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화이야기=고려외

국립중앙박물관 = 2016. 5. 25. 한일국보 반가사유상의 만남, 벼락도끼와 돌도끼, 상주 북장사 괘불전시

백련암 2016. 7. 3. 02:08

국립중앙박물관 =  2016. 5. 25. 한일국보 반가사유상의 만남, 벼락도끼와 돌도끼, 상주 북장사 괘불전시

 

 ◈ 한일국보 반가사유상의 만남◈

 국립중앙박물관은 2015년 한일국교정상화 50주년을 계기로 오는 5월 24일부터 6월 12일 까지 3주간  한국과 일본 대표 반가사유상을

1점씩 감상할 수 있는 특별한 자리를 마련하였습니다.

 

6세기 후반 한국에서 제작된 대표적인 반가사유상인 국보 제78호 금동반가사유상과 한반도에서 전래된 반가사유상을 학습하여

일본적인 조형으로 승화한 대표 사례인 아스카시대[飛鳥時代] 7세기 후반의 일본 국보 주구사[中宮寺] 목조반가사유상이 최초로 한자리에서

 전시됩니다. 특히 주구사 반가사유상은 이번 전시를 위해 최초로 일본을 떠나 해외에 전시되는 것입니다.

 

둥근 의자 위에 걸터앉아 왼쪽 다리를 수직으로 내리고 왼쪽 무릎 위에 오른쪽 다리를 걸쳐 올린 반가좌(半跏坐)의 자세에,

오른쪽 손가락을 뺨에 살짝 댄 채 생각에 잠긴 사유형(思惟形)의 보살상을 ‘반가사유보살상’이라고 합니다.

 

반가사유의 자세는 출가 전 인간의 생로병사를 고민하며 명상에 잠긴 싯다르타 태자의 모습에서 비롯되었습니다.

 

한국에서 반가사유상은 삼국시대 6세기에서 7세기 사이에 집중적으로 만들어졌으며 불교의 동점(東漸)과 함께

일본 아스카시대 반가사유상의 제작에 영향을 미칩니다.

반가사유상이라는 동일한 형식의 불상이 양국 특유의 문화 속에 표현되는 과정에서 조형적인 공통점과 차이점을 느껴볼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또한 두 상의 비교 전시는 인도에서 시작된 반가사유상이 중국을 거쳐 한국과 일본으로 전해지는 과정에서 역동적인

고대 동아시아의 문화 교류가 어떻게 펼쳐졌을지 상상해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할 것입니다.

 

 

 

 

 

 

 

 

이 목조 반가사유상은 쇼토쿠 태자(聖德太子[성덕태자] 574년 ~ 622년)가 세웠다고 알려진 나라 현주구 사(中宮寺[중궁사]) 소장의 작품입니다.

머리에는 특이하게 두 개의 둥근 상투를 틀어 올렸으나, 못 구멍 자국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원래는 보관을 착용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지그시 감은 눈매에는 윤곽선을 새기지 않아 명상을 하는 둣 보여 신비롭습니다.  살짝 올라간 입가와 편평한 귀에서 예스러운 표현이 보이지만

신체의 비율이 자연스럽고 치맛주름이 유려한 후대의 양식이 공존하고 있어서 아스카시대 후기에 제작된 것으로 여겨집니다.

당시 목조불상에 주로 사용한 녹나무로 제작되었으며, 나무를 11개의 조각으로 나누어 각 부위를 끼워 맞추는 창의적인 방법이 사용되었습니다.

이상은 한반도에서 전래된 반가사유상을 일본적인 조형으로 승화시킨 아스카시대의 대표적인 불교조각품입니다.

 

 

 

   

 

한국과 일본의 반가사유상

반가사유상(半跏思惟像)이란 한 쪽 다리를 다른 쪽 무릎 위에 얹고 손가락을 뺨에 댄 채 생각에 잠긴 자세의 상을 말합니다.

이러한 자세는 출가 전에 인간의 생로병사를 고민하며 명상에 잠긴 싯다르타 태자의 모습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인도 간다라 지역에서 처음 등장한 반가사유상은 중앙아시아를 거쳐 중국, 한국, 일본으로 전해졌습니다.

삼국시대에는 미륵 신앙을 배경으로 국보 제 78호 상과 제 83호 상을 비롯하여 봉화 북지리에서 출토된

세계에서 가장 큰 석조반가사유상(추정 복원 높이 약 3m)등 기념비적인 작품들이 만들어졌습니다.

특히 신라에는 전륜성왕(轉輪聖王) 사상의 유행과 더불어 화랑을 미래의 구세주인 "미륵(彌勒)의 화신" 으로 여기는 인식이 있었고,

이는 곧 대형 반가사유상이 제작되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한국의 반가사유상이 일본에 전래되어 아스카(飛鳥[비조])시대에 수 많은 미륵보살 반가사유상을 탄생시켰습니다.

그 예로 666년에 만든 오사카 야추사(野中寺[야중사]) 금동반가사유상의 대좌에는 "미륵[미륵]"이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습니다.

일본의 반가사유상은 한국과 같이 금동으로 만든 것이 많지만, 큰 상의 경우에는 주구사(中宮寺[중궁사]) 상과 같이 나무로도 제작하였습니다.

 

 

둥근 의자 위에 걸터앉아 왼쪽 다리를 수직으로 내리고 왼쪽 무릎 위에 오른쪽 다리를 걸쳐 올린 반가좌(半跏坐)의 자세에,

오른쪽 손가락을 뺨에 살짝 댄 채 생각에 잠긴 사유형(思惟形)의 보살상을 ‘반가사유보살상’이라고 합니다.

 

 

 

 

◈벼락도끼와 돌도끼◈

 

 

震平安道 義州 巖石 得雷斧以獻[진평안도 의주 암석 득뇌부이헌]

 

[해석]  평안도 의주의 바윗돌에 벼락이 쳤다.

그곳에서 찾아낸 벼락도끼를 임금님께 바쳤다.

 

 

◈벼락도끼와 돌도끼◈

우리나라에서 선사시대의 유적과 유물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언제일까요?

고려시대 이전에는 문헌이 전하지 않아서 알 수 없지만 조선시대에는 돌도끼를 "벼락도끼"로 인식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조선시대 사람들은 벼락이 떨어진 곳에서 발견한 돌도끼를 벼락도끼라고 불렀습니다.  천둥과 번개를 다스리는 신의 도끼라는 뜻이 담겨 있는

벼락도끼를 나쁜 기운을 물리치는 신묘한 약효를 가진 만병통치약이라고 여겼습니다.

