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화이야기=고려외

국립 전주 박물관

백련암 2016. 3. 17. 14:11

전주 국립박물관

 

전북 지역은 서쪽으로는 바다와 평야를, 동족으로는 산간 지역을 두고 있어서 다양한  자연환경을 접할 수 있는 곳이다.

또한 금강과 만경강, 섬진강, 동진강등의 큰 강을 끼고 있어서 선사시대부터 역사시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문화가 꽃필 수 있었던 곳이다.

뿐만 아니라 전북 지역은 한반도 남부 지역과 중부, 서북부, 멀게는 중국까지 이어지는 중요한 길목에 위치하여 오랜 시기 동안 교류의

중심지가 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전북 지역의 주민들은 주체적으로 외부의 문화 요소를 받아들이고 변형시켜 자신들만의 문화를 만들어 나갔다.

 

국립 전주박물관

 

 

    

좌측 글 = 서기 1987년 10월 14일 착공.    서기 1990년 10월 26일 개관

우측  글 =  국립 전주 박물관

 

 

현판

 

 

노천 전시물 =  돌방무덤(橫穴式石室墳[횡혈식석실분]) : 시대 = 三國時代 中 百濟時代(삼국시대 중 백제) 7세기

출토 = 全北 完州 芚山里 出土(전북 완주 둔산리 출토)

돌방무덤(橫穴式石室墳[횡혈식석실분])은 잘 다듬은 여러 장의 돌로 벽과 천정을 짜 맞추어 죽은 이를 묻는 공간을 만든 무덤을 말합니다.

전주 평화동에 있던 고분은 입구와 벽면에 여러장의 돌을 수평으로 좁혀 쌓아 돌방을 만든 것으로 보아,

완주 둔산리 고분보다 이른 6세기에 조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돌방무덤(橫穴式石室墳[횡혈식석실분])

 

 

군산 도암리 고분 = 群山 桃巖里 橫穴式石室墳 · 橫口式石槨墓[군산 도암리 횡혈실석실분 · 횡구식석곽묘])  :

시대 = 三國時代 中 百濟時代(삼국시대 중 백제) 6세기

이 두기의 고분은 원래 군산시 도암리에 있던 삼국시대 백제의 무덤입니다.

오른쪽 무덤은 시신을 넣은 나무 널(木棺[목관])을 보호 안치하기 위하여 돌을 쌓아 덧널(槨[곽])을 만들고,

출입구를 측면에 만든 앞트기식돌덧널무덤(橫口式石槨墓[횡구식석곽묘])이고,

왼쪽 무덤은 집처럼 꾸민 돌방과 출입구가 있는 돌방무덤(橫穴式石室墳[횡혈식석실분])입니다.

 

 

돌방무덤(橫穴式石室墳[횡혈식석실분]

 

 

    

출입구를 측면에 만든 앞트기식돌덧널무덤(橫口式石槨墓[횡구식석곽묘])

 

 

    

益山 彌勒寺地 石燈(익산 미륵사지 석등) : 시대 = 삼국시대 중 백제시대 7세기 전반

미륵사는 백제 무왕이 창건한 백제 최대의 사찰로 조선시대까지도 명맥을 유지했던 사찰이었기 때문에

 다양한 불교석조물이 많이 조성되었습니다.

그 가운데 석등은 미륵사지 창건 당시 조성된 것인데, 이후에 조성되는 석등은 대부분 이 석등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益山 彌勒寺地 石燈(익산 미륵사지 석등)

 

 

    

益山 帝釋寺地 石燈 屋蓋石(익산 제석사지 석등 옥개석) : 시대 = 삼국시대 중 백제시대 7시기 전반

출토지 = 全北 益山 帝釋寺地 出土(전북 익산 제석사지 출토)

백제 무왕이 창건한 제석사에 있던 석등 옥개석(屋蓋石)입니다. 팔각형 옥개석 윗면의 두툼한 연꽃무늬가 백제 기와의 연꽃무늬와 같은 것으로 보아,

이 석등 옥개석 역시 백제 무왕이 제석사를 창건한 때인 7세기 전반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武城里 出土 石佛(무성리 출토 석불) : 시대 = 高麗時代,  출토지 = 全北 井邑 武城里 出土(전북 정읍 무성리 출토)

정읍 무성리에서 출토된 석불은 다른 부처와 달리 손에 꽃을 쥐고 있습니다. 이 꽃은 용화(龍華)라고 부르는 꽃으로,

미륵불의 상징으로 여겨집니다. 미륵불은 미래에 올 부처로, 석가모니불이 열반에 든 뒤 56억 7천만년 후에 출현하여

세번의 설법으로 모든 중생을 교화한다고 합니다.

 

 

武城里 出土 石佛(무성리 출토 석불) = 하단 정밀

 

 

돌탑과 솟대

옛 마을 뒷산에는 수호신을 모신 산신당(山神堂) 또는 성황당(城隍堂)이 있었고 마을 입구에는 장승[벅수], 솟대[짐대], 돌탑, 신목(新木) 등으로

 이루어진 성스러운 공간이 있었습니다. 돌탑은 무주군 설천면 대평마을 입구의 조선시대 돌탑을 참고로 만든것이고

솟대는 부안군 부안읍 서와리 솟대[중요민속자료 제 18호]를 본 떠 만든 것입니다.

