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계 발원 사리갖춤(李成桂發願舍利具)
이성계 발원 사리 갖춤
1932년 10월 6일, 금강산 월출봉(1580m)에서 산불 저지선 공사를 하던 인부들이 돌 상자 하나를 발견하였습니다. 그 안에는 사리갖춤이 들어 있었는데, 이성계와 부인 강씨, 그리고 후에 조선의 개국공신이 된 이들을 비롯한 1만여 명이 미륵을 기다리며 금강산 비로봉(1638m)에 사리갖춤을 모신다는 내용의 명문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당초 비로봉에 봉안한 사리갖춤이 어떻게 월출봉에서 발견됐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은기(銀器) 3점, 동기(銅器) 1점, 백자(白磁) 5점으로 이루어진 이 사리갖춤(이하, 이성계 발원 사리갖춤)은 발견 반년 후인 이듬해 7월, 조선총독부 박물관에서 정식 유물로 등록되고, 후에 국립박물관이 인수하여 오늘에 이릅니다. 이성계 발원 사리갖춤은 그 조형적 특징과 미술사적 위상이란 면에서 크게 주목되지만, 한편으로 역성혁명을 목전에 둔 신흥무장 출신 이성계의 자신감과 야망이 매우 정치색 짙게 드러나는 특이한 역사 유물인 점에서도 대중적 재조명이 필요한 유물이라 생각됩니다.
강원도 금강산 월출봉 출토, 고려 1390년 ~ 1391년
♤라마탑형 사리기♤
가장 안쪽에 모신 사리기는 은제금도금 라마탑형 사리기입니다.
이 사리기는 유리와 금속으로 된 가느다란 원통형 용기와 연좌형 대좌, 원통형 은판, 그리고 라마탑형 용기가 결합한 형태입니다.
불사리를 직접 봉안했을 가느다란 원통형 용기를 연좌형 대좌 위 원통형 은판 안에 놓고, 여기에 라마탑형 용기를 뚜껑으로 덮었을 것입니다.
이 용기에는 돌아가며 4구의 불입상(佛立像)이 새겨져 있습니다.
양 발을 벌리고 마치 호위 무사처럼 정면으로 서 있는 이 불상들은 전형적인 고려 불화의 양식과 달리 정면관(正面觀)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정면관 강조는 뒤에 볼 팔각당형 사리기에도 보이는데,
조선 초기 미술에서 보이는 특색이라는 점에서 조선시대로 연결되는 새로운 양식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불입상을 비롯한 여러 문양은 축조(蹴彫)와 어자문기법(魚子文技法), 그리고 선조기법(線彫技法)으로 표현되었고,
대좌부ㆍ상륜부 등 주요 부분과 함께 부분 도금을 하였습니다.
이런 부분도금은 현존 고려시대 금은기(金銀器)나 사리갖춤 중에서는 예를 찾기 어려운데, 이 점에서 이 무렵에 새로 유행한 양식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연화형 대좌는 타출한 은판 1장과 연꽃 모양으로 자른 은판 3장을 겹쳐 연결하였는데, 하단부는 한 장의 은판을 타출하여 변형 여의두문 형태의
독특한 다리와 2단의 연파문대, 원형 대좌부 등을 표현하였습니다. 뚜껑으로 쓰인 라마탑형 용기는 상륜부와 계란형 탑신부를 따로 만들어 결합한 것으로,
한 장의 은판으로 제작한 상륜부는 고도의 타출기법을 보여줍니다.
한편 원통형 은판의 표면에는 ‘奮忠定難匡復燮理佐命功臣 壁上三韓三重大匡 守門下侍中 李成桂 三韓國大夫人 康氏 勿其氏’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습니다.
불사의 핵심 발원자인 이성계와 그 부인 강씨를 기록한 것입니다.
‘奮忠定難…守門下侍中’은 1389년 공양왕 옹립 후에 받은 위호로서, 사실상 왕을 능가하는 권력자 이성계의 위상을 담고 있습니다.
