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품 템플스테이와 부처님이야기

축생전 이야기 = 호랑이. 토끼. 용, 개, 닭

백련암 2011. 12. 19. 00:58

1. 호랑이(上)   축생전 이야기 = 호랑이. 토끼. 용 

 

지혜의 문수보살 수호하는 영물

 

청계천 등축제에서...


짐승의 왕 호랑이는 죽는 순간까지 품위를 잃지 않으려고 애쓴다. 숨이 끊어지기 직전까지도. 다른 짐승에게 먹히지 않도록 온 힘으로 꼿꼿한 자세를 취하다

 죽는다고 한다. 어둠 속에 먹이를 노릴 때 형형히 빛나는 눈빛은 매섭다. 날렵하고 균형 잡힌 몸매와 늠름함, 포효하는 울음소리는 공포였다.

 

그러나 조선시대 호랑이는 공공의 적이었다. 잡으면 나라에서 상을 내렸다. 울산 동구 마골산 불당골에는 착호비(捉虎碑)가 있다.

말을 키우는 하급관리 전후장이 영조 22년(1746)에 호랑이 5마리를 잡아 ‘절충장군’ 직을 받았다는 거다. 그는 호랑이 사냥에 일가견이 있었다.

‘승정원일기’에 보면 영조 33년(1757)에도 호랑이를 잡아 가선대부(嘉善大夫, 조선시대 종2품 아래 관직)로 벼락 승진했다.


남한의 마지막이라고 알려진 호랑이는 어떻게 됐을까. 자연사는 아니었다. 대한제국 말엽 1908년 2월 영광 불갑사 뒤 고개에서 나무꾼이 함정을 이용해

 호랑이를 잡았다. 소식을 들은 일본인이 당시 논 50마지기 값인 200원으로 호랑이를 샀다. 그는 호랑이를 박제했다.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일본인들이 다니 던 목포 유달초등학교에 기증했다. 영광 불갑사 일주문 옆엔 그 호랑이를 모형으로 제작한 조형물이 있단다.


두려운 동물인 만큼 숭배의 대상이기도 했다. 잡귀와 재앙을 물리치는 힘이 있다고 믿었다. 결국 사람들은 호랑이와 산신이 손을 잡게 만들었다.

사찰 산신각에서 산신을 보좌하는 호랑이 그림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는 이유다.

예천 용문사 산신도에는 푸른 관을 쓰고 붉은 도포를 입은 산신이 호랑이 등에 기대어 만족스러운 미소를 띠고 있다.

수원 팔달사와 서울 화계사 명부전 벽화에 토끼가 호랑이에게 담배를 물려주는 모습은 정겹기까지 하다.

산신각은 민간신앙이었던 산신 사상과 불교가 습합하면서 나타난 독특한 문화다. 인자하거나 해학적인 그림은 호랑이에 대한 공포를 없애고

호환도 막고 싶었던 슬기가 엿보인다. 한 마디로 일석이조를 노린 셈. 산신과 호랑이에 얽힌 흥미로운 얘기가 전한다.


하얀 눈썹을 가진 호랑이가 흰 수염을 가진 할아버지로 변해 마을로 내려갔다. 희한하게도 마을 사람들은 하나같이 교만한 여우 등

탐욕 가득한 축생으로 보였다. 호랑이는 야차 같은 사람들은 잡아먹었다. 어느 날 스님이 “과보 받는다”고 호랑이를 꾸짖었다.

그러자 호랑이는 눈썹 하나를 스님에게 줬다. 다음 날 스님은 저잣거리에서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정말 많은 이들이 모습만 사람이었다. 스님은 혀를 끌끌 찼다.


호랑이의 용맹함은 불법을 수호하는 영물로 추앙 받는다. 지혜를 상징하는 문수보살이 타고 다니는 동물이 바로 호랑이다.

보살이 중생들에게 지혜를 전할 때 어김없이 호랑이가 등장한다. 위엄과 용맹으로 지혜를 수호하는 영물이라는 증거다.


