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설화 및 꽃의전설

청주 무심천과 남석교의 유래

백련암 2009. 12. 9. 12:58

청주 무심천과 남석교의 유래

충청북도 도청소재지인 청주는 인구 65만을 자랑하는 대도시다. 예로부터 학문의 도시로 유명했던 청주에는 시를 관통하는

소하천인 무심천(無心川)이 흐르고 있다.

 

이름만 들어보아도 불교와 관련이 있을 법한 이 하천은 남천(신라시대)-심천(고려시대)-석교천.대교천(조선시대)-무성뚝(일제시대)으로 불리기도 했다.

 

이러한 명칭과 별개로 예전부터 지금까지 불려오던
이름이 있었으니 무심천이다. 그렇게 불리게 된 계기에는 신라시대 때 남천에 놓여진 남석교에 얽힌 사연에서 유래됐다고 한다. 그 애틋한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보자.
 
  
                                 슬픈사연 담고 無心하게 흘러가는 강
   
 
신라 때 탁발나간 스님이 돌보던 아이 죽자
 
주지스님 마을사람들과 튼튼한 남석교 세워
 
신라시대 때 청주고을(西原京) 남천 양지마을에는 일찍이 남편을 여의고 혼자 사는 과부가 다섯 살배기 어린 아들을 키우며

살았다. 이 과부는 너무나 가난해 하루하루를 남의 집에서 품을 팔면서 살아가야 할 처지라 아들을 이웃집에 맡기고 일을 나가곤 했다.

 
“아가야, 엄마가 일 나가 먹을 것을 얻어 올 테니 옆집에서 잘 놀고 있거라.”  하지만 아기는 좀처럼 엄마와 떨어지지 않으려

 칭얼칭얼 울었다.

그러던 중 이 마을 근처에 있는 사찰에서 탁발을 온 스님이 과부의 집 앞에서 목탁을 치기 시작했다.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 관자재보살 행심반야바라밀다시 조견오온개공….”
 
한참동안 경전을 염송한 스님은 부처님께 올릴 공양물을 시주하라고 권했다. 하지만 과부는 아무것도 시주할 물건이 없었다.

그녀의 품에는 어머니의 유일한 아들만이 정이 그리워 울고 있었다. 무엇이라도 시주하고픈 마음이 든 과부는 스님에게 정중하게 부탁을 했다.

 
“스님, 저는 지금 스님에게 드릴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지만 스님께서 저의 아들을 오늘 하루만 돌봐 주신다면 제가 일을 나가 벌어온 것을 스님에게 보시할 수 있습니다. 저녁까지만 저의 아들을 돌봐 주시겠습니까?”
 
탁발 나온 스님은 과부의 갑작스런 제안에 당황스러워한  나머지 엉겹결에 “아, 예…”하고 대답하고 말았다.
가뜩이나 아이를 이웃에 맡기기 미안했던 과부는 스님에게 두 번 세 번 고개를 조아리며 감사의 인사를 올렸다.

 

탁발 나온 스님은 꼼짝없이 과부의 집에서 하룻동안 아들을 돌볼 처지가 돼버렸다.
 
과부가 집을 나가자 혼자 남은 탁발승은 아이를 방에 들여 놓고 마루에 앉았다. 사찰생활이 워낙 힘들었던 스님은 따스한 햇볕이 들어오는 마루에 앉아 있으려니 졸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이를 돌봐야 하는 처지라 졸음이 올 때마다 마당을 휘휘 돌며 졸음을 쫓았다.
 
하지만 계속 밀려오는 졸음을 이기지 못한 스님은 마루에 기대어 깜빡 잠이 들고 말았다. 그 사이 방안에서 놀던 아이는 지겨웠던지 밖을 나와 마당에서 놀다가 엄마를 찾기 시작했다.

 

이런 사실도 모르는 탁발승은 아예 마루에 엎드려 잠이 들고 말았다.

 

엄마를 찾아 나선 어린 아이는 집안 남천에 다다랐으나 엄마가 보이지 않자 개천에 놓여 있는 외나무다리를 건너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그만 발을 헛디뎌 강물에 빠져 죽고 말았다. 잠에서 깨어난 탁발승은 아이를  찾
아보았으나 보이지 않자 누가 데려간

줄로만 알고 다시 절로 돌아갔다.

 
저녁 무렵 일을 끝내고 돌아오던 어머니는 남천을 지나다가 자신의 아들이 물에 빠져 죽은 모습을 발견하고는 얼른 물에 들어가 시신을 끌어안고 대성통곡을 하기 시작했다.
 
“아이고, 내 아들아. 어찌하여 강물에 빠져 이렇게 주검으로 어미 품에 돌아왔단 말이냐.”
 
어머니는 죽은 아들을 땅에 묻으며 모든 책임을 자신의 잘못으로 돌렸다.
“이제 와서 누구를 원망한단 말이냐. 모든 것은 내가 아들을 잘못 돌본 탓이거늘….”
 
