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구본사와 사찰 벽화 이야기

조계종단 교구본사 = 선운사, 봉선사

백련암 2010. 8. 15. 17:32

대한불교조계종 제 24교구 본사 선운사


     

도솔암 내원궁(문화재)과 지장보살(보물)


     

도솔암 마애불 보물 1200호 

 




전라북도 고창군 아산면 삼인리 도솔산(도率山)에 자리한 선운사,  도솔산은 선운산(禪雲山)이라고도 하며, 조선 후기 선운사가 번창할 무렵에는

89개의 암자와 189개에 이르는 요사(寮舍)가 산중 곳곳에 흩어져 있어 장엄한 불국토를 이루기도 하였다.

 

도솔산 북쪽 기슭에 자리 잡고 있는 선운사는 김제의 금산사(金山寺)와 함께 전라북도의 2대 본사로서 오랜 역사와 빼어난 자연경관,

소중한 불교문화재들을 지니고 있어 사시사철 참배와 관광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특히 눈 내리는 한겨울에 붉은 꽃송이를 피워내는 선운사 동백꽃의 고아한 자태는 시인ㆍ묵객들의 예찬과 함께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선운사의 창건에 대해서는 신라 진흥왕이 창건했다는 설과 백제 위덕왕 24년(577)에 고승 검단(檢旦, 黔丹)선사가 창건했다두 가지 설이 전하고 있다.

첫 번째 설은 신라의 진흥왕(재위기간 540∼576)이 만년에 왕위를 내주고 도솔산의 어느 굴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었는데, 이때 미륵 삼존불이 바위를

가르고 나오는 꿈을 꾸고 크게 감응하여 중애사(重愛寺)를 창건함으로써 이 절의 시초를 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당시 이곳은 신라와 세력다툼이 치열했던 백제의 영토였기 때문에 신라의 왕이 이곳에 사찰을 창건하였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따라서 시대적ㆍ지리적 상황으로 볼 때 검단선사의 창건설이 정설인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검단스님의 창건과 관련해서도 여러 가지 설화가 전해오고 있다.

본래 선운사의 자리는 용이 살던 큰 못이었는데 검단스님이 이 용을 몰아내고 돌을 던져 연못을 메워나가던 무렵, 마을에 눈병이 심하게 돌았다.

그런데 못에 숯을 한 가마씩 갖다 부으면 눈병이 씻은 듯이 낫곤 하여, 이를 신이하게 여긴 마을사람들이 너도나도 숯과 돌을 가져옴으로써

큰 못은 금방 메워지게 되었다. 이 자리에 절을 세우니 바로 선운사의 창건이다.

검단스님은 "오묘한 지혜의 경계인 구름[雲]에 머무르면서 갈고 닦아 선정[禪]의 경지를 얻는다" 하여 절 이름을 '禪雲'이라 지었다고 전한다.

 

또한 이 지역에는 도적이 많았는데, 검단스님이 불법(佛法)으로 이들을 선량하게 교화시켜 소금을 구워서 살아갈 수 있는 방도를 가르쳐주었다.

마을사람들은 스님의 은덕에 보답하기 위해 해마다 봄ㆍ가을이면 절에 소금을 갖다 바치면서 이를 '보은염(報恩鹽)'이라 불렀으며,

자신들이 사는 마을이름도 '검단리'라 하였다.

선운사가 위치한 곳이 해안과 그리 멀지 않고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곳에서 염전을 일구었던 사실 등으로 미루어보아,

염전을 일구어 인근의 재력이 확보되었던 배경 등으로  미루어 검단스님이 사찰을 창건한 것임을 알 수 있다.

 

= 선운사 보물들=

 

◀ 대웅보전 ▶ 보물 제 290호

 

선운사의 본전(本殿)으로서 신라 진흥왕 때 세운 것으로 전하며, 지금 있는 건물은 조선 성종 3년(1472)에

중건하여 임진왜란 때 전소되었다가 광해군 5년(1613)에 다시 지은 것이다.

 

불단 위에는 흙으로 빚은 소조(塑造) 삼세불을 봉안하고 삼존 사이에는 근래에 조성된 보살입상을 협시로 세웠다.
삼존은 중앙의 비로자나불을 주존(主尊)으로 하여, 왼쪽에 아미타불과 오른쪽에 약사불을 모셨다. 

 

 

◀ 금동지장보살 좌상 ▶ 보물 제 279호

 

조선 초기의 금동지장보살좌상으로 높이는 1m이다. 머리는 고려시대 지장보살상에서 폭넓게 나타나는

두건(頭巾)을 쓴 모습이며, 두건을 묶은 좁은 띠가 이마를 두른 후 귀를 덮고 양 가슴부분까지 내려와 있다. 

 

 

 


고려 보살상의 양식에서 벗어난 것으로 조선 초기의 양식을 반영하고 있다. 선운사지장보살좌상과 함께 그 예가 드문 지장보살상의 하나로,

조선시대 지장신앙의 양상을 보여주는 귀중한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 지장보살상은 일제강점기에 도난당한 적이 있는데,

이때 영험함을 보인 사실로 인해 더욱 널리 추앙받고 있다.

