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화이야기=고려외

국립고궁박물관 = 조선 왕비와 후궁들의 궁중옷과 인장들 외 현정이와 8월 21일

백련암 2015. 9. 14. 13:08

銀製茶盞(은제찻잔) : 시대 = 조선

조선시대 왕실의 다례(茶禮), 진찬(進饌)등에 사용한 찻잔으로 뚜껑과 받침을 갖추고 있다.

몸체와 받침 전체에 선각(線刻)으로 화려한 꽃무늬를 새겨 넣었다.

 

 

   

銀製茶盞(은제찻잔)의 손잡이 모양이 불로초라 말하는 영지버섯모양의 조각으로 만들어져 있다.

 

 

손잡이 모양이 불로초라 말하는 영지버섯모양

 

 

또 다른 모양의 銀製茶盞(은제찻잔)

조선시대 왕실의 다례(茶禮), 진찬(進饌)등에 사용한 찻잔으로 뚜껑과 받침을 갖추고 있다.

몸체와 받침 전체에 선각(線刻)으로 화려한 꽃무늬를 새겨 넣었다.

 

 

     

銀製茶盞(은제찻잔)  손잡이가 얼굴은 짐승같고 꼬리는 물고기 모양이다.

 

 

銀製酒煎子(은제주전자) : 시대 = 조선

조선 시대 왕의 어진(御眞)을 모신 선원전(璿源殿)에서 다례(茶禮)를 올릴 때 사용한 주전자이다.

몸체 양쪽의 원형 테두리 안에 태양 속에 산다는 삼족오(三足烏)와 달에서 방아를 찧는 토끼를 선각(線刻)하고 금도금하였다.

 

 

    

손잡이는 용으로 연결하고  물나오는 주둥이는 불로초라 말하는 영지버섯모양으로 연결되었음

길쭉한 주구의 아래 부분은 도깨비 문양으로 장식하고 금도금하였으며 손잡이에도 용머리를 조각하여 화려함을 더했다.

 

 

 

 

   

뚜껑에는 박쥐가 선각되어 있다.

주구 꼭대기에는 여닫을 수 있는 작은 뚜껑이 달려 있다. 연봉오리 형태의 손잡이가 달려 있는 뚜껑에는 박쥐무늬[??紋 ]가 선각되어 있다.

 

 

몸체 양쪽의 원형 테두리 안에 태양 속에 산다는 삼족오(三足烏)와 달에서 방아를 찧는 토끼를 선각(線刻)하고 금도금하였다.

한 쪽면은 볼 수 없음  궁금...

 

19세기 궁중 잔치나 임금의 초상을 모신 진전眞殿에서의 제사 등 왕실 의례에서 사용되었던 은제 주전자이다.

몸체 중앙에는 태양 속에 산다 는 삼족오三足烏와 달에서 방아를 찧는 토끼를 선각으로 새기고 금도금하였다.

길쭉한 주구의 아래 부분은 도깨비 문양으로 장식하고 금도금하였으며 손잡이에도 용머리를 조각하여 화려함을 더했다.

주구 꼭대기에는 여닫을 수 있는 작은 뚜껑이 달려 있다. 연봉오리 형태의 손잡이가 달려 있는 뚜껑에는 박쥐무늬[??紋 ]가 선각되어 있다.

임금의 초상인 어진을 그리는 과정을 기록한 의궤인《영정모사도감의궤影幀模寫都監儀軌》에 이와 같은 형태의 주전자가 그려져 있으며,

 '은병銀甁'으로 표기되어 있다. 또한, 궁중 잔치의 시작에서 끝까지의 과정 과 필요 물품, 소요 인원 등 행사와 관련된 모든 사항을 기록한

《진연의궤》,《진찬의궤》에서는 '은도금일월병銀鍍金日月甁'으로 표기되어 있다. 궁중잔치에서 술잔과 함께 주정酒亭 위에 놓고 사용하였다.

이 주전자 바닥면에는 '십실十室' 이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어 선원전 10실에서 사용되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선원전 10실은 철종 임금의 초상을 모신 곳이다.

