하고 그 어떠한 조건도 없이 중생들을 깨달음의 세계로 인도 하였다.



海印寺 傳說(해인사 전설)

신라 40대 애장왕(哀藏王) 때 순응(順應)과 이정(利貞)이 창건한 고찰이다.

전설에 따르면 애장왕비는 전신에 심한 피부병을 앓게 되어 백약이 효과가 없고 병은 날로 심해져서 드디어 죽을날만 기다리게 되었다.

왕과 백성의 슬픔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가야산 산신령이 왕의 꿈속에 나타나서 "가야산에 가면 왕비의 병을 고칠 수 있는 약을 구할 수 있다." 라고 했다.

왕은 즉시 사람을 보냈는데, 사신들은 가야산에서 글을 읽는 두 사람의 도승을 만나 왕비의 병을 고칠 수 있는 처방과 오색실을 얻어 돌아왔다.


긴 오색실의 한쪽은 왕비의 몸에 감고 다른 한쪽은 침전 앞에 있는 배나무에 감은 후 모두 그 밑에 모여서 부처님에게 축원을 드렸더니,

왕비의 몸에서 작은 벌레가 무수히 기어나와 오색실을 타고 배나무로 모두 옮겨가서 배나무가 말라 죽고 왕비의 병이 말끔히 나았다.


왕은 기뻐서 즉시 가야산으로 사람을 보내 두 도승을 찾았다. 그들은 바로 순응(順應)과 이정(利貞)이었다.

왕은 왕비의 병을 고쳐준 보답으로 그들의 소원을 물었다.

그리고 그들의 소원에 따라 가야산에 절을 짓고 이름을 해인사(海印寺)라고 했다고 한다.



惠通(혜통)스님의 구법

신라의 혜통 스님은 멀리 당나라에 가서, 당시 당나라에서 가장 유명한 선무외삼장(善無畏三藏, 637년- 735년)에게 배우기를 청했다.

선무외삼장은 인도 마갈다국 사람인데, 그는 중국에서 포교하기 위해 당나라에 입국한 사람으로서 당다나라에 가장 귀한 대접을 받는 스승이

밀교(密敎)에 각별한 권위가 있는 분이었다. 하지만 그는 동쪽의 작은 나라 사람이 어찌 법기(法器)가 되겠는가  하면서 가르쳐 주지 않았다.


혜통은 3년 동안이나 물러서지 않고 열심히 좇았으나 여전히 허락받지 못했다.

혜통은 이에 울분하여 불이 이글이글 타는 화로를 머리에 이고 삼장법사 앞에 서 있었는데 잠시 후 이마가 우뢰와 같은 소리를 내면서 터졌다,

삼장이 깜짝 놀라 화로를 치우고 손가락으로 터진 곳을 만지며 주문을 외우니 상처가 아물어 전과 같이 되었는데,

 왕(王)자 모양의 흉터가 생겼다. 이로 인해 혜통을 왕화상(王和尙)이라 불렀고,

그의 깊은 도량을 인정하여 그에게 심오한 불교의 진리를 모두 전수하였다고 한다.



세조와 문수동자 이야기 벽화

조카 단종을 죽이고 조선 7대 임금이 된 세조의 꿈에 형수 문종황후(단종의 어머니)가 나타나 "에이, 더러운 인간아!

아무리 부귀영화가 좋기로 어찌 감히 조카를 죽이는가?" 하고 얼굴에 침은 뱉았다고 한다.

그런데 그날부터 세조의 몸에는 병명을 알 수 없는 이상한 종기가 나서 어떤 약을 써도 소용이 없었다.

견디다 못한 세조는 금강산에 들어가 불공을 드리려고 길을 떠나 단발령(斷髮嶺)에 이르렀는데,

산색은 청정하여 마치 부처의 몸을 보는 것 같고 흐르는 냇물은 청정하여 마치 부처의 음성을 듣는 것만 같았다.

세조는 그대로 머리를 깍고 중이 될 것을 생각하였다. 그러나 만류하는 신하들 때문에 머리 전부를 깍지 않고 윗부분만 잘라 버렸다.

그리하여 그 고개를 단발령(斷髮嶺)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단발령에서 발길을 돌린 세조는 금강 산행을 그만두고 부처의 진신사리가 모셔진 상원사(上院寺)로 갔다.

날씨가 몹시 더워서 몸의 종기가 터지는 것만 같았다.

등에는 손이 닿지 않아 씻지 못하고 있었는데, 마침 그곳을 지나가던 한 동자가 "등을 문질러 드릴까요?"하고 소리쳤다.

