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동 반가사유상(金銅 半跏思惟像) : 삼국시대(三國時代) 7세기
금동 반가사유상(金銅 半跏思惟像) : 삼국시대(三國時代)
금동 반가사유상(金銅 半跏思惟像) : 삼국시대(三國時代) 7세기 전반 : 보물(寶物) 제 331호
네모난 대좌(대좌) 위에 앉아 있어 "방형대좌(방형대좌) 반가사유상" 으로도 불린다. 신체 표현이 지나치리만큼
가늘고 길게 변형되어 극도의 추상성을 보인다. 그러면서도 세부 표현은 매우 사실적이며 정교하다.
금동 불 좌상(金銅 佛 坐像) : 고려 14세기
석조 지장보살 좌상(石造 地藏菩薩 坐像) : 朝鮮 1515년 寶物 제 1327호
지장보살은 지옥에서 고통 받고 있는 중생을 위하여 영원히 부처가 되지 않는 보살이다. 다른 보살상과 달리 민멀리의 스님 모습이거나
머리에 두건을 쓴 모습으로 표현된다.
대좌 밑에 "정덕(정덕) 10년 3월에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조선 중종(중종) 10년(1515년)에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지장보살상과 같이 머리에 두건을 쓴 지장보살상은 고려 말부터 조선 전기에 걸쳐 많이 만들어졌다.
금동 부처와 관세음보살
다양한 부처님의 모습 이분들을 보면 무엇이 생각 나시는거 없나요??_()_
삼존불
위에 사진이나 아래 사진이나 옛날에 이런 셋트 인녕이 있지요 그와 같은 느낌이 네요
머리 장식
황복사지금제아미타불좌상(皇福寺址 金製 阿彌陀佛 坐像) : 남북국시대(통일신라) (南北國時代 = 統一新羅) 706년. 國寶 제 79호
출토지 = 경상북도(慶尙北道)-경주시(慶州市) 구황동(九黃洞) 황복사(皇福寺) 삼층석탑(三層石塔) 높이 12.2cm
1번 아미타불
1942년 경주 구황동 삼층석탑에서 발견된 금동사리함 속에 들어있던 불상이다.
사리함에서는 이 불상 외에 또다른 금제여래입상 1구와 각종 사리구들이 함께 발견되었다.
금동사리함의 외면에 새겨진 글귀에 의하면 692년 효소왕이 사리함을 넣어 석탑을 세웠고
그 뒤 706년에 성덕왕이 다시 아미타상과 『무구정광대다라니경』1권을 넣었다고 한다. <여기까지 같음>이에 따르면 이 불상은 706년에 넣은 아미타상으로 추정된다.
3단의 연화대좌 위에 결가부좌한 이 불좌상은 두 어깨를 감싸는 통견식의 법의자락이 아래로 흘러내려 대좌를 덮고 있다.
오른손은 가슴 높이까지 손가락을 곧게 펴서 들었으며, 왼손은 왼쪽 무릎 위로 올려놓았다. 불상의 몸체와 대좌, 광배는 따로 주물하여 결합하였는데,
몸체만 순금이고, 대좌와 광배는 금동으로 제작하였다.
적절한 신체 비례와 정교한 세부 표현 등에서 당(唐) 불상 양식을 수용한 통일신라 초기의 우수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2번 여래불
황복사지금제여래입상(金製 佛 立像) 높이 14.0cm 국보 제 80호
머리와 몸체 일부에는 주조 기법과 관련된 것으로 보이는 구멍과 땜질 자국이 남아있다. 두 어깨를 감싸는 통견식으로 법의를 입었는데 왼손으로 옷자락을 움켜쥐었고, 오른손은 위로 들어 시무외인을 취하였다. 대좌는 연꽃이 아래로 향한 복련으로, 연육부와 그 아래의 원형과 12각의 낮은 두 부분이 따로 만들어져 결합되었다.
광배는 바깥쪽에 불꽃무늬가 뚫어새겨졌고, 머리 중앙부분에는 연꽃모양을 뚫어새긴 별도의 금속판이 결합되어 있다.
이 불상은 얼굴 모습, 옷매무새와 옷주름, 대좌 및 광배 표현 등에서 함께 출토된 금제아미타불좌상보다 고식을 따르고 있어 692년에 넣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부처입상 = 순금제 불 입상(純金製 佛 立像) : 國寶 제 80호. 남북국시대(통일신라) (南北國時代 = 統一新羅) 692년
경북 경주 황복사 터 삼층석탑 (慶北 慶州 皇福寺 址 三層石塔)에서 발견되었다. 높이 14.0cm
1942년 경주 구황동 삼층석탑에서 발견된 금동사리함 속에 들어있던 불상이다.
