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품 템플스테이와 부처님이야기

33관음성지를 찾아서= 신륵사, 봉은사, 도선사

백련암 2010. 12. 5. 03:58

31] 여주 신륵사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 하네..."

 

나옹스님 숨결 깃든 여강의 법문 (강월헌)

 

                         신륵사 앞을 흐르는 남한강은 여강이라 불린다. 나옹스님이 유배를 가다 바로 이곳 정자인 강월헌에서 입적한다.

                         스님의 마지막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삼층석탑이 오랜세월 조용히 흐르는 여강을 바라보며 서있다.

 

◀보물 제226호 신륵사 다층전탑. 고려시대 전탑이다.

<흙으로 구운벽돌탑> ...

 

12월의 첫날 나옹스님의 자취가 남아 있는 여주 신륵사를 찾았다. 짙은 안개가 정오가 되도록 사라지지 않았다. 일주문을 지나니 한옥으로 세련되게 단장된 수련관이 보인다. 템플스테이를 위한 공간이다.

 

강월헌으로 향한다.

 

1376년 4월15일 회암사 중창불사를 성대히 마친 나옹스님은 채 한달도 지나지 않아 유학자들의 시기를 받아 경남 밀양 영원사로 추방을 당한다. 회암사 열반문을 나서서 유배길에 오른 스님은 일주일 후 신륵사에 닿는다. 더이상 몸을 움직일수 없던 스님은 이곳 강월헌에서 입적한다. 강월헌 바로 아래에 당시 다비장이였음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삼층석탑이 굽이쳐 흐르는 강을 바라보고 서 있다.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 하고/ 창공은 나를 보고 티없이 살라 하네/ 탐욕도 벗어 놓고 성냄도 벗어 놓고/ 물같이 바람 같이 살다가 가라 하네.”

 

너무나 유명한 시지만 나옹스님이 지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강월헌과 삼층석탑이 있는 동대 바로 뒤에는 고려시대 유일한 전탑이 있다. 신륵사가 고려때부터 ‘벽 절’이라고 불리는 이유가 바로 보물 제226호 신륵사 다층전탑 때문이다.

 

전탑 옆에 서서 여강을 바라보다 전탑 위쪽 전각으로 향했다. 전각 안에는 신륵사 대장각비가 있다. 깨져서 글씨를 잘 알아보긴 힘들지만 고려말 유학자인 목은(牧隱) 이색 선생이 공민왕과 부모를 명복을 빌기 위해 나옹스님의 제자들과 함께 대장경을 새기고 장경각을 세웠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현재는 장경각이 남아 있지 않지만 당시 찍은 대장경은 지금 일본에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유학자인 목은과 나옹스님과의 인연 또한 대단하다. 목은의 문집인 ‘목은집’에 절이나 스님을 위해 쓴 기문이 37편이며 그중 9편은 나옹스님과 관련된 것이다. 나옹스님과 목은은 거의 동시대를 살았다. 스님의 입적 후 스님을 기리기 위해 세운 회암사에 있던 선각왕사비와 신륵사에 있는 보제존자 석종비의 글을 목은이 지었다. 목은과 나옹스님은 고향도 같고 또한 둘 다 이 곳 신륵사에서 생을 마감한다. 

전탑이 있는 언덕을 내려와 사찰 중앙으로 들어선다. 신륵사 도량의 중심에 있어야 하는 극락보전은 해체보수 중에 있다. 극락보전 앞에 있는 구룡루를 임시 법당으로 사용하고 있다. 극락보전 뒤쪽에 신륵사에서 가장 오래된 전각인 보물 제180호 조사당이 있다. 조사당안에는 무학, 지공, 나옹스님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조사당 뒤쪽 계단을 20여m오르면 나옹스님의 부도와 비인 보제존자 석종과 석종비가 있다. 두 손을 모아 부도탑에 인사를 올린 후 계단을 내려와 마지막으로 관음전을 찾았다. “사람이 죽으면 어디로 갑니까?” 나옹스님이 친구의 죽음을 보고 출가하면서 가진 질문이다. 스님은 그 답을 찾았을까. 관세음보살님에게 여쭈니 살며시 미소로 답한다.

