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화이야기=고려외

익산 미륵사지 = 금마면 미륵사지 특별전시회 2013년~2014년 3월 30일까지

백련암 2010. 8. 4. 00:55

미륵사지(彌勒寺址)

益山 彌勒寺址 石塔(익산 미륵사지 석탑) : 국보 제 11호    시대 = 백제

 

익산 미륵사지는 사적 제150호. 〈삼국유사〉 권2 무왕조(武王條)의 기록에 따르면

백제(18년 B.C~A.D 660년)세서 가장 큰 가람이었던 미륵사의 창건은「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백제 30대 무왕(600~641)이 왕비와 함께 용화산에 있는 사자사(獅子寺)로 지명법사를 찾아가던 중

큰 연못 속에서 미륵삼존불이 나타나자 왕비가 이곳에 절을 세우기를 소원하여 지명법사의 도움으로 산을 허물어 못을 메우고

탑과 법상, 미륵삼회전, 낭무(廊廡)의 건물을 건립하고 미륵사라 이름했다고 한다.

 

삼국유사의 기록을 믿는다면 미륵사는 창건당시 건축. 공예 등 백제의 문화 역량이 최대한 발휘 되었을 뿐만 아니라 

신라등 삼국의 기술이 결집되었음을 알 수있다.  미륵사의 창건은 이곳 금마에 가람을 조영하여 마한 세력을 아우르려는

정치적 의도도 있었을 것이나 황룡사로 대표되는 신라 화엄신앙에 대비되는 백제 미륵신앙에 바탕한 것이다.

 

이 절이 언제 없어졌는지는 알 수 없으나 17세기경에는 이미 폐사되었으며 현재는 반쯤 파손되어 있는 서탑과 당간지주 등 일부만 전해지고 있다.

 

1980년대 문화재관리국의 문화재연구소에서 실시한 본격적인 발굴조사의 결과로 동탑과 서탑 사이에 목탑을 세워서

일직선상에 탑 3개를 배열하고, 각 탑의 북쪽편에 금당을 1개씩 둔 가람배치였음을 알게 되었다.

또한 한 쌍의 금당과 석탑에는 각기 회랑이 둘러져 있어 탑과 금당을 1개의 절로 생각할 때 마치 3개의 절이 모여 있는 듯한

3원식(三院式)의 구성을 보여주고 있을 뿐 아니라 3개의 금당에 모두 지하공간이 있는 특이한 구조의 건물이다.

이 절터에서는 막새기와 · 토기 · 불상 등을 비롯하여 1만여 점의 각종 유물이 나왔으며 특히 '미륵사'라든가 '국5년경진'(國五年庚辰) ·

'요봉원'(姚奉院) · '지원4년'(至元四年) · '천력3년'(天歷三年) 등의 문자가 새겨진 기와가 출토되었다.

 

미륵사지는 미륵삼존불의 출현으로 절을 짓게 된 창건동기나 미륵이 이 세상에 와서 3번의 설법을 하기 위한 3군데의 장소를 마련하고 있는 점,

그리고 미륵이 머무를 장소로 금당에 지하공간을 설치했다는 점 등에서 미륵불이 이 세상에 내려오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건립된 것으로 생각된다

(→ 미륵하생신앙).

 

彌勒寺址出土 石造物(미륵사지출토 석조물)

이 곳에 전시된 석조물(石造物)들은 1980년부터 1996년까지 17년간 미륵사지 발굴조사에서 수습된 백제시대에서 조선시대까지의 것이다.

전시된 석조물은 22종류 60여 점으로 동원 9층석탑 부재(東院 九層石塔 部材), 석등(石燈)부재, 당간(幢竿)부재,

건물기단석(基壇石), 맷돌, 다양한 형태의 건물 초석(礎石) 등이다.

 

 

益山 彌勒寺址 幢竿支柱(익산 미륵사지 당간지주)  :  보물 236호     시대 =  통일신라

미륵사지에는 다른사찰과는 달리 90m 정도의 간격을 두고 2기의 당간지주가 있다.

원래 이곳 미륵사지에 있던 2개의 석탑앞쪽에 각각 하나씩 당간지주가 있는데  다른사찰과는 다른 형식적인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그렇다고 이 당간지주가 백제시대부터 있던 당간지주는 아니고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부석사 당간지주와 소수서원 입구에 있는 숙수사지 당간지주와 비숫한 형태를 하고 있다.

 

*당간지주는 사찰입구에 세워두는 것으로 절에서는 행사나 의식이 있을때 당이라는 깃발을 달아두는데,

깃발을 걸어 두는 길쭉한 장대를 당간이라 하며, 당간을 양쪽에서 지탱해 주는 두 돌기둥을 당간지주라 한다.*

 

 

益山 彌勒寺址 幢竿支柱(익산 미륵사지 당간지주)  :  보물 236호     시대 =  통일신라

두기 중의 하나 이곳은 탑쪽으로 있다.

 

당간지주는 사찰 입구에 세워두는 것으로, 절에서는 행사나 의식이 있을 때 당이라는 깃발을 달아두는데,

깃발을 걸어두는 길쭉한 장대를 당간이라 하며, 당간을 양쪽에서 지탱해 주는 두 돌기둥을 당간지주라 한다.

 미륵사터의 남쪽에는 2기의 지주가 약 90여 미터의 간격을 두고 서 있는데, 크기와 양식, 조성수법이 같아 같은 시기에 세워진 것으로 본다.

지주를 받치는 기단부(基壇部)는 완전히 파괴되어 대부분이 땅속에 묻혀있는 상태이며, 약간만이 드러나서 그 원모습을 짐작하게 한다.

지주는 원래 모습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데, 마주보는 면에는 특별한 장식이 없다. 바깥쪽 면에는 가장자리를 따라 띠를 돌린 후,

그 중앙에 한 줄의 띠를 새겨두었다. 당간을 흔들리지 않게 고정시키기 위해 지주의 안쪽 면에 3개의 구멍을 각각 뚫어놓았는데,

맨 위의 것만 직사각형 모양이고 나머지는 둥글다.

대체적으로 장식이 적으며, 단정한 형태를 보이는 이 두 지주는 통일신라 중기 이후에 만들어진 것으로 짐작된다.

이 곳의 당간지주와 거의 같은 모양의 예로는 영주 숙수사지 당간지주(보물 제59호)와 영주 부석사 당간지주(보물 제255호) 등이 있다.

 

 

益山 彌勒寺址 幢竿支柱(익산 미륵사지 당간지주)

두기 중의 하나 이곳은 교회를 뒤로 하고 있다.

 미륵사터의 남쪽에는 2기의 지주가 약 90여 미터의 간격을 두고 서 있는데, 크기와 양식, 조성수법이 같아 같은 시기에 세워진 것으로 본다.

 

 

益山 彌勒寺址 幢竿支柱(익산 미륵사지 당간지주)
위의것과 같음  다른방향에서 찍은 것

 

   

미륵사지 석탑과 돌문의 문고기

 

 

   

미륵사지탑 

국보 제11호. 높이 14.2m. 한국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석탑으로 중국에서 전래된 목탑양식을 석재로 바꾸어 표현한 것이다.

현재 6층의 탑신이 남아 있으나 일부가 붕괴되어 시멘트로 보수한 상태이며 원래는 7층 또는 9층이었다는 설이 있다.

낮고 작은 기단 위에 건립되었으며 각 층의 탑신은 각 면이 3칸으로 되어 있다.

