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설화 및 꽃의전설

율곡선생과 나도밤나무

백련암 2009. 11. 14. 20:17

율곡선생과 나도밤나무

조선중기의 대표적인 학자이자 정치가였던 율곡 이이(栗谷 李珥 1536~1584)선생. 그는 한국의 어머니상으로 꼽히는 신사임당의 아들로 강원도 강릉 오죽헌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다.

이후 본가인 경기도 파주시 파평면 율곡리에서 시와 서(書)를 익히며 조선시대의 대학자로서의 인격을 연마했다. 그와 관련된 어린 시절(혹은 탄생에 대한)에 대한 이야기가 흥미롭게 전해지고 있다.

그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보자.

 

이이선생이 호랑이의 액운을 피한 사연은?

 

예시자 권유로 밤나무 1000그루 심어  1그루 모자라자 나도밤나무 도움 받아

    

#1 율곡의 아버지 이원수가 인천에서 수운판관(水運判官, 조세를 운반하는 관직)으로 재직할 때다.

이때는 부인인 신사임당을 비롯한 식솔들이 강릉에 살고 있었다.

어느 때 휴가를 받은 이원수는 강릉의 처가로 가기 위해 가던 중 날이 저물어 평창의 한 주막에서 여장을 풀게 되었다.

그 주막에는 예지력이 뛰어난 여인이 주모로 있었다. 그녀는 이원수를 보더니 상서로운 기운이 몸에서 나오는 것을

보고 그에게 말했다.

 

“나으리께서는 지금 하늘의 상서로운 기운을 받고 계십니다. 분명 댁으로 가시게 되면 합궁을 하게 돼 자식을 얻을 것이오니

매우 큰 경사가 될 것입니다.”

 

이원수는 기분 나쁘지 않은 칭찬이 싫지 않았다.

 

“고맙소. 주모. 그대는 사람의 마음을 즐겁게 하는 재주를 타고났구만.” 이어 주모는 이원수에게 말을 덧붙였다.

 

“나으리, 소인은 그냥 나으리를 기쁘게 해 드리려는 뜻에서 드리는 말이 아니옵니다.

 

그저 저는 나으리의 풍모에서 나오는 기운을 보는 남다른 능력이 있어서 그렇게 말씀 드리는 것 뿐이옵니다.

 

그런데 꼭 드릴 말이 한마디 더 있습니다.” “지체하지 말고 해 보시오.” 주모는 조곤조곤 말을 이었다.

 

“이번에 나으리는 귀한 인물을 얻을 것은 분명하나 나쁜 액운도 함께 타고 나 호환(虎患, 호랑이한테 당하는 나쁜 일)을 조심하셔야 합니다.” 이원수는 주모의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허허, 이상한 일이군. 아직 있지도 않는 자식 이야기를 하지 않나. 또 액운은 뭔가?”

이상하게 생각한 이원수는 주모에게 물었다. “내 다가올 일에 대해 잘 알 수는 없으나 그리 된다고 하니, 주모의 말을 믿어보겠

다. 호환이 있다고 하니 피할 길도 있을 것이 아니요. 그 방도를 내게 일러주시오.”

 

“네, 있습니다. 나으리께서는 창차 태어날 아드님을 위해 뒷산에 밤나무 1000그루를 심으세요. 그리고 아드님이 자라서 험상궂

게 생긴 스님이 아드님을 보자고 말하면 뒷산에 밤나무 1000그루를  심었으니 그것을 시주하면 호환을 피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원수는 황당한 이야기에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강릉에 도착한 이원수는 며칠 처가에 머물고 간 뒤 신사임당에게서는 태기가 느껴졌고, 율곡 선생이 태어났다. “허허, 그 주모의 말이 정말이었구나.

 

그렇다면 장차 이 아이에게도 호환이 닥칠 것이야.”  학문에 남다른 능력을 보인 율곡이 무럭무럭 자라던 어느 날 험상궂게 생긴 스님이 그를 찾아왔다.

 

“댁의 아드님을 한번 보고 싶습니다.”

율곡의 아버지는 직감적으로 불길한 일이 일어날 것임을 간파하고 거부했다. “보여 줄 수가 없소. 나는 이미 뒷산에 밤나무 1000그루를 심어 놓았소.  그러니 그것을 가져가시고 대신 내 아들을 데려갈 생각은 추호도 하지 마시오.”

 

그러자 스님은 대뜸 말했다. “어디 밤나무 1000그루가 있는지 가 봅시다.”

험상궂게 생긴 스님과 율곡의 아버지 이원수는 뒷산으로 올라가 밤나무의 숫자를 세기 시작했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뒷산에는 밤나무 1000그루에서 한 그루가 썩어서 999그루 밖에 남지 않았다.

당황한 이원수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는데 밤나무 숲 어디선가 “나도 밤나무요”라는 소리가 들려왔다.

가만히 보니 밤나무와 똑같이 생긴 나무가 자신도 밤나무라며 주장했다. 그래서 꼭 1000그루의 밤나무가 되었다.

