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남북도 = 心 산사 길없는길

2016. 10. 16. 全北 南原 實相寺(전북 남원 실상사)

백련암 2016. 10. 25. 00:53

2016. 10. 16. 全北 南原 實相寺(전북 남원 실상사)


실상사 가는 길에 비가 너무와 힘들었다. 비가 안왔으면 노고단을 올라갔다가 실상사로 가기로 하였지만

비가오는 바람에 일정이 모두 바뀌어 실상사와 화엄사 그리고 구층암으로 하루 일정을 끝낸다.




南原 實相寺(남원 실상사)  :  사적  제309호     시대 = 신라

실상사와 백장암 약수암을 포함한 일대로서 지리산 북쪽 기슭에 있다.

실상사는 신라 흥덕왕 3년(828)에 증각대사 홍척이 창건하였으며, 제자 수철대사와 편운대사도 이 절에서 배출되었다.

조선시대 정유재란 때 화재를 입어 200여 년 동안 폐허로 남아 있었고, 승려들은 백장암에서 머물며 그 명맥을 이어왔다.

숙종 때 다시 지었고 고종 때 화재를 입어 작게 지은 것이 현재의 모습이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보광전 · 약사전 · 명부전 등이 있다.

중요문화재로는 백장암 3층석탑(국보 제10호) · 실상사 수철화상능가보월탑(보물 제33호)과 탑비(보물 제34호) · 실상사 석등(보물 제35호) ·

부도(보물 제36호) · 실상사 3층석탑(보물 제37호) · 증각대사응료탑(보물 제38호)과 그 탑비(보물 제39호) · 백장암 석등(보물 제40호) ·

실상사 철제여래좌상(보물 제41호) · 백장암 청동은입사향로(보물 제420호) · 약수암 목조탱화(보물 제421호) 등이 있다.

중요문화재를 많이 간직하고 있으며, 절 입구에는 상원주장군(중요민속문화재 제15호)을 비롯한 석장승들이 있다.



저 앞에 실상사 천왕문이 보인다.

실상사는 여느 절집과는 다르게 평지에 논과 밭들과 함께 어우러져 있다.

이곳은 논에다 연을 심었던 것 같다 이제는 꽃이 다 지고 연잎만이 조금 남아 있을 뿐이다.

저 밑바닥에는 아마도 연근이 아직 있을 것이라고 생각이 든다.


실상사 공양은 정말로 음식이 단백하고 맛이있다. 공양주 보살님은 부처님의 마음으로 모든 정성을 다해 음식을 하시고 계신 것 같다.

부처님이 중생을 보살피듯이 우리 중생들의 건강을 생각하시면서 음식을 장만하시는 것 같은 마음과 정성이 느껴지는 곳이다. 보살님 고맙습니다.^^...



사천왕문 옆에 있는 감나무 나무는 별로 있데 감은 주렁주렁 많이도 열렸다.


◈전북 남원 실상사◈

우리나라 선문의 효시인 ‘구산선문’ 은 이곳 ‘실상산문’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실상사는 ‘구산선문 최초 가람’으로서 한국 선풍(禪風)의 발상지입니다. 가람 안팎에 화려하고 고색창연한 경관은 없습니다.

그러나 도내에서 단일 사찰로는 가장 많은 수의 국보와 보물을 가진 곳이기도 합니다. 


     실상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7교구 본사인 금산사의 말사이다.

828년(흥덕왕 3)에 홍척(洪陟)이 구산선문(九山禪門)의 하나인 실상산문(實相山門)을 개산(開山)하면서 창건하였다.

홍척은 도의(道義, 道儀)와 함께 당나라에 들어가 선법(禪法)을 깨우친 뒤 귀국하였다. 그 후 도의는 장흥 가지산에 들어가서 보림사(寶林寺)를 세웠고,

홍척은 이 절을 세운 뒤 선종(禪宗)을 전파하였는데, 풍수지리설에 의거하여 볼 때 이곳에 절을 세우지 않으면 우리나라의 정기가 일본으로 건너간다고 하여

이 절을 건립하였다고 한다. 그 뒤 2대조 수철(秀澈)을 거쳐 3대조 편운(片雲)에 이르러서 절을 크게 중창하고 선풍을 더욱 떨치게 되었다.

그러나 1468년(세조 14)에 화재로 모두 불타버린 후 200년 동안 폐허로 남아 있었고, 승려들은 백장암(百丈庵)에 기거하면서 그 명맥을 이어왔다.

그 뒤 1679년(숙종 5)에 벽암(碧巖)이 삼창(三創)하였고, 1684년 계오(戒悟)가 현재의 극락전(極樂殿)인 부도전(浮屠殿)을 지었다.

1690년에 침허(枕虛)를 중심으로 300여 명의 수도승들이 조정에 절의 중창을 상소하여 1700년(숙종 26)에 36동의 건물을 세웠다.

