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7. 4. 익산 미륵사지 3차
익산에 가면 항상 미륵사지를 들렸다 오는 습성이 생겼다. 얼마큼이나 진전이 되었나 궁금해서이다.
또한 전시관도 수시로 바뀌고 있다.
미륵석탑 내 심주석에 안치되어있던 사리호를 그대로 재현해 놓았다.
구슬과 금제 사리 봉영기 그리고 사리호가 함께 재현되어있다.
金板(금판) 금제족집게
金板(금판) = 아래 금판위에 새겨진 글들
왼쪽부터 ①중부덕솔지수시금일량 ②하부(部)비치부급부모처자 ③동보시
백제 사람들의 염원, 공양구: 銀製冠飾(은제관식)과 銀製銙帶裝飾(은제과대장식) : 시대 = 백제
은제관식 = 미륵사지 출토 은제관식은 2점이며 지금까지 발견된 은제관식과는 달리 꽃봉우리 상단이 길게 돌출되어 있고, 꽃받침은 거의 원형이
될 정도로 말려있다. 관식의 아래쪽(加揷部[가삽부])은 관모에 끼울 수 있도록 되어 있고, 중심 줄기의 상단과 하단에 곁가지를 내어
그 끝은 당초문과 꽃봉오리 모양을 표현하였다.
이 은제관식에는 땜질한 흔적이 확인되는데 이는 보수해서 사용해야 할 정도로 귀한 장식품임을 알 수 있다.
또한 공양물로 사용하기 위해 제작된 것이 아닌 실생활에서 사용하던 것을 사리장엄 봉안식 때 공양한 것으로 보인다.
은제과대장식 = 미륵사지 석탑 사리공에서 허리의 띠꾸미개(帶金具[대금구]) 중 하트 형태(心葉文[심엽문])의 은제 과판 1점과
은제 띠드리개 장식 1점이 출토되었다. 이는 사리장엄을 안치 하면서 허리띠 없이 장식만 공양물로 봉안한 것으로 보인다.
※미륵사지 석탑 출토 과판은 하트형 장식에 고리가 달린 형태로 부여 능산리 등 사비 백제의 고분에서 출토된 것과 비슷하다.
이러한 허리띠 장식 문양은 부여 외리 출토 도깨비 문양 전돌에서도 확인된다.
石塔 心柱石 內 供養品(석탑, 심주석 내 공양품) : 삼국시대(백제)
金製耳飾(금귀걸이), 金塊(금괴), 銀塊(은괴), 金製小形玉(작은 금구슬)
琥珀(호박) : 미륵사지 석탑에서 나온 호박이다. 삼국시대(백제)
金製玉(사리외호 내 금구슬) 金製舍利內壺 內 供養品(금제 사리내호 내 공양품)
彌勒石塔(미륵석탑) 삼국시대(백제) 金製玉(금구슬) 瑪瑙(마노) 琉璃玉(유리구슬)
金銅製舍利 外 壺(금동제사리 외 호)
금동제사리외호는 뚜껑과 동체상부, 하부 등 세부분으로 나누어 주조하였고, 동체의 하부 상단에는 ㄴ자 모양의 홈을 파서,
동체 상부의 하단에는 못을 박아 끼워 맞춰 결합한 것이다.
외호의 표면에는 연꽃덩굴무늬, 연꽃잎무늬, 둥근무늬(魚子文[어자문]) 등 다양하고 화려한 문양이 있다.
金製舍利 內 壺(금제사리 내 호)
금제 사리내호는 상하 2개체로 외호와 달리 뚜껑과 동체상부가 일체형이며, 금판을 두드려서 제작하였고, 표면은 외호와 비슷한 문양을 음각 장식하였다.
土製 螺髮(토제나발[부처님의 소라모양의 머리모습]) : 미륵사지 삼국시대(백제)
미륵사지 석탑 기단부 조사과정 중 사리공이 마련된 중앙 심주석의 남측 하부에서 다양한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이러한 석탑 하부 출토 유물들을 진단구(鎭壇具), 혹은 지진구(地鎭具)로 부르는데, 사리의 공양을 위한 공양구의 일종이다.
석탑 하부에서는 토제 나발 편(片)과 은제손톱 2점과 같은 희귀한 유물이 출토되었다.
이는 중국 위진남북조 시기의 양나라에서 부처의 조발(爪髮) 공양의례가 있었던 점과 관련하여 사리장엄 의례의 일부로서 봉안된 성물로 보인다.