* 참고문헌 : 한국문화재보호재단, 『朝鮮王朝遺物圖錄』, 1993. 궁중유물전시관, 『황실생활유물』, 1997. 문화재관리국, 『宮中遺物圖錄』, 1986.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991.

<소장품 상세설명에서>

 

 

농사와 길쌈 풍속을 그린 화첩 = 豳風七月圖帖 第 二面 · 三面(빈풍칠월도첩 제 2면 · 3면)

시대 = 조선 18세기~ 19세기 초    작가 = 李昉運(이방운)     소장 = 국립중앙박물관

화가 이방운(李昉運, 1761년~?년)이『詩經[시경]』「豳風七月篇[빈풍7월편]」을 8폭의 수묵담채화로 그린 것이다.

제 2면 · 3폭의 뽕잎 따기, 길쌈, 염색 장면을 통해 당시 잠업의 중요도를 짐작할 수 있다.

 

 

哲宗 哲仁王后嘉禮都監儀軌[철종 철인왕후가례도감의궤]

 

 

백명의 아이들을 그린 병풍 = 百子圖屛風[백자도병풍] : 시대 = 조선~ 대한제국, 19세기 말 ~ 20세기 초

자손이 번성하고 아이들이 건강하고 휼륭하게 자라기를 기원하는 길상화(吉祥畵)로서 혼례식의 의례병풍

또는 부녀자나 아이들의 방에 장식용으로 사용된 병풍이다.

궁중에서는 간택된 여성이 임시로 머물던 별궁(별궁)에 백자도병풍을 설치했다는 기록이 있다.

 

 

좌측부분 = 백명의 아이들을 그린 병풍 = 百子圖屛風[백자도병풍]

 

 

 중앙부분 =  백명의 아이들을 그린 병풍 = 百子圖屛風[백자도병풍]

 

 

우측부분 = 백명의 아이들을 그린 병풍 = 百子圖屛風[백자도병풍]

 

 

명성황후 자필 한글편지 = 내용

글씨 보고 밤사이에 잘 잔일 든든하며, 여기는 주상전하(上候[상후])의 문안도 아주 평안하시고,

동궁(東宮)의 정황(諸節[제절])도 매우 편안하시니 축수(祝手)하며 여기는 한결같다. 오늘 일기는 춥고 차다.

호삼이는 (어떤 일로 임금께서) 풍류까지 내려주시니(賜樂[사락]) 더욱 감격스럽고 슬프다(感愴[감창])

 

 

명성황후 자필 한글편지 = 내용

글씨 보고 밤사이에 아무 탈 없이 지낸 일 든든하며, 여기는 주상전하의 문안도 아주 평안하시고,

동궁의 정황도 매우 편안하시니(앞으로도 편안아기를) 축수하며 나는 한결같으나 끝내[終是, 종시] 깨끗하지 아니하니 답답하다.

일기는 매우 맑고 화창하다.

 

 

    

편지 봉투

 

 

花鳥圖(화조도)  :  시대 = 조선   유형 =  족자

선명하고 짙은 색채로 그려진 화조도이다. 두 폭이 한 점을 이룬다. 두 폭 모두 다른 종류의 새 두 쌍과 여러 가지 꽃들로 구성되었으며,

토파와 괴석이 큰 비중을 차지한다. 두 폭의 화면 구성 방식에 같은 원칙을 적용하여, 토파와 괴석을 화면 한쪽에 치우치게 배치하고

화려한 깃털을 가진 새 한 쌍은 지면 혹은 괴석에, 다른 한 쌍의 새는 위쪽으로 뻗어 올라간 꽃가지 위에 배치하는 방식을 취하였다.

새를 표현한 섬세한 필치와 화려하면서도 깊이감 있는 색채가 돋보인다.

본래 여러 폭으로 구성된 병풍으로 제작되었으나 후대에 낱폭으로 분리된 것으로 추정된다.

