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품 템플스테이와 부처님이야기

축생전 = 공작새, 비둘기, 공명조, 비익조

백련암 2012. 5. 14. 01:49

1. 공작새

 

각종 재앙이나 질병 물리치는 보살

 

초파일 전야제 축제 <제등행렬 중..>

 

 

“그대 앞에만 서면 나는 왜 작아지는가.” 한 시대를 풍미한 김수희의 ‘애모’다. 사랑하는 사람 앞에선 한 없이 작아지고 침묵하며

눈물 흘리는 심정을 노래했다. 여기 사랑 아닌 살 떨리는 침묵도 있다. 역시 그대 앞에만 서면 작아진다. 왜일까. 천적이다.

그대 앞에선 꼼짝없이 죽은 목숨이기 때문이다. 맹독 품은 뱀도 공작새 앞에선 먹잇감일 뿐이다.


공작새가 인도에선 흔한 동물이라는 사실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인도 산치에 남아 있는 대탑이나 불교 미술품에 공작 문양들이 많다.

산치 제1탑 북문에도 공작새 부조가 있다. 인도 신화에서는 뱀 잡아먹는 새로 가장 강력한 위력을 지닌 가루다의 깃털 하나가 공작새가

됐다고도 한다. 독사가 많은 아열대 기후인 인도 풍토에선 독사를 먹어치우는 공작새가 감사했을 터다.


‘공작왕주경’이나 ‘불모대공작명왕경’, ‘불설공작경’, ‘불설대공작주왕경’, ‘불설대공작명왕화상단장의궤’ 등 이렇게 많았나 싶을 정도로

다수 경전 이름에 공작이 들어간다.


공작새는 공작명왕으로 불교에 등장하는데 독사 잡아먹는 공작새가 모토다. 불모대공작명왕보살이라고도 한다.

기원이 오랜 밀교인 잡밀(雜密)에서 말하는 불존(佛尊)이다. 명왕이지만 분노형은 아니다. 공작명왕 대다라니를 수지독송하면 독사

맹독이나 재앙, 질병을 쫓아버릴 수 있다고 한다.

 

이런 얘기가 전한다.

한 스님이 나무를 하다 뱀에게 엄지발가락을 물려 고통 받고 있을 때 부처님이 ‘불모공작명왕대다라니’ 설법을 했다고 한다.

다라니가 독은 물론 모든 병을 낫게 했단다. 한국불교 대표 밀교종단 진각종은 매년 부처님오신날 제등행렬에 불 뿜는 공작등으로

이목을 집중시키곤 한다.


수컷 공작새의 화려한 꽁지깃 유래도 흥미롭다. 부처님이 설법을 시작하자 중생들이 앞 다퉈 주변으로 몰렸다.

공작새는 부처님 근처로 갈 엄두를 못 냈다. 기연을 놓칠까 안타까워하는 마음을 안 부처님은 한 줄기의 불광(佛光)을 내보냈고,

불광은 공작새 꼬리에 떨어졌다. 그 때부터 공작새 꼬리는 지금처럼 아름다워졌다고 한다.


계속 새롭게 자라는 꽁지깃은 영생의 상징이 되기도 했다. 꽁지깃에 총총히 박힌 반점이 하늘의 별과 같아 힌두교 최고신 브라마가

타고 다닌다. 불교에선 꽁지깃 반점이 항상 뜨고 있는 눈 같아 천수천안 관세음보살의 천개 눈을 상징하기도 한다.


국내엔 강원도 홍천에 공작산이 있다. 풍수지리학적으로는 공작이 알을 낳는 형세다. 이곳에 수타사가 자리하고 있다.

수타사 본사 건봉사의 ‘건봉사 및 건봉사 말사서적’의 수타사 앞 뒤 풍광묘사로 공작산 이름을 추론하기도 한다.

‘한 마리 용이 설악산에서 날아오고, 여섯 마리 거북이 이 곳 신령스러운 구역을 머리에 이고서 떠받드는, 구슬항아리 속에 하늘이 열리

는 곳’이란 글귀 뒤 ‘파랑새 다투어 재잘거리며 주작이 서로 날은 곳, 동서 앞뒤에 절이라곤 없는 터전’이라 했다.

파랑새를 공작새로 보는 게다.


공작명왕은 게임이나 만화, 영화의 소재가 되기도 했다. 일본 작가 오기노 마코토의 ‘공작왕’은 일본식 퇴마물이다.

홍콩영화 ‘공작왕’과 극장판 애니메이션으로도 제작됐다. 공작왕 화신으로 태어난 밀교 퇴마사 공작이 세상을 지배하려는 악령에

대항하는 활약상이 담겼다.


