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품 템플스테이와 부처님이야기

33관음성지를 찾아서 = 보문사, 조계사, 용주사

백련암 2010. 4. 26. 20:02

1] 인천 보문사

큰법당우측으로 마애관음보살 상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보인다.

 

저녁놀 붉은 태양이 눈썹 바위를 비치면 관세음보살님의 상호가 비로소 밝게 빛난다.

낙가산 높은 곳에서 늘 중생들을 살펴보고 있는 보문사 마애관세음보살.

 

 

눈섭바위 밑에서 보는 낙조는 서해의 절경이라 한다.

 

중생들의 귀의처   마애관세음보살   “서해에 물들다” 

  

해수관음보살을 친견하러 바다를 건넌다. 길진 않다. 강화도 외포리선착장에서 10여분도 채 걸리지 않는다.

서해안의 작은 섬 석모도에 닿는다. 석모도에는 우리나라 3대 관음기도도량 중 하나, 보문사가 있다.

짧은 뱃길이지만 배를 타고 어디론가 향하니 마음이 들뜬다. 사람들이 던져주는 과자 부스러기에 입맛이 길들여진 갈매기떼들이 배 주위를 에워싸고 먹이를 기다리는 눈치다. 보문사는 석모도 석포리선착장에서 섬 건너편에 자리잡고 있다.

석모도에서 이정표를 따라 10km 남짓 이동하면 된다. 신라 선덕여왕 4년(635) 금강산 보덕굴에서 수행하던 회정대사(懷正大師)는 이곳에 도착, 길지(吉地)임을 한 눈에 알아보고 사찰을 창건했다고 한다.

사찰 뒤 산세가 관세음보살이 상주하는 인도 사자국의 보타낙가산과 흡사함을 발견, 산 이름을 낙가산(洛迦山)으로 짓고 사명은 불보살이 갖가지 모습으로 나타나 중생을 구제한다는 뜻의 보문사(普門寺)로 명명했다.

이후 1300여 년 동안 여러 차례 병화(兵火)를 겪지만 여전히 중생들의 귀의처로 면모를 유지해오다 지난 1928년 마침내 새로운 변신을 했다. 사찰 뒤 절벽 눈썹바위에 조성된 마애관세음보살이다. 당시 주지 선주스님과 화주 화응스님이 조성한 보문사 마애석불좌상은, 서해 쪽빛바다를 바라보는 곳에 자리잡아 자비로운 미소와 영험, 법력으로 사시사철 참배객들이 몰려오는 유명한 관음기도처가 됐다. 일주문을 지나 가파른 길을 오르면 먼발치에 사찰 종각과 관음보살이 조성된 산 위 눈썹바위가 보인다.

뒤로 돌아 서면 시원한 서해 바다가 펼쳐 있다. 경내에 들어서니 새롭게 조성한 33관음보탑과 오백나한전, 와불전이 눈에 띈다. 몇해 전 찾았을 때와 사뭇 달라진 모습이다.

 

나한기도도량으로도 유명한 보문사.

 

사진은 23위 나한상이 모셔진 보문사 석실 법당.

 

보문사는 관음기도도량 뿐 아니라 나한기도도량으로도 유명하다. 회정대사가 보문사를 창건한 지 14년이 지난 649년 보문사

아래 동네 어부들이 바다에서 건진 인도의 22위(位) 나한상이 나한전인 보문사 석실법당에 모셔져 있다.

석실법당 앞에는 600년 된 향나무가 서 있다. 한때 300여 명의 수행자들이 정진하던 대가람임을 증명하듯 어마어마한 크기의

 ‘화강암 맷돌’도 있다.

 

극락보전 앞에 대한불교조계종과 한국관광공사가 선정한 한국33관음성지 제1호 보문사 안내판이 붙어 있다.

극락보전 옆으로 마애관음보살을 향해 오르는 419계단 길이 있다. 몇해 전 인기드라마 ‘내이름은 김삼순’에서 주인공 삼순이로 분한 영화배우 김선아씨가 이 계단을 한발한발 오르면서 이별한 연인을 그리기도 했다.

경주서 단체로 기도 온 불자들도 계단을 오르면서 “억수로 되다, 되…”라며 힘겨워 한다. 계단을 다 올라가서 옅은 미소로 맞아 주는 관세음보살을 보는 순간 고통은 한 순간에 사라진다. 정상에서면 덤으로 시원하게 펼쳐지는 선경(仙境)같은 서해바다도

볼 수 있다.

 

살짝 흘렸던 땀이 바다 바람에 금세 씻겨진다.

거대한 바위덩어리가 마애불이 새겨진 암벽위로 눈썹처럼 덮고 있다. 당장이라도 내려앉을 것 같다.

높이 9.2m, 너비 3.3m인 마애불의 크기를 척수로 환산하면 높이 32척, 너비 11척이 되는데 이는 관세음보살의 32응신(應身)과

11면(面 )을 상징한다고 한다. 눈썹바위 그림자가 마애불을 반 정도 가렸다.