 

    

돌탑과 솟대

 

 

장승

장승은 마을어귀, 사찰입구 또는 길가에 세운 신상(神像)을 말합니다. 대부분의 장승은 마을제(洞祭[동제])의 대상이자

수호신으로 여겨졌을 뿐만 아니라 이정표, 풍수(風水)의 쇠처(衰處)를 비보(裨補)하기 위한 것으로도 여겨졌습니다.

이 석장승은 부안군 부안읍 서와리 장승(중요민속자료제 18호)을 본 떠 만든 것입니다.

 

당산은 민간신앙에서 신이 있다고 믿고 섬겨지는 대상물이다. 부안 서문안 당산은 높은 돌기둥과 돌장승이 각각 1쌍으로 이루어져 있다.

돌기둥은 마을 밖의 부정한 것에 대한 침입을 막고 마을의 평안함을 위해 세운 솟대의 일종이다.

이 돌기둥은 각각 할아버지당과 할머니당으로, 할아버지 당산은 서문안 당산의 주신으로서 꼭대기에는 돌로 조각된 새가 얹혀 있다.

할머니 당산은 새를 따로 얹지 않고 돌기둥 윗부분에 새겨서 표현한 특징을 보인다.

돌장승 역시 남녀 한 쌍이다. 할아버지로 불리는 상원주장군(上元周將軍)은 탕건(모자의 일종)을 쓰고 수염이 있다.

할머니는 할아버지보다 조금 작은 모습으로 몸체에는 하원당장군(下元唐將軍)이라 새겨져 있다.

풍수지리설에 바탕을 둔 신앙물 중 하나인 이 돌기둥은 ‘짐대’라고도 하는데

이곳의 지형이 배가 떠있는 형상과 같아서 안정감을 주기 위해 세워진 것으로 보여진다.

마을에서는 돌장승 2기와 돌기둥 2기를 하나의 단위로 삼아 마을의 신으로 모시며, 매년 음력 정월초하루 자정을 전후해서 당산제를 지낸다.

예전에는 공동체의식이 강해서 마을사람들이 함께 모여 제사를 드렸지만 최근에는 몇 집만이 참여하는 것으로 축소되었고

이들의 위치도 보호관리상 할머니당산 쪽에 모아두고 있다.

돌기둥에는 조성 연대와 건립자를 알 수 있는 기록이 남아 있어 숙종 15년(1689)에 건립된 것임을 알 수 있지만, 돌장승의 경우 만들어진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보통 나무로 세워지는 장승과 솟대가 돌로 만들어지는 변화의 과정을 볼 수 있는 민속자료이다.

 

 

십자무늬 청동의기 : 十字文 靑銅儀器[십자문청동의기]

 

 

고인돌의 부장품들 : 支石墓 副葬品(지석묘 부장품)

 

 

별자리가 새겨진 돌 : 星穴石(성혈석)

 

 

東周式銅劍(동주식동검) : 初期鐵器(초기철기)

전북 지역에서 한국식동검문화기에 중국과 직접적인 교류가 있었음을 보여주는 청동기가 확인된다.

완주 상림리의 유적에서는 중국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 즉 동주시대(東周時代, BCE 770~221)에 주로 제작, 사용된 동주식동검이 발견되었다.

이때 26자루의 동검을 특별한 시설을 하지 않고 구덩이에 한꺼번에 묻은 것으로 보아 의례를 치르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이외에도 익산 평장리 유적에서 확인된 중국 청동거울 역시 중국과의 직접적인 교류를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가야 무사의 갑주(甲胄) : 시대 = 加耶(가야),  출토지 = 남원 월산리 출토

갑옷은 날아오는 화살이나 적이 휘두르는 무기로 부터 무사의 신체를 보호했던 방어구이다.

4세기 경부터 널리 쓰이기 시작했으며 가야 무덤에서 집중적으로 발견된다. 초반에는 판갑옷(板甲)을 주로 사용하다

5세기 이후부터는 고구려의 영향으로 실용적인 비늘갑옥(札甲[찰갑])이 사용되었고, 이때부터 팔과 다리, 목을 보호하는 갑옷도 함께 만들어진다.

이러한 철제 방어구는 주로 큰 무덤에서 다른 종류의 많은 부장품과 함께 출토 되는데, 이를 통해 철제 갑옷이 방어구이자 권위의

 상징물로 기능했던 것을 알 수 있다.  

 

    

목가리개(頸甲[경갑])                가야 무사의 갑주(甲胄)                비늘갑옥(札甲[찰갑])

 

 

◈가야 무덤의 부장품◈

가야 사람들은 죽은 이를 위하여 무덤에 아주 많은 양의 부장품을 함께 묻었다. 중심이 되는 무덤에는 위세품과 장신구뿐만이 아니라

죽은 이와 가깝거나 죽은 이를 따르던 사람들을 함께 묻기도 하였다.

남원 월산리 유적에서 확인된 청자계수호와 철제 자루솥, 남원 두락리 유적의 흑옥과 은팔찌 등은 백제 지역에서 주로 확인되는 것으로,

백제와 전북 동부 지역 가야 사이의 교류 관계를 잘 보여준다,

이 외에도 가야 무덤에는 악귀를 물리치기 위하여 무기나 농 · 공구를 축소한 철기를 함께 묻기도 하였다.