그래서 당대 선지식을 ‘호랑이’라고 칭하기도 한다. 가야산에는 성철 스님 호랑이가 “절돈 3000배를 내놓으라”며 호령했다.

세간에서는 인홍 스님을 ‘가지산 호랑이’, 활안 스님은 ‘조계산 호랑이’로 일컬었다. 서릿발 같은 가르침 때문이다.


그런데 1700년 동안 한반도 정신에 면면히 흘러온 불교는 토끼일까, 호랑이일까.   


 

2. 호랑이(下)

 

목숨 살려준 은혜 갚아 사찰 창건 도움

      

다짜고짜 호랑이는 스님 앞에서 아가리를 벌리기 일쑤였다. 목에 걸린 비녀를 빼달라는 거다. 어지간히 여인네들을 취한 모양이다.

그런데 꼭 처녀를 스님에게 물어다 놓았다. 스님을 유혹하는 호랑이일까. 얘기는 기묘하게도 사찰 창건 설화와 얽힌다.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보다 멀지 않은 옛날이다. 신라시대 두운 대사가 소백산 기슭 동굴에서 수행할 때다. 가끔 호랑이가 물끄러미 보다 가곤 했다.

하루는 입을 다물지 못하고 낑낑댔다. 목에서 비녀를 빼주고 나니 척! 처녀를 스님 앞에 데려왔다. 스님은 아픈 처녀를 지극정성 보살폈다.

완쾌한 처녀가 어찌 가만히 있을까. 냉큼 절을 보시했다.

은혜를 갚아 기쁘다는 뜻의 ‘희(喜)’, 두운 대사의 참선방을 상징하는 ‘방(方)’을 써 희방사(喜方寺)라 했다.


고려 말 참의벼슬을 지낸 조한룡은 조선왕조가 들어서자 출가했다. ‘세염(洗染)’이란 이름으로 만행을 하던 스님은 나주 불회사를 복원코자 탁발을 했다.

 어김없이 호랑이는 목에 가시마냥 비녀를 걸고 나타나 입을 벌렸다. 살생 않겠다는 약속을 받고 비녀를 빼자 호랑이는 처녀를 물어다 절 마당에 내려놨다.

 

스님은 처녀를 간병해 돌려보냈고, 부모는 스님 걸망에 쌀을 시주했다. 하지만 걸망은 쌀을 붓고 부어도 차지 않았다.

결국 곳간을 열었고 스님은 신통력으로 쌀을 불회사로 날려 보냈다. 수미산만큼 많은 쌀을 보관한 곳이 화순 ‘중장터’란다.

화순 운주사와 나주 불회사 사이에 있는 마을 이름이다. 어쨌든 스님은 시주받은 쌀을 밑천으로 불회사를 복원했다고. 


‘호랑이의 유혹’을 물리친 스님도 있다. 신라 선덕여왕 때 일이다. 상원 대사 앞에 호랑이가 출현했다. 입을 열었다. 이번에 사람 뼈였다.

역시 처녀를 물고 왔고, 대사는 기절한 처녀를 돌본 뒤 겨울이 지난 이듬해 봄 집에 데려다줬다. 그런데 부모는 부부의 연을 맺기를 간청했다.

몇 번을 거절했으나 처녀는 수행처까지 따라왔다. 마침내 대사와 처녀는 의남매를 맺고 계룡산에 청량사를 짓고, 따로 암자를 마련해 수행했다.

이 얘기가 바로 계룡산 청량사지 5층 석탑과 7층 석탑 전설이다. 두 탑을 남매탑이라 일컫는다. 

 

때론 호랑이가 호법신장이었다. 구족계를 받은 뒤 5년 운수행각을 마친 구산 스님은 호랑이 굴 옆을 수도처로 택했다.

 끈질긴 졸음을 내쫓고 잡념을 제거하고자 일부러 그랬다. 1000여일을 정진했다. 토굴 근처에 채마밭을 갈아 재배한 곡물을 양식으로 삼았다.

그러나 수확기엔 어김없이 산돼지가 들끓었다.