석탑 하부에서 출토된 유물의 존재는 당시 사리장엄 의례가 탑의 하부 구축과정에서부터 체계적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또한 사리장엄과 관련된 다양한 유물들이 사리공 뿐만 아니라 탑 내부의 여러 곳에서 건축과정의 각 단계별로 공양 및 매납되었음을 알 수 있다.
菩薩像 片(보살상 파편) 미륵석탑 塑造佛 片(흙으로 빚은 불상 편)
中院 西回廊址(중원서회랑지) 삼국시대(백제) 東院 東便(동원동편) 삼국시대(백제)
菩薩像 片(보살상 파편)
金銅如來立像(금동여래입상) : 미륵석탑 북승방지 북동측 시대 = 삼국시대(백제)
金銅板 佛片(금동판 불편) : 彌勒寺址(미륵사지) 삼국시대(백제)
金銅透調裝飾(금동투조장식) : 彌勒寺址(미륵사지) 삼국시대(백제)
시루
靑銅제 鳳凰形裝飾(청동제 봉황모양 장식) : 彌勒寺址(미륵사지) 통일신라시대
靑銅제 馬形裝飾(청동제 말모양 장식) : 彌勒寺址(미륵사지) 통일신라시대
小形三層石塔(소형삼층석탑, 석제삼층소탑) : 彌勒寺址(미륵사지) 통일신라
주름무늬 병과 뚜껑
납석제 항아리와 뚜껑
납석제 항아리와 뚜껑
"大中十二年" 銘土器壺片("대중십이년"이 새겨진 토기편) : 東僧房址 上層(동승방지 상층) 통일신라
정확한 내용은 알기 어렵지만, 대중 12년(858년)에 미륵사에 있었던 행사에 참여한 사람들의 관직(丁㘴, 史)과 이름(문)을 기록한 것으로 보는 의견이 있다.
"大中十二年" 銘土器壺片("대중십이년"이 새겨진 토기편)
鐵製 鼎(철제 솥) : 寺域西便 建物址(사역서편건물지) 고려시대
靑銅菩薩頭(청동보살머리) : 北僧房址 北東側(북승방지 북동측) 鐵製菩薩頭(철제머리보살) 彌勒寺址 고려시대
小塔形 土器蓋(소탑형 토기개) = 탑모양 뚜껑
향로 뚜껑 = 土製 香爐蓋(토제 향료개) : 北僧房址 上層(북승방지 상층) 고려시대
金銅製塔 上輪 部(금동제탑 상륜부) : 講堂址 東便 後代石列(강당지 동편 후대석렬) 고려시대
靑銅 菩薩手(청동 보살손) : 彌勒寺址(미륵사지) 고려시대
靑銅 菩薩手(청동 보살손) : 彌勒寺址(미륵사지) 고려시대
金銅香爐(금동향로) : 보물 제 1753호 통일신라시대
항아리 = 大形土器(대형토기)
미륵사지에서는 다양한 크기의 항아리들이 출토되었습니다. 전시된 항아리들은 백제에서 통일신라시대까지 사용된 것들입니다.
이 항아리들은 대부분 미륵사의 중심 구역에서 벗어나 스님들이 주로 생활했던 공간에서 출토되었습니다.
큰 항아리들 가운데 구덩이 속에서 발견된 몇몇은 비교적 완전한 모양으로 남아있었습니다.
삼국시대에는 여러 곡식을 주식으로 하고 메주를 발효시킨 장류(醬類)와 소금이나 술지게미에 절인 채소를 부식으로 먹었습니다.
이 항아리들은 곡식, 장류[醬類], 절인채소 등을 저장하는데 사용 되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미륵사지가 복원하는 과정을 처음부터 완성되기까지를 그림으로 표현해 놓았다.
1. 미륵사터 조성과 건축부재 준비과정을 묘사해 놓은 것이다.
2. 목탑 건립과 석탑 기단 조성을 하는 과정을 재현해 놓은 것이다.
3. 한창 건립중이다 어느 정도 미륵사 절의 모양이 보인다.
4. 완성된 미륵사 웅장하고 아름다운 탑과 절의 위엄이 느껴진다.
3탑, 3금당 동양최대의 사찰 전라북도 익산시 금마면 기양리에 위치하는 미륵사지는 백제 최대의 사찰로
30대 무왕(600~641년)에 의해 창건되었고, 17세기경에 폐사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미륵사지가 발굴되기 이전에는 백제 창건당시에 세워진 미륵사지 서탑(국보 11호) 1기, 그리고 석탑의 북쪽과 동북쪽 건물들의
주춧돌과 통일신라시대에 사찰의 정면 양쪽에 세워진 당간지주 1쌍(보물 236호)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미륵사지에 대한 조사연구는 일본인들이 1910년 고적조사를 개시로 남아있는 석탑과 관련, 부분적인 조사를 실시하여
‘品’자형 가람배치를 갖는 것으로 주장되기도 하였다.
