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품 템플스테이와 부처님이야기

축생전 = 원숭이.

백련암 2011. 12. 19. 01:16

1. 뱀

 

애욕 업장으로 윤회 거듭한 다산의 상징

                                                                              

다소 뚱뚱한 체형을 가진 개그우먼이 캐릭터 ‘출산드라’를 연기하며 다산의 상징이라 말하던 시절이 있었다. “자연분만, 모유수유”와 “날씬한 것들은 가라”고 외치며 S라인 몸매에 열광하던 사회를 풍자해 높은 인기를 얻었다.

 

매끈한 몸을 자랑하고 여러 개 알을 낳는 뱀도 다산과 풍요의 상징이다. 허나 갈라진 혀와 독, 차가운 몸 그리고 징그러운 모습이 신과 사람들에게 부정적인

이미지를 심어준 탓일까. 뱀은 애욕과 복수 화신이나 한 서린 동물로 비유되곤 한다.


‘용재총화’엔 스님이 죽어 뱀으로 환생한 설화가 있다. 진광사 스님이 시골여인을 아내로 삼고  밤이면 몰래 출입하다 죽었는데 아내를 잊지 못했다.

낮에는 독 속에 숨어 지내다 밤마다 아내와 동침했다. 결국 궤짝에 담겨 물에 떠다니는 신세가 됐다고 한다.


춘천 청평사 공주탑엔 청춘남녀의 진득한 사랑이 화를 부른 얘기가 서렸다. 중국 공주를 짝사랑하던 청년에게 공주가 마음을 열자 왕은 천한 그를 죽였다.

그는 “죽어도 못 보내”를 부르짖었다. 뱀으로 윤회한 그는 공주 몸을 칭칭 감고 가는 곳마다 따라 다녔다. 공주는 어긋난 사랑이 애욕으로 번지자 점점

야위어 갔고, 마침내 도 높은 스님이 있다는 청평사를 찾기에 이르렀다.

 

뱀에게 “밥을 얻어오겠다”고 한 뒤 공주는 잠깐 자유를 얻었다. 때마침 가사불사 법회 중이었고 공주는 몸을 깨끗이 씻고 가사를 꿰맨 다음 법당에서 염불했다. 기다림에 지친 뱀은 몸을 배배 꼬다 기어코 공주를 찾아 나섰다. 구성폭포에 이르러 공주를 발견한 뱀은 환희에 젖어 갈라진 혀를 낼름거리며 몸을 날렸다.

아뿔싸. 폭포 아래 공주는 물에 비친 형상이었다. 물속에 뛰어든 뱀은 생을 달리했고 시신을 거둔 공주는 구성폭포 위에 삼층석탑을 세웠다.


짜증 한 번 냈다가 축생계로 떨어진 수행자도 있다. 금강산 유점사 산내 암자에 법호가 홍도(弘度)라는 스님은 승속을 떠나 생불로 불릴 정도로 덕이

수승했다고 한다. 하루는 스님이 밖에서 경행을 했다. 그런데 갑자기 회오리바람이 불어 먼지가 스님을 덮쳤다.

스님은 “뭔 놈의 바람이 이렇게 먼지를 일으키는가”라며 제대로 짜증을 냈다.

 

꿈 속 노인이 스님을 꾸짖었고 놀라 일어나려던 스님은 몸이 구렁이로 변한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마침 아침 공양을 준비하고 기다리던 대중이

스님을 찾았지만 스님 처소에선 똬리 튼 구렁이만 발견했다. 갈지자로 쓸쓸히 공양간으로 향한 구렁이는 꼬리에 물을 묻히고 다시 재를 묻혀 벽에

이런 글을 남겼다. “일기진심 수사보(一起嗔心 受蛇報).” 한 번 성내면 뱀의 업보를 받는다는 절절한 가르침이었다.