그처럼 대단한 이성계의 불사에서 첫째 부인 한씨(韓氏) 대신 둘째 부인 강씨가 이름을 올린 연유는 잘 알 수 없습니다.
물론 한씨는 불사 넉 달 후에 신병으로 사망하지만, 아무리 건강이 나빴다 하더라도 이름조차 새겨 넣지 않을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적이 궁금합니다.
이성계 부부에 이어 새긴 물기씨(勿其氏)는 누구인지 알 수 없습니다. 사리기 제작에 참여한 기술자일 가능성도 있으나,
당대 최고의 지위에 있던 두 사람과 아무런 형식적 구분도 없이 장인의 이름을 이어 새겼을지 의문입니다.
혹 이들 부부와 각별한 인연이 있는 인물일지도 모릅니다. 그 점에서는 여진인과 같은 외국인일 가능성도 전혀 배제하기는 어렵지 않을까 합니다.
라마탑형 사리기는 보통의 고려 후기 사리갖춤에서는 바깥쪽에 사용됩니다. 그런데 이성계 발원 사리갖춤에서는 가장 안쪽에 모셔지고
그 바깥을 뒤에 볼 팔각당형 사리기가 감쌉니다.
보통 사리를 직접 봉안하는 가장 안쪽 사리기가 제일 중요시되고 재질도 가장 값비싼 것을 사용하는 점을 감안할 때,
당시 발원자들이 라마탑 형식을 전통적인 팔각당 또는 다각탑 형식보다 더 의미 있는 것으로 인식했던 것일까요?
라마탑형 사리기의 제작 시기는 명문에 보이지 않으나, 기법과 양식 면에서 유사한 팔각당형 사리기가 만들어진 1390년 3월경에 두 사리기가
한 세트로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팔각당형 사리기◇
라마탑형 사리기를 품은 것은 은제금도금 팔각당형 사리기일 것입니다.
팔각당형 사리기도 라마탑형 사리기처럼 연화형 대좌와 팔각형 은판, 팔각당형 뚜껑 등 각 부분을 따로 제작하여 결합한 형태입니다.
팔각형 은판의 표면에는 종서(縱書)와 횡서(橫書)로 명문이 새겨져 있는데, 庚午년(1390년, 공민왕 2) 3월에 사리탑을 조성하여 모신다는 내용과
발원자들의 이름이 보입니다. 강양군부인(江陽郡夫人) 이씨(李氏), 낙안군부인(樂安郡夫人) 김씨(金氏)(혹은 전씨(全氏)) 등 상류층 여성 신도들과 함께
발원에 참여한 사람들 중 주목되는 것은 승려 월암(月菴)과 영삼사사(領三司事) 홍영통(洪永通), 동지밀직(同知密直) 황희석(黃希석),
그리고 박자청(朴子靑)입니다.
월암은 이성계가 일찍이 보살피던 승려로서 뒤에 볼 백자발의 명문에도 이름이 나옵니다.
그는 이성계와의 인연으로 사리갖춤 불사에서 봉안 의례와 관련하여 역할을 하였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홍영통은 유명한 재상 홍자번의 증손으로, 신돈 집권 시 중용되었으나 신돈 몰락과 더불어 유배된 인물입니다.
명재상으로 이름을 떨친 증조부와 달리 그는 비리로 악명 높던 이인임과 밀착하여 원성을 듣고, 정당한 업무 수행을 하던 관리들을 폭행하는 등
많은 악행으로 조정 관료들의 비난을 받았으나, 그때마다 우왕의 인척이라 하여 무거운 처벌에서 비껴나며 최고위 관직까지 역임하였습니다.
구시대적 인물의 전형이면서도 후에 조선 개국 공신에 책록된 연유는 알 수 없으나, 어떤 식으로든 조선 개국 과정에 기여를 했을 것입니다.
