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랑성 유유히 거닐며 史庫 자취 찾아볼까나
고구려때 개산…왕실종찰 역할 맡아
‘조선왕조실록’보관 역사도 생생해
인천 강화군 길상면 온수리에 자리잡은 정족산 전등사(傳燈寺). 주위 2km의 삼랑성에 둘러싸여 있다.
선교(禪敎)의 본산인 전등사는 숱한 선객과 학승이 배출된 송도요, 경기도 대표 중견사찰이다.
연산군이 김포 포구에서 지척인 강화도로 귀양살이를 떠나 올 때 울부짖던 장면을 상상하면, 한때 강화는 서울서 절망적으로
먼 곳이었건만, 지금은 서울근교나 다름없다. 뻥뻥 뚫린 외곽도로를 타고 달리면 서울서 전등사까지 1시간이면 족하다.
서울·경기권에 거주하는 ‘도시인’들이 찾아와 산중에서 고즈넉한 하룻밤을 보내기엔 안성맞춤이다.
지난 2008년 한해동안 전등사서 템플스테이를 체험한 인원은 외국인 459명을 합쳐 총 2131명이다.
1942년 편찬된 <전등본말사지(傳燈本末寺誌)>에 따르면 전등사는 381년(고구려 소수림왕 11) 아도화상이 개산했다.
당시 이름은 진종사(眞宗寺)다. 고려 충렬왕 때 왕비인 정화궁주가 ‘인기(印寄)’라는 스님을 송나라에 보내서 대장경을 찍어오게 해서 전등사에 두었고, 구슬로 만든 ‘옥등(玉燈)’을 헌납한 일을 계기로 이후 진종사는 전등사로 이름을 고쳤다고 전해진다.
고려 때 강화에서 조성된 팔만대장경 역시 부처님의 가피로 나라를 지키겠다는 호국불교 사상의 결정체다.
당시 강화엔 잊지 못할 역사가 전개됐다. 고종 18년(1231) 몽고의 침략을 당했고, 이듬해인 1232년 고종은 왕실 귀족을 비롯한 조정 관료들과 함께 모두 강화로 천도하여 원종11년(1270)에 개성 왕도(개경)로 다시 돌아오기까지 39년동안 몽고군사와 대치하면서 나라를 지킨 파란만장한 역사가 바로 그것이다. 강화 곳곳에 고려시대 별도인 강도의 왕궁터가 남아있고 몽고와 항쟁하던 흔적들도 성곽 곳곳에 남아있는 까닭이다.
고려 왕실이 개경으로 환도한 뒤, 39년 동안 쓰였던 강화 궁궐터는 몽골군에 의해 폐허로 변하고 말았다. 그럼에도 삼랑성
안의 전등사는 사세를 유지해 나갔다. 고려 왕실의 각별한 애정과 정족산의 산세가 어우러진 탓일까. 풍수가들도 ‘마니산이 할아버지산이라면 정족산은 할머니산으로, 신령스러운 기운이 있어 전란에도 피해를 입지 않는 복지(福地)’임을 강조한다.
전등사는 실록을 소장한 왕실종찰로서 꾸준히 성장했다. 숙종 때인 1678년 조선왕조실록을 전등사에 보관하기 시작하면서
전등사는 왕실종찰로서 두각을 나타냈다. 본래 왕실에서는 실록을 4부씩 만들어 궁궐 내의 춘추관과 충주, 성주, 전주 등
네 군데의 사고(史庫)에 보관하도록 했다. 하지만 임진왜란 때 모두 소실되고 전주 사고만 무사했다. 조정에서는 임진왜란 후
전주 사고본을 4부씩 옮겨 적게 하여 전주 사고본은 강화 전등사로 옮겼고, 다른 실록은 봉화 태백산, 영변 묘향산, 평창 오대산에 각각 보관하게 했다.
1707년 강화 유수였던 황흠은 사각(史閣)을 고쳐 짓고, 다시 별관을 지어 ‘취향당’이라고 했다. 그때부터 정족산 사각은 실록은 물론 왕실의 문서까지 보관하는 ‘보사권봉소((譜史權奉所)’로 정해졌다.