해가 저물수록 그림자가 올라간다. 바다 속으로 붉은 태양이 떨어질 무렵, 태양은 차가운 바위에 빨간 온기를 불어 넣는다.

관세음보살 미소도 환히 타오른다. 저녁예불을 알리는 쇠북소리에 붉은 바다가 춤춘다

 

 

강화도까지 오면 보문사 이정표를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강화도 외포리 선착장에서 30분간격으로 석모도 석포리행 배가 운행된다. 승객이 많으면 증편된다. 자가용 버스까지 배에 실을 수 있다.

석포리선착장에서 보문사까지 수시로 버스가 운행중이다. 보문사 (032)933-8271~3

 

 

2] 서울 조계사

중생 아픔 보듬는 도심 속 관음성지

 

 

일제강점기인 1938년 당시 한국불교를 대표했던 스님들의 노력으로 완공된 조계사 대웅전.

경복궁 근정전보다 큰 규모를 자랑한다.


“누구나 언제나…서울 한복판 열린 도량”

서울 종로구 견지동 45번지 조계사. 지금으로부터 100여년 전, 스님들의 도성 출입이 풀린 후, 전국 스님들의 모연으로 종로 한복판에 창건한 각황사(覺皇寺)다. 각황사는 당시 근대 한국불교 최초의 도심포교당이다. 4대문 안에 처음으로 자리잡은

사찰로서 대중포교의 구심점으로 성장했다. 이후 1938년 태고사로 개칭됐다 1954년부터 촉발된 불교정화운동을 통해 조계사

이름이 바뀌었다.

조계사는 한국불교 발전과 중흥을 위한 불자들의 염원과 함께 한국불교사의 영욕이 고스란히 서려있는 도량이다. 초창기

조계사는 작은 법당과 조계종 총무원 건물과 요사채 등 부속 건물이 전부였다. 주변 땅을 꾸준히 매입해 가면서 사찰 규모를

넓혀왔다.

대한불교조계종 불교문화사업단과 한국관광공사가 선정한 33관음성지의 두 번째 사찰인 조계사는 관세음보살처럼 중생

들의 아픔을 돌봐주는 우리나라 대표적인 사찰이다. 사회적 약자들이 시위를 벌이다 수배됐을 때 마음의 안식처가 되어 머물

다 가기도 하고, 조계사가 운영하는 서울노인복지센터에선 날마다 3000여명의 어르신들에게 무상급식을 제공하기도 한다.

서울 종로노인종합복지관, 서울 낙산어린이집 등의 산하 복지시설에 매년 3억3300만원의 후원금을 지원할 뿐만 아니라 공양

미 지원과 경로잔치 개최, 장소대여 등 유무형적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다.

 

 

조계사 극락전에 봉안된 관세음보살.

 

조계사는 열린도량으로서 불자 뿐만아니라 내외국인에게도 산문을 활짝 열었다. 대웅전을 24시간 개방하고 매주 토요일과

일요일에는 새 신도 신행안내프로그램을 운영하며 누구나 손쉽게 조계사를 찾을 수 있도록 문턱을 낮췄다.

하루 평균 600여 명의 외국인 관광객과 참배객들이 줄을 잇는 조계사는 여러 나라 언어로 사찰을 소개하고 주변관광코스도

소개하는 첨단 터치스크린 관광 안내 시스템을 도입했다.

또한 국제포교사회와 연계한 사찰 안내도 실시한다. 주말마다 발우공양과 참선, 요가 등 한국불교문화를 체험하는 템플라이프는 한국을 찾는 외국인들에게 인기 만점이다.

또한 몽골과 태국 출신의 외국인 노동자를 대상으로 한 상담과 정기법회도 연다.

조계사는 한국불교를 알리는 일에도 소홀함이 없다. 명상과 참선에 대한 높은 사회적 관심도를 반영해 시민선원을 열어 누구

나 손쉽게 참선수행을 할 수 있도록 도심 속 열린도량으로 운영하고 있다.

부처님오신날을 앞두고 봉축준비로 분주한 조계사는 봉축등 장엄이 한창이다. 외국인 단체 관광객들의 발길도 늘고 있다.

일주문 뒤로는 조계사의 상징이며 서울시 지방문화재인 대웅전이 자리하고 있다.

정면 7칸 측면 4칸으로 515.6㎡로 경복궁의 근정전보다 큰 규모를 자랑한다.

일제강점기인 1938년 당시 한국불교를 대표했던 스님들의 노력으로 완공된 법당이다.

대웅전 앞에는 지난해 봉안된 8각10층 규모의 세존사리탑이 있다. 

대웅전에선 스님들의 기도소리가 끊임없이 이어진다. 따스한 봄햇살이 대웅전 문창살을 따사롭게 비춘다

 

 

3] 화성 용주사

       

대웅전 닫집에서 발견된 원문(願文)에 의하면 1790년 10월1일 고승대덕 스님들이

 

용주사 대웅보전에 모여 점안식을 거행했다.
삼존불은 전국의 조각 명인 20명이 초청되서 조성되었고
후불탱화는 당시에 정조의 총애를 받던 김홍도가 그렸다고 <본사제반서화조작등제인방함>에 기록되어 있다.   