그 후 1974년과 1975년 원광대학교 마한. 백제문화연구소에서는 동쪽에 남아있는 탑 자리가 목조탑인지 석조탑인지 밝히기 위하여
동탑지 부근을 발굴 조사하여 서탑과 같은 규모의 석탑지임을 확인하였다.
1980년에 들어서 문화재 연구소에서는 백제 문화개발사업의 일환으로 당시 최대 규모의 사찰인 미륵사지를 정비하고 보호하여
이를 사회교육도장으로 활용하기 위하여 종합적인 발굴조사를 실시하게 되었다.
이러한 종합적인 발굴조사 결과 일본인들이 주장한 ‘品’자형의 가람배치는 맞지 않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확인된 가람배치에 의하면 동탑과 서탑이 있고, 그 중간에 목탑이 있으며, 각 탑의 북편에 금당(金堂=법당)의 성격을 지닌 건물이 하나씩
있었음이 확인되었다.
그리고 이들 탑과 금당을 한 단위로 구분하는 회랑이 있어 동쪽은 동원(東院), 서쪽은 서원(西院), 중앙은 중원(中院)이라는
개념의 삼원 병립식 가람형태임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중원의 북측에 거대한 강당(講堂) 하나만을 두고 공동으로 사용하게 하였다.
여기에서 ‘가람’이란 승가라마(僧伽藍摩)의 준말로 범어(梵語)의 Sngharama에서 유래 된 것으로 여러 승려들이 한군데 모여 살면서
불도를 닦는 것을 뜻하였으나, 후세에 와서는 절에 속한 집을 말하는 것으로 의미가 축소되었다.
아무튼 이러한 가람배치는 동양가람배치연구에서는 밝혀진 바가 없는 전혀 새로운 형식의 특수한 형태이다.
미륵사지의 발굴은 1980년에서부터 1995년까지 15년간 실시되어 20,000여점의 유물이 출토되었는데
막새기와류와 기와의 등에 문자를 새긴 명문와, 토기류 그리고 자기류가 거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특히 건물의 서까래 끝에 붙이는 녹유 연꽃무늬서까래 기와는 백제시대에 사용된 것으로 상당수가 출토되었다.
그리고, 이밖에 그 수는 많지 않지만 금속제품, 목제품, 벽화편, 토제편, 유리 및 옥제품, 석제품 등도 수습되어
종류 면에서 비교적 다양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미륵사는 신라의 침략을 불교의 힘으로 막기 위한 호국 사찰로써 성격을 띠고 세워졌던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따라서 미륵사는 백제가 망할 때 까지 왕실 사찰로 혹은 호국 사찰로 매우 중요한 역할을 맡았던 사찰이었다.
▲위의 사진설명
▲위의 사진설명
"金馬渚官 銘 瓦[금마저관 명 와] = 금마저관"이 새겨진 기와 : 동원승방지 통일신라시대
"金馬渚官 銘 瓦[금마저관 명 와]이 새겨진 수키와, 암키와 金馬渚官 銘 圓瓦, 平瓦[금마저관 명 원와, 평와]
"金馬渚城[금마저성]"이 새겨진 암키와 "金馬渚城 銘 平瓦[금마저성 명 평와]
백제 시대의 익산은 금마저군이었는데 통일신라 경덕왕 때 금마군으로 이름이 바뀌었습니다.
이 기와들은 금마저라는 지명이 쓰였던 8세기 전반에 만들어진 것으로 생각됩니다.
"金馬渚城 銘 瓦[금마저성 명 와] 금마저성이 새겨진 기와" : 북승방 남측 동서축대 통일신라시대
"金馬渚官 銘 瓦[금마저관 명 와]이 새겨진 수키와, 암키와 金馬渚官 銘 圓瓦, 平瓦[금마저관 명 원와, 평와]
"金馬渚城[금마저성]"이 새겨진 암키와 "金馬渚城 銘 平瓦[금마저성 명 평와]
백제 시대의 익산은 금마저군이었는데 통일신라 경덕왕 때 금마군으로 이름이 바뀌었습니다.
이 기와들은 금마저라는 지명이 쓰였던 8세기 전반에 만들어진 것으로 생각됩니다.
鴟尾(치미) : 彌勒寺址(미륵사지) 삼국시대(백제)
치미는 망새라고도 하는데, 지붕의 용마루 양쪽 끝을 장식하는 특수기와이다.
치미는 지붕에 얹어서 웅장하게 보이는 장식적 용도 이외에 재앙을 피하기 위한 벽사적(闢邪的) 의미를 지닌 것으로 판단된다.