‘뱀절’이라 불리는 백제시대 사찰 비암사는 차라리 한(恨) 그 자체다. 사중 스님이 며칠째 밤 깊도록 탑돌이를 하다 해가 솟으면 사라지는 청년의 뒤를 몰래

밟았다. 청년이 뒷산 숲속 굴속으로 자취를 감추자 스님은 조심스럽게 안을 들여다봤다. 청년은 오간 곳 없고 구렁이 한 마리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사연인 즉 100일 동안 들키지 않고 탑을 돌면 구렁이 몸을 벗고 사람이 될 수 있었는데 99일째 스님에게 들통 난 것이다. 스님은 영영 사람이 되지 못하는

구렁이를 평생 돌보며 살았고 실제 비암사 동쪽 산꼭대기엔 구렁이굴이 있다고 한다.


뱀의 비운은 지금도 윤회를 거듭하고 있다. ‘출산드라’는 어떻게 표현했을까. “오늘의 말씀. 그 분은, 지혜의 신이자 장애물 제거 신 가네샤에 몸을 감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지금! 몸에 좋은 보신약재란 이유로 펄펄 끓는 솥에 온몸을 던지셨으며, 때론 술로 우리 인간들에게 건강을 약속하시고

정력강장제로 다시 태어나셨던 것이었습니다.”

 

1. 말


분노에 치를 떠는 관음세음보살 화신

 

                                                ▲제주도 섭지코지에서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는 말가족...

 

관세음보살은 자비 화신이다. 분노는 가당치도 않다. 헌데 분노에 치를 떠는 관세음보살 화신이 있다. 제도하기 어려운 중생의 번뇌를 부수기 위해 분노 띤

얼굴을 하고 있다. 말 머리를 한 관세음보살이다. 다른 이름은 마두관음(馬頭觀音)이다.


관음보살은 천(天), 아수라(阿修羅), 인간(人間), 축생(畜生), 아귀(餓鬼), 지옥(地獄) 등 6도를 돌며 중생을 교화한다.

6도에서 중생을 제도할 때 관음보살은 성관음, 천수관음, 십일면관음, 여의륜관음 등으로 현신한다. 보살이 마두관음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곳은 축생도다.


마두관음은 사람 몸에 말 머리를 하고 한 손엔 창을 들고 있다. 분노하고 있는 표정 때문인지 불법을 수호하는 명왕의 하나로 마두명왕, 대력지명왕,

분노지명왕으로도 불린다. 명왕이란 일체 중생을 교화하려는 부처님 뜻을 받들어 수행하는 지혜 광명, 즉 진언의 주인이다.


인도 신 가네샤는 아버지 시바의 잘못으로 코끼리 머리를 붙였다. 그런데 마두관음이 말 머리를 하고 있는 이유는 뭘까. 전륜왕의 보배 같은 말에서

유래한다고 한다. 사방을 내달리면서 위신력으로 마귀를 굴복시키는 것과 같이 두터운 무명 업장을 녹이기 위해서다.

마두관음은 험악하고 커다란 입으로 무명 업장을 먹는다고도 한단다.
축생계를 교화하는 마두관음과 달리 말은 전법 수레 역할로도 불교와 인연을 맺는다. 출가를 결심한 싯다르타가 성을 빠져 나올 때도 말은 묵묵히

그를 태웠다. 아들 라훌라가 태어나고 새 왕자의 탄생을 축하하며 밤낮으로 이어진 7일 잔치가 끝난 뒤였다.


달이 서쪽으로 기울 무렵, 태자 싯다르타는 자리에서 일어나 깊은 잠에 든 아내 아쇼다라와 아들 라훌라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이별 인사를 대신했다.

발길을 돌려 마부 찬나 방으로 향한 싯다르타는 칸타카에 안장을 얹으라고 말했다. 싯다르타는 자신을 태우던 말 칸타카를 타고 카필라성을 나서

깨달음의 길로 발을 내디딘 셈이다. 그래서인지 법을 펼치는 도량인 사찰 창건 설화에서도 말이 자주 등장한다.


중국 낙양 백마사는 후안 명제가 인도에 파견한 채음과 진경 스님이 인도 고승 섭마등, 축법란과 함께 불경을 백마에 싣고 낙양에 돌아온 데서 유래했다.

백마사는 불교가 중국에 들어온 뒤 최초로 세워진 도량으로 ‘중국 제일 사찰’로 불린다. 1900년 역사를 지닌 백마사 입구 양쪽에는 송나라 때 조성한

두 마리의 백마상이 있다.


