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구본사와 사찰 벽화 이야기

조계종단 교구본사 = 통도사, 고운사, 금산사

백련암 2010. 7. 10. 04:04

 대한불교조계종 제 15교구 본사 통도사

禪之宗刹 靈鷲叢林 通度寺

 

      

삼보사찰(三寶寺刹) 중 불보(佛寶)사찰인 통도사(通度寺)

   
  창건과 연혁

통도사는 경상남도 양산시 하북면 지산리 영축산(靈鷲山)에 있는 절로, 낙동강과 동해를 끼고 하늘 높이 치솟은 해발 1,050m의 영축산 남쪽 기슭에

자리잡고 있다. 영축산이란 본래 부처님재세시 마가다국 왕사성의 동쪽에 있던 그라드라라는 산이었다.

본래 이 산은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법화경을 설한 유명한 곳으로 신선과 독수리들이 많이 살고 있었기 때문에 영축산 이라고 불렸던 곳이다.

어느 하나 불연과 떼 놓을 수 없다. 그래서 이 산의 모양이 불법을 직접 설하신 인도 영축산과 통한다 해서 통도사라 이름
다고 일컬어 진다.

또한 승려가 되려는 사람은 모두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금강계단에서 계를 받아야 한다는 의미에서 통도사라 했다고 한다.

우리 나라 삼보사찰(三寶寺刹:佛寶·法寶·僧寶로 일컬이지는 세 사찰) 가운데 하나인 불보(佛寶) 사찰이며, 대한불교조계종 제15교구 본사이다.

646년(선덕여왕 15)에 자장율사(慈藏律師)가 창건하였다. 산 이름을 영축산이라 한 것은 산의 모양이 인도의 영축산과 모양이 매우 비슷하기

때문이라고 하나, 그 옛 이름은 축서산(鷲棲山)이다.

절 이름을 통도사라 한 까닭은

① 전국의 승려는 모두 이곳의 금강계단(金剛戒壇)에서 득도(得度)한다는 뜻,

② 만법을 통달하여 일체 중생을 제도한다는 뜻, ③ 산형이 인도의 영축산과 통한다는 뜻 등이 있다.
창건주 자장율사가 643년에 당나라에서 귀국할 때 가지고 온 불사리와 가사(袈裟), 그리고 대장경 400여 함(函)을 봉안하고창건함으로써

초창 당시부터 매우 중요한 사찰로 부각되었다. 특히 불사리와 가사뿐 아니라 우리 나라 역사상 최초로 대장경을 봉안한 사찰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역사 기록은 통도사의 사격(寺格)을 단적으로 설명해 주는 매우 중요한 기록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이 절을 창건한 자장율사는 계단(戒壇)을 쌓고 사방에서 오는 사람들을 맞아 득도시켰다.

이에 통도사는 신라 불교의 계율 근본도량(根本道場)이 되었다.

창건 당시에는 오늘날과 같은 대찰이 아니고 후에 금강계단이라고 불려진 계단을 중심으로 몇몇 법당이 존재하였을 것으로 짐작하고 있다.

그 뒤 고려 초에는 사세가 더욱 확장되어 절을 중심으로 사지석표(四至石標), 즉 국장생석표(國長生石標)를 둘 만큼 대규모로 증축되었다.

특히 현존하는 중요 석조물이 고려 초기 선종대에 조성되었으므로, 가람의 정비는 이때 중점적으로 이루어졌음을 추정할 수 있다.

그 당시의 중요한 석조 조형으로는 금강계단 상부의 석종형부도(石鐘形浮屠)를 비롯하여 극락전 앞의 삼층석탑, 배례석(拜禮石), 봉발대(奉鉢臺),

그리고 국장생석표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모두 고려시대에 속하는 유물이고 그 밖에 현존하는 목조건물들은 모두 임진왜란 이후에 건립되었다.

