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품 템플스테이와 부처님이야기

축생전 이야기 = 거북, 물고기, 사자, 뱀, 말, 양

백련암 2012. 3. 9. 12:16

1. 거북

 

대조사 거북이


단단한 등껍질로 탐욕 막는 무장

 

삶 자체가 수륙양생이다. 단단한 등껍질은 어디서나 눈에 띄었다. 주술가들이 예부터 눈여겨봤던 이유다.

등껍질을 태워 갈라지는 모양으로 점을 쳐 하늘 뜻을 전해왔다고 한다. ‘귀복(龜卜)’이다.  여기서 ‘구복’과 ‘거붑’을 거쳐 ‘거북’이 탄생한 것이다.


중국에서 거북은 용과 봉황, 기린과 함께 4가지 영물 중 하나로 숭배됐다. 4가지 방위 중 북쪽을 지키는 수호신 ‘현무’가 바로 거북이다.

중국 남쪽 장강 중류 지방에 있던 초나라의 가사 ‘초사’ 연유편에는 현무를 설명하는 기록이 전한다.

“암수가 한 몸이고 거북과 뱀이 모인 것을 이른다. 북방에 위치하므로 현(玄)이라 하고 몸에 비늘과 두꺼운 껍질이 있으므로 무(武)라고 한다.”


사찰 곳곳엔 거북이 숨어 있다. 큰스님 부도비를 떠받들고 수미단, 법당 지붕을 받드는 기둥에서 벽화 속에 심심치 않게 보인다.

사찰 이름을 바꾼 거북도 있다. 강원도 원주 치악산 구룡사는 유난히 곡절이 많았다. 조선시대 치악산 나물은 대부분 궁중에 납품됐는데,

구룡사 주지스님이 공납 책임자였다. 인근 사람들은 나물 값을 제대로 받기 위해 로비를 하기도 했다. 하여 구룡사는 물질은 10점 만점에 10점이었으나

수행도량으로서는 빵점이었다. 이 때 한 스님이 절 입구 거북바위 때문에 몰락한다며 바위를 쪼개라고 충고했다.

이에 바위를 쪼갰지만 구룡사는 더욱 더 쇠락해갔다. 이번엔 다른 스님이 나타나 절 입구를 지키는 거북바위를 없앴기에 망했다고 했다.

주지스님이 당황하자 “거북을 살리시오”라고 답했다. 주지스님은 방도를 물었고 절 이름에서 ‘아홉 구(九)’를 빼고 ‘거북 구(龜)’를 넣으라했단다.


거북은 위기에 처할 때면 얼굴과 손, 발을 등껍질에 감춘다. 등껍질로 외부 공격을 막아내기 위해서다.

때문에 현무에서 ‘단단할 무(武)’자가 쓰였다. 중국과 한국에서 타고난 무장으로 비유되는 연유도 여기 있다.

부처님은 이런 특징을 설법에도 사용했다. ‘중아함경’엔 굶주렸던 자칼을 피해 머리와 꼬리, 다리 모두를 껍질 속에 숨겼던 거북 얘기가 나온다.

부처님은 머리와 꼬리, 네 다리를 안이비설신의 육근에 빗대 수행자들을 경책했다. “색, 소리, 냄새, 맛, 감촉, 생각에 집착해 눈, 귀, 코, 혀, 몸, 뜻을

밖으로 드러내려 하지 말라.  설사 육근이 나온다 하더라도 자칼이 거북을 어찌할 수 없듯 다스려야 한다.”


육근으로 인해 색, 소리, 냄새, 맛, 감촉, 생각에 집착하는 순간 번뇌라는 그물에 걸리니, 거북처럼 단단한 수행 껍질로 이를 물리치라는 설법인 게다.

부처님 전생담 ‘자타카’에도 비슷한 얘기가 전한다. 고향을 향한 애착을 버리지 못한 거북이 삽에 찍혀 죽는다는 얘기로 집착을 버리라는 교훈을 남기고 있다.


윤회 사슬을 끊고자 치열하게 정진 중인 눈 푸른 납자의 가행을 독려하는 데도 거북이 등장한다. 맹귀우목(盲龜遇木)이다.