국내에선 법주사를 빼놓을 수 없다. 신라 진흥왕 14년(553년) 의신 스님이 절터를 찾아다니던 중 타고 다니던 흰 노새가 현재 법주사 터에 멈춰서 울부짖었다 한다. 이 흰 노새는 스님과 함께 천축국에서 불경을 싣고 왔다. 기이한 노새의 행동에 스님은 이곳에 절을 지었고 노새 등에 싣고 다니던 경전이

여기에 머물렀단 이유로 절 이름이 법주사(法住寺)가 됐다.


논산 불명산 쌍계사엔 일주문을 대신해 하마비(下馬碑)가 서 있다. 억불정책이 싹 트던 고려 말 쌍계사 스님 꿈속에 나타난 어느 대사는

“말 탄 사람이 절에 들어오면 화를 입는다”고 전했다. 조선이 개국을 알리고 척불이 진행되던 어느 날 밤, 말발굽 소리가 불명산을 뒤흔들었다.


스님들은 일심으로 목탁을 치며 독경했고, 그 소리가 말발굽 소리를 압도했다. 그러자 말들은 꼬꾸라졌고, 말 탄 사람들 역시 낙마해 목숨을 잃었다.

이런 일이 반복되자 쌍계사를 찾는 이들은 아무리 지체가 높아도 말을 타고 절에 들어가지 못했다.
하여 말이 죽은 곳에 하마비를 세우고 자신을 낮추는 마음을 잊지 말라고 경계했던 것이다. 일주문을 대신할 만 하다.     




1. 양

 

음식 유혹 못 견뎌…설법 듣고 업장 소멸


맛있는 음식의 유혹은 견디기 힘들다. 배가 주릴 때는 물론이고 음식 냄새나 빛깔에 취하면 절로 배가 고파진다. 배가 부른데도 눈과 코를 사로잡은

음식에 마음을 뺏기면 비만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일찍이 부처님은 양을 비유로 들어 무명에 사로잡혀 쉽게 유혹에 빠진 경솔한 행동을 경계했다.


‘본생경’은 풀에 묻은 꿀의 달콤함을 탐내다가 산지기에게 덜미를 잡힌 양 얘기를 전한다. 이를 본 왕은 ‘조심성 많은 양이 적은 양의 꿀 때문에 잡혔다’고 생각하며 맛에 집착하는 욕심이 가장 두렵다고 했다. ‘잡보장경’에서는 성실한 여종 몰래 보리 한 말을 먹어치운 숫양 얘기가 나온다.

여종은 틈만 나면 양을 회초리로 때렸고 양도 지지 않았다. 그냥 들이 받곤 했다. 어느 날 양은 여종이 회초리를 들지 않은 모습을 보자 그대로 뿔로

들이받았다. 기겁한 여종은 엉겁결에 손에 잡힌 불을 양에게 던졌다. 몸에 불이 붙자 양은 미친 듯이 사방으로 날뛰었다. 결국 산과 들로 불길이 번졌다.

산 속에 살던 원숭이들은 무슨 죄인가. 500마리 원숭이까지 여종과 양 싸움에 등 터지는 게 아니라 아예 타죽고 말았다.

여러 하늘이 이런 게송을 내렸다고 한다. “성내 서로 싸우는 그 사이에는 머물지 말라.”


기후 탓인지 우리나라에서는 거의 양을 사육하지 않았다. 때문에 한국불교에서 양이 등장하는 경우는 드물다. 불교미술이나 민화에는 염소 모습으로

주로 등장한다. 헌데 한 곳이 있다. 고불총림 백양사(白羊寺) 이름 유래에 양 설화가 얽혀 있다.