 

그때마다 몽둥이를 들고 고함을 지르며 쫓아냈다. 어느 날 집채 만한 산돼지는 스님을 힐끗 본 뒤 다시 채마밭을 들쑤셨다.

그 때! 돌연 호랑이가 산돼지를 쫓아냈다. 그 뒤로도 스님이 정진하던 시간 동안 채마밭을 지켰다.

경허 스님의 세 달로 일컬어지는 수월 스님이 두만강 너머 나자구에 머물 때 호랑이가 따라다녔다는 말도 전해진다. 법력에 감화한 것이리라.


‘삼국유사’ 감통편에 등장하는 호랑이는 파격적인 사랑을 나눈다. 낭도 김현은 흥륜사에서 탑돌이를 하며 열심히 염불했다.

삼매에는 이르지 못한 것 같다. 그 와중에 탑돌이를 하던 여인과 정이 움직여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으슥한 곳에서 관계(通)한 뒤 여인 집까지 따라 나섰지만 호랑이 소굴이었다.

 

세 오빠의 악행으로 죽음을 택한 여인은 마을 사람을 해칠 테니 김현에게 자신의 목숨을 거두라고 설득한다.

부부의 연을 맺고 정을 통했으니 말이다. 김현은 2급 벼슬을 사사했고, 훗날 호랑이를 죽인 자리에 아내의 넋을 기려 호원사를 창건했다.

김현이 죽을 때 남긴 ‘논호림’이란 기록에서 사람들이 이 같은 사실을 알았다고 한다.  


 

1. 토끼

 

인류 최초로 달에 발을 내디딘 부처님


초파일 등축제에서...


 

인류 최초로 달에 발을 내디딘 사람은 부처님이다? 이런 발칙한 상상을 감히 할 수 있을까? 1969년 7월20일 미국 아폴로 11호에서 내린 이는 닐 암스트롱이다.


그런데 달에서 방아 찧는 토끼가 부처님이라면 동네 개가 웃을까? 아니다. 흥미롭다. 토끼는 부처님 전생이었다.

‘본생경’에는 ‘토끼의 공양’ 이야기 한 토막이 있다. 울창한 숲엔 토끼와 원숭이, 들개, 수달이 살았다.

그 중 토끼는 가장 품성이 너그러워 세 친구에게 진리를 가르치곤 했다.

 

“보시를 행하고 계율을 지키며 포살을 행해야 한다.” 어느 날 토끼는 달을 살피다가 다음 날이 포살(布薩)임을 알고 친구들에게 계를 지키고,

수행자가 찾아온다면 공양을 올리도록 당부했다. 토끼의 지계 열기에 제석천의 황백색 모포와 같은 돌의자가 후끈 달아올랐다.

제석천은 수행자로 몸을 바꿔 다음 날 네 마리의 동물을 차례차례 찾았다.


수달은 어부가 숨겨둔 7마리의 빨간 물고기를 내 놓았고 원숭이는 망고 열매를, 들개는 고기와 도마뱀 그리고 우유를 공양 올렸다.

그러나 토끼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생명을 해치며 불살생계를 깰 수 없었고 자신이 먹는 풀을 공양 올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토끼는 타오르는 장작불에 몸을 던져 온전히 자신의 몸을 보시하려 했다.

불에 뛰어들기 전 토끼는 “몸에 사는 생명이 죽어서는 안된다”며 몸을 세 번 흔들었다. 그리고 기쁜 마음으로 불길 속에 자신을 내던졌다.


그런데 믿기지 않는 일이 벌어졌다. 불은 토끼 털 한 가닥도 태우지 못했다. 토끼는 오히려 불이 차가워 닭살이 돋을 지경이었다.

토끼의 공덕에 감동한 제석천이 ‘찬 불’을 지폈던 것이다. 제석천은 토끼를 가상히 여겨 달나라(극락)에 영원히 살게 했다.

남인도 첸나이주립박물관에는 토끼 본생 이야기를 담고 있는 조각이 한 점 있다. 토끼가 타오르는 불길 속으로 뛰어드는 찰나가 생동감 있다.


사찰 곳곳 전각, 조각, 벽화 등에서 다양한 토끼를 만날 수 있다.