1층 탑신은 네 귀퉁이에 배흘림이 분명한 기둥을 세우고 그 사이에 탱주를 새겼으며 각 면의 중앙에는 내부로 통하는 문이 1개씩 설치되어 있다.

내부 중앙에는 십자(十字)로 교차 되는 점에 탑을 지탱하는 석조의 찰주가 세워져 있다.

각 층의 옥개는 얇고 넓은 편으로 중앙에서 직선으로 뻗어 내려오다가 끝부분에서 약간 위로 올라간 모습이며 옥개석은 3단받침으로 되어 있다.

2층 탑신은 1층에 비해 높이가 현저하게 낮아졌으며 옥개부분도 위로 올라갈수록 체감되어 전반적으로 안정된 느낌을 준다.

이 석탑은 〈삼국유사〉에 보이는 기록이나 석탑의 양식적 특징으로 볼 때 백제 말기인 무왕대에 건립된 것으로 생각된다.

 

 

미륵사지 석탑과 영지에 비친 모습

 

 

 

 

◈2014년 2월 18일 彌勒寺址(미륵사지)◈

익산시 금마면 미륵사지 특별전시회를 2013년 11월 27일 ~ 2014년 3월 30일까지 한다는 뉴스를 보고 떠났다.

 

미륵사지는 1980년에 발굴조사가 시작되었다. 그 결과 미륵사지가 백제 최대의 사찰이었음을 각 유구를 통해 알 수 있게 되었으며

1996년까지 1만 9,000여 점에 이르는 귀중한 유물이 출토되었다. 이에 따라 현장전시를 통해서 국민들에게 공개,

백제문화의 우수성을 알리고 국민의 사회교육장으로 활용하기 위해 미륵사지유물전시관을 1992년 착공, 1997년 5월 9일 개관하였다.

 

미륵사지 유물을 한눈에, 미륵사지 유물전시관   미륵사지 유물 전시관은 4만 991.9m²(12,400평)의 대지에 연건평 1,963.6m²(94평) 규모로

 전시실, 세미나실, 기획전시실, 수장고, 사무실 등을 갖추고 미륵사지 출토유물 및 자체소장유물자료 1만 9,300여 점을 보관하고

유물과 자료 중 400여 점을 전시하고 있다.   

전시실은 중앙홀, 개요실, 유물실, 불교미술실 4개의 상설전시실과 1개의 기획전시실이 있다.

중앙홀은 미륵사 및 미륵사 석탑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미륵사 축소모형과 미륵사지를 배경으로 한 미륵산 전경 사진,

1910년대 미륵사지 및 석탑 사진판넬이 설치되어 있다.  

개요실은 미륵사지 발굴성과를 중심으로 미륵사의 창건과 변천과정을 살펴볼 수 있도록 미륵사지 기복지형 모형,

설명판과 17분짜리 영상을 설치 방영하고 있다.  

유물실은 8장의 벽진열장과 중앙 공개 전시대를 갖추어 미륵사 가람 활동이 유치된 1천 년간의 신앙,

생활문화를 볼 수 있는 유물을 종류, 기능, 시대별로 나누어 전시하고 있다.

 

불교 미술실은 미륵신앙과 미륵사에 관련된 문헌기록과 자료, 가람 배치 비교·석탑변천 과정 패널과 석탑· 목탑· 석등 모형 등을 전시하고 있다.

특히 사회교육 활동의 일환으로 미륵사지 현장학습 및 토요전통문화강좌, 여름문화학교, 교사역사문화강좌 등을 개최하고 있으며

연중 문화 영화를 상영하고 있다.   

미륵사지 유물전시관의 유래   미륵사지는 1980년에 발굴조사가 시작되었다. 그 결과 미륵사지가 백제 최대의 사찰이었음을 각 유구를 통해

알 수 있게 되었으며 1996년까지 1만 9,000여 점에 이르는 귀중한 유물이 출토되었다.

이에 따라 현장전시를 통해서 국민들에게 공개, 백제문화의 우수성을 알리고 국민의 사회교육장으로 활용하기 위해

미륵사지유물전시관을 1992년 착공, 1997년 5월 9일 개관하였다.  

전시관은 미륵사지의 경관을 고려하여 중심 지역보다 낮은 위치에 세워 지형적으로 조화를 이루도록 하였고

모양은 미륵사지 석탑의 이미지를 살린 것으로 지붕처마선의 날렵함이 또 하나의 볼거리를 제공한다.

 

 

서쪽에 자리하고 있던 미륵사지 석탑 <국보 : 제 11호>

미륵사지내에 있는 이 석탑은 미륵사지 서원(西院)에 자리하고 있으며, 국내에 남아 전하는 석탑으로는 가장 오래되고 규모가 큰 탑이다.

현재 남아있는 층수는 6층이며[현재 보수정비 중], 이 탑의 층수에 대해서 한때는 7층 설이 주장되기도 하였으나

동탑지 주변발굴에서 노반(露盤)이 발견되어 9층이었음이 밝혀졌다.

이 석탑은 목조탑파의 양식을 그대로 따른 것으로 한국 석탑의 기원이 되는 것이다.   

구조를 보면 화강암을 사용하여 조성된 이 탑은 방형(方形)의 이중(二重) 기단석(基壇) 위에 사방 세 칸의 탑을 쌓았다.

초층에는 민흘림형식을 갖춘 네모꼴의 돌기둥을 설치하고, 기둥머리위에는 평방(平枋)과 창방(昌枋)을 올려놓았으며,

각 중앙칸에는 출입구를 만들어 十자모양의 내부로 통하는 통로를 두었고, 탑 내 중앙의 교차되는 중심에는 바른 네모꼴 모양의 찰주(擦柱)있다.

특히 초층(初層)에서 주목되는 것은 네모꼴 기둥의 가공한 기법이 민흘림 양식이며, 우주(隅柱)의 경우 귀솟음 기법을 사용한 것이 매우 특이하다.

또 이 탑의 특징은 목조건물에서 공포(拱包)를 가설하였을 것이나, 이 탑에서는 목재와 같이 기교 있게 공포(拱包)를 조각할 수 없으므로

공포양식을 모방한 3단의 층급받침으로 지붕돌을 받치도록 하였다.

지붕돌은 얇고 넓은데 네 모퉁이가 가볍게 치켜들고 있어서 신라 석탑양식에서는 볼 수 없는 백제 특유의 양식을 나타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2층 이상은 탑신(塔身)이 얕아지고 각 부분의 가구 수법을 약화 시켰으며, 지붕돌은 폭만 줄여 1층과 같은 수법을 보이고 있다.

5층 이상의 층급받침은 정단에서 4단으로 증가되었다. 그리고 각 기둥과 면석, 창방과 층급받침 등을 모두 별개석 으로 엇물림 쌓기를 하고 있다.  

 

이 탑은 붕괴 직전에 있는 폐탑으로 남아있는 것을 1915년 일본인들이 보수(?)하여 비교적 탑의 동쪽 부분은 온전하게 남아있으나,

서쪽부분을 시멘트로 덮어 버려 조형미를 잃고 있었다. 

1992년 문화재관리국에서 동탑지에서 발견된 탑 부재를 치밀하게 조사하여 동탑을 9층으로 복원 하였다.

이 석탑은 본래 9층이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나 17세기 이전에 붕괴되었으며 1915년 일본인들이 무너진 부위에 콘크리트로 보강하였고

최근까지 절반이상 무너진 상태로 존속되어 왔다.

