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품 템플스테이와 부처님이야기

축생전 이야기 = 코끼리, 쥐, 소

백련암 2011. 12. 19. 00:21

 1. 코끼리 (上)

 

호기심·애정 많은 상서로운 생명

 

▲파주 보광사 벽화인 기상동자도. 보현동자가 등에 올라 흰 코끼리를 몰고 간다

 

흔들리지 않는 침대 광고에 코끼리가 등장한 적이 있다. 지금도 동물원에 가면 직접 볼 수 있는 동물이 코끼리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코끼리가 살 수 있는

적합한 환경이 아니다. 성인 코끼리 1마리는 하루 동안 나뭇잎, 가지, 풀, 과실 등의 먹이 300kg을 먹고 물은 70~80ℓ나 섭취한다.

참고로 코끼리는 10마리 이상 무리를 지어 생활한다. 그렇다면 코끼리는 언제 우리나라에 그 존재가 알려졌을까?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태종11년 2월에 이런 기록이 있다. “일본 국왕이 코끼리 한 마리를 바쳤다. 우리나라에는 처음이다.

사복시에서 기르게 했는데 하루에 콩을 4~5말씩을 먹는다.” 사복시란 궁중의 말과 가마를 관리하는 관청이다.

이 대목은 코끼리가 처음으로 등장한 기록이다. 놀라운 사건도 접할 수 있다.

그 이듬해 코끼리를 구경하던 사람이 추하게 생겼다고 비웃으며 침을 뱉었는데, 성난 코끼리가 코를 말아 땅에 쳐 죽이는 사건이 생기기도 했다.

때문에 코끼리는 지금의 소록도인 노루섬에 유배를 당했다.
그 후 전라감사로부터 이 코끼리가 물과 풀을 먹지 않고, 사람만 보면 슬피 울어 눈물을 흘린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태종은 짐승이라도 멀리 고향을 떠나 사니 그럴만 하다며 육지에 내어 기르게 했는데 워낙 대식가라 그 비용을 감당키 어려워  전라도와 경상도,

충청도에서 돌아가며 기르게 했다고 한다. 조선왕조실록 기록에 근거해 유추해보면, 코끼리가 사납긴 해도 정이 많고 가족을 무척 그리워하는 동물로 보인다.


실제 일반적으로 사람의 뇌보다 2~3배 큰 뇌를 가졌으며 영리하고 기억력이 좋은 것으로 정평이 나있다.

죽은 동료나 가족의 마른 뼈를 알아보고 코로 만지기도 하며 가늠할 수 없는 거리에 있는 물가도 기억한다. 심지어 35년 전 헤어진 사람을 만나도

이를 기억하고 반기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코끼리들은 나이가 많은 암컷을 우두머리로 무리를 이룬다. 무리는 서로 돕고, 긴 코로 어루만지며 다양한 소리나 몸짓으로 애정을 표현하고 상처를 입거나

병든 코끼리를 돌보기도 한다. 가까운 친척이라도 만날 때면 애정이 콸콸콸 흘러 넘친다.

새끼를 거느린 암컷자매가 무리지어 다니다 어미코끼리와 다른 자매 무리를 만나면 100여마리의 코끼리들이 무리를 이루기도 한다.

이들은 쉽게 찾을 수 있는 정해진 장소에 모여 정겹게 풀을 뜯는다.

코끼리의 습성과 거대한 외양으로 불교 문화권에서 코끼리는 상서로움이라는 이미지를 입는다.


우리나라 큰 절의 경우 대중방에 용상방이라는 이름이 붙기도 하는데 이는 용이나 코끼리에 견줄 정도의 고승이 많이 배출되길 바라는 마음이 담겼다.


밀양 표충사 대광전 불단에는 흰 코끼리 그림이 있다. 보통 흰 코끼리는 보현보살의 탈것으로 나타나는 데 길상(吉祥)을 의미한다.

파주 보광사에는 흰 코끼리를 몰고 가는 보현동자 모습을 담은 벽화도 있다.

등에 올라타 긴 막대기로 방향을 이끄는 동자 모습이 천진난만하기까지 하다. 소에게 꼴을 먹이고 집으로 돌아오는 목동 같이 한갓지고 여유럽다.


