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화이야기=고려외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기록되어 있는 백제 역사유적지구 미륵사지 유물

백련암 2016. 4. 1. 19:34

미륵사지유물전관 소개

미륵사는 백제 제 30대 무왕(600년~641년)대에 창건되었다. 미륵사지(사적 제 150호)에는 우리나라 최대의 석탑으로 일컬어지는

국보 제 11호 미륵사지석탑, 보물 제 236호 당간지주 2기, 도 지정문화재 자료 제 143호 석등 하대석 2기와, 여러 건물지, 가마터,

공방지, 연못 등이 있다.  그리고 미륵사지의 남서쪽에 미륵사지 유물전시관이 있다.

 

미륵사지유물전시관의 출발은 백제의 문화를 정립하기 위한 학술자료를 얻고 유적을 보존 정비하고자 미륵사지 각 유구의

순차적 발굴조사가 시작된 1980년부터이다. 전라북도 미륵사 1000여년(600년~1600년전후)의 역사와 신앙 · 생활문화등이 복합되어

있는 미륵사지출토 유물들을 발굴현장 옆에서 느끼고 관람할 수 있도록 전시관을 건립하였다.

전시관은 미륵사지의 경관을 고려하여 중심지역보다 낮은 위치에 세워 조화를 꾀했고 건물의 모습은 미륵사지석탑의 이미지를 반영하였다.

미륵사지 유물전시관은 1992년에 착공하여 1994년에 완공하고, 1997년 5월 9일에 개관하였다.

 

益山 彌勒寺址(익산 미륵사지 ) : 사적  제150호    시대 =  백제♣

익산 기양리에 있는 백제 때의 절터이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백제 무왕 때 왕이 왕비와 사자사(師子寺)에 가던 도중 용화산 밑의 연못에서 미륵삼존이 나타났는데,

왕비의 부탁에 따라 이 연못을 메우고 3곳에 탑, 금당, 회랑을 세웠다고 한다.

기록에 따르면 미륵사는 백제 무왕 때 지어져 조선시대에 폐사되었음을 알 수 있다.

절의 배치는 동 · 서로 석탑이 있고 중간에 목탑이 있으며 탑 뒤에는 부처를 모시는 금당이 각각 자리한다. 이것이 복도(회랑)로 구분되어

 매우 특이한 가람배치를 하고 있다. 금당의 규모는 앞면 5칸 · 옆면 4칸이고 바닥에는 빈 공간이 있는데, 이것은 바닥마루의 습기에 대비한 것으로 보인다.

고려 · 조선시대 건물터에서 온돌시설이 발견되어 온돌의 발전과정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출토된 유물로는 기와 · 토기 · 금속 · 목재 등 다양하며 글자를 새긴 기와도 많이 발견되었다. 서쪽 금당 앞의 석탑은 국보 제11호로 지정되었는데,

현재 남아있는 석탑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목조건축의 기법을 사용하여 만들었다.

무너진 뒤쪽을 시멘트로 보강하였던 것을 새롭게 복원하기위해 해체 중에 있다. 전시관에는 미륵사의 복원된 모형이 있다.

미륵사는 신라의 침략을 불교의 힘으로 막고자 지은 호국사찰로서 백제가 망할 때까지 중요한 역할을 했던 곳으로 여겨지는 역사적 가치가 큰 곳이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기록되어 있는 백제 역사유적지구 미륵사지이다.

세계문화유산이란

 1972년 1월 16일, 유네스코(UNESCO: 국제연합교육과학문화기구) 제17차 정기총회에서 채택된 "세계문화 및 자연유산보호협약" 에 따라

지정된 유산.  전세계 인류가 공동으로 보존해야 할 중요한 역사적·학문적 가치를 지니고 있는 세계적 유산을 의미한다.

 

여기에는 문화유산(文化遺産) · 자연유산(自然遺産), 그리고 문화와 자연의 요소가 서로 합쳐진 혼합유산(混合遺産) 등

세 가지 종류의 유산이 있으며, 이의 지정을 위해 국제적인 전문학술기관들이 참여하고 있다.

이 협약은 일명 ‘세계유산협약(世界遺産協約)’으로도 불려지고 있다.

세계유산의 등재과정은 이 협약의 선정기준에 의거, 각 국가별로 희망하는 유산이 신청되면 서류심사를 거쳐

유산의 문화적 · 학술적 · 미학적 가치를 검토하고, 이를 통과한 후보지에 대해 국제기념물유적이사회(ICOMOS)와

국제자연보전연맹(IUCN)에서 위촉한 조사단이 현지에 파견되어 실사를 하게 되어 있다.