 

 

 

 

정혜옹주 사리탑 출토 사리장엄구 = 水鐘寺浮屠舍利莊嚴具[수종사부도사리장엄구] : 보물 제 259호  시대 = 고려 말 ~ 조선 초

1439년(세종 21년) 정혜옹주(貞惠翁主, ?~ 1424년)를 위해 금성대군(錦城大君, 1426년~1457년)이 시주해 만든 사리탐에서 발견된 사리장엄구이다.

정혜옹주는태종의 후궁인 의빈(懿嬪) 권씨의 딸인데, 세종과 소헌왕후의 아들인 금성대군은 이 의빈(懿嬪) 권씨에게서 자랐다.

금성대군은 자신을 키워준 의빈 권씨의 딸 정혜옹주를 위해 사리탑을 세운 것이다. 

청자 항아리와 함께 금동 9층소탑, 은제도금 육각감, 수정사리병이 발견되었다.  

 

 

정혜옹주 사리탑 출토 사리장엄구 = 水鐘寺浮屠舍利莊嚴具[수종사부도사리장엄구]

청자 항아리와 함께 은제도금 육각감, 수정사리병이 발견되었다.  

 

 

정혜옹주 사리탑 출토 사리장엄구 = 水鐘寺浮屠舍利莊嚴具[수종사부도사리장엄구] 

은제도금 육각감, 수정사리병이 발견되었다.  

 

 

정혜옹주 사리탑 출토 사리장엄구 = 水鐘寺浮屠舍利莊嚴具[수종사부도사리장엄구]

수정사리병이 발견되었다.  

 

 

정혜옹주 사리탑 출토 사리장엄구 = 水鐘寺浮屠舍利莊嚴具[수종사부도사리장엄구]

청자 항아리가 발견되었다.  

 

 

인수대비가 간행한  혜능대사 어록집 = 六祖法寶壇經諺解(육조법보단경언해) :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 374호  시대 = 조선 1496년(연산군 2년)

인수대비(仁粹大妃, 1437년~1504년)의 명으로 모든 백성들이 번뇌로부터 벗어나도록 하기 위해 간행한 경전으로

중국 당(唐)나라 선종(禪宗)의 제 6祖인 혜능(慧能, 638년~713년)의 어록(語錄)을 한글로 번역한 언해본이다.

<박물관의 글>

 

 

인목왕후가 손수 쓴 불교경전 = 金光明最勝王經 : 시대 = 조선 1622년(광해군 14년)  소장 = 동국대 박물관

선조의 비 인목왕후(仁穆王后 1584년~1632년)가 아들인 영창대군의 극락왕생과 딸인 정명공주의 장수와 복락을 기원하며

손수 필사한 사경(寫經)이다. 진언을 외우며 복을 빌면 부귀영화를 누리고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있다는 내용이다.

 

 

인목왕후가 손수 쓴 불교경전 = 金光明最勝王經 : 시대 = 조선 1622년(광해군 14년)  소장 = 동국대 박물관

 

 

인목왕후가 손수 쓴 불교경전 = 金光明最勝王經 : 시대 = 조선 1622년(광해군 14년) 

 

 

華嚴經(화엄경)  :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 269    시대 = 조선 17세기   소장 = 서울 지장암

이 책의 판식(板式)은 사주단변(四周單邊), 반곽(半郭) 20.2×16.3cm, 무계(無界), 반엽(半葉) 6행 15자, 주(註)는 쌍행(雙行), 간혼흑구(間混黑口),

내향혼엽화문어미(內向混葉花紋魚尾), 판심(板心)은 화엄(華嚴)이며 표지는 감색(紺色) 비단으로 되어 있다.

대방광불화엄경은 한국 불교에 있어 가장 핵심적인 경전 가운데 하나로 대방광불화엄경소는 실차난다(實叉難陀)가 한역한

주본화엄경(80권본)을 당나라 징관(澄觀)이 소(疏)를 붙인 것에 송(宋)나라 정원(淨源)이 주해한 120권 가운데 24권 12책이다.

이 화엄경소는 대각국사 의천(義天)이 교장수집(敎藏收集)과 구법(求法)을 위해 송나라에 들어갔을 때 각별한 교분을 맺은 정원(淨源)이

상인 서전(徐戩)을 통하여 경판을 보내 왔던 것으로 현재까지도 우리나라 불교 강원의 교과 과정에서 사용되고 있다.