특히 새꼬리 형태의 치미는 하늘의 신과 지상의 인간을 연결하는 강녕사상(康寧思想)이 내포되었다는 설이 있다.
치미는 후한 대에 반우(反羽)라고 불린 기록이 처음으로 보이고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은 고구려 벽화고분을 통하여 알 수 있으며,
실물로는 고구려지역에서 원오리사지, 정릉사지, 안학궁지 등에서 출토된 예가 있고, 백제지역에서는 공주 · 부여 · 익산지역의 사찰터에서 출토되었는데,
그 중 부소산 서복사지와 미륵사지 동원승방지, 연못지 출토 치미가 거의 완전한 형태로 복원되었으며,
신라지역의 치미로는 황룡사지와 안압지 출토 치미가 복원되었고, 고려와 조선시대까지 치미가 사용되었다.
전시된 치미는 동원 승방지(미륵사지)에서 출토되어 복원되었는데 백제시대 치미로 보여진다.
치미는 아래 위가 뉘어진 2단 구조를 하고 있다.
몸통 부분에는 머리에서 부터 종대까지 새의 깃털을 표현한 듯한 방사형이 층단이 전면에 나 있고,
종대부의 층단 내에는 물고기 비늘모양이 반타원형 무늬로 장식되어 있다.
후미 깃 끝마다 구멍이 뚫려 있는데, 이와 같은 구멍은 꼬리와 배 등에도 있으며 구멍에는 장식품을 꽂았던 것으로 보인다.
새의 날개 모양으로 장식된 몸통 및 종대부는 활처럼 힘차면서도 그 선이 유연한데, 이는 버선코 같은 꼬리 끝과 함께 우아함을 더하고 있다.
전시된 치미의 크기는 높이 99cm, 길이 85cm, 머리너비 28cm, 후미 깃의 길이 53cm이다.
鴟尾(치미) : 彌勒寺址(미륵사지) 삼국시대(백제)
"만력 15년[萬曆 十五年]" 글자가 새겨진 수키와 : "萬曆十五年 銘 圓瓦[만년십오년 명 원와] : 사역북편 건물지 4 조선시대
"萬曆 十五年 [만년십오년]"이 새겨진 수키와 "萬曆十五年 銘 圓瓦[만년십오년 명 원와]
"만력"은 명의 연호로 "만력 십오년"은 1587년(조선 선조 20년)에 해당합니다.
"용수방[龍樹房]" 글자가 새겨진 수키와 : "龍樹房 銘 圓瓦[용수방 명 원와]" : 東僧房址 上層[동승방지 상층] 고려시대
"龍樹房[용수방]" 이 새겨진 수키와 "龍樹房 銘 圓瓦[용수방 명 원와]"
용수("龍樹[용수])" 는 2세기~ 3세기에 인도에서 대승불교를 창시한 사람입니다.
木塔(목탑) 모형 복원하는 일만 남았다.
과연 살아생전에 미륵사지에 미륵사가 복원된 모습을 볼 수 있을련지 모르겠다.
삼국시대 우리나라에 불교가 들어오면서 전해진 탑의 형식은 목탑과 전탑이었으며, 석탑은 우리나라에서 발생한 것이다.
특히 미륵사지에는 동 · 서쪽에 석탑이 있고 중앙에는 목탑이 자리하고 있어 목탑에서 석탑이 발생한 시원지로 생각되고 있다.
발굴조사에 의하면 중앙의 목탑은 석탑의 기단과 같은 기단형태였으며, 계단도 유사한 형태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탑의 규모는 미륵사지 전체 평면에서 탑을 중심으로 형성된 동원과 서원에 비하여 중원이 크며,
목탑도 그 같은 비례에 의하여 동 · 서 쪽에 자리하고 있는 석탑에 비하여 큰 규모였음이 확인된다.
목탑의 상면에 대해서는 남아있는 자료가 없었으나,
동탑과 서탑이 양식상 목탑에서부터 발생한 것이라는 점에서 양쪽 석탑과 비숫한 구조였을 것이다.
전시된 모형은 이 같은 점을 기초로 목탑의 본래 모습을 추정 복원하여 20분의 1로 만든 것이다.