이 실사를 통과한 유산에 대해 최종적으로 21개국으로 구성된 세계유산위원회(世界遺産委員會)에서 등재 여부를 의결하게 된다.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우리나라의 유산들

한국은 현재 강진 도요지,  공주부여 역사유적지구,  중부내륙산성군(삼년산성 · 상당산성 · 미륵산성 · 충주산성 · 장미산성 · 덕주산성 ·온 달산성),

익산 역사유적지구,  염전(전라남도 신안군 · 영광군),  대곡천 암각화군,  낙안읍성,  서원(남계서원 · 옥산서원 · 도산서원 · 필암서원 · 병산서원 ·

돈암서원 · 무성서원),  서울 한양도성,  김해 · 함안 가야고분군을 세계문화유산 잠정목록으로 올려놓고 있다.

 

1995년 12월, 독일 베를린에서 개최된 유네스코 제19차 세계유산위원회 총회에서 경주의 석굴암과 불국사,  합천 해인사의 경판전, 

팔만대장경과 해인사 일원,  그리고 서울의 종묘가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세계 목판인쇄술 발달과 불교사상의 중요한 근원지인 법보사찰 해인사(사적 및 명승 제5호)는 대장경판(국보 제32호)으로 널리 알려진

한국의 대표적인 화엄도량이다. 총 8만1258판에 이르는 팔만대장경과 이를 봉안하고 있는 장경판전(국보 제52호)은

고려 호국불교(護國佛敎)의 대표적인 유산이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는 ‘해인사 팔만대장경’은  전세계 불교경전 중 가장 중요하고 완벽한 경전이고

고도로 정교한 인쇄술의 극치에 달해 있으며, 경판전은 대장경의 부식을 방지하고 이를 온전히 보관하기 위해

15세기경 건축된 건물로 보존과학의 예지를 잘 반영하므로  해인사 일원과 장경판전 · 팔만대장경을 일괄적으로 세계유산으로 등재하고

IV항과 Ⅵ항(행사 · 생활전통 · 사상 · 신념 · 세계적 예술 및 문학작품과 직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유산)을 적용하였다.

 

1997년 12월, 이탈리아 나폴리에서 개최된 제21차 총회에서 수원의 화성과 서울의 창덕궁을 추가로 세계유산으로 등재시켰다.

이후 2000년 12월 호주 케언스에서 개최된 제24차 총회에서 경주 역사유적지구,  고창 · 화순 · 강화 고인돌이 등재되었고,

2009년 프랑스 파리 유네스코 본부에서 개최된 제33차 총회에서 조선 왕릉 40기가 등재되었으며,

2010년 8월 브라질 브라질리아에서 개최된 제34차 총회에서 안동 하회마을과  경주 양동마을이 등재되었다.

최근 2014년 6월 카타르 도하에서 개최된 유네스코 제38차 총회에서 남한산성이 세계문화유산으로 신규 등재되었다.

 

한편, 자연유산으로 신청한 설악산은 보존정책 및 동식물 서식에 대한 종합적인 연구가 미비하여 세계유산으로의 등재가 보류된 상태이다.

그러나 2007년 6월 27일, 뉴질랜드 크라이스트처치에서 열린 제31차 세계유산위원회에서 “제주화산섬과 용암동굴”이라는 이름으로

제주특별자치도의 한라산,  성산일출봉,  거문오름용암동굴계 3개 지역이 우리나라 최초로 세계자연유산으로 등재되었다.

 

국보 제24호로 지정된 ‘석굴암’은 통일신라시대의 불교예술의 정수로 극동 아시아 불교예술의 걸작품이다.

우리 나라의 대표적인 불교사찰인 ‘불국사(사적 및 명승 제1호)’ 에는  다보탑(국보 제20호) · 석가탑(국보 제21호) · 연화교와 칠보교(국보 제22호) ·

청운교와 백운교(국보 제23호) · 금동비로자나불좌상(국보 제26호) · 금동아미타여래좌상(국보 제27호) 등 6종의 국보가 소장되어 있다.

특히 불국사는 불교 교리가 사찰 건축물을 통해 잘 형상화된 대표적인 사례로, 아시아에서도 그 유례를 찾기 어려운 독특한 건축미로 유명하다.

 

이에 대해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는 ‘석굴암과 불국사’를 일괄적으로 세계유산으로 등재하였는데 그 기준은 세계유산 등록기준 중

제I항(창조적 천재성으로 이룩된 걸작품)과 제IV항(인류역사의 발달단계를 보여주는 건축물 또는 조경)을 적용하였다.