코끼리는 각종 불교 관련 설화나 경전 등에서도 신과 동일시되며 부처님과 동격으로 표현된다. 그 중에서도 도솔천에 계셨던 부처님이 세상에 나투며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란 탄생게를 설한 이야기가 가장 유명하다.



2.코끼리 (中)

세상에 몸을 나투기 전 부처님은 도솔천에서 호명보살의 이름을 갖고 있었다. 호명보살은 여섯 개의 상아를 가진 흰 코끼리가 돼 마야부인의 오른쪽 갈비를

통해 태에 들어갔다. 열 달 후 룸비니 동산에서 석가모니가 탄생했으며, 일곱 걸음을 걸으며 한 손 으로는 하늘을 다른 손으로는 땅을 가리키며

이렇게 선언했다. “하늘과 땅 가운데 오로지 자신이 홀로 존귀하다(天上天下 唯我獨尊).”


불성을 가진 모든 중생이 존귀하다는 선언의 이 장면에도 코끼리가 등장한다. 흰 코끼리가 바로 부처님이다.

대부분의 코끼리는 회색이다. 다만 십만 마리 중 한 마리 확률로 흰 코끼리가 나온다고 동물학자들은 말한다.

흰 코끼리는 생전에 보기가 어려웠던 만큼 희귀한 생명이었다. 먼 과거부터 수많은 생애를 거쳐 오며 끊임없이 쌓아온 무수한 선근과 공덕의 힘으로

깨달음을 이룬 부처님. 세계사 중 가장 혁명적인 사건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부처님의 탄생과 깨달음이 희귀한 흰 코끼리에 비견되는 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이다.


부처님 전생담인 ‘본생경’에는 흰 코끼리의 전생 이야기가 나온다. 마갈타 국 왕사성에 보살이 순백색의 코끼리로 태어난다.

왕은 그 코끼리를 왕상(王象)으로 삼지만 자신보다 칭송받는 코끼리를 질투해 죽이려했다. 복덕의 신통력을 가진 이 코끼리는 바라나시로 가 왕과 백성의

칭송을 받았다. 코끼리가 바라나시로 온 후 왕은 염부제주(수미산 남쪽 바다 가운데 있다는 삼각형으로 된 섬)의 첫 왕이 돼, 보시 등 복덕의 업을 짓다가

죽었다고 한다.


인도에서는 흰두교의 신 가네샤의 머리가 코끼리다. 인도에서 가네사는 지혜와 학문의 신이며 장애를 제거해준다는 신이다.

때문에 인도 여러 상점에서는 쉽게 가네샤의 조각상을 볼 수 있는데, 조각상을 거꾸로 세워 놓으면 상점이 파산했다는 얘기다.

왜 가네샤는 코끼리 머리일까. 파르바티는 목욕하는 동안 문을 지키게 하기 위해 자신의 몸을 문질러 그를 만들어내었다.

그런데 시바가 아들인 줄도 모르고, 아내에게 접근하지 못하게 하는 데에 격분해 그의 목을 베어버렸다.

시바는 파르바티를 위로하기 위해 처음으로 만나는 동물의 목을 베어 아들의 몸에 붙이겠다고 약속했고, 그 동물이 바로 코끼리였다.


무리를 지어 다니는 코끼리는 사자, 호랑이 등 포식자들이 근처에 오면 새끼를 지키기 위해 그들을 물리친다.

거대한 몸짓과 그런 행동은 용맹의 표상으로 인식됐고, 코끼리는 전투에도 수차례 이용되기도 했다. 알렉산더 왕이 페르시아 왕 다리우스의 15마리 코끼리,

그리고 인도 왕 포로스의 200마리 코끼리와 전쟁을 했던 역사적 기록이 대표적이다. 아잔타석굴 중 17번 석굴벽화에는 무역상인 심할라가 관세음보살의

도움으로 목숨을 구하고 아버지와 왕국을 몰살한 괴물들을 섬멸하기 위해 흰 코끼리를 타고 군대를 이끈다.