또한 1821년에는 의암(義巖)이 다시 중건하였으나 1882년(고종 19)함양 출신 양재묵(楊載默)과 산청 출신 민동혁(閔東赫)에 의해

사찰건물들이 불타 없어지는 수난을 겪었으며, 1884년에 월송(月松) 등이 중건하였다. 1903년(광무 7) 익준(益俊)이 승당을 지었으며, 1932년 칠성각을 세웠다.


특히 불상에는 보화(寶貨)가 많이 들어 있다 하여 일찍이 도굴꾼들에 의해 훼손된 적이 있었다.

그 불상의 복장(腹藏)에는 효령대군(孝寧大君)의 원문(願文)과 사경(寫經) 및 인경(印經)이 수백 권이나 들어 있었고,

고려판 화엄경소(高麗板華嚴經疏) 등 보기 드문 서적도 몇 가지 있었다고 한다. 그 중 일부는 도난당하였고, 나머지는 건물과 함께 불타 버렸다고 한다.

1986년 요사로 사용 중인 선리수도원(禪理修道院)을 건립하였고, 1989년 천왕문을 세웠다.

1991년 범종각을 짓고, 1996년 화엄학림(華嚴學林) 강당과 학사를 건립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

현존하는 당우로는 보광전(普光殿)을 비롯하여 약사전 · 명부전 · 칠성각 · 선리수도원 · 누각 · 천왕문 · 화엄학림강당과 학사,

그리고 조금 떨어진 곳에 극락전과 부속 건물이 있다. 당우 가운데 보광전 안에는 조선시대에 조성된 비로자나불좌상을 중심으로

좌우에 베트남에서 이운해 왔다는 종이로 만든 보살입상이 있고, 범종이 걸려 있다. 종은 1694년(숙종 20)에 만든 것으로

종을 치는 자리에 일본의 지도 비슷한 무늬가 있다. 이것을 치면 일본이 망한다는 소문이 떠돌아서 일제 말기에는 주지가 문초를 당하기도 하였다.


또한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45호로 지정된 극락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맞배지붕 건물로서 1832년에 의암이 중건하면서

부도전에서 극락전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내부에는 지불(紙佛)인 아미타여래좌상과 1985년에 조성한 아미타후불탱이 봉안되어 있다.


이 중 실상사삼층석탑은 상륜부가 원형 그대로 남아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걸작품으로 불국사 석가탑의 상륜부를 복원할 때 이 탑을 본떠 복원하기도 하였다.

1980년 2월 2일 도굴꾼에 의하여 크게 파손된 것을 문화재관리국의 기술진들이 원형대로 복원하였다.

또한 약사전에 봉안되어 있는 철제여래좌상(보물 제41호)은 수철이 4,000근의 철을 들여 주조한 통일신라시대의 걸작품이다.

이 불상은 현재 지리산 최고봉인 천황봉과 일직선상에 있는데, 우리나라의 정기를 일본으로 보내지 않겠다는 호국적 이념에서 이곳에 안치했다고 한다.


절 입구에는 상원주장군(上元周將軍, 중요민속자료 제15호)을 비롯한 석장승들이 남아 있어 장승 연구에도 중요한 자료가 된다.



天王門(천왕문)

불법을 수호하는 외호신(불국 정토의 외곽을 맡아 지키는 신)이 안치된 전각으로 사찰을 지키고 악귀를 내쫒아 청정도량을 만들고

사람들의 마음을 엄숙하게 하여, 사찰이 신성한 곳이라는 생각을 갖게 하기 위하여 세워졌다.

그러나 큰 의미는 수행자의 마음속에 깃든 번뇌와 좌절을 없애 한마음으로 정진할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北方 多聞天王(북방 다문천왕)                                                               東方 持國天王(동방 지국천왕)


四天王(사천왕)

일주문을 지나 사천왕문을 들어서면 대게는 좌우에 사천왕을 두 분씩 모시게 된다.

오른쪽으로 돌아서면, 각각의 두 분을 만나게 되는데 자신의 팔의 방향으로 동방지국천왕<좌, 지물 - 비파>, 

남방 증장천왕<우, 지물 - 보검>을 대하여 서게 된다. 그것은 사찰의 배치상 대웅전을 중심으로 사찰의 전각들이 북에서 남쪽으로 향하여 배열되기 때문이다.


가장북쪽에 대웅전이 마치 수미산을 중심으로 하듯 산의 주봉을 뒤로 지고 자리하는 것이다.그래서 참배객은 항상 남에서 북으로 향하여 법당을 향하게 된다.

사천왕의 배치도 가장 안쪽에 북방 비사문천(毘沙門天)이 모셔지게 된다. 그래서 사천왕문을 들어서면서 왼손의 방향으로 돌면 서방 광목천왕<좌, 용과 여의주>,

북방 다문천왕<우, 탑과 방>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물론 약간의 예외는 있다.