동자는 오자마자 세조의 등을 어떻게나 시원스럽게 잘 문질러 주는지 금방 하늘에라도 날아갈 것만 같았다.

그러나 당시 법에 임금의 몸에 상처를 내면 살아남지 못한다는 엄한 규율이 있었다.

"동자야, 너 아무한테도 임금을 봤다고 하지 말아라." 그러자 동자가 말하였다.

"걱정 마십시오, 당신도 아무한테나 나를 봤다고 하지 마세요."  "네가 누구인데?" 

 "나는 문수 동자올시다. 나를 여기서 친견했다고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시오."

세조가 그 말을 듣고 곧 뒤돌아 보니 머리를 두 가닥으로 딴 동자가 금방 나무 사이로 사라지는데 아무리 찾아봐도 다시 만날 수가 없었다.

세조가 너무 신기해서 그 동자의 모습을 곧 그림으로 그리고 조상(造像)으로 만들어 모시게 하였는데

지금 오대산(五臺山) 상원사(上院寺)에 모신 문수 동자가 그분이다.

세조는 그날로 모든 병이 씻은 듯이 나아서 그 은혜에 보답하고자 그때부터 많은 불사를 하게 되었다.



108계단의 解脫門(해탈문)과 주변 담장

이곳은 첫 번째 문이고 해서 일주문인줄 알았는데 금강역사의 벽화가 있고 문수 · 보현동자가 있어 해탈문이된다.


해탈문을 지나 청학루까지는 긴 108계단이 펼쳐지고, 사찰과 담장을 사이에 두고 얕은 물이 흘러 사찰의 운치를 더한다.



학림사 해탈문 옆으로 보이는 계단으로 오르면 용굴암으로 가는 길이다.



108계단의 解脫門(해탈문)

이 문을 지나면 속세를 벗어나 불교 세계 즉 법계(法界)에 들어가게 되며, 해탈을 하겠다는 마음을 갖게 된다고 하여 해탈문(解脫門)이라 한다.

 사찰에서 일주문(一柱門), 금강문(金剛門), 사천왕문(四天王門)을 지나 본전에 이르는 마지막 문(門)이다.

해탈문을 지나야만 진리의 세계가 펼쳐지는 불국정토에 들어갈 수 있으며, 이 문을 들어서면서 부처의 이치를 깨우치라는 뜻이기도 하다.

불교의 우주관에서는 세계의 중심인 수미산의 정상에는 불교의 수호신 제석천왕이 다스리는 욕계 6천의 제2천인 도리천이 있고,

그곳에 경지를 상징하는 해탈문이 있다고 한다.



108계단의 解脫門(해탈문)



解脫門(해탈문)



解脫門 懸板(해탈문 현판)



金剛力士(금강역사)

호법신장(護法神將)의 대표적인 신장(神將)으로서 그 모양이 다양하다. 여러가지 무기를 들고 부처와 불법(佛法)을 수호하는데,

보기만 해도 힘이 솟구치고 가슴을 뛰게 한다.  금강(金剛)은 원래 팔대 보살(八大 菩薩)이 화현(化現)하여 나타난 8대 명왕(八大 明王)을 말한다.

명왕이란 보통이 방법으로 교화하기 어려운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서 분노(忿怒)의 상으로 나타난 존(尊)을 말하며,


8대 보살이 변해서 나타난 8대 명왕(八大 明王)은 다음과 같다.

①馬頭明王(마두명왕) =  관세음 보살(관세음보살)의 화신,         ②大輪明王(대륜명왕) =  미륵 보살(미륵보살)의 화신

③軍茶利明王(군다리명왕) = 허공장 보살(허공장보살)의 화신     ④步擲明王(보척명왕) = 보현 보살(보현보살)의 화신

          ⑤降三世明王(강삼세명왕) = 금강수 보살(금강수보살)의 화신     ⑥大威德菩薩(대위덕 보살)  =  문수 보살(문수 보살)의 화신

        ⑦不動明王(부동명왕) =  제개장 보살(제개장보살)의 화신           無能勝明王(무능승명왕)  =  지장 보살(지장보살)의 화신


이와 같은 보살들이 금강으로 화현할 때 나타나는 8대 금강(팔대금강0은 다음과 같다.