이 사리갖춤 불사 외에도 이전부터 이성계와 함께 불사에 참여한 예들이 확인되지만, 그것만으로 공신에 책록되지는 못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황희석(黃希 1392년에 살해된 정몽주 일파의 단죄 요청을 주도하는 등의 활약으로 개국공신이 된 황희석(黃希碩)과 동일 인물일 것입니다. 그가 환속한 승려인데도 개국공신에 책록된 것은 잘못이라는 태종 때 권희달의 주장이 있는 것으로 보아, 회군공신인 데다 불교계와의 깊은 인연으로 이성계의 사리갖춤 불사에 동참한 것으로 보입니다. 한편 황희석의 가인(家人)으로서 태조 즉위 시 중랑장(中郞將)이 되고 1395년(태조 4)에 원종공신녹권을 받은 박자청의 이름도 보입니다. 그가 태종 연간에 토목 공사 감역관으로 이름을 떨친 것이나, 은(銀) 채굴을 책임졌던 일, 사리기 제작을 맡은 인물로 추정되는 나득부(羅得富), 이씨(李氏), ○룡( 그리고 사리기에 돌아가며 새긴 8구의 합장한 불입상이 1408년 박자청이 감역한 태조(太祖) 건원릉(建元陵)의 무인석상(武人石像)과 양식적 친연성(둥그스름한 어깨, 귀가 크고 넓적한 얼굴 모습, 양쪽 발을 벌리고 서 있는 자세 등)이 있다는 견해 등을 감안하면, 이성계 휘하인 황희석의 가인으로 있으면서 장인으로서의 전문성이 인정되어 동참한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성계 발원 사리갖춤은 조선 초 저명한 토목 감역관 박자청의 앞선 시기 활동상을 보여 주는 자료도 되는 셈입니다. ♤청동발, 백자발, 그리고 명문 없는 유물들♤ 라마탑형 사리기와 팔각당형 사리기를 봉안한 것은 청동발입니다. 구연부 바깥 면에 ‘洪武二十四年辛未二月日造舍利盒施主信堅妙明朴竜’이라는 명문이 점각(點刻)으로 새겨져 있어서, 신미년(1391년) 2월 어느 날, 신견(信堅), 묘명(妙明), 박룡(朴竜) 등 3인이 시주하여 사리합으로 만들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원래는 지금은 전하지 않는 뚜껑과 한 세트를 이루어 합의 형태로 만들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신견과 묘명은 여주 신륵사 보제존자석종비(普濟尊者石鐘碑(1379년))에도 그 이름이 보여서 나옹의 문도들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끝에 기록된 박룡은 발을 만든 장인인 듯하지만, 분명치 않습니다. 발의 안팎 면에 동심원으로 가질한 흔적이 있어 고려 말의 보기 드문 기년명 방짜유기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성계 발원 사리갖춤의 발원자와 발원 내용, 제작 시기, 사리갖춤 봉안 장소 등 불사에 관한 종합적인 정보를 보여주는 것은 백자발1과 백자발2에 새긴 명문들입니다. 백자발1의 바깥 면에는 앞의 팔각당형 사리기에서 본 월암과 이성계(송헌시중(松軒侍中)에서 송헌은 이성계의 호이다), 그리고 만여 명의 사람들이 1391년(공양왕 3) 4월, 장차 미륵의 세상이 오기를 기다리며 발원한다는 내용의 명문이 음각되어 있습니다. 이 발은 뒤에 볼 백자발2와 겹쳐지기 힘든 크기, 함께 발견된 백자 향로와의 관계, 당시 유행한 매향(埋香) 풍습과 미륵 신앙 등을 감안할 때 사리 봉안을 위한 용기라기보다 향목(香木) 봉안용 향합(香盒)으로 봐야 한다는 견해가 유력합니다. 한편 앞서 본 청동발을 봉안한 것은 백자발2일 것입니다. 백자발2는 굽 부분에 “辛未四月日防山砂器匠 沈竜 同發願比丘 信寬”이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습니다. 