조선 선조 때 일이었다. 환양선사가 영천암에서 ‘금강경’을 설하는데 사람들이 구름같이 몰려 설법을 들었다. 법회가 3일째 되던 날 하얀 양이 내려와 설법을

들었고, 7일간 계속된 법회가 끝난 날 밤 스님 꿈에 흰 양이 나타났다. 양은 고백했다. 천상에서 죄를 짓고 축생 몸을 받았으나 설법을 듣고 업장을 소멸해

천상에 다시 환생해 가게 되었노라고. 이튿날 영천암 아래엔 흰 양 한 마리가 죽어있었고 이후 절 이름을 백양사라 고쳐 불렀다고 한다.
조금 다른 얘기도 전해진다. 백양사가 옛 이름인 정토사로 불리던 시절 팔원(八元) 스님은 약사암에서 늘 ‘법화경’을 독경했다. 어느 날 흰 양 한 마리가

나타나 독경 소리에 취한 듯 내내 무릎을 꿇고 앉아 있다 독경이 끝나면 조용히 사라졌다. 다음날부터 독경을 듣는 양의 숫자가 하나 둘 늘어가더니

흰 양 100마리가 무리지어 나타났다. 그래서 백양사라는 이름을 붙였고 팔원 스님은 양을 불러들였다 해서 환양(喚羊)선사라고 불렸다.


양 설화가 서린 백양사는 백제 무왕 33년(632년)에 여환조사가 창건한 고찰로 호남불교 요람이다. 조계종 제18교구 본사이며 5대 총림 중 한 곳이다.

이 백양사의 옛 이름은 백암사(白巖寺)였다. ‘암석이 모두 흰색이라 백암산이라 하였다’는 기록에 근거한 이름이다. 고려시대엔 정토사라 불렸다.

조선시대 기록은 백암사와 정토사를 혼재해 표기했다. 지금의 이름은 환양선사 다음 주지인 소요대사의 비명(碑銘)에 백양사라는 명칭이 쓰였고

이 시기부터 ‘백양사’라 했다고 한다.


양 꿈은 출세, 성공, 횡재 따위 행운을 암시하기도 한다. 고려말엽 이성계 장군이 양을 잡으려다 양 뿔과 꼬리가 떨어져 나가는 바람에 놀라 깼다.

불길한 예감에 정신적 스승으로 모시던 무학대사에게 꿈을 털어놨다. 대사는 ‘양(羊)’ 글자에서 뿔과 꼬리를 떼며 ‘왕(王)’자가 된다며 왕이 될 운명이라고 했다. 이성계는 군대를 이끌고 거사를 일으켜 조선을 건국했다. 건국 야사에 양이라니. 상서롭다는 뜻을 양(羊)자가 가질 만하다.

 

 

1. 원숭이(상)


불법 수호하며 죄 벌하는 무리의 우두머리

 

낮에도 밤에도 느낄 수 있는 눈과 귀가 있었다. 나쁜 짓을 하면 자신에게 들킨다고 경고했다. 인도로 불전을 구하러가는 현장 법사를 수행하는 무리 가운데

우두머리격인 원숭이가 그랬다.


손오공이라는 이 원숭이는 근두운 대신 스케이트보드를 타고 머리를 옥죄는 띠 대신 헬멧을 썼고 늘어나는 여의봉 대신 쌍절곤을 휘둘렀다.

머털도사가 머리카락을 뽑아 도술을 부리는 것처럼 털을 뽑아 신통력을 부렸고 약자를 도왔다. 명나라 때 오승은이 썼다는

‘서유기’를 각색한 ‘날아라 슈퍼보드’ 얘기다.


어째서 원숭이가 신통방통한 능력을 가졌을까. 두말 하면 입 아프다. 지혜롭고 총명하기 때문이다. 동작도 재빠르다. 나무 탈 땐 마치 나비처럼 가볍게 난다.

그래서 원숭이를 ‘잔나비’라고 부르기도 한다. ‘날쌔다’라는 뜻의 동사 ‘재다’와 ‘원숭이’라는 중세 우리말 ‘납’을 합친 말이다.


뿐만 아니라 용맹하기까지 한 동물이다. 그래서인지 불교에서는 부처님 전생이기도 했다.


500마리 원숭이들이 굶주림으로 고통 받을 때 원숭이왕은 임금 궁전으로 들어가 과일을 먹도록 명령했다. 이를 알아챈 임금이 노발대발 해 모두 죽이려 하자 원숭이 왕은 “원숭이들을 용서하고 대신 내가 아침상 반찬이 되겠다”고 했다. 임금은 “네 고귀한 보시정신은 히말라야산보다 더 높다”고

감탄하며 눈물을 흘렸다. ‘육도집경’ 얘기이며 500마리 원숭이는 부처님 제자 500비구라고 한다.