 

1936년 어느 여름에 일본인 2명과 우리나라 사람 1명이 공모하여 보살상을 훔쳐간 뒤, 거금을 받고 매매하여 일본으로 건너가게 되었다. 

그런데 이때부터 지장보살상이 영이(靈異)를 나타내기 시작하여, 소장자의 꿈에 수시로 나타나서 "나는 본래 전라도 고창 도솔산에 있었다.

어서 그곳으로 돌려 보내달라"고 하였다. 소장자는 다소 이상한 꿈으로만 생각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으나, 이후로 병이 들고 가세(家勢)가 점점 기울게

되자 꺼림칙한 마음에 보살상을 다른 이에게 넘겨 버렸다.

그러나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지장보살이 소장자의 꿈에 나타났으나 그 역시 이를 무시하였고, 집안에 우환이 끊이지 않게되자 다시 다른 이에게 넘기게

 되었다. 그후 여러 사람의 손을 거치면서 이 보살상을 소장한 사람들이 겪은 일들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으며, 마지막으로 소장하게된 사람이 이러한 사실을

고창경찰서에 신고하여 모셔갈 것을 부탁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당시 선운사 스님들과 경찰들이 일본 히로시마로 가서 모셔오게 되었는데,

이때가 도난당한 지 2년여 만인 1938년 11월이었다. 당시 잃어버린 보살상을 다시 모시고 온 사실을 기념하기 위해 찍은 사진에도 사건에 대한 개요가

간략하게 기록되어 있으며, 당시 주지는 '이우운(李雨雲)'으로 기재되어 있다.

 

 

지장보살 좌상 ▶ 보물 제 280호

 

도솔천내원궁(兜率天內院宮)에 봉안되어 있는 고려 후기의 금동지장보살좌상으로 높이는 96.9㎝이다. 

얼굴은 둥글고 단아한 인상을 주고 있으며 전체적으로 이목구비 등을 세부적으로 꼼꼼하게 표현하였다.

양 귀에는 만개한 화문(花紋)을 띠로 연결하여 귓불에 묶은 이식(耳飾)을 착용하고 있어,

고려시대의 일반적인 보살상이 원형 고리를 길게 늘어뜨려 매달고 있는 것과는 사뭇 다른 특이한 형태라 하겠다.


오른손은 가슴 부분에 들어 엄지와 중지를 맞댄 중품인(中品印)을 취하고 왼손은 가슴과 배 중간쯤에 들어 법륜(法輪)을

 잡고 있는데, 이는 육도중생을 구제한다는 의미로서 보주(寶珠)ㆍ석장(錫杖)ㆍ법륜 등의 지물을 들고 있는 지장보살의 일반적인 특성을 표현한 것이다.

앉은 자세는 오른발을 왼 무릎에 올린 모양으로 발을 실감나게 표현하였다. 어깨나 소매ㆍ무릎 등에 몇 가닥의 간단한 주름만을 표현하여,

상에 나타난 선묘는 유려하게 휘어지는 맛과 함께 단순ㆍ명쾌한 특징을 지니고 있다.

이 보살상은 고려 후기의 불상양식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우아하고 세련된 당대 최고의 걸작이라 할 수 있다.


 

 

◀ 도솔암 마애불 ▶ 보물 제 1200호

 

도솔암의 서편 암벽 칠송대(七松臺)에 새겨진 높이 13m, 너비 3m에 이르는 거대한 마애불상이다.

전설에 의하면 백제 위덕왕(재위 554∼597년)이 검단선사(黔丹禪師)에게 부탁하여 암벽에 불상(마애불)을

조각하고 동불암이라는 공중누각을 짓게 하였는데, 조선 영조 때 무너졌다고 한다.




 

불상은 낮은 부조로 연화대좌 위에 결가부좌한 모습이며, 머리에는 뾰족한 육계가 있다.
방형(方形)에 가까운 평면적인 얼굴에 눈은 가늘고 눈꼬리가 치켜 올라갔으며, 우뚝 솟은 코에 앞으로 내민 일자형의 두툼한 입술이 소박하고

익살스러운 미소를 띤 것처럼 보인다. 귀는 어깨에 닿을 정도로 길게 늘어져 있고, 목은 표현하지 않아서 상체 위에 머리를 올려놓은 것처럼 표현되어 있다.

 상체는 방형에 가슴이 넓고 평면적이며, 결가부좌한 넓은 하체에 손과 발 역시 체구에 비해 큼직큼직하다.

투박한 두 손은 활짝 편 채 아랫배에 가지런히 붙여져 있다.

이 불상은 고려 초기의 거대한 마애불 계통 불상으로 크게 주목받고 있다.

사람들은 이 마애불을 미륵불이라 부르고 있는데 불상의 배꼽에 신기한 비결(秘訣)이 숨겨져 있다는 전설이 전하여진다.

이외의 보물은  ** 참당암 대웅전 보물 제 803호이다.**

 

1) 전북 유형문화제 제 14호인 석씨원류(관음전에 봉안)

    석씨원유란 = 석가모니의 일대기와 석가모니 이후 서역 및 중국에서 불법이 전파된 사실을 기술한 것이다.

