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설화 및 꽃의전설

태안 젓개포구와 서산 간월암

백련암 2009. 11. 21. 12:28

태안 젓개포구와 서산 간월암

물이 빠져 있는 간월암 

 

간월암 앞바다 

 

간월암 관음전 

간월암 관세음보살

 

사찰 옮겨 어부들의 목숨을 구하다

 

신라 말 무학대사 건승포서 정진하던 중

어선이 자주 좌초되자 간월도로 절 옮겨


안면읍에서 서쪽 해안으로 들어가면 방포항이 있다. 행정구역으로는 태안군 안면읍 승언8구다. 신라시대 때는 이 곳을

 ‘건승포’로 불렀다. 그러던 명칭이 신라 말에는 ‘젓개포구’로 바뀌었다.

 

‘절을 개조한 포구’라는 의미에서 ‘절개 포구’라고 부르다가 ‘젓개포구’로 부른 것. 이곳에는 신라 말 무학대사가 해안 옆에서

절을 짓고 살면서 도를 닦다가 배가 자주 좌초돼 인근 간월도로 절을 옮겨 간월암을 창건했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허허, 이거 큰일 났구나. 또 배가 암초에 걸려 가라 앉고 있어.”

옛날 젓개포구 옆에서 무학대사가 자그마한 암자를 창건해 수행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이 절 앞을 지나는 배가 자주 좌초를 당해 인명이 희생되는 사고가 발생했다.

서해 바다라 파도가 거세지도 않는데 원인을 알 수 없는 사고를 보면서 무학대사는 적잖이 걱정을 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무학대사는 제자들에게 지시를 했다.


“내가 이곳에 절을 짓고 수년동안 수행을 하고 있는 이유는 만 중생을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함이다.

 

내가 제도해야 할 중생들 가운데는 바다에 나가 고기잡이를 하는 선원도 있고, 땅에서 농사를 짓는 농부들도 있다.

그중 바다에 나가 고기를 잡는 어부들이 이 절을 지날 때마다 희생되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아파 견딜 수가 없구나.

그러니 너희들이 왜 배들이 이 절을 지나다가 좌초되는지 원인을 알아 보거라.”

스승의 지시에 제자들이 한자리에 모여 골똘히 생각했다. 그중 한 스님이 묘안을 떠올려 말을 꺼냈다.

“여기서 아무리 방법을 찾아봐도 원인을 알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니 우리 중에 누가 아예 고기잡이 배를 타 보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러자 다른 스님이 반대했다.

 

“만약에 배를 타고 나갔다가 좌초되어 목숨을 잃어 버린다면 아무 소용이 없질 않습니까?”

그랬다. 배가 좌초되는 이유를 알려고 하다가 소중한 목숨만 더 잃을 것이 뻔했다.

한참 고민하던 스님들 가운데 한 스님이 묘안을 꺼냈다.

 “방법이 있습니다. 배가 가라앉을 것에 대비해 우리 가운데 한 명이 인명구조용 배를 큰 배에 싣고 출항을 하는 겁니다.”

이렇게 해서 제일 젊은 스님이 어부가 되어 고기잡이 배에 오르게 되었다.

 

출항에 앞서 스님은 어부들에게 제안을 했다. “여보게들, 자네들도 알다시피 건승포 앞에만 가면 배가 뒤집히니 혹여

그렇지도모를 것에 대비해 작은 배를 한척 마련해서 고기잡이를 나가도록 하세.”

건승포 앞에 사고가 자주 일어나는 사실을 알고 있는 어부들은 누구도 반대하지 않고 만일의 사고에 대비해 인명구조용 배를

함께 싣고 고기잡이를 나갔다.

 

며칠을 바다에서 보낸 어부들은 만선의 기쁨을 안고 건승포로 돌아오기 위해 뱃머리를 돌렸다.

칠흙 같은 어둠 속에서 선장이 배를 몰기란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하지만 오랫동안 배를 조종한 경험이있는 선장이 침착하게 건승포로 조타수를 돌렸다.

 

선장은 인적이 없는 항구인 건승포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사찰에서 나오는 불빛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그는 밤낮으로 기도하기 위해 켜 놓은 사찰의 불빛을 등대 삼아 서서히 항구로 배를 몰았다.

그런데 갑자기 뭔가 걸리는 듯한 둔탁한 소리를 내며 배가 멈춰버렸다.

“무슨 일입니까? 선장님.”