사리함에서는 이 불상 외에 또다른 금제여래입상 1구와 각종 사리구들이 함께 발견되었다. 금동사리함의 외면에 새겨진 글귀에 의하면
692년 효소왕이 사리함을 넣어 석탑을 세웠고 그 뒤 706년에 성덕왕이 다시 아미타상과 『무구정광대다라니경』1권을 넣었다고 한다.
머리와 몸체 일부에는 주조 기법과 관련된 것으로 보이는 구멍과 땜질 자국이 남아있다. 두 어깨를 감싸는 통견식으로 법의를 입었는데
왼손으로 옷자락을 움켜쥐었고, 오른손은 위로 들어 시무외인을 취하였다.
대좌는 연꽃이 아래로 향한 복련으로, 연육부와 그 아래의 원형과 12각의 낮은 두 부분이 따로 만들어져 결합되었다.
광배는 바깥쪽에 불꽃무늬가 뚫어새겨졌고, 머리 중앙부분에는 연꽃모양을 뚫어새긴 별도의 금속판이 결합되어 있다.
이 불상은 얼굴 모습, 옷매무새와 옷주름, 대좌 및 광배 표현 등에서 함께 출토된 금제아미타불좌상보다 고식을 따르고 있어 692년에 넣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순금제 아미타불 좌상 (純金製 아미타불좌像) : 남북국시대(통일신라) (南北國時代 = 統一新羅) 706년. 國寶 제 79호.
경북 경주 황복사 터 삼층석탑 (慶北 慶州 皇福寺 址 三層石塔)에서 발견되었다 높이 12.2cm
1942년 경주 구황동 삼층석탑에서 발견된 금동사리함 속에 들어있던 불상이다.
사리함에서는 이 불상 외에 또다른 금제여래입상 1구와 각종 사리구들이 함께 발견되었다. 금동사리함의 외면에 새겨진 글귀에 의하면
692년 효소왕이 사리함을 넣어 석탑을 세웠고 그 뒤 706년에 성덕왕이 다시 아미타상과 『무구정광대다라니경』1권을 넣었다고 한다.
이에 따르면 이 불상은 706년에 넣은 아미타상으로 추정된다.
3단의 연화대좌 위에 결가부좌한 이 불좌상은 두 어깨를 감싸는 통견식의 법의자락이 아래로 흘러내려 대좌를 덮고 있다.
오른손은 가슴 높이까지 손가락을 곧게 펴서 들었으며, 왼손은 왼쪽 무릎 위로 올려놓았다. 불상의 몸체와 대좌, 광배는 따로 주물하여 결합하였는데,
몸체만 순금이고, 대좌와 광배는 금동으로 제작하였다.
적절한 신체 비례와 정교한 세부 표현 등에서 당(唐) 불상 양식을 수용한 통일신라 초기의 우수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보살 = 소조 보살 입상(塑造 菩薩 立像) : 三國時代(고구려(高句麗), 6세기 중엽)
평남 평원 원오리 절터 출토(平南 平原 元五里 寺址 出土)
1937년 평양 부근 원오리의 옛 절터에서 발견된 것으로, 흙을 구워 만든 불 · 보살상 수백 개의 파편 가운데 하나이다. 틀을 사용하여 만들었으며,
표면에 흰색이나 붉은색을 칠한 흔적이 남아 있다. 옷주름 아랫부분은 간격이 촘촘하고 끝자락이 양측으로 삐친 모습을 하고 있어
중국 북위(北魏) 불상의 영향이 느껴진다.
부처 = 금동 불 입상(金銅 佛 立像) : 삼국시대 고구려(三國時代, 高句麗) 7세기 전반, 國寶 제186호
경기도 양평 출토(京畿道 楊平 出土)
1976년 경기도 양평 한강변에서 발견된 불상이다.
6세기 불상에 비해 앞에서 보는 것 뿐 아니라 옆이나 뒤에서 보이는 부분까지 입체감이 잘 살아 나도록 만들었다.
이 불상은 중국의 북제. 북주 불상 양식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늘씬한 신체에서 풍기는 강인한 인상과 자신감에 찬 표현들은 고구려의 불상 특징이 반영된 것이다.
보살 = 금동 보살 입상(金銅 菩薩 立像) : 三國時代 高句麗 6세기. 寶物 제 333호
광배(부처님에게서 나오는 빛 장식) = 금동 광배(金銅光背) 삼국시대 백제(三國時代 百濟) 7세기 전반
충남 부여 부소산 출토(忠南 扶餘 扶蘇山 出土)
부처나 보살에게서 나오는 빛을 표현한 광배는 머리에서 나오는 빛(두광)과 몸에서 나오는 빛(신광)으로 이루어진다.
이 광배는 원형인 것으로 미루어 보아 두광임을 알 수 있다.
두개의 금동판을 중앙과 가장자리에 작은 쇠못을 박아 결합하였다. 뒷면에는 "하다의 장법사(何多宜 藏法師)" 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이는 광배를 만든 사람과 관련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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