①靑除災金剛(청제재금강)      ②碧毒金剛(벽독금강)      ③黃隨求金剛(황수구금강)      ④白淨水金剛(백정수금강)

⑤赤聲火金剛(적성화금강)      ⑥定除災金剛(정제재금강)      ⑦紫賢神金剛(자현신금강)      ⑧大神力金剛(대신력금강)


이들 금강역사는 어떤 무기로도 당할 수 없는 금강저(金剛杵)를 손에 들고 항상 부처 곁에서 호위하고 있다.

시대와 장소에 따라 이들의 모습도 당양하며, 인도에서는 나신(裸身)으로 나타나고,

중앙아시아 동쪽에선느 무장한 무사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이 일반적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중국 고대의 역사(力士)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이 대부분이며, 해이한 마음으로 사찰의 경내를 배회하다가

이들 금강역사의 분노에 찬 무서운 모습을 보면 가슴이 철렁하고 정신이 반짝든다,

긴장되고 경건한 마음으로 부처의 자비로운 모습을 우러러 보게 된다.

8대 금강이 갖고 잇는 무기도 다양해서, 그들이 손에 든 무기를 잘 살펴보면 옛날의 무술을 짐작할 수 있다.

벽화 금강역사들은 여의주, 긴창, 도끼, 금강저를 각각 손에 들고 있다.

그리고 또 다른 금강역사들은 칼, 바위, 삼지창, 장풍 등을 무기로 삼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金剛力士(금강역사)

호법신장(護法神將)의 대표적인 신장(神將)으로서 그 모양이 다양하다. 여러가지 무기를 들고 부처와 불법(佛法)을 수호하는데,

보기만 해도 힘이 솟구치고 가슴을 뛰게 한다.  금강(金剛)은 원래 팔대 보살(八大 菩薩)이 화현(化現)하여 나타난 8대 명왕(八大 明王)을 말한다.

명왕이란 보통이 방법으로 교화하기 어려운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서 분노(忿怒)의 상으로 나타난 존(尊)을 말한다.



청 사자를 탄 문수동자 = 지혜의 상징

문수 보살을 문수사리(文殊師利) 또는 만수사리(滿殊尸利) · 만수실리(曼殊室利) 등으로도 부른다.

대승보살 가운데 한 분이며, 문수와 만수라는 말은 묘(妙)라는 뜻이고, 사리, 실리라는 말은 두(頭) · 덕(德) · 길상(吉祥)이란 뜻이므로

이를 합치면 지혜가 뛰어나 공덕이라는 뜻이 된다.


보통 석가여래의 보처로 왼쪽에 있으며 지혜를 상징하고 있다. 머리에 5계(髻=상투 계)를 맺은 것은 대일여래의 5지(智)를 나타내는 것이고,

오른손에는 지혜의 칼을 들고, 왼손에는 꽃 위에 지혜의 그림이 그려져 있는 청련화를 쥐고 있다.

위엄과 용맹을 상징하기 위해 늘 청사자를 타고 있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일찍이 반야경을 결집, 편찬하였다고 전해지는 이 보살의 이름을 사람들이 들으면 4중죄(重罪)가 소멸된다고 한다.

화엄경에서는 비로자나불의 협시 보살로서 보현과 더불어 삼존불의 일원이 되어 있다.

문수 보살이 여러 가지 화신으로 우리 곁에 나타나서 이적을 나타낸 이야기는 많다.



흰 코끼리를 탄 普賢菩薩(보현보살) 

보현 보살은 문수 보살과 함께 부처의 양 옆에 자리하고 있는데 문수보살이 부처의 지덕(智德)과 체덕(滞德)을 맡고 있는데 비해,

 보현 보살은 이덕(理德)과 장덕(長德), 행덕(行德)을 맡고 있는 보살이다.

또한 중생의 목숨을 길게 연장해 주는 덕을 가졌으므로 연수 보살(延壽菩薩) 혹은  연명 보살(延命 菩薩)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또는 흰 코끼리를 타고 연화좌에 앉아 있으므로 상왕보살(象王菩薩), 연좌보살(連坐菩薩)이라고 부른다.

부처가 성도한 후 보리수 아래에서 화엄경을 설할 때 보현 보살은 많은 게송을 읊어서 부처의 공덕과 권위와 자비를 일일이 말하여 찬탄하였다.



학림사 안에서 바라본 解脫門(해탈문)



칼을 들고 있는 금강역사들



바위와 칼을 들고 있는 금강역사들



문수보살



보현보살



학림사 해탈문을 통해 청학루로 오른는 108계단 위에 세워진 원숭이 석상들은 재미있고, 귀엽운 모습으로 눈길을 끈다.