 그리고 불교에서 방향은 동 · 남 · 서 · 북의 순으로 원을 그리는 방향이다. 사문유관에서도 노 · 병 · 사를 동남쪽 서위 방향으로 묘사하고 

북쪽에서 사문을 만나게 됨을 우리는 알고 있다.



南方 增長天王(남방 증장천왕)                                                                 西方 廣目天王(서방 광목천왕)



東方 持國天王(동방 지국천왕)

東方 持國天王(동방 지국천왕)은 수미산 중턱의 동쪽 영역을 관장하는 천왕(天王)이다.『아쇼카 왕경』이나『방등 대집경』에 의하면,

수미산을 다스리는 제석천 또는 부처님이 지국천왕으로 하여금 동방에서 불법(佛法)을 지키라고 명령하였다고 하며,

그래서 지국천왕은 나라를 지키고, 백성을 평하게 할 것을 맹세하였다고 하여 그 이름이 유래된 것이다.

고대의 인도 베다(아타르바베다, 마하브하라타 베다)등 고문헌에 나타난 신화들에서는 지국천왕이 그 권속으로 “간다르바”를 부린다고 표현되어 있다.


 “간다르바(乾達婆[건달바])”는 = 음악 신을 뜻하는 것으로서 노래하고 춤추며 놀기 좋아하는 이른바 건달(乾達)도 여기서 유래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후대에 불경에서는 지국천왕이 “간다르바”나 “비사사”라는 귀신을 부리면서 동방에서 참된 도리를 파괴하고 선한 백성을 괴롭히는 자들을 물리치는

 역할을 한 것으로 표현되어 있다. “간다르바”라는 귀신은 향을 먹고사는 귀신이라고 하며 중국에서는 심향(心香)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비사사”라는 귀신은 사람의 정기(精氣)를 뺏는 탐정귀(貪精鬼)라고 한다.


이런 “간다르바”와 비사사를 부하로 부리는 동방 지국천왕이 가지고 있는 물건(지물[指物])에 대하여는 경전에- 따라 차이가 있으나.

비파와 같은 악기가 대표적으로 알려져 있다. <다라니집경>에 의하면, 동방지국천왕은 왼손에 팔을 내려 칼을 잡고, 오른손을 구부려 보주(寶珠)를 쥔다고 하고,

<일자불정륜경[一字佛頂輪經]>에 의하면, 왼손에는 창, 오른손은 손바닥을 올려드는 형상이라고 하며, <약사여래유리광칠불본원공덕경>중 <염송의궤공양법>에는

비파(琵琶)를 든 것으로 표현되어 있으며, 불국사 천왕문에서는 비파를 들고 있다. 뿐만 아니라 조선 후기의 사찰의 형식에는 동쪽 지국천왕은 비파를 들고 있다.

물론 삼국시대의 사찰 형식에는<다라니집경>의 방식을 따라  보검을 들고 있는 형식을 취하는데 석굴암의 형식이 좋은 예이다.



南方 增長天王(남방 증장천왕)

南方 增長天王(남방 증장천왕)은 수미산 중턱의 남쪽에 있는 “유리”라는 자방을 관장하는 천왕(天王)이라하며 뜻은 자꾸 늘어난다, 확대된다.는

의미를 가진 것으로 그래서 한문으로 증장(增長)이라고 한다.

증장천왕은 그 권속으로 굼잔다와 프레타를 부리며, 굼반다는 배가 매우 부른 모습으로 표현되어 욕심이매우 많은 아귀라고 하며,  

“비사사”처럼 사람의 정기를 빨아먹는 귀신이라고 한다. 

프레타는 죽은 사람들의 영혼을 부리며 보통 6악도(惡道)라고 불리는 중생들이 거처하는 아귀를 의미한다.



西方 廣目天王(서방 광목천왕)

西方 廣目天王(서방 광목천왕)은 수미산 중턱의 서쪽에 주처(住處)가 있는 천왕(天王)이다.

그 뜻은 이상한 눈, 추한 눈의 의미를 가진 것으로 그래서 한문으로는 추목(醜目), 악안(惡眼)이라고도 하며, 일반적으로는 광목천왕이라고  불린다.

광목천왕은 고대 인도에서 시바신의 화신으로 세 개의 눈을 가진데서 유래하며, 그 권속으로 여러 종류의 용(龍)과 부단나(富單那) 등이 있으며,

부단나란 냄새나는 귀신, 아귀를 말하고, 때로는 열병을 앓게 하는 귀신이라고도 생각한다.