 

 

미륵사지 모형도

 

 

미륵사지 유물전시관의 정면의 모습

 

 

미륵사지 유물전시관의  옆에서 본 모습 = 건물의 모습은 미륵사지석탑의 이미지를 반영하였다.

 

 

 

 

미륵사지 복원된 모습의 목탑과 주변의 모형물

삼국시대 우리나라에 불교가 들어오면서 전해진 탑의 형식은 목탑과 전탑이었으며, 석탑은 우리나라에서 발생한 것이다.

특히 미륵사지에는 동 · 서쪽에 석탑이 있고 중앙에는 목탑이 자리하고 있어 목탑에서 석탑이 발생한 시원지로 생각되고 있다.

발굴조사에 의하면 중앙의 목탑은 석탑의 기단과 같은 기단형태였으며, 계단도 유사한 형태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탑의 규모는 미륵사지 전체 평면에서 탑을 중심으로 형성된 동원과 서원에 비하여 중원이 크며, 목탑도 그 같은 비례에 의하여

동 · 서 쪽에 자리하고 있는 석탑에 비하여 큰 규모였음이 확인된다. 목탑의 상면에 대해서는 남아있는 자료가 없었으나,

동탑과 서탑이 양식상 목탑에서부터 발생한 것이라는 점에서 양쪽 석탑과 비숫한 구조였을 것이다.

전시된 모형은 이 같은 점을 기초로 목탑의 본래 모습을 추정 복원하여 20분의 1로 만든 것이다.

 

 

미륵사지 완성된 모형 전경

 

 

미륵사지 관련 연표도

 

 

 

 

 

 

 

 

    

金製舍利奉迎記글(금제사리봉영기글)

 

 

 

 

金製舍利奉迎記(금제사리봉영기) 앞면 : 시대 = 백제

 

 

  金製舍利奉迎記(금제사리봉영기) 뒷면 : 시대 = 백제

  

 

   

 

    

            복리를 받고, 모든 중생들이 다 함께 불도를 이루게 하소서         

 

앞면, 뒷면의 내용과 뜻 

竊以法王出世隨機赴   感應物現身如水中月   是以託生王宮示滅雙   樹遺形八斛利益三千   遂使光曜五色行遶七   遍神通變化不可思議

    절이법왕출세수기부   감응물현신여수중월   시이탁생왕궁시멸쌍   수유형팔곡이익삼천   수사광요오색행요칠   편신통변화불가사의

 

뜻 = 가만히 생각하건데, 법왕께서 세상에 출현하시어 근기에 따라 부감하시고, 중생에 응하여 몸을 드러내신 것은 마치 물가운데 비치는

달과 같았다. 이 때문에 왕궁에 의탁해 태어나 사라쌍수 아래에서 열반에 드셨는데, 8곡의 사리를 남겨 삼천대천세계를 이익되게 하셨다.

마침내 찬란히 빛나는 오색(사리)으로 일곱 번을 돌게 하였으니, 그 신통변화는 불가사의하였다.  

 

我百濟王后佐平沙乇   積德女種善因於曠劫   受勝報於今生撫育萬   民棟梁三寶故能謹捨   淨財造立伽藍以己亥

아백제왕후좌평사탁   적덕여종선인어광겁   수승보어금생무육만   민동양삼보고능근사   정재조립가람이기해

 

뜻 = 우리 백제왕후는 좌평 사탁전덕의 딸로서 오랜 세월(曠劫[광겁]) 동안 선인을 심으시어 금생에 뛰어난 과보(勝報[승보])를 받으셨다.

(왕후께서는) 만민을 어루만져 기르시고 삼보의 동량이 되셨다. 때문에 삼가 깨끗한 재물을 희사하여 가람을 세우고

기해년 정월 29일에 사리를 받들어 맞이하셨다.

 

♣♧♣ 

年正月卄九日奉迎舍利   願使世世供養劫劫無   盡用此善根仰資大王   陛下年壽與山岳齊固     寶曆共天地同久上弘   正法下化蒼生又願王

     년정월입구일봉영사리   원사세세공양겁겁무   진용차선근앙자대왕   폐하년수여산악제고     보력공천지동구상홍   정법하화창생우원왕

 

뜻 =  원하옵건데 세세토록공양하여 영원토록(劫劫[겁겁]) 다함이 없어서 이 선근으로 우러러 대왕폐하의 수명은 산악과 나란히

견고하고, 왕위(寶曆[보력]) 천지와 함께 영구하여, 위로는 정법을 크게하고 아래로는 창생을 교화하는데 도움이 되게 하소서

 