근대적 학문 체계로서의 고고학이 자리를 잡기 이전까지는 우연히 발견된 과거의 유물과 유적을 흔히 당대의 지배적인 자연관이나

종교관에 따라 초자연적 산물로 해석하였습니다.  20세기 중반 이후 고고학이라는 학문이 발달하면서 돌도끼의 용도, 제작시기와 방법을 알게 되었습니다.

 

 

   

주먹도끼

 

석기를 판별하는 방법

석기는 단순한 돌과 어떻게 다를가요?  석기는 돌에서 매끈한 자연면을 의도적으로 깨거나 갈아서 만든 날카로운 날을 가진 도구 입니다.

이 때문에 석기를 자세히 관찰하면 가공한 흔적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돌을 타격하면 힘을 받은 점을 중심으로

동심원과 이것이 직교하는 균열흔이 나타납니다.  이외에 깨진 면의 규칙성, 전체적인 형태의 정형성과 규격성,

 출토 정황 등이 석기를 판별하는 기준이 됩니다.

 

 

주먹도끼

 

 

   

㉠                                       雷斧(뇌부)                                     

黃海道 長淵郡 夢金浦里[황해도 장연군 몽금포리]  :  시대 =  청동기시대

傳 漣川  全谷面[전 연천 전곡면]  :  시대 =  청동기시대

 

 

별도끼 = 星形石斧(성형석부)  :  시대 =  靑銅器時代   

 

 

2.  별도끼 = 星形石斧(성형석부)  :  시대 =  靑銅器時代    발견된 곳 = 平安南道 大同郡 美林里(평안남도 대동군 미림리)   1917년 입수

3. 별도끼 =  星形石斧(성형석부)  :  靑銅器時代(청동기시대)  1923년 구입

 

 

별도끼 = 星形石斧(성형석부)  :  시대 =  靑銅器時代(청동기시대)

 

 

달도끼 = 瑗狀石斧(원상석부)   :  경기도      시대 = 청동기

 

 

달도끼 = 瑗狀石斧(원상석부)   :  경기도      시대 = 청동기

 

 

달도끼 = 瑗狀石斧(원상석부)   :  경기도      시대 = 청동기

 

 

돌도끼 =  石斧(석부) :  咸鏡北道 羅先市 雄基貝塚(함경북도 나선시 웅기패총)  : 시대 =  청동기

 

일제강점기 선사시대 조사

1880년대 개항 직후 조선을 찾은 서양인들이 우리나라의 유적과 유물에 대해 소개한 단편적인 기록들이 남아 있기는 하지만,

본격적인 조사는 일제강점기에 고고학 자료를 독점한 조선총독부 촉탁이었던 도리이 류조(鳥居龍藏[조거용장] 1870년~1953년)가 담당하였다.

한반도 전체를 망라하여 지표채집과 간단한 시굴조사를 시행하며 유물 채집에 주력하였다.

1922년에는 조선총독부에 고적조사과가 설치되었으며, 이 때 후지타 료사쿠(藤田亮策[등전량책], 1892년~1960년)가

고적조사위원으로 부임하여 웅기 송평동 조개무지 등 선사시대 유적을 조사하였다.

 

 

다목적용 도끼, 주먹도끼 =  手斧(수부)  :  시대 =  구석기시대    출토지 =  양평 도곡리 2005-2006년 발굴

 

 

   

별도끼                                                                                                           우두머리의 도끼

1. 별도끼 = 星形石斧(성형석부)  :  시대 =  청동기시대   출토지 = 김포 양촌면 2007 - 2011년 발굴

2. 우두머리의 도끼 = 星形石斧(성형석부)  :  시대 =  청동기시대   출토지 =  평택 소사동 2004 - 2006년 발굴

 

 

정교한 벼락도끼는 사람의 솜씨일까? = 『靑坡集[청파집]』板木(판목),   시대 = 조선 철종 4년(1853년) 판각 추정,    李陸(이육, 1438년 - 1498년)

조선시대에는 벼락도끼를 천지조화의 산물이라고 생각했으나, 15세기 문인 이육(李陸, 1438년-1498년)은

벼락도끼가 자연의 산물이 아니라 노련한 장인이 만든 물건일 가능성을 그의 문집『청파집』중「靑坡劇談[청파극담]」에 남겼다.

 

 

벼락도끼에 대한 설명한 글

별이 떨어져 돌이 되고, 벼락 치고 천둥이 울려 돌을 얻으니 칼 같기도 하고 도끼 같기도 하다. 그 다듬은 솜씨는 진실로 우연이 아니고

훌륭한 장인과 노련한 손을 거치지 않으면 이룰 수 없으니, 어찌 천지조화의 능력이 자연스럽고 신묘하여 사람의 솜씨보다 뛰어나다 하겠는가?

누가 하늘에 사물이 있어 자연히 이와 같다고 말하겠는가? 천지에서 생겨나는 물건 가운데 초목의 꽃 같은 것은 교묘하지 않은 것은 아니나

음양의 정기를 빌려서 일시에 번영하고 호화로운 것이다. 금 · 옥 · 흙 · 돌은 사람의 힘을 빌리지않으면 교묘하게 될 수 없다.

나는 벼락도끼(雷斧[뇌부]) 벼락칼(雷劍[뇌검])의 연원을 알지 못하니 박학다식한 군자를 기다려 알고자 한다.

 

왕의 진상품, 벼락도끼

죄신(雷神)은 하늘에서비와 바람, 천둥과 번개를 다스리는 신으로 도끼(雷斧[뇌부])를 지니고 있는 모습이 나타니가 시작한 것은 8세기경

중국의 당(唐)대입니다. 『조선왕조실록』의 벼락도끼 관련 기록은 세종 23년(1441년)을 시작으로 광해군 14년(1622년)에 이르기까지

약 180년 동안 7번 보입니다.  신의 물건인 벼락도끼에 신묘한 약효가 있다고 생각하여 임금에게 진상품으로 올렸습니다.

백성들은 벼락도끼를 만병통치약으로 여겨 임산부에게 갈아 먹이기도 하고, 나쁜 기운을 물리친다고 믿어 아이에게 채워 주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16세기 초부터 성리학적 사회질서가 자리를 잡으면서 벼락도끼를 자연적인 기(氣)가 뭉쳐서 만들어진 물건이라고 설명하기 시작하였습니다.