어떤 원숭이는 입을 막고 다른 원숭이들은 각각 눈과 귀를 막고 있다.  익살스러운 그 모습들은 무언(無言)의 가르침을 전한다.

사악한 것은 듣지도, 보지도, 말하지도 말라고 말이다. 

이 원숭이 석상들을 보고 있으니 공자가 제자 안회에게 "예(禮)가 아니거든 보지말고, 듣지말고, 말하지 말고, 행동하지 말라" 라고 했던 말이 떠오른다.

    

108계단의 해탈문 입구부터 경내까지 네 쌍의 원숭이들의 모습

해탈문을 입구엔 좌우로 입을 막고있는 원숭이 두 마리가 있습니다. 즉 사찰에서의 묵억과  구업을 짓지말란 뜻일까?

해탈문입구에 있으므로 속세를 벗어나 법계로 들어가 해탈을 하겠다는 맘으로 제일 먼저 묵언부터 생각하는 원숭이일까?

삿된말에 대해서는 대꾸도 하지말라 즉 거짓말, 이간질, 악담 같은 말들...



    

해탈문 안으로 들어서면 두 눈을 가리고 있는 원숭이 해탈문을 지났으니 진리의 세계가 펼쳐지는 불국정토에 들어가니 

나쁜것과 사악한 것은 보지 말고 오직 수행과 부처님의 이치만을...




    

해탈문 안으로 들어가 중간쯤에 있는 원숭이는 이간질이나 거짓말 그리고 악담 화나게 하는 말들은 듣지 않겠다는 생각 그리고

제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습니다.   오직 오직 부처님 말씀만을 법으로 삼고 살아가렵니다.



    

모든 것을 다 견디고 행하면서 지키면  깨달음에 행복해집니다. 환희의 기쁨으로 만세를 외쳐봅니다.



빗물나가는 곳에 두꺼비가 ...



布袋和尙(포대화상)

청학루 앞 뜨락에는 4명의 동자승을 안고 있는 포대화상(布袋和尙)이 연화대좌 위에 앉아 있습니다.


포대화상(布袋和尙)은 중국의 승려인데, 이름은 계차(契此)이고 명주(明州) 봉화현 사람이었다. 몸집이 뚱뚱하고, 이마는 늘 찡그려 깊은 주름이 잡혀 있고,

커다란 배는 늘어져 이상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말이 일정치 않고 횡설수설 아무말이나 잘 지껄였으며, 길을 가다가 피곤하면 아무데서나 잘 눕고,

졸리면 어디서라도 잠을 잤다. 언제나 지팡이에 큰 자루를 지니고 다녔는데 필요한 소지품은 모두 그 자루 속에 넣고 다녔다.

그리고 무엇이든 보기만 하면 달라고 하였는데 얻은 물건도 모두 자루 속에 넣었다. 먹을 것을 주면 받아먹으면서 조금씩 나누어 자루 속에 넣곤 하였으므로,

사람들이 그의 별명을 포대화상이라고 붙였다.  특히 날씨 예측이나 사람들의 길흉화복(吉凶禍福)을 잘 예언하였는데 맞지 않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한곳에 오래 머무르는 법이 없고 계속 어디론가 방황하면서 늘 길을 걸어 다니며 일생을 보냈다. 그가 남기 게송을 봐도 이를 알 수 있다.


一鉢千家飯(일발천가반) = 바루대 하나로 천 짐의 밥을 얻어 먹으며

孤身萬里遊(고신만리유) = 외로운 이 몸 만리 길을 떠다니네

靑日觀人小(청일관인소) = 맑은 날에도 사람 만나기가 어렵고

問路白雲頭(문로백운두) = 길을 묻는 사이 머리에는 백발이 내렸네


자기의 죽음을 예언하고, 서기 916년 3월 명주 악림사(岳林寺) 행랑 밑 반석에 단정히 앉아서 입적하였다.


그때도 다음과 같은 게송을 남겼다.

彌勒眞 彌勒(미륵진 미륵) =  미륵불  중에도 진짜 미륵불

分身百千億(분신백천억)  =  백천억 가지로 몸을 나누어

時時示時人(시시시시인)  =  항상 사람들 앞에 나타나도

時人自不識(시인자불식) = 사람이 스스로 알지 못하네


그때서야 사람들은 포대솨상을 미륵보살의 화현(化現)이라 하여 그 모습을 그려서 받들어 모시게 되었다.



靑鶴樓(청학루)

설법전(說法殿)은 청학루(靑鶴樓)라고도 하는데 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누각건물이다.  대웅전에서 바라 보게되면 설법전이 된다.

