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남북도 = 천년!.. 감동..그리고.

일타스님이 계시던 곳 = 해인자 지족암

백련암 2016. 4. 17. 14:48

海印寺 知足庵 沿革(해인사 지족암의 연혁)

지족암의 옛 이름은 兜率庵(도솔암)이며, "지족"이라는 말은 산스크리어(Tusita)의 음역으로, 그 의미는 미륵보살의 정토, "만족시키다."는 뜻으로

 "知足兜率天(지족도솔천)"이라고 합니다.  지족암에는 고려 태조 왕건의 스승인 希郞祖師(희랑조사)가 기도하던 토굴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 이후 한동안 본 암자가 어떻게 유지되었는지 알려져 있지 않으나, 16세기에 씌여진『寒岡集[한강집]』의「遊伽倻山錄[유가야산록]」과

도세순의『龍蛇日記[용사일기]』, 17세기『滄洲文集[창주문집]』의「遊伽倻山記[유가야산기]」등 유학자들의 문집속에

 "지족암"을 가보았다는 내용이 자주 등장하므로, 1796년 官守(관수)스님의 重建(중건) 이전에도 寺勢(사세)는 계속 유지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850년에 秋譚長老(추담장노)가 주석하다 큰절로 내려간 후 폐허가 되기도 하였으나 1856년에朴文煥公(박문환공)이 중건하였고,

1893년에 幻雲大德(환운대덕)이 重修(중수)하였습니다. 그리고 박문환공의 아들인 基墩居士(기돈거사)가 선친을 추모하기 위해 뜻을 모아

香契(향계)를 결성하여, 법당에 향과 등 공양이 끊이지 않게 지원하였습니다.

1913년에는 큰 홍수로 인해 堂宇(당우)가 倒壞(도괴)되어 몇 년간 빈터가 되었으나, 羔山 慧命(고산 혜명)스님이 1915년에 암자를 복원하였습니다.

그 이후 1940년 洪松海(홍송해)스님, 1958년 影月(영월)스님, 1963년 正林(정림)스님 등이 지족암에 주석하였습니다.

1976년부터 海印叢林 律主 (해인총림 율주) 東谷堂 日陀 大宗師(동곡당 일타 대종사)가 지족암에 주석하면서 법당을 신축하고 요사채를

크게 중수하였으며 도량을 대폭 확장하여 암자의 면모를 일신시켰습니다.

1999년에 감원으로 취임한 香寂(향적) 종사는 스승의 대를 이어 2010년 ~ 2013년에 대대적인 중창불사를 하였습니다.

이때에 진영각, 석경당, 삼여정(공양실), 조실채, 산신각 등을 신축하였으며, 海印三昧塔(해인삼매탑)과 東谷橋(동곡교)를 건립하여

현재의 면모를 갖추었습니다.

 

일타스님

파도가 심하면 달이 나타나기 어렵고  밤이 그윽하면 등불이 더욱 빛나도다. 

그대들에게 마음 닦기를 권하노니   감로장을 기울어지게 하지 말지니라.

일타스님의 유훈이란다.

일타스님은 본인만이 아니라 집안에서 41명이 출가했다고 한다.

 

 

지족암 일주문

지족암 일주문은 참으로 졍겹다. 크지도 않고 아담하니 돌담을 사에 두고 타원형의 문설주가 더 예쁘다.

이곳을 새로 단장을 할 때 저 일주문을 다르게 하면 어쩌나 걱정을 잠시 해 본적이 있다.

경내 안으로 들어서면 또 다른 정겹던 정자가 있기도 했었다. 지금은 완전히 다른형태가 되었지만 그래도 괜찮다.

마음은 그대로 너무나 푸근하고 편하다.

 

 

지족암 현판

 

 

경내에서 바라본 일주문

 

 

海印三昧塔(해인삼매탑)

 

 

海印三昧塔(해인삼매탑)

 

 

종무실로 쓰고 있는 동곡당과 옆에 붙은 공양실인 삼여정

 

 

大夢覺殿(대몽각전)

크게 깨달은 집이라는 대몽각전에는 본존불인 석가모니불을 중앙에 모시고 좌우보처로는

일반절에서 와는 다른 느낌의 보살들이 모셔져 있다.

 

일타스님의 법호는 東谷(동곡) 또는 三餘子(삼여자)이시다.

법당 아래쪽의 東谷堂(동곡당)은 일타스님의 법호 東谷(동곡)에서 따온 집이고,

三餘亭(삼여정) 역시 三餘子(삼여자)라는 스님의 법호에서 딴 이름으로

세가지 바쁘지 않는날에는 차한잔할 수 있는 곳이리라.

