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불교조계종 제 18교구 본사 고불총림 백양사
禪之宗刹 古佛叢林 白羊寺
백암산 백학봉을 배경으로 서 있는 쌍계루의 모습이 계곡을 막아 만든 연못에 비쳐 아름답다.
대웅전 내부에 비천상, 용과 학등을 타고 있는 선인 등이 모빌처럼 천정에 매달려 있다.
♣총림(叢林)이란 = 단림(檀林)이라고도 번연한다.
僧俗이 화합하여 한곳에 머무름이(一處住) 마치 수목이 우거진 숲과 같다고 하여 부르는 것이다. 특히 禪刹의 경우 이름으로 功德叢林이라고도 한다.
마치 큰 나무들이 숲을 이룬것을 林 이라고 함과 같으니 승취(僧聚)가 모여 사는 곳 이므로 叢林이라 말한다.
즉 禪院, 禪林, 僧堂, 專門道場(량) 등 다수의 승려대중이 모여 수행하는 곳을 총칭하여 총림이라 하는것이다.
그리고 叢林이 되기 위해서는 승려들의 참선수행 전문도량(專門道場)인 禪院, 과 경전교육기관인 講院 계율 전문교육기관인 律院을 모두 갖춘사찰을
지칭하는 말로 우리나라는 조계종단에 해인사, 통도사, 송광사, 수덕사, 백양사" 등 5대총림이 있고, 태고종에 조계산 선암사 가 있다.♣
♣고불 총림인 백양사는 1996년 3월에 총림으로 공식승격 되었다.♣
백양사는 백제 무왕 33년(632년) 임진에 신라고승 여환(如幻)선사가 범궁을 창건하여 백암산백양사라고 했으며, 고려 덕종 3년(1034년) 갑술(甲戌)에
중연(中延)선사가 중창하면서 정토법문을 선양하기 위해 정토사(淨土寺)라고 개명했다.
고려 충정왕 2년(1350년) 경인에 왕사 각엄존자가 오래 머무른 이래 선교양종통조(禪敎兩宗統組) 청어 휴정 선사의 심인을 전해 받은 이들이 차례로
이어 오면서 각진국사(覺眞國師)가 3창하고, 1574년(선조 7) 환양(喚羊)이 현재의 백양사라고 개칭했는데 이것은 환양의〈법화경〉독성소리에
백학봉에 있는 흰 양떼가 자주 몰려온 것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한다.
1786년(정조 10) 환성(喚星)이, 1864년(고종 1)에는 도암(道巖)이 중건했다. 근세 이후에는 송만암(宋曼庵)에 의해 교세와 사운이 융성했다.
일제강점기에는 31본산 중의 하나였으며 현재는 26개의 말사를 관장하고 있다.
현존 당우로는 대웅전(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43호) · 극락보전(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32호) · 사천왕문(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44호)·
명부전 · 칠성각 · 진영각(眞影閣) · 보선각·설선당(說禪堂) · 선실(禪室) · 요사채 · 범종각 등이 있다.
이밖에 백양사 재흥에 힘쓴 태능(太能)의 소요대사부도(逍遙大師浮屠: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56호)와 고려 때 각진국사가 심은 것으로 전해지는
절 주위의 비자나무는 천연기념물 제153호로 지정되어 있다. 또한 이 절에서는 전통적인 재식(齋式)이 집전되는데
관조부(觀照部) · 전경부(轉經部) · 정근부(精勤部) · 송주부(誦呪部) · 범음부(梵音部)가 각각 행해진다.
총림(叢林)은 승가와 속가가 화합해 한 곳에 머무름이 마치 수목이 우거진 숲과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참선수행 전문도량인 선원과 경전 교육기관인 강원(승가대학), 계율 전문교육기관인 율원, 염불원을 모두 갖춰야 한다.
해인총림 해인사, 조계총림 송광사, 덕숭총림 수덕사 등 다른 총림들은 거대하고 웅장한 사격을 갖춘 데 비해, 백양사는 큰 규모는 아니다.