서울 화계사, 순천 선암사, 김제 금산사, 남원 선원사, 상주 남장사, 양산 통도사, 여수 흥국사 등이 대표적이다.  전남유형문화재 제169호인

순천 선암사 원통전에는 방아 찧는 두 마리 토끼가 새겨져 있다. 원통전 출입문의 이 토끼는 ‘투조모란꽃살문’의 하단에 조각됐다.


토끼는 원래 인도 고대 범어에서 달(月)의 다른 이름으로 불렸다.

 

또 달은 ‘토월(兎月)’이라고도 하는데 만월 주기가 여성의 생리현상과 동일해 ‘달=여성=토끼’라는 의미도 갖는다.

그런데 왜 하필 토끼는 계수나무 옆에서 방아를 찧고 있을까. 사실 토끼는 달에서 불로장생약을 조제 중이라고 한다.  계수나무도 장수를 뜻한다.


여기서 토끼 간 얘기를 빼놓을 수 없다. 토끼는 거북이 등을 타고 용왕에게 가서 간을 집에 두고 왔다는 말로 죽음을 벗어났다.

정말 “간이 배 밖으로 나온” 동물이다. 현대의학에서 간이 나쁘면 시력이 안 좋다고 한다.

토끼눈을 ‘명시(明視)’라고 하는데 눈 밝고 간 튼튼한 동물이 토끼인 셈이다. 용왕은 눈이 침침했던 모양이다.


그러나 최근 토끼의 눈은 눈물 양이 적고 깜박거림이 없어 안구 자극 실험에 주로 이용된다. 마취도 되지 않은 채 충혈, 눈꺼풀 부어오름, 궤양 등을 앓는다.

토끼는 지금 “간을 집에 두고 왔다”는 핑계라도 대던 옛날이 그립지 않을까. 도리어 실험 탓에 앓는 토끼에게 ‘신선한 간’이 필요할 지 모를 일이다. 





1. 용(上)

 

악귀 물리치는 영물, 고래만 보면 비명


초파일 등축제


 

“무엇을 상상하든지 그 이상을 보게 될 것이다.” “상상 그 이상의 상상.”

 

이런 말들이 아깝지 않은 해괴망측하고 무시무시한 동물이 있다. 머린 낙타와 비슷하고 눈은 토끼처럼 빨갛다.

귀는 소귀목덜미는 뱀과 같고 잉어 비늘을 몸에 둘렀다. 발은 호랑이 발에 발톱은 매 발톱이다.

거기에 머리에 달린 뿔은 사슴뿔을 닮았다. 온갖 동물 잡탕이다.

 

머리에 온통 뱀을 두르고 눈만 봐도 돌로 굳는다는 메두사보다 끔찍하지 않은가. 이 말도 안 되는 동물은 중국 고서 ‘광아’에서 표현한 용이다.


용은 희귀한 모습인 만큼 온갖 신통력을 부린다. 비를 내리게 하거나 구름과 안개를 일으키고, 파도를 손바닥 뒤집듯 한다. 입에서 불도 내뿜는다.

서양용처럼 날갠 없지만 동양에서 상상하는 용은 잘만 난다. ‘성호사설’에는 “용이 싸우면 비가 내리고, 독룡이 놀라면 벼락치고,

용이 화가 나면 홍수난다”라는 내용도 있다.

 

하지만 용의 천적이 바다 포유류라면? 용은 고래를 보면 기겁을 한다. 사찰 종각에 매달린 범종을 보면 무슨 얘기인지 알 수 있다.

 한국 범종은 종을 매달기 위해 종 위 종뉴를 만든다. 대부분 용 모습이기에 용뉴라고도 한다.

종 위에 앉은 용을 포뢰라고도 하는데 용생구자설에 의하면 포뢰는 용의 다른 모습이다.

 

포뢰는 바다에 사는 경어(鯨魚, 고래)를 가장 무서워해서 만나면 놀라 크게 비명을 지른다고 한다. 종 소리가 우렁차야 하기에 옛사람들은 포뢰 모양을

 만들었고, 고래 형상을 딴 당(撞, 종을 치는 도구)으로 종을 쳤다. 고래를 만나 포뢰가 놀라서 큰 소리를 지른다고 믿은 것이다.

