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은사 판전 |
▲봉은사에서 가장 오래된 전각인 ‘판전’은 이곳이 조선불교 교학의 중심지 였음을 말해준다.
◈조선후기 불교침체때 판각불사로 ‘극복’◈
철종 6년 영기스님 발원으로 건립 추사 선생 쓴 현판은 최고의 秀作
산봉우리 대신 고층빌딩으로 둘러싸여 있는 도심사찰 서울 강남 봉은사. 도시의 개발과 경제성장 속에서 현대를 상징하는 마천루가 줄을 잇는 도심 한복판에는 옛 잠실벌에서 밭매던 아낙도, 한양으로 들어가기 위해 나루터로 가던 길손도 간데 없다. 봉은사에서 가장 오래된 전각인 ‘판전(版殿)’만이 유려했던 지난날을 말없이 내려다보고 있을 뿐이다. 마치 한국불교의 역사와 전통, 그리고 문화를 내외에 알리는 전통문화의 중심도량으로서의 면모를 갖추어야 하는 동시에 수행환경과 전통사찰로서의 품격을 지켜야 하는 과제를 부여하듯이 말이다. 봉은사 경내의 여러 명소 가운데 가장 손꼽히는 전각은 바로 판전이다. 이곳에는 중요한 성보문화재가 소장되어 있기 때문이다. 봉은사에는 왜 판전이 건립되었던 것인가. 판전 밖에 서서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았다. 봉은사 중창주 문정왕후의 죽음, 보우대사의 유배와 순교를 끝으로 조선 명종대의 불교부흥운동은 중단되었고, 봉은사의 역사도 조선불교의 침체와 함께 오랜 부진의 시기를 보내게 된다. 보우스님 이후에도 사명스님, 벽암 각성스님 등이 주석하면서 봉은사와 불교발전을 위해 노력했지만 전대에 비해 크게 뒤지는 것이었다. 더구나 임진왜란.병자호란의 전란을 겪으면서 봉은사는 당우가 크게 불타는 아픔을 당하기도 했다. 침체기를 보내고 있던 봉은사에 분위기를 일신하는 대작불사가 바로 판각작업이었다. 조선말기 철종 6년(1855) 남호 영기스님이 <화엄경소> 판각을 발원하여 판전을 건립하고, 이듬해 화엄경 81권을 비롯한 여러 종류의 자료들을 판각하게 된다. 당시 승려들의 도성출입이 금지되고 있었다는 점 하나만 보더라도 이 경전 판각 불사는 대단한 의의를 지니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높은 단 위에 세워진 정면 5칸, 측면 3칸의 익공식 맞배지붕으로 이뤄진 판전의 정면을 바라보니 ‘판전’이라는 추사 김정희의 현판 글씨가 마치 살아 움직이는 듯 걸려 있다. 71세의 추사가 별세 사흘 전에 썼다는 절필작 ‘판전’은 무심의 경지에 오른 추사를 보는 듯 아무런 욕심도 치장도 없다. 현판 왼쪽에 세로로 ‘칠십일과병중작(七十一果病中作)’이라는 글씨가 조그맣게 적혀 있다. 이 현판의 세로 글씨 가운데의 ‘과(果)’는 곧 ‘노과(老果)’를 말하는 것으로서, 추사가 만년에 이곳과 가까운 과천에 살았기 때문에 스스로 그런 호를 붙였던 것이다. 이 현판은 서울시유형문화재 제83호로 지정되어 있다. 판전에 들어서니 동.서 측면과 뒷면쪽 벽에 판가(板架)를 마련, 경판이 봉안돼 있었다.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84호인 <화엄경소>를 비롯, 육조스님 <법보단경> <초발심자경문> <불설아미타경> <금강바라밀경> <유마힐소설경> 등 15종 3438매의 많은 목판본이 있다. 이 판전의 특기할 만한 점은 경판들의 완벽한 보관을 위해 판전 바닥을 구들장으로 해 습기방지를 꾀한 것이다. 옛 조상들의 지혜를 읽을 수 있는 부분이다. 판전은 문화재가 소장돼 있어 오전9시부터 오후1시까지만 사시예불 및 참배객들을 위해 개방되어 있다. 또 개산대재 때도 개방된다. 봉은사 총무국장 진화스님은 “판전은 이곳에서 가장 오래된 전각이기도 하지만 그만큼 의미도 깊다”며 “현재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는 판전편액과 화엄경판 뿐 아니라 앞으로 ‘판전’ 전각도 문화재로 지정되어 보존관리가 철저하게 이뤄져야 할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판전에 서서 사찰 경내를 내려다보았다. 신라 원성왕 10년(794) 연회국사에 의해 창건되어 오늘에 이르기까지 1200여 년의 역사가 눈앞을 스쳐간다. 불교가 침체되었던 조선시대에는 선종의 수사찰로서 선종의 종풍을 드높인 명찰이었고, 이 시기에 부활된 승과고시를 통해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보우스님, 서산스님, 휴정스님, 유정스님, 벽암스님와 같은 고승을 배출한 역사의 고향이다. 또 조선중기 존폐위기에 놓였던 조선불교 역사 속에서 암울했던 시기, 보우스님을 해하려는 유생들의 상소가 빗발치던 때에도 스님은 이곳에서 불교중흥의 의지를 다져나갔던 곳이었다. 이곳에서는 중생교화와 불국토 건설을 위한 수많은 고승들의 사자후가 이어졌고, 진리를 구하는 사부대중들의 치열한 구도행이 이어졌다. 이러한 전통은 오늘에도 이어져 여러 대중스님들이 구법정진하는 것은 물론 가장 왕성한 포교활동을 펼치는 서울의 중심도량이기도 하다.