그러나 미륵사지석탑은 우리나라 석탑 중 가장 큰 규모이고, 현존 최고 양식으로 알려져 있으며 1층 내부에 있는 十자형 통로와 심주,

천장 구조  등은 고대 석탑의 특징을 잘 보여 준다.

 

 

금제사리봉영기(金製舍利奉迎記) 전면 *가로 : 15,3cm  세로 : 10.3cm = 확대경속에 비친 사리봉영기

 

   

상단 전면, 하단 후면 = 확대해 놓은 사진

백제 왕후가 가람을 발원하고 기해년(639년)에 탑을 조성하여 왕실의 안녕을 기원하는 내용의 발원문으로

미륵사 건립의 목적, 발원자, 석탑건립연대 등을 알 수 있다.

 

◈원문해석◈

가만히 생각하건데 법왕(法王)께서 세상에 출현하시어 근기(根機)에 따라 부감(赴感)하시고,

중생에 응하여 몸을 드러내신 것은 마치 물 가운데 비치는 달과 같았다.

이 때문에 왕궁(王宮)에 의탁해 태어나시고 사라쌍수(娑羅雙樹) 아래에서 열반에 드셨는데, 8곡(斛)의 사리(舍利)를 남겨

삼천대천세계(三千大天世界)를 이익되게 하셨다.

마침내 찬란히 빛나는 오색(五色, 사리)으로 일곱 번을 돌게 하였으니, 그 신통변화(神通變化)는 불가사의(不可思議) 하였다.

우리 백제왕후(百濟王后)는 좌평(佐平) 사택전덕의 딸로서 오랜 세월(曠劫, 광겁) 동안 선인을 심으시어 금생에 뛰어난 과보(勝報,승보)를 받으셨다.

(왕후께서는) 만민을 어루만져 기르시고 삼보(三寶)의 동량(棟梁)이 되셨다.

때문에 깨끗한 재물(淨財)을 희사하여 가람(伽藍)을 세우고, 기해년(己亥年) 정월 29일에 사리(舍利)를 받들어 맞이하셨다.

원하옵건데 세세토록 공양하여 영원토록(劫劫) 다함이 없어서 이 선근(善根)으로 우러러 대왕폐하의 수명은 산악과 나란히 견고하고,

왕위(寶曆,보력)는 천지와 함께 영구하여, 위로는 정법을 크게 하고 아래로는 창생을 교화하는데 도움이 되게 하소서.

다시 원하옵건대, 왕후의 몸에 나아가서는, 마음은 수경 같아서 법계를 항상 밝게 비추시고, 몸은 금강(金剛)과 같아서 허공과 같이 불멸하시어,

칠세를 영원토록 다 함께 복리를 받고, 모든 중생들이 다 함께 불도를 이루게 하소서

해석- =동국대 교수 김상현=

 

 

   

금동제사리외호(金銅製舍利外壺) *높이 :13cm, 어깨폭 : 7.7cm 

사리기(舍利器)란 사리를 모셔 놓은 그릇이나 공간을 말하며 사리장엄의 핵심으로 석탑 심주 사리공 정중앙에 안치되어 있었다.

사리외호(舍利外壺) 안에 사리내호(舍利內壺), 사리내호 안에 유리제 사리병이 들어가 있어 3중첩 방식을 택하고 있다.

사리는 유리병에 봉안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신라의  선화공주와의 로맨스로 잘 알려진 서동이 백제의 무왕이기에 선화공주의 발원으로 세워졌다고 하였으니,

선화공주의 발원으로 미륵사가 착공되었고,

아마도 선화공주가 사망하여 새로 맞이한 후비가 이 사리호를 봉안한 셈이 됩니다.

그렇게 알고 있어야 무왕의 로맨스도 살리고 역사적 기록이 증명하는 사실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아름다운 이야기를 담고 있는 이 순금 사리호는 치말한 구성의 무늬와 점선면의 능숙한 새김기술을 볼 수 있어,

화려하면서도 전체적인 형태에 고귀한 품위가 있어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았다."는 백제 아름다움의 진수를 보여줍니다.

 

 

↑사리내호(舍利內壺)                                                                                                   ↑  사리외호(舍利外壺)                      

사리기(舍利器)란 : 사리를 모셔 놓은 그릇이나 공간을 말하며 사리장엄의 핵심으로 석탑 심주 사리공 정중앙에 안치되어 있었다.

 

 

   

금제사리내호(金製舍利內壺)  *높이 : 5.9cm, 어깨폭 : 2.6cm

◈익산 미륵사지 서탑 출토 순금사리호= 백제 639년(무왕 40년) 높이 13cm<外舍利壺>◈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탑 중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것이 전북 익산의 미륵사지 西 탑입니다.

또한 미륵사지는 백제 무왕이 세운 절로 대지 면적 5만 평이 넘는 우리나라 최대가람이었습니다.

경주 황룡사의 두배가 되는 넓이입니다.

 

1980년대부터 미륵사지의 발굴을 시작하였고, 서탑이 붕괴 위험에 놓여 2009년 해체수리하던 과정에서 사리장엄 일체가 발견되었는데,

사리의 봉안내용이 새겨진 금판을 해석해보니 "무왕 40년 정월 29일에 좌평 사택전덕의 따님인 백제 왕후가 이 사리를 모셨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신라의  선화공주와의 로맨스로 잘 알려진 서동이 백제의 무왕이기에 선화공주의 발원으로 세워졌다고 하였으니,

선화공주의 발원으로 미륵사가 착공되었고,

아마도 선화공주가 사망하여 새로 맞이한 후비가 이 사리호를 봉안한 셈이 됩니다.

그렇게 알고 있어야 무왕의 로맨스도 살리고 역사적 기록이 증명하는 사실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아름다운 이야기를 담고 있는 이 순금 사리호는 치말한 구성의 무늬와 점선면의 능숙한 새김기술을 볼 수 있어,

화려하면서도 전체적인 형태에 고귀한 품위가 있어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았다."는 백제 아름다움의 진수를 보여줍니다.

 

사리장엄 발견 당시의 사진을 찍어 확대해 벽면에 붙여 놓은 사진들

유물출토상황  =  ▲사진으로 보여주고 있음

석탑 1층 심주석 중앙에 방형 사리공(한 변 25cm, 깊이 27cm,)을 조성하고 바닥에는 바닥면을 덮을 수있는  크기의 판유리를 깔고

그 위에 다양한 유물을 차례로 안치하였다. 먼저 사리공 사면에 청동합 6개를 두고 이 합들 사이에는 유리구슬을 채운 뒤

남측에는 은제관식과 금제소형판들을, 북측에는 직물에 싼 칼(刀子) 4자루를 두고, 동측에 1자루, 서측에 2자루의 칼을 각각 올려놓았다.

그리고 남측 벽면에 비스듬히 금제사리봉영기를 올려놓고 정중앙에 사리호를 마지막에 안치한 상태로 확인되었다.

북측과 서측 벽면 쪽에는 부식이 심한 직물들이 있었고 주변에는 금사(金絲)등 각종 실들과 함께 크고 작은 금괴도 섞여 있었다.

 

 

   

            좌 = 확대경으로 본 진신사리                                                   우측사리 = 내호사리함에 유리구슬과 함께 들어있던 것이다.