왕을 지키는 수호신 역할도 한 것 같다. 중국의 명왕조 무덤을 수호하기 위한 코끼리 석상은 유명하다. 중국에서는 오래 전부터 짐을 실어 나르거나

전쟁터에 동원하기 위해 코끼리를 길들였다. 명나라 시대(1368~1644)까지도 길들여진 코끼리가 이용됐고,

명의 수도인 북경에서는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 시대(1644~1911)에도 훌륭한 코끼리 외양간이 운영됐다고 한다. 


 

3.코끼리 (下)


밀렵·온난화로 멸종 위기 처한 세계의 기둥

 

코끼리는 사실 겁이 많다. 무섭고 위험스러운 포식동물들로부터 새끼를 지켜오며 오랜 야생생활을 해온 탓에 신중함도 자연스럽게 익히고 산다.

모르는 대상에 대해서는 항상 경계심을 보이기 일쑤다. 때문에 나이 많은 코끼리에 의지하며 무리 생활을 한다.

경험이 많은 코끼리는 그만큼 야생을 살아가는 지혜를 갖고 있으며 당연하게 무리의 우두머리가 된다.

무리의 코끼리들은 포식자들로부터 자신을 지키고 먹이와 물을 찾는 지혜를 빌리는 셈이다. 진리를 갈구하는 우리 역시 한 무리의 코끼리 아닐까.


인도의 대서사시 라마야나에는 “거대한 코끼리 비루파크샤는 산과 숲을 비롯한 지구 전체를 머리로 떠받치고 있었네”라는 표현이 나온다.

그 코끼리가 피곤한 머리를 흔들자 지진이 일어났다고도 하는데, 이는 코끼리를 ‘세계의 기둥’이라 보고 있는 것이다.

세계는 원인과 결과의 법칙에 따라 움직인다. 세계를 떠받치는 법이 인과법이니 코끼리는 불교와 떼려야 뗄 수 없다.

억겁의 윤회에서 업장을 소멸하고 고통과의 연을 끊는 지혜를 발견한 부처님이나 그 지혜나 모두 ‘세계의 기둥’인 셈이다.


1700여년의 역사를 지켜온 한국불교. 그 오랜 세월동안 문화와 풍습에 녹아든 불교는 지명에도 영향을 미치게 마련이다.

코끼리도 빠질 수 없다. 코끼리는 범어로 ‘가야’라고 한다. 경상북도 성주군과 합천군의 경계를 이루는 곳에 가야산이 있다.


산 정상이 바로 ‘상왕봉(象王峰)’인데, ‘상왕’이란 ‘열반경’에서 모든 부처를 말한다. 인도남부의 가야(Gaya)를 음역했다는 설도 흥미롭다. 

인도 보드가야의 주요 설법 장소로 신성시 되던 가야산에서 그 이름이 유래했다고도 한다.

조선 8경 중 하나로 추앙받아 온 가야산이 예전엔 ‘상왕산’이라고도 불렸다고 한다.


코끼리는 한국불교의 사찰에도 그 모습을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하동 쌍계사에는 코끼리를 탄 보현동자가 불자와 관람객들을 맞이하고,

경남 함양 견불사에는 흰 코끼리 등에 탄 아기 부처님 상과 코끼리 상이 있다. 그러나 이제 코끼리는 불교 안에서만 숭상받는 존재인 듯하다.

유엔환경계획(UNEP)은 지난해 5월 1시간에 3종, 하루에 130종의 생물이 지구에서 멸종한다고 발표 했다.

덩치가 커서 크게 위협이 되는 천적이 없는 코끼리도 현재 멸종위기에 처했다. 환경 개발에 따른 목초지 파괴와 상아를 노린 밀렵 때문이다. 


2세기께 중국 후한(後漢) 시대의 삼대 저작 중 ‘잠부론’에 이런 말이 있다. “코끼리는 상아 때문에 죽는다.” 예부터 상아는 값지고 귀했으며,
여러 용품으로

거듭났다. 장식품부터 빗, 지팡이, 체스의 말, 바느질 도구나 화장품 용기 등등. 특히 피아노 건반에는 다른 동물의 뼈를 사용해도 되지만 상아가 다량 쓰인다.

결국 상아를 얻으려고 인간은 코끼리를 죽였다. 지금도 해마다 2만여 마리의 코끼리 들이 밀렵과 마구잡이 개발로 인한 보금자리 파괴로 죽어가고 있단다.