눈 먼 거북이 숨구멍 난 나무판자를 만나 구멍으로 머리를 들이밀 확률이다.

목숨 줄 구할 중대한 인연이다. 눈 먼 거북이 숨구멍으로 들어가기 위해 머리를 내밀 듯 납자들도 끊임없이 탐욕 바다 밖을 향해야 한다.

지치고 끝이 없어 보여도 언젠간 반드시 생사 고리를 잘라내는 경지에 이를 수 있다는 채찍이다.


눈 먼 거북이 부산 범어사 금어선원 문빗장에 떡 앉은 이유다.

금어선원 문빗장이 열리는 순간, 눈 푸른 납자들은 고해와 탐욕 바다에서 숨구멍 뚫린 나무판자를 만나는 것이리라.


부지런히 물 속 손과 발을 저어 고해 밖으로 머리를 내놓아야 할 일이다.


 

1. 물고기


 

24시간 눈 뜨고 수행자 정진 경책

 

 비울수록 목소린 청아하다. 배불러도 두 눈 번뜩인다. 잠 잘 때도 눈 감지 않는다. 배고프면 기운 빠지고 배부르면 눈 감기는 우리네 모습과 사뭇 다르다.

그래서 전통가구 쾌, 반닫이, 뒤주 자물통 모양으로 인기다. 눈 감지 않는 보물 감시자 물고기다.


물고기는 절 이름에 들어가기도 한다. ‘삼국유사’ 제4권 제5 의해편엔 이런 얘기가 전한다.

어느 날 혜공 스님과 원효 스님이 시내를 따라가며 물고기와 새우를 잡아먹고 돌 위에 큰일(?)을 봤다.

혜공 스님이 장난쳤다.  “원효 스님이 눈 똥은 내가 잡은 물고기일 거요.”   좀 각색하면 더 흥미롭다. 두 스님이 법력 내기를 했다.

산채로 물고기를 삼켜 큰일을 본 뒤 살아있는 물고기가 나오면 이기는 내기였다.

물고기 두 마리가 나왔는데 한 마리는 물을 거슬러 올라가고 한 마리는 죽어 나왔다. 올라가는 물고기를 보고 서로 자기 고기라고 했단다.

포항 오어사(吾魚寺) 설화다.


물 속 생명이지만 뭍 위에서도 산다. 사찰 종각마다 여의주 물고 눈을 부라리고 있다. 목어다.

사찰에서는 나무로 만든 긴 물고기 모양인 목어를 걸어 두고 두드린다.

범종과 법고 그리고 운판과 더불어 불교사물이다. 목어는 중국에서 유래했는데 가슴에 새길만한 전설이 있다.


덕 높은 스님 제자 가운데 유독 한 명만 제멋대로 생활했다. 계율에 어긋나는 속된 행동도 주저하지 않았다.

결국 몹쓸 병에 걸려 일찍 죽은 그 스님은 등에 나무 단 물고기 과보를 받았다. 헤엄은 힘들었고, 풍랑이라도 만날라치면 나무가 흔들려

피 흘리는 고통이 뒤따랐다. 어느 날, 스승이 배를 타고 강을 건널 때였다. 큰 나무가 등에 매달린 물고기가 뱃전에 머리를 대고 슬피 울었다.

스승은 깊은 선정으로 방탕한 생활 탓에 일찍 생을 마감했던 제자가 그 물고기란 사실을 알았다.

가여운 제자를 위해 수륙재를 베풀고 물고기 몸을 벗게 도왔다. 그날 밤, 스승 꿈에 제자가 나타났다.

제자는 감사와 함께 서원을 밝혔다. “다음 생에는 열심히 정진하겠습니다.

부디 제 등에 난 나무를 베어 저와 같이 생긴 물고기를 만들어 나무막대로 쳐주세요. 제 이야기를 수행자들에게 교훈으로 들려주십시오.”

광주 무등산 문빈정사 법당 입구엔 이 이야기를 그린 벽화가 있다.