 

   
     
일체 중생을 자비로 구제하는 어머니  
관음보살 품에서 ‘효심은 불심으로’ 승화
  
  용주사 대웅보전. 천보루 기둥에 33관음성지임을 알리는 안내판이 붙어 있다. 
 사도세자의 위패가 있는 호성전 앞 부모은중경탑.  

 

1623(인조1)년 억불정책으로 스님들의 도성출입이 제한된다. 그렇다고 불교가 위축된 것은 아니다.

 

성리학이 일상생활의 규범으로 인식되고 정치철학의 통치이념으로 자리 잡았지만 불교 역시 많은 사람들의 신앙으로 위치를
점했다. 1790(정조14)년 창건된 용주사가 그 예다.

 

  
정조는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부친 사도세자의 묘를 화산(花山)으로 옮겨 현륭원(顯隆園)이라 정하고 신하들부터 ‘천하제일
복지(福地)’로 추천받은 옛 갈양사터에 용주사를 창건한다.  
국왕의 뜻에 따라 국가공사로 시작됐고 불사비용 또한 스님들 뿐 아니라 각 궁가와 중앙 및 지방관가로부터 시주를 받아 충
당했다.

용주사 창건불사에 당대 최고의 명인들이 참여했는가 하면 불과 7개월 만에 불사를 완성한 것은 당시 상황을 짐작케 한다. 

이 후 몇 차례의 전란으로 일부 소실되긴 했지만 창건당시 아름다운 성보들은 대다수 남아 있다.

 

경기도 화성 송산동에 위치한 용주사는 남북의 직선 축 위에 대웅보전과 천보루, 삼문을 두고 대웅보전 앞마당 좌우에 ‘ㅁ’자

모양의 나유타료와 만수리실이 대칭으로 위치해 기하학적인 공간구성을 취하고 있다.

 

사천왕문을 지나면 사찰에서 볼 수 없는 문을 만난다. 복원된 홍살문과 삼문(三門)이다. 홍살문은 왕실의 능이나 관아 등에 붉게 칠한 두 개의 기둥을 세운 문으로 경의를 표하는 장소의 의미를 갖는다. 지난 2008년 용주사는 홍살문 복원과 함께 사도세자

제향의식까지 100년 만에 복원했다.

 

 일주문과 천보루 사이에 있는 삼문은 동서옆문과 중앙 대문에 각각 문이 나 있다. 사찰에선 보기 드문 양식이다. 홍살문을 지나면 왼편에 용주사 효행박물관이 있다. 박물관에는 정조 때 제작한 불설부모은중경판 뿐 아니라 정조가 직접 지은 게송 어제화산용주사봉불기복게, 김홍도가 그린 사곡병풍등 수많은 성보들이 전시돼 있다.

 

용주사에는 당대 최고 명인들의 숨결이 깃든 예술적 아름다움이 경내 곳곳에 남아 있다. 그 중 천보루를 지나 대웅전에 들어서면 불교예술미의 절정에 이른다. 화려한 닫집아래 석가모니부처님, 약사여래불, 아미타불의 삼존불과 후불탱화의 웅장한 장엄미가 압권이다.

 

석가여래불은 정읍 내장사의 계초스님 등이, 아미타불은 지리산 파근사의 봉현스님 등이, 약사여래불은 간성 건봉사의 상식
스님 등, 전국 조각명인 20여명이 불심을 응축해서 예술혼을 불어넣은 걸작이다.  후불탱화 역시 당시 정조의 총애를 받은
김홍도가 그린 것으로 알려졌다.

 

전통불화에서 좀처럼 사용하지 않는 인물음영법을 후불탱화에 접목시켜 불교미술사에서도 획기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대웅보전 옆에는 사도세자의 위패를 모신 호성전이 있고 그 앞에는 부모은중경탑이 있다.

 

용주사는 사도세자에 대한 정조의 간절한 효심이 불심으로 승화되어 창건돼 오늘날까지 정조의 효심이 사찰 곳곳에 스며있
다.

 

용주사가 ‘효행원찰’로 불리는 근거다. 모든 이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며 일체 중생을 고통에서 구제하는 어머니란 의미로 관세음보살

은 ‘대성자모(大聖慈母)’라고도 한다.
 

정조는 장흥 보림사의 보경스님으로부터 <부모은중경(父母恩重經)>을 받아 읽고 통곡을 하게 된다. 그의 가슴을 울렸던 것은 자식에 대한 어버이의 끝없는 사랑이었다. 아랫사람이 윗사람에 대한 무조건적인 복종을 유교에선 효로 이해했다.

하지만 효가 불교의 보은(報恩)사상을 만나면서 위에서 아래로의 대자대비한 은혜를 전제하게 된다.

용주사에 머물면서 한동안 잊고 살았던 어버이의 큰 은혜를 다시금 떠올리며 두 손을 모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