北方 多聞天王(북방 다문천왕)

 北方 多聞天王(북방 다문천왕)은 수미산 중턱의 북쪽 영역을 관장하는 천왕(天王)이다. 두루(遍,普[편,보])의 뜻을 가지고,

듣는다는 뜻으로 두루 많이 듣는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다문천왕은 수미산 북방을 지키면서 부처님의 설법을 가장 많이 들었다고 하는데서

그 이름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고대 인도의 아타르바베다에서는 다문천왕이 암흑계에 머무는 악령의 우두머리로서 재물과 복덕을 주관하는 존재로 표현되어 있다.

다문천왕은 권속으로 야차, 나찰을 부리며, 야차는 행동이 민첩하고 가벼우며 음악과 환락, 음식, 오락, 바람을 주관하며 숲 속이나 묘지, 골짜기에서 산다고 하고,

나찰은 “두려운 존재”라는 뜻으로 혈육(血肉)을 먹고 탐내는 존재라고 한다.

이러한 다문천왕을 불교에 흡수되면서, 야차와 나찰을 부하로 부리면서 부처님의 설법을 가장 많이 듣고 불법(佛法)을 수호하는 존재로 변화된 것이다.


多聞天王의 地物(다문천왕 지물)에 대하여 : <다리니집경>에는 왼손에 창(혹은 방)을 잡아 땅을 짚고, 오른손에는 불탑(佛塔)을 든다고 하며,

<일자불정륜경[一字佛頂輪經]>에는 왼손에 창, 오른손에 금강저를 든다고 하고, <약사여래 유리광칠불본원공덕경>에는

왼손에 막대(방 혹은 봉[棒]) 오른손에 탑을 든다고 하며, 어둠 속을 방황하는 중생을 재도한다는 뜻으로 얼굴이 검은색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보광전 앞에 보물 제 35호인 석등과 보물 제 37호인 동서 삼층석탑이 있다.



南原 實相寺 石燈(남원 실상사 석등)  : 보물  제35호    시대 = 통일신라

이 석등은 통일신라시대에 만든 것으로, 각 부분을 팔각형으로 만들어 그 시대 석등의 일반적인 형식을 따르고 있다.

하지만 이 석등은 기둥이 둥근 장고(長鼓)모양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일반 석등과 다르다.

지붕 위에 또 하나의 작은 원형지붕을 얹은 점 역시 독특하다. 받침과 기둥, 몸체 등 곳곳에 연꽃을 비롯한 다양한 무늬를 새기어 화려하게 장식하였다.

부처의 자비를 담은 불빛을 온누리에 환하게 비추려는 듯 몸체의 여덟 면 모두에 큼직한 사각창을 내었다.

<실상사의 글>



南原 實相寺 石燈(남원 실상사 석등)  : 보물  제35호    시대 = 통일신라

실상사는 지리산 천왕봉의 서쪽 분지에 있는 절로, 통일신라 흥덕왕 3년(828)에 홍척(洪陟)이 선종 9산의 하나로 실상산문을 열면서 창건하였다.

이 석등은 실상사 보광명전 앞뜰에 세워져 있다.

석등은 불을 밝히는 화사석(火舍石)을 중심으로 밑에 3단의 받침을 쌓고, 위로는 지붕돌과 머리장식을 얹었는데,

평면은 전체적으로 8각형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받침부분의 아래받침돌과 윗받침돌에는 8장의 꽃잎을 대칭적으로 새겼다.

화사석은 8면에 모두 창을 뚫었는데, 창 주위로 구멍들이 나 있어 창문을 달기 위해 뚫었던 것으로 보인다.

지붕돌은 여덟 곳의 귀퉁이가 모두 위로 치켜올려진 상태로, 돌출된 꽃모양 조각을 얹었다.

머리장식에는 화려한 무늬를 새겨 통일신라 후기의 뛰어난 장식성을 잘 보여준다.  長鼓

이 석등은 규모가 커서 석등 앞에 불을 밝힐 때 쓰도록 돌사다리를 만들어 놓았으며,

지붕돌의 귀퉁이마다 새긴 꽃모양이나 받침돌의 연꽃무늬가 형식적인 점 등으로 보아 통일신라 후기인 9세기 중엽에 만들어진 작품으로 보인다.

<문화재청 글>



    

南原 實相寺 東ㆍ西 三層石塔(남원 실상사 동ㆍ서 삼층석탑)  : 보물  제37호    시대 = 통일신라

실상사의 중심법당인 보광전 앞뜰에 동 · 서로 세워져 있는 두 탑이다. 실상사는 통일신라 흥덕왕 3년(828)에 홍척(洪陟)이 창건하였으며,

풍수지리설에 의거하여, 이 곳에 절을 세우지 않으면 우리나라의 정기가 일본으로 건너간다 하여 지은 것이라 한다.

이 곳에는 3층 석탑 이외에도 석등, 묘탑, 탑비, 부도, 철조여래좌상 등이 있어 유명하다.