‘육도집경’엔 목숨이 위태로운 이유로 색을 탐하는 마음을 들며 세 가지 어리석음을 설하는 공작왕 얘기가 전한다.  

인류의 큰 재앙이 탐심은 아닐까.


 

1. 비둘

 

중생의 생명 무게 가르친 "구구보살"

 

전국 시내 곳곳에서 참새보다 흔하다. 늘어나는 개체수로 2009년 해로운 야생동물로 지정돼 포획할 수 있는 새로 전락했다.

그래도 ‘평화의 상징’이었다. 비둘기는 과거를 그리워하는 처량한 신세가 됐다.


그러나 불교 안에서 비둘기는 모든 중생들 생명 무게가 같다는 부처님 가르침을 극명히 알려주는 존재다.

‘육도집경’이 전하는 비둘기 얘기는 불교 언저리나 생명, 생태운동을 하는 이들 모두 알고 있을 만큼 유명하다.


인도 시비왕이 보시행을 닦고 있었다. 비수천과 제석천은 그를 시험하고자 했다. 비수천은 비둘기로, 제석천은 매로 몸을 바꿨다.

굶주린 매는 있는 힘 다 짜내 비둘기를 쫓았고, 비둘기는 시비왕 겨드랑이 밑으로 숨어 들어갔다.

비둘기를 쫓던 매는 주림에 못 이겨 왕에게 “비둘기를 내놓으라”고 말했다. 왕은 “살기 위해 품으로 온 것을 어찌 내놓을 수 있으냐”며

맞섰다. 고픈 배를 채워야 하는 매가 협상에 들어갔다. “그렇다면 내 먹이를 빼앗은 셈이니 대신할 수 있도록 왕의 살이라도 베어

달라”고 했다.


보시제일 시비왕 아니던가. 매의 제안을 허락한 왕은 살을 떼어 저울에 올렸다. 그럼에도 저울은 비둘기 쪽으로 기울었다.

계속해서 살을 떼어 올려도 소용없자 결국 왕은 자신을 모두 저울에 올렸고, 그제야 저울은 수평을 이뤘다.

비둘기와 매가 비수천과 제석천으로 다시 몸을 바꾸고 왕의 보시행을 칭송했다. 물론 뗐던 살점 모두 왕에게 돌려줬단다.


‘천상천하 유아독존’에 여러 가지 해석 여지가 있다. 허나 ‘모든 생명이 존귀하다’라고 읽힌다면 이 얘기는 의미심장하다.

하늘 아래 존귀하지 않은 생명이 없다는 가르침이기 때문이다. 불살생계는 논외로 하더라도 이 외침은 인권, 동물복지, 생태보호 등

불교계 사회 역할에 있어 탄탄한 바탕이 된다.


생명의 무게를 일러준 가르침 외에도 비둘기와 스님들 일화도 흥미롭다. 정찬주 작가는 저서 ‘산은 산 물은 물’에서 ‘가야산 호랑이’

성철 스님과 성전암 비둘기와 인연담을 소개했다.

 

성철 스님이 암자를 떠나기 3년 전 ‘구구보살’과 얽힌 얘기다. 스님은 아직 눈도 못 뜬 산비둘기 새끼 두 마리에게 물에 불린 쪼갠 콩을

먹이로 주며 키웠다. 비둘기는 자란 뒤에도 스님 방에서 같이 살았는데 1년 뒤 어미가 돼 알을 낳아 새끼도 길렀다고.

당시 성전암은 사람을 피하기 위해 스님이 암자 둘레에 철책을 둘러치고 안거 하던 시절이었다.

 

스님을 친견하기 위해 암자를 찾았다 발길을 돌린 이들에게 ‘구구보살’은 부러운 날짐승이었다.

스님이 암자를 떠날 때 일화는 마음 짠하다. 비둘기가 파계사까지 따라왔다 돌아갔다고 한다.

그 때 스님은 자꾸 뒤돌아보며 이렇게 말했다고.

“구구보살, 니 집은 성전암 아이가. 어서 돌아가그래이. 바람이 찹다.”


평화를 상징하다 유해 야생동물로 신세가 전락한 비둘기. 불살생계를 수지한 불제자들의 지나친 육식. 신세가 처량하다.