17세기 이후에는 실록에서 벼락도끼에 대한 기록이 점차 사라지게 됩니다.

 

 

오행설로 풀어 본 벼락도끼

벼락도 불기운이다. 불(火)이 다 타면 흙(土)이 되고 흙이 뭉쳐져서 돌(石)이 되는 것이 바로 그 이치다.

- 중국 송대의 학자 채원정(蔡元定, 1135 - 1198년) -

 

벼락도끼의 효능을 설명한 글

돌을 축축히 한 후 갈아서 즙을 복용하고 또한 삶아서 복용한다. 베개 속에 넣어 두면 악몽을 꾸지않게 한다. 끝을 갈아서 먹으면, 피로증에 좋고,

병을 일으키는 노충(勞蟲)을 죽이고, 뱀이나 지네 등 고독을 배출하며, 설사를 막아준다. 상자나 장롱에 놓아두면 좀이 생기지 않는다.

각종 뇌물(雷物)을 몸에 지니면 마음이 안정되어, 헛것을 보고 놀란 병의 치료에 쓴다.

 

 

벼락도끼의 약효 = 『本草綱目[본초강목]』  李時珍(이시진, 1518 - 1593)   중국 명나라 1596년 초간

『本草綱目[본초강목]』은 약으로 사용할 수 있는 동식물 및 광물을 분류하고 생산시와 효용을 기술해 놓은 중국 명나라 때의 약학서이다.

우리나라에는 조선 18세기 이후에 전래되었다. 이 책에는 벼락도끼에 대한 다양한 약효가 소개되어 있어

그 당시 벼락도끼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을 알 수 있다. 

 

 

뇌공도에 기록된 글 =  雷公圖(뇌공도)

"현은김덕성이 그린 뇌공도이다. 산을 뽑을 것 같은 힘과 세상을 다 덮는 기운이 역대 최고이니 이처럼 웅건한 신장이 과연 누구인가.

맹분(孟賁)과 하육(夏育)과 같은 장사라 하더라도 이에 이르지는 못하리라.  갑자년(1804년) 8월,"

 

* 맹분(孟賁)과 하육(夏育) = 중국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천하장사의 이름,

엄청난 용기와 힘의 소유자로 두 사람은 용사(勇士)의 범칭이 되어 "분육(賁育)"으로 일컬어진다.

 

조선시대 사람들이 생각한 뇌신 = 雷公圖(뇌공도) : 시대 = 조선 18세기 후반   작가 = 金德成(김덕성, 1729년 - 1797년)

뇌공도 우측 상단에 "현은 김덕성이 그린 뇌공도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청둥의 신인 뇌신을 그렸음을 알 수 있다.

뇌신(雷神)은 고대의 신으로 번개와 천둥을 일으키는 신이다. 천둥을 일으키는데 사용하는 북인 뇌고(雷鼓)와 나무망치를 등에 메고 칼을 들고 있다.

뇌신의 근육질 몸매와 역동적인 자세는 조선시대 그림에서 쉽게 볼 수 없는 요소이다.

 

 

   

 

 

   

 

 

   

 

 

   

 

 

◈경상북도 상주 북장사 괘불

 

상주 북장사 괘불은 소원을 들어주는 부처

이태마는 경상북도 상주 천주산(天柱山)에 위치한 북장사의 괘불을 공개하는 자리입니다. 이 괘불은 13.3m의높이로 광배를 뒤로하고 서 있는 부처를

압도적인 규모로 배치하였고 보살들과 제자 등은 작게 그려 석가모니불이 영취산(靈鷲山)에서 설법하는 장면을 장대하게 그렸습니다.

일반적으로 영산회상도(靈山會上圖)에는 법회(法會)를 주관하는 석가모니불이 대좌(臺座) 위에 앉은 모습으로 등장하는데  비해, 이 불화에서는

서 있는 입상(立像)의 부처로 표현 하였습니다. 야외 법회를 위한 괘불의 기능에 맞게 예배의 주존(主尊)을 더욱 부각시켜,

긴 화면에 서 있는 부처로 그린 것입니다.

<북장사 괴불>은 영산재(靈山齋), 수륙재(水陸齋)와 같은 불교의식을 거행할 때에도 걸렸지만 상주지역에서 극심한 가뭄이 닥쳤을 때

비를 청하는 기우제(祈雨祭) 때에도 사용되었습니다. 이 전시와 함께 불교회화실에서는 옛 사람의 구체적인 염원을 엿볼 수 있는 불화를 선보입니다.

인간의 고민과 간절한 소원이 담긴 불화 속 이야기를 함께 느껴보시기 바랍니다.

 

 

北長寺 靈山會 掛佛幀(북장사 괘불탱) : 보물 제 1278호   시대 = 조선

괘불이란 절에서 큰 법회나 의식을 행하기 위해 법당 앞 뜰에 걸어놓고 예배를 드리는 대형 불교그림이다.

이 그림은 괘불에서 많이 그려지는 영산회상도로 석가가 설법하는 장면을 나타낸 것이다.

숙종 14년(1688) 승려 화가인 학능 등이 그린 이 괘불은 길이 13.2m, 폭 8.07m이다.

전해오는 전설에 의하면 어느날 당나라 승려가 찾아와 괘불을 그리겠다고 하면서 3일 동안 출입을 금하라고 했다.

한 승려가 궁금해서 엿보니 파랑새가 입에 붓을 물고 그림을 그리는 것이었다.

엿본 것을 알게 된 파랑새는 사라지고 가까이 가서 그림을 살펴보니 어깨부분이 미완성이었다고 한다.

본존불인 석가불이 중앙에 서 있고 여러 보살 등이 석가를 에워싼 형태인데, 석가의 얼굴표정은 약간 딱딱해 보이지만

둥근 얼굴과 조화로운 이목구비, 둥그런 어깨선의 균형잡힌 신체에서 전반적으로 부드럽고 원만한 느낌을 준다.

주로 홍색과 녹색을 사용하였고 중간색과 금색무늬는 화면을 경쾌하고 화려하게 해준다.

이 괘불은 치밀하고 정교한 필치로 신체의 표현이 분명하고, 밝고 선명한 색채로 나타낸 다양한 꽃무늬가 돋보이는 17세기 후반의 뛰어난 작품이다.

또한 신체 각부의 표현이 조화를 이루며, 채색을 밝고 선명하게 하여 괘불의 비교 자료로도 가치가 있다.