이때 왕실의 세보인 선원세보를 비롯해 왕실 문서를 보관하던 건물이 ‘선원각’이었다. 이후 1719년부터 1910년까지 전등사의
가장 어른스님에게는 조선 최고의 승직인 ‘도총섭’이라는 지위가 주어졌다. 1726년에는 영조가 직접 전등사를 방문해 ‘취향당’ 편액을 내렸는가 하면 1749년에는 영조가 시주한 목재를 사용해 전등사의 중수(重修) 불사가 이뤄지기도 했다.
네 모서리 기둥 윗부분에는 발가벗은 여인상을 조각해 놓았다 = 네 모서리 마다 조각상이 다르다.
네 모서리 기둥 윗부분에는 발가벗은 여인상을 조각해 놓았다 또 다른모습의 조각상
전등사에 전해오는 재미난 전설도 있다. 대웅보전(보물 제178호) 네 귀퉁이 추녀 용마루 밑에 각각 조성돼 있는 나신상(裸身像)이다. 나부상(裸婦像)이라고도 불리는 이 원숭이형 목조장식은 절을 짓던 도편수의 순정을 배반하고 돈까지 챙겨 달아난
아랫마을 주모가 벌을 받는 형상이라고 전한다. 이 전설은 사실 근거없는 ‘루머’일 뿐이다. 한글대장경 <육도집경>에 담긴 전생 부처님의 행적과 원숭이와의 깊은 인연 얘기를 안다면 나신상의 조성 이유를 알만하다. ‘도편수의 돈을 떼먹고 도망간 술집
작부’가 아닌, 전생에 원숭이의 왕이었던 부처님의 은혜에 보답하고자 하는 한없는 공덕의 뜻이리라. 보은 법주사 팔상전
네 귀퉁이 추녀 밑에도 유사한 형식의 ‘나신상’이 조성돼 있으니, 두 말할 나위가 없다.
이외에도 전등사에는 아주 잘 알려진 은행나무가 아름드리로 서 있다. 늦은 여름부터 가을 한복판에 이르기까지 노랗게 물드는 은행나무를 보노라면 장관이다. 600여년의 수령을 자랑하는 두 그루의 큰 은행나무는 열매를 맺지 않는다는 신비로움을 간직하고 있다.
600년 세월 그 자리를 지켜온 은행나무 곁에는 윤장대(보물 제684호)가 서 있다. 가만히 윤장대를 돌려보자. 수천년 견디고 버티어서 남겨진 옛 경전의 자취, 천년고찰의 향기를 마음에 담아볼 일이다.
전등사 템플스테이는… 3명의 스님이 전문지도
‘경판인쇄’ 인기프로그램
전등사의 템플스테이는 올해 부처님오신날을 기점으로 확 달라진다. 우선 100여 명이 먹고 잘 수 있는 전용관이 오는 5월께 완공된다. 사찰문화체험 및 불교교리와 사찰역사 등을 공부하는 교육관도 생긴다. 전등사가 이처럼 템플스테이를 원만하게 시행할 수 있는 대대적인 불사를 추진하는 이유는 올해가 정부지정 ‘인천방문의 해’인데다, 2014년 인천 아시아게임 개최 등을 겨냥한 것으로 보인다.
전등사 템플스테이 프로그램은 알차다. 범우스님, 지현스님, 학진스님 등 3명의 스님이 전문적인 템플스테이 지도법사 소임을 맡고 있다. 참선지도, 사찰예절 습의, 운력, 사찰안내, 발우공양 등을 세 스님이 각각 나눠서 체계적으로 지도한다.
특히 전등사의 경우 ‘경판인쇄’라는 차별적인 프로그램을 도입했다. 참가자 들이 직접 자기 손으로 탁본한 경전을 소장할 수
있도록 하는 ‘인기 프로그램’이다.
지난 1년간 템플스테이를 지도한 지현스님은 “템플스테이 하룻동안 불교의 모든 것을 전해주기는 어렵다”며 “고요한 산사에서 하룻밤 편안하게 쉬었다 돌아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우선이다”고 말했다.
스님은 그러나 “염주끼우기, 연등만들기, 참선체험, 다도실습 등의 천편일률적인 프로그램에 다소 한계가 있다”며 “올해는 사불(寫佛)과 사경(寫經) 등 새로운 수행프로그램을 실시해서 ‘3자1배’ ‘10자1배’ 등 참가 불자들이 적극 동참할만한 형식 등을 고심하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