 

32] 강남 봉은사 

뚝섬 나룻배 노 저어 닿은 봉은사…

관세음보살 부르는 그 마음 오롯이 

 

종루 아래 작은 연못 중앙에 모셔진 관세음보살. 봉은사를 찾는 신도들이 처음과 마지막에 들러 인사를 올린다.

 

G20이 열린 코엑스와 거대한 빌딩들이 도심 곳곳에 즐비하게 서 있는 서울 강남의 한복판 삼성동. 그 중심에 천년고찰 봉은사가 자리잡고 있다. 50년 전만 해도 달랐다. 강산이 다섯 번이나 변했으니 두말이 필요없다.

1960년대 초 뚝섬 나루터에서 나룻배를 타고 건너 2km 쯤 한가로이 걸어 이르던 곳이 봉은사였다. 당시 뚝섬유원지와 봉은사는 유명한 나들이 코스였다. 많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 ‘뚝섬 봉은사’라는 이름이 여전히 남아 있는 이유다.

 

신라시대 창건된 봉은사는 법등을 이어 오다가 불교가 어려움에 처했던 조선시대 중.후기 선종 불교의 으뜸 사찰로 도약한다.

명종의 어머니인 문정왕후와 허응당 보우스님이 불교부흥운동을 전개했기 때문이다. 억불정책으로 폐지됐던 선교양종을 부활하고 선종의 수사찰로 봉은사를, 교종의 수사찰로 봉선사를 삼아 불교를 중흥하고자 했다. 특히 봉은사는 스님의 과거시험인 승과를 실시한 도량으로 불교 부흥의 중심지였다.

 

지난 7일 오전 봉은사를 찾았다. 평일 추운 날씨지만 법복을 입은 신도들 외국인 관광객까지 많은 사람들이 북적였다.

진리를 찾아 처음 들어서는 진여문(眞如門)을 먼저 지난다. 수도산(修道山) 수선종(首禪宗) 봉은사(奉恩寺) 현판이 걸려 있다.

 

문 양쪽에 1989년 법왕루를 지으면서 철거된 천왕문에 모셔져 있던 사천왕상이 봉안돼 있다.

 

 대웅전

                                                                                     봉은사 대웅전.

 

진여문을 지나 법왕루까지 약간의 오르막길 왼편에 새롭게 조성된 개울이 있고 우측에 부도와 탑비 공덕비들이 줄지어 서 있다.

부도들 중간에 보우스님의 부도와 비 예정지 푯말이 있다. 불교중흥을 위해 노력했던 보우스님은 문정왕후가 저세상으로 떠나자 제주도로 유배가서 결국 최후를 맞았다. 보우스님의 부도탑은 아직 어디에도 없다.

 

법왕루를 지나 대웅전으로 향한다. 대웅전 편액은 추사 김정희의 글씨이다. 판전(板殿)의 편액 또한 추사의 글씨인데 대웅전의 글씨는 세밀하게 삐친 부분을 다시 칠하면서 지워 버린탓에 판전의 글씨에서처럼 본래의 필력을 완전하게 찾아볼 수 없게 된 점이 아쉽다.

대웅전 좌우로 심검당과 선불당이 있고 선불당 뒤로 지장전이 자리하고 있다. 대웅전 우측 계단을 올라 영산전으로 향한다.

                                                                                         

 

북극보전(북두칠성전)

 

대웅전 뒤편으로 영산전 북극보전 영각이 있고 길을 따라 내려서면 미륵전에 다다른다. 일주문 역할을 하는 진여문을 들어서면서부터 환한 미소 반겨주는 거대한 미륵부처님이 봉안되어 있는 곳이다. 10년 넘는 불사끝에 1997년 조성된 미륵대불은 높이가 23m이다.

 

71세에 쓴 봉은 편전 편액(쓴글로 유명하다)

 

미륵전 왼편에 판전(板殿)이 있다. 판전엔 <화엄경소>를 비롯, 15종 3438매의 방대한 수량의 목판본이 보관돼 있다.

특히 판전의 편액은 추사가 71세 때 병중에서 쓴 글로 유명하다. 편액 왼쪽에 세로로 ‘칠십일과병중작(七十一果病中作)이라고 쓰여 있다.  과(果)는 노과(老果)를 말하며 추사가 스스로를 일컫는 말이다.