 

 

大夢覺殿(대몽각전) 옆으로  眞影閣(진영각) 나란히 있다.

 

 

大夢覺殿 懸板(대몽각전 현판)

 

 

大夢覺殿 柱聯(대몽각전 주련)  =  금강경 사구계중 삼구계만이 쓰여있음

 

 凡所有相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卽見如來(범소유상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즉견여래)

무릇 상이 있는 건 모두 허망한 것이니. 만약 상이 아님을 바로 보면 부천님을 친견하리라

若以色見我以音聲求我  是人行邪道不能見如來(약이색견아이음성구아 시인행사도불능견여래)

만약 형상으로 나를 보거나, 음성으로 나를 구하면, 이 사람은 삿된 도를 행함이니 능히 여래를 보지 못한다.

一切有爲法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應作如是觀(일체유위법여몽환포영 여로역여전응작여시관)

일체 현상계에 모든 생멸 법은 꿈과 같고 환상과 같고, 물거품 같고, 그림자 같으며, 이슬과도 같고 번개와도 같으니

응당 이와 같이 관해야 한다.

 

♣금강계 사구계중에서 빠진 나머지 하나♣

不應住色 生心 不應住 聲香味觸法 生心 應無所住 而生其心(불응주색생심불응주 성향미촉법생심 응부소주이생기심)

응당 물질에 머물러 맘을 내지 말며 응당 성향미촉법에 머물러 맘을 내지 말 것이니 응당 머무른바 없이 마음을 내거라

 

大夢覺殿(대몽각전)

 

 

大夢覺殿(대몽각전) 구 현판

 

 

대몽각전엔 중앙에 부처님을 모시고 좌우보처로 반가사유상을 모셔놓았다.

우측 국보 83호 형상으로 모셔져 있음

 

 

 

 

본존불인 석가모니부처님

 

 

우측

 

좌측 반가사유상의 관세음보살 국보 제 83호와 비슷하게 모셨다.

 

 

 

나한탱화

 

 

산신탱화

 

 

眞影閣 懸板(진영각 현판)

 

 

眞影閣 柱聯(진영각 주련)

一天白日露眞心(일천백일로진심) : 하늘의 밝은 해가 참 마음 드러내니

 萬里淸風彈古琴(만리청풍탄고금)  : 만리의 맑은 바람 옛 거문고 타는구나

生死涅槃曾是夢(생사열반증시몽)  : 생사열반 이 모두가 오히려 꿈이러니

山高海濶不相侵(산고해활부상침)  :  산은 높고 바다 넓어 서로 침범하지 않네

일타스님의 열반송 입니다.

 

 

 

 

마지막까지 입으셨다는 누더기

 

 

 

 

너무 순수해보이시는 일타스님의 생전의 모습,  입가의 옅은 미소가 마음을 편하게 맞아주십니다.

 

 

부처님 발을 찾아가는 길목에 있는 동종

 

 

지족암 동곡당당우 위에 있는 팔각정

 

 

이 바위모습은 불같은 느낌이 들어 한컷...

 

 

분명 이정자 주변에 있다고해 열심히 돌아 보았지만 없었다.

 

 

 

 

    

 

 

    

 

 

부처님의 발바닥이 새겨져 있는 바위 너무 허무했다.

 

 

東谷堂(동곡당)

동곡당  옆으로 살짝 돌아서면 "知足 兜率庵(지족 도솔암)"이란 현판이 걸려있습니다.

지족암의 다른 당우들도 모두가 일타스님과 관련이 있다고 한다. 

 

東谷堂 柱聯(동곡당 주련)  =  일타스님의 게송은

 

頓忘一夜過(돈망일야과) : 몰록 하룻밤을 잊고 지냈으니

時空何所有(시공하소유)  : 시간과 공간을 어디로 가벼렸나

開門花笑來(개문화소래)  : 문을 여니 꽃이 웃으며 다가오고

光明滿天地(광명만천지)  :  광명이 천지에 가득 넘치는구나,

 

 

三餘亭(삼여정) 현재 공양실이다.

三餘亭(삼여정) 역시 三餘子(삼여자)라는 스님의 법호에서 딴 이름으로

"세가지 바쁘지 않는날에는 차한잔할 수 있는 곳이리라."