이 책의 간기(刊記)에는 각수(刻手)를 간자(刊字)로 표기하고 있으며 각수는 조운(祖云), 성감(性甘), 법상(法尙), 성호(性湖), 영준(英俊),

학수(學修) 등 17명이 참여한 것으로 되어 있다. 또한 현수(玄修), 상정(尙正) 등이 도대시주(都大施主)로 참여하고 있으며,

혜순(惠淳)의 화주로 1629년~1631년까지 3년여에 걸쳐 경기도 삭령(현 연천) 용복사(龍腹寺)에서 개판한 것을 인출한 것이다.

<문화재청의 글>

 

 

華嚴經(화엄경)  :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 269호

경기도 용복사(龍腹寺)에서 개판(開板)한 것을 인출(印出)한『대방광불화엄경[大方光佛華嚴經]』이다.

감색(紺色) 구름무늬 비단으로 표지를 싸고 다섯개의 구멍을 뚫어 붉은 실로 묶었다.

 

 

지장암 목조비로자나불좌상  :  보물 제 1621호   시대 = 조선 1622년 나무에 도금

이 불상은 현재 종로구 창신동 지장암 대웅전의 삼신불상(三身佛像) 중 중앙에 있는 목조비로자나불좌상으로

1924년 강재희(姜在喜) 거사가 지장암을 중창하면서 이곳에 모셨다고 전한다.

앉은 높이가 117.5cm달하는 중형의 목조불상으로 보존상태는 양호하다. 이 상에서는 푸른 명주바탕에 붉은 글씨로 쓴

조성발원문(造成發願文)이 발견 되었다. 그 발원문에서 이 불상의 원 봉안처는 조선시대 왕실의 부녀자들이 출가 수행하던

자인수양사(慈仁壽兩寺)이며, 광해군의 정비인 장열왕비(章烈王妃, 문성군부인 유씨/1576~1623)가 광해군과 세자, 세자빈, 본인 및

작고한 친정부모, 작고한 대군과 공주의 천도를 위해 모두 11존의 불상과 불화를 동시에 조성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이 상은 11존상 중 하나이며, 현재까지 밝혀진 유일한 예에 속한다.

이 불상은 당대 최고의 고승 벽암 각성(碧巖 覺性)의 감수 아래 현진(玄眞), 응원(應元), 수연(守衍), 옥명(玉明), 법령(法玲), 명은(明訔),

청허(淸虛), 성인(性仁), 보희(普熙), 인균(印均), 경현(敬玄), 지수(志修), 태감(太鑑) 등 13명의 조상화원(造像畵員)과 성옥(性玉), 승일(勝一),

밀연(密衍), 의인(義仁) 등 4명의 치장(治匠)이 참여하였다.

이들은 17세기 각기 하나의 유파를 형성하며 시대를 풍미했던 조각승들로 당시 자인수양사 불사(佛事)의 중요성을 짐작할 수 있다.

이 지장암 비로자나불상은 당당한 불신표현에 얼굴의 표정은 순박하면서도 위엄이 있다. 몸체는 등에서 약간 앞으로 굽었고

법의의 옷 주름 표현이 부드러우며 볼륨감이 있고 자연스러우며 생동감이 넘친다.

이러한 얼굴표현은 현진과 수연이 으뜸 조각승〔首畵員〕으로 참여한 불상들과 비교되며, 신체와 옷 주름의 표현은 응원과 인균이 만든

유파의 불상들과 양식적으로 상통한다. 비로자나불의 지권인 (智拳印) 수인(手印)은 오른손으로 주먹 쥔 왼손을 덮은 모습인데,

이러한 수인은 전대에는 찾아 볼 수 없고 17세기 이후에 새롭게 대두된 것으로 현진(玄眞)이 제작한 1624년 법주사 대웅전 소조비로자나불상이 있고,

현진의 작풍을 계승한 청헌(淸憲)이 조성한 구례 화엄사 대웅전 목조비로자나불상도 이러한 지권인을 취하고 있어

현진파의 조상작품과 관련성이 있다.