그럼에도 총림에 당당히 등재된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누각인 쌍계루와 함께 백양사승가대학(강원) 학사인 향적전, 우화루 등 4개 동에 이른다.
우화루는 누각이라는 명칭에 부합되지 않은 일반 전각형태를 띠고 있어, 이번 불사를 통해 전형적인 모습을 갖추게 된다.
사찰정비 불사는 현 백양사 주지 시몽스님의 발원에서 비롯됐다. 사격 쇄신을 통해 백양사의 총림으로서의 위상을 세우기 위함이다.
현재 백양사의 사격은 만암스님(1875~1957) 덕분이다. 백양사 중창조로서 지난 1917년부터 10년간 불사를 진행했다.
만암스님이 처음 백양사로 내려왔을 때는 폐사와 다름이 없었다. 극락보전 정도만 멀쩡했고 다른 전각들은 흔적을 찾을수 없었다.
백양사가 현재 고불총림으로서 한국불교를 이끌어가는 대표 사찰이 된 것은 모두 만암스님의 불사로 이룩된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각들은 세워졌지만 당시 열악한 재정상태 등의 현실에서 아무리 애를 쓴다 해도 빼어난 격식까지 갖추기는 힘들었을 터.
현 주지 시몽스님이 진정한 총림으로 자리매김하기 위해 불사에 뛰어든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향적전은 이미 불사를 마무리했고, 쌍계루는 5월 말 완공된다. 우화루 등은 현재 한창 불사가 진행되고 있어 올해 안에는 마칠 계획이다.
▶▶ 백양사에는 특별한것이 있다.◀◀
▶▶ 백양사 필수코스…‘참사람 템플스테이’
▶▶ 숲길 걸으며 마음치유하는 ‘아주 특별한 템플스테이’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누각, 백양사 쌍계루. 고려시대 풍미했던 인물들이 노래한 400수의 시가 누대를 장식하고 있다.
백양사 템플스테이가 특별하다는 것은 이미 검증된 사실이다. 지난 1월 서울 코엑스 전시장에서 문화체육관광부가 주최해 열린 ‘내나라 여행 박람회’에서
백양사 템플스테이가 최고상인 최우수 이벤트 상을 수상했다. 모두 16개 템플스테이 사찰이 참여한 행사에서 백양사는 많은 관중을 동원하면서
가장 높은 평점을 받았다. 백양사에는 천혜의 자연환경을 벗하며 휴식과 함께 자신의 삶을 되돌아 볼 수 있는 시간이 열려있다.
백양사는 다른 사찰에서 진행하는 템플스테이와 차별화를 두기 위해 현대인이 필요로 하는 프로그램을 개발했다.
숲 치유 명상 템플수련회와 전문 심리치료사가 지도하는 명상심리치료극 템플스테이가 그것이다.
숲 명상 치유 템플수련회는 매달 2박3일 일정으로 펼쳐진다. 신원섭 충북대 산림과학부 교수와 김형태 조선대 보건전산행정과 교수가 초청돼
숲 속에서 오감 체험, 산림욕, 나무목걸이 만들며 나이테 알기, 다담 나누기 등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꾸며져 있다.
또 마음의 찌꺼기를 제거하는 숲 명상, 선 체조 등도 함께 진행된다.
심리극으로 마음을 치유하는 명상심리치료극 템플스테이도 운영되고 있다. 박희석 원광대 마음숲심리상담센터장이 진행하는 이 템플스테이는
‘십우도’ 단계에 따라 심리극을 펼쳐 자신이 갖고 있는 청정한 성품을 찾아가는 프로그램이다.
20명을 대상으로 실시하며 3박4일 일정으로 격월로 진행할 예정이다.
이밖에도 주말마다 상시로 열리는 체험형 템플스테이(1박2일)와 평일 문을 여는 휴식형 템플스테이가 있다. 휴식형은 예불을 올리는 것을 빼면
특별한 프로그램 없이 여가를 즐길 수 있다는 특징이 있다.
특별 프로그램으로 새해맞이, 야생차 만들기(4~5월), 백양단풍, ‘한 해를 돌아보며’ 템플스테이 등이 운영되고 있다.