이 밑을 지나 대웅전에 이르게 되는데 법회 때 강당으로 사용하고 있다.



靑鶴樓 懸板(청학루 현판)



說法殿(설법전)

설법전(說法殿)은 청학루(靑鶴樓)라고도 한다.  대웅전과 설법전 사이에는 오층탑 있다.

청학루을 통과하면 탑을 중심으로 여러 전각들이 둘러져 있다. 탑을 중심으로 동서남북에 건물들이 배치돼 경내의 풍경은 아늑하다.

 


說法殿 懸板(설법전 현판)



선불장   =  스님들이 참선하는 곳



選佛場(선불장)



選佛場 懸板(선불장 현판)



선불장 1칸 댓돌 위엔 수석들이 놓여있습니다.



선불장 2칸 문살과 문들이 정겨워 부분을 나누어 보았습니다.



선불장 마지막 1칸은 난 들이 댓돌위에 나란히들 놓여있습니다.



선불장 앞 뜨락에 있는 개구쟁이 동자승 상



선불장 앞 뜨락 연화대에 앉아  합장하고 있는  동자승 상



大雄殿(대웅전)

학림사 대웅전은 경사면에 터를 다듬어 건물을 세웠는데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안에는 단층의 닷집을 설치하여 신라 말엽에 조성되었다는 청동석가여래상을 모셨고, 소형의 아미타여래와 탄생불을 봉안하였다.

또한 석가여래 후불탱화와 1985년에 조성한 지장탱화, 신중탱화가 좌우에 있다.



大雄殿(대웅전)과 대웅전 앞에는 오층석탑이 있다.



大雄殿(대웅전)

학림사 대웅전은 경사면에 터를 다듬어 건물을 세웠는데 안에는 단층의 닷집을 설치하여 신라 말엽에 조성되었다는 청동석가여래상을 모셨고,

 또한 석가여래 후불탱화와 1985년에 조성한 지장탱화, 신중탱화가 좌우에 있다.



          우측에 지장보살                                           중앙엔 주불인 석가모니불                                        좌측에 관세음보살



    우측에 지장보살                                           중앙엔 주불인 석가모니불                                        좌측에 관세음보살





삼존상 좌우에 천불탱화가 모셔져있다.

석가보니불과 6대보살과 사천왕이 모셔져 있습니다.



삼존상 좌우에 천불탱화가 모셔져있다.



地藏壇(지장탱)

시왕과 무독귀왕과 도명존자가 그려져 있은 지장탱



神衆壇(신중탱)



예불 동종



大雄殿 柱聯(대웅전 주련)


佛身充滿於法界(불신충만어법계) : 부처님의 법신 법계에 충만하사

普現一切衆生前(보현일체중생전) : 일체중생 앞에 널리 나타 나시니

隨緣赴感靡不周(수연부감미불주) : 인연따라 나아감에 두루하지 않음이 없으시고

而恒處此菩提座(이항처차보리좌) : 언제나 이 보리좌에 앉아 계시네  



鶴林寺 三神佛掛佛圖(학림사 삼신불괘불도) :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 211호     시대 = 조선후기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211호. 비단 바탕에 채색. 세로 467㎝, 가로 269㎝. 제작 시기에 대한 기록은 없으나

1774년 3월 21일 ‘영산탱(靈山幀)’을 중수하여  원통암(圓通庵)에 봉안하였다는 기록이 화기에 전한다.

중앙에 지권인을 취한 비로자나불을 두고 그 좌측에는 보관을 쓰고 영락으로 신체를 장엄한  보살형의 노사나불을, 우측에는 석가모니불을 도해하였다.

이후의 삼신불도가 여래형의 삼신불을 도해한 것에 비해 보살형의 노사나불 도상을 보여준다는 점에서도 중요한 작례이다.


야외 의식용으로 조성된 18세기의 다른 괘불도에 비해 규모는 그다지 크지 않다. 그러나 존상의 배치와 화면의 요소가 실제보다 화면이 커 보이는 효과를 낸다.

삼신불은 머리와 상체의 비율에 비해 몸이 가늘고 길게 표현되었으며 두광(頭光)의 위쪽에는 채색 구름을 두었다.

신체를 따라 길게 뻗어나간 옷주름과 하단으로 내려오는 법의 자락 역시 인물의 세장한 인상을 강조한다.


삼신불이 입상의 형식으로 배치된 18세기의 괘불도로는 1735년 남양주 봉선사 괘불도를 제외하면 유일한 예이다.