 

    

㉠                                                                   ㉡

㉠해체 당시에 사리함의 모든것을 세밀하게 볼 수있게 확대해 벽면에 붙여 놓은 것

㉡금판에 씌어진 내용을 육안으로는 잘 보이질 않아 확대 선명하게 볼 수있게 벽면에 붙여 놓은 것

 

금판(金鈑) = *가로 : 1.5cm,  세로 : 8.3cm,  두께 : 0.1cm 내외=<확대경이 앞에서 비춰 줌>

 

모든 금판(金鈑)에 글이 쓰여있다.

 

 

금제족집게 * 가로 : 0.8cm,  세로 : 5cm

 

 

   

㉠                                                                                                          ㉡

청동합(靑銅盒) = 청동합들은 모두 = 높이 :3.23~4.58cm,   지름 : 5.88~8.28cm로 이루어졌음

 

 

   

청동합                                                                                                  금판 금못 구슬

아주작은 금 고리들을 금족집게로 집어서 연결을 하였음

 

 

   

곡 옥(곡선을 이른 옥) = 가로 : 1.2cm   세로 : 1.4cm 정말 아름답다.<확대경으로..>

 

 

   

마노,         유리구슬,              호박                                                                              금동제 장식편

 

 

    

금동합, 금제구슬,                                                                              금동합 귀걸이

 

 

미륵사지가 복원된 모습을 그림으로 표현해 놓았다.

3탑3금당 동양최대의 사찰   전라북도 익산시 금마면 기양리에 위치하는 미륵사지는 백제 최대의 사찰로 30대 무왕(600~641년)에 의해 창건되었고,

17세기경에 폐사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미륵사지가 발굴되기 이전에는 백제 창건당시에 세워진 미륵사지 서탑(국보 11호) 1기,

그리고 석탑의 북쪽과 동북쪽 건물들의 주춧돌과 통일신라시대에 사찰의 정면 양쪽에 세워진 당간지주 1쌍(보물 236호)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미륵사지에 대한 조사연구는 일본인들이 1910년 고적조사를 개시로 남아있는 석탑과 관련, 부분적인 조사를 실시하여 ‘品’자형 가람배치를 갖는

것으로 주장되기도 하였다. 그 후 1974년과 1975년 원광대학교 마한.백제문화연구소에서는 동쪽에 남아있는 탑 자리가 목조탑인지 석조탑인지 밝히기

 위하여 동탑지 부근을 발굴 조사하여 서탑과 같은 규모의 석탑지임을 확인하였다. 

1980년에 들어서 문화재 연구소에서는 백제 문화개발사업의 일환으로 당시 최대 규모의 사찰인 미륵사지를 정비하고 보호하여

이를 사회교육도장으로 활용하기 위하여 종합적인 발굴조사를 실시하게 되었다.

이러한 종합적인 발굴조사 결과 일본인들이 주장한 ‘品’자형의 가람배치는 맞지 않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확인된 가람배치에 의하면 동탑과 서탑이 있고, 그 중간에 목탑이 있으며, 각 탑의 북편에 금당(金堂=법당)의 성격을 지닌 건물이

하나씩 있었음이 확인되었다. 그리고 이들 탑과 금당을 한 단위로 구분하는 회랑이 있어 동쪽은 동원(東院), 서쪽은 서원(西院),

중앙은 중원(中院)이라는 개념의  삼원 병립식 가람형태임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중원의 북측에 거대한 강당(講堂) 하나만을 두고 공동으로 사용하게 하였다.

 

여기에서 ‘가람’이란 승가라마(僧伽藍摩)의 준말로 범어(梵語)의 Sngharama에서 유래 된 것으로 여러 승려들이 한군데 모여 살면서

불도를 닦는 것을 뜻하였으나, 후세에 와서는 절에 속한 집을 말하는 것으로 의미가 축소되었다.

아무튼 이러한 가람배치는 동양가람배치연구에서는 밝혀진 바가 없는 전혀 새로운 형식의 특수한 형태이다.   

미륵사지의 발굴은 1980년에서부터 1995년까지 15년간 실시되어 20,000여점의 유물이 출토되었는데 막새기와류와 기와의 등에

문자를 새긴 명문와, 토기류 그리고 자기류가 거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히 건물의 서까래 끝에 붙이는 녹유 연꽃무늬서까래 기와는 백제시대에 사용된 것으로 상당수가 출토되었다.

그리고, 이밖에 그 수는 많지 않지만 금속제품, 목제품, 벽화편, 토제편, 유리 및 옥제품, 석제품 등도 수습되어 종류 면에서 비교적

다양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미륵사는 신라의 침략을 불교의 힘으로 막기 위한 호국 사찰로써 성격을 띠고 세워졌던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따라서 미륵사는 백제가 망할 때 까지 왕실 사찰로 혹은 호국 사찰로 매우 중요한 역할을 맡았던 사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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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화문수막새(蓮花文圓瓦當), 「사」「우」명 암키와 (「巳」「右」 銘 圓瓦),  연화문수막새(蓮花文圓瓦當) = 백재시대    

당초문암막새(唐草文平瓦當) = 통일신라시대

 

 

    

연화문수막새(蓮花文圓瓦當) = 백제시대                                          범어문수막새(梵語文圓瓦當) = 조선시대 "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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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판국화문수막새(重瓣菊花文圓瓦當),  인동당초문암막새(忍冬唐草文平瓦當), 중판국화문수막새(重瓣菊花文圓瓦當) = 통일신라시대

봉황문수막새(鳳凰文圓瓦當),   용문암막새(龍文平瓦當),   봉황문수막새(鳳凰文圓瓦當) = 조선시대

 

 

용문암막새(龍文平瓦當) = 조선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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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목문수막새(鬼目文圓瓦當),   귀목문암막새(鬼目文平瓦當),   연화문수막새(蓮花文圓瓦當)  = 고려시대  

서조문암막새(瑞鳥文平瓦當) = 고려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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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층(上層) = 태미륵사명」암키와(太彌勒寺銘 平瓦), 「금마저관」명 수키와(金馬猪官 銘 圓瓦)

                 하층(下層) =「천력3년」명 암키와(天曆三年 銘 平瓦),   「만력십오년」명 수키와(萬曆十五年 銘 圓瓦)   

 

 

    

彌勒寺址 木塔(미륵사지 목탑) 대각선 모습

삼국시대 우리나라에 불교가 들어오면서 전해진 탑의 형식은 목탑과 전탑이었으며 석탑은 우리나라에서 발생한 것이다.

특히 미륵사지에는 동 · 서쪽에 석탑이 있고 중앙에는 목탑이 자리하고 있어 목탑에서 석탑이 발생한 시원지로 생각되고 있다.

발굴조사에 의하면 중앙의 목탑은 석탑의 기단과 같은 기단형태였으며 계단도 유사한 형태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탑의 규모는 미륵사지 전체 평면에서 탑을 중심으로 형성된 동원과 서원에 비하여 중원이 크며, 목탑도 그 같은 비례에 의하여

· 서쪽에 자리하고 있는 석탑에 비하여 큰 규모였음이 확인된다.

목탑의 상면에 대해서는 남아있는 자료가 없었으나, 동탑과 서탑이 양식상 목탑에서부터 발생한 것이라는 점에서

양쪽 석탑과 비숫한 구조였을 것이다.

전시된 모형은 이 같은 점을 기초로 목탑의 본래 모습을 추정 복원하여 20분의 1로 만든 것이다.

 

 

미륵사지가 복원된 모습을 표현해 놓은 모형도이다.