 

 

三餘亭 懸板(삼여정 현판)

 

 

    

수각

 

 

山神閣산신각)

 

 

山神閣 懸板산신각 현판)

 

 

산신각에 모셔져 있는 독성과 산신도

 

 

산신각에 모셔져 있는 산신도

 

 

산신각에 모셔져 있는 독성도

 

 

삼거리에서 지족암 백련암 희당대 쪽으로 가는 길목에 꽤 많은 이름없는 부도들이 있었다.

꽤 오래된것 같은데 이름들이 모두 마모가 되어 알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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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모르는 부도들

 

 

 

 

 

 

 

 

 

 

 

 

 

 

 

 

 

 

 

해인사 범종각의 사시 예불시간에 맞추어 법고를 치는 스님들

 

 

국사단 뒤에 있는 적목련

그전에는 아련한 추억으로 목련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요즘 법화경을 배우러다니는데 강사스님이 해인사출신으로

해인사 이야기를 자주하신다. 이 적목련도 그 강사스님의 그리워하는 것 중의 하나이다. 

같은 말을해도 정말 보고싶고 그리워서 하는 말의 진실이 보인다. 나는 스님의 그런말과 행동을 보면 슬그머니 웃고만다.

 

 

 

 

국사단 앞 나무에 소원지...

 

 

 

 

가야국시조의 어머니인 정견모주

 

 

海印寺 影池(해인사 영지)

가야산의 정상이 이 연못에 비친다고 해서 영지라 부른다. 가락국 김수로왕의 왕비인 허황후가 장유화상을 따라

가야산 칠불봉으로 출가한 일곱왕자를 그리워하여 가야산을 찾았으나 산에 오를 수 없어 아들들의 그림자라도 보게 해달라고

부처님께 지극한 마음으로 기도하였다.  그러자 정진 중인 왕자들의 모습이 이 연못에 비쳤다고 전한다

 

 

 

 

 

 

 

 

海印寺 影池(해인사 영지)

 

 

 

 

 

 

해인사길

 

 

 

친 · 외가 41명 출가 ‘수행의 귀감’

동곡 일타(東谷 日陀)스님. 

우리나라 불자들중 ‘일타스님'을 모르는 이는 거의 없다. 
대한불교 조계종 전계대화상을 지낸 대 율사요, 자유자재한 언설변재로 듣는 이의 마음에 깨달음의 씨를 심어주는 대 법사며, 
젊은 시절 태백산 깊은 골에 들어 6년 동안의 수선정진으로 깨달음을 이룬 대 선사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스님을 존경하고 따르는 이들은 스님을 ‘자비보살’이라 칭한다. 

가슴에는 태양을, 입가에는 언제나 미소를 띠우고 찾아오는 이들에게 희망과 용기와 기쁨을 주기 때문이다. 
또한 스님은 십여 종이 넘는 주옥같은 저술로써 뭇 불자들의 마음을 밝혀준 타고난 문장가이기도 하다. 
그러나 스님 친가 · 외가 전가족 41명이 모두 출가해 부처님 될 종자를 심었다는 경이로운 사실을 아는 이는 드물다. 

이는 부처님 열반이후 한 집안의 출가 기록으로는 단연 최고이다.  그야말로 ‘기네스북’에 오를만한 사실이다. 
일타 스님 가족 · 친척은 어떻게 이토록 지중한 불연(佛緣)을 맺을 수 있었던가. 

그 연원은 스님의 외증조할머니의 죽음에서부터 시작된다. 
(이 글에서의 모든 가족 · 친척 호칭은 일타스님을 기준으로 삼아 붙이기로 한다.) 
스님의 외증조할머니인 안성 이씨 평등월 보살은 충청도 공주 땅에 자리잡은 광산 김씨 영인(永仁)에게로 10대의 꽃다운 나이에 시집을 갔다. 
평등월 보살은 늙으막에 비록 혼자가 되었지만, 만수(萬洙) · 완수(完洙) · 은수(恩洙) 세 아들의 효성은 지극하였고 

며느리들도 시어머니를 잘 모시기 위해 온 정성을 기울였다. 

어느 날, 비구니스님 한분이 탁발을 하러 왔다. 

비구니스님은 집안에서 가장 큰 바가지에 쌀을 가득 담아 바랑속에 부어주는 할머니를 향해 불쑥 말을 걸었다. 
할머니, 요즘 세상사는 재미가 좋으신가 보지요?     아, 좋다마다요….
할머니는 신이 나서 아들 자랑, 며느리 자랑, 손자 자랑을 일사천리로 늘어 놓았다.   스님은 묵묵히 듣고만 있다가 한마디를 툭 던졌다. 
“할머니, 그렇게 세상 일에 애착을 많이 가지면 죽어서 업(業)이 됩니다.”
“업?” 충청도 사람들은 ‘업이 된다’고 하면 구렁이가 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업’이라는 말에 머리카락이 하늘로 치솟는 것 같은 전율을 느낀 할머니는 스님께 사정을 했다. 
‘제발 업(구렁이)만은 면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달라’는 할머니의 간청은 밤새도록 이어졌다. 