后卽身心同水鏡照法     界而恒明身若金剛等   虛空而不滅七世久遠   並蒙福利凡是有心       俱成佛道

후즉신심동수경조법     계이항명신약금강등   허공이불멸칠세구원   병몽복리범시유심       구성불도

 

뜻 = 다시 원하옵건데 왕후에 몸에 나아가서는, 마음은 수경같아서 법계를 항상 밝게 비추시고, 몸은 금강(金剛)과 같아서

허공과 같이 불멸하시어, 칠세를 영원토록 다함께 복리를 받고, 모든 중생들이 다함께 불도를 이루게 하소서

 

 

明身(명신) =  법계를 항상 밝게 비추시고, 몸은 금강(金剛)과 같아서  

正法(정법) = 정법을 크게하고 아래로는 창생을 교화하는데 도움이 되게 하소서

 

 

사리장엄수습과정모습

 

 

 

 

金製珠(금제구슬[주])  :  시대 = 백제     금동제사리외호 및 금제사리내호 내 유물

 

 

鑛物(광물) : 시대 = 백제     금동제사리외호 및 금제사리내호 내 유물

 

 

琉璃玉(유리구슬) :  시대 = 백제     금동제사리외호 및 금제사리내호 내 유물

 

 

琉璃玉(유리구슬) : 시대 = 백제     금동제사리외호 및 금제사리내호 내 유물

 

 

琉璃玉(유리구슬) : 시대 = 백제     금동제사리외호 및 금제사리내호 내 유물

 

 

金製珠(금제구슬)와 管玉(관옥)  :  시대 = 백제     금동제사리외호 및 금제사리내호 내 유물

 

琉璃玉(유리구슬) : 시대 = 백제     금동제사리외호 및 금제사리내호 내 유물

 

 

금동제사리외호(大) 및 금제사리내호(小) 

 

사리기(舍利器)란 사리를 모셔 놓은 그릇을 말한다. 미륵사지 석탑 사ㅣ기는 심주 사리공 정중앙에 안치하였고,

금동제사리외호 안에 금제사리내호, 유리제사리병을 차례로 넣어 3중구조를 갖추고 있다.

이륵사지 사리기에 보이는 다양한 공예기법과 양식은 기존의 백제의 전통적인 금속 공예기법을 계승함은 물론,

어자문 기법과 같은 새로운기법을 받아 들여 7세기 전반 백제 특유의 미술양식을 형성했음을 보여준다.

 

 

금동제사리외호는 뚜껑과 동체상부, 하부 등 세부분으로 나누어 주조하였고,

동체의 하부 상단에는 ㄴ자 모양의 홈을 파서, 동체 상부의 하단에는 못을 박아 끼워 맞춰 결합한 것이다.

 

 

金銅製舍利外壺(금동제사리외호)

금동제사리외호는 뚜껑과 동체상부, 하부 등 세부분으로 나누어 주조하였고,

동체의 하부 상단에는 ㄴ자 모양의 홈을 파서, 동체 상부의 하단에는 못을 박아 끼워 맞춰 결합한 것이다.

외호의 표면에는 연꽃덩굴무늬, 연꽃잎무늬, 둥근무늬(魚子文[어자문]) 등 다양하고 화려한 문양이 있다.

 

 

 

 

금동제사리외호 하단부분

 

 

金製舍利內壺(금제사리내호) 

금제 사리내호는 상하 2개체로 외호와 달리 뚜껑과 동체상부가 일체형이며, 금판을 두드려서 제작하였고,

표면은 외호와 비슷한 문양을 음각 장식하였다.

 

    

 

 

사리봉안방식

左(좌) = 일본나라 호류지(法隆寺[법륭사])오층석탑 사리장엄구   中(중앙) = 미륵사지 석탑 사리기     右(우)미륵사지 석탑 사리기 X-선 사진

 

 

 

 

아래 금판위에 새겨진 글들

왼쪽부터 ①중부덕솔지수시금일량          ②동보시          ③하부(部)비치부급부모처자

 

金板(금판)

 

 

위 금판위에 새겨진 글을 확대경으로 봄

왼쪽부터 ①中部德率支受施金壹兩          ②同布施          ③下⼙(部)非致夫及父母妻子

 

金板(금판) :  시대 = 백제

 

 

금제족집게

 

 

♣부여 왕흥사지 출토 사리장엄구♣

부여 왕흥사지 출토 사리장엄구 : 삼국시대(백제) 577년,   보물제 1767호   소장 =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왕흥사는 사비성 북서쪽에 위치했던 사찰로 목탑지심초석에서 사리장엄구가 발견되었다.