물론 조형상으로 가장 앞서는 석조물로는 영산전(靈山殿)에서 마주 보이는 남산 위의 폐탑재를 들 수 있으나, 이는 이미 파괴된 채 기단부의

사리공(舍利孔)만이 주목되고 있다. 이 석탑이 어떻게 하여 파괴되었는지 또는 최초에 건립된 사원과 어떤 연관이 있는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찾아가는 길= 기차 여행 = 서울역(KTX)승차 = 부산역 하차 =  동부시외버스터미널(노포동 지하철역, 경남버스)에서

신평(통도사)행 승차 =  (시간 : 06:30~20:40 / 매 20분 간격) → 통도사 하차

 

 

대한불교조계종 제 16교구 본사 고운사

 

     

약사전과 대웅전 그리고 연수전



고운사  지장보살과 좌우보처인 무독귀왕 도명존자



고운사는 신라 신문왕 원년(서기 681년)에 해동 화엄종의 시조이신 의상대사께서 창건하신 사찰이다. 부용반개형상(연꽃이반쯤 핀 형국)의 천하명당에

위치한 이 사찰은 원래 高雲寺였다. 신라말 불교와 유교ㆍ도교에 모두 통달하여 신선이 되었다는 최치원이 여지ㆍ여사 양대사와 함께

가운루(경북 유형문화재 제151호)와 우화루를 건축한 이후 그의 호인 孤雲을 빌어서 孤雲寺로 바뀌게 되었다.

고려 태조 왕건의 스승이자 풍수지리사상의 시조로 받들어지는 도선국사가 가람을 크게 일으켜 세웠으며 그 당시 사찰의규모가

五法堂十房舍(5동의 법당과 10개의 요사채)였다고 한다. 현존하는 약사전의 부처님(보물 제246호)과 나한전 앞의 삼층석탑(경북 문화재자료 제28호)은

도선국사께서 조성하신 것들이다.

특히 고운사는 해동제일지장도량이라 불리는 지장보살영험성지이다. 옛부터 죽어서 저승에 가면 염라대왕이 고운사에 다녀왔느냐고 물었다고 하는데

 지장보살님의 원만자비하신 풍모는 물론이거니와 명부십대왕의 상호와 복장도 다른 사찰에서는  보기 힘든 위엄과 정교함을 자랑한다.

 

일제시대에는 조선불교 31총본산의 하나였고 지금은 조계종 제16교구의 본사로 의성, 안동, 영주, 봉화, 영양에 산재한 60여대소사찰들을 관장하고 있다.

사세가 번창했을 당시에는 366간의 건물에 200여 대중이 상주했던 대도량이 해방이후 쇄락하여 많은 사찰재산이 망실되고

지금은 이십여명 대중이 상주하는 교구본사로는 작은 규모의 사찰로 전락하였다. 하지만 10여년전부터 중창불사의 뜨거운 원력으로

주변을 정리하고 낡은 건물들을 수리 및 단청하여 지금은 위풍당당한 본산의 위상과 소박하고 절제된 수행지로서의 이미지가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

이 정도 규모 이상의 고찰로서는 전국에서 유일하게 입장료를 받지 않는 고운사는 민가로부터 3km 정도 떨어져 오염되지 않은 순수함을 자랑하며

 일주문에 이르는 솔밭 사이 비포장길은 부처님께 진실된 마음으로 다소곳이 다가서는 불자들의 마음처럼 포근하고 정감넘치는 모양을 하고 있다.

 

 청정하고 엄격한 수행가풍을 자랑하는 고금당선원에서 정진하는 스님들을 비롯한 고운사의 모든 대중들은 위로는 진리를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제도하는 대승불교의 참모습을 구현하기 위해 새벽의 찬공기를 가르며 부처님전에 발원을 멈추지 않는다.

7월에는 연꽃보러 가도 됨 중순에는 백련 홍련보다 백련이 늦게 핀다네요

 

찾아가는 길 = 기차 여행 =

동대구역이나 대구역에서 하차 = 안동행 무궁화를 타고 안동역하차. =  역사 바로 옆에 시외버스터미널에 가서 의성행 버스를 타고(일직) 일직에서 하차

  = 택시를 타고 고운사로 옵니다.
◈ 참고로 안동에서 고운사까지 택시요금은 20,000원입니다. = 주소 = 고운사는 의성군 단촌면 구계리 116번지    전화 054-833-2324

 

버스는 = 동대구고속버스터미널에서 중앙고속에 가면 안동행 우등고속 승차 = 안동에서 하차(1시간 30분소요)

안동시외버스터미널에서 일직버스표를 끊습니다.(1,100원) 그리고 의성행 버스를 타고 일직에 내려서 택시를타고  고운사로 가자고하면 됩니다.