 

닭머리 모양 청자 : 靑磁鷄首壺[청자계수호] : 시대 = 加耶(가야)

 

 

금귀걸이 : 金製耳飾(금제이식) : 출토지 = 長水郡 鳳棲里(장수군 봉서리)

 

 

 

 

 

 

 

 

 

 

◈백제의 또 다른 중심, 익산◈

백제가 사비로 수도를 옮긴 후 무왕(武王, 재위 600년~641CE) 이 왕위에 올랐다. 무왕은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신라 정벌에 나서고

중국 수(隋) · 당(唐)과 교류하는 한편, 안으로는 국가 사찰을 창건하고 궁성인 왕궁을 짓는 등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현재 익산에는 무왕의 궁성으로 추정되는 왕궁리 유적을 비롯하여 미륵사터와 제석사터, 쌍릉 등 무왕과 관련한 유적이 많이 남아 있다.

특히 왕궁리 유적에서는 대형 건물터와 정원뿐 아니라 국가의 수도임을 의미하는 "수부(首府)"를 새긴 기와 등이 확인되어 주목된다.

 

益山 雙陵 出土品(익산 쌍릉 출토품)  :  시대 =  백제   

3. 금동 나무널 꾸미개(金銅透飾座金具[금동투식좌금구])=小王墓    4. 金銅座金具[금동좌금구]=大王墓    5. 널 못(棺釘[관정])=大王墓

6. 齒牙(치아)=大王墓     7.옥꾸미개(玉製裝具[옥제장구])=大王墓     8. 有文木材(유문목재)= 大王墓

 

 

 

 

금동 나무널 꾸미개 : 鍍金透金具(도금투금구)  小王墓(소왕묘)

 

 

사발 : 陶製盌(도제완)  大王墓(대왕묘)

 

 

確金(확쇠)

 

 

 

 

 

確金(확쇠) : 시대 = 후백제   출토지 = 全州 東固山城(전주 동고산성)

확쇠란 = 문지도리의 장부를 끼우기 위해 확처럼 구멍을 내서 문틀에 댄 쇠.

대궐이나 한옥집 같은 큰 대문에는 문의 축을 고정하고 여닫을 때의 마찰로 인한 마모를 방지하는 것

 

 

光州 武珍古城 出土品(광주 무진고성 출토품) : 시대 = 후백제     출토지 = 光州 廣域市 武珍古城 出土品(광주 광역시 무진고성 출토품)

 

 

    

상서로운 새무늬 수막새 = 瑞鳥文圓瓦當[서조문원와당]  :  시대 = 후백제

 

 

 

 

 

 

片雲和尙浮屠(편운화상부도)

남원 실상사에 있는 편운화상부도에는 "정개(正開) 경오년(910년 CE)에 부도를 세운다." 라는 내용의 명문이 새겨져 있다.

정개(正開)는 후백제 견훤의 연호이며 편운화상은 통일신라 말 구산선문(九山禪門)의 하나인 실상산문(實相山門)을 연

홍척(洪陟)의 제자로 알려져 있다. 편운화상부도는 후백제가 이 지역을 장악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創祖洪陟第子[창조홍척제자]  =  (실상사를) 창건한 조사 홍척의 제자이며,

安峰創祖片雲和尙浮屠(안봉창조편운화상부도)  =  인벙실,ㄹ 게칭힌 편운화상의 부도이다.

正開十年庚午歲建(정개십년경오세건)  =  정개 십년 경오년(910년)에 세운다.

 

 

片雲和尙浮屠 擢本(편운화상부도 탁본)

 

 

◈전주, 조선왕실의 본향

태조 이성계(李成桂, 1335년~1408년)가 세운 나라 조선(朝鮮, 1392년~1910년)은 전주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통일신라 문성왕(文聖王, 839년~857년) 때 전주 이씨의 시조 이한(이한)이 이곳에 살기 시작하면서 전주는 왕실의 본향(本鄕)이 된 것이다.

 

조선의 여러 왕은 자신의 뿌리가 비롯된 *풍패지향(豊沛之鄕) 전주를 역사적 공간으로 만들었다.

왕과 왕실 자손의 태(胎)를 묻는 길지(吉地)로 전주를 택했으며 국가의 중요한 기록을 보관하는 사고(史庫)를 전주에 세웠다.

 

태조 *어진(御眞)을 모신 경기전(慶基殿), 시조의 위패(位牌)를 모신 조경묘(肇慶廟), 시조의 묘역인 조경단(肇慶壇)을 정비하고 대대로

제사를 모시기로 하였다. 왕실의 권위를 높이고자 할 때도, 선조들의 공덕을 기리고자 할 때도, 제국 열강과 어깨를 나란히 하려 할 때도,

전주는 그 어느 곳보다도 더 중요한 의미를 지닌 곳이 되었다.

 

이곳에 살던 사람들 역시 왕실 본향으로서 전주의 위상을 인식하고 이를 지키고자 하였다.

태조의 어진을 전주에 모시기를 요청한 것도, 전란에서 어진과 실록을 온전히 지켜낸 것도, 이 지역의 사람들이었다.

 

왕실 유적을 정비할 때 지원과 노력을 아끼지 않은 사람들 역시 이 지역의 보통 사람들이었다.

조선시대 전주는 왕실뿐만 아니라 지역민들이 소중하게 여기고 지켰던 역사적 공간이었다.

 

*풍패지향(豊沛之鄕) = 제왕의 고향, 중국 한나라를 세운 유방(劉邦)의 고향 패현(沛縣) 풍읍(豊邑)에서 유래되었다.