아들의 장례를 마친 어머니는 아들의 극락왕생을 빌기 위해 홀연히 마을을 떠나 이름 모를 사찰로 들어가  스님이 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대원사 주지스님은 탁발승을 불렀다. 
혹여, 네가 일전에 남천에 탁발 갔을 때 어린 아들을 돌본 적이 있느냐?”
 
주지스님의 물음에 영문도 모르는 탁발승은 “네, 아이의 어미가 일을 나가 시줏물을 구해오겠다고 해서 한나절 돌본 적이 있습니다만….”
 
“그래? 그럼 그 아이를 잘 돌봐주었느냐?”
 
그제서야 탁발승은 머뭇거리며 말했다. “그게 저… 소승이 깜빡 잠이 든 뒤 일어나 보니 아이가 보이지 않아 누가 데려간 줄

알고 절로 돌아왔습니다.”

 
주지스님은 탁발승을 나무라지 않고 조용히 자기 방으로 돌려보냈다. 그리고는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긴 한 숨을 쉬었다.
 
“나무아미타불….”
 
며칠이 지난 뒤 대원사 주지 스님은 모든 대중스님들을 불러 모았다.

 

“내가 스님들을 불러 모은 이유는 우리가 탁발을 하러 다니는 남천의 외나무다리가 사람이 다니기에는 너무 위험해 스님들이

  나서서 튼튼한 다리를 놓자고 부탁하기 위해서입니다.

 

자고로 우리 스님들은 중생들을 제도하기 위해 삭발.염의하고 수행하고 있으니 중생들과 우리를 위해 다리를 놓는 것도 큰 복을 짓는 일이 아닌가 싶습니다.”
 
아무도 반론을 하지 못할 정도로 논리정연한 말을 하는 주지스님의 말에 어떤 스님도 반대할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남천에는 대규모 토목공사가 시작됐다. 당시 스님들은 큰 절을 짓거나 다리를 놓을 때 주도적으로 나서기도 해 다리를 놓는 기술이 능통했다.

 

스님들이 다리를 놓으려고 하자 마을 사람들도 스님들을 기꺼이 도왔다.
 
이 모습은 청주고을을 드나드는 모든 사람들이 보게되었고, 인근 사찰 스님들도 의미있는 불사라며 삼삼오오 공사현장을 찾아와 일손을 도왔다.
이렇게 해서 남천 옆에는 임시 숙소가 마련되었고, 스님들과 주민들은 100일여 동안 대규모 토목공사를  벌여 마침내 튼튼한

돌다리를 완성했다.

 

준공식 날이 되자 청주고을 사람들과 스님들이 운집했다. 대원사 주지 스님이 단상에 올라와 자신이 돌다리를 추진하게 된 경위

를 설명했다.  

 
“소승이 주지로 있는 대원사에 한 스님이 탁발을 나가 남천 양지마을 아이를 돌보다가 잘못하여 아이를 물에 빠져 죽게 한 적이 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후 소승은 애통하게 죽은 이 아이의 영가를 천도해 주고  다시는 이런 일이 있어서는 안되겠다는 생각

에 튼튼한 다리를 놓겠다는 원력을 세웠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이 불사가 원만하게 이루어져 오늘 회향식을 갖게 되니 모든 것이 부처님의 은덕이 아닌가싶습니다.

 

오늘부터 소승은 남천에 빠져 죽은 아이의 극락왕생을 위해 다시 100일 기도에 들어가겠습니다.”
 
대원사 주지스님의 말이 끝나자 당시 탁발을 나갔던 스님이 스스로 단상에 나와 자신의 과오를 다시 한번  참회했다.

 

이 모습을 본 청주고을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지금 와서 누구를 탓하고 누구를 원망하랴.

 

미운 것은 아이를 집어 삼키고도 말없이 흘러간 무심(無心)한 남천이 아니겠냐”고 한탄을 했다.
이 일이 있은 뒤부터 청주고을 사람들은 ‘남천’을 ‘무심천(無心川)’으로도 부르기 시작했다. 그 이름이 현재 무심천으로 고정돼

불리어지고 있다.

 
그때 놓인 다리는 남천에 놓인 다리라는 의미에서 ‘남석교’(南石橋)’ 혹은 ‘석교(石橋)’ ‘대교(大橋)’로 불렸다. 이 다리는 일제시대 때 도시개발계획에 따라 매몰되었으며 현재는 청주시 남문로1가 중앙로가 끝나는 사거리 너머 석교동 육거리시장에 원상태대로 흙속에 묻혀 있다.
 
청주=여태동 기자  
  
■ 찾아가는 길
경부고속도로나 중부고속도로를 타고 도청으로 가다보면 청주시 중심을 흘러가는 강이 나온다.
 
※참고 및 도움 - 무심천 유래비, 손광섭 청주건설박물관장.

 

 

'불교설화 및 꽃의전설' 카테고리의 다른 글

무거와 김신암  (0) 2009.12.27
청주 용두사지철당간 유래   (0) 2009.12.14
태안 젓개포구와 서산 간월암  (0) 2009.11.21
예산 향천사 창건유래  (0) 2009.11.14
율곡선생과 나도밤나무  (0) 2009.11.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