 

종루 밑으로 내려서면 해수관음상이 작은 연못 중앙에 서 있다. 기도를 다 마친 신도들이 마지막으로 찾는 곳이다. 조용히 관세음보살을

읊조리는 그들은 무엇을 저토록 간절히 발원하는 것일까.

 

 

  

 =염화미소=

관음전

 

33] 삼각산 도선사  

호국참회기도도량 도선사 전경.

 신라 도선국사가 조성한 석불전 마애불. 관세음보살로 추정되는 마애불은 영험하기로 유명하다.

 

석불전 관음보살 자비미소
  
삼각산 봉우리에 비쳐

 

국내 유일의 호국참회기도도량 삼각산 도선사. 동지였던 지난 22일 찾았다. 수행과 포교가 살아 숨쉬는 기도도량으로 늦은 오후인데도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동지 때 도선사에서 달력 1만부를 준비하는데 이날도 어김없이 다 나갔다고 한다.
 
산으로 향하는 아스팔트길인 청담로를 약 2km 가량 들어서면 마음의 광장이 나온다. 그 중앙에 미소석가불이 모셔져 있다.  광장에서 경내 도로를 100m 오르면 사천왕상이 모셔진 광명문이 나온다. 광명문을 지나 100m 지나면 오른쪽으로 백팔 계단이 나온다.  그 계단을 따라 오르면 청담대종사 석상, 비, 사리탑으로 올라가 참배하도록 되어 있다.
 
여기서 한 구비를 돌아서면 호국참회원의 모습이 보인다. 신년 소망등으로 화려하게 장엄된 모습이다. 3층으로 되어 있는 호국참회원 1층엔 조계종 전 종정 청담대종사 유물, 유품전시관이 자리하고 있다. 청담스님이 주창한 호국참회불교란 신라불교의 통일염원, 고려불교의 호국염원, 조선불교의 구국염원, 현대불교의 평화염원을 바탕으로 미신불교가 아닌 수행불교, 이론불교가 아닌 실천불교, 관념불교가 아닌 생활불교로 불교 재흥(再興)을 꾀하자는 사상이다. 사찰 곳곳에 정화불사와 불교중흥의 획을 그었던 청담대종사의 체취가 온전히 서려 있다.
 
대웅전으로 향한다. 대웅전으로 향하는 계단 길 중간에 어린아이처럼 밝은 웃음을 띄고 있는 포대화상이 그 특유의 넉넉함을 찾는 이들을 반긴다. 배를 문지르며 하는 기도 방법 때문에 포대화상의 배에 손때가 가득 묻어 있다. 계단을 마저 오르면 대웅전이 모습을 보인다. 신라 말 경문왕 2년(862) 도선국사가 개창했다. 그 후 여러 차례 중수를 거쳐 사세를 굳혀오던 중,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의 병화로 소실되었다가 철종 14년(1863) 중창되었다.
 
그리고 광무 7년(1903) 황제의 어명으로 1년 여의 불사 끝에 대웅전을 중건한 뒤, 국가원찰로 지정받았다. 동호스님과 청담스님이 중수를 거쳐 이어오다, 1990년 현성스님이 오늘의 대웅전을 신축했다.
 
대웅전 뒤쪽에 자리한 석불전 마애불은 영험이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20m의 암벽에 8.43m의 크기의 얕은 부조로 새겨진 마애불은 관세음보살로 보여진다. 신라 경문왕 2년(862)에 도선국사가 명산 승지를 두루 답사하다가 삼각산에 이르러 산세가 절묘하고 풍경이 청수한 이곳에서 천년후 말세 불법이 재흥하리라 예견하고 신통력으로 서있는 큰 바위를 반으로 잘라 그 한쪽 면에 30여척에 달하는 관세음보살을 주장자로 새겼다고 전해진다.
 
제법 쌀쌀한 날씨에도 기도하는 열기로 석불전 안은 항상 따스하게 느껴진다. 절을 올리고 앉아서 관음보살을 쳐다본다. 아무 말 없이 친근한 미소만 전한다.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