사리구는 심초석에 사리공을 뚫고 청동사리함을 안치한 후 석재 뚜껑을 덮었고 청동제사리함 안에 은제병과 금제사리병을 차례로 두었다.

청동함 몸체의 앞부분에는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577년 창왕(위덕왕)이 죽은 왕자를 위해 사찰을 세웠다고 기록하였다.

 

 

♣익산 왕궁리 오층석탑 시리장엄구

익산 왕궁리 5층석탑 출토 사리장엄구 =  삼국시대(백제) 7세기, 국보 제 123호  소장 = 국립전주박물관

익산 왕궁리 오층석탑 내부에서 발견된 사리장엄구의 제작시기는 유리제 사리병과 금제사리내함의 기법과 무늬가

2009년 발견된 미륵사지 석탑 사리갖춤과 유사한 것으로 보아 7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함께 봉안된 금강경판 또한

같은 시기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 사리갖춤은 진신사리(眞身舍利)와 법신사리(法身舍利)를 함께 봉안한 유일한 사례이다.

 

 

백제 사람들의 염원, 공양구:    銀製冠飾(은제관식) :  시대  =  백제

 

 

銀製銙帶裝飾(은제과대장식)  :   시대 =  백제

미륵사지 석탑 사리공에서 허리의 띠꾸미개(帶金具[대금구]) 중 하트 형태(心葉文[심엽문])의 은제 과판 1점과 은제 띠드리개 장식 1점이 출토되었다.

이는 사리장엄을 안치 하면서 허리띠 없이 장식만 공양물로 봉안한 것으로 보인다.

 

미륵사지 석탑 출토 과판은 하트형 장식에 고리가 달린 형태로 부여 능산리 등 사비 백제의 고분에서 출토된 것과 비슷하다.

이러한 허리띠 장식 문양은 부여 외리 출토 도깨비 문양 전돌에서도 확인된다.

 

 

銀製冠飾(은제관식)

미륵사지 출토 은제관식은 2점이며 지금까지 발견된 은제관식과는 달리 꽃봉우리 상단이 길게 돌출되어 있고,

꽃받침은 거의 원형이 될 정도로 말려있다. 관식의 아래쪽(加揷部[가삽부])은 관모에 끼울 수 있도록 되어 있고,

중심 줄기의 상단과 하단에 곁가지를 내어 그 끝은 당초문과 꽃봉오리 모양을 표현하였다.

이 은제관식에는 땜질한 흔적이 확인되는데 이는 보수해서 사용해야 할 정도로 귀한 장식품임을 알 수 있다.

또한 공양물로 사용하기 위해 제작된 것이 아닌 실생활에서 사용하던 것을 사리장엄 봉안식 때 공양한 것으로 보인다.

 

 

銀製冠飾(은제관식)

 

 

 

琥珀(호박)  :  시대 = 백제

 

 

珍珠(진주)  :  시대 = 백제

 

 

    

琉璃玉(유리구슬)  :  시대 = 백제

 

 

靑銅盒(청동합)  :  시대 =  백제

『上(⼙/部) 達率目近[상(⼙/部)달솔목근』이라고 합 위에 쓰여 있다.

 

 

金製珠(금제구슬)                      金板/ 金釘(금판/ 금정[못])

 

 

금구슬,   마노,   유리구슬,   호박

 

 

靑銅盒(청동합)  :  시대 =  백제

 

 

土器壺(토기호)

 

 

♣백제사람들의 염원 : 진단구♣

土製螺髮(토제나발[부처님의 소라모양의 머리모습])  :  시대 = 백제

 

미륵사지 석탑 기단부 조사과정 중 사리공이 마련된 중앙 심주석의 남측 하부에서 다양한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이러한 석탑 하부 출토 유물들을 진단구(鎭壇具), 혹은 지진구(地鎭具)로 부르는데, 사리의 공양을 위한 공양구의 일종이다.

 

석탑 하부에서는 토제 나발 편(片)과 은제손톱 2점과 같은 희귀한 유물이 출토되었다.

이는 중국 위진남북조 시기의 양나라에서

부처의 조발(爪髮) 공양의례가 있었던 점과 관련하여 사리장엄 의례의 일부로서 봉안된 성물로 보인다.