‘백장청규’는 물고기가 종각에 걸려 있는 이유를 잘 설명해준다. “물고기는 밤낮으로 눈 감지 않으므로 수행자로 하여금 자지 않고 도를 닦으라는 뜻으로

목어를 만들었다. 수행자의 잠을 쫓고 혼침(惛沈)을 경책한다.”


자세히 살펴보면 목어는 용머리를 하고 있다. 게다가 여의주를 문다. 물고기가 여의주라니! 여기엔 물고기가 변해 용이 된다는 뜻이 담겨있다.

물고기란 중생이 깨달은 중생인 용, 즉 보살이 되는 것을 말한다. 여의주는 말 그대로 보물인데 대자유나 견성을 상징한다.

목어를 두드려 나는 법음은 수행정진으로 보살이 되라는 경책인 셈이다.
목어가 변형돼 생긴 목탁도 물고기 모양이다. 다만 둥근 형태일 따름이다. 손잡이가 있는 우리나라 목탁은 꼭 손이 필요하다.

왼손엔 목탁, 오른손은 목탁 채를 쥔다. 왼쪽은 변하지 않는 체(體)를 뜻하며, 오른쪽은 움직이는 용(用)을 상징한다.

이 둘의 마주침으로부터 생기는 목탁소리는 바로 체와 용이 둘이 아닌 하나가 되는 순간의 법음이다.


목어나 목탁은 속 빈 물고기다. 몸속 오장육부를 다 긁어내 비운다. 그래야 청아한 소리가 난다.

마음속 오만가지 번뇌와 분심, 탐심을 다 긁어내야 우리네 불성도 비로소 소리낼 수 있으리라.

 

 

1. 사자


화엄사 원통전 사자탑(보물 300호)

 

“흡사 가정에서 기르는 금빛 털을 지닌 삽살개처럼 생겼다. 여러 짐승이 이를 보면 무서워 엎드리고, 감히 쳐다보지도 못한다. 기가 질리기 때문이다.”


박지원(1737~1805)이 ‘열하일기’에서 표현한 사자의 위용이다. 옛 사람들도 사자를 무릇 짐승의 왕이라 일컬었다.

절대적인 힘과 위엄을 갖춘 동물로 생각한 게다. 사실 사자가 언제 우리나라에 들어왔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울릉도와 사자’ 얘기가 ‘삼국사기’에 있어 삼국시대로 추정할 뿐이다.


원래 사자 명칭은 산예(猊)라고 한다. 사자 ‘산()’자에 사자 ‘예(猊)’자를 쓴다. 한자 ‘예(猊)’가 부처가 앉는 자리나 고승이 앉는 자리란 의미가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불교국가 스리랑카 이름이 사자국(獅子國)인데 ‘사자’란 명칭이 예서 왔단다.


여하튼 사자는 불교에서 불법을 수호하는 영물이다. 두려움이 없고 모든 동물을 능히 다스리는 용맹함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아쇼카왕 석주 사자상으로 시작해 불교 건축물엔 사자상이 자주 등장한다.


탑이나 향로에 사자 조각이 많은 이유도 사자의 용맹함 때문이다. 사자는 부처님 광명을 상징하는 석등에 빠질 수 없다.

진리의 빛을 밝히는 석등을 수호신이 지키지 않으면 누가 호법신장이 될 것인가.

속리산 법주사 쌍사자석등(국제 5호)이 유명한 까닭이다. 법주사 석등은 두 마리 사자가 석등을 받들고 서 있다.  빛을 소중히 모신다는 뜻일 터다.


법주사 석등에서 눈여겨 볼 부분은 따로 있다. 사자 한 마리는 입을 벌려 ‘아’ 소리를 내고 나머지는 입 다물며 ‘훔’ 소리를 내고 있다.

둘을 합치면 영원과 완성, 성취를 뜻하는 ‘옴’이 된다. 분황사 석전탑(국보 30호) 동서남북은 돌사자가 지킨다.

탑은 사리나 불교 유물을 소장하고 있어 그 자체가 불법이다. 수없는 번뇌와 망상인 사악한 무리에게 빈틈 하나 보이지 않겠단 의지가 결연할 수밖에 없다.