탑은 2층으로 된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으로, 동서 두 탑 모두 탑의 머리장식이 거의 완전하게 보존되어 있는 희귀한 예이다.

탑신은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하나의 돌로 만들어져 통일신라시대의 정형을 보이며, 각 층 몸돌에는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이 새겨져 있다.

지붕돌은 처마밑이 수평이며, 밑면의 받침은 4단이고, 네 귀퉁이에서 살짝 들려 있는데, 그 정도가 부드러우면서도 경쾌하다.

특히 탑의 머리장식은 원래대로 잘 보존되어 각 장식부재들이 차례대로 올려져 있다.

이와 같이 두 탑은 규모나 양식이 같아서 동시에 조성된 것임을 알 수 있으며,

대작은 아니지만 돌의 구성이 정돈되어 있는 통일신라 후기의 뛰어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동쪽탑                                                                                                                      서쪽탑

南原 實相寺 東ㆍ西 三層石塔(남원 실상사 동ㆍ서 삼층석탑)  : 보물  제37호    시대 = 통일신라

이 쌍둥이 석탑은 통일신라 말 실상사를 처음 지으면서 함께 세운 것이다. 높이는 5.4m로 전형적인 통일신라시대 석탑이다.

층마다 몸체와 지붕을 각각 별개의 돌로 만들고, 각층 몸체의 모퉁이에는 기둥모양을 조각하였다.

지붕 아래 면은 수평이나, 윗면 모퉁이 부분을 치켜 올려졌다. 받침부가 비교적 커서 균형감은 덜하나 전체적인 모습은 경쾌한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서쪽 탑은 아쉽게도 꼭대기 일부를 잃어버렸으나, 두 석탑 모두 윗부분이 비교적 원래대로 남아 있어 그 화려했던 모습을 짐작하게 한다.

<실상사 글>



普光殿(보광전)

보광전 안에는 조선시대에 조성된 비로자나불좌상을 중심으로  좌우에 베트남에서 이운해 왔다는 종이로 만든 보살입상이 있고,

 범종이 걸려 있다.  종은 1694년(숙종 20)에 만든 것으로 종을 치는 자리에 일본의 지도 비슷한 무늬가 있다.

이것을 치면 일본이 망한다는 소문이 떠돌아서 일제 말기에는 주지가 문초를 당하기도 하였다.



法堂 內 三尊佛

보광전 안에는 조선시대에 조성된 비로자나불좌상을 중심으로  좌우에 베트남에서 이운해 왔다는 종이로 만든 보살입상이 있다.



普光殿 法堂 內 三尊像(보광전 삼존상)

좌우에 계신 보살은 베트남에서 이운해 왔다는 종이로 만든 보살입상 이랍니다.



보광전 신중단(신중탱)

불교의 호법신(護法神)들을 묘사한 불화이다. 법당의 중심부에서 좌우측 벽에 봉안된다. 신중탱화에 나오는 많은 호법신들은 우리나라 재래의 신들이 많다. 이는 재래 토속신앙의 불교적 전개를 의미하고, 그 기능은 토속 신들의 호법선신(護法善神)의 구실을 담당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점에서 신중탱화는 그 어떠한 탱화보다도 고유의 특성이 강하다. 


우리나라 최초의 신중탱화는 화엄신중신앙(華嚴神衆信仰)에 바탕을 둔 것으로 39위(位)신중탱화가 그 원형을 이룬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차츰 불교가 민간신앙과 강하게 결합되면서 보다 많은 신들을 수용하여 104위 신중탱화를 이루게 되고,

다시 개개의 신들이 지니는 본래의 신앙적 기능이 강조됨에 따라서 104위 신중탱화는 다시 분화된다.


현재 우리나라에 있는 탱화는 네 가지 유형으로 분류할 수 있다. 

첫째는 대예적금강신(大穢跡金剛神)을 주축으로 한 탱화이다.      둘째는 제석천과 대범천 ․ 동진보살을 중심으로 한 신중탱화이다.

셋째는 제석천 ․ 대범천을 중심으로 한 탱화이다.             넷째는 동진보살(위태천)을 중심으로 한 탱화이다.



實相寺銅鐘(실상사 동종)  :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 137호    

실상사 경내에 있는 높이 123㎝, 입 지름 83㎝의 종이다.

종을 매다는 고리는 용이 종머리를 딛고 있는 형상이며, 소리의 울림을 도와주는 용통은 간략화 된 용이 꼬리를 휘감은 모양을 하고있다.

몸통 위쪽은 원안에 범자를 양각한 문양을 12곳에 배치하였다. 그 아래 사각형을 이룬 유곽이 4면에 있으며,

사이사이에 두 손으로 꽃가지를 잡고 보관을 쓴 보살상이 1구씩 배치되었다. 유곽의 테두리는 덩굴무늬로 장식되었고, 안쪽으로는 꽃 모양의 유두 9개가 있다.