그래서 종 위 포뢰는 항상 입을 벌리고 있다. 말도 안 되는 소리가 아니다. ‘삼국유사’ 권3 탑상편엔 “아래로 세 개의 자금종을 달아 놓았는데,

모두 각과 포뢰가 있고 경어로 당을 삼았다”는 기록이 있다.


고래만 빼면 용은 그럭저럭(?) 훌륭한 영물이다. 악귀를 물리치는 데 용만한 동물이 없다. 대명사가 있지 않은가.

처용(處容)이라고. ‘삼국유사’ 권2 제2 기이편 얘기다.

 

신라 49대왕 헌강왕이 동해 용을 기쁘게 하고 정사를 도울 용의 아들을 얻었는데 바로 처용이다.

왕은 혹여 처용이 도망이라도 갈까 미녀를 아내로 삼게 했고, 급간(級干)이란 관직도 내렸다.

 

옛말 틀린 거 하나 없다. 경국지색이었다. 역신이 그녀를 흠모해 사람 탈을 쓰고 밤에 처용 집에 들어가 동침한 것이다.

처용이 돌아와 보니 두 사람이 누워 있는 걸 봤다. 어찌 분노가 치밀지 않으랴. 그러나 처용은 도리어 노래를 부르며 춤을 췄다.

“가랑이가 넷이렷다. 허나 둘은 내 것이지만 둘은 누구 것이더냐? 본디 내 것인데 앗은 것을 어찌할꼬.”


요즘 세상이면 칼부림 날 사태다. 역신도 예상치 못한 상황에 놀랐고, 곧 형체를 드러내고 처용 앞에 꿇어앉아 이렇게 말했다.

 “공의 아내를 사모해 지금 그녀와 관계 했는데, 공은 노여움을 나타내지 않으시니 감동하여 칭송하는 바입니다.

맹세코 이후로는 공의 형용을 그린 것만 봐도 그 문에 들어가지 않겠습니다.”

 

하여 옛사람들은 처용의 형상을 문에 붙여 악귀를 물리치고 경사를 맞아들이곤 했다.

용의 아들 아내를 건드리고도 목숨을 건졌으니 역신에겐 참으로 경사스러운 일이기도 하다.


우리나라에서 용은 왕권의 상징이기도 했다. 고려 태조 왕건은 용비늘 두 닢을 국보로 소중히 간직하도록 했다.

자신이 용의 후손임을 증명하기 위해서였다.

    

 

2. 용(下)


애물단지서 불법 수호신으로 환골탈태

 

통도사 금강계단 에서...

 

불법을 수호하는 천왕팔부중은 천, 용, 야차, 건달바, 아수라, 가루라, 긴나라, 마후라가다. 여기에 부모 속을 썩이는 자식, 애물단지가 있다.

 입에서 불까지 내뿜는다. 게다가 백성들을 괴롭히는 존재이기도 했다. 바로 용이다.

 

용이 왜 애물단지일까. 아홉 마리 용 설화가 얽힌 사찰 이야기가 흥미롭다. 민오 스님이 1705년(숙종 31)에 엮어 간행한

 ‘통도사사리가사사적약록(通度寺舍利袈裟事蹟略錄)’에 용이 등장한다. 통도사는 부처님 진신사리를 봉안한 탑이 있어 불보(佛寶)사찰로 유명하다.

이 탑을 중심으로 금강계단(金剛戒壇)이 있다. 공교롭게도 계단을 조성한 곳은 용이 살던 연못이었다고 하던데…….


자장 율사가 당나라 종남산 운제사에서 기도를 드릴 때였다.

 

문수보살이 스님 모습으로 나타나 부처님 가사와 사리, 경전들을 주며 일렀다.

“그대의 나라 남쪽 취서산 기슭 독룡(毒龍)이 거처하는 연못에 금강계단을 쌓고 불사리와 가사를 봉안하라.”