법주사 석등 외에도 다보탑 사자상, 범어사 대웅전 돌계단 석사자(보물 434호), 화엄사 4사자 삼층석탑(국보 35호), 화암사지 쌍사자 석등(보물 389호),

화엄사 원통전 사자탑(보물 300호), 영암사지 쌍사자 석등(보물 353호) 등 사찰 곳곳에 사자가 위용을 드러내고 있다.
흔히 선지식들이 설하는 법을 사자후(獅子吼)라고 칭한다. 사자후는 부처님 목소리다. ‘유마경’엔 “석가모니 설법 위엄은 마치 사자가 부르짖는 것과 같다”고 했다. 부처님 설법을 비유하는 말인데 짐승들이 사자 울부짖음 앞에서는 꼼짝 못하듯 부처님 설법의 위력이 대단하다는 표현이다.

사자의 일갈에 온 동물들이 벌벌 떨며 굴복하는 모습을 빗댄 말이다. 그만큼 부처님이 설파한 진리의 힘을 강조했다.

부처님은 사람 가운데 가장 뛰어난 이를 뜻하는 인중사자(人中獅子)라고 비유되기도 한다.


불자들에게 사자는 지혜의 상징 문수보살을 모시는 상징물로 더 친근하다.

사찰 어느 곳에서든 사자 위에 앉거나 사자가 끄는 수레를 타고 있는 문수보살을 볼 수 있다.

이 때 사자는 보살을 모시는 동시에 악귀를 물리치는 용감한 수호신이다. 때문에 ‘불도(佛道)의 개’로도 심심찮게 불린다.


황해 북도 봉산군에서 전해졌던 봉산탈춤도 문수보살과 관계가 있다고 한다.

5번째 마당에서 나오는 사자가 부처님 명을 받고 등장해 노스님을 타락시킨 스님을 혼내준단다.

조선시대에 이르러 불교 위세가 위축되면서 봉산탈춤 사자가 불법 수호가 아니라 타락 응징으로 상징이 바뀌었다.



1. 뱀



애욕 업장으로 윤회 거듭한 다산의 상징


다소 뚱뚱한 체형을 가진 개그우먼이 캐릭터 ‘출산드라’를 연기하며 다산의 상징이라 말하던 시절이 있었다.

“자연분만, 모유수유”와 “날씬한 것들은 가라”고 외치며 S라인 몸매에 열광하던 사회를 풍자해 높은 인기를 얻었다.

 

매끈한 몸을 자랑하고 여러 개 알을 낳는 뱀도 다산과 풍요의 상징이다. 허나 갈라진 혀와 독, 차가운 몸 그리고 징그러운 모습이 신과 사람들에게 부정적인

이미지를 심어준 탓일까. 뱀은 애욕과 복수 화신이나 한 서린 동물로 비유되곤 한다.

‘용재총화’엔 스님이 죽어 뱀으로 환생한 설화가 있다. 진광사 스님이 시골여인을 아내로 삼고  밤이면 몰래 출입하다 죽었는데 아내를 잊지 못했다.

낮에는 독 속에 숨어 지내다 밤마다 아내와 동침했다. 결국 궤짝에 담겨 물에 떠다니는 신세가 됐다고 한다.


춘천 청평사 공주탑엔 청춘남녀의 진득한 사랑이 화를 부른 얘기가 서렸다. 중국 공주를 짝사랑하던 청년에게 공주가 마음을 열자 왕은 천한 그를 죽였다.

그는 “죽어도 못 보내”를 부르짖었다. 뱀으로 윤회한 그는 공주 몸을 칭칭 감고 가는 곳마다 따라 다녔다. 공주는 어긋난 사랑이 애욕으로 번지자 점점

야위어 갔고, 마침내 도 높은 스님이 있다는 청평사를 찾기에 이르렀다.

뱀에게 “밥을 얻어오겠다”고 한 뒤 공주는 잠깐 자유를 얻었다. 때마침 가사불사 법회 중이었고 공주는 몸을 깨끗이 씻고 가사를 꿰맨 다음 법당에서 염불했다. 기다림에 지친 뱀은 몸을 배배 꼬다 기어코 공주를 찾아 나섰다. 구성폭포에 이르러 공주를 발견한 뱀은 환희에 젖어 갈라진 혀를 낼름거리며 몸을 날렸다.