더불어 여름 참선 수행프로그램인 ‘참사람 템플스테이’는 조계종 전 종정 서옹스님의 ‘참사람 운동’에 초점을 맞춰 참선 중심으로 진행하는
수련회로 정평이 나 있다.
= 찾아가는길 = 기차여행 = KTX 있음 = 용산역 출발 = 장성역 하차 = 버스 이용
내가가는 길은 = 용산역에서 ktx를 타고 익산하차하여 무궁화나 새마을로 환승하여 백양사역하차 버스나 도보로 절까지 들어간다.
대한불교조계종 제 19교구 본사 화엄사
각황전
★ 544년(백제 성왕 22년, 신라진흥왕 5년)에 연기도사(緣起)가 창건하였다. 절 이름을 화엄경(華嚴經)의 화엄 두 글자를 따서 붙인것이라고 한다.
643년(선덕여왕 12년)에 자장법사(慈藏法師)가 증축하였고 석존 사리탑(釋尊舍利塔)· 7층탑 · 석등룡(石燈龍)등은 건조 하였다.
<봉성지(鳳城志)>에 따르면, 신라 문무왕 때 의상국사(義相國師)가 왕명을 받아 석판에 화엄경 80권을 새겨 절에 보관하였다고 하였다.
875년(헌강왕 1년) 도선(道詵)이 다시 증축했다 1593년(선조26년)에 불타버리고 1630년 벽암선사(碧巖禪師)가 7년을 걸려 재건 하였다.
대웅전은 1636년(인조 14년)에 각황전(覺皇殿)은 1643년(인조 21년)에 보제루(普濟樓), 명부전(冥府殿), 원통전(圓通殿), 영산전(靈山殿),
음향각(음香閣), 적묵당(寂默堂), 금강문(金剛門), 천왕문(天王門), 등이 차례로 복구 되었다.
그후 1701년 (숙종 27년)에 화엄사를 선교양종(禪敎兩宗)의 대가람(大伽籃)으로 하였다.
구성 =
절 앞쪽에 1칸 1호의 일주문(一柱門)이 있어 지리산 화엄사(智異山 華嚴寺)의 큰 편액(篇額)이 다음에 금강력사(金剛力士) · 문수(文殊) · 보현(普賢)의
상(像)을 안치한 금강문(金剛門)이 조금씩 서쪽에는 사천왕(四天王)의 상을 안치한 천왕문(天王門)이 있다.
그리고 이절에는 원래 4벽(壁)을 청석(靑石)으로 두른 전각(殿閣)이 있었고 이 청석에는 화엄경을 조작했었다고 하며 1597년 (선조 30년)에
불타 버렸다고 한다. 지금도 가끔 그조각을 볼 수 있는데 당나라 초기의 서풍(書風)을 띠고 있다고 한다.
백제 성왕 22년(544)에 인도 스님이신 연기조사께서 대웅상적광전과 해회당을 짓고 화엄사를 창건 후,
백제법왕(599)때 3천여 명의 스님들이 계시면서 화엄사상을 백제 땅에 꽃피웠습니다.
신라시대는 신라 선덕여왕 14년(645)에 자장율사가 부처님 진신사리 73과를 모시고 4사자 3층 사리석탑과 공양탑을 세우셨습니다.
원효성사는 해회당에서 화랑도들에게 화엄사상을 가르쳐 삼국통일을 이루었습니다.
또 문무왕 17년(677)에 의상조사는 2층 4면 7칸의 사상벽에 화엄경을 돌에 새기고 황금장육불상을 모신 장육전 법당(지금의 각황전)과
석등을 조성하였습니다.
경덕왕(742~764)때 이르러 8원 81암자로 화엄불국 연화장세계의 면모를 갖추고, 신라말기 헌강왕(875)때 도선국사는 동오층석탑과 서오층석탑 조성과
더불어 화엄사 중흥조가 되시면서 화엄사가 대총림으로 승격되었습니다.
고려시대는 고려 태조 26년(943)에 왕명으로 고려 최초로 화엄사를 중수하였고, 홍경선사가 퇴락한 당우와 암자를 중수하였습니다.
