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설화 및 꽃의전설

예산 향천사 창건유래

백련암 2009. 11. 14. 20:37

▲전남 광주 약사사의 나한전

 

예산 향천사 창건유래

    금까마귀가 안내한 향기 나는 샘터 사찰

 

 백제 의각스님 중국에서 3천옥불 조성해   뱃길로 모셔와 절 창건 후 香泉寺로 불러 
        

충청남도 예산군 예산읍 향천리에 위치한 향천사. 야트막한 금오산 품에 안긴 향천사 이름을 따서 지명이 유래됐을 만큼

그 역사는 백제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의자왕 16년(서기 650년)에 의각스님이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삼국사기>에 전하는 바에 의하면 의각스님은 키가 7척이나 되고 불법에 밝으며 평소에 <반야심경>을 일심으로 독송하여

  눈과 입에서 광명이 나왔다고 전하고 있다.

 

이처럼 비범한 스님이 창건한 사찰 향천사에는 금까마귀가 나타나 사찰위치를 점지해 주었다는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백제의 국운이 다해 갈 무렵인 646년 의각스님은 일본에 문화사절로 백제사에 가 있다가 중국으로 건너가 오자산(현재의

구화산)에서 구국일념의 원을 세우고 용맹정진에 들어갔다.

“부처님, 풍전등화와 같은 백제를 구해낼 방법을 찾게 해 주십시오.”

5년여 동안 일념기도한 의각스님은 그곳에서 옥돌로 3053불상과 16나한상을 조성하고 향나무로 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대세지보살을 조성하였다.

 

구화산에서 정진하던 스님은 문득 그곳에서 정진인연이 다 되었음을 직감하고 귀국준비를 했다. 그리고는 제자들에게 말했다.

“내가 조성해 놓은 옥불상과 16나한상, 그리고 향으로 만든 부처님과 보살님을 고이 모셔갈 수 있는 넉넉한 배를 준비하거라.”

“예, 스승님.”


제자들의 각별한 준비 덕분에 의각스님이 조성한 불상들은 오산현 북포해안(현재의 예산군 예산읍 창소리)에 도착할 수 있었다.
“스승님, 백제 땅에 당도했사옵다.”  

 

배에서도 참선삼매에 들어 있던 의각스님이 눈을 떴다. 

 

“그래, 고생들이 많았다.”

막상 백제땅에 도착했지만 많은 불상들을 봉안할 장소가 마땅히 없었다.

머나 먼 뱃길을 건너 백제땅에 도착했다는 안도감을 가질 사이도 없이 또 다른 고민에 빠졌다.

                                                               
“어디에다가 불상을 모셔야 할까? 내 이럴 줄 알았으면 먼저 기별을 넣어 장소를 물색해 놓았을 것을….” 
  
마음이 조급해진 의각스님은 포구에다 배를 대어 놓은 채 육지에 올라 이곳저곳을 다니면서 마땅한 장소를  찾아보았으나

적절한 곳이 나타나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배에 불상을 실은 채로 1개월 동안 지극정성으로 기도를 올렸다.

 

그러던 어느 날 새벽예불을 올리는 종소리가 다시 메아리로 돌아오고 있었다.

 

그 일에 연유해 마을 사람들은 이 지역을 종성(鐘聲)마을로 불렀다고 한다. 

 

이후 종성마을은 시간이 지나면서 종경리(宗境里)로 바뀌었다.

의각스님이 계속 지극정성으로 기도를 올리던 100일째 되던 날 드디어 감응이 왔다.

 

그날도 여느 때처럼 새벽예불을 올리고 있었다.

 

그런데 하늘에서 이상한 새가 하늘을 맴돌았다. 의각스님은 조용히 제자들에게 일렀다.

“지금 저 하늘에 맴도는 새가 예사롭지 않구나. 배에서 내려 건너편 산위에 올라 그 행동을 예의주시해 보거라.” 
 
제자들이 화급히 배에서 내려 산 위에 올라가 새의 모습을 살펴보았다.

“아니, 저 새는 금까마귀가 아닌가? 한 마리도 아닌 두 마리야. 그리고 허공에 원을 그리면서 돌고 있어.”

제자들은 스승인 의각스님에게로 가서 산 위에서 보았던 광경을 설명했다.

 

“스승님, 산 위에 금까마귀 한 쌍이 원을 그리고 있었는데 예사롭지 않아 보였습니다.” 

의각스님은 제자의 말을 중간에서 끊으며 화들짝 놀랐다.

“뭐라고? 금까마귀가 나타났다고? 이는 필시 예사로운 징조가 아님을 알려주는 신호다.