이 불상은 광해군의 정비인 장열왕비가 직접 발원하여 조성한 왕실발원 불사라는 역사적인 가치와 17세기 전국에 걸쳐 활약한

대표적인 조각승들이 참여하여 공동작업으로 이룩한 작품이라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

 

 

지장암 목조비로자나불좌상 조성 기록 = 조성기(造成記) : 시대 = 조선 1622년(광해 14년)  위 보물 1621호 비로자나불 복장물

자장암 목조비로자나불상의 조성기(造成記)이다.푸른 명주에 붉은 경명주사로 조성 목적, 조성 시기, 발원자, 조각가 등

불상의 조성과 관련된 사항이 기록되어 있다.

 

 

地藏庵 木造毘盧遮那佛坐像 服藏遺物(지장암 목조비로자나불좌상 복장유물)  :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 269호

시대 = 조선 1622년(광해 14년)    소장 = 지장암

지장암 목조비로자나불상에서 나온 복장 유물이다. 목조비로자나불좌상은 1622년(광해 14년) 광해군 비(光海君 妃)

유씨(章烈王妃[장열왕비], 1576년 ~ 1623년)가 왕실과 친가를 위해 조성한 것이다.

불상 밑바닥의 복장공에서 노란 보자기에 싼 후렴통을 비롯하여 화엄경, 법화경의 경전과 다라니 등이 발견되었다.

 

 

地藏庵 木造毘盧遮那佛坐像 服藏遺物(지장암 목조비로자나불좌상 복장유물) 

지장암 목조비로자나불상에서 나온 복장 유물이다. 목조비로자나불좌상은 1622년(광해 14년) 광해군 비(光海君 妃)

유씨(章烈王妃[장열왕비], 1576년 ~ 1623년)가 왕실과 친가를 위해 조성한 것이다.

불상 밑바닥의 복장공에서 노란 보자기에 싼 후령통을 비롯하여 화엄경, 법화경의 경전과 다라니 등이 발견되었다.

 

 

보물을 넣는 통 = 候鈴筒(후렴통) : 서울 유형문화재 제 269호   시대 = 조선 17세기

후령통은 금 · 은 · 칠보 따위의 보물을 넣는 통으로 복장의 중심 물품이다. 은제로 된 통안에는 5약(인삼 포함), 금박, 수정 등과

쌀, 팥, 기장 등 5곡이 들어 있었다.  후령통을 감싼 보자기에는 5방의 범어(梵語)가 5색으로 쓰여 있다.

 

 

화엄경, 법화경의 경전과 다라니

부처이름을 외우면 복을 받는다는 경전 = 1)五千五百佛名神呪除障滅罪經(오천오백불명신주제장멸죄경) : 유형문화재 제 269호,  시대 = 조선 17세기

5500명의 부처님 이름을 외우면서  자기가 지은 죄를 뉘우치면 부처님의 보호를 받고 복을 받는다는 경전이다.

1240년(고종 24년)에 새긴 고려대장경 판본을 17세기에 인출한 것으로 보인다.

(박물관의 글)

 

3권(1, 3, 6) 3책이 가철(假綴)되었고 권4는 1~11장만 남아있고 이후는 탈락되었다. 규격은 38.1×27.5cm, 판식(板式)은 상하단변(上下單邊),

 상하 간(上下間)22.5cm , 무계(無界), 전엽(全葉) 23행 14자 판미제(板尾題)는 “五千五百佛名經 卷第一 第二十五張 長”이다.

이 책은 고려 고종(1240) 때 새긴 고려대장경 판본으로 북인도의 도나굴(闍那崛)이 8권으로 한역한 것 가운데 일부이다.

이 경전의 이름은 5500명의 부처님 이름과 신비한 주문으로 장애와 죄악을 없애게 하는 경전이란 뜻이다.