<문화재청 글>

 

 

 

 

尙州 北長寺 靈山會 掛佛幀(상주 북장사 괘불탱) : 보물 제 1278호   시대 = 조선 1688년 학인등,

중앙의 석가모니부처는 불꽃문양 테두리로 화려하게 장식한 광배를 뒤로하고 크게 자리하였다. 그 주위에는 보살들과 제자들,

사천왕이 비중에 따라 다른 크기로 그려졌다. 이 불화는 영취산(靈鷲山)에서 설법하는 석가모니불과 보살, 제자등을 그린 불화로,

1688년 수화승(首畵僧) 학능(學能)을 비롯하여 7명의 승려화가들이 조성하였다. 바탕천, 불화의 고리, 채색 안료 등 괘불의 제작을 위해

96명이 시주하였고 사찰에 있는 승려들이 직 · 간접적으로 후원하였다.

화면은 불투명한 진채(眞彩)의 녹색과 붉은 색을 주요색으로 하였고 검은색과 흰색, 남색 등을 부분적으로 채색하였다.

부처의 법의(法衣)에 그려진 다양한 문양이 채색과 어우러져 화려하다.

 

 

번호순대로의 호명

1.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  2.문수보살(文殊菩薩), 보현보살(普賢菩薩), 보살중(菩薩衆)   3.범천(梵天), 제석천(帝釋天),

4.사천왕(四天王)   5.금강(金剛)   6.10대제자(十代弟子)

 

 

 

 

 

 

 

 

 

 

 

서 있는 부처 = 영취산에서 설법하는 석가

화면을 압도하는 부처가 있다 그의 몸은 화염(火焰)으로 둘러싸여 있고 정상계주(頂上髻珠)에서 피어나는 상서로운 기운이 하늘로 향한다.

신이(神異)한 힘을 일으킬 것 같은 부처의 주위에는 보살중(菩薩衆)과 천부중(天部衆), 그리고 제자들이 부처의 설법을 듣고 있다.

불화는 영취산(靈鷲山)에서 가르침을 펼치는 연산회(靈山會)를 그리고 있다.

설법의 주인공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은 화면 절반 이상을 차지하도록 크게 부각하여 그렸다.

석가모니불의 왼손은 배 부근에서 검지와 중지를 맞대고 있으며, 오른손은 몸 옆으로 내리고 있다.

부처의 오른손을 가리는 부근, 연꽃을 든 보살이 있다. 대칭하는 지점에서도 보살이 서 있는데 그는 여의(如意)을 손에 들고 있다.

지혜와 실천을 상징하는 문수보살(文殊菩薩)과 보현보살(普賢菩薩)이다 보현보살은 연꽃을 들었고 문수보살은 여의을 들었다.

그리고 부처의 머리부터 몸까지 에워싸는 광배를 따라 대칭으로 합장한 여섯 보살이 있다.

여섯보살은 표현된 모습만으로는 그 개개의 도상을 알 수 없다.

보살들의 바깥쪽  합장을 한 범천(梵天)과 제석천(帝釋天)이 있다.  범천의 미간에는 제 3의 눈이 그려졌다.

화면의 아래쪽에는 눈을 부릅뜨고 용맹한 모습의 사천왕이 보인다. 향 오른쪽에는 검을 든 천왕, 그리고 뒤쪽에 비파를 든 천왕이 있다.

여의주와 용의 몸통을 쥔 천왕, 그 뒤쪽으로 보탑(寶塔)을 쥔 천왕이 있다. 사천왕의 뒤에는 그보다 작게 4위(位)의 금강(金剛)을 그렸다.

석가의 가르침을 받들고 종지(宗旨)를 실천하는 10명의 제자는 화면 상단에 있다. 흰 눈썹과 흰 수염을 한 나이든 승려의 얼굴과 젊은 승려의 모습을

그린 가섭과 아난존자, 그리고 붉은 장포를 머리 위에 쓴 이국적인 제자도 있다.

석가(釋迦)는 성도(成道) 이후 열반(涅槃)에 이르기까지 수십년간 설법의 행적을 가지고 있다. 그 가운데 석가모니가 설법주(說法主)로 묘사되고

많은 사람이 그 법회(法會)에 참여한 도상(圖像)을 영산회상도(靈山會上圖)라고 한다.

 

영취산에서 설법하는 석가모니는 대좌 위에 앉아 가르침을 설하고 주위에 보살과 제자들, 호위하는 사천왕은 설법을 듣는다.

영산회상도는 대웅전(大雄殿)에 봉안되었다. 사찰의 야외 의식에서 의식의 주존(主尊)으로 상징된 괘불(掛佛)도 법당에 봉안되었던

후불도(後佛圖)의 도상에서 그 조형을 취하였기 때문에 괘불의 이른 작례에서는 영취산에서 설법하는 앉아 있는 부처의 모습으로 영산회를 그리고 있다.

 

17세기에 제작된<죽림사 영산회괘불도>와 <청룡사 영산회괘불도>가 대표적인 예다.

 

 

羅州 竹林寺 極樂殿 靈山會相圖(나주 죽림사 극락전영산회상도)

 

竹林寺 靈山會掛佛圖(죽림사 영산회괘불도)  :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 301호   시대 = 조선 1622년

 

나주 죽림사 영산회상도는 석가모니부처가 주재하는 영축산 설법장면을 그린 것이다.

세로로 긴 화면 중앙에 대좌에 앉은 부처의 모습을 크게 그리고 그 주위에 문수· 보현· 미륵· 제화갈라보살과 10대 제자· 범천· 제석천· 사천왕·

용왕과 용녀, 건달바와 긴나라 등이 둘러싸고 있는 구도이다.

죽림사 영산회상도는 18세기 중엽의 작품이다. 광배 등 초록색을 사용한 부분이 약간 훼손된 상태이기는 하나

전체적인 색감과 화면구성은 18세기 전라도 지방의 불화의 특성을 잘 보여주는 좋은 작품이다.

 

 

 

義通尊者(의통존자)

 

 

慧軍高尊者(혜군고존자)

 

 

   

㉠연꽃잎을 모자로 삼고 오이를 들고있는 동자,                                                          ㉡길게 목을 빼고 있는 거북이를 들고있는 동자

 

㉠다산을 기원하는 동자 = 木造童子立像(목조동자입상)  :  시대 = 조선 후기

재생을 의미하는 연꽃잎으로 모자를 삼고, 풍요와 다산을 상징하는 오이를 든 동자는 천진난만한 모습이다.