아뿔싸. 폭포 아래 공주는 물에 비친 형상이었다. 물속에 뛰어든 뱀은 생을 달리했고 시신을 거둔 공주는 구성폭포 위에 삼층석탑을 세웠다.


짜증 한 번 냈다가 축생계로 떨어진 수행자도 있다. 금강산 유점사 산내 암자에 법호가 홍도(弘度)라는 스님은 승속을 떠나 생불로 불릴 정도로 덕이

수승했다고 한다. 하루는 스님이 밖에서 경행을 했다. 그런데 갑자기 회오리바람이 불어 먼지가 스님을 덮쳤다.

스님은 “뭔 놈의 바람이 이렇게 먼지를 일으키는가”라며 제대로 짜증을 냈다.


꿈 속 노인이 스님을 꾸짖었고 놀라 일어나려던 스님은 몸이 구렁이로 변한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마침 아침 공양을 준비하고 기다리던

대중이 스님을 찾았지만 스님 처소에선 똬리 튼 구렁이만 발견했다. 갈지자로 쓸쓸히 공양간으로 향한 구렁이는 꼬리에 물을 묻히고

다시 재를 묻혀 벽에 이런 글을 남겼다. “일기진심 수사보(一起嗔心 受蛇報).” 한 번 성내면 뱀의 업보를 받는다는 절절한 가르침이었다.


‘뱀절’이라 불리는 백제시대 사찰 비암사는 차라리 한(恨) 그 자체다. 사중 스님이 며칠째 밤 깊도록 탑돌이를 하다 해가 솟으면 사라지는 청년의 뒤를 몰래

밟았다. 청년이 뒷산 숲속 굴속으로 자취를 감추자 스님은 조심스럽게 안을 들여다봤다. 청년은 오간 곳 없고 구렁이 한 마리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사연인 즉 100일 동안 들키지 않고 탑을 돌면 구렁이 몸을 벗고 사람이 될 수 있었는데 99일째 스님에게 들통 난 것이다.

스님은 영영 사람이 되지 못하는 구렁이를 평생 돌보며 살았고 실제 비암사 동쪽 산꼭대기엔 구렁이굴이 있다고 한다.


뱀의 비운은 지금도 윤회를 거듭하고 있다. ‘출산드라’는 어떻게 표현했을까.

 “오늘의 말씀. 그 분은, 지혜의 신이자 장애물 제거 신 가네샤에 몸을 감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지금 몸에 좋은 보신약재란 이유로 펄펄 끓는 솥에 온몸을 던지셨으며, 때론 술로 우리 인간들에게 건강을 약속하시고 정력강장제로

다시 태어나셨던 것이었습니다.”


1. 말


분노에 치를 떠는 관음세음보살 화신


▲제주도 섭지코지에서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는 말가족...

관세음보살은 자비 화신이다. 분노는 가당치도 않다. 헌데 분노에 치를 떠는 관세음보살 화신이 있다. 제도하기 어려운 중생의 번뇌를 부수기 위해

분노 띤 얼굴을 하고 있다. 말 머리를 한 관세음보살이다. 다른 이름은 마두관음(馬頭觀音)이다.


관음보살은 천(天), 아수라(阿修羅), 인간(人間), 축생(畜生), 아귀(餓鬼), 지옥(地獄) 등 6도를 돌며 중생을 교화한다.

6도에서 중생을 제도할 때 관음보살은 성관음, 천수관음, 십일면관음, 여의륜관음 등으로 현신한다. 보살이 마두관음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곳은 축생도이다.

마두관음은 사람 몸에 말 머리를 하고 한 손엔 창을 들고 있다. 분노하고 있는 표정 때문인지 불법을 수호하는 명왕의 하나로 마두명왕, 대력지명왕,

분노지명왕으로도 불린다. 명왕이란 일체 중생을 교화하려는 부처님 뜻을 받들어 수행하는 지혜 광명, 즉 진언의 주인이다.