 

 

1. 공명조·비익조

 

한 마음에서 피어난 시기와 사랑

 

마음은 수만 갈래로 부서진다. 기뻤다가 슬프고, 좋았다가 밉다. 화났다가 즐겁다. 마음 거울에 비친 세속 인연들이 만들어낸 감정들이

다. 인연 사라지면 가라앉는 감정들이지만 웃고 눈물 흘린다. 부질없는 감정이란 말, 맞다. 중생심, 맞다. 그러나 우리네 마음‘들’이다.

세속 인연들에 치어 그렇게 살아가야만 했다.


새는 온몸으로 난다. 날개로 나는 게 아니다. 머리, 꼬리 깃, 날개, 몸통, 발 모두 공기에 의지하며 하늘을 가른다.

그렇게 절절히 날아야만 했다. 본래면목을 찾아야 하는 중생들도 온 마음 감싸 안고 웃고 울며 살아간다. 절절히.


몸 하나에 두 머리를 달고 살아가는 새가 있다. 공명조(共命鳥)다. 공명조는 목숨을 함께 하는 새다.

‘아미타경’ 초반부 부처님은 극락정토를 설한다. 그곳에선 공작과 앵무새는 물론 사리조와 가릉빈가, 공명조가 밤낮으로 온화한 소리를

낸다. 아미타불 법음을 널리 펴기 위함이다.


‘잡보장경’에 공명조가 어떻게 살아가는지 잘 나온다. 한 쪽이 자면 한 쪽은 밤새 지켜준다. 허나 비극은 공명조를 비켜가지 않았다.

깨어있던 다른 쪽 머리가 맛있는 나무열매를 혼자 먹었고, 먹지도 않았는데 포만감을 느낀 한 쪽 머리가 분한 마음을 가졌다.

복수혈전이다. 열매를 혼자 먹은 머리가 잠들자 독이든 열매를 냉큼 삼켰다. 숨은 점차 얕아졌고, 결국 목숨을 잃었다.


비익조는 공명조와 다르다. 암컷과 수컷의 눈과 날개가 하나씩이다. 짝을 이루지 않으면 날지 못한다. 땅에는 연리지, 물속엔 비목어,

하늘엔 비익조가 있다. 비익조는 둘이서 열심히 날개를 퍼덕여야 날 수 있다. 눈도 하나뿐이니 서로 열심히 좌우를 살펴야 한다.

생각은 달라도 마음은 하나로 합해야 한다는 얘기다.


중국 명나라 때 백과사전 ‘삼재도회’는 “이 새들은 쌍이 같이 있지 않으면 날지 못하고 이름은 겸겸이다. 눈과 날개가 하나씩 나눠져

있기 때문에 두 마리가 같이 있어야 날 수 있다”고 했다. ‘산해경’에도 비익조 내용이 전해진다. ‘산해경’은 고대신화, 지리, 동굴, 식물,

광물, 무술, 종교, 의약, 민속 등이 기록된 중국 옛 서적이다. ‘산해경’도 “두 마리가 나란히 붙어 있지 않으면 날 수 없다”고 전한다.

때문에 비익조는 애정과 사랑, 그리움, 애틋함의 대명사다. 어리석음을 비유한 공명조 얘기와는 사뭇 다른 이미지다.


공명조와 비익조는 아미타 극락정토와 관련해 사찰 이곳저곳에서 눈에 띈다. 상주 남장사 대웅전 불단 목조각과 의성 환성사 대웅전

불단 비익조다. 낙산사 해수관음 복전암에도 비익조가 새겨졌다. 보통 불단은 수미단으로 극락세계 아래 있는 무한대의 높은 산,

수미산을 의미한다. 비익조가 빠지면 섭섭하다.


서로 더부살이하고 있는 두 새 얘기가 왜 이렇게 다를까. 마음 한 번 잘 쓰고 못 쓰고에 목숨이 달린다. 죽음이라는 천길 낭떠러지에

떨어지기도 하고 하늘로 비상하기도 한다. 부처님은 마음을 복전이라고 했다. 복 심는 밭이란 뜻이다. 씨앗은 스스로 뿌려야 한다.

어떤 씨앗을 파종하는지도 스스로 몫이다.


한국불교도 마찬가지다. 한국불교의 화두는 2가지로 압축된다. 수행과 포교다. 산사에서 수행에 매진하는 스님들은 이 시대의

어른으로, 포교현장에서 현신하는 스님이나 재가자는 전법 사명으로 함께 절절히 살아가야만 한다.

수행과 포교, 한 몸에 달린 두 개의 머리이려나. 서로 기대야하는 두 몸, 한 맘 날개짓이려나. 복전도 수행과 포교도 비상의 날개짓을 꿈꾼다.

최호승 기자 time@beop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