택시요금은  \10,000원가량

 

 

     대한불교조계종 제 17교구 본사 금산사

 

 

 

조선 성종 23년(1492)에 작성된 "금산사 5층석탑 중창기"에 의하면, 금산사는 이미 석가모니 부처님 이전의 가섭불 때에 있었던 옛 절터를

다시 중창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는 금산사의 터전이 오래 전부터 부처님과 인연이 깊었던 것임을 알수 있게 한다.


흔히 통일신라 시기 진표율사에 의하여 창건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엄밀히 따지면 그는 중창자이지 창건주는 아니다.

왜냐하면 "삼국유사"를 비롯한 기록에 의하면, 진표율사는 금산사의 순제법사에게 출가한 것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진표율사 이전에 이미 금산사가

창건되었음을 알게 한다.  남아있는 "금산사사적"의 기록에 의하여 금산사가 백제 법왕 1년인 599년에 창건되었음을 알수 있다.

이후 금산사의 모습이 크게 부각된 것은 통일신라 시기 경덕왕때 진표율사에 의한 중창 때문이다.

금산사에서 숭제법사의 가르침을 받아 수행을 하던 진표율사는 27세 때에 변산 부사의암(不思議庵)에서 철저한 수행에 전념하였다.

17년 간을 몸을 돌보지 않는 망신참의 고행을 통하여 마침내 미륵보살과 지장보살로부터 간자와 계본을 전해 받게된다.

이후 진표율사는 금산사로 다시 돌아와 금산사의 중창불사를 발원하고, 경덕왕과 왕실의 후원을 받아 6년에 걸쳐 가람을 대규모로 일으켜 세웠다.

이 때가 경덕왕 21년인 762년부터 혜공왕 2년인 766년에 이르는 기간이었다.

금산사의 창건과 관련하여 "금산사사적"의 내용을 근거로 불 때 599년 백제 법왕의 자복사찰로 창건되었으며, 이 후 진표율사에 의한 6년여의 중창으로

사찰다운 모습을 갖추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금산사가 미륵신앙의 성지로 자리 메김 한 것은 진표율사 때부터이다.


= 연혁 =

백제 법왕원년 (서기 599년) = *왕실의 번영을 기원하는 사찰로 산중암자 규모로 창건됨.

신라혜공왕 2년(서기766년) = *진표율사의 중창  *금당을 짓고 미륵 장육상을 봉안함.  *미륵십선계 수계식 및 점찰법회  봉행.  *대중불교 운동 전개.

후백제 935년  = *견훤이 금산사에 유폐됨

고려 문종 33년(1097년) = *혜덕왕사 재중창(대사구, 봉천원, 광교원 등 86동 43개 암자 설치). 이 때 금산사의 전성기를이룸.

고려 충숙왕 15년(1328년) = *원명 해원의 중창  

선조 25년(1592년)  = *임진왜란 시 처영 뇌묵대사가 일천 승병의 거점지로 활용.

선조 29년(1596년) = *정유재란시 불탐.                       인조 13년(1635년) = *수문대사에 의하여 대사구 지역 재건.. 

1725년 = *환성지안에 의하여 화엄대법회를 개최하여 1,400여명이 금산사에 모임.

1863년 ~ 1907년 = *일제 때 용명선사 가람을 수호하다 광산업자들에 의해 순교.

1961년 이후 = *1961년 송월주 스님이 금산사 주지로 취임 후 도영, 도법, 평상, 원행 스님 등 도제들과 용봉스님 등 사부대중의 협력을 받아 일주문,

금강문, 사천왕문, 해탈교, 극락교, 향적당, 적묵당, 보현당, 설법전, 요사채, 나한전, 조사전, 전통찻집, 보제루, 경비실, 목욕소 등을 신축하고

미륵전, 대적광전 대장전 상서전 등을 해체 복원하고 방등계단 성역화 불사를 마무리하여 대사구를 완전 복원함. 

 

찾아가는 길 = 기차 이용(용산역 KTX)

용산역 승차 = 김제역 하차 = 역건너편대각선방향(파출소 맞은편)에서 5번버스 승차 = 금산사 종점 하차 = 30분정도 소요

9/44분,  10/25분, 12시, 13/10분, 14/25분, 15/5분 15/30분, 16/40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