비슷한 설화도 있다. 화난 임금을 피해 달아나던 원숭이 무리가 강을 만나 안절부절 못할 때였다. 원숭이왕은 긴 팔로 강 건너 나뭇가지를 잡고 무리에게

자신을 밟고 강을 건너게 했다.


제 몸을 돌보지 않고 무리의 안전을 위해 희생하는 모습에 감화한 임금은 성으로 돌아와 백성을 평화롭게 다스렸다 한다. 효심도 만만치 않다.

사냥꾼이 쳐 놓은 그물을 찢자 무리가 포위망을 벗어났다. 그 때 새끼를 등에 업은 늙은 암컷 원숭이가 서두르다가 발을 헛디뎌 깊은 구덩이로 빠지고 말았다. 사냥꾼이 뒤쫓고 있음에도 원숭이 왕 어머니였던 암컷을 구하기 위해 왕은 꼬리를 늘여 어머니의 목숨을 건진다.


이와 같은 까닭에 불교 문화권에서는 원숭이가 자주 등장한다.  양산 통도사 벽화 ‘봉선군모천지우도’도 빼놓을 수 없다.‘서유기’ 이야기를 담고 있어서다.


이 벽화는 면류관을 쓴 인물이 의자에 앉아 있고 좌우에 무장을 한 인물들이 호위하고 있다. 기둥 뒤에는 3명의 인물이 커튼 뒤에서 무장들을 보고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한 인물은 면류관을 쓴 사람 앞에 무릎을 꿇고 있다. 벽화는 ‘서유기’ 87회를 묘사하고 있으며 이야기는 이렇다.


은무산 요괴를 물리치고 나무꾼을 구해준 현장 법사 일행이 천축 변방에 속한 봉선군에 당도했다. 그때 비를 내리게 할 수 있는 법사를 구한다는

방을 붙이는 이를 만났고, 봉선군이 몇 년 째 가뭄으로 고통 받고 있다는 얘기를 듣는다.


현장 일행은 손오공이 비를 내리게 할 수 있다며 관원을 만났고, 오공은 비를 내리고자 천궁에 올라갔다. 오공은 하늘에 바치는 제물을 뒤엎어

개에게 먹이고 거룩한 제삿날 입에 담지 못할 욕설을 퍼부어 옥황상제를 모독했다는 전후사정을 듣는다.

이에 오공은 옥황상제를 설득해 봉선군에 비가 내리게 한다. 무릎을 꿇은 인물이 바로 오공이다.


 

2. 원숭이(하)

 

‘왕의 동물’이던 원숭이…지계의 상징

 

                                                             대웅전 네 모서리 기둥 윗 부분에는 벌거벗은 여인상을 조각 하였다

                                                          전설에 의하면 절을 짓던 목수의 사랑을 배반하고 도망친 여인을 조각한 것으로

                                                             나쁜짓을 경고하고 죄를 씻게 하기위해 추녀를 받치게 하였다고 한다.

 


‘왕의 남자’란 영화는 1000만 관객을 극장으로 불러들였다. 정조와 광대 그리고 광대와 광대 사이 미묘한 감정의 흐름을 외줄타기 했던 ‘왕의 남자’는

개봉했던 그 해 그렇게 대박 났다.

 

‘왕의 동물’ 원숭이는 왕에게 백성을 섬기라는 충고를 톡톡히 했다. 거짓말이 아니다. ‘조선왕조실록’에 명백히 기록된 얘기다.

 

성조 8년(1477) 11월4일, ‘세조실록’과 ‘예종실록’을 편찬한 문신 손비장이 왕에게 아뢨다. “어제 사복시에서 흙집을 지어 원숭이를 기르자고 청하고,

또 옷을 줘 입히자고 청했는데, 신의 생각으로는 원숭이는 곧 상서롭지 못한 짐승이니 사람 옷을 입힐 수는 없습니다.”

일본에서 보내온 선물을 애지중지하던 성조가 원숭이에게 옷을 해 입히고 집을 마련하라 이르자 손비장이 나선 것이다. 손비장이 탐탁지 않았을 터.

그러나 손비장은 말을 끊지 않았다. “한 벌 옷이라면 한 사람 백성이 추위에 얼지 않도록 할 수 있습니다.