선원들이 깜짝 놀라 선장실로 달려갔다. “큰일났네. 만선의 기쁨을 누리기는 틀린 것 같네. 배가 암초에 걸려 버렸다네.”

사태가 화급해지자 어부로 변신한 스님은 암초에서 벗어나기 위해 인명구조용 배를 바다에 띄웠다.

“여보게들, 어서 이 배에 올라들 타시게. 그래야 배의 무게가 가벼워진단 말일세.”

10여 명의 선원들이 인명구조용 배에 올라타자 만선의 배는 다시 부력(浮力)을 얻어 암초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허허, 자네가 아니었으면 만선의 기쁨은커녕 건승포 앞바다에서 물고기 밥이 될 뻔 했네. 고맙네, 고마워.”

무사하게 건승포로 돌아온 선원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 쉬었다.

어부로 가장한 스님은 곧바로 절로 돌아와 무학대사에게 그동안 있었던 일을 상세하게 고했다.

“스님, 많은 어선들이 밤늦게 항구를 출입할 때 우리 절의 불빛을 등대삼아 다니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절 앞에는 밀물과 썰물의 차이가 너무 커 밀물 때는 아무 문제가 없으나 썰물 때는 배의 바닥이 암초에

부닥쳐 사고가 일어나기 쉽습니다.”

무학대사가 한동안 말을 들은 후 스님에게 물었다. “그럼, 어떤 방도가 있겠느냐?”

“저, 저….”

제자인 스님은 차마 사찰을 옮겨야 한다는 말을 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그러자 무학대사가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그래, 너의 입으로 절을 옮겨야 한다는 말을 차마 하지 못하겠다는 뜻이로구나. 내 너의 뜻을 알겠으니 이만 물러가도록 해라.”


 

제자가 물러간 뒤 무학대사는 법당에서 깊은 침묵으로 일관하며 며칠 동안 문밖 출입을 하지 않고 기도를 했다.

 

그리고는 법당 문을 활짝 연 뒤 제자들을 불러 모았다.

“내가 이곳에 절을 지은 지 10년이 넘었다. 여기를 다녀간 제자들도 100명이 넘었어.

하지만 이제 이 절의 기운은 여기까지인 것 같다.

머지않아 이 절을 폐사시키고 새 수행처를 찾을 것이니 그리 알고 준비하도록 하라.”

그러자 제자들이 이구동성으로 스승에게 물었다. “스승님, 그러면 어디로 수행처를 옮기시려 하십니까?”

무학대사는 조용히 답했다.

“이곳에서 북서쪽으로 50리 떨어진 조용한 곳이다.”

그리하여 제자들은 사찰에 모셔놓은 부처님과 사찰건물을 해체한 뒤 부재들을 수레에 싣고 50리 길을 이동 했다.

무학대사는 안면도를 한 바퀴 돌아 지세를 살핀 뒤 한 곳에 짐을 내릴 것을 명했다.

 

그곳은 풍랑이 휠씬 조용했다.

 

대신 밀물 때는 바닷물에 잠겨 섬이 되는 현재의 부석면에 위치한 간월도였다.

 

이곳에서 무학대사는 수행을 하다가 달을 보고 홀연히 도를 깨치시고 난 후 암자 이름을 간월암(看月菴)이라 불렀다.

무학대사는 그 후 조선을 개국한 이성계의 스승이 되어 한양을 도읍지로 정하는 등 조선의 건국에 많은 공헌을 했으며

조정에서는 간월도, 황도 등을 사찰 땅으로 하사했다.

이후 간월암은 조선왕조의 불교배척 정책으로 완전히 폐사됐다가 근세에 만공선사가 제자인 벽초스님에게 명해 중창했다.

 

무지개처럼 아름다운 섬들 사이로 드러나는 일출과 일몰은 빼어난 장관을 이루는 간월암은 하루 두 번씩  밀물과 썰물 때는

섬과 육지로 변화되는 세계에서도 보기 드문 천혜의 자연경관을 자랑하는 사찰로 요즘도 기도객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태안 서산=여태동 기자 

찾아가는 길

젓개포구(방포항)는 꽃지해수욕장과 맞붙어 있는 항구다.

서해안 고속도로에서 홍성 나들목을 나와 안면도로 들어가 꽃지 해수욕장으로 가기 전 방포항 이정표를 따라 들어가면 된다.

참고 및 도움

간월암 홈페이지, 방포항 꽃다리수퍼 주인, 안면읍 창기4리 김희식(83) 할머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