 

석탑 하부에서 출토된 유물의 존재는 당시 사리장엄 의례가 탑의 하부 구축과정에서부터 체계적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또한 사리장엄과 관련된 다양한 유물들이 사리공 뿐만 아니라 탑 내부의 여러 곳에서 건축과정의 각 단계별로 공양 및 매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은으로 만든 부처님의 손톱모양     銀製裝飾(은제장식)  : 시대 =  백제

은제손톱 2점과 같은 희귀한 유물이 출토되었다.

 

 

白磁花形接匙(백자화형그릇[접시])  :   시대 = 고려

 

 

靑磁陽刻蓮瓣文盞托(청자양각연판문잔탁)과 靑磁盞(청자잔)  :   시대 = 고려

 

 

靑磁蓮瓣文甁(청자연판문병)  :   시대 = 고려

 

 

靑磁蓮瓣文甁(청자연판문병)  :   시대 = 고려

 

 

♣고려♣

고려 태조 역시 불교를 숭앙하여 불교를 국교로 삼았고, 만년에는 후손들에게 불사의 교훈을 준 훈요십조(訓要十條)를 선포하였다.

(제 1조, 6조) 따라서 이 시대에는 미륵사는 중요시 여겨지고 중심곽에는 많은 건물들이 중창되어 번성하였다는 것을

조사된 유구나 유물로 미루어 보아 추정할 수 없다.

고려 승려 일연이「삼국유사」에 미륵사 창건에 대하여 세세히 기록한 것으로 보아 이 시기에도 미륵사의 존재는 중요시되었음을

능히 짐작할 수 있다. 특히 태평흥국 5년(980년)이나 연우 4년(延祐四年, 1317년)경 기와가 많이 출토된 것으로 보아

고려 초에서부터 후기까지도 성행했던 것으로 믿어진다.

 

♣조선♣

조선시대의 미륵사는 서탑과 당간지주 좌우 2기만이 남아 있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미륵사를 설명하면서 서탑이 있는데 대단히 커서 그 높이가 수십척이나 되고 동방 석탑 중에 가장 크다, 고

기록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 폐허의 절터에 석탑이 우뚝서 있었음을 짐작 할 수 있다.

발굴조사에서 조선 초기에는 미륵사의 중심곽을 벗어난 강당 북쪽 외곽지역과 서회랑을 벗어난 서쪽 외곽에 불전들이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여기서 출토된 유물도 조선 초기의 분청사기 편과 기와등이다.

특히 이곳에서 흥미로운 사실은 북쪽에 있었던 조선시대의 불전이 서탑을 향하고 있덨다는 것이다.

이것은 당시 서탑이 존재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영조 때의 문인 강후진이 와유록(臥遊錄)에서 석탑이 반파되어 7층만이 남았다라고 기술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도

이때는 이미 절이 없어진 것을 알 수 있다.

 

 

부처의 손

 

부처의 손

 

 

益山 彌勒寺止 金銅香爐(익산 미륵사지 금동향로)  :  보물  제1753호   시대 =  통일신라

미륵사지 금동향로의 조형에 대해서는 국내의 자료가 전무하여 중국과 일본 수각형 향로를 중심으로 살펴볼 수밖에 없다.

우선 중국 수각형 향로 가운데 미륵사지 향로와 비교되는 당대(唐代)의 작품이 여러 점 확인된다.

그 중에서도 6개의 다리와 6수면(獸面)을 지닌 741년의 경산사지(慶山寺址)출토의 향로가 미륵사지 향로의 조형과 유사한 점을 발견할 수 있다.

미륵사지 향로는 당대에 만들어진 중국 수각형 향로의 조형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고식의 연판 모습과 감은사지 사리감과 유사한

수면(獸面)과 고리에서 볼 수 있듯이 통일신라 초에 이루어진 여러 요소를 복합적으로 반영하여 한국적으로 수용한 작품으로 보인다.

 백제 금동향로와 동일한 금 · 구리 아말감 도금법을 사용한 점 역시 이 향로의 제작시기를 올려보는 근거가 된다.

따라서 앞으로 보다 많은 자료와 세밀한 비교 검토가 이루어져야 하겠지만, 이 향로의 제작시기에 관해서는 불교미술과 함께 금속공예에 있어

완숙한 단계에 이르렀던 8세기 전반에서 중엽을 넘어서지 않는 시기에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미륵사지 발굴조사를 토대로 다른 동반 유물과의 비교를 통해 이 향로가 858년 이전에 매납(埋納)되었다는 견해는

이러한 편년을 적극적으로 뒷받침해 준다.