독 품은 용이 백성들을 못살게 굴고 있으니 보살 말대로 하면 불법이 오랫동안 머물 수 있다는 게다.

독룡이 천룡(天龍)이 돼 계단을 옹호한다는 말도 덧붙였다. 용들이 순순히 자장의 뜻을 따르지는 않았을 터다.

그러나 자장은 아홉 용을 쫓아내고 계단을 쌓았다.

하루아침에 내쫓긴 용 가운데 한 마리는 굳이 터를 지키겠다고 해 연못 한 귀퉁이를 남겨 살게 했다. 구룡지(九龍池)다.


풍수지리 대가 도선 국사에게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며 쫓겨난 용도 있다.

 

고려시대 민지가 ‘금강산유점사사적기’에 기록한 사건으로 반평생을 옥룡사 주지로 지낸 국사가 절을 창건할 때 일이다.

절터 일대가 큰 연못이었는데 아홉 마리 용이 살았다고 한다. 용들은 걸핏하면 도술을 부려 사람들 속을 썩였다.

국사는 이곳에 절을 세우기로 하고 용들에게 물러가라 했다. 국사의 명성이 자자했던 터라 여덟 용은 군말 없이 이삿짐을 쌌단다.

헌데 백룡(白龍) 하나가 버텼다. 둘은 도술 경쟁을 하기에 이르렀고 화가 난 국사가 지팡이를 휘둘러 백룡의 눈을 멀게 했다.

래도 버티자 아예 연못을 펄펄 끓였다. 눈멀고 몸뚱이마저 여기저기 타서 망신창이가 된 백룡 행방은 묘연하다.


사실 용은 부처님이 태어날 때 청정수를 뿜어 목욕을 시킨 영물이다. 때문에 닫집, 대들보, 천장 등 사찰 곳곳에는 용이 도사리고 있다.

사바에서 피안으로 건너갈 때 타는 배를 반야용선이라고 하는데, 법당에 조각된 용머리와 꼬리는 도량이 반야용선임을 의미한다.

승주 선암사 승선교 아래 거꾸로 매달린 용머리는 개천을 타고 경내로 들어올지 모를 사악한 무리들을 경계하고 있다.

순천 송광사 삼청교도 마찬가지다.


불법 수호는 호국으로 이어진다. 온갖 판타지 게임에서 만사형통, 절대무적의 무기로 구경도 하기 힘든 만파식적(萬波息笛) 얘기다.


‘삼국유사’에서 문무왕은 늘 지의 법사에게 “죽은 뒤 용이 돼 불법을 받들어 나라를 지키겠다”고 서원하곤 했다.

 왕은 불교식으로 화장하고 유골을 동해 입구 대왕암에 안장해달라고 유언하고 눈을 감았다. 지성이면 감천이랬다.

바다 속 큰 용이 된 왕은 아들 신문대왕에게 만파식적을 선사했다. 이 피리를 불자 적병이 물러가고 질병이 낫고, 가물 땐 비가 왔다.

많은 비를 개이고 했으며 바람이 가라앉고 물결은 평온해졌다. 용의 신통력이 한데 모인 만파식적. 서원은 세상을 바꾼다.  



 1. 개


우리집 강아지 코코 생후 3개월<닥스훈트>


무자 화두 주인공…팔만대장경 제작 도와


유명인사다. 친근하기까지 하다. 게다가 주인을 모시는 충성심도 깊다. 무자 화두 주인공 개 얘기다. “개에게도 불성이 있는가?”  “없다(無).”

선가(禪家)뿐만 아니라 일반인들도 심심치 않게 들어본 무문관 제1칙 화두다.

조주구자(趙州狗子) 또는 조주무자(趙州無子)로 불리는 이 화두는 번뇌의 씨앗을 송두리째 뽑는 지름길로 알려져 왔다.


하필 개가 화두 주인공일까. 사람들 지척에 늘 개가 있어서다. 개는 전통적으로 잡귀와 액운을 물리치고 집안 행복을 수호하는 영물로 여겨졌다.