 

분명이 상서로운 일이 일어날 것이야. 다시 산으로 가서 금까마귀의 동태를 잘 살피거라.”

제자들은 다시 산 위로 올라가 금까마귀의 움직임을 살폈다.

 

한참동안 주변을 맴돌던 금까마귀가 하늘로 솟구치더니 천천히 이동하기 시작했다.

 

의각스님 제자들은 금까마귀가 가는 곳으로 달려가 보았다.

 

배에서 멀지 않는 산 정상에 앉아 잠시 휴식을 취한 금까마귀 한 쌍이 다시 산 아래로 내려갔다.

“어디로 갔지? 분명히 산을 내려갔는데….”

금까마귀가 간 곳을 잃어버린 제자들은 산 아래를 샅샅이 찾아다녔다.  “저기 있다!”

금까마귀 한 쌍은 산 중턱 우물 옆에서 유유히 물을 쪼아 먹고 있었다.

 

의각스님 제자들이 다가가자 금까마귀는 하늘 높이 날아가 버렸다.

그런데 이게 웬일일까. 금까마귀가 머물렀던 우물에서 향기로운 냄새가 나고 있었다.

“이것 봐. 우물에서 향기로운 냄새가 나고 있어. 저것 좀 봐. 널찍한 장소가 펼쳐져 있어. 아마도 저 금까마귀가 이곳에

부처님도량을 지으라고 계시를 해 준 것이 틀림없어. 어서 스승님께 이 사실을 전하자.”

제자들이 의각스님에게 이 같은 사실을 전했다. “그래, 그곳에 도량을 열라는 하늘의 계시가 내린 것이다.

어서 그곳으로 불상들을 모셔가도록 하자.”

막상 이런 결정을 하고 나자 또 다른 걱정거리가 나타났다.

배에 싣고 온 3053옥불과 16나한, 아미타부처님, 관세음보살, 대세지보살을 옮기려하니 몇십명도 안되는 인력(人力)으로는

엄두가 나지 않았다.

“무슨 방법이 없을까?”

의각스님이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는데 밖에서 소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뱃전에 나가보니 포구에는 힘이 세어 보이는 흰 소 한마리가 수레를 달고 나타났다.

“어허, 부처님이 우리를 돕고 있구나.”

의각스님과 제자들은 흰 소가 끌어온 수레에 옥불상을 모두 운반을 하자 어려운 문제가 해결됐다.

흰 소는 이것뿐만 아니라 사찰 건립에 필요한 목재도 날라다 주었다.

 

이렇게 7일 동안 힘든 일을 다한 흰 소는 크게 고함을 지르고는 죽어 버렸다.

 

이렇게 사찰을 창건한 의각스님은 마지막 회향식날 법상에 올라 사부대중들에게 의미심장한 법문을 했다.

 
“오늘 이 불사가 원만하게 성취될 수 있었던 것에는 우주에 두루하신 호법신장과 부처님의 크나큰 가피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이 도량을 점지해 준 금까마귀와 흰 소의 도움이 없었다면 이번 불사는 엄두도 못 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소납은 이날 부터 이 도량이 들어선 뒷산 이름을 예전에 부르던 덕봉산 대신 금오산(金烏山)으로  부를 것이며

사찰 이름을 향천사(香泉寺)라고 부를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 대중들도 그렇게 불러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하지만 의각스님의 발원과는 다르게 백제는 660년 신라에 의해 멸망 당하고 말았다.

 

의각스님이 조성한 불상 중 1510여 불상은 현재 천불전에 봉안돼 있으며 16나한은 나한전에 봉안돼 있다.

 

의각스님이 입적한 이후에도 향천사는 제자인 도장스님을 비롯해 고려시대 보조국사와 조선시대 멸운스님,

근세에는 보산스님 등이 주석하며 불법(佛法)을 널리 전했다.

 

현재는 전 수덕사 주지인 법정스님이 주석하며 유치원과 선원을 운영하며 수행과 포교활동을 펼치고 있다.

 
예산=여태동 기자,   이시영 충남지사장

 

찾아가는 길 /
1) 서울이나 호남 지역에서는 서해안 고속도로를 이용할 타고 해미 나들목으로 나와 예산읍내로 들어와 금오산으로 찾아 들어오

    면 된다.

2) 대전지역에서는 최근에 개통된 대전-당진 고속도로를 이용해 예산읍내로 들어와 금오산으로 들어오면 된다. (041)335-3556

참고 및 도움 /
향천사 안내판, 향천사 총무 효성스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