동자는 명부세계의 시자(侍子)로서 지옥에 떨어진 중생이 전생(前生)에 지었던 선악(善惡)의 업(業)을 기록하는 역할을 한다.

동자가 조각상으로 구현될 때 장수와 풍요의 상징인 거북이나 오이, 학 등을 지물(持物)로 든다.

 

 

       

㉡                                                                                                        ㉠

 

㉡장수를 기원하는 동자 = 木造童子立像(목조동자입상)  :  시대 = 조선 후기

재생을 의미하는 연꽃잎을 쓰고 얼굴은 약간 왼쪽으로 돌린 동자는 두 손으로 거북이를 들고 있다.

동자상은 지장보살상(地藏菩薩像) 시왕상(十王像)등과 함께 명부전(冥府殿)에 봉안되며 시자(侍子)의 역할을 한다.

저승사자에게 끌려가면서 시작되는 망자(亡者)의 인도와 심판, 구제가 결정되는 명부의 세계에서

천진난만한 동자의 미소는 그 굴레를 벗어날 수 있다는 가능성의 믿음을 상징하고 있다.

 

 

 

왕생자를 맞으러 오는 아미타불 = 阿彌陀聖衆來迎圖(아미타성중내영도) : 시대 = 일본 15-16세기

죽은 후에 정토(淨土)에 왕생하고자 하는 소망은 일본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극락왕생을 염원하는 아미타신앙(阿彌陀信仰)은

일본 불교에서도 널리 성행하였다. 화면에는 아미타불이 많은 보살들과 함께 구름 속에서 하강(下降)하고 있다.

이 세상을 마치고 극락으로 태어날 왕생자(往生者)를 직접 데려가기 위해 구름을 타고 내려오고 있다.

아미타불 일행의 가장 앞쪽에는 왕생자를 태우고 정토의 세계로 가기 위해 금연화(金蓮花)를 받친 보살이 무릎을 끓고 있으며,

뒤쪽으론느 각종 악기를 연주하는 보살들이 극락의 세계로 인도하고 있다.

 

 

왕생자를 맞으러 오는 아미타불 = 阿彌陀聖衆來迎圖(아미타성중내영도)

 

 

수복과 장수를 기원하는 신중도 = 帝釋天龍圖(제석천용도) : 시대 = 조선 1796년

펼쳐진 병풍을 배경으로 두광(頭光)과 큰 신광(身光)을 등진 제석천(帝釋天) 그리고 여러 신(神)들이 그려진다.

털 투구를 쓰고 삼고저(三鈷杵)를 높이 든 위태천, 털 모자를 쓰고 검(劍)을 든 무장신(武將神)도 있다.

위태천 오른쪽으로는 치포관(緇布冠)을 쓰고 있는 제왕형의 인물아래에 복숭아를 받쳐 든 동자와 석류를 바닥에 놓는 동자,

그리고 제석천 옆쪽으로 호리병을 잡은 인물이 있다.

19세기에는 복(福)과 장수(長壽), 소원성취(所願成就), 제액소멸(除厄消滅) 등을 신중에게 기원하는 신중신앙(神衆信仰)이 널리 성행되었다.

복숭아와 석류는 장수와 다산(多産)의 의미를 담고 있다.

 

 

수명과 장수를 발원하는 신중도 = 神衆圖(신중도) :  시대 = 조선 19 - 20세기

재앙을 없애 주고 복(福)을 내려 주는 신중(神衆) 신앙은 조선 후기에 개인과 가족의 행복을 바라는 기복(祈福 )적 욕구와 맞물려 큰 호응을 받았다.

불화의 오른쪽 아래에 화기(畵記)에는 기축생(己丑生)의 남씨(南氏) 여인이 수명장수하기를 발원(壽命長壽發願)하면서 시주하였다고 적혀 있다.

불교의 대표적인 호법신(護法神)인 위태천(韋駄天)이 화면의 중앙에 크게 부각되어 배치되었고

우리나라 고유의 신들인 산신(山神), 조왕신(竈王神) 등의 모습도 보인다.

상단에 합장한 보살형의 인물은 제석천(帝釋天)과 범천(梵天)인데 이 불화에서는 위태천보다 비중이 작다.

하늘과 일부 무구 등을 채색하고 있는 남색과 위태천의 삼고저(三鈷杵) 등에 채색된 금(金)이 화면을 돋보이게 한다.

 

 

극락왕생 기원하는 신중도 = 帝釋天龍圖(제석천 용도)  :  시대 = 조선 1817년

불교와 부처를 수호(守護)하는 신중(神衆圖)은 19세기에 개인의 복이나 장수를 위한 소원을 들어주는 신으로 신앙되었다.

불화는 화면의 상단에 제석천(帝釋天)과 그 무리를 그리고  하단에는 위태천(韋駄天)과 무장(武將)한 신(神)들을 그리고 있다.

화기(畵記)에 의하면 50세가 된 김영표 부부가 세 아들 부부, 막내아들과 함께 극락왕생(極樂往生)을 기원하며

불화의 제작을 위해 시주(施主)하였다.   진채색의 붉은색과 녹색을 주조색으로 설채하였고 붉은색 위에는 흰색으로

선을 겹쳐 긋거나 다양한 문양을 섬세하게 그려 넣어 장식적 효과를 주고 있다.

신들의 얼굴에 채색한 흰색이 발색(發色)되어 어두운 색조의 화면에 밝은 느낌을 준다.

 

 

극락에서 설법하는 아미타불= 阿彌陀極樂會圖(아미타극락회도) :  시대 = 조선 1828년  화승 = 信謙(신겸, 19세기 전반활동)

불교의 세계관에서 극락(極樂)은 즐거움만이 있으며 마음과 몸의 고통이 없는 곳으로, 불교 신자들의 이상향이다.

극락에는 일체의 번뇌를 끊고 깨달음의 경지에 든 아마타불(阿彌陀佛)과 보살이 머문다. 

중앙에 앉아 있는 아미타불은 중생의 근기(根機)에 맞게 그들을 구제해 준다는

손모양(이 불화에서는 왼손의 첫 번째와 세 번째 손가락을 맞댄 중품하생인[中品下生印])을 하고 있다.

"나무 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이라는 정성스러운 염불(念佛)만으로도 죽음 이후 망자(亡者)를 서방 극락세계로 데려간다는

아미타불은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사람들에게 인기 있었던 부처였다. 