종에 새긴 글을 통해 조선 숙종 20년(1694)에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實相寺銅鐘(실상사 동종)  :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 137호     시대 =  <사진 문화재청 펌함>  법당



藥師殿(약사전)

안에는 보물 제 41호인 철조여래좌상이 모셔져 있다.


동방 유리광세계의 교주이시고 대의왕불(大醫王佛)이신 약사유리광여래를 모신 전각으로서 유리광전이라고도 합니다.

약사여래부처님은 현세 중생의 모든 재난이나 질병을 없애고 고통을 구제하는 부처님이며, 일광보살(日光菩薩), 월광보살(月光菩薩)이

좌우에 협시하여 진리광명을 두루 비추어 중생의 모든 고통을 제거한다고 합니다.

                  


南原 實相寺 鐵造如來坐像(남원 실상사 철조여래좌상)  : 보물  제41호     시대 = 통일신라

통일신라 말 지방의 여러 선종 사찰에서 쇠를 녹여 많은 불상을 만들었는데, 이 불상은 그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높이는 2. 69m이다.

무릎 아래는 복원한 것이며, 깨어진 두 손도 근래에 칮아 원래의 모습대로 복원하여 붙였다.

두리뭉실한 머리 윤곽, 촘촘한 고수머리, 원만하고 시원스런 얼굴, 넓은 가슴에 갸름한 허리 등으로 보아 신라시대 불상의 특징을 그대로 이어받고 있다.

그러면서도 근엄하고 딱딱한 표정을 띈 이 불상은 온유함과 생동감을보이던 앞 시대의 불상과 달라 신라 말 불상의 변천 양상을 가늠케 한다.

<실상사 글>



南原 實相寺 鐵造如來坐像(남원 실상사 철조여래좌상)  : 보물  제41호     시대 = 통일신라



南原 實相寺 鐵造如來坐像(남원 실상사 철조여래좌상)  : 보물  제41호     시대 = 통일신라

통일신라 후기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실상사 창건 당시부터 지금까지 보존되어 오고 있는 유명한 철불이다.

통일신라 후기에는 지방의 선종사원을 중심으로 철로 만든 불상이 활발하게 만들어졌는데, 이 불상 역시 한 예로서 당시의 불상 양식을 잘 표현하고 있다.

머리에는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기교있게 붙여 놓았고, 정수리 위에는 상투 모양의 머리(육계)가 아담한 크기로 자리잡고 있다.

귀는 그런대로 긴 편이고, 목에 있는 3줄의 주름인 삼도(三道)는 겨우 표현되고 있다. 좁아진 이마, 초생달 모양의 바로 뜬 눈,

다문 입 등의 근엄한 묘사는 이전의 활기차고 부드러운 모습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어깨선이 부드럽고 가슴도 볼륨있게 처리되었지만 전반적으로 다소 둔중한 느낌을 주며,

양 어깨에 모두 걸쳐 입은 옷 역시 아래로 내려올수록 무거운 느낌을 준다.

옷주름은 U자형으로 짧게 표현되고 있는데 이것은 당시에 유행하던 옷주름 표현기법으로 비교적 자연스러운 모습이다.

이상과 같은 특징을 지닌 실상사 철제여래좌상은 긴장감과 활력이 넘치던 8세기의 불상이 다소 느슨해지고 탄력이 줄어드는

9세기 불상으로 변화하는 과도기적인 작품이라는 점에 그 의의를 둘 수 있다. 
<문화재청  글>



철조 여래좌상의 양손

근래에 찾아 원래의 모습대로 부처님의 손을 복원하였다고 한다.



구름 위 연꽃에 쌓여 있는 철조 여래좌상의 양손



철조 여래좌상



약사전에 있는 신중단의 신중탱



冥府殿(명부전)

지장보살의 대원력이 살아 숨쉬는 전각으로서 명부전(冥府殿)이라고도 하며 지장보살을 주불로 모시기 때문에 지장전이라고 합니다.

지장보살의 좌우에는 도명존자(道明尊者)와 무독귀왕(無毒鬼王)을 협시로 봉안합니다.

그리고 대부분 우리나라 사찰은 유명계(幽冥界)의 심판관인 시왕(十王)을 좌우로 모시기 때문에 시왕전(十王殿)이라고도 합니다.

시왕(十王)은 지옥에서 죄의 경중을 정하는 10위의 왕으로 진관대왕, 초강대왕, 송제대왕, 오관대왕, 염라대왕,

변성대왕, 태산대왕, 평등대왕, 도시대왕, 오도전륜대왕을 말합니다.



무독귀왕  지장보살  도명존자



무독귀왕과 시왕중 5분과 인상



도명존자와 시왕중 5분 그리고 마지막에 인상



중앙 지장보살과 좌우협시인 무독귀왕과 도명존자



七星閣(칠성각) = 인간의 수명장수와 재물을 관장하는 칠성신을 모시는 사찰 전각.