이 작품은 출토 경위가 확실하며 완벽한 보존 상태를 지닌 작품인 동시에 우리나라에서 첫 예가되는 통일신라의 금동 수각형 향로라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

 

 

 

 

치미

치미는 망새라고도 하는데, 지붕의 용마루 양쪽 끝을 장식하는 특수기와이다.

치미는 지붕에 얹어서 웅장하게 보이는 장식적 용도 이외에 재앙을 피하기 위한 벽사적(闢邪的) 의미를 지닌 것으로 판단된다.

특히 새꼬리 형태의 치미는 하늘의 신과 지상의 인간을 연결하는 강녕사상(康寧思想)이 내포되었다는 설이 있다.

치미는 후한 대에 반우(反羽)라고 불린 기록이 처음으로 보이고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은 고구려 벽화고분을 통하여 알 수 있으며

실물로는 고구려지역에서 원오리사지,  정릉사지,  안학궁지 등에서 출토된 예가 있고,  

백제지역에서는 공주 · 부여 · 익산지역의 사찰터에서 출토되었는데, 그 중 부소산 서복사지와 미륵사지 동원승방지,

연못지 출토 치미가 거의 완전한 형태로 복원되었으며,

 신라지역의 치미로는 황룡사지와 안압지 출토 치미가 복원되었고, 고려와 조선시대까지 치미가 사용되었다.

 

전시된 치미는 동원 승방지에서 출토되어 복원되었는데 백제시대 치미로 보여진다.

치미는 아래 위가 뉘어진 2단 구조를 하고 있다.  몸통 부분에는 머리에서 부터 종대까지 새의 깃털을 표현한 듯한 방사형이 층단이 전면에 나 있고,

종대부의 층단 내에는 물고기 비늘모양이 반타원형 무늬로 장식되어 있다.

후미 깃 끝마다 구멍이 뚫려 있는데, 이와 같은 구멍은 꼬리와 배 등에도 있으며 구멍에는 장식품을 꽂았던 것으로 보인다.

새의 날개 모양으로 장식된 몸통 및 종대부는 활처럼 힘차면서도 그 선이 유연한데, 이는 버선코 같은 꼬리 끝과 함께 우아함을 더하고 있다.

전시된 치미의 크기는 높이 99cm, 길이 85cm, 머리너비 28cm, 후미 깃의 길이 53cm이다

 

 

치미

전시된 치미는 동원 승방지에서 출토되어 복원되었는데 백제시대 치미로 보여진다.

 

 

새의 날개 모양으로 장식된 몸통 및 종대부는 활처럼 힘차면서도 그 선이 유연한데, 이는 버선코 같은 꼬리 끝과 함께 우아함을 더하고 있다.

전시된 치미의 크기는 높이 99cm, 길이 85cm, 머리너비 28cm, 후미 깃의 길이 53cm이다

 

 

 

 

 

 

 

 

 

 

백제계의 석탑의 변천사

 

 

 

 

 

 

益山 彌勒寺址 石塔(금산 미륵사지 석탑)  :  국보  제11호     시대 =  백제

백제 최대의 절이었던 익산 미륵사터에 있는 탑으로, 무너진 뒤쪽을 시멘트로 보강하여 아쉽게도 반쪽탑의 형태만 남아 있다.

6층까지만 남아 있으며, 정확한 층수는 알 수 없다.

기단(基壇)은 목탑과 같이 낮은 1단을 이루었다. 탑신(塔身)은 1층 몸돌에 각 면마다 3칸씩을 나누고

가운데칸에 문을 만들어서 사방으로 내부가 통하게 만들었으며, 내부 중앙에는 거대한 사각형 기둥을 세웠다.

1층 몸돌의 네 면에는 모서리기둥을 세웠는데, 위아래가 좁고 가운데가 볼록한 목조건축의 배흘림기법을 따르고 있다.

기둥 위에도 목조건축에서 기둥과 기둥을 연결하는 재료인 평방(平枋)과 창방(昌枋)을 본떠 설치하였다.

지붕돌은 얇고 넓으며, 네 귀퉁이에 이르러서 살짝 치켜 올려져 있다.

 2층부터는 탑신이 얕아지고 각 부분의 표현이 간략화되며, 지붕돌도 1층보다 너비가 줄어들 뿐 같은 수법을 보이고 있다.

탑이 세워진 시기는 백제 말 무왕(재위 600∼641)대로 보는 견해가 유력하다.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되고 커다란 규모를 자랑하는 탑으로,

양식상 목탑에서 석탑으로 이행하는 과정을 충실하게 보여주는 중요한 문화재이다.

 

 

무너진 뒤쪽을 시멘트로 보강하여 아쉽게도 반쪽탑의 형태만 남아 있다.