2) 영산전 목조 삼존불상 제 28호 = 대웅보전 서편의 영산전에 봉안된 목조삼존상으로서, 석가모니불 좌상을 주존으로 제화갈라보살과 미륵보살 입상이

 양쪽에서 협시하고 있다. 

3) 육층석탑 제 29호 = 선운사 대웅전 앞마당에 자리하고 있는 고려시대의 석탑이다. 

4) 범      종 제 31호 = 선운사 천왕문 2층에 걸려 있는 조선 후기의 범종이다.

5) 만 세  루 제 53호 = 정면 9칸 측면 2칸 규모의 강당건물로서, 고려시대에 지어진 건물이지만 19세기 말에 중건된 익공계(翼工系) 구조의 맞배지붕

형식을 취하고 있다.  절의 창건 당시부터 건립되어 여러 차례의 중수가 있었으며, 현재도 700년이 된 두 개의 아름드리 기둥이 남아 있어

옛 자취를 느끼게 한다.  

6) 백파율사 비 제 122호 = 백파율사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조성한 이 비석은 선운사 입구로 들어서서 오른쪽 숲 속의 부도 밭에 세워져 있다.

조선 철종 9년(1858)에 건립한 것으로 비명(碑銘)은 조선시대의 대명필가인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의 필적이다.

7) 선운사 사적기 제 155호 = 「선운사적(禪雲寺蹟)」ㆍ「참당사사적기(懺堂寺事蹟記)」ㆍ「운사고적(雲寺古蹟)」의 3책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선운사의 규모와 연혁 등을 살펴볼 수 있는 귀중한 사적이다.

내용은 선운사 각 건물의 규모와 전각ㆍ요사에 봉안된 불상ㆍ탱화ㆍ기물(器物)ㆍ경전 등의 물목(物目)을 기록하였다.

8) 참당암 지장보살 제 133호 

9)참당암 동종 제 136호 = 조선 정조 12년(1788)에 조성된 범종으로 선운사 참당암 대웅전 안에 있다. 



 

대한불교조계종 제 25교구 본사 봉선사

 

승과원 = 조선시대 승려들이 시험을 봤던 터


 

 

봉선사 주지스님의 천수바라춤 


 

= 봉선사 대종 =

 

고려 광종 20년인 969년에 승려 탄문운악산 자락에 절을 창건하고 운악사라고 부른 것이 봉선사의 전신이라고 전해진다.

 

봉선사로 이름을 바꾼 것은 조선 예종 때인 1469년이다. 왕의 어머니인 정희대비가 죽은 남편 세조의 능을 운악산으로 이장하여 광릉이라하고,

이 절을 세조의 명복을 비는 사찰로 삼아 '선왕을 받든다'는 뜻으로 봉선사라는 이름을 붙였다.

예종은 친필 현판을 하사하기도 했다. 1551년에는 교종의 으뜸 사찰로 지정되는 등 사세가 번창했다.

임진왜란 과 병자호란 때 소실된 것을 1637년에 복구했으나, 한국전쟁으로 또다시 전소되어 현대에 복원한 건물이 남아 있다.

 

일제 강점기에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을 역임한 태허(운암 김성숙)스님, 운허스님이 머물렀고, 운허의 친척 형이 되는

춘원 이광수도 은거한 일이 있다. 이 때문에 이광수 기념비가 절 입구에 세워져 있다.



 *봉선사의 대종*

봉선사 대종은 세조의 비 정희왕후가 봉선사를 다시 지을 때 세조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만든 것이다.

 한반도에 많이 남아있지 않은 조선 초기의 동종으로, 대한민국의 보물 제397호로 지정되어 있다.

 


창건기 서기 969년(고려 광종 20년)에 법인국사께서 창건하시고 운악사라 이름을 하였다.

          서기 1469년(조선예종 1년)에 세조의 비 정희황후가 세조의 능침을 이산에 모시고는 광릉이라 하고 이어 당사를 초창하여, 

 선왕의 능침의 명복을 비는 자복사로 삼고 봉선사라 하였다.

          서기 1592년(선조 25년)의 임진왜란과 서기 1636년(인조 14년)의 병자호란에 소실된것을 서기 1637년에 계민선사가 복구하였다.

          서기 1950년 6.25사변으로 16동 150간의 건물이 전소 되었으며 다시 복원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 찾아가는 길= 지하철여행 =

1) 1호선 의정부역 하차(동부광장에서 왼쪽으로 20m 정도) 아래쪽 버스정류장에서 21번 광릉행버스 를 타고 = 국립수목원

     = 광릉 = 봉선사 입구 하차 (배차 30~40분간격)임

 

2) 1호선 청량리역 하차 = (청량리역 환승센타 제일 바깥쪽라인에서) 707번 광릉행 버스탑승 = 광릉내 하차 = 21번버스환승 =

     봉선사 입구 하차 = (배차 5~7분간격)

** 청량리역 환승쎈타에서 = 707번 탑승 = 장현초교 하차 = 2번 봉선사행 마을버스 환승 = 봉선사 입구 하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