내용은 부처님 이름을 외면서 자기가 지은 죄를 뉘우치고 남들이 잘되는 것을 자신의 일처럼 기뻐하면 언제나 부처의 보호를 받고 괴로움을 당하지 않고

복을 받는다는 내용이다.
제작년대는 권 1,3,6 말에 “庚子歲高麗國大藏都監奉勅雕造”의 기록으로 보아 고려 고종 27년(1240)에 판각하고 조선후기(17세기)에 인출한 것으로 보인다.

 

2)妙法蓮華經(묘법연화경) 좌측 상단 

성종의 후궁인 숙용(숙용) 정씨와 소의(소의) 권씨가  시주하여 성종 연간(1469년~1494년)에 간행한  판을  17세기 경에 찍어낸

묘법연화경이다. 전체 5권(권, 1 · 2 · 3  · 4  · 6)이며 불복장용으로 인출하였던 듯 모두 낱장 상태로 있다.

(박물관의 글)

 

5권(1,2,3,4,6)이며 복본(10묶음)이 있고 모두 낱장이다. 규격은 20.2×13.8cm이고 판식(板式)은 사주단변(四周單邊),

반곽(半郭) 20.2 ×13.8cm, 무계(無界), 반엽(半葉) 10행 20자이다. 판심제(版心題)는 “法”이다.
묘법연화경은 줄여서 ‘법화경’이라고 부르기도 하며 천태종의 근본경전이다. 부처가 되는 길이 누구에게나 열려 있음을 기본사상으로 하고

있으며 화엄경과 함께 우리나라 불교사상의 확립에 가장 크게 영향을 끼쳤으며, 삼국시대 이래 가장 많이 유통된 불교경전이다.
이 책은 계환(戒環)의 묘법연화경인데 급남(及南)의 요해서(要解序)가 붙어있고 불복장용으로 인출하였던 듯 모두 낱장 상태로 있다.

성종의 후궁인 숙용 정씨(淑容 鄭氏)와 소의 권씨(昭儀 權氏)가 시주자(施主者)로 참여하여 조선 성종 연간에 간행한 판에서

17세기 경에 찍어낸 판본이다.

 

하단의 경 = 3)부처 이름을 외우면 죄가 소멸된다는 경전  = 佛說佛名經[불설불명경]

부처의 명호를 독송하면 모든 죄가 소멸된다는 내용의 경전이다. 전체 12권 가운데 권 제2와 제 3은 가철되었고,

나머지는 낱장으로 남아있다. 1242년(고종 29년)에  새긴 고려대장경 판본은 17세기에 인출한 것으롤 보인다.

<박물관의 글>

 

2권(권2,3) 2책이 가철(假綴)되었고 낱장이 다수이다. 규격은 38.2×27.4cm,
판식(板式)은 상하단변(上下單邊) 상하 간(上下 間) 22.8 cm, 23행 14~15자, 권수제(卷尾題)는 “佛名經 第 二卷 第三張 恃”이다.
이 책은 고려 1242년(고종) 때 새긴 고려대장경으로 후위(後魏)의 보리유지(菩提流支)가 한역한 불명경이다.

이 경전은 부처의 명호를 수지 독송하면 모든 고난을 멀리하고 악도에 떨어지지 않고 모든 죄과를 소멸하며 삼매를 얻을 수 있다는 내용이다.

전체 12권 가운데 권 제2와 3은 가철되어 있고, 나머지 권은 낱장으로 남아 있다.

제작년대는 권 2,3 말에 “壬寅歲高麗國大藏都監奉勅雕造”의 기록으로 보아 고려 고종(1242년) 때 새긴

고려대장경판에서 조선후기(17세기)에 인출된 것으로 보인다.

 

 

문정황후가 발원한 나한도 = 五百羅漢圖[오백나한도] : 시대 = 조선 1562년(명종 17년)

명종의 어머니인 문정왕후(문정왕후, 1501년~1565년)가 나라의 평안과 왕의 무병장수 및 자손의 번영을 기원하며 제작한

오백나한도 중 제 153 나한  덕세위존자(德勢威尊者)를 그린 그림이다.