중앙실에 있는 이 가람모형은 미륵사의 1/50축소모형입니다.(추정복원). 국립문화재연구소는 1980년부터 1996년까지

약 17년간 미륵사지 발굴조사를 실시 하였는데 그 발굴성과를 토대로 하여 추정 복원한 것입니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의하면 미륵사는 백제 제 30대 무왕(재위 : 600~641년)대에 창건되었다고 하며,

미륵사터를 발굴조사하여 출토유뮬들을 살펴 본 결과 사실임이 확인 되었다고 합니다.

미륵사는 석가모니불이 아닌 미륵불을 모셨던 절로 추정됩니다. 미륵하생경을 보면 도솔천에 있는 미륵은 56억 7천만년 후에 하생하여

용화보리수 아래에서 세 번의 설법을 통해 중생을 구원한다고 하고 있습니다.

미륵을 모신 금당과 탑을 이렇게 세곳에 세운 것은 삼회의 설법을 상징한다고 하며,

여기 이곳 금마는 미륵이 하생할 인연을 갖고 있는 땅이었고 이러한 용화세상의 세계를 가람으로 구상화했다고 합니다.

보시는 바와 같이 3탑 3금당이 나란히 있는 가람의 형태에서 중원의 목탑과 금당의규모는 좌우 가람의 2배가 되는데,

좌우 가람의 석탑은 석탑으로서는 우리나라 최초의 것이라고 합니다.

석탑이 여기 익산의 금마 미륵사에서 시작되었다고 하는 것은 중국의 전탑, 일본의 목탑등과 비교할 때

백제인의 창의성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건축물이라 하겠습니다.

무왕이 이러한 미륵사를 당시의 수도인 부여에 짓지 않고 여기에 지은 것은 무왕이 수도를 부여에서 이곳 금마로 옮기려고 했다는

사실과 함께  정치 · 경제 · 군사 · 종교적인 여러 가지 면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하겠습니다.

현재의 서탑은 1915년에 일본인에 의해서 수리되었고 동탑은 1992년에 문화재관리국과 전라북도에 의해 복원된 것입니다.

 

 

미륵사지 발굴조사 전경

미륵사지는 1980년부터 3차에 걸쳐 17년 동안 전면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다. 발굴조사 결과 중원과 동 · 서원에 각각 탑과 금당을 갖추고

동 · 서 승방과 강당이 구성된 백제 최대 규모의 사찰로 밝혀졌으며, 가람 배치는『三國遺事[삼국유사]』의

"殿塔廊廡各三所創之[전탑량무각삼소창지]"의  기록과 일치하는 것이었다.

또한 백제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이르는 수십여 개의 건물지와 2만여 점에 가까운 유물이 출토되어 미륵사 창건 이후의 지속적인 경영이 확인되었다.

<발굴 당시의 모습을 사진으로 기록을 남겨 액자에 걸어 놓고 전시를 하고 있다.>

 

 

<발굴 당시의 모습을 사진으로 기록을 남겨 액자에 걸어 놓고 전시를 하고 있다.>

 

 

<발굴 당시의 모습을 사진으로 기록을 남겨 액자에 걸어 놓고 전시를 하고 있다.>

 

 

    

①                                                                                        ②

미륵사지 석탑 국보 제 11호  해체 현장 = 이층에서 자세히 내려다 볼 수있게 해 놓았습니다. 가건물로 지어져있다.

해체된 석탑부재  = 해체현장인 가건물 2층에서

 

 

    

①東 金堂址(동금당지)                                                                    ②中 金堂址(중 금당지)

①東 金堂址 = 미륵사의 금당은「삼국유사(三國遺事)」의 기록처럼 삼금당(三金堂)이다.

동(東) · 서(西) · 중(中) 삼금당을 그 세워진 위치에 따라 동금당(東金堂) · 서금당(西金堂) · 중금당(中金堂) 이라고 부르고있다.

각 금당지에는 南北과 中央에 돌계단이 있고, 같은 양식의 이중 기단과 높은 초석이 있다.

초석은 한 변 105cm 정도의 정방형 초반석 위에 긴 정방형의 초석을 올려놓았는데 밑의 초반석 각 변의 중앙에 위의 긴 초석의 모서리가

위치하도록 하여 초석을 누르는 건물의 전체적인 무게를 8곳으로 분산시켜 받도록 하였다.

각 초석의 정면에는 초석의 움직임을 막고, 그 위에 마루를 깔기 위한 나무 보가 놓여졌을 것으로 추정되는 홈이 파여 있다.

 

삼금당(三金堂)은 모두 정면 5칸, 측면 4칸으로 칸 수는 같지만 각 칸의 너비에 따른 기단의 전체적인 크기는 중금당의 것이 동서 금당의 2배 정도이다.

삼금당(三金堂) 중 동금당(東金堂)이 제일 먼저 소실(燒失)되었다. 동금당지(東金堂址)에서는 금동제 장식과 납우리가 출토되었다.

서금당지(西金堂址)에서는 토제 나발(螺髮)과 연우(延祐, 4년, 1317년) 글자가 있는 기와가 나왔으며 같은 시대의 암수 막새가 많이 발견되었다.

이로써 볼 때 서금당지에는 고려말까지 건축물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중앙에 있는 금당지라 중금당지라고 부른다.즉 목탑 바로 뒤에 있다.

각 금당지에는 南北과 中央에 돌계단이 있고, 같은 양식의 이중 기단과 높은 초석이 있다. 초석은 한 변 105cm 정도의 정방형 초반석 위에

긴 정방형의 초석을 올려놓았는데 밑의 초반석 각 변의 중앙에 위의 긴 초석의 모서리가 위치하도록 하여 초석을 누르는 건물의 전체적인

무게를 8곳으로 분산시켜 받도록 하였다. 각 초석의 정면에는 초석의 움직임을 막고,

그 위에 마루를 깔기 위한 나무 보가 놓여졌을 것으로 추정되는 홈이 파여 있다.  삼금당(三金堂)은 모두 정면 5칸, 측면 4칸으로 칸 수는 같지만

각 칸의 너비에 따른 기단의 전체적인 크기는 중금당의 것이 동서 금당의 2배 정도이다.

 

 

동쪽 석탑 중앙 빈자리가 목탑이 있던 자리인 木塔址(목탑지)이다.

이곳에서 출토된 평기와 · 수막새 · 기와를 고정시키는 쇠못등의 유물과 이중기단(二重基壇)은 여기에 세워졌던 탑이 목탑이라는 것을 말해주고있다.

목탑지 기단은 북편 중앙의 계단식, 기단면석(基壇面石), 갑석(甲石) 일부와 서쪽의 기단석에 의해 한변 18.56m 규모의 정방형(正方形)으로 추정된다.

발굴당시 기단 북쪽의 구 지표가 손상되지 않고 남아 있었는데 이곳에서 나중에 보수 · 정비등으로 지붕에 올려졌을 것으로 추정되는

통일신라 중기와 후기의 평기와 · 수막새가 많이출토 되었다. 특히 수막새가 기단에서 북쪽으로 80m되는 지점에서

기단선과 평행을 이루면서 출토되어 목탑이 소실되면서 그대로 지붕이 내려 앉았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해준다.

미륵사는「삼국유사(三國遺事)」의 기록대로 연못을 메우고 지었다. 목탑지 하부는 목탑의 기단 면적만큼 메웠던 흙을 다시 깊이 350cm를 파냈다.

여기에 사람 머리 크기의 돌들을 150cm 정도 채워 다진 후 그 위에 황갈색 마사토와 점질토를 섞어 3~5cm 두께로 층층이 46단 193cm를 다져 올렸다.