워싱턴 대학의 새뮤얼 와서 박사는 ‘보존 생물학 저널’에서 상아를 노린 무분별한 밀렵으로 2020년에는 아프리카 코끼리가 완전히 멸종하게 될 것이란

충격적인 전망을 내놓기도 했다.  한국사회에서 현대와의 조우가 아쉬운 불교와 멸종위기의 코끼리. ‘세계의 기둥’ 코끼리가 사라질 위기에 놓였다.


 

 





◈1.쥐(上)


다산 · 풍요 상징…폭군으로 비유되기도


겨울, 아랫목의 온기가 사라질 때면 으레 연탄불을 갈러 부엌 아궁이로 향했다. 그곳에는 어김없이 덫에 걸린 쥐가 요동을 쳤다.

“찍, 찍”하는 소리가 거북했다. 까만색 털과 여기저기 묻은 오물은 더럽다는 인상을 심어 주기에 충분했다.


아직까지 쥐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혐오스런 동물로 취급된다. 쥐, 하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는가. 우선 “찍, 찍” 소리와 시궁창이 연쇄적으로 상기되고

불결하다는 느낌이 엄습한다. 튀어나온 앞니와 꼬리, 온갖 더러운 곳을 밟고 다녔을 발까지. 어미 쥐를 줄줄이 따르는 그 많은 무리의 쥐들.

한 마디로 ‘불결 종결자’라고나 할까. 쥐에겐 불행할 따름이다.


다행인지 몰라도 우리가 불결하다고 여기는 이미지로 인해 쥐는 특별한 영물로 추앙받는다. 약 3600만년 전부터 서식해온 것으로 알려진 쥐는

약 1800여종에 달한다. 쥐는 출산횟수나 한 배에 낳는 새끼의 수가 엄청난데, 특히 임신기간이 짧다.

실제 사향쥐(22~30일), 붉은쥐(23~26일), 집쥐(21일), 생쥐(17~20일)한 달도 안 돼 후손들을 낳는다.

집쥐는 출산 후 몇 시간만 지나면 발정해 교미하고 임신한다고 한다. 한 번에 6~9마리를 1년에 6~7회 정도 출산한다. 왕성한 번식력이다.

때문에 쥐는 다산(多産)과 풍요로움을 상징한다. 글자만 놓고 봐도 그렇다. 십이지의 첫 번째 동물인 쥐는 자(子)다.

자는 자(滋)를 뜻하며 ‘번식하다’, ‘더하다’, ‘보태다’를 의미한다.


중국 민간에서는 늙은 쥐가 음식을 훔쳐 먹는 모습을 그려 사내아이의 출산을 기원하기도 해 흥미롭다. 그림에서는 여러 마리의 쥐가

항아리 주둥이에 올라 음식을 훔쳐 먹는 장면이 주로 묘사된다. 여기서 항아리는 자궁, 여러 마리의 쥐는 아기씨나 남성을 상징한다.

심심치 않게 사람 주위에서 쥐가 눈에 띄는 이유는 먹을거리가 있어서다. 먹을거리 주변을 동분서주하는 작은 몸의 쥐는 부지런한 모습으로

비춰지기도 한다. 먹이를 한 곳에 모으는 습 때문에 ‘부(富)의 코드’로 읽히기도 한다.

배에서 쥐들이 내리면 그 배가 큰 재앙을 맞는다는 속설이 있을 정도로 예지의 동물로 여겨진다. 이런 예지 본능은 악운을 막아주는 수호신으로

추앙받는데 일등공신이다. 이런 연유로 쥐는 우리나라 세시풍속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주연급 동물 중 하나다.

반면 부정적인 의미도 적지 않다. 일단 사람의 곡식을 나눠먹는다기보다 ‘뺏어 먹는다’는 인간 중심의 사고는 쥐를 간신과 수탈자로 비유하기에 이른다.

다산 정약용은 그의 우화시 ‘고양이’에서 “백성들은 쥐 등쌀에 나날이 초췌하고”라고 했는데, 백성의 재물을 수탈하는 아전을 쥐로 표현했다.