비로자나불은 두 손을 가슴 앞에서 모아 지권인(智拳印)을 취하고, 노사나불은 두 손을 가슴 앞에서 바깥으로 벌려 설법인(說法印)을 취하였다.

석가모니불의 왼손은 손바닥을 위로 향한 모습으로 가슴 앞에 들고 오른 팔을 내리고 서있다.


비로자나불과 석가모니불은 통견과 편단우견이라는 착의법, 크기, 수인을 차등 있게 표현하여 구별하였다.

육계는 비교적 높은 편으로 중앙에는 주홍색으로 편평한 계주를 표현하고 정상부에는 백색으로 원형의 계주를 나타냈다.

이마가 넓은 얼굴형에 이목구비는 가는 선조로 나타냈으며 머리카락의 윤곽, 수염과 눈썹은 밝은 녹색으로 표현하였다.


학람사 괘불도는 녹색과 적색을 주조색으로 사용하면서 하늘의 표현, 여래의 법의, 하단부의 바탕에는 연녹색이 채색되었다.

옷주름은 연녹과 청색조에 먹을 더하여 음영 효과를 나타냈으며 법의의 외연부와 가슴을 가로지르는 대의의 외연에는 분홍, 주홍,

청색조에 백색을 더하여 화문을 시문하였다.


♣♣♣

특징 : 화기에는 영산탱을 조성하였다고 기록되었으나 도상은 비로자나불을 중심으로 노사나불과 석가모니불입상이 도해되어 있어 일치하지 않는다.

 영산탱은 석가모니불이 인도의 기사굴산[靈鷲山]에서 설법하는 장면을 그린 영산회탱을 축약하여 부르던 명칭이다.

영산탱은 도해된 주제를 뜻하는 의미 이외에 영산회 의식용 불화라는 또 다른 중의적인 의미가 있다.

조선시대 불보살단에 대한 의례는 영산회(靈山會), 영산작법(靈山作法)이란 절차로 진행되었고, 영산회에 사용되는 불화 역시 영산회탱으로 명명되었다.


화기에는 중수했을 때의 기록이 확인되는데, 불화를 그린 승려를 양공(良工)과 화사(畵師)로 적었다. 기록의 순서는 양공에 이어 화사가 등장하는데,

불화를 처음 조성했던 승려는 화사, 중수에 참여한 이는 양공으로 구분하였다. 화사(畵師)로는 수화승 초흠(楚欽)을 비롯하여

칠혜(七惠), 태운(泰云), 순경(順敬), 덕순(德淳), 시명(是明), 인위(印位), 성운(性云) 등 8인이 기재되어 있다.

이 중 칠혜와 태운은 1735년 각총(覺聰)이 봉선사 괘불을 조성할 때 함께 작업하였다.


학림사 괘불은 18세기 중엽 경 조성되어 1774년 새롭게 중수되었다.

 양공은 처징(處澄), 원유(圓有), 보행(普行)의 세 승려로, 중수의 범위는 그리 크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중수를 담당한 화승 처징은 각총의 봉선사 괘불도 조성에는 참여하지 않았으나  1758년 각총이 여주 신륵사 삼장보살도를 그릴 때 함께 작업한 기록을

확인할 수 있다.  그는 1774년 학림사 괘불을 중수한 후 1788년에는 수화승 경환(敬還)과 상주 남장사 괘불도에 참여했으며

1790년에는 상겸(尙謙)과 용주사 감로도를 그렸다. 대체로 18세기 중반 경기도를 중심으로 행적이 확인되는데 1788년 남장사 괘불도를 조성하면서

남긴 『불사성공록(佛事成功錄)』에는 서울[京]에서 온 화승으로, 1801년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에는 양주목(楊洲牧) 승려로 기재되었다.


학림사 괘불도는 19세기 서울, 경기 지역에 성행하였던 삼신불 괘불도의 선행 사례이다. 그러나 1832년 서울 흥천사(興天寺) 괘불도,

1868년 서울 백련사(白蓮寺) 괘불도와 같이 삼신불을 주제로 한 괘불도의 경우 노사나불이 여래형으로 나타나는 것에 비해

학림사 괘불도는 봉선사 괘불도를 이어 17~18세기에 조성되던 삼신불 도상을 계승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학림사 대웅전과 오백나한전 사이에 있는 수령이 600년에 이르는 반송은 현재 보호수로 지정돼 있단다.



아들을 찾기 위해 발을 씻어 주는 良介和尙(양개화상)의 어머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