불화는 경상도 일대를 주름 잡았던 화승(畵僧) 신겸(信謙)이 9명의 화승과 함께 그렸다.

 

 

극락에서 설법하는 아미타불= 阿彌陀極樂會圖(아미타극락회도)

 

 

극락에서 설법하는 아미타불= 阿彌陀極樂會圖(아미타극락회도)

 

 

병을 고쳐주는 약사불 = 藥師佛會圖(약사불회도)  :  시대 = 조선 1828년  화사 = 信謙(신겸, 19세기 전반활동)

불교에서 약사불(藥師佛)은 동방(東方) 유리광정토(琉璃光淨土)에서 머물며 병을 고쳐주는 부처란 뜻으로 약왕불(藥王佛)이라고도 부르고 있다.

이 부처는 과거에 보살로 수행했을 때 중생을 교화시키기 위해 12가지의 서원(誓願)을 세웠다.

불화에는 약사불의 정토(淨土)에서 가르침을 설하는 부처와 설법(說法)을 듣는 보살들, 사천왕(四天王)과 제자(弟子)들을 그리고 있다.

중앙에 앉아 있는 약사불은 치료의 상징인 약합(藥盒)을 들고 있다.

채색은 붉은색과 녹색의 진채(眞彩)로 하였고 부처가 들고 있는 약합이나 보살들의 보관(寶冠)에 일부 금 안료가 사용되어 화려함을 더한다.

 

 

병을 고쳐주는 약사불 = 藥師佛會圖(약사불회도) 

 

 

재난에서 구제해주는 관음보살 = 觀音菩薩圖(관음보살도)  :  보물 제 1204호   시대 = 조선 1730년   화승 = 義謙(의겸, 18세기 전반 활동)

부처의 자비를 상징하는 관음보살(觀音菩薩)은 세상 사람들의 고난의 소리를 듣고 그 고통으 덜어주며 그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중생의 부름에 대답한다고 한다.  그래서 보살의 이름도 "[고통의] 소리 [음音]를 듣고 [관觀]"라는 의미로 관음보살로 불렸다.

불화는 1730년 수화승의겸(首畵僧義謙)과 4명의 화승(畵僧)이 함께 조성하였다. 넘실거리는 파도와 그곳에서 솟아 오른 바위,

그리고 풀방석 위에 앉은 관음보살이 비중 있게 배치되었다.

관음보살의 오른쪽에는 버드나무 가지를 꽃은 정병(淨甁)이 놓여지고, 가지 위에는 살포시 파랑새가 앉아있다.

정병의 옆쪽으로는 선재동자(善財童子)가 관음보살을 향해 두 손을 가지런히 모아 합장(合掌)하고 있다.

 

 

義謙等筆 水月觀音圖(의겸등필 수월관음도) : 보물  제1204호   시대 = 조선

관음은 여러 모습으로 중생 앞에 나타나 고난에서 안락의 세계로 이끌어 주는 자비를 상징하는 보살로

수월관음도에는 그가 사는 정토의 모습이 잘 나타나 있다.

이 그림은 크기가 가로 105.5cm, 세로 143.7cm로, 머리에 크고 높은 보관을 쓴 관음의 얼굴과 이목구비가 둥글고 예쁘게 묘사되어

화면 중앙을 가득히 채우고 있다.  건장한 신체로 벌어진 어깨와 넓고 큰 하체를 가지고 있다.

옷은 녹색과 붉은색이 서로 대비를 이루고 있으나 약간 색이 바래져 보인다.

관음의 오른쪽 바위 위에는 버들가지가 꽂힌 화병이 있고 왼쪽에는 한 쌍의 대나무가 있는데 이것들은 고려시대 그림과 유사한 구도이다.

고려와 비교할 때 이런 배치구도는 비슷하지만 정면을 바라보고 있는 관음의 모습과 옷의 색깔, 바위의 형태 등은

많이 달라진 모습으로 조선시대 특징을 엿볼 수 있다.

영조 6년(1730)에 18세기 최고의 승려화가인 의겸이 그린 이 수월관음도는 당대 최고의 작품이며,

특히 고려 때에는 수월관음도가 많이 그려졌으나 조선시대에는 찾아보기 힘든 매우 귀한 것으로 회화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문화재청 글>

 

 

죄를 소멸하는 수륙재 의식집 =  天地冥陽水陸雜文(천지명양수륙잡문)  :  시대 = 조선 후기

번(幡)을 든 보살들 사이에는 탑 모양 안에 많은 글들이 적혀 있다. 일체의 악(惡)을 없애준다고 하는 불정존승다라니(佛頂尊勝陀羅尼)다.

이 책은 물과 육재에서 헤매는 외로운 영혼과 아귀(餓鬼)를 달래며 위로하기 위하여 불법(佛法)을 강설하고

음식을 베푸는 수륙재의식집(水陸齋儀式集)이다.  조선 후기에는 수륙재(水陸齋), 영산재(靈山齋)부터

사찰의 일상의례에 이르기까지 의식이 성행하였고, 이에 따라 의식집이 다수 간행되었다.

 

 

죄를 소멸하는 수륙재 의식집 =  天地冥陽水陸雜文(천지명양수륙잡문)

 

 

죄를 소멸하는 수륙재 의식집 =  天地冥陽水陸雜文(천지명양수륙잡문)

 

 

부모의 은혜를 설하는 부모은중경 = 父母恩重經諺解變相(부모은중경언해변상) : 시대 =  조선

부모의 크고 깊은 은혜에 보답할 것을 설한『佛說大報父母恩重經[불설대보부모은중경]』으로, 1796년 정조(正祖, 1752년~1800년)의

어명(御命)으로 간행하였다.  정조는 사도세자(思悼世子)의 무덤을 수호하는 능침사찰(陵寢寺刹)로서 용주사를 창건하고

『父母恩重經[부모은중경]』목판(木板)을 하사하였다.

각 장면마다 구도가 짜임새가 있고 묘사가 섬세하며 인물의 자세와 표정은 이전에 간행된『부모은중경』에 비해서 뛰어나다.

펼쳐진면에는 부처가 대중을 거느리고 남방으로 가다가 한 무더기의 삭은 뼈를 보고 엎드려

예를 올렸다는<如來頂禮[여래정례]>장면이 그려져 있다.