 

 

    

석탑과 탑의 내부 중앙의 탑의 통로인 열십자 길목에 기둥이 있다.

 

 

彌勒寺址石燈下臺石(미륵사지 석등 하대석)  :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 143호     시대 = 백제

미륵사터에 남아있는 것으로, 석등 받침돌의 일부이다. 모두 2기가 남아있어 1기는 동쪽의 새로 복원해 놓은 석탑과 법당터 사이에 있고,

다른 1기는 중앙의 목탑터와 법당터 사이에 있다. 보통 석등은 불을 밝혀두는 화사석(火舍石)을 중심으로,

아래에는 3단의 받침돌을 두고 위로는 지붕돌과 머리장식을 얹어두는데, 이들은 3단의 받침돌 중 아래받침돌까지만 남아있다.

사각의 바닥돌 위에 놓인 아래받침돌은 윗면에 8잎의 연꽃을 두르고 그 사이에도 작은 잎을 조각해두었다.

동쪽에 있는 것이 꽃잎의 끝이 좀더 위로 말려 있을 뿐 거의 비슷한 모습이며, 맨 윗면에는 윗돌을 꽂아두기 위한 둥근 홈이 나 있다.
연꽃무늬의 모습이 이 절터에서 발견된 연화문 수막새와 비슷하고, 지금의 위치가 원래의 자리인 것으로 보아

미륵사의 창건시기와 비슷한 백제 무왕 때의 작품으로 추측된다. 비록 일부만 갖추고 있긴 하나,

리나라에 남아있는 석등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석등의 처음 양식을 밝히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彌勒寺址石燈下臺石(미륵사지 석등 하대석)

 

 

    

                                                                                          山神像(산신상)

    

僧舞(승무)                                                                                      삶의 굴레

 

    

관음보살                                                                                     까치 호랑이

 

    

해탈의 향기 하늘에 오르네.                                                                     기룡 관음상

 

 

포대화상

 

 

    

동 · 서에 2기가 남아 있는 당간지주

미륵사지에서는 당간지주가 다른 가람에서와는 달리 서탑과 동탑에서 남쪽으로 약 90m를 두고 각각 하나씩 두 기를 조영하였다.

이 동.서 당간지주가 위치한 지점은 동․서탑이 위치한 것보다는 절터의 중심 쪽으로 가깝게 자리하고 있어

하나의 가람배치 계획 속에서 조영된 것으로 보여지고 있다.

 

구조는 4매의 길게 다듬어 만든 돌로 지복석을 놓고 그 위에 기단(基壇)을 마련하였는데, 기단은 두 개의 장대석을 가공하여 조합하였다.

그리고 두 지주(支柱)사이에는 간대받침을 별개의 돌로 만들어 끼웠는데 간대받침은 상단과 하단에 반원형의 장식을 베푼 것으로

중앙에는 간대의 고정을 위한 구멍이 있다.

양지주의 내면에는 간대를 세웠을 때 고정시키기 위한 간공(竿孔)등 2개 처에 설치하였으며, 간구(竿溝)를 두었다.

이 당간지주는 조형미가 아름다우며 김제 금산사(金山寺)의 당간지주와 비슷한 형태를 지니며, 통일신라 대에 조성되었다. 

 

 

▲ 미륵사 석탑은 돌로 만든 동양 최대의 탑으로 한국 미술사의 성지이다.

 

대중은 문화재를 학술의 관점에서만 보는 걸 불편해 한다. 그보다는 문화재에서 즐거움을 느끼길 바란다.

문화재를 ‘공공의 자재(資財)’라는 시각에서 본다면 일리가 있다. ‘학술’이라는 말로 포장된 난해한 존재, 전문가에만 독점당한 문화재여서는

분명 곤란하다. 문화재라는 말에 너무 뻣뻣하게 굳어버리지 말고 자유롭게 바라보려는 시선은 창의적 관점을 이끌어낼 수도 있다.

그래서 그런지 가끔 대답하기에 ‘대략 난감’한 질문을 하기도 한다.

 

부여 정림사지 탑과 더불어  가장 오래된 목조형태 석탑
 
삼국유사에 무왕 · 선화공주 600년 창건했다고 기록
 
2008년 1월, 해체복원 과정서 ‘639년 사택녀 발원’ 기록 나와
 

삼국유사 내용 틀렸다기보다  창건과 완공 연대일 가능성 커 사택녀도 새 왕비일 수 있어

 

가령 탑을 예로 들면,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탑은 무엇인가?”는 것이다.

질문 속엔 하나만 딱 집어 대답해주길 바라는 마음이 있는 모양이지만, 그럴 수 없다는 게 문제다.

현재 전하는 탑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은 익산 미륵사(彌勒寺) 탑과 부여 정림사(定林寺) 탑이라는 게 정설이다.

두 탑이 동시에 세워지지는 않았더라도 양식(樣式)으로 볼 때 거의 비슷한 시기로 보는 것이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인 학자들은 이 두 탑을 고려의 작품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해방 이후 뒤늦게 시작된 우리의 미술사 연구가 점차 그 열매를 맺기 시작하던 1970년대 무렵 학자들은 두 탑 모두 백제 작품이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고, 그에 따라 이 두 탑은 우리나라 최고(最古) 석탑의 반열에 올랐다.

두 탑에 대한 정확한 시대측정은 드디어 우리 미술사 연구가 일본의 영향에서 벗어났음을 의미하는 성과이기도 했다.

 

미륵사 탑과 정림사 탑의 특징은 석탑이면서 목탑의 흔적을 뚜렷하게 간직하고 있다는 점이다.

미술사를 보면 새로운 유형이 나올 때 그 이전에 유행했던 양식의 흔적이 남아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전작(前作)에 대한 향수뿐만 아니라 새로운 양식에 천천히 적응하려는 마음이 작용했기 때문일 것이다.

석탑이 처음 등장했을 때도 목탑의 자취가 뚜렷하게 남아 있음을 미륵사 탑과 정림사 탑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렇게 급격한 변화보다는 완만한 흐름을 택한 것에서 백제 미술의 유연함이 유감없이 드러나 있다.

목조 건축은 나무 부재의 조립이므로 바깥에서 보면 포작(包作)이나 창방(昌枋)·평방(平枋) 같은 조립들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런데 석탑은 돌을 큼직큼직하게 잘라서 올려놓는 것이니 목탑에서와 같은 조립이 있을 리 없건만,

굳이 목탑에서나 보일 조립의 흔적을 일부러 새겨 넣은 것이 미륵사와 정림사 탑이다.

이런 특징은 이 두 탑 이후에 나타난 석탑부터는 눈에 띠게 줄어들어 있다.

석탑이 그만큼 사람들의 눈에 익어가고 목탑의 잔영이 사라져가고 있다는 뜻이다.

그러다가 8세기에 들어서면 목탑의 자취는 완전히 사라져 없고 석탑만의 모습으로 정착한다.

 

익산 미륵사 석탑은 현재 남아 있는 탑 중에서 가장 오래되었을 뿐 아니라 탑에서 백제의 완전한 사리장엄이 발견되었다는 점에서

남다른 의미가 있다. 미륵사 창건에 대해서는 ‘삼국유사’의 ‘무왕’조에 아주 자세하게 나온다.

서기 600년 백제 무왕(武王)과 왕비 선화(善花)공주가 익산의 용화산에 있는 사자사(獅子寺)를 찾았을 때였다.