 

璿源系譜記略(선원계보기략)  :  시대 = 조선 1783년 이후    木版本(목판본)

조선시대 왕실의 족보이다,1681년(숙종 7년)부터 1931년에 이르기까지 각 왕대에서 부정기적으로 수정, 보완하여

*종신(宗臣), *조신(朝臣)들에게 *반포(頒布)한 것을 목판으로 간행한 것이다.

왕실의 여러 경조사(慶弔事)로 인해 새롭게 기록할 내용이나 변경할 내용이 생기면 수정하여 새로 간행하였다.

전주 이씨가 왕가가 되기 이전, 시조 이한(李翰)으로 부터 목조(穆祖)까지의 계보인 선원선계(璿源先系)와 목조에서부터 편찬된

당시의 왕실 계통이 수록된 선원세계(璿源世系) 등이 수록되었다.

 

선원세계(璿源世系)의 첫 부분에는 전주 이씨가 전주로부터 시작되었음을 밝히고 삼국시대부터 전주부(全州府)의 연력을 기록하였다.

또한 태조 원년 이래 전주가 어향(御鄕)으로서 완산유수부(完山留守府)로 승격되었다고 기록하여

조선왕실의 본향으로서 전주의 상징적 위치를 알려주고 있다.

 

종신(宗臣) = 왕족의 벼슬자리에 있는 사람      조신(朝臣) =  조성에서 벼슬을 하는 신하

반포(頒布) = 세상에 널리 퍼뜨려 알게 함

 

 

全州 李氏 族寶(전주 이씨 족보)  : 시대 = 조선 1855년    木活字本(목활자본)

전주 이씨 회안대군파(懷安大君派)의 족보이다. 회안대군은 태조 이성계의 넷째 아들인 이방간(李芳幹, 1364년~1421년)이다.

이 족보는 조선 왕실의 근본이 전주에서 비롯되었음을 밝히고 시조 이하의 계보와 회안대군파의 계보를 수록하였다.

특히 선원보략(璿源譜略)부분에서는 태조와 관련하여 운봉(雲峰)에서 왜구를 물리친 사실이 기록되어

조선왕실에서 황산대첩(荒山大捷)을 태조 이성계의 중요한 업적으로 중시하였음을 알 수 있다.

 

고려 우왕 6년(1380년) 왜적을 남원 운봉에서 물치치고 왜적의 장수 아지발도(阿只拔都)의 목을 베었다.

辛禑庚午大破倭賊于雲峰斬其將阿只拔都

신우경오대파왜적우운봉참기장아지발도

 

 

전라북도 일대 이성계 설화가 있는 곳의 표시

 

 

龍飛御天歌(용비어천가)  :  시대 = 조선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가는 조선 왕조의 창업을 송축(頌祝)한 서사시이다.

조선 왕실의 선조인 목조(穆祖), 익조(翼祖), 도조(度祖), 환조(桓祖)와 태조, 태종에 이르는 6대의 행적을

중국 고사(古事)에 비유하며 건국의 정당성을 강조하였다.

왕이 되는 것을 오랜 세월에 걸쳐 덕을 쌓아서 하늘의 명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후대 임금은 선조의 공덕을 헛되이 하지 말 것을 당부하였다.

 

자(尺)로서 제도(制度)가 나므로(하늘이 태조에게) 인정(仁政)을 맡기리라 하여 하늘 위의 금척을 내리시니

-용비어천가 제 82장

 

이성계의 조선 건국은 하늘의 계시에 따른 것이라는 설화가 전라도 지역에 전한다.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기 전 꿈에 하늘에서 신인(神人)이 내려와 금척(金尺)을 주고 개국의 명을 내렸다는 몽금척(夢金尺) 설화가

그 중의 하나로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에도 수록되어 있다.

전라도 지역에서는 태조가 이 꿈을 꾼 곳이 진안(鎭安) 마이산(馬耳山)이라고 전한다.

 

 

全州 李氏譜(전주이씨 족보)  : 시대 = 조선 1855년  木活字本(목활자본)

전주 이씨 회안대군파(懷安大君派)의 족보이다. 회안대군은 태조 이성계의 넷째 아들인 이방간(李芳幹, 1364년~1421년)이다.

이 족보는 조선 왕실의 근본이 전주에서 비롯되었음을 밝히고 시조 이하의 계보와 회안대군파의 계보를 수록하였다.

숙종과 관련하여 경기전에 태조 어진을 모셨다는 내용이 있는데 경기전이 세워진 이후에도 태조의 초상화가 계속 제작되었음을 보여준다.

 

태조 어진은 전주 경기전과 영흥 준원전에 봉안하였다. 숙종 14년(1688년)에 이를 모사한 1점을 한양 영희전에 봉안하였다.

睟容二本奉安于全州慶基殿永興濬源殿 肅宗十四年戊辰又模一本奉安于京都永禧殿

수용이본봉안우전주경기전영흥준원전 숙종십사년무진우막일본봉안우경도영희전

 

慶基殿(경기전)

조선시대에는 건국 초기부터 태조어진을 모시는 진전(眞殿)이 세워졌다. 진전은 조선의 수도인 한성, 태조 출생지인 함경도 영흥과 경주,

평양, 개성의 태조 옛 집터, 전주 등 모두 여섯 곳에 세워졌다. 경기전은 1410년(태종 10년) 전주에 세운 진전이다.

1409년에 전주부(全州府)에서 태조어진을 모시기를 청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이듬해 경기전이 완공되고

이곳에 경주 집경전(集慶殿)의 어진을 본 떠 그린 태조 어진이 모셔졌다.