 

 

문정황후가 발원한 나한도 = 五百羅漢圖[오백나한도]

 

 

測雨臺(측우대)  : 보물 제 844호   시대 = 조선 1782년(정조 6년)

창덕궁 측우대(昌德宮 測雨臺)는 조선시대에 강우량을 측정하는 측우기를 올려 놓았던 대석(臺石)이다.

높이 30.3㎝, 가로 45.3, 세로 45.5㎝의 대리석으로 만든 이 측우대는 정조 6년(1782) 6월부터 7월 사이에

계속되는 가뭄에 비오기를 바라는 간절한 뜻을 하늘에 알리고 비를 기다리는 의식적인 의의를 담고 있다.

측우기는 한국전쟁 때 없어지고 현재 측우대만 국립고궁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대석의 4면에 새겨진 글에는 측우기의 제작 경위와 그 뜻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말하고 있어 조선 기상학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측우기와 측우대는 영조 때 전국적인 정비 이후에도 필요에 따라 중앙이나 지방에서 제작되었다.

남아 있는 유물은 1782년에 제작한 측우대와 1811년의 측우대, 그리고 1837년의 측우기가 있다.

<문화재청의 글>

 

 

금영 측우기 (錦營 測雨器)보물  제561호   시대 =  조선시대

빗물을 그릇에 받아 강우량을 재는 측우기는 조선 세종 23년(1441)에 만들어진 후 여러 차례 다시 만들어졌으나,

현재 남아 있는 것은 헌종 3년(1837)에 만들어진 측우기가 유일하다.

금영 측우기(錦營 測雨器)는 높이 31.5㎝, 지름 15.3㎝로 원통형의 표면 3곳에 대나무처럼 도드라진 마디가 눈에 띤다.

동그란 통은 빗물을 받는 그릇으로 여기에 주척이라 부르는 자가 있어 측우기에 고인 빗물의 깊이를 쟀다.

원통형 표면에 상단(상단)과 중간 두곳에 융기된 마디가 있고, 중앙부의 두마디 사이에 6줄의 명문이 새겨져 있다.

 

『錦營 測雨器 高一尺 五寸 徑七寸 道光丁酉製 重十一斤[금영 측우기 고일척 오촌 경칠촌 도광정유제 중십일근]』이라는

명문이 6행에 걸쳐 새겨져 있다.

원래 충청남도 공주에 있던 것이 일본으로 반출되었다가 다시 반환된 문화재이다.

공주 박물관에는 이 측우기를 받쳤던 것으로 전해지는 정사각형의 받침돌이 남아 있다.

<문화재청의 글>

 

 

   

『錦營 測雨器 高一尺 五寸 徑七寸 道光丁酉製 重十一斤[금영 측우기 고일척 오촌 경칠촌 도광정유제 중십일근]』이라는

명문이 6행에 걸쳐 새겨져 있다.

 

 

 

 

測雨臺(측우대)  : 보물 제 844호   시대 = 조선 1782년(정조 6년)

강우량을 측정하는 측우기의 바침이다. 네 측면에는 가뭄이 극심해지자 정조 임금이 비를 기원하는 뜻에서 세종 대의 측우기를 원형으로 삼아

만들어 창덕궁에 두었다는 내용의 명문이 새겨져 있다., 황동 측우기는 보룸 제 561호 금영(錦營) 측우기를 복원한 것이다.

 

◈이 글은 심염조(沈念祖)가 짓고 정지검(鄭志儉)이 썼다.

 

4면에 음각(陰刻)된 측우기명(測雨器銘)의 첫 구절에

“測雨之有器 實於 世宗二十四年 鑄銅爲之 高一尺五寸 圓徑七寸 置書雲觀及諸道郡縣 每雨尺其深以聞 先大王四十六年 得其舊制

鑄置昌德慶熙二宮及 八道兩都 其爲器雖小 兩聖朝憂勤水旱之政在焉 顧不重歟...... 라고  측우기에 대한 역사적 사실들을 기록하고 있어서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측우기명(測雨器銘)을 짓고 글을 쓴 두 직제학(直提學)은 규장각(奎章閣)의 직제학인 심염조(沈念祖, 1734-1783)와 정지검(鄭志儉, 1737-1784)이며,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의 정조(正祖)6년 5월 24일 경신(庚申) (1782년 7월 4일) 기록에는 왕(王)이 직접 우사단(雩祀壇)에서 기우제를 지내자

