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품 템플스테이와 부처님이야기

일엽스님 깨달음의 길과...= 예산 수덕사

백련암 2009. 12. 1. 03:12

수덕사 근대 역사여행

수덕사삼층석탑(시도유형문화재 제103호) - 수덕사 대웅전앞에 있는 삼층석탑이다.

2층기단위에  3층의 탑신을 올리고 머리장식을 얹은 모습이다. 기단과 탑의 옥신에는 기둥모야을 새겼다.

지붕돌은 밑면에 4단의 받침을 두었고 네 귀퉁이는 살짝 들려 있다.

상륜에는 삼층 지붕돌과 한 돌로 만들어진 노반이 있고, 그 위에 복발이 있다.

 

   일엽스님 깨달음의 길과 ''신여성'' 나혜석 숨결 찾아볼까

   

견성암과 수덕여관에 이들 행적 남아...      시대 앞서간 신 여성 삶 흔적 ‘오롯’

 

백제 위덕왕(威德王, 554~597) 재위시에 창건된 수덕사는 1308년 건립한 국보 제49호 대웅전에서 시작해  현재까지 각 시대별 유물이 보존돼 있는 명찰이다. 그래서 관람의 스펙트럼이 넓다.

한국 선(禪)의 중흥조로 일컫어지는 경허.만공스님 이후 “덕숭산은 도인이 머무는 사찰”로 각인돼 있다.

그리고 비구니 일엽스님과 나혜석의 삶의 흔적이 짙게 배어 있는 곳이다.

고암 이응로 화백의 숨결이 담긴 수덕여관도 있다. 그야말로 근대까지 700년 역사가 고스란히 남겨져 있는 것이다. 지난 3월28일 근대역사를 찾아 수덕사 여행길에 올랐다.

결론부터 말하면 수덕사에는 비구니 스님이 없다. 덕숭산 수덕사는 불교 5대 총림의 하나로, 조계종 제7교구본사다.

리나라 25곳의 교구본사는 전부 비구스님이 주지로 있다.

 

산내 암자인 견성암과 환희대에 산철(해제철)에 50여 명, 결제 기간에 150여 명의 비구니 스님들이 모여 수행하고 있을 따름이다. 가수이면서 포교사로 활동하고 있는 송춘희 씨가 부른 노래 ‘수덕사의 여승’을 기억하는 시골의 아낙들이 가끔 “여기 여자

스님 없어요?”라고 묻는단다. 수덕사 수련회나 템플스테이를 찾는 사람들 가운데 ‘비구니 스님 도량’ 이라서 찾아왔다는 경우도 가끔 있다. 오해다.

사천왕문 - 사천왕은 모든 귀신들의 왕이며 불법을 수호하는 힘을 가진 하늘의 왕이다.

부처님에게 감화되어 불법을 수호하겠다는 서원을 세우고 무력으로 보호하는 불교 대장군들이다.

부처님이 있는 곳이나, 부처님의 법을 설하는 곳, 부처님의 법을 수행하는 수행자들을 보호하는 군사력을 지닌

장군들로서 불교를 수호하는 4대천왕을 모신 곳이다.

 

다문천왕 - 손에 비파를 들고, 즐거움의 감정을 주관하고 겨울을 관장한다.

겨울을 관장하며 야차와 나찰을 거느리고 북쪽하늘을 지배하고 있다. 얼굴색은 흑색이가.


금강문 =  밀적금강 손에 금강저를 들고 항상 부처님을 호위하는 야차신의 우두머리로서

부처님의 비밀스런 사적을 모두 듣겠다는 서원을 세웠다. 입을 다물고 있어 흠금강역사 라고도 하다.


 

 

인적없는 수덕사에 밤은 깊은데/ 흐느끼는 여승의 외로운 그림자/

속세에 두고 온 님 잊을 길 없어/ 법당에 촛불 켜고 홀로 울적에/

아~ 수덕사의 쇠북이 운

 “노래의 작사자 김문응 씨가 수덕사 아래서 잠을 자고 새벽 예불 시간에 절에 올라왔대요.

 

마침 젊은 수좌스님이 범종을 치고 있었어요. 어둠 속에서 승복을 입고 종을 치는 모습이 김문응 씨에게는 갸날픈 여성으로 다가온거야. 당시에 비구니 일엽스님에 대한 세간의 관심이 높았던 때지. 범종을 쇠북으로 표현한 것은 작사자가 불교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다는 점을 보여주는 것이지.” 수덕사 주지 옹산스님의 설명이다.  수덕사 근대역사여행은 두 여성에서 시작한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일제시대 신여성, 일엽스님(본명 김원주)과 정월 나혜석이 중심에 있다. 공교롭게도 둘은 1896년에 태어났다.

나혜석이 4월18일, 일엽스님이 10일 늦은 4월28일 생이다. 둘 다 신학문을 공부했고,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김원주는 그곳에서 일본인 남성을 사랑했지만, 남자의 집안은 그녀를 매몰차게 거절했다. 일본에 어린 아들 한명 남겨놓고 출가해 일엽스님이 됐다. ‘평안도 목사집’ 큰딸 김원주는 마음의 상처를 부처님 품안에서 치유해 나갔다.