칠성은 본래 도교에서 신앙하던 것으로, 우리나라에 들어와 기우 · 장수 · 재물을 비는 민간신앙으로 자리잡았다.

이후 칠성신에 대한 제사는 조정과 민간에서 계속되었으며, 이 신앙이 불교에 수용되어 사찰 안에 칠성각을 짓고 칠성신을 모시게 되었다.

칠성각은 조선시대에 나타나기 시작해 지금도 대부분의 사찰에 두고 있는데, 이는 우리나라의 사찰에서만 볼 수 있는 특유한 경우이다.

칠성각에는 칠여래와 북두칠성을 상징하는 칠원성군을 탱화로 그려 봉안하고 있다.



熾盛光如來(치성광 여래)와  七元星君(칠원성군)

도교에서 유래한 칠성신앙을 불교에서 받아들여 그 중 북극성을 부처로 바꾸어 부르는 이름이다.

이밖에 북두칠성은 칠여래(七如來), 해는 일광변조소재보살(日光遍照消災菩薩), 달은 월광변조소재보살(月光遍照消災菩薩)로 바꾸어 부른다.

북극성은 그 빛이 밤하늘의 별 중 가장 밝아 치성광(熾盛光)이라는 명칭이 붙었으며 묘견보살(妙見菩薩)이라고도 한다.

 치성광을 내뿜어 해와 달, 그리고 별과 그 별이 머무는 자리 등 빛이 있는 모든 곳을 다스린다.

불교가 우리나라 재래의 민간신앙을 흡수한 예로, 다른 나라 불교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사찰에서는 다른 불상처럼 조각상으로 꾸민 예는 없고, 칠성각 또는 삼성각에 후불탱화로 모신다.

일광여래 · 월광여래와 함께 삼존불을 이루고 주변에는 칠여래와 칠원성군이 배치된다.

아이의 수명을 관장하고 재물과 재능을 준다고 하여 예로부터 민간에서 많이 믿었다.

특히 약사불과 비슷한 역할을 한다고 하여 자식이 없거나 아들을 낳고자 하는 여자, 자녀의 수명을 기원하는 이들이 많이 믿었다.


♣▶고려(高麗) ‘치성광여래왕림도(熾盛光如來枉臨圖)

'치성광여래’는 북극성을 말한다. ‘치성광불여래왕림도’는 북극성인 치성광여래를 한복판에 두고, 그 주변의 보살들에게 각기 별자리 이름을 붙여 배치한 것이다.

그림을 자세히 살펴보면, 치성광여래 양 옆으로 해를 상징하는 일광보살(日光菩薩)과 달을 상징하는 월광보살(月光菩薩)이 있다.


치성광여래는 소가 이끄는 수레에 올라타고 있는데, 이는 인간의 삶이 수레바퀴처럼 돌고 돈다는 불교의 윤회사상을 반영한 것이다.

또한 가운데 위치한 치성광여래를 28명의 보살로 표현된 별자리(28宿)가 둘러싸고 있으며, 그 28수는 또 동물과 연관시켜 표현하기도 했다.

그림의 오른쪽 위에는 북두칠성 외에 2개 별자리를 더한 북두구진(北斗九辰)이 한데 모여 있고, 제일 위쪽에는 일년 열두 달을 상징하는 12궁(宮) 별자리가 있다. 여기서 특이한 점을 발견할 수 있다. 서양의 황도 12궁 별자리가 고려시대의 불화 안에 나타난다는 점이다. 우리는 이 흔적을 통해 서양의 별자리가 고려시대에 전래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치성광불여래왕림도’의 불화에서 고려시대 천문의 흔적은 물론 동서양 교류의 흔적까지 살필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불화의 근간은 조선 선조 2년작인 '치성광제성강림도(熾盛光諸星往臨圖)'로 이어지고 있다.

이 선조본에서 특이한 점은 고려본과는 다르게 북두칠성이 머리를 길게 내려뜨린 여인의 모습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불화를 볼 수 있는 기회가 되시면 세밀하게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七星閣(칠성각) 옆면



梵鍾閣(범종각)



세월호 조형물이라고 합니다. 희생자들의 위령탑 비슷하게 해 놓은 것 같습니다.



옛 기와탑 = 古瓦塔(고와탑)

이 탑은 통일신라시대 구산선문(九山禪門) 가장 먼저

 개창한 유서 깉은 사찰인 "실상사(實相寺)"에서 출토된 기와들로 쌓은 것입니다. 실상사가 창건된 당시의 모습과 변천과정을 밝히기 위해

실상사와 남원시의 두움으로 지난 1996년 - 2005년까지 국립부여 문화재 연구소가 발굴 조사하였고

그 과정에서 출토된 통일신라 - 조선시대의 기와들을 모아 이탑을 만들었습니다.