 ‘동국세시기’에는 새해가 되면 부적으로 개 그림을 그려 곳간 문에 붙였다는 풍습이 전한다. 1700년 동안 한국에 뿌리 내린 불교 역시 개가 빠지지 않는다.

삽살개는 ‘귀신과 액운을 쫓는 개’다. 중국서 지장보살로 추앙받는 신라 왕자 교각 스님과 뗄 수 없는 도반이기도 하다.

삽살개 ‘선청’을 데리고 당나라로 구법과 교화의 길에 올랐고 지금도 구화산에는 ‘선청’을 타고 있는 지장보살상이 남아있다.


마치 문수보살과 사자 같은 인연이다. 이 대목에서 자장율사를 빼놓을 수 없다. 자장율사는 신라 28대 진덕여왕 때 대국통을 관뒀다.

대신 석남원에서 수행하며 문수보살을 친견하고자 지성을 다했다. 그러던 날 남루한 옷차림을 한 노인이 망태기를 메고 찾아와

“자장, 자장”하고  율사를 불렀다. 자장율사를 모시던 시자가 그를 나무랐고 자장율사는 좋은 말로 돌려보내라고 했다.

이 말을 전해들은 노인은 “아상 있는 자가 어찌 나를 보리요”하고 망태기에 넣어둔 죽은 개를 허공에 던졌다.

개는 사자로 변했고 노인은 사자 등에 올라타 날아가 버렸다.

그토록 보고 싶어 했던 문수보살을 겉모습으로 외면했던 자장율사는 땅을 치고 후회했다는 후문이다.


합천 해인사 ‘유진 팔만대장경 개강 인유’에는 팔만대장경 제작을 도운 개 설화가 아로 새겨졌다.

이거인이라는 합천 사람은 어느 날 길에서  눈이 셋 달린 강아지를 만나 3년을 한 집에서 동고동락했다.

3년이 지나자 개는 병들지도 않았는데 밥도 먹지 않다가 며칠 만에 죽었다. 거인은 불쌍히 여겨 관을 짜 깨끗하고 양지바른 곳에 개를 묻었다.

제문도 지어 슬픔을 달랬다. 뒤이어 거인도 죽어 저승길에 올랐다. 웬일인가. 첫 번째 관문에서 만난 눈이 셋 달린 삼목대왕(三目大王)

거인 손을 잡으며 반가이 맞이하는 게 아닌가 사연인 즉 삼목대왕이 죄를 지어 개 모습으로 이승에 귀양 왔다 거인에게 신세를 진 것이다.

삼목대왕은 은혜를 갚고자 거인에게 염라대왕 앞에서 고할 말을 귀띔했다. 거인은 삼목대왕이 시키는 대로 했다.

“법보(法寶)의 고귀함을 판에 새겨 세상에 널리 알리지 못하고 온 것이 후회스럽다.” 그러자 염라대왕은 명부에서 거인 이름을 지웠다.


비슷한 얘기도 전해진다. 용왕 딸이 노부부의 개로 살았다. 3년 뒤 죽은 개는 용궁에 노인을 초대했다.

노인은 용왕 딸이 미리 일러 준대로 ‘해인(海印)’을 선물로 받아와 여생을 행복하게 살다 절을 지었다는 설이다.

민화 가운데 삼목대왕을 표현한 세눈박이 개 그림이 있다.


개의 충직함은 전생과 금생을 넘나드는 불교설화에서도 끔찍하다. 복날이면 보신탕 음식점을 찾아 동물성 단백질을 보충하는 인간들도 끔찍하다.

경전은 동물이 전생에 부모나 형제라 이르는데, 인간이 영양을 보충하는지 악업을 보충하는지 모를 일이다.


◈1. 닭


  ▲지안의 작품 닭.


성미 급한 군다리보살 화신…깨달음 상징


보살은 자비롭고 자애로운 이미지가 강하다. 정설처럼 굳어진 얘기다. 헌데 성미가 급하기도 했다.‘천수경’에는 “나무 군다리보살 마하살” 이라는

내용이 있다. 여기서 군다리보살은 인간 마음 속 마귀를 잡아 불성을 지키는 신장과 같다.