또 ‘시경’ 위풍편 ‘석서(큰 쥐)’라는 시에서도 백성을 고달프게 하는 폭군의 상징으로 쥐가 등장한다.

현재의 대통령이 이에 빗대어 많은 말들이 전해지는 점은 걱정거리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사람과 지척에 살아서인지 스님들과의 인연도 제법 있다. 지리산 홍서원 스님들은 골칫거리였던 쥐에게 밥그릇을 따로 마련해

공존하는 방법을 터득했다. 이 외에도 쥐는 선지식 경봉 스님과 ‘무소유’ 법정 스님의 이야기에도 등장한다.



2. 쥐(下)


꼬리 바쳐 경전 필사…미륵신앙과도 관련


무소유’ 법정 스님과 쥐의 인연이 흥미롭다. 스님의 수필집 ‘서있는 사람들’ 중에 나오는 해탈 쥐와의 인연담은 헌식(獻食)에서 비롯된다.

헌식이란 공양할 때 배고픈 중생 몫으로 음식을 따로 뒀다 나누는 일이다.


스님은 음식을 두던 헌식돌에서 으레 기다리던 큰 쥐를 아무도 없는 산중에서 자주 보게 되자 반가웠다고 회고했다. 곁에 다가와 음식을 먹을 만큼

서로 길이 들었다고. 어느 날 스님이 “여러 생에 익힌 업보로 흉한 탈을 쓰게 됐는데, 내생에는 좋은 몸 받아 해탈하거라”고 말을 건넸는데,

기이하게도 다음날 쥐는 헌식돌 아래 죽어있었다. 스님은 착하게 살려는 생명의 근원은 한가지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한다.


사실 쥐와 관련된 불교 이야기로는 ‘불설비유경’의 안수정등 비유가 널리 알려져 있다. 이야기인 즉, 이렇다.

사방에서 일어난 들불과 성난 코끼리에 쫓긴 한 사람이 나무 덩굴을 타고 우물 안으로 피했다. 위기를 모면하는가 싶었더니 우물 안벽에선

독사 네 마리가 혓바닥을 날름거렸고, 바닥에는 독룡이 그가 떨어지기만을 기다렸다. 의지할 곳이라곤 덩굴뿐이었다.

와중에 난데없이 흰 쥐와 검은 쥐가 덩굴을 갉아먹기 시작했다.

난감하기 이를 데 없는 순간이었다. 찰나 입으로 떨어지는 달콤한 꿀 다섯 방울에 절체절명의 위기를 잊었다는 애기다.

흰 쥐와 검은 쥐는 낮과 밤을 상징하는데 안수정등의 비유는 재물, 애욕, 음식, 명예, 수명의 오욕에 집착하는 중생의 어리석음을 깨우친다.


경봉 스님은 이 안수정등 그림을 설법에 주로 이용했다고 한다. 경봉 스님은 통도사 불교전문강원 대교과에서 공부하다 틈만 나면

일터나 장터, 잔칫집을 돌아다니며 행방포교(行方布敎)에 나섰다고 한다.  스님이 꼭 챙기던 것이 있었는데,

먹으로 안수정등(岸樹井藤) 법문이 묘사된 그림을 매단  석장이다. 처음에는 구수한 이야기를 풀어놓고 마침내 불교의 깊은 진리로

사람들을 이끌었다고 하니, 안수정등 그림이 현장에서 어떤 효과를 발휘했을지 눈에 선하다.


쥐는 미륵신앙과도 관련이 있는 것 같다. ‘삼국유사’ 권4 제5 의해편에 따르면 진표율사는 불사의방(不思議房)에 들어가 수행할 때

쌀 한 홉을 덜어내 쥐를 길렀다. 미륵신앙을 크게 일으켰던 진표율사의 이 같은 기록 탓에 학계는 미륵신앙과 구도에서 쥐가 어떤 역할을 했으리라

짐작하고 있다고 한다. 함경도의 세인굿에서 불리던 무가인 ‘창세가’의 내용은 쥐와 미륵신앙의 또 다른 접점이 된다.

‘창세가’에 보면 미륵이 우주의 질서를 정리하고 나서 쥐에게 물과 불의 근원을 물어 비로소 물과 불을 사용할 줄 알게 됐고,

쥐는 그 대가로 이 세상의 뒤주를 얻었다.