비가 내린 것을 기념하는 내용을 돌에 새기라는 정조의 명령과 함께, 규장각 측우기를 새로 만들었다(奎章閣亦新造測雨器, 규장각역신조측우기)는

 기록이 나오므로 필자는 1998년 4월부터 이 대리석 측우대를 규장각측우대라고 합니다.

 

♣♣♣

다음은 규장각측우대 옆의 4면에 새겨진 측우기명(測雨器銘) 한글번역문 전문(全文)입니다. 괄호안의 한글과 숫자는 필자가 달아놓은 주석이고,

한문은 이해를 돕기위한 것입니다.

 

“구리로 주조(鑄造)한 높이 1척 5촌, 원의 직경 7촌 되는 측우기로 우량(雨量)을 재는 것은 세종24년(1442) 시작되었습니다.

서운관(書雲觀)과 각도(各道)의 군현(郡縣)에서 비가 올 때 마다 우량을 재어서 보고(報告)하였습니다.

선대왕(先大王, 영조) 46년(1770)에 옛 제도를 따라 창덕궁 경희궁의 두 궁궐과 팔도(八道) 양도(兩都; 松都(개성), 江都(강화))에서

측우기로 우량을 측정하기 시작했습니다.

비록 그 기기는 작으나 두 성조(聖祖; 세종, 영조)께서 물난리와 가뭄을 다스리는데 크게 힘쓰신 뜻이 거기에 있으니 어찌 소중하지 아니합니까?

성상6년(정조6년, 1782) 여름 경기전역이 크게 가물어 기우제를 여러 번 지냈으나 효험이 없었습니다.

이리하여 성상께서는 자신을 책(責)하고 언로(言路)를 터놓으며, 친히 기우제단에 나와 제사를 올리고, 밤새도록 머물러 있다가 날이 샌 뒤

옥문(獄門)으로 가서 사형수를 제외한 죄수들을 석방하여 비가 오기를 빌었습니다.

도성(都城)에 있는 백성들이 이를 우러러 보고 감격하며, 우는 사람까지 있었으며, 성상께서 백성을 위해 이처럼 애쓰시니 비가 꼭 올 것이고,

비록 비가 내리지 않더라도 비 온 것이나 같이 기쁘다고 하였습니다.

 

과연 해가 지기도 전에 큰 비가 밤까지 내려 우량(雨量)이 1촌 2분이나 되었으니, 이는 실로 성상께서 지성하심에 하늘이 감동한 것입니다.

성상께서는 그래도 비가 미흡한 것을 걱정하시고 내각에 분부하여 측우기를 이문원 정원에 설치하고 기다리게 하였습니다.

비가 흡족히 내리자 신(臣) 염조와 신(臣) 지검에게 글을 쓰라 하시니, 이 기쁨을 기념하고자 한 것입니다.

 

신(臣)들은 가까이 모시고 있는 신하들이라, 비가 오지 않을 때에는 먼저 성상께서 백성을 위해 걱정하시는 것을 알고,

감히 그 걱정을 함께하지 않을 수 없으며, 비가 온 다음에는 성상께서 백성을 위해 기뻐하시는 것을 알고, 감히 그 기쁨을 함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측우기에는 임금과 백성들의 걱정과 기쁨이 얽혀있으니, 신(臣) 등이 공순하게 지키고 기다려야 합니다.

이에 두 손을 모으고, 머리 숙여 글을 새깁니다. 여기 있는 측우기의 1푼 1치를 보고도, 멀리 떨어진 곳의 사정을 알 수 있습니다.

비가 적으면 가물까 염려되고, 많으면 홍수 날까 상심하게 되니 언제나 적당하기만을 빕니다.

분부를 받들어 직제학 신 심염조가 글을 짓고, 직제학 신 정지검이 글을 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