 

 

    

기단 모서리에 있는 동물상

 

 

木塔(목탑) 모형

삼국시대 우리나라에 불교가 들어오면서 전해진 탑의 형식은 목탑과 전탑이었으며, 석탑은 우리나라에서 발생한 것이다.

특히 미륵사지에는 동 · 서쪽에 석탑이 있고 중앙에는 목탑이 자리하고 있어 목탑에서 석탑이 발생한 시원지로 생각되고 있다.

발굴조사에 의하면 중앙의 목탑은 석탑의 기단과 같은 기단형태였으며, 계단도 유사한 형태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탑의 규모는 미륵사지 전체 평면에서 탑을 중심으로 형성된 동원과 서원에 비하여 중원이 크며, 목탑도 그 같은 비례에 의하여

동 · 서 쪽에 자리하고 있는 석탑에 비하여 큰 규모였음이 확인된다. 목탑의 상면에 대해서는 남아있는 자료가 없었으나,

동탑과 서탑이 양식상 목탑에서부터 발생한 것이라는 점에서 양쪽 석탑과 비숫한 구조였을 것이다.

전시된 모형은 이 같은 점을 기초로 목탑의 본래 모습을 추정 복원하여 20분의 1로 만든 것이다.

 

 

    

좌우의 모습

 

 

재앙을 막아주는 말과 자라  =  土製馬片(토제마조각) :  시대 = 고려

말과 자라의 모양은 토속적인 속성으로 재앙을 태워서 멀리 보낸다는 의미로 말의 모형을 만들어 땅에 묻거나,

자라의 모형을 만들어 건축물에 올려 땅과  불의 재앙을 제거한다는 것이다.

사찰에서 이와 같은 유물의 출토는 불교 사원과 토속신앙의 결합을 알 수 있는 자료 중 하나이다.

 

 

재앙을 막아주는 자라

자라의 모형을 만들어 건축물에 올려 땅과  불의 재앙을 제거한다는 것이다.

 

 

人面文圓瓦當([인면문원와당]얼굴무늬 수막새)  :  시대 = 통일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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彌勒寺址 石塔(미륵사지 석탑) 부재들

 

 

益山 彌勒寺址 石塔(익산 미륵사지 석탑)  :  국보  제11호

 

 

益山 彌勒寺址 石塔(익산 미륵사지 석탑)  :  국보  제11호

 

 

益山 彌勒寺址 幢竿支柱(익산 미륵사지 당간지주) : 보물  제236호   시대 = 통일신라

당간지주는 사찰 입구에 세워두는 것으로, 절에서는 행사나 의식이 있을 때 당이라는 깃발을 달아두는데,

깃발을 걸어두는 길쭉한 장대를 당간이라 하며, 당간을 양쪽에서 지탱해 주는 두 돌기둥을 당간지주라 한다.

미륵사터의 남쪽에는 2기의 지주가 약 90여 미터의 간격을 두고 서 있는데, 크기와 양식, 조성수법이 같아 같은 시기에 세워진 것으로 본다.

지주를 받치는 기단부(基壇部)는 완전히 파괴되어 대부분이 땅속에 묻혀있는 상태이며, 약간만이 드러나서 그 원모습을 짐작하게 한다.

지주는 원래 모습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데, 마주보는 면에는 특별한 장식이 없다.

바깥쪽 면에는 가장자리를 따라 띠를 돌린 후, 그 중앙에 한 줄의 띠를 새겨두었다.

당간을 흔들리지 않게 고정시키기 위해 지주의 안쪽 면에 3개의 구멍을 각각 뚫어놓았는데, 맨 위의 것만 직사각형 모양이고 나머지는 둥글다.

대체적으로 장식이 적으며, 단정한 형태를 보이는 이 두 지주는 통일신라 중기 이후에 만들어진 것으로 짐작된다.

이 곳의 당간지주와 거의 같은 모양의 예로는 영주 숙수사지 당간지주(보물 제59호)와 영주 부석사 당간지주(보물 제255호) 등이 있다.

 

건너편에 교회가 당간지주와 마주하고 있고 영지쪽에서도 그림같이 예쁘게 보인다. 

근처 가까이에서 보면 하나도 예쁘지 않은데 미륵사지내에서 보면 교회가 숲에 쌓여 예쁘게 보이는것 같다.  

 

 

나오려는데 비행기가 왔다갔다해 시끄럽다고 생각하며 하늘을 보니 낙하산이 쏟아진다.

노인들의 말씀이 군인들이 훈련하는 것이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