 

나혜석은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여성화가’라는 명찰을 달고 일본 유학에서 돌아와 수원의 거부(巨富)집 며느리가 됐다. 하지만 프랑스 유학 도중 친일성향의 남편 대신 민족운동가와 사랑을 나눴다. 그리고 소박을 맞았다. 어린 두 아이를 잊지 못해 몰래

학교를 찾아가곤 했으니 당당한 이혼이 아니라 ‘소박’이 맞는 표현일게다. 모정은 시커멓게 타들어 갔다. 출가를 하기위해 수덕사를 찾았지만 만공스님은  ‘처자는 수행을 할 재목이 못돼’라며 내쳤다. 수덕여관에 머물면서 몇 년을 버텼다.

하지만 친구 일엽스님도 그의 우군이 되어 주질 못했다. 결국 행자로 떠돌다가 무연고자로 죽음을 맞이했다.

 

두 여성. 참 많이 닮았으면서도 아주 다른 길을 살았다. 절친한 친구지만 눈길을 끌만한 둘 사이 대목도 없다. 자식이 어머니를 용서한 시기도 최근의 일이다. 일엽스님의 아들 김태신 화승은 ‘나를 어머니라 부르지 마라’는 일엽스님의 매정함에 오랜 세월 방황했다. 60이 넘어서야 출가해 ‘어머니 일엽스님’을 마음에서용서했다.

나혜석의 아들은 최근에서야 어머니의 흔적을 찾아왔다고 한다. 일엽스님의 자취는 견성암에서, 나혜석의 흔적은 수덕여관에서 찾을 수 있다.

 

비구니계의 큰 별로 살았던 일엽스님은 중생제도와 후학양성에 큰 족적을 남겼다. 수덕사 템플스테이 일정 가운데 견성암 순례가 끼어있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나혜석이 수덕여관에 머문 것은 출가투쟁, 곧 ‘1인 시위’였다. 그림을 그리기 위해 수덕사에 온 것이 아니었지만, 언제일지 모를 ‘출가 허락’을 기다리면서 그녀는 여관에 머물면서 그림을 그렸다.

프랑스 파리를 동경하던 고암 이응노(1904~1898) 화백이 나혜석의 소식을 듣고 수덕여관을 찾았다.

어느덧 수덕여관은 예술인들이 찾는 명소가 됐다. 1944년 나혜석이 출가를 포기하고 수덕여관을 떠나자  이응노 화백은

수덕여관을 매입했다. 현재 수덕여관은 선(禪)미술관으로 리모델링을 해 일반인에게 개방 되고 있다.

수덕여관을 떠난 나혜석은 2년 후 행려로 죽음을 맞았다. 출가자 일엽스님은 1971년에 열반송을 남기고 입적했다.

천년고찰 수덕사에서 우리 할머니 시대의 역사를 다시 돌아볼 수 있다는 점은 현시대를 사는 사람들의 행운이다.

 

  

 

수덕사 템플스테이는…

 

휴식·일반형 … 템플라이프도 가능

 

수덕사 템플스테이는 휴식형과 템플라이프, 그리고 일반프로그램으로 구분된다. 휴식형은 참가자가 5명 미만일 경우 진행하는데 만다라그리기, 사경, 염주꿰기, 차담 등의 시간으로 진행된다.

일반 프로그램은 목어, 법고, 운판, 범종을 체험하고 참선실수, 성불도 놀이, 다향명상을 통한 건강클리닉, 견성암과 환희대.

선미술관(수덕여관) 관람의 시간으로 짜여져 있다. 단체로 참관할 경우 단체의 성격에 맞춰 일부 프로그램을 가감하고 있다.

매년 여름에는 4박5일 일정의 참선수련회도 열린다. 참가를 원하는 사람은 홈페이지를 통해 신청하면 된다.

www.sudeoksa.com (041)337-0173

 

수덕사 주지 옹산스님...  “바쁜 도시생활 놓으면 더 큰 자기 얻어 가요”

    

“이 시대는 100년의 연구보다 단 1분의 깨달음이 더욱 중요합니다. 교리나 남의 이야기는 자신의 것이 안됩니다.

수행을 체험해야 비로소 그런 가르침이 내 것으로 체화되는 것이지요. 많은 분들이 편안하게 수덕사에 와서 수행을 체험하길

바랍니다.”

수덕사 주지 옹산스님은 ‘템플스테이는 짧은 깨달음의 체험’이라고 정의했다. 중생심을 잠재우기 위해 수행과 정진이 필요하며, 이는 선 수행으로 이뤄질 수 있다고 강조하는 스님은 “수덕사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선종사찰인 만큼, 모든 프로그램에 실수

참구의 시간을 반드시 갖고 있다”며 “종교를 떠나 많은 사람들이 이 귀중한 체험을 하기 바란다”고 말했다.

수덕사 템플스테이는 지난해 1500여 명이 다녀갔다. 서초법조인불자회, 포항 포스코 직원을 비롯한 기업체와 단체에서도 수덕사를 찾았다. 올해는 비구니 담소스님이 템플스테이를 맡아 하루에서 3일까지 다양한 프로그램을 마련해 놓고 있다.

“덕숭산에는 도인과 선지식이 있습니다. 공부를 지도할 스승이 있는 것이지요. 바쁜 도시생활을 잠시 놓아버리면, 더 큰 자기를 얻어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