신미(辛未)년(1391년) 4월에 방산의 사기장 심룡이 그릇을 만들고 승려 신관이 함께 발원한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방산이란 지금의 강원도 양구군 방산면으로, 근래에 이곳 장평리, 송현리, 금악리 일대에서 이 발과 태토, 유약, 번조 방식이 공통되는 14∼15세기경의 백자편들이 발견된 바 있습니다. 백자발을 만든 도공 심룡은 1395년 간행된『李原吉開國原從功臣錄券』에 ‘前郎將 沈龍’이라고 기록된 인물과 동일 인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앞의 팔각당형 사리기 명문에 기록된 박자청이 태조 즉위 때에 중랑장으로서 개국원종공신이 된 사실은 이러한 추정에 힘을 보태고 있습니다. 승려 신관은 1418년의 三千浦埋香岩刻碑文에 대화주(大化主)로 등장하는 승려 신관(信寬)과 동일 인물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백자발1과 백자발2는 뒤에 볼 백자발3과 백자발4 및 백자향로와 함께 도자사적인 의미가 큽니다. 고려백자와는 다른 새로운 백자로서, 현재까지 확인된 기년명 경질백자(硬質白磁) 중 가장 이른 시기의 것인 까닭입니다. 푸른빛 감도는 유약이라든가 태토 사용 등에서 아직 질적으로 그리 뛰어나지는 않지만, 조선시대 경질백자의 선행 양식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를 생산한 방산 지역의 중요성 또한 높여주고 있습니다. 한편 앞서 살핀 5점의 명문 유물 외에 이성계 발원 사리갖춤에는 명문이 없는 4점의 유물이 더 있습니다. 백자발3과 백자발4, 백자향로 1점, 그리고 은제이소(銀製耳搔) 1점이 그것입니다. 백자발3과 백자발4는 각기 백자발1, 백자발2와 한 세트로서 뚜껑으로 사용된 것으로 보입니다. 이처럼 도자기를 마주 포개어 합(盒)을 이루게 한 예는 일찍이 11세기경의 영암 청풍사지 오층석탑 출토 청자사리합에서도 보입니다. 백자향로는 고려시대의 일반적인 향완의 형식을 따르면서도, 나팔형의 기대(器臺) 대신 굽이 달린 독특한 형식을 보여줍니다. 은제이소는 얇고 긴 은판을 두드려 만든 것으로 모양이 귀이개를 닮았다 하여 이소라는 이름이 붙여졌으나, 실제로는 사리를 옮기는 도구일 것입니다. ◁금강산 비로봉▷ 이성계가 사리갖춤을 봉안한 금강산에는 고려 태조 왕건과 관련한 이야기가 전합니다. 태조가 이곳에 올라 담무갈보살의 현신을 목격하고 예를 갖춘 것을 기념하여 정양사(正陽寺)를 세웠다는 설화가 그것입니다. 1307년에 노영(魯英)이 그린 <담무갈보살ㆍ지장보살 현신도(魯英筆曇無竭菩薩地藏菩薩現身圖)> (이명, 흑칠금니소병(黑漆金泥小屛))에는 태조가 담무갈보살에 엎드려 예를 갖추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노영 필 담무갈보살 · 지장보살 현신도(魯英 筆 曇無竭菩薩 · 地藏菩薩圖 現身圖) = 고려 1307년 금강산이 언제부터 불교 성지로 인식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미 14세기에는 중요한 불교 성지이자 영험한 기복도량이라는 인식이 널리 확산되어 있었습니다. 1343년(충혜왕 복위4) 기황후가 원나라 황제를 위해 이곳에 장안사를 중창한 일이나, 원나라 황제들이 시주하여 표훈사를 중창한 것, 1360년대에 나옹이나 무학 같은 고승 등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방문하곤 한 일 등은 당시 불교계에서 금강산이 어떤 위치에 있었는지를 잘 말해줍니다. 