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화이야기=고려외

파고다 공원에 있는 원각사 10층 석탑 = 국보 2호

백련암 2011. 5. 26. 13:08

용산중앙박물관에 갔다왔다 요즘법화경공부를 하다보니 탑(견보탑품= 見寶塔品)에 대해서 나와 있어 파고다 공원 원각사 10층석탑

(圓覺寺址十層石塔, 국보 제 2호)과 개성에 있는 경천사 10층석탑에 대해서 공부를 하다보니 찾아나서게 됐다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볼 수있는 아름다운 탑은 단 두점밖에 없단다 원각사 10층석탑과 경천사 10층석탑 뿐이란다.

 

※의문 = 원래는 13층탑인것같다고 하셧다 3개의 탑신이 사라진것이다

♣개성 경천사에 있는 석탑(경천사 10층석탑, 국보 제 86호)를 모방하여 약 120년 후에 세워졌으므로 쌍둥이 탑이라 할 수있단다.

 

★ 핵심

원각사(圓覺寺)는 흥복사(興福寺)라는 이름으로 고려시대부터 내려온 고찰(古刹)이었는데, 

조선 태조 대에 조계종(曹溪宗)의 본사가 되었다가 후에 폐지되었다. 1464년(세조 10) 중건하고 원각사라 하였으며, 이 때 대종(大鐘)도 함께 만들었다. 

 

        한양도성 내의 3대 사찰의 하나로 번창하다가 1504년(연조 10) 폐사되고, 장악원(掌樂院) 또는 연방원(聯芳院)이라는 기생방(妓生房)이 되었고 

원각사 대종(大鐘)은 1536년 숭례문으로 옮겨졌다. 

 

        원각사(圓覺寺) 터에는 국보 2호인 원각사지 10층석탑(圓覺寺址 十層石塔)과 보물 3호인 대원각사비(大圓覺寺碑)가 남아 있다.  

대원각사비(大圓覺寺碑)는 1464년(세조 10)에 창건된 원각사의 창건 전말을 기록한 비이며 1471년(성종 2)에 건립되었다. 

        귀부(龜趺)는 화강석제의 세선(細線) 기하학무늬이고, 비좌(碑座)로부터 배면에는 연꽃잎이 뒤덮여 있으며, 귀두(龜頭)는 목이 수평으로 돌출되어 

있다. 대리석으로 된 비신(碑身)은 이수(螭首)와 단일석이고 제액(題額)에는 ‘대원각사지비(大圓覺寺之碑)’를 두 줄로 전서(篆書)하였다. 

        비표(碑表)의 찬자(撰者)는 김수온(金守溫), 서자(書者)는 성임(成壬)이고 비음(碑陰)의 찬자는 서거정(徐居正), 서자는 정난종(鄭蘭宗)이다. 

원각사지 10층석탑(圓覺寺址 十層石塔)은 '아(亞)' 자형의 3층 기단 위에 탑신부는 층층이 아름다운 기와집을 모각하여 기둥· 난간· 공포(栱包), 

지붕의 기와골까지 섬세한 수법이다. 

        옥신(屋身)에는 수많은 부처 ·보살상 ·천인(天人) 등과 구름·용·사자·모란·연꽃·인물·새·선인(仙人) 등이 새겨져 있다.

  

= 원각사 10층석탑 =

조선 세조 13년(1467년)에 3층의 기단(基壇)과 10층의 탑신(塔身)으로 되어 있고 인물과 화초 무늬 따위가 양각되어 있다.

맨 위 3층은 오랫동안 무너져 내려져 있던 것을 1947년에 원상태로 복구하였다. 2000년에는 표면 훼손이 심각해 유리 보호각을 씌워

놓은 상태다.  이 탑이 원각사10층석탑이다.

비록 탑의 상륜부가 없어지긴 했지만 높이가 자그마치 12m에 이르고, 국보 제2호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다.

원각사는 이미 법등이 끊어졌지만 이 탑과 대원각사비(보물 제3호)가 있어 원각사의 존재를 알려주고 있다.

원각사에는 원래 고려 때 흥복사가 자리하고 있었는데  조선이 건국되었어도 법등은 이어왔으나 억불숭유 정책에 따라 사찰 기능 대신

약학도감으로 전용되다 조선 전기 세조 때인 1464년 다시 사찰로 환원하고  이름을 원각사로 하게했다. 

이 때 건립된 여러 사찰 건물과 함께 이 원각사10층석탑도 세웠다.