측면모습 木塔(목탑) 모형 뒷모습
얼굴그림기와 편 = 人面文 瓦片(인면문 와편) : 彌勒寺址(미륵사지) 통일신라시대
얼굴그림기와 편 = 人面文 瓦片(인면문 와편) : 寺域南側 瓦積層(사역남측 와적층) 삼국시대(백제)
봉황문수막새(鳳凰文圓瓦當), 용문암막새(龍文平瓦當), 봉황문수막새(鳳凰文圓瓦當) = 조선시대
용문암막새(龍文平瓦當), : 寺域 北便 建物址 7(사역 북편 건물지 7) 조선시대
봉황문수막새(鳳凰文圓瓦當),
재앙을 막아주는 말 :土製馬片(토제마조각) 재앙을 막아주는 말과 자라 고려시대
말과 자라의 모양은 토속적인 속성으로 재앙을 태워서 멀리 보낸다는 의미로 말의 모형을 만들어 땅에 묻거나,
자라의 모형을 만들어 건축물에 올려 땅과 불의 재앙을 제거한다는 것이다.
사찰에서 이와 같은 유물의 출토는 불교 사원과 토속신앙의 결합을 알 수 있는 자료 중 하나이다.
미륵사지가 복원된 모습을 표현해 놓은 모형도이다.
서쪽에 자리하고 있던 미륵사지 석탑 <국보 : 제 11호>
미륵사지내에 있는 이 석탑은 미륵사지 서원(西院)에 자리하고 있으며, 국내에 남아 전하는 석탑으로는 가장 오래되고 규모가 큰 탑이다.
현재 남아있는 층수는 6층이며[현재 보수정비 중], 이 탑의 층수에 대해서 한때는 7층 설이 주장되기도 하였으나,
동탑지 주변발굴에서 노반(露盤)이 발견되어 9층이었음이 밝혀졌다.
이 석탑은 목조탑파의 양식을 그대로 따른 것으로 한국 석탑의 기원이 되는 것이다.
구조를 보면 화강암을 사용하여 조성된 이 탑은 방형(方形)의 이중(二重) 기단석(基壇) 위에 사방 세 칸의 탑을 쌓았다.
초층에는 민흘림형식을 갖춘 네모꼴의 돌기둥을 설치하고, 기둥머리위에는 평방(平枋)과 창방(昌枋)을 올려놓았으며,
각 중앙칸에는 출입구를 만들어 十자모양의 내부로 통하는 통로를 두었고, 탑 내 중앙의 교차되는 중심에는 바른 네모꼴 모양의 찰주(擦柱)가 있다.
특히 초층(初層)에서 주목되는 것은 네모꼴 기둥의 가공한 기법이 민흘림 양식이며, 우주(隅柱)의 경우 귀솟음 기법을 사용한 것이 매우 특이하다.
또 이 탑의 특징은 목조건물에서 공포(拱包)를 가설하였을 것이나, 이 탑에서는 목재와 같이 기교 있게 공포(拱包)를 조각할 수 없으므로
공포양식을 모방한 3단의 층급받침으로 지붕돌을 받치도록 하였다.
지붕돌은 얇고 넓은데 네 모퉁이가 가볍게 치켜들고 있어서 신라 석탑양식에서는 볼 수 없는 백제 특유의 양식을 나타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2층 이상은 탑신(塔身)이 얕아지고 각 부분의 가구 수법을 약화 시켰으며, 지붕돌은 폭만 줄여 1층과 같은 수법을 보이고 있다.
5층 이상의 층급받침은 정단에서 4단으로 증가되었다.
그리고 각 기둥과 면석, 창방과 층급받침 등을 모두 별개석 으로 엇물림 쌓기를 하고 있다.
이 탑은 붕괴 직전에 있는 폐탑으로 남아있는 것을 1915년 일본인들이 보수(?)하여 비교적 탑의 동쪽 부분은 온전하게 남아있으나,
서쪽부분을 시멘트로 덮어 버려 조형미를 잃고 있었다.
1992년 문화재관리국에서 동탑지에서 발견된 탑 부재를 치밀하게 조사하여 동탑을 9층으로 복원 하였다.
이 석탑은 본래 9층이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나 17세기 이전에 붕괴되었으며 1915년 일본인들이 무너진 부위에 콘크리트로 보강하였고,
최근까지 절반이상 무너진 상태로 존속되어 왔다.
그러나 미륵사지석탑은 우리나라 석탑 중 가장 큰 규모이고, 현존 최고 양식으로 알려져 있으며
1층 내부에 있는 十자형 통로와 심주, 천장 구조 등은 고대 석탑의 특징을 잘 보여 준다.
서쪽에 자리하고 있던 미륵사지 석탑 <국보 : 제 11호> 현재 복원 진행 중
복원하는 모습의 미륵사지 석탑 국보 제 11호 문화재청의 교수와 학생들이 함께 복원하고 있다.
뉴스상으로는 80%가 복원되었다고 하였지만 현장에 가서 보니 그렇지만은 않은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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