이성계가 비상한 시기에 미륵의 하생을 발원하며 사리갖춤을 금강산에, 그것도 가장 높은 봉우리에 모신 것도 그러한 연장선상에서 이해할 일입니다. = 끝내면서 = 이성계 발원 사리갖춤은 조선 전기 미술로 이어지는 미술사의 흐름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은제도금 사리기에 사용된 부분 도금 기법과 타출 기법이 고려 후기 당시 금속공예의 그것과는 다르다든가, 사리기에 새긴 불상의 모습이 고려 후기의 불화나 불교조각보다 조선 전기의 석상(石像)과 양식적으로 친연성이 있다는 지적, 그리고 무엇보다도 조선 경질백자의 선행 양식으로 볼 수 있는 새로운 경질백자가 사용된 점 등은 그러한 평가의 근거가 되고 있습니다. 이 사리갖춤은 역사적인 유물로도 상당한 매력이 있습니다. 곳곳에 새긴 명문은 그 기년을 통해 앞서 말한 미술사적 해석의 시대적 기준을 제공할 뿐만 아니라, 내용을 통해서는 이 불사가 단순한 종교 행사를 넘어 역성혁명을 목전에 둔 이성계가 미륵의 하생을 기원하며 불사리를 봉안한 정치적이고 역사적인 의식(儀式)임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익히 알려진 일부 조선 개국공신들의 고려 말 행적을 엿볼 수 있는 덤도 있습니다. 대단치 않은 변방 세력가의 자손으로서 왜구와 홍건적을 물리치며 전장에서 세월을 보낸 신흥무장 이성계. 그가 위화도 회군으로 정권을 잡고 권문세가 출신의 최영을 비롯하여 여러 정적을 제거한 지 3년째 되는 해에, 인연 깊은 불자들과 만여 명의 사람들을 이끌고 불교 성지 금강산에 불사리를 모신 것을 범상한 불사로만 보기는 어렵습니다. 필시 이성계는 자신의 주도로 새로운 구원의 세상을 만들 수 있음을 불사리 봉안이라는 최고의 제의(祭儀)를 통해 선언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당시 정치 상황이 상당히 극적으로 전개되던 점에서도 이러한 추측은 개연성을 갖습니다. 금강산 비로봉에 사리갖춤을 봉안하던 바로 그 달(1391년 5월), 이성계를 추종하는 개혁파 관료들이 고려 최대의 현안이던 토지 문제의 해결을 위해 전대미문의 개혁 조치를 단행하였던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사리갖춤 불사와 이 개혁조치는 새 왕조 개창과 이성계의 등극을 향한 막바지 정치 일정의 극적 이벤트로서 기획된 것이 아니었나 합니다. 그리고 이성계 세력에게는, 1년 뒤의 조선 왕조 개창이야말로 자신들과 백성을 위해 간구했던 미륵하생과 용화삼회의 현실 버전이었을 것입니다. 한국미술사에서 큰 의미를 지닌 이성계 발원 사리갖춤은 이성계의 대망과 5백년 고려의 낙조가 교차하는 실로 역사적인 유물이라 할 만합니다.)은 1388년 요동 정벌시 청주상만호(靑州上萬戶)로 이성계 휘하에 있으면서 위화도 회군 이후 회군공신에 책록되고,
竜) 등과 함께 명문 맨 끝부분에 기록된 점,
황복사 터 삼층석탑에서 나온 금제 불입상과 아미타불좌상
사리함 속에서 나온 부처
1942년 황복사 터(皇福寺址)로 전해오는 경주시 구황동(九黃洞) 절터의 삼층석탑을 해체ㆍ복원할 때 2층 지붕돌 상부의 사리공에서
두 점의 불상이 발견되었습니다.
통일신라 692년, 높이 14cm, "부처" 국보 제80호 통일신라 706년, 높이 12cm, "아미타불" 국보 제 79호
불상이 담겨있던 금동제 사리외함의 뚜껑 안쪽에는 해서체로 1행에 20자씩 총 18행의 명문과 99기의 작은 탑들이 새겨져 있습니다.