별나라마다 혼란을 일으키는 악마들을 무찌르고, 선을 지키는 보살이다. 이 보살이 바로 닭신이다.


군다리보살이 왜 닭과 인연이 닿을까. 닭은 누구보다 먼저 새벽을 맞이하고 울음을 터트려 인간에게 알려준다. 이런 까닭에 신의 새로 여겨졌다.

그런데 깜빡 존다면 어떨까. ‘본생경’에는 아침마다 닭 울음소리를 듣고 수행하는 500비구들이 시도 때도 없이 우는 닭 때문에 고생한 일화가 나온다.


군다리보살도 졸았다. 낮이나 밤이나 악마로부터 불성을 지키던 군다리보살에게도 졸음이 몰려왔다.  그 순간 들이닥친 악마들로 인해

본래 마음은 혼란에 빠졌고 군다리보살은 변명이나 자초지종을 들을 여유도 없이 긴 칼로 악마 냄새가 나는 모든 것들을 내리쳤다.

자신이 존 탓에 성미 급하게 마구 베다보니 칼 맞은 이가 악마가 아닐 수도 있었을 터다. 악마란 불성을 유혹하는 탐, 진, 치 삼독심이다.


불교에서는 본래면목, 참나, 불성을 바로 보는 것을 깨달음이라 일컫는다. 삼독심에 물들지 않고 불성이 자유자재하기 위해 군다리보살이 존재한다.

하지만 졸았으니 앞뒤 판단할 새가 어디 있었으랴. 그런데 이 군다리보살이 제 때 울기도 한다.

조선시대였다. 서산대사가 지리산 여러 암자로 운수행을 다녀도 일대사를 해결하지 못하자 친구를 만나러 마을로 내려갔을 때였다. 

 갑자기 닭이 홰를 치며 크게 우는 소리를 들었고, 순간 대사는 확연히 깨쳤다. 그리고 이런 오도송을 남겼다.


“머리는 희지만 마음은 늙지 않는다/ 옛 사람이 일찍이 말했네/ 닭 우는 소리 듣는 순간/장부의 할 일 다 마쳤네//

홀연히 본래 내 집에 돌아오니/ 모든 것이 다 이것뿐이구나/ 팔만 사천 대장경도/ 본래 이 하나의 빈 종이일 뿐이로다.”


서울 조계사 대웅전 문에는 닭이 새겨져 있는데 속히 깨달음을 얻으라는 뜻이다.

그러나 걸림 없는 게 자유인이라며 닭고기도 마다 않는 수행자나 불자들. 그 마음 속 군다리보살이 아마 ‘깜빡’ 졸고 있는 탓이리라.


문헌에는 닭과 관련한 설화가 많다. ‘삼국유사’에는 신라 시조 혁거세왕이 알에서 태어났다.

더구나 왕후를 구하고자 했을 때 계룡(요즘 유행하는 말로 닭용)이 나타나 왼쪽 옆구리에서 닭 부리 같은 입술을 지닌 여자 아이를 낳았다.

사람들이 월성 북쪽 냇가에 가서 목욕시켰더니 부리가 빠지면서 아름다운 얼굴이 드러났다고.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김알지 탄생담에도 닭이 등장한다. 신라왕이 서쪽 숲에서 닭 울음을 듣고 알아보니 나뭇가지에 걸린 금빛 궤 아래

흰 닭이 울고 있었다. 그 궤를 열어보니 사내아이가 있었고, 이 아이는 경주 김씨 시조가 됐다고 한다. 

궤가 나온 숲은 그 뒤 계림(鷄林)이라 했으며 신라 국호로 쓰이기도 했다.


우리나라 쌍계사는 대개 두 개의 물줄기를 품고 있다는 뜻인데 신라 서곡대사가 세운 고찰 강원도 홍천 쌍계사는 ‘雙鷄’라고 쓴다.

서곡대사가 닭 울임이 있는 명당에 절을 세우고자 계란 2개를 땅 속에 묻었더니 새벽에 닭 두 마리가 홰치며 운데서 연유한 이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