불법을 널리 알리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바쳤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때는 조선후기. 나운 화상이 중국에서 ‘묘법연화경’을 들여와

필사본을 쓰기 위해 잠시 명상에 잠겼는데, 어디선가 황색 쥐가 나타났다. 쥐는 꼬리를 보시할 테니 붓을 만들어 필사해 줄 것을 당부했다.

감복한 나운 화상은 쥐의 꼬리를 뽑아 붓을 만들었고, 한자에 한번 씩 절을 하고 3개월의 공을 들여 완성했다.

이 경전은 현재 통도사 유물전시관의 ‘묘법연화경’으로 알려졌다.


쥐띠 해엔 불교계에 크고 작은 일들도 많았다. 760년 4월 월명사는 향가 ‘도솔가’를 지어 해가 두 개였던 변괴를 없앴고,

1564년 여름 휴정 스님은 ‘선가귀감’을 지었다. 또 1972년에는 프랑스 파리에서 ‘직지심체요절’이 발견되기도 했으며,

1984년에는 익산에서 미륵사터가 발굴다.




◈1. 소(上)


농사신으로 숭배 대상…   깨달음 과정 묘사


중국 전설에 ‘염제(炎帝)’로 불리는 신농씨는 불로 음식을 익히거나 구워먹을 수 있게 해주고, 쟁기 등의 농기구를 만들어 농사를 가르쳤다.

때문에 농사의 신으로 숭상 받는다.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이란 말이 있다. 농업은 천하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큰 근본이란 얘기다.

쌀을 주식으로 하는 우리 민족 역시 예로부터 땅에 의지하며 살아왔다. 우리나라도 신농씨를 떠받들며 농사가 모든 일의 근본임을 잊지 않았다.

고구려 고분 오회분 5호묘 벽화에서 염제는 소의 머리에 사람의 몸을 하고 손에 벼 이삭을 들고 있다.

이른바 ‘농신’의 머리가 소라니. 소와 농사의 끈끈한 관계가 기괴(?)하게 드러나고 있다.

소는 여러 사람 몫을 너끈히 해낸다. 논이나 밭을 갈아야 하는 농경사회에선 절대적이었다.

그래서 각 가정에서 소의 유무는 부를 상징하기도 했으며 묵묵히 일을 하는 탓에 우직하고 온순한 가축으로 인식돼 왔다.


무엇보다 소는 불교와 밀접하다. 십이신장은 ‘약사경’을 외우며 불자를 지켜주는 신장으로 불교의 약사신앙과 관련이 있는데 소는 십이신장 중

두 번째 동물이다. 더구나 수행자가 깨달음을 얻는 과정에서 소를 빼놓고는 이야기를 할 수가 없다.

어느 사찰에나 있는 벽화 속에 나타난 심우도(尋牛圖). 그 속에 묘사된 소는 인간의 진면목인 불성이자 미혹으로 똘똘 뭉친 마음을 의미한다.

심우도는 동자와 소를 등장시키는데 수행단계를 10단계로 나눠 표현하고 있다. 하여 십우도(十牛圖)라고도 한다.



의성 고운사 십우도 = 목우



◈2. 소(中)


우직하게 도량 불사 앞장…곳곳서 공덕 기려


우직하고 성실함 때문일까. 아니면 선한 축생이라는 이미지 탓일까. 소는 사찰 창건 일등공신(?)이다.

사찰마다 창건 설화가 있는데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동물이 바로 소다.


공주 갑사에는 공우탑이 있다. 죽은 소를 위해 세운 탑이다. 탑에 얽힌 소 이야기는 이렇다.

정유재란을 겪은 갑사는 화마로 앙상한 터만 남았다. 그러나 의상 스님이 화엄의 높은 교학을 펼쳤던 도량의 황량함을 두고 볼 수는 없는 일.

인호 스님과 20여명의 스님들이 중창 불사의 원력을 세웠을 때였다. 뜻대로 불사가 진행되지 않자 인호 스님은 골머리를 앓았다.