명문에 따르면 천수(天授) 3년(692) 신문왕(神文王)이 세상을 떠나자 신목태후(神穆太后)가 왕위를 이은 아들 효소왕(孝昭王)과 함께
종묘의 신성한 영령을 위해 선원가람에 삼층석탑을 세웠습니다.
성력(聖曆) 3년(700) 신목태후가 세상을 떠나고 대족(大足) 2년(702) 효소왕이 승하하자 뒤를 이은 성덕왕(聖德王)이 신룡(神龍) 2년(706)에
불사리 4과(顆)와 6촌(寸) 크기의 순금제 아미타상 1구, 그리고 『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 1권을 석탑 2층에 안치하였습니다.
사리외함 및 사리외함, 뚜껑 경북 경주시 구황동 삼층석탑 출토, 통일신라 706년 경
1942년 발견 당시에는 금제 불상 2점, 금제와 은제 방형 상자, 금제와 은제 고배, 유리판, 유리구슬 등이 발견되었습니다.
석탑 사리공에서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은 발견되지 않았으나 사리외함 측면에 점선으로 새겨진 수많은 소탑(小塔) 모양을 통해 704년 한역된
『다라니경』이 신라로 유입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불상의 제작 연대▶
사리함 속에서 발견된 두 점의 불상 가운데 하나는 입상이고 또 다른 하나는 좌상이지만 명문에는 불상의 자세가 기록되어 있지 않기에 불상의 제작 연대나
안치 순서가 명확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두 불상의 양식이나 형식을 살펴보면 입상은 692년 석탑 건립시기에 봉안되고, 좌상은 706년에 봉안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불입상의 얼굴을 살펴보면 이목구비의 경계와 윤곽이 부드럽고, 살짝 올라간 양 입가에 고졸한 미소가 어려 있습니다.
또한 두툼한 법의에 가려 신체가 드러나지 않게 표현되었기에 고식(古式), 즉 삼국시대 불상 양식이 남아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점을 통해 볼 때 불입상은 아마도 692년 석탑을 세울 당시에 안치된 불상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반면 불좌상은 신체 표현이 사실적이고 풍만하며, 옷주름이 유려하고 자연스럽습니다. 이목구비의 경계가 분명한 점도 통일신라 불상의 특징입니다.
한쪽 손은 올리고 다른 한손은 무릎에 얹는 등 7세기에 유행했던 아미타불의 수인(手印)을 갖추었고 중국 당(唐)의 영향을 받은 통일신라 불상 양식을
보여주기에 불좌상은 706년에 안치된 아미타상으로 추정됩니다.
금제 불입상 상세부분 금제 불좌상 상세부분
▶전통의 계승과 새로운 유행의 예고◀
불입상은 양 어깨를 덮은 법의를 왼쪽 등 뒤로 넘겼으며, 두터운 옷주름은 U자형을 이루며 층층이 흘러내려 옵니다.
신체에 비해 커다란 손은 사실적인 표현과는 거리가 멀며, 오른손은 손바닥을 밖으로 향하여 들어 올렸고, 왼손에는 옷자락을 쥐고 있습니다.
옷자락을 쥔 형식은 인도의 마투라 불상이나 간다라 불상, 또는 중국의 6세기 불상에서도 발견되는 고식적인 요소입니다.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고식적인 요소 속에서 통일신라시대에 크게 유행하게 되는 불상 형식이 엿보인다는 점입니다.
불입상의 U자형 주름은 통일신라시대에 유행하는 옷주름의 선구적인 형태입니다.
이처럼 아래로 층층이 흘러내리는 옷을 입은 불상을 아육왕상식(阿育王像式) 불상이라고도 하는데,
아육왕상은 인도의 아육왕이 만들었다는 전설 속의 불상입니다.