 

湖南 節義錄(호남 절의록)  :  시대 = 조선 1799년   木活字本(목활자본)

임진왜란(1592년~1597년) 이괄의 난(1624년), 정묘호란(1627년), 병자호란(1636년~1637년), 이인좌의 난(1728년) 등

국난(국난)이 일어났을 때 공을 세운 전라도 출신의 충신, 열사(烈士), 의사(義士)들의 공을 기록한 책이다.

임진왜란때 전주사고에 보관된 실록과 전주 경기전에 봉안된 태조 어진을 정읍 내장산 용굴암(龍窟庵)으로 옮기고 지키는데

공을 세운 전라도 태인(泰仁)의 선비 안의(安義), 손홍록(孫弘祿) 과 경기전 참봉(參奉), 오희길(吳希吉)의 사적도 포함되어 있다.

 

안의는..... 경기전 참봉 오희길, 유신과 함께 어진과 실록을 정읍 내장산 용굴암으로 옮기고 순번대로 지켰다.

安義.....  慶基殿參奉吳希吉柳訊移奉御容及實錄于 井邑 內藏山 龍窟庵輪次守直

안의.....  경기전참봉의희길유신이봉어용급실록우 정읍 내장산 용굴암륜차수직

 

 

 

 

實錄箱子(실록상자)  : 시대 = 조선

실록을 보관한 상자이다. 상자 앞면에는 보관하는 실록의 명칭과 권 수가 기록된 종이가 부착되는데

이 실록 상자는 선조실록(宣祖實錄)을 보관하였던 상자이다.

 

 

御製樹德全編(어제수덕전편) 영조(영조, 1694년~1776년)  :  시대 = 조선 1771년   목판본

영조가 조경묘를 건립하고 그 경위와 감회를 적은 글이다. 영조는 중국 주(周)의 시조인 후직(后稷)이 덕을 쌓아 하늘의 명을 받은 것과 같이

조선왕실의 시조들이 선을 행하고 덕을 쌓아서 오늘의 조선이 있게 되었다고 하였다.

또한 시조로부터 천여 년이 지나 전주에 시조묘를 세우는 것은 주나라에서 지조를 제사했던 것과 같은 뜻이라 하였다.

*樹德(수덕) = 덕을 쌓음

 

昌德宮 禁標(창덕궁 금표)  :  시대 = 大韓帝國   출토지 = 全北 全州市 肇慶壇 出土(전주 전주시 조경단 출토)

                                                                全羅金石文 硏究會(전라금석문 연구회) 

조경단 구역에 일반인의 출입을 금지하는 표지석이다. 조경단 내에는 일반인이 거주하거나 농사를 짓는 일이 있어, 금지하는 명이 내려지기도 하였다.

이 금표는 고종황제가 조경단을 정비한 후 세운 표지석으로, "창덕궁(昌德宮)"이라고 새겨져 있다.

고종황제가 1911년까지 창덕궁에 기거하였기 때문에 조경단 역시 고종황제 및 황실의 소유지라는 의미로서 창덕궁이라는 명칭을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앞면 大韓肇慶壇(대한 조경단)이라고 고종황제가 직접 쓴 글씨

 

 

肇慶壇碑 榻本(조경단비 탑본)  :  시대 =  대한제국 1899년(비)   고려금석원(탑본)

1899년 고종은 전주 이씨의 시조 이한(이한)의 묘역인 조경단을 정ㅈ비하고 이한의 묏바리라고 전해지는 곳에 제사를 모시는

단(壇)을 쌓고 비(碑)를 세웠다.  비의 앞면은 고종황제가 "대한조경단(大韓肇慶壇)"이라고 직접 썼다.

또 비의 뒷면에는 전주부 북쪽 10리 되는 곳에 있는 건지산(乾止山)이 전주 이씨 시조 이한의 묘소라고 밝혔다.

또한 태조로부터 영조를 거쳐 고종에 이르기까지 조경단의 내력을 새겨 전주가 왕실의 본향임을 강조하였다.

 

 

    

大元帥寶(대원수보)  : 시대 = 大韓帝國(대한제국) 1899년

대원수보(大元帥寶)는 1899년(광무 3년) 육군과 해군을 총지휘하는 원수부(元帥府)가 설치되면서 군통수권자로서 황제가 사용한 것이다.

 

 

    

制誥之寶(제고지보) : 시대 = 대한제국 1897

1897년 대한제국 탄생 후 고종의 지위도 국왕에서 황제로 격상되어 호칭, 복식, 의장 등에서 여러 가지 변화가 있었다.

특히 관직과 각종 문서의 변화에 따라 이에 사용하는 어보(御寶)가 새로 제작되어 사용되었다.

제고(制誥)는 황제의 명령을 뜻하며, 제고지보(制誥之寶)는 정 1품에서 종 1품의 최고위 관료인 칙임관(勅任官)을 임명할 때 사용하였다.

 

 

    

高宗皇帝 御寶(고종황제어보)  : 시대 = 대한제국 1900년

대한제국을 연 고종황제의 인장이다. 이 인장에는 1873년, 1888년, 1890년, 1892년, 1900년에 고종황제가 받은 존호(尊號)들이 새겨져 있다.

존호는 왕실의 기념일이나 경사가 있을 때 왕과 왕비의 덕망과 업적을 찬양하여 세자 및 신하들이 올렸던  존귀함을 담은 호칭이다.