그러다 꿈에 소가 나와 “불사를 돕겠다” 약속하고 사라졌다. 꿈을 깬 이후 소는 나흘 째 아침마다 갑사를 찾았고,  매일 같이 향나무와 기와 등

법당 중건에 필요한 자재를 구해와 나르는 등 불사에 힘을 보탰다. 그렇게 소의 도움으로 원만한 불사 회향을 앞둔 어느 날 기력을 다한 소는

지쳐 쓰러져 숨을 거뒀다. 스님들은 소의 공덕을 기리고자 탑을 세웠고, 그 탑이 바로 갑사 길목에 있는 공우탑(功牛塔)이다.


땅 끝 해남의 아름다운 절 미황사는 검은 소와 관련이 있다. 조선 숙종 때 병조판서를 지낸 민암의 ‘미황사 사적기’에는 미황사 창건 얘기가 실렸다.

신라 경덕왕 8년 홀연히 한 돌배가 땅끝마을 사자포에 와 닿았다. 배안에서는 천악범패의 소리가 들렸으나 범인은 쉽게 접근할 수 없었다.

이 소식을 접한 의조 화상은 장운, 장선 두 사미와 사부대중 100명과 몸을 정갈히 하고 경건하게 기도를 올렸다. 그러자 비로소 돌배가 해안에 닿았다.

안을 살피니 ‘화엄경’ 80권, ‘법화경’ 7권, 비로자나·문수보살 및 40성중, 16나한과 탱화, 그리고 금환(金環)과 흑석(黑石)이 각각 한 개씩 실려있었다.

사부대중이 부처님을 봉안할 곳을 논의할 때 흑석이 절로 갈라져 검은 소 한 마리가 나타났다.

아니나 다를까. 그날 밤, 의조 화상도 꿈을 꾼다. 한 금인(金人)이 말하기를 “나는 본래 인도의 왕으로서 여러 나라를 두루 다니며

불상과 경전을 모실 곳을 구하고 있는데 이곳에 이르러 산 정상을 바라보니 1만불이 나타나므로 여기에 온 것이다.

마땅히 소에 경을 싣고 누워 일어나지 않는 곳에 경을 봉안하라”고 일렀다. 의조 화상은 이를 그대로 따라 소에 경을 싣고 가는데

소가 누웠다 일어나서 산골짜기 이르러 다시 누웠다. 첫 절이 통교사(通敎寺)고, 두 번째 누운 곳에 지금의 미황사를 창건했다. 

 미황사의 ‘미’가 소의 아름다운 울음소리를, ‘황’은 금인의 황홀한 색을 취한 것이라 한다.


봉화 청량사에는 뿔이 셋 달린 소 이야기가 전해진다. 청량사 유리보전 오른쪽에는 뿔모양으로 갈라진 세 가지를 드리운 늙은 소나무가 있다.

전해오는 바 원효 대사가 청량사 창건에 진력을 다할 때 하루는 사하촌에 내려갔다. 마침 뿔이 셋 달린 소와 논을 갈던 농부를 만났고,

소는 당최 농부의 말을 듣지 않고 제멋대로였다.  스님은 농부에게 소를 시주할 것을 권유, 소는 여러 가지 물건들을 밤낮없이 운반해

청량사 창건에 힘을 쏟았다. 그러다 회향 하루 전 소는 생을 마쳤는데 ‘지장보살’의 화신이었다.

이후 스님이 소를 묻은 곳에서 가지가 셋인 소나무가 자랐다고 한다. 후대 사람들은 이 소나무를 ‘삼각우송’, 이 소의 무덤을 ‘삼각우총’이라 불렀다.


평택 심복사 역시 소가 등장한다. 파주 문산포에 사는 천문을이라는 어부는 바다에서 건진 불상을 봉안할 도량 걱정에 잠을 못 이뤘다.

꿈에 나타난 부처님의 말씀대로 바닷가에 홀연히 나타난 검은 소 세 마리와 불사를 마쳤다.

절과 500m 떨어진 곳에 소의 무덤이 있고, 매년 정월 초삼일이면 천노인을 기리는 예불을 드린다고 한다.