 

조선의 건국이념이 불교를 배척하고 유교를 숭상하는 소위 억불숭유정책인데 세조가 원각사를 건립한 것은 아이러니다.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르는 과정에 단종은 물론 많은 신하들을 제거한 데 대한 참회의 뜻으로 세웠다고 알려져 있으나 아무튼

국가적인 사찰이었음은 분명하다.

그 뒤 원각사는 연산군 때 사찰의 기능을 없애 악사들을 관장하는 장악원(掌樂院))으로 바뀌었다가 이어 중종 때인 1512년에는 건물을 헐어

사찰의 건물들이 없어져 폐사의 길로 들어섰다고 알려져 있고. 그 후 결국 원각사 터에는 이 10층 대리석탑과 1471년(성종 2)에

세운 대원각사비(大圓覺寺碑)만 자리를 지키고 남아있게 되었다.

폐허가 된 원각사 터는 공원으로 바뀌는데,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긴 소위 아관파천(莪館播遷) 후 민의의 수렴을 위해 사람이

모이는 공원을 만들고자 했던 것이다. 

이 때 대한제국의 고문으로 와 있던 영국인 브라운이 건의하여 1897년(고종 34년, 대한제국 광무원년)에 이곳을 서양식 공원으로 만들게 되었다고 한다.

이 곳은 1919년 3ㆍ1독립선언문 낭독과 독립만세를 외친 곳이 되었다.

원각사 터에 10층 대리석탑이 있어 조선에 들어와 있는 외국인들은 탑을 파고다라 불렀기 때문에 탑이 있는 공원이란 뜻에서 파고다 공원으로

이름 했던 것이다.

이 탑의 표면에 새겨진 조각은 조선불교 신앙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

그러나 이 비가 자연에 그대로 노출되어 비둘기 배설물, 산성비 등의 원인으로 마멸이 급속하게 진행되자 보호를 위해

1999년 지금처럼 서울시에서 유리 보호각을 씌웠다.

일제가 우리나라를 식민통치하다 2차 대전에서 패망하기 직전 이 탑을 일본으로 옮겨가기 위해 위의 3층까지 해체했으나 결국 옮겨가지 못하고

그대로 방치된 채 광복을 맞았다.

광복 후 미군정청의 문교부 교화국 담당으로 있던 크네츠비치가 미군의 공병부대를 동원해 원상으로 복구 해놓았다.

크네츠비치는 6ㆍ25전쟁 당시 국립중앙박물관의 유물 2만여 점을 부산으로 옮기는데 결정적인 공헌을 한 사람이기도 했다.

크네츠비치는 원각사탑을 아무런 전문가의 조언도 없이 복원했다.

복원 후 당시 이 사람을 '파고다 맨'이란 애칭으로 부르기도 했고, 1995년 12월 7일 문화체육부(현 문화체육관광부)에서 은관문화훈장을 수여했다.

 

 

1979년도 사진 보호막이 없었음

서울 원각사지 십층석탑 (서울 圓覺寺址 十層石塔) : 국보  제2호     시대 = 조선

 

원각사는 지금의 탑골공원 자리에 있었던 절로, 조선 세조 11년(1465)에 세웠다. 조선시대의 숭유억불정책 속에서도 중요한 사찰로 보호되어 오다가

1504년 연산군이 이 절을 ‘연방원(聯芳院)’이라는 이름의 기생집으로 만들어 승려들을 내보냄으로써 절은 없어지게 되었다.

이 탑은 조선시대의 석탑으로는 유일한 형태로, 높이는 약 12m이다. 대리석으로 만들어졌으며 탑 구석구석에 표현된 화려한 조각이

대리석의 회백색과 잘 어울려 더욱 아름답게 보인다.

탑을 받쳐주는 기단(基壇)은 3단으로 되어있고, 위에서 보면 아(亞)자 모양이다. 기단의 각 층 옆면에는 여러가지 장식이 화사하게 조각되었는데

용, 사자, 연꽃무늬 등이 표현되었다. 탑신부(塔身部)는 10층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3층까지는 기단과 같은 아(亞)자 모양을 하고 있고

4층부터는 정사각형의 평면을 이루고 있다. 각 층마다 목조건축을 모방하여 지붕, 공포(목조건축에서 처마를 받치기 위해 기둥 위에 얹는 부재),

기둥 등을 세부적으로 잘 표현하였다.

우리나라 석탑의 일반적 재료가 화강암인데 비해 대리석으로 만들어 졌고, 전체적인 형태나 세부구조 등이

고려시대의 경천사지 10층석탑과 매우 비슷하여 더욱 주의를 끌고 있다.