신은 진실로 전하께서 동물을 좋아하시지 않는 줄로 알고 있습니다.”


결국 성조는 손비장의 청을 거절하지 못했다고 전한다. 기록대로 유추하자면 손비장 공이다.

그러나 왕은 조선 백성들 시름을 한 번 더 깊이 생각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계를 지키지 않는 수행자를 경책하는 일도 원숭이 몫(?)이다.

 

‘백유경’에 실린 콩 얘기는 지계의 중요성을 설하고 있다. 옛날 원숭이 한 마리가 콩 한 줌을 가지고 있다 한 알을 땅에 떨어뜨렸다.

원숭이는 손에 쥐었던 콩을 다 버리고 땅에 떨어진 한 알을 찾으려 했으나 찾지 못했고, 나머지 콩은 닭과 오리가 모두 먹어 치워버렸다.

‘백유경’은 이렇게 경계한다. 출가자도 원숭이와 같아 처음에는 한 가지 계율을 훼손해도 후회하지 않기 때문에 방일(放逸)은 더욱 늘어나 계를

모두 버리게 된다고.


원숭이는 절절한 신심도 갖췄다. 사람들이 부처님에게 공양 올리는 모습을 본 뒷산 500마리 원숭이들은 연못 속 달을 공양키로 했다.

나무 위로 올라간 원숭이는 서로 팔을 이어 달을 건지려 했으나 그럴 때마다 달은 일그러지고 사라졌다. 다시 건지고 건졌지만 달은 일그러지고 사라졌다.

그러다 힘을 다한 원숭이는 모두 연못에 빠져 죽었다. 그러나 갸륵한 마음 덕분에 뒷날 500 아라한이 됐다.


인욕도 만만치 않다. 부처님 전생 설화 가운데 ‘육도집경’ 원숭이 왕 이야기를 되새김질해보자. 원숭이는 깊은 구덩이에 빠져 며칠을 굶은 사냥꾼을 등에

업고 땅위로 올라왔다. 하지만 사냥꾼은 원숭이 뒤통수를 돌로 내리친 뒤 주린 배를 채웠다. 그럼에도 원숭이는 악한 마음을 품은 사냥꾼을 도리어

불쌍히 여기며 ‘지금 내 힘으로 제도할 수 없는 사람은 미래세에 부처가 되어서라도 반드시 제도하리라’고 서원했다.

사냥꾼의 배신에도 기필코 그를 제도하겠다는 원숭이의 서원은 인욕에 다름 아니다.


여럿 사찰에서는 문이나 대웅전에 눈과 귀와 입을 가린 원숭이 조각이 있다. 나쁜 것은 보지 말고, 음란한 소리는 듣지 말고, 오만한 말은 하지 말라는 뜻이다.

 

이밖에도 사찰 구석구석 원숭이는 숨어있다. 법주사 팔상전 추녀 밑에는 원숭이 상이 있고 대웅전 계단 양쪽에도 화강암으로 된 나한상이 있다.

강화 전등사 나녀상(裸女像)이 법주사 팔상전 원숭이와 비슷하다. 여기엔 두 가지 얘기가 전해진다. 고구려 소수림왕 11년,

언제 끝날지 모르는 공사에 지친 일꾼들에게 원숭이 4마리가 술을 가져다 줬고, 이 술을 자양강장제 삼은 일꾼들은 공사를 무사히 회향했다고 한다.

이를 감사히 여긴 아도대사가 원숭이 공덕을 기리기 위해 법당 네 귀퉁이에 원숭이 형상을 조각하게 했다고.

 

불같은 사랑과 배신이 얽혀 있기도 하다. 전소된 전등사 대웅전을 복원을 맡은 목수는 아랫마을 주모와 통하였다.

노임까지 그녀에게 맡겼으나 돈에 눈 먼 주모는 불사가 끝날 무렵 줄행랑을 놨다. 상심한 목수는 대웅전 바깥 처마 들보 사이에

벌거벗은 여인을 조각해 평생 업보의 무게에 짓눌리게 했단다.


본의 아니게 벌거벗겨진 원숭이(?)는 천년 넘는 세월동안 염불소리를 듣고 목탁소리를 들었으니, 부처로 나투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