도량 내에 자리하고 있는 나무 한그루, 풀 한포기마다 꺼져가던 조선의 불교를 되살려 내기 위해 정진을 거듭했던 사부대중이 살아 숨 쉬는 도량. 이곳에서 잠시 가뿐 숨을 고르며 현재도 과거에 담겨 있는 숭고한 의지를 체득하고 어떻게 한국불교를 발전시켜 나가야 할 것인가를 참구해 보는 것은 어떨는지.
# 봉은사 템플스테이는…
매주 목요일 2~4시에는 외국인 템플라이프 진행 봉은사는 1박2일 동안 진행되는 ‘템플스테이’와 2~5시간의 단기체험 프로그램인 ‘템플라이프’를 진행한다. 매주 목요일 오후2시~4시에는 외국인을 위한 목요상설템플라이프를 진행하는 것이 특징이다.
템플스테이의 경우 발우공양 습의, 108배, 사경, 참선, 다도 및 연꽃만들기 등의 프로그램으로 진행되며, 템플라이프의 경우 기본프로그램과 수행프로그램, 체험프로그램으로 나누어 참가자가 선택할 수 있다. 템플스테이는 10명 이상의 단체만 가능하며, 템플라이프는 5명 이상의 단체로 각각 한달 내지 일주일 전에 예약해야 한다. 목요상설템플라이프는 현장에서 접수가능하다. 신청 및 예약은 봉은사 템플스테이 안내소 (02)3218-4895, 이메일 bongeunsa@ templestay.com 로 하면 된다.
# 봉은사와 추사
<사진> 추사가 쓴 봉은사 판전 현판...▶
말년 머물며 현판과 주련 써 조선말기의 대표적인 문인이자 서화가, 실학자였던 추사 김정희(1786~1856)는 만년에 봉은사에 머물면서 여러 가지 발자취를 남겼다. 추사는 1819년 문과에 급제해 예조참의, 설서, 대교, 시강원 등 순탄한 벼슬길을 누렸으나 유배와 귀양을 반복하게 된다. 그 뒤로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과천에 내려가 은거 하면서 학문과 서예에 힘썼다.
성리학 중심의 사상을 바탕으로 새로운 시대사조를 수용하고, 경학과 금석학에 정통하여 북학의 정수를 대성한 추사는 집안 대대로 불교와 깊은 인연을 맺었다. 추사가 봉은사를 자주 찾게 된 것은 1850년 무렵 북청 유배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직후, 세상의 명리에 환멸을 느끼고 선영이 있는 과천에서 은거하면서부터다. 과천에 과지초당을 세우고 불교에 귀의해 이곳과 그다지 멀지 않은 봉은사를 틈나는 대로 찾아오며 마음의 안정을 찾았다. 이 무렵 영기스님이 화엄경판을 판각하기 위해 간경소를 차리고 있었고, 평소 친분이 있었던 추사는 판전 현판 및 영산전과 북극보전의 주련을 직접 쓰는 등 불사에 참여했다고 전해진다. 얼마 후 현재의 선불당 옆에 초가를 마련하고 수행에도 몰두했다. 추사는 봉은사에서 명작들을 잉태해 냈다. 벗 권돈인에게 보낸 그의 편지에서는 “장시간 쓴 병풍 글씨와 대련 작품이 쌓인 것을 보니 크고 작은 것이 수백 폭이었고, 또 편액이 그만큼 되었다”고 했을 정도였다. 추사가 세상 떠나기 전 병중에 썼다고 전해지는 ‘판전’글씨는 대학자이자 명필가로서 불교적 심성이 붓끝에서 약동하는 작품으로 불교와 유학의 원융한 만남을 보여주는 상징이기도 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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