인도 신 가네샤는 아버지 시바의 잘못으로 코끼리 머리를 붙였다. 그런데 마두관음이 말 머리를 하고 있는 이유는 뭘까. 전륜왕의 보배 같은 말에

유래한다고한다.  사방을 내달리면서 위신력으로 마귀를 굴복시키는 것과 같이 두터운 무명 업장을 녹이기 위해서다.

마두관음은 험악하고 커다란 입으로 무명 업장을 먹는다고도 한단다.

축생계를 교화하는 마두관음과 달리 말은 전법 수레 역할로도 불교와 인연을 맺는다. 출가를 결심한 싯다르타가 성을 빠져 나올 때도 말은 묵묵히

그를 태웠다. 아들 라훌라가 태어나고 새 왕자의 탄생을 축하하며 밤낮으로 이어진 7일 잔치가 끝난 뒤였다.

달이 서쪽으로 기울 무렵, 태자 싯다르타는 자리에서 일어나 깊은 잠에 든 아내 아쇼다라와 아들 라훌라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이별 인사를 대신했다.

발길을 돌려 마부 찬나 방으로 향한 싯다르타는 칸타카에 안장을 얹으라고 말했다. 싯다르타는 자신을 태우던 말 칸타카를 타고 카필라성을 나서

깨달음의 길로 발을 내디딘 셈이다. 그래서인지 법을 펼치는 도량인 사찰 창건 설화에서도 말이 자주 등장한다.


중국 낙양 백마사는 후안 명제가 인도에 파견한 채음과 진경 스님이 인도 고승 섭마등, 축법란과 함께 불경을 백마에 싣고 낙양에 돌아온 데서 유래했다.

백마사는 불교가 중국에 들어온 뒤 최초로 세워진 도량으로 ‘중국 제일 사찰’로 불린다. 1900년 역사를 지닌 백마사 입구 양쪽에는 송나라 때 조성한

두 마리의 백마상이 있다.


국내에선 법주사를 빼놓을 수 없다. 신라 진흥왕 14년(553년) 의신 스님이 절터를 찾아다니던 중 타고 다니던 흰 노새가 현재 법주사 터에 멈춰서 울부짖었다 한다. 이 흰 노새는 스님과 함께 천축국에서 불경을 싣고 왔다. 기이한 노새의 행동에 스님은 이곳에 절을 지었고 노새 등에 싣고 다니던 경전이 여기에 머물렀단 이유로 절 이름이 법주사(法住寺)가 됐다.


논산 불명산 쌍계사엔 일주문을 대신해 하마비(下馬碑)가 서 있다. 억불정책이 싹 트던 고려 말 쌍계사 스님 꿈속에 나타난 어느 대사는 “말 탄 사람이 절에 들어오면 화를 입는다”고 전했다. 조선이 개국을 알리고 척불이 진행되던 어느 날 밤, 말발굽 소리가 불명산을 뒤흔들었다.

스님들은 일심으로 목탁을 치며 독경했고, 그 소리가 말발굽 소리를 압도했다. 그러자 말들은 꼬꾸라졌고, 말 탄 사람들 역시 낙마해 목숨을 잃었다.

이런 일이 반복되자 쌍계사를 찾는 이들은 아무리 지체가 높아도 말을 타고 절에 들어가지 못했다.

하여 말이 죽은 곳에 하마비를 세우고 자신을 낮추는 마음을 잊지 말라고 경계했던 것이다. 일주문을 대신할 만 하다.



1. 양


돈암동 흥천사 양


음식 유혹 못 견뎌…설법 듣고 업장 소멸

맛있는 음식의 유혹은 견디기 힘들다. 배가 주릴 때는 물론이고 음식 냄새나 빛깔에 취하면 절로 배가 고파진다. 배가 부른데도 눈과 코를 사로잡은

음식에 마음을 뺏기면 비만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일찍이 부처님은 양을 비유로 들어 무명에 사로잡혀 쉽게 유혹에 빠진 경솔한 행동을 경계했다.


‘본생경’은 풀에 묻은 꿀의 달콤함을 탐내다가 산지기에게 덜미를 잡힌 양 얘기를 전한다. 이를 본 왕은 ‘조심성 많은 양이 적은 양의 꿀 때문에 잡혔다’고

생각하며 맛에 집착하는 욕심이 가장 두렵다고 했다. ‘잡보장경’에서는 성실한 여종 몰래 보리 한 말을 먹어치운 숫양 얘기가 나온다.