그러자 험상궂은 스님이 갑자가 호랑이로 변하더니 멀리 도망쳐 버렸다.

 

이런 사건이 있는 후부터 율곡 선생은 호랑이의 화를 면하고 유명한 대학자가 되었다고 한다.

후에 사람들은 ‘나도 밤나무’를 율곡 선생을 살렸다고 해서 활인수(活人樹)라고 부르고 마을 이름도 율곡리(栗谷里)라고 불렀다

고 한다. 율곡선생의 호도 여기에 연유해 ‘율곡(栗谷)’이라 불렀다.

 

 

#2 율곡선생이 어린 시절 집에서 공부에 전념하고 있었다. 워낙 총기가 뛰어난 지라 3살 때부터 글을 깨치기 시작했다.

 

어느 날 외할머니가 석류를 들어 보이며 “이것이 무엇과 같으냐”고 물었다. 이에 어린 율곡은 “껍질 속에 잘게 부서진 붉은 구슬

을 싸고 있는 것  같네(石榴皮裏碎紅珠)”라는 싯구를 읊었다. 깜짝 노란 할머니는 속으로 “장차 큰 인물이 될 것이야”라며

어린 율곡이 ‘큰 그릇’임을 알아차렸다.

 

하루가 다르게 학문의 깊이가 더해질 무렵 율곡이 사는 집에 한 스님이 탁발을 왔다. 문밖에서 스님이 목탁을 치자 그 소리는

대문이 쩌렁쩌렁 울릴 정도였다.

 

이때 율곡의 어머니 신사임당이 안에서 나와 쌀을 한 됫박 퍼서 스님에게 건넸다.

 “부처님 가피력이 댁의 가정에 영원하시길…”

 

스님은 잠시 축원을 올린 뒤 돌아가려다가 잠시 발걸음을 멈추었다. 사랑채 멀리서 글공부에 심취해 있는 어린 율곡을 보았기 때

문이다.  그의 범상치 않는 모습을 본 스님은 찬찬이 관상을 훑어보았다.

그러다가 갑자기 이상한 점을 발견하고는 시주를 한 신사임당에게 한마디 당부했다.  “나무관세음보살,

 

댁의 아드님은 참으로 귀한 상을 지니고 태어나셨습니다. 장차 나라를 위해 큰 인물이 될 것은 분명하나, 장차 호산에 갈 팔자(호랑이에게 물려갈 팔자)이니 조심하셔야 합니다.”

 

깜짝 놀란 신사임당은 그것이 무슨 말이냐고 되물으며 해결방도를 물었다. 그러자 스님은 나직한 목소리로 신사임당에게 말했

다.  “댁의 아드님은 몇 년 뒤 호랑이의 화에 직면하게 될 것입니다.

 

그 호랑이는 분명 험상궂은 사내의 모습을 하고 아드님의 얼굴을 한번 보자며 보챌 것입니다. 그러니 뒷산에 밤나무 1000그루를 심어 그때가 되면 그 험상궂은 사람에게 밤나무를 희사를 하겠다고 하면 화를 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신사임당은 뒷산에 밤나무 1000그루를 심어 만일의 사태에 대비했다. 몇 년이 지난 뒤 스님이 일러 준 그날 과연

험상궂게 생긴 사내가 찾아와 율곡을 보겠다고 했다.

 

이에 신사임당은 율곡을 보여주지 않고 대신 “밤나무를 줄 터이니 돌아가라”고 부탁했다. 그러자 그 사내는 “그럼 밤나무 1000

그루를 확인해 보자”며 뒷산으로 올라갔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지 밤나무 수는 아무리 세어 보아도 한 그루가 부족했다. 신사임당은 주변을 둘러보니 심어 놓은 밤나무

가운데 한 그루가 죽어 있었다.  너무 당황해서 안절부절 하고 있는데 어디서 우렁찬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나도 밤나무요!” 그러자 험상궂은 사내는 갑자기 호랑이로 변해 버리면서 도망쳐 버렸다고 한다.

비슷한 내용의 두 가지 전설이 전해지는 곳에 대해서는 경기도 파주시 율곡리라는 설과 강릉시 왕산면 노추산 이성대(二聖臺,

공자와 맹자를 기리는 사당으로 설총과 율곡선생이 수도했던 곳이라고 함)라는 설,

 

그리고 율곡선생이 나고 자랐던 강릉 오죽헌이라는 이야기가 분분하다. 다만 파주시는 지난 2005년 율곡리 산 100-1번지에 위치한 화석정(율곡선생이 어린 시절 이곳에 와서 명상과 시를 즐겨했던 곳이라 전하는 곳) 주변에 “나도 밤나무” 1000그루를 심고,

기념비를 세워 그 설화를 계승하려는 노력을 하고 있다.

 

강릉·파주=여태동 기자

 

※참고 및 도움=정문교씨(강릉 율곡평생교육원장), 오죽헌 관리사무소, <파주시 지명유래집>,

                        신동균씨(파주시 문화재관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