이 기와 하나하나가 1200여 년에 걸쳐 실상사에  남겨진 우리 조상의 얼을 담고 있사오니 한 점도 없어지지 않게 보존하여 후손들에게 남겨 줍시다.


2005년 10월   대한 불교조계종 실상사,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남원시



佛頭 造形物(불두 조형물) 







天王門(천왕문)



버스 도로에서 실상사로 넘어가는 람천의 다리 = 람천 교



南原 實相寺 石長栍(남원 실상사 석장승)  : 중요민속문화재  제15호      시대 = 조선

옹호금사축귀장군[ 擁護金砂逐鬼將軍, 금모래 가득한 람천을 보호하고 악귀를 쫓아내는 장군]


장승은 민간신앙의 한 형태로 마을이나 사찰 입구에 세워져 경계를 표시함과 동시에 잡귀의 출입을 막는 수호신의 구실을 한다.

실상사 입구에 있는 3기의 돌장승 역시 경계표시와 함께 경내의 부정을 금하는 뜻에서 세운 것으로 보여진다.

만수천의 해탈교를 건너기 전 마을쪽에 있는 돌장승이 옹호금사축귀장군(擁護金沙逐鬼將軍)이고,

해탈교를 건너자 마자 길 좌우에 2기의 돌장승이 마주보고 서 있다.

 오른쪽 논두렁 가에 있는 돌장승이 상원주장군(上元周將軍)이고, 왼쪽의 괴목 아래 서 있는 돌장승이 대장군(大將軍)이다.

3기의 장승은 거의 같은 모습으로 머리에 벙거지를 쓰고 있으며 크고 둥근 눈에 뭉툭한 주먹코이다.

윗 송곳니 두 개가 삐져나와 험상궂은 듯 하지만 입가의 미소가 순한 심성을 드러내고 있다.

길게 수염이 표시되고 몸체에는 좌우 각각 상원주장군, 대장군, 옹호금사축귀장군이라는 이름이 새겨있다.

다만 수염이 반대로 향하고 있어 상원주장군과 대장군은 대칭적인 한 쌍을 염두에 둔 조각인 듯싶다.

대장군의 기단석(基壇石)과 상원주장군의 뒷면에 있는 기록으로 보아 실상사 석장승들은 조선 영조 원년(1725)과 영조 7년(1731)에 세워졌음을 알 수 있다.

<문화재청 글 펌>





오른쪽 논두렁 가에 있는 돌장승인 상원주장군(上元周將軍)

머리에 벙거지를 쓰고 있으며 크고 둥근 눈에 뭉툭한 주먹코이다. 윗 송곳니 두 개가 삐져나와 험상궂은 듯 하지만 입가의 미소가...

수염이 반대로 되어 있다.


이 돌장승들은 실상사를 지키는 상징적인 조각품으로 원래는 이곳 냇가에 모두 네 개가 있었다.

절로 가는 도중 내를 건너기 전에 두 개의 장승이 서있는데, 그 중 오른쪽 것이 홍수에 쓸려 내려가 현재는 세 개만 남았다.

장승들의 높이는 대략 2.5 ~ 2.9m, 너비 40 ~ 50cm 가량이며 머리에 모자를 쓰고 튀어나온 둥근 눈에 주먹코와 커다란 귀를 갖는 등

비숫한 양식을 보인다.  장승에 새긴 기록으로 보아, 같은 시기인 조선 영조 1년(1725년)에 세운 것들임을 알 수 있다.

장승은 보통 남녀로 배치해 음양의 조화를 꾀하는데, 이 곳 장승은 모두 남자 형태이다.

귀신을 쫒는 장승들의 표정이 험상궂기는 커녕 오히려 익살스럽고 해학적이다.

<팻말에 쓰여진 글>



왼쪽의 괴목 아래 서 있는 돌장승인 대장군(大將軍)

머리에 벙거지를 쓰고 있으며 크고 둥근 눈에 뭉툭한 주먹코이다. 윗 송곳니 두 개가 삐져나와 험상궂은 듯 하지만 입가의 미소가...



동장승 2014.  =  성신석조각연구회

실상사 안에는 람천에서 가져온 긴 모양의 돌이 뉘어져 있었다. 성신여대 교수, 강사, 대학생으로 구성된 성신석조각연구회는

마치 머리 없는 장승의 몸처럼 보이는 이 돌에 머리를 만들어 생명을 불어 넣고자 했다.

홍수 때 사라진 것으로 전해지는 장승을 대신해 해탈교 입구 옹호금사축귀장군[ 擁護金砂逐鬼將軍, 금모래 가득한 람천을 보호하고 악귀를 쫓아내는 장군]

맞은 편에 이 작품을 뉘어 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