여종은 틈만 나면 양을 회초리로 때렸고 양도 지지 않았다. 그냥 들이 받곤 했다. 어느 날 양은 여종이 회초리를 들지 않은 모습을 보자 그대로 뿔로

들이받았다. 기겁한 여종은 엉겁결에 손에 잡힌 불을 양에게 던졌다. 몸에 불이 붙자 양은 미친 듯이 사방으로 날뛰었다. 결국 산과 들로 불길이 번졌다.

산 속에 살던 원숭이들은 무슨 죄인가. 500마리 원숭이까지 여종과 양 싸움에 등 터지는 게 아니라 아예 타죽고 말았다.

여러 하늘이 이런 게송을 내렸다고 한다. “성내 서로 싸우는 그 사이에는 머물지 말라.”


기후 탓인지 우리나라에서는 거의 양을 사육하지 않았다. 때문에 한국불교에서 양이 등장하는 경우는 드물다. 불교미술이나 민화에는 염소 모습으로

주로 등장한다. 헌데 한 곳이 있다. 고불총림 백양사(白羊寺) 이름 유래에 양 설화가 얽혀 있다.


조선 선조 때 일이었다. 환양선사가 영천암에서 ‘금강경’을 설하는데 사람들이 구름같이 몰려 설법을 들었다. 법회가 3일째 되던 날 하얀 양이 내려와 설법을

들었고, 7일간 계속된 법회가 끝난 날 밤 스님 꿈에 흰 양이 나타났다. 양은 고백했다. 천상에서 죄를 짓고 축생 몸을 받았으나 설법을 듣고 업장을 소멸해

천상에 다시 환생해 가게 되었노라고. 이튿날 영천암 아래엔 흰 양 한 마리가 죽어있었고 이후 절 이름을 백양사라 고쳐 불렀다고 한다.

조금 다른 얘기도 전해진다. 백양사가 옛 이름인 정토사로 불리던 시절 팔원(八元) 스님은 약사암에서 늘 ‘법화경’을 독경했다. 어느 날 흰 양 한 마리가.

나타나 독경 소리에 취한 듯 내내 무릎을 꿇고 앉아 있다 독경이 끝나면 조용히 사라졌다. 다음날부터 독경을 듣는 양의 숫자가 하나 둘 늘어가더니

흰 양 100마리가 무리지어 나타났다. 그래서 백양사라는 이름을 붙였고 팔원 스님은 양을 불러들였다 해서 환양(喚羊)선사라고 불렸다.


양 설화가 서린 백양사는 백제 무왕 33년(632년)에 여환조사가 창건한 고찰로 호남불교 요람이다. 조계종 제18교구 본사이며 5대 총림 중 한 곳이다.

이 백양사의 옛 이름은 백암사(白巖寺)였다. ‘암석이 모두 흰색이라 백암산이라 하였다’는 기록에 근거한 이름이다. 고려시대엔 정토사라 불렸다.

조선시대 기록은 백암사와 정토사를 혼재해 표기했다. 지금의 이름은 환양선사 다음 주지인 소요대사의 비명(碑銘)에 백양사라는 명칭이 쓰였고,

이 시기부터 ‘백양사’라 했다고 한다.

양 꿈은 출세, 성공, 횡재 따위 행운을 암시하기도 한다. 고려말엽 이성계 장군이 양을 잡으려다 양 뿔과 꼬리가 떨어져 나가는 바람에 놀라 깼다.

불길한 예감에 정신적 스승으로 모시던 무학대사에게 꿈을 털어놨다. 대사는 ‘양(羊)’ 글자에서 뿔과 꼬리를 떼며 ‘왕(王)’자가 된다며 왕이 될 운명이라고

했다.  이성계는 군대를 이끌고 거사를 일으켜 조선을 건국했다. 건국 야사에 양이라니. 상서롭다는 뜻을 양(羊)자가 가질 만하다.

 

최호승 기자 time@beop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