◈1. 소(下)


보은·간경 공덕 상징…지명과도 연관


소는 수행자와 자주 얽힌다. 보은과 경전 간경의 공덕을 기릴 때 심심찮게 등장한다. 수행자가 환생한 까닭부터 보자면 이렇다.


조선 성종 3년 지리산 쌍계사엔 우봉 스님이 살고 있었다. 스님은 지리산을 넘어 화엄사로 가던 중 몹시 배가 고팠다. 길가의 보리밭에 들어가 

보리이삭 3개를 꺾었다. 그리고 손으로 비벼 먹었다. 이때부터 스님은 죄책감에 시달렸다. 주인 허락도 없이 보리이삭을 훔쳐 먹었기 때문이다.

결국 승복과 바랑을 벗고 바위 아래 숨겨두고 소로 변했다. 금생에 빚을 다 갚아버리겠다는 분연한 결단과 뉘우침에 따른 것이었다.


임자 없는 소는 보리밭 주인이 기르게 됐다. ‘업둥이’란 이름을 받은 소는 3년 간 부지런히 일했다.

어느 날 ‘업둥이’는 ‘내일 밤 마적들이 떼로 몰려올 것이니 기껍게 대접하라’는 말을 남겼다. 사실, 똥으로 남긴 글씨였다.

주인은 소의 당부대로 했고 그 이야기를 마적들에게 했다.  마적들은 똥을 확인하러 외양간으로 갔다.

그러자 소는 사라졌고 스님이 소가 된 사연과 당부가 쓰여 있었다. 마적들은 감동했고 화엄사로 가서 출가했다.


진실 혹은 거짓에 나올 법한 얘기다. 그러나 얘기가 전해지는 지역에선 다르다. 쇠똥에서 밝은 빛이 나왔다는 방광면,

소가 똥 눈 마을을 우분리 즉 쇠똥마을이라 부른다고 한다.


출처는 알 수 없지만 콧김 덕에 천상계에 오른 소도 있다. 어느 날, 소 한 마리가 천상으로 올라왔다.

놀란 하늘의 왕이 “어떻게 그대는 이곳에 올 수 있었는가” 물었다. 대답이 기가 막히다.

“풀을 뜯다 우연히 옆에 떨어져 있는 경전을 콧김으로 뒤적였는데, 그 공덕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 소가 뒤적인 경전이 바로 ‘화엄경’이었단다.


“시줏돈 무서운 줄 알아야 한다”는 말이 있다. 시주하는 마음을 기리는 뜻이다. 우습게 시줏돈을 사용한 스님들에 대한 경책에 소가 나온다.

옛날 중국 한산 스님이 주지 스님과 길을 나설 때 일이다. 두 스님은 수십 마리 소들이 풀을 뜯고 있는 곳에 이르렀다.

“어느 절 아무개 스님은 이리, 무슨 절 아무개 스님은 저리….” 한산 스님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소들이 자리를 잡았다.

주지 스님은 놀랐고, 다시는 절 돈을 함부로 쓰지 않았다는 웃지 못 할 얘기도 전해진다. 실제 소들은 절 돈을 마구 써 소로 환생한 스님들이었다고.


소머리를 한 나찰도 있다. 우두나찰은 말 머리를 하고 있는 마두나찰과 저승문을 지킨다.

두 나찰은 죽은 자가 저승문에 이를 때 돈을 달라고 조른단다. 그래서 관속에 노잣돈을 넣는 풍습이 생겼다.


초기경전에 나타나는 나찰에 대한 기록들을 보면 신통력을 알 수 있다. 공중을 날아다니고 사람을 꾀며 잡아먹기도 한단다.

이런 나찰과 야차를 다스리는 신은 사천왕중의 북방 다문천왕이며 나찰과 야차를 다스려 불법을 수호하는 신장의 역할을 한다.

요즘 우두나찰이란 말이 무색하다. 먹기 위해 길러지는 소들이 즐비하다. 영화 ‘워낭소리’에서 죽어라 일하지만 할아버지와 깊은 유대를 가졌던 소.

생을 다하고 묻힌 그 소와 달리 가축전염병 예방 명목으로 생매장 당하는 소.

아무리 노잣돈을 챙겨도 ‘무한육식’을 즐기면 저승문에서 우두나찰에게 잡아 먹히지나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