중국에서는 ‘아육왕상’ 명문이 있는 불상 가운데 이처럼 U자 형태로 옷주름이 층층이 흘러내리는 예가 많고, 통일신라시대에는 불상에 명문은 없지만
이러한 옷주름이 표현된 불상들이 상당수 제작되었습니다.
금제 불입상 앞부분 금제 불입상 뒷면
광배에는 문양과 크기가 다른 동심원과 타오르는 불꽃 문양을 정교하고 섬세하게 맞새김하였으며, 불두 바로 뒤의 광배 중앙에는 연꽃잎이 덧대어 있습니다.
대좌는 낮은 연판과 12각형 받침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제작 과정을 보여주는 흔적도 남아있어 흥미로운데,
머리와 가슴에는 불상의 원형과 거푸집을 고정하는 틀 고정용 못[鑄型支持材 또는 型持]을 제거하고 마감한 흔적이 있습니다.
또한 등에는 완성 후 흙으로 만들었던 원형을 파냈던 구멍이 남아있습니다. 광배와 불상, 불상과 연화대좌는 별도로 주조하여 만든 후 고정하였습니다.
▷국제적 양식의 수용과 발전◁
불좌상은 8세기 전반, 통일신라의 불교미술이 당시 국제적으로 크게 유행하던 중국 당나라의 불상 양식을 새롭게 받아들여 어떻게 발전ㆍ전개시켰는지를
보여줍니다. 불좌상은 함께 발견된 불입상에 비해 전체적으로 양감이 풍부하고 얼굴 이목구비의 윤곽선이 뚜렷하며,
위엄과 권위가 있는 근엄한 모습이 특징입니다.
양쪽 어깨를 덮은 법의는 훨씬 얇아졌고 신체에 밀착되어 몸체의 굴곡과 풍만한 인체를 그대로 드러냅니다.
또한 삼도(三道)를 표현한 목의 가로 주름선이 뚜렷해지고 실제 손처럼 손금까지 표현할 정도로 신체 세부도 정밀하게 표현하였습니다.
연화대좌 아래로 흘러내린 법의의 표현은 중국 당나라 불상과 대좌 표현에서도 쉽게 확인할 수 있는 형식입니다.
특히 오른손을 들어 손바닥을 밖으로 향하고, 왼손은 무릎에 내려놓은 이와 같은 손 모양 역시 중국에서 유행했던 아미타불상의 손모양과 유사합니다.
불좌상은 자연스럽고 사실적인 표현을 수용하면서도 육감적이거나 관능적인 과장된 입체감을 배제하였다는 점에서 중국 불상과 차이를 보이며
석굴암으로 전개되는 통일신라 불상의 절정을 예고합니다.
금제 불좌상 부분 금제 불좌상 뒷면
광배와 불상, 그리고 대좌가 모두 별도로 제작되었는데 머리 주위의 빛을 형상화한 두광(頭光)과 신체 주위의 빛을 형상화한 신광(身光)이
하나의 광배로 표현되었습니다.
두광 부분에는 연꽃잎이 덧대어 있고 신광 중앙에는 넝쿨 문양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이들 주변에는 넝쿨 문양과 화염문이 정교하게 맞새김되어 있습니다. 대좌는 삼단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원형이라는 점 역시 독특합니다.
한 가지 의문점은 불좌상의 크기입니다. 명문에 따르면 아미타상이 6촌이라고 했으나 실제 크기는 4촌이 안 된다는 점에서
이 점은 추후 해결해야 할 과제이기도 합니다.
두 점의 불상은 사리장엄구로 불상을 봉안한 시원적인 사례이며 연대 추정이 가능한 왕실 발원의 순금제 불상이고,
광배와 대좌가 온전히 보존된 드문 예입니다.
또한 전통을 계승하고 새로운 양식을 받아들인 통일신라 불교조각의 세련된 미감과 섬세한 주조 기술의 진면목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통일신라 불상의 정수를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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