탑의 윗부분에 남아있는 기록으로 세조 13년(1467)에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으며, 형태가 특이하고 표현장식이 풍부하여 훌륭한 걸작품으로 손꼽히고 있다.

<문화재청의 글>

 

유리 보호각이 씌워진 원각사 10층 석탑 = 국보 제 2호

 

이탑은 世祖가 세운 圓覺寺 터에 남아있는 12m의 十層石塔이다.  

圓覺寺는 1465년<世祖 11年>에 조계종의 본산이었던 興福寺 터를 확장하여 세운 사찰인데  이 塔은 2년 뒤인 1467년<世祖 13年>에 완성했다.

世祖는 사리분신<舍利分身>하는 경이로운일을 겪은 뒤 원각사를 짓기로 결정하였는데, 공사도중에도 舍利分身하고 서기가 나타났다고 전해진다.

지금 견해로는 十層石塔이지만 사료에는 13층의 탑<窣 覩 婆, =솔도파>을 세워 분신사리와 새로번역한 圓覺經을 모셔두었다고 한다.

亞字모양의 기단은 세겹인데 아래에는 용과 연꽃 같은 무늬를 새겼고,  중간에는 삼장법사와 손오공, 저팔계, 사오정, 일행이

인도에서 佛法을 구해오는 과정을 그려 새겼다. 

위에는 부처님의 전생설화와 일생을 조각하였다.  법회장면을 새갠 탑의 몸체에는 현판, 용을 휘감은 기둥, 목조구조, 지붕을 두었는데,

마치 하나의 건물같다.

 

*塔을 만든 재료는 흔치 않은 대리석이며 독특한 형태와 조각 솜씨는 조선시대 석탑의 백미로 꼽힌다.

*이 石塔은 고려시대에 제작한 경천사 10층석탑(국보 제 86호)과 여러면에서 매우 비슷하다

 

◈솔 도 파 < >란 = 고승(高僧)의 사리(舍利)나 유골을 안치하는 묘탑(妙塔). 부도(浮圖), 부두(浮頭), 불도(佛圖),포도(蒲圖)라고도 한다.

   원래 불타(佛陀) 또는 솔도파( Stupa)라는 음이 잘못 전해진 것으로 처음에는 불상·불교사원·불탑을 의미했지만 뒤에는 고승들의 사리를 담는

   석조 소탑을 지칭하게 되었다.

◈불교 = : 솔도파란 부처의 사리를 모시거나 절을 장엄하게 하기 위하여 쌓은 탑 

 

 

 

지인의 사진 = 유리 보호각이 씌워지지 않던 시절의 원각사 10층 석탑.

 

서울 원각사지 십층석탑 (서울 圓覺寺址 十層石塔) : 국보  제2호  시대 : 조선

 

원각사는 지금의 탑골공원 자리에 있었던 절로, 조선 세조 11년(1465)에 세웠다. 조선시대의 숭유억불정책 속에서도 중요한 사찰로 보호되어 오다가

1504년 연산군이 이 절을 ‘연방원(聯芳院)’이라는 이름의 기생집으로 만들어 승려들을 내보냄으로써 절은 없어지게 되었다.

이 탑은 조선시대의 석탑으로는 유일한 형태로, 높이는 약 12m이다. 대리석으로 만들어졌으며 탑 구석구석에 표현된 화려한 조각이 대리석의

회백색과 잘 어울려 더욱 아름답게 보인다.
탑을 받쳐주는 기단(基壇)은 3단으로 되어있고, 위에서 보면 아(亞)자 모양이다.

기단의 각 층 옆면에는 여러가지 장식이 화사하게 조각되었는데 용, 사자, 연꽃무늬 등이 표현되었다. 탑신부(塔身部)는 10층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3층까지는 기단과 같은 아(亞)자 모양을 하고 있고 4층부터는 정사각형의 평면을 이루고 있다.

각 층마다 목조건축을 모방하여 지붕, 공포(목조건축에서 처마를 받치기 위해 기둥 위에 얹는 부재), 기둥 등을 세부적으로 잘 표현하였다.

우리나라 석탑의 일반적 재료가 화강암인데 비해 대리석으로 만들어 졌고,

 전체적인 형태나 세부구조 등이 고려시대의 경천사지 10층석탑과 매우 비슷하여 더욱 주의를 끌고 있다.

탑의 윗부분에 남아있는 기록으로 세조 13년(1467)에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으며,

형태가 특이하고 표현장식이 풍부하여 훌륭한 걸작품으로 손꼽히고 있다.