 

 

부모의 은혜를 설하는 부모은중경 = 父母恩重經諺解變相(부모은중경언해변상)

 

 

극락왕생을 비는 법화경 = 妙法蓮華經(묘법연화경)  :  보물 제 971호  시대 = 조선

『妙法蓮華經[묘법연화경]』은 한국 불교사상 확립에 큰 영향을 끼친 경전으로 조선시대에 가장 많이 간행되었다.

변상도(變相圖)에는 고려 우왕(禑王)의 극락왕생을 기원하기 위해 정씨(鄭氏) 성(姓)을 가진 사람이 시주하여 간행하였다는 내용이 있다.

목판의 저본(底本)은 1405년(태종 5년)에 성달생(成達生) ·  성개(成槪) 형제가 돌아가신 아버지의 명복(冥福)을 빌기 위해

옮겨 쓴 것을 도인(道人) 신문(信文)이 목판에 새겨 찍어냈다.

책의 첫 머리에 경전의 내용을 요약하여 그린 변상도 안에 그려진 위태천(韋駄天)은 인물이 크면서도 정교하여

다른 법화경에 있는 변상도(變相圖)보다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妙法蓮華經(묘법연화경) :  보물  제971호    시대 =  조선

묘법연화경은 줄여서 ‘법화경’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천태종의 근본경전으로 화엄경과 함께 한국 불교사상 확립에 크게 영향을 끼친 경전이다.

묘법연화경 중 권5에서 권7에 해당하는 이 책은 태종 5년(1405)에 성달생 · 성개 형제가 죽은 아버지의 명복을 빌기 위해

옮겨 쓴 것을 도인(道人) 신문(信文)이 목판에 새겨 찍어낸 것이다.

닥종이에 찍은 목판본으로 3권을 하나의 책으로 엮었으며, 책의 크기는 세로 29㎝, 가로 30.5㎝이다.

책의 첫 머리에는 불경의 내용을 요약하여 그린 변상도(變相圖)가 있는데,

고려 우왕의 극락왕생을 기원하기 위해 정씨 성을 가진 사람이 시주하여 목판에 새긴 것이다.

변상도 안에 그려져 있는 신중상(神衆相)의 구도가 크고 새김이 정교하여 다른 법화경에 있는 변상도보다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문화재청 글>

 

 

민간신앙이 담긴 산신도 =  山神圖(산신도)  :  시대 =  조선 1886년

익살스러운 모습의 호랑이를 옆구리에 끼고 있는 산신(山神)은 근엄한 표정이다. 

깊은 산 속을 암시하는 나무와 바위를 배경으로 산신은 붉은색 옷을 입고 오른손에 주장자(柱杖子)를 쥐었으며,

왼손에 영지를 들고 있다. 불교가 민간신앙으로 토착화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산신신앙은 조선 후기에 크게 유행하였다.

대부분의 사찰에서는 산신각(山神閣)을 세우고 산신도(山神圖)를 봉안하였다.

산신은 자식을 바라고 장수 등을 바라는 기원의 대상이되었다.

 

 

자손을 기원하는 산신도 =  山神圖(산신도)  :  시대 =  조선  1885년

산신(山神)은 부채를 들고 한 쪽 무릎을 세운 채 호랑이를 옆구리에 끼고 앉아 있다.

용맹의 상징인 호랑이는 산신 옆에서 고양이처럼 귀여운 자세로 누워있다.

산신도(山神圖)는 산왕(山王)으로 신앙되던 호랑이를 의인화하여 그린 불화로, 불교가 민간신앙과 결합하고 토착화하는 과정에서 생겨난다.

산의 신령으로 믿어져 온 호랑이와『華嚴經[화엄경]』에서 불법을 외호(外護)하는 주산신(主山神)이 결합되어 산신이 되었다.

고집스러워 보이는 산신과는 대조적으로 호랑이는 익살스럽게 표현되었고 소나무의 표현이 장식적이다.

화기(畵記)에 의하면 충남 공주에 사는 김만귀(金萬貴) 부부가 자식을 얻고 오래 살기를 기원하며 불화의 조성을 발원하였다.

 

 

아들을 얻는 기원이 담긴 독성도 = 獨聖圖(독성도)  :  시대 = 조선 1878년

독성(獨聖)이 마무는 곳은 천태산(天台山)이라는 인식에 따라 독성도는 산을 배경으로 늙은 비구가 석장(錫杖)을 짚고 앉아 있는 모습으로 그렸다.

화면 속의 인물은 붉은 가사(袈裟)를 풀어 가슴을 드러낸 편안한 모습으로 앉아있으며 주장자(拄杖子)와 절첩본 사경(寫經) 형태의

경전(經典)이 놓였다. 화기에 의하면 이 불화는 1878년에 부부가 39세가 되는 해로, 그들은 속히 아들을 얻기를 기원하면서(願得貴男[원득귀남])

불화의 제작을 발원하였다. 자식을 바라는 부부의 간절한 바람과 독성에 대한 신앙을 엿볼 수 있다.

 

 

   

㉠                                                        시대 = 조선 후기                                                        ㉡

 

동자 = 木造 童子立像(목조 동자입상) = 머리를 양쪽으로 묶고 서 있는 동자는 두 손에 거북이를 들고 있다.

얼굴은 해맑은 미소를 띄고 천진난만한  모습으로 표현되어 있다.

사찰의 명부전(冥府殿)에서는 망자(亡者)를 구제하는 지장보살(地藏菩薩)과 심판하는 시왕(十王), 판관(判官) 등과 함께 동자가 봉안된다.

 

㉡동자 = 木造 童子立像(목조 동자입상)  =  머리를 한 갈래로 따고 있는 동자는 두 손에 장수(長壽)를 상징하는 지물(持物)인 거북이를 들고 있다.

고개를 다소 숙인 모습으로 천진난만한 미소를 짓고 있다. 목조각 위에 채색된 붉은색, 녹색, 남색 안료가 잘 남아있다.

 

 

서왕모가 베푸는 잔치 = 瑤池宴圖(요지연도) : 시대 = 조선 19세기   작가 = 미상

서왕모(西王母)가 주나라 목왕(穆王)을 초대하여 곤륜산(崑崙山) 요지(瑤池)에서 연회를 베푸는 장면은 궁중장식화로 즐겨 그려졌다.

화면 왼쪽에는 초대받은 여러 신선들이 바다를 건너오는 모습이 보인다.