용화산 입구에 있는 연못에 이르렀는데 문득 연못 안에서 미륵삼존이 솟아 나와 이들을 맞았다.

왕과 왕비는 미륵부처님들이 친히 자신들을 영접했다는 사실에 커다란 감동을 받았다.

 

선화 공주가 특히 더욱 그랬던 모양이다. 그녀는 무왕에게 이곳에 절을 세우자고 했고 무왕은 쾌히 승낙했다.

그리고 서기 600년에 마침내 미륵사를 완성했다. 지금의 미륵사는 바로 이런 창건연기를 간직하고 있다.

‘삼국유사’에는 당시의 가람 규모나 배치를, “금당과 탑, 그리고 회랑을 각각 세 곳마다 지었다(殿塔廊 各三所創之)”라고 적었다.

그런데 이 말은 1980년부터 20년 동안 이어진 미륵사지 발굴을 통해 그대로 확인되었다.

일연(一然) 스님이 ‘삼국유사’를 얼마나 정확하게 기술했는가 알게 해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세 채의 금당마다 그 앞에 세워진 탑 3기는 발굴을 통해 동·서 탑은 석탑, 중앙탑은 목탑으로 밝혀졌다.

지금 금당은 모두 사라졌고, 탑도 서탑(西塔) 하나만 남아 있지만, 이 탑은 다른 어떤 탑과 비교해도 뒤지지 않을 커다란 의미를 지니고 있다.

 

 

▲ 미륵사 석탑의 심초석 발굴 모습.

 

미륵사 탑은 지금 6층까지만 남아 있는데 본래 7층이었는지 혹은 9층이었는지 명확하지 않다.

현재 남은 모습을 스캔해서 그 비율에 맞춰 3D로 원형을 복원한 적이 있는데 그 때 9층이라는 결론이 나왔다.

그래서 1993년에 새로 세운 동탑도 이에 따라 9층으로 지었다. 하지만 그래도 7층일 거라는 주장은 여전히 존재한다.

어느 쪽이든 원 모습은 우리나라는 물론이고 동양에서 가장 큰 석탑이었을 거라는 데 이론이 없다. 미륵사 탑의 양식을 좀 더 살펴보자.

기단(基壇)을 나지막하게 한 단만 놓은 것은 여느 목탑에서나 볼 수 있는 스타일이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이 석탑이 목탑을 그대로 번안(飜案)했다는 것은 초층 탑신(塔身)부터 확인된다.

각 면마다 3칸씩 나누고 가운데 칸에 문을 만들고 그 안으로 작은 통로를 두었다.

그래서 평면으로 보면 사방에서 내부로 연결되어 중앙에서 일치되어 있고,

중앙에는 거대한 사각형 기둥을 세운 심초석을 두었다. 이런 모습은 목탑의 조립방법과 거의 같다.

 

또 초층 몸돌의 네 면에 세운 모서리기둥의 모습이 위아래가 좁고 가운데가 볼록한, 이른바 목조건축의 ‘배흘림기법’도 따르고 있다.

기둥 위에도 목조건축에서 기둥과 기둥을 연결하는 재료인 평방(平枋)과 창방(昌枋)을 본떠 설치한 것도 마찬가지다.

미륵사는 조선시대 중기 무렵 탑이나 당간지만 남은 채 건물은 모두 없어지고, 이후 황무지처럼 버려진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의 문인 강후진(姜侯晉, 1685∼1756)은 미륵사를 유람하면서 “미륵사에 벼락을 맞아 무너진 석탑이 있는데,

나이 지긋한 촌로가 이 탑에 올라가 비스듬히 누운 채 곰방대를 뻐끔뻐끔 물고 있더라.”라고

미륵사 탑을 마치 동양화 한 폭을 소묘(素描)하듯 표현하기도 했다.

 

일제강점기에 이 탑의 붕괴를 우려해 몸체에 시멘트를 발라 지탱시켰다. 그런데 시멘트를 바른 모습이 너무 안 좋은데다가,

또 이 시멘트마저도 갈라지고 있어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탑의 안전을 위해 지난 2007년부터 해체 복원 작업을 시작했다.

탑신을 모두 해체하고 드디어 심초석까지 내려갔을 때가 이듬해 1월, 그곳에서 백제 사리장엄이 고스란히 발견되어 새해 벽두부터 국민을 흥분시켰다.

금동 외함과 내함 그리고 사리를 담은 사리병, 여기에 사리장엄 주변에 놓인 각종 보석들까지 백제의 탑 사리장엄이 원 모습 그대로

발견된 것은 2007년 부여 왕흥사지 목탑지에서 나온 사리장엄에 이어 두 번째다.

미륵사 탑 사리장엄이 아무 탈 없이 봉안 상태 그대로 출토될 수 있었던 것은 탑을 세울 때 가장 먼저 설치하는 심초석 안에 봉안한 덕분이었다.

그래서 도중에 탑 일부가 무너졌어도 아무 손상 없이 보존될 수 있었다.

그런데 새로운 보물을 얻었다는 흥분이 서서히 가라앉을 무렵 이번에는 학계가 급격히 후끈 달아올랐다.

사리장엄과 함께 발견된 금판 봉안기(奉安記) 뒷면에 적힌 다음과 같은 문장 때문이다.

 

“우리 백제의 왕후는 좌평 사택의 후덕한 따님으로 전생에 갖가지 좋은 인연을 쌓아 복을 얻어 금생에 태어나셨다.

백성을 어루만지시는 한편 삼보의 동량이 되어 재물을 희사해 가람을 짓고, 기해년(639년) 정월 29일에 사리를 봉안하셨다

(我百濟王后 佐平沙積德女 種善因於曠劫 受勝報於今生 撫育萬民 棟梁三寶 故能謹捨淨財 造立伽藍 以己亥年正月卄九日 奉迎舍利).”

 

‘삼국유사’는 무왕과 왕비 선화공주가 발원해 600년에 창건되었다고 하는데, 금판에는 연도며 왕비 이름까지 전혀 다르게 보였던 것이다.

그래서 ‘삼국유사’에 전하는 이야기는 사실이기는커녕 허황한 전설을 그럴듯하게 적어 넣은 책이라는 혹독한 비판까지 나왔다.

일연 스님이 들었다면 억울해 땅을 쳤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얼마 뒤 금판의 기록에 대한 새로운 해명이 나오기 시작했다.

즉 ‘삼국유사’에 나오는 600년은 가람을 창건하기 시작한 해이고, 금판에 나오는 ‘기해년’ 639년은 가람과 석탑의 완공시기로 본 것이다.

완공기간이 길어 보이지만, 미륵사보다 규모가 작은 부여 왕흥사도 35년이나 걸렸던 점을 참고할 만하다.

여하튼 600년에서 시작해 가람창건이 완성된 639년 동안 선화공주가 승하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그렇다면 완공 때 썼을 금판에 기록된 왕비 ‘사택적덕녀(沙積德女)’란 선화공주를 이은 새 왕비라는 가설이 성립될 수 있다.

 

또 무왕과 선화공주에 대해 당시 백제와 신라가 적대관계였는데 왕실 간 혼인을 할 수 있을 상황이 아니라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이것 또한 충분히 설명될 수 있는 이야기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493년에 백제 24대 동성왕(東城王, 재위 479∼501)과

신라 이찬(伊飡, 17관등 중 두 번째 벼슬) 비지(比智)의 딸이 결혼을 했다는 기록이 있고,

그 뒤를 이은 25대 무령왕(武寧王, 재위 501∼503)의 부인 역시 신라 지증왕(智證王, 재위 500∼514)의 딸일 수 있다는 주장도 있는 만큼

그 가능성은 얼마든지 열려 있다고 봐야 한다. 선화공주가 실존인물로 미륵사 창건을 발원했을 사실은 충분히 뒷받침되는 이야기다.