 

 

고종황제의 어진

흥선대원군과 조대비의 결탁으로 왕위에 오르다.

고종은 1852년(철종 3)에 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과 여흥부대부인 민씨 사이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철종이 1863년(철종 14) 12월 8일에 후사를 남기지 않고 죽자 조대비(신정왕후 조씨, 익종의 비)에 의해 후계자로 지목되어 왕위에 올랐다.

이때 고종의 나이는 12세에 불과했다. 이름은 희(熙), 아명은 명복(命福), 초명은 재황(載晃), 초자는 명부(明夫), 자는 성림(聖臨)이다. 

고종의 아버지 흥선군 이하응은 영조의 현손인 남연군(南延君)의 아들로,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가 계속되는 동안

여러 왕실 종친이 화를 입는 상황에도 처신을 잘해 살아남았다. 

시정잡배들과 어울리며 안동 김씨 가문을 기웃거리면서 스스로 친 난 그림이나 팔려는 흥선군을 경계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흥선군은 남몰래 정세를 살피며 조대비에게 줄을 대고 있었다. 풍양 조씨인 조대비는 흥선군과 결탁해 안동 김씨 세력을 몰아내려고 했다.

이로써 60년간 이어온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는 고종의 즉위와 함께 끝이 났다.

 

고종은 1866년(고종 3)에 민치록(閔致祿)의 딸을 왕비로 맞이하니, 민비(閔妃) 혹은 명성황후(明成皇后)이다.

고종과 민비 사이에서 4남 1녀가 태어났으나 27대 왕인 순종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일찍 죽었다.

이 밖에 고종은 7명의 후궁에게서 3남 1녀를 두었다.

 

 

 

 

    

 

 

東醫寶鑑(동의보감) : 許浚(허준, 1539년~1615년)   시대 = 조선 1610년   木版本(목판본)

전라도와 더불어 감영판(監營版)을 가장 많이 출판하던 곳은 경상도였다. 경상감영은 191종의 서적을 출판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경상감영에서 출판한 책들은 간기에 "영영(嶺營)"이 라고 표시되어 있다.

『동의보감[東醫寶鑑]』은 허준 등이 편찬한 의학 서적으로 1610년(광해군 2년)에 총 25권으로 완성하여 1613년에 간행되었다.

 

 

詩傳大全(시전대전)  :  시대 = 조선

명나라 영락(永樂) 연간(1403년~1424년), 호광(胡廣, 1370년~1418년) 등이 황제의 명을 받아 편찬한

『오경대전[五經大全]』중『詩經大全[시경대전]』을 인쇄한 책이다.

간기에 "내각장판(內閣藏板)"이라는 기록이 있는데, 이는 규장각(奎章閣)에서 출판한 서적을 가리킨다.

내각장판은 완영판(完營版)에 비해 글자가 정교하지만 책이 적고 여백이 적고 표지와 속지의 질도 역지 좋지 않았다.

 

♠오경(五經) = 유학의 다섯 가지 경서 : 시경, 서경, 주역, 예기, 춘추     *규장각(奎章閣) = 조선왕실 도서관이자 학술, 정책을 연구하던 기관

 

 

明義錄(명의록)  :  金致仁(김치인, 1716년~1790년)    시대 = 조선 1777년     木版本(목판본)

정조(正祖, 재위 1776년~1800년)가 왕세손 시절 대리청정(代理聽政)을 반대한 세력의 반역을 진입하고,

왕세손을 도운 홍국영(洪國榮), 정민시(鄭民始)등의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편찬한 책이다.

간기의 "완영(完營)"이라는 기록을 통해 전라감영에서 출판한 책임을 알 수 있다.

 

대리청정(代理聽政) = 세자나 세손이 왕을 대신해 정사를 돌봄

 

 

全羅監營版 書籍(전라감영판 서적)

조선시대 각 도의 행정 중심인 감영(監營)에서는 중앙 정부의 요청에 따라 목판을 새겨 서적을 출판하여 바쳤다.

감영에서 출판한 책은 주로 정치 · 역사 · 사회제도 · 유학 · 의학 · 군사와 관련된 것이었다.

전라감영에서는 1428년(세종 10년)에 『詩經大全[시경대전]』, 1429년(세종 11년)에『禮記大全[예기대전]』등의

서적을 간행한 이후 60여 종의 책이 출판하였다. 이들 서적에는 전라감영의 별칭인 "완영(完營)"이라는 표시가 있다.

 

 

孟子(맹자)  ; 조선후기

감영이 있던 지역에서는 사가(私家)에서도 개인이 소장할 목적으로 서적을 출판하였다. 이러한 서적을 사간본(私刊本)이라고 한다.

전주에서 출판된 사간본은 유교 경서나 역사서, 문집류가 주를 이룬다. 또한 간기에는 "완부(完府)나 "풍패(豊沛)"라는 표시가 있다.

이 책 간기에는 "세재정묘풍패신간(歲在丁卯豊沛新刊)"이라 표시되어 완판사간본임을 알 수 있다.

 

 

全韻玉篇(전운옥편) :  시대 =  1904년

한자의 음과 뜻을 쉽게 찾아볼 수 있게 만든 책이다. 한자 아래에 한글로 음을 표시하고 사성(四聲)의 운(韻)을 달았다.

한자(漢字)의 운(韻)을 분류하여 일정한 순서로 배열하는 운서(韻書)보다 상세한 뜻을 달았다.