이 그림은 본래 중국의 문헌『竹書紀年[죽서기년]』과『穆天子傳[목천자전]』에 실린 서왕모와 주목왕(周穆王)의 연회에 초대된

신선들의 이야기가 결합된 고사(故事)에 연원을 두고 있다.

 여러 신선들은 바다와 산, 바위, 학과 봉황, 거북, 사슴, 영지, 복숭아나무 등과 함께 등장한다.

 

 

서왕모가 베푸는 잔치 = 瑤池宴圖(요지연도)

 

 

초대받은 여러 신선들이 바다를 건너오는 모습

 

 

부처를 모신 작은 법당 = 金銅佛龕(금동불감)   시대 = 고려 14세기

불감(佛龕)은 부처를 모신 작은 법당(法堂)으로 고려 말부터 조선 초까지 석탑 안에 봉안되었다.

목조 건축을 충실히 재현한 불감의 문 안쪽에는 역사(力士)를 조각했고 안쪽 벽면에는 부처와 보살을 표현하였다.

불감 바깥에는 부처의 세계를 수호하는 사천왕(四天王)과 팔부중(八部衆)을 각각 양옆과 뒷면에 새겼다.

 

 

부처를 모신 작은 법당 = 金銅佛龕(금동불감) 

 

 

크리슈나와 라다 =  시대 = 라자스탄 비카네르, 1680년   그림으로 그린 라시카프리야

크리슈나 숭배는 라지푸트 지역 문화 전통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케샤브 다스가 1591년에 쓴 『라시카프리야』는

이러한 전통을 잘 보여주는 문학 이론서이다. 이 책은 영웅 커플의 유형과 그들의 행동, 감정에 대한 시로 이루어져 있는데,

대표적인 예로 비슈누의 화신이 크리슈나와 그의 연인 라다가 종종 등장한다.

이 그림에 보이는 네 쌍의 연인은 모두 푸른색 피부를 지닌 크리슈나와 라다로, 이들이 보여주는 여러 가지 동작은

『라시카프리야』에 묘사된 다양한 감정과 행동 양식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발을 씻는 크리슈나  :  펜자브 지역 1780년경

이 그림은 힌두교의 대표신인 비슈누의 8번째 화신인 크리슈나를 그린 것이다. 3명의 아름다운 여인이 노란색 하의를 입은 크리슈나의 시중을 들고 있다.

한 여인은 부채와 수건을 들었고, 다른 여인은 물을 붓고 있으며, 또 다른 여인은 금색 용기 위에 놓인 그의 발을 씻고 있다.

히말라야 산맥 아래 위치한 펀자브 지역은 18세기에 무굴 세밀화의 영향을 받기 시작했는데,

이 작품은 이 지역 고유의 서정성과 무굴 회화의 섬세함이 잘 결합된 모습을 보여준다.

 

 

낙타  :  아우드 1750년경

몸체와 토끼, 사자, 원숭이, 인간 등 여러 동물로 이루어진 "복합 동물"은 무굴 회화에 자주 등장하는 주제 가운데 하나다.

신 아래에서는 모든 생물이 결국 같다는 것을 그림으로 보여주는 한편, 영적인 순수성에 도달하기 위해서

동물 자체의 속된 본성을 극복해야 한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낙타를 탄 여성 하프 연주자는 천상의 존재로,

복합  동불을 그린 세밀화에 자주 등장한다.  화려한 색채와 정교한 세부 묘사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마하라오 람싱 2세의 접견 : 라자스탄, 코타 19세기

19세기 코타를 지배한 마하라오 람싱 2세(재위 1827년-1865년)의 궁정 생활을 소재로 한 그림으로, 드로잉에 일부 채색을 더한 습작이다.

접견실 가운데 오른편에 앉아 있는 이가 바로 람싱 2세이며, 그와 마주한 인물은 두광, 복장, 앉아 있는 위치로 보아

그와 동등한 지위를 지닌 군주로 여겨진다. 이들 주위에는 위계질서에 따라 군주에 비해 작게 그려진 시종이 등장하며,

 이들은 부채나 방패를 들고 있다.  접견실 앞 정원 양측에는 코타 왕과 그의 손님을 수행하는 많은 인물들이 앉아 있고

가운데에는 행사를 주관하는 지팡이를 든 인물과 무희, 악사가 보인다.

 

 

 

 

사랑을 위한 불멸의 금자탑 타지마할

인도에 있는 가장 아름다운 따지(무덤) 건축물이 있다.

타지마할은 샤자한(Shah Janhan)이 17년의 결혼기간동안 14명의 아이를 낳고, 15번째의 아이를 나으려다 1629년 세상을 떠난

부인 뭄타즈 마할(Mumtas Mahal)을 추모하여 만든 무덤이다.

뭄타즈마할에 대한 샤자한의 사랑은 그야말로 시공을 초월한, 타지마할 만큼이나 불가사의한 사랑, 바로 그것이었다.

하루에도 네 번씩 색깔을 바꾼다는 타지마할의 자태는 고요한 달빛에 비칠 때면 보랏빛을 띤 상아색으로 바뀌고,

그 고운 모습을 마치 샤자한과 뭄타즈마할의 달콤한 속삭임처럼 다가온다.

 

※▶타지마할이란 =  타지마할은 인도의 대표적 이슬람 건축물로 인도 아그라(Agra)의 남쪽, 자무나(Jamuna) 강가에 자리 잡은 궁전 형식의

묘지로 무굴제국의 황제였던 샤 자한이 왕비 뭄타즈 마할을 추모하여 건축한 것입니다.

 

 

   

숫사자

獅子(사자)  :  시대 = 明나라 大理石(명, 대리석)

명대(明代)의 암수 한 쌍의 사자조각상이다. 수사자가 발로 누르고 있는 공은 권력을 상징하고,  

암사자의 새끼 사자는 계승자를 의미하여 자손이 흥성해져서 관직에 오르기를 바라는 염원이 담겨져 있다.

사자상은 궁궐의 아문(衙門)이나 대문에 배치되다가 송대(宋代, 960년~1279년) 이후에는 벽사(辟邪)와 길상(吉祥)의 의미로

개인의 주택이나 공원 등에도 세워지게 되었다.  명 · 청대에 이르러 이와 같이 암수 한 쌍의 사자상을 문 앞에 세우는 형식이 정착되었다.

 

 

청자 물고기 모양 연적 = 靑磁魚形硯滴(청자어형연적)  : 龍泉窯(용천요)   시대 =  元(원나라) 14세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