문종(1047~1083)때 대각국사 의천에 의하여 중수, 인종(1126~1146)때 정인왕사가 중수, 명종 2년(1172)에 도선국사비 건립,
충렬왕(1236~1308)때 원소암 중건, 충숙왕(1313~1330)때 조형왕사에 의한 전면적인 보수를 하였습니다.
조선시대에 세종 6년(1426)에 선종대본산으로 승격된 화엄사는 배불의 와중에도 설응, 숭인, 부휴, 중관, 무렴 등의 고승대덕들에 의해 법석의 요람을
이루었습니다. 임진왜란(1592~1598)때는 호남의 관문 구례 석주관에서 승병 300여 명을 조직하여 왜군에 맞서 싸웠으나 이 앙갚음으로
왜장 가등청정은 화엄사를 전소시키기에 이릅니다.
인조(1630~1636)때 벽암선사와 문도들이 대웅전 등 몇몇 건물을 중건하고, 숙종(1699~1703)때 계파선사와 문도에 의하여 장육전 자리에
현존하는 목조건물로는 국내 최대규모로 웅장한 각황전 건립과 더불어 선교 양종대가람이 되었고, 근세에 이르러 도광대종사의 전면적인 중수에 힘입어
지금의 화엄사로 중흥할 수 있었습니다.
◆ 성보유물 = 화엄사 금강문, 나한전, 불이문, 원통전, 구층암 등이다 또한 전각 나한전, 원통전, 대웅전, 각황전의 주련도 국보급 이다
◆ 천연기념물 = 올 벚나무 제 38호 등
= 찾아가는 길 = 기차여행 = 구례까지 무궁화나 새마을 밖에 없음, 시간대는 별차이가 없으나 요금은 많은차이가 남
용산역출발 = 구례역 하차 = 화엄사까지 택시 10분소요
소요시간 (새마을) = 4시간 20분 주말요금 =\ 33800원 평일요금 =\32400원
소요시간 (무궁화) = 4시간 40분 주말요금 =\ 22800원 평일요금 =\21800원
대한불교조계종 제 20교구 태고총림 선암사
★ 우리나라 총림이 총 6개가 있는데 태고종에 총림이 1개가 있다.★
禪之宗刹 太古叢林 仙巖寺
조계산 선암사
선암사는 순천시 승주읍 죽학리 802번지로, 조계산(해발 884m) 장군봉 아래에 위치한다.
사찰 창건에 대해서는 백제 아도화상(阿度和尙)이 창건 했다고 하는 설, 신라말 도선국사가 창건설 등이 있다.
현재 남아 있는 유물로 볼 때 통일신라시대로 보기도 한다.
고려시대에는 대각국사 의천이 대각암에 머물면서 선암사를 중창하여 그 규모가 법당 13동, 전각 12동, 방 26개, 산내암자가 19개에 이르렀다 한다.
정유재란 이후 1660년에 경잠(敬岑) · 경준(敬俊) · 문정(文正) 대사가 8년 동안에 걸쳐 중창불사를 하여 사찰의 면모를 새롭게 하였다.
숙종 7년(1681년) 호암약휴(護巖若休)가 체 4차 중창불사를 주도하여 원통전, 관음상, 53불전, 대법당 오십전, 승선교 등 잇따른 불사가 이루어졌다.
순조 23년(1823년) 화재가 발생하여 대웅전 명부전 등이 소실되어 다음해에 해붕(海鵬)과 눌암(訥庵) · 익종(益宗) 세 대사가 제 6차 중창불사를 하고
일시 고쳐졌던 산 이름을 청량산(淸凉山)에서 조계산(曹溪山)으로, 사찰 이름을 해천사(海川寺)에서 선암사(仙巖寺)로 다시 회복하여
명실상부한 옛 면모를 되찾게 되었다.
해방이후 1948년의 여순사건과 한국전쟁(6.25)으로 많은 피해를 입었으며, 비구 · 대처승간의 대립으로 일부 건물이 유실되기도 하였으나
최근 대부분의 전각이 수리되었다. 승선교를 비롯한 지정문화재 24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