 

완판방각본 - 교육용 도서 및 교양 도서

완판방각본 중에는 교육을 위한 서적, 생활에 도움이 되거나 교양을 위한 책들이 대량으로 출판되었다.

『天字文[천자문]』과 같은 아동용 한자 학습서, 여러 사람에게 편지 쓰는 방법을 소개한『諺簡牘[언간독]』

중국 역사를 소개한『通鑑[통감]』, 한자 학습을 위한「全韻玉篇[전운옥편」,『於定奎章全韻[어정구장전운]』등이 대표적이다.

 

 

書傳諺解(서전언해)  :  시대 = 조선 후기

칠서 중 하나인『서경』에 한글로 토를 달고 원문을 번역한 책이다. 서경은 중국 초기 국가인 하(夏), 은(殷), 주(周)의 역사를 기록하였다.

 

완판 방각본 - 하경룡장판

1810년 전주의 하경룡(河慶龍)이 발간한 서적이다. 당시 감영에서 간행하지 않은 종류의 책들을 민간에서 간행한 것으로 추정된다.

『大學[대학]』,『中庸[중용]』,『論語[논어]』,『孟子[맹자]』,『詩傳[시전]』,『書傳[서전]』,『周易[주역]』등

칠서(七書)와 이를 한글로 변역한 칠서언해(七書諺解)가 있다.

 

 

楚漢傳(초한전)  :  시대 = 1909년

중국 한(漢)나라 의 유방(劉邦)과 초(楚)나라의 항우(項羽)가 천하를 놓고 벌였던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엮은 한글 소설이다.

간기에 "을유계춘완산개간(乙酉季春完山開刊)"이라고 표시되어 1909년 전주에서 간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완판방각본 - 영웅 · 군담소설

완판방각본 소설 중 판소리계 소설과 함께 주류를 이룬 것은 영융, 군담(軍談) 소설류이다.

완판본 영웅, 군담 소설은 서울에서 출판된 경판에 비해 그 길이가 길었고 남성을 주인공으로 한 소설이 많았던 점을 특징으로 들 수 있다.

『삼국지』,『조웅전』,『소대성전』,『용문전』,『유충렬전』,『초한전』등이 간행되었다.

 

♠군담(軍談) = 전쟁과 관련된 이야기

 

 

沈淸傳(심청전) : 시대 = 1920년

앞을 보지 못하는 아버지의 눈을 밝히기 위한 효녀 심청의 이야기이다. 서울 한남서림에서 출판한 경판본(京版本)으로 판소리 계열인

완판본과는 달리 문장체로 써졌다. 또 경판본 한글 소설은 완판본과는 달리 흘림체인 것도 하나의 특징이다.

 

완판방각본 - 판소리계 소설

완판방각본의 절반 정도는 고대소설이다. 이는 풍요로운 삶을 누렸던 이 지역 사람들이 오락으로 이러한 책들을 즐겼음을 알려준다.

1823년 최초의 목판 한글 고소설인『별월봉긔』가 출판된 이후, 다양한 한글 소설이 출판되었다.  그 중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즐기고

입으로 전해지던 판소리를 판각한 판소리계 소설이 있다. 완판본 판소리계 소설은 경판본에 비해 길이가 길고 전라도 지역의 방언이

그대로 담겨진 것이 특징이다. 『춘향전』,『심청전』,『심청가』,『화용도』,『토별가』등이 있었다.

 

 

全州府 地圖(전주부 지도) :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 80호,  시대 = 조선 19세기   종이에 색(紙本談彩[지본담채])

조선왕실의 본향이었던 전주는 1392년(태조 1년) 완산유수부(完山 留守府)로 승격되었으나, 1403년(태종 3년) 전주부(全州府)로 이름이 바뀌었다.

또한 제주도를 포함한 전라도를 총괄하는 전라감영(全羅監營)이 설치되어 호남지역 문화와 정치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 병풍은 전주성과 그 주변을 그린 지도다. 첫 번째 폭과 마지막 폭에는 전주부의 변천 과정과 전주성 내외의 주요 장소의 위치,

간단한 연혁 등이 기록되었다. 객사(客舍)와 풍남문(豊南門), 패서문(沛西門) 그리고 경기전(慶基殿)과 조경묘(肇慶廟) 등이 잘 묘사되어 있다.

 

 

첫 번째 폭과 마지막 폭에는 전주부의 변천 과정과 전주성 내외의 주요 장소의 위치, 간단한 연혁 등이 기록되었다.

 

 

전주성과 그 주변을 그린 지도다.

객사(客舍)와 풍남문(豊南門), 패서문(沛西門) 그리고 경기전(慶基殿)과 조경묘(肇慶廟) 등이 잘 묘사되어 있다.

 

♠♠♠

이 지도는 전주부성 안를 중심으로 전주부 내의 전역을 그린 대형지도로서 4폭의 병풍식으로 되어 있다.

지도에는 성의 표시와 성문 그리고 관아의 배치․향교․서원․수목 등이 그려져 있고,

성 밖은 산천의 지형을 옛날 방식으로 그렸으며 각 면의 이름을 써 붙였다.

지도의 귀퉁이에는 전주부의 사방거리와 이웃 고을로부터의 거리를 표시하고 있고, 전주부내 4면의 원호(元戶) 3,783호,

전주부 외 각 면의 원호 12,215호 등 총 31개 면에 원호 15,998호를 정확하게 밝혀두고 있다.