 

천년 영화는 간곳없고 절터만 남았어도, 미륵사지는 한국 미술사를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꼭 가봐야 하는 미술사의 성지로 남았다.

백제의 왕실을 상징하던 장엄함은 간 곳 없지만 너른 절터에 오로지 혼자만 남은 석탑 하나만으로도

이곳은 미술사의 성지로 여겨질 충분한 이유가 된다.

발굴을 통해 출토된 방대하고 다양한 유물, 그리고 백제 최고 수준의 사리장엄까지,

미륵사 석탑은 우리 문화사를 한층 풍성하게 해준 황금 어장이자 보물창고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益山 彌勒寺止 金銅香爐(익산 미륵사지 금동향로)  :  보물  제1753호    시대 = 통일신라

미륵사지 금동향로의 조형에 대해서는 국내의 자료가 전무하여 중국과 일본 수각형 향로를 중심으로 살펴볼 수밖에 없다.

우선 중국 수각형 향로 가운데 미륵사지 향로와 비교되는 당대(唐代)의 작품이 여러 점 확인된다.

그 중에서도 6개의 다리와 6수면(獸面)을 지닌 741년의 경산사지(慶山寺址)출토의 향로가 미륵사지 향로의 조형과 유사한 점을 발견할 수 있다.

미륵사지 향로는 당대에 만들어진 중국 수각형 향로의 조형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고식의 연판 모습과 감은사지 사리감과 유사한 수면(獸面)과

고리에서 볼 수 있듯이 통일신라 초에 이루어진 여러 요소를 복합적으로 반영하여 한국적으로 수용한 작품으로 보인다.

백제 금동향로와 동일한 금 · 구리 아말감 도금법을 사용한 점 역시 이 향로의 제작시기를 올려보는 근거가 된다.

따라서 앞으로 보다 많은 자료와 세밀한 비교 검토가 이루어져야 하겠지만, 이 향로의 제작시기에 관해서는 불교미술과 함께 금속공예에 있어

완숙한 단계에 이르렀던 8세기 전반에서 중엽을 넘어서지 않는 시기에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미륵사지 발굴조사를 토대로 다른 동반 유물과의 비교를 통해 이 향로가 858년 이전에 매납(埋納)되었다는 견해는

이러한 편년을 적극적으로 뒷받침해 준다.

이 작품은 출토 경위가 확실하며 완벽한 보존 상태를 지닌 작품인 동시에 우리나라에서 첫 예가되는

통일신라의 금동 수각형 향로라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

 

 

    

① 금동제사리외호                                                                        ② 금동제사리내호

▶①외호는 넓은 구연(口緣) 위로 보주형(寶珠形) 꼭지가 달린 뚜껑과 긴 목, 둥근 어깨를 지닌 동체(胴體)로 되어 있다.

뚜껑과 목, 저부에는 연꽃잎을, 동체는 인동당초, 연화당초문으로 음각하고 여백에는 어문자(魚子紋)을 가득 시문하였다.

특히, 외호는 동체를 상하로 나누어 아랫부분에 "ㄴ"자형으로 홈을 파고 윗부분에는 리벳이 설치되어 끼우는 방식으로 결합된다.

외호 안에는 내호를 비롯해 다양한 색상의 유리구슬과 금제화형구슬, 향분으로 추정되는 분말형태의 유기물 등이 채워져 있었다.

 

▶②내호는 외호와는 달리 뚜껑과 동체 상부가 일체형이며 금판을 두드려서 만든 단조기법으로 제작되었다. 시문된 문양은 전반적으로

외호와 유사한 구성을 보인다. 내호에서는 유리제사리병 파편과 사리등이 추가로 확인되어 미륵사지석탑 사리봉안은

금동제사리외호 - 금제사리내호- 유리제사리병의 3중 구조로 밝혀졌다.

 

 

    

①金銅製舍利外壺                                                                 ②기타유물

②왼쪽부터= 은제과대,    은제관식,     금제족집게,     금괴

 

 

    

①琉璃製舍利甁(유리제사리병)                                                                      ②靑銅盒(청동합)

내호는 조사하는 과정에서 유리제사리병과 사리가 확인되었다. 사리병은 구연부와 뚜껑 외에는 형태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작고 얇은 수십개의 파편 상태로 수습되었다. 사리는 병 안에 봉안되었던 것으로 보이며 꼭지가 달린 구형(球形)의 뚜껑은 짙은 갈색을 띠고 있다.

 

 

    

金製舍利奉迎記(금제사리봉영기)

백제 황후가 가람을 창건하고 己亥年(639년)에 탑을 조성하여 왕실의 안녕을 기원하는내용의 발원문으로 미륵사 건립의 성격,

발원자, 석탑 건립연대 등을 알 수 있다. 앞면에 9자씩 11줄로 99자, 뒷면에는 94자를  새겨 전체 193자를 각자(刻字)하였으며,

특히, 앞면에는 주사(朱砂)를 사용하여 글씨를 더욱 선명히 드러나게 하였다.

 

 

    

①金製少形板(금제소형판)                                                                 ②靑銅盒(청동합)

손가락 길이만한 얇은 금판이 모두 18개가 확인되었다. 백제시대 화폐의 기능을 담당한 금정(金錠)으로 추정된다.

이중 세 점은 각각  中部德率支受施金壹兩  下(部)非致夫及父母妻子[중부덕속지수시금일량 하부(부)비치부급부모처자]. (전면). 

同布施[동보시] (후면) "惊" 등의 명문이 새겨져 있어 사리봉안 의례를 지내면서 개인이 시주한 내용으로 확인되었다.

특히, 중부(中部), 하부(下⼙[部]), 덕솔(德率),과 같은 명문을 통해 당시의 행정체제나 관등을 살펴볼 수 있다.

 

합은 사리장엄에서 흔히 사리병과 함께 봉안되는 유물 중 하나로 각각 크기가 다른 원형합 6점을 수습하였다. 벽면 주위에 놓여 있는  위치로 보아

이들은 중앙에 사리호를 안치할 것을 계획하고 사리호 주변을 에워싸는 형태로 놓인 것으로 보인다.

합 내부에는  금제구슬 370여 점, 유리구슬 3700여 점, 진주구슬 700여 점의 구슬류가 들어 있었으며, 금제관, 금괴, 금옥, 호박 등이 함께 들어있었다.

특히  금제구슬은 보존상태가 매우 양호하였으며 이외에도 금제고리. 금제화형구슬, 향분으로 추정되는 유기물 등 각 합마다 특색있는 유물이 들어 있었다. 

 

 

    

靑銅盒(청동합)

 

 

= 찾아가는 길 = 기차여행

1) 용산역출발 = 익산역하차  역에서 나와 우측으로 조금가면 버스정류장이 나옴  시내버스 41, 60번 이용 (배차간격 40분간격) 미륵사지 정류장 하차

2) 전주 공용버스터미널에서 금마행 직행버스가 30분간격으로 운행(1일 45회) 금마에서도 41,60번 버스이용

    또는 금마에서 미륵사지까지 택시이용(소요시간  5분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