 

대원각사비 시대 1471년(성종 2) 

 

 

 

서울 원각사지 대원각사비 (서울 圓覺寺址 大圓覺寺碑) : 보물 제 3호   시대 : 조선 

대원각사 비신= 大圓覺寺 碑身(보물 3호) 이수<螭首>와는 단일석이다.

 

원각사의 창건 내력을 적은 비로, 조선 성종 2년(1471)에 건립되었다. 원각사는 탑골공원 자리에 있던 절로서

조선시대 태조가 한양에 도읍을 정할 때 조계종의 본절로 세웠다.

조계종이 없어지자 관아로 사용되다가 세조가 간경도감에서『원각경 』을 번역하고, 회암사 사리탑에서 사리를 나누어온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이곳에 다시 원각사를 짓고 13층 사리탑을 세웠다.

 

비는 머릿돌을 따로 얹지 않고 비몸돌 위를 두 마리의 용이 감싸듯 표현되어 있어 복고적인 형식을 따르고 있다.

비를 지고 있는 돌거북은 둔중한 몸체로 머리는 목을 표현하지 않고 앞으로 나와 있다.

등무늬는 육각형이 아닌 사다리꼴 평행세선을 새겼으며, 등 중앙에는 연잎조각을, 꼬리와 다리에는 물고기 비늘을 조각해 놓아

조선시대 조각미의 독특한 형태를 잘 보여주고 있다.

 

비몸돌 위로는 보주(寶珠 :연꽃봉오리모양의 장식)를 드는 두 마리의 용이 조각되었으며,

조각 아래의 가운데에는 ‘대원각사지비(大圓覺寺之碑)’라는 비의 이름이 강희맹의 글씨로 새겨져 있다.

 

비문은 당대 명신들이 짓고 썼는데, 앞면의 비문은 김수온, 성임, 뒷면의 추기는 서거정, 정난종이 각각 짓고 썼다.

 

정면모습 = 碑座는 배면에 연꽃잎이 뒤덮여 있으며  龜頭는 목이 수평으로 돌출되어있다.

 

옆모습= 귀부(龜趺) 화강석재의 세선<細線>기하학무늬이다

 

 귀부 뒷모습<귀갑문 꼬리> = 너무나 정교해 감탄하였다

대원각사비(보물 3호)

세조가 원각사를 창건한 경위를 적어놓은 비석이다

거북이 모양 받침돌을 만들고 그 등위에 연꽃을 새겨 비석몸돌을 세울 자리를 만들었다

 

 

 

 

탑골공원 팔각정 (塔골公園 八角亭) :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 73호

유리 보호각속에 원각사 10층탑과 앞에 보이는 정자는 파고다 공원의 팔각정

 

조선 고종(재위 1863∼1907) 때 영국인 브라운이 조성한 현대식 공원으로 공원 안에 있는 원각사 10층 석탑으로 인하여 파고다공원

또는 탑동공원이라 불리웠으며, 이때 팔각정도 함께 지었다.

황실공원으로 제실, 음악연주 장소 등으로 사용하였으며, 1913년부터는 일반인에게 공개되었다.

1919년 3.1운동 당시 학생들과 시민이 이 앞에 모여 학생대표의 독립선언문 낭독에 이어 대한민국 만세를 외치고 시위 행진을 벌였던 곳으로 유명하다.

일제시대에는 시민들이 울적해진 심정을 달래기 위하여 이곳을 많이 찾았다고 한다.


 

서울 탑골공원 (서울 塔골公園) : 사적  제354호   시대 = 대한제국

조선시대 원각사터에 세운 서울 최초의 근대식 공원으로 파고다 공원이라고도 불리운다.

원각사는 고려 때 흥복사라 불린 절로, 조선 전기에 절을 넓히면서 원각사로 이름을 바꾸었다. 그러나 불교를 억누르는 정책으로 인해

연산군과 중종때 절이 폐사되었다. 그 후 영국인 브라운의 건의로 이곳에 서양식 공원을 세웠으나, 그 이유와 시기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없다.

공원 안에는 원각사지 10층석탑(국보 제2호)과 원각사비(보물 제3호)가 있다.

또한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만세를 부른 팔각정·독립만세 부조판·손병희 선생의 동상들도 있다.
1919년 3월 1일 처음으로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독립만세를 외친 3·1운동의 출발지로서, 우리 민족의 독립 정신이 살아 숨쉬는 유서 깊은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