<문화재청의 글>

 

 

첫 번째 폭과 마지막 폭에는 전주부의 변천 과정과 전주성 내외의 주요 장소의 위치, 간단한 연혁 등이 기록되었다.

 

 

 

 

石芝 蔡龍臣(석지 채용신)

채용신(1850년~1941년)은 초상화로 이름을 알린 화가이다. 왕의 초상을 그리는 어진화사(御眞畵師)로 활약하였고

1910년 이후 본격적으로 초상화를 그리기 시작하였다.

그는 조선시대 초상화의 전통을 계승하면서 서양화법과 근대 사진술을 반영하여 독특한 화풍을 이루었다. 사진을 바탕으로 그림을 그려

사실적이고 입체적인 표현을 하였지만, 대상을 철저히 파악하여 그 인물의 정신과 실재감을 되살린 것이다.

채용신은 전라도 지역의 항일운동가 및 유학자들과 교유하면서 그들의 초상을 남겼다.

1920년대 이후에는 정읍에서 주문에 의한 초상화를 다량으로 제작하였다.

40여 년 동안 전라도에서 활동하며 수많은 사람들의 다양한 삶의 모습들을 화폭에 담은 것이다.

 

 

金瓘 肖像(김관 초상)  :  시대 = 1914년 작가 = 蔡龍臣(채용신, 1850년~1941년)

채용신은 언양 김씨 집안의 주문에 따라 이 가문의 초상을 제작하였다. 이는 조선 전기 문신(文臣) 김관(金瓘, 1425년~1485년)의 초상으로,

채용신에 의해 새롭게 제작된 것이다. 화면 좌우에 적혀 있는 글에서 초상화의 주인공과 작자, 제작 시기를 비롯하여

13대손 철상(哲相)이 초상을 모셨음을 밝히고 있다.

 

 

龜巖 懸板(구암 현판) : 시대 = 조선 19세기   성예가 = 李 三晩(이삼만, 1770년~1847년)

이 삼만은 조선 후기 전라도 지역의 서단을 대표하는 서예가로서 전국 각지에 그가 쓴 많은 현판이 전해진다.

이 현판은 김해 김씨의 재실(齋室)인 귀로재(歸老齋)에 걸려 있었던 것이다.

 

蒼巖 李 三晩(창암 이삼만, 1770년~1847년)

李 三晩(이삼만, 1770년~1847년)은 전라도를 대표하는 조선 후기 서예가이다.

 서울의 김정희(金正熙, 1786년~1856년), 평양의 조광진(曺匡振, 1772년~1840년)과 함께 조선 후기 3대 명필(名筆)로 꼽힌다.

그는 많은 노력과 정진을 통해 명필의 경지에 올랐다. 특히 그는 모든 서체를 고루 잘 썼는데,

말년에 완성한 흐르는 물과 같은 유수체(流水體)가 그의 대표적 서체로 널리 알려졌다.

또한 전국 각지에 그의 글씨가 담긴 많은 현판과 금석문이 전해진다.

이삼만은 후학들에게 서법(書法)의 전수를 위해 노력하였다.

이러한 노력은『華東書法[화동서법]』이나 그가 남긴 많은 서첩들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華東書法(화동서법) : 서예가 = 李 三晩(이삼만, 1770년~1847년)   시대 = 조선 19세기 

『화동서법[華東書法]』은 1800년 이삼만이 글씨 쓰는 법을 전수하기 위해 전주에서 간행한 책이다.

이때 찍은 목판본은 음각본(陰刻本)이었으며 이후 화동서법은 한양에서 양각본(陽刻本)으로 다시 발간되었다.

책의 이름은 중화(中華)와 동국(東國), 즉 중국과 조선의 서법을 모았다는 뜻이다.

 

송(宋)의 미불(米芾, 1051년 ~1107년),  채양(蔡襄, 1012년~1067년), 명(明)의 동기창(董其昌, 1555년~1636년),

조선의 한호(韓濩, 1543년~1605년), 윤순(尹淳, 1680년~1741년), 이광사(李匡師, 1705년~1777년)의 글씨가 소개되어 있다.

책의 머리에 이 여섯 명필을 소개하는 서문을 썼는데 서문은 왕희지(王羲之)의 『大唐三藏聖敎序[대당삼장성교서』에서

필요한 글자를 모은 것이다.

 

 

永字八法(영자팔법)

해서(楷書)를 쓸 때 기본이 되는 것으로 "영(永)'이라는 글자의 조형적 특성을 모든 글자에 공통적으로 적용한 것이다.

 

永字八法(영자팔법)

가로 획 = 勒(륵)     오른쪽 삐침 = 策(책)     왼쪽으로 길게 삐침 = 掠(략)     세로 획의 끝 부분에서 = 趯(적),  쓰러져 있는 붓을 들면서 생기는 삐침

側(측) = 點(점 = 영자 매위 상단의 점)     책과 반대되는 모양으로 첫머리 부분을 책보다는 강조 = 啄(탁)

오른쪽으로 간 붓에 힘을 주어 붓 끝을 펴서 급히 쓰는 획 = 磔(책)     세로 획 = 努(노)

 

勒 = 굴레 륵,    策 =채찍 책,    掠 =노략질할 략,    趯 =뛸 적(뛰다),    側 =곁 측 (맨위 점),   

啄 =쫄 탁,    磔 =책형 책(찢다. 가르다),    努 =힘쓸 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