정녕 업이 되기 싫거든 오늘부터 바깥 출입을 금하고 일심으로 ‘나무아미타불’을 부르면서 극락왕생을 기원하시오.
말이 끝나자 비구니스님은 바랑과 삿갓을 방에 놓아 둔 채 홀연히 사라졌다. 
할머니는 방의 가장 좋은 위치에 스님의 삿갓과 바랑을 걸어 놓고  아침에 눈만 뜨면 몇 차례 절을 올린 다음  ‘나무아미타불’을 부르기 시작했다. 
그뒤 할머니는 20년 가까운 세월을 하루같이 염불기도 하다가 88세의 나이로 입적하였다.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다. 
7일장(七日葬)을 지내는 동안 매일같이 방광(放光)을 하는 것이었다. 낮에는 햇빛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으나, 밤만 되면 그 빛을 본

마을 사람들이  ‘불이 났다’며 물통을 들고 달려오기를 매일같이 하였다.  그리고 문상객으로 붐비는 집안 역시 불을 켜지 않아도 대낮같이 밝았다. 
외증조할머니의 장례를 마친 일타스님의 외가 식구들은  그때까지 생각하던 불교에 대한 인식을 바꾸지 않을 수 없었다. 
외증조할머니가 살아있을 때에는 그저 노인장이 삶의 끝에서 자신을 위안하기 위해 염불을 하는 줄 알았는데, 
눈앞에서 이변이 일어나자 절실한 신심으로 변한 것이다. 


가장 먼저 출가한 이는 일타스님의 큰외삼촌인 김학남(金學男·1902~1955)씨다. 
4형제중 맏이였던 큰외삼촌은 부인과 하나뿐인 아들을 남겨둔 채 천진도인 혜월(慧月)선사의 제자로 출가하여 법안(法眼)이라는 법명을 받았다. 
그뒤 법안스님은 오대산 금강산 천성산 지리산 등지의 이름있는 선방을 찾아다니며 열심히 참선정진하였다. 

두번째로 출가한 사람은 일타스님의 외할아버지 김만수(金萬洙 · 1878~1947)씨로서, 어머니의 방광과 아들의 출가이후 수년동안 거사의 신분으로 
금강산 마하연 지리산 칠불암 송광사 삼일암 등의 이름있는 선방을 전전하다가,  셋째 아들인 용학(容學)이 장가를 들자 불러 물었다. 
얘야, 너도 이제 장가를 갔으니 어른 아니냐? 내가 없어도 머슴들 데리고 농사지을 수 있겠느냐 “
예.   젊은 혈기에 아들이 자신있게 대답하자 그 길로 출가하여 ‘추금(秋琴)’이라는 법명으로 용맹정진하였다. 

세번째 출가자는 일타스님의 막내 외삼촌인 김용명(金容明)씨였다. 막내 외삼촌은 일본 명치대학(明治大學)을 다닌 수재로서 온 집안의 희망이었다. 
그런데 졸업을 얼마 앞둔 어느 날 자전거를 타고 가다가 끊어진 다리 아래로 떨어지고 말았다. 
다행히 뒤따라오던 사람이 병원으로 옮겨 3일만에 의식을 되찾았고, 

그때 병실에서 <불교성전>을 보다가 홍법대사의 ‘제행무상(諸行無常)’이라는 시를 읽고 발심하였다. 
1938년 대학 졸업과 동시에 배를 타고 귀국한 용명은 고향집으로 가지 않고, 곧바로 양산 통도사로 가서 윤고경(尹古鏡) 대강백을 은사로

모시게 되었고 ‘진우(震宇)’라는 법명을 받았다. 


그때 힘이 빠진 것은 셋째 외삼촌 용학이었다. 
큰형은 스님이요,  둘째형은 방랑자, 일년내내 백마지기가 넘는 넓은 땅을 농사지어 그 비싼 학비를 보내었건만, 

믿었던 동생(용명)마저 스님이 되니 참으로 허무하기 짝이 없었다. 
가족들에게 “며칠 동안 바람쐬고 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찾아간 곳은 큰형님 법안스님이 계신 해인사 백련암이었다. 
법안스님은 ‘혼자서 대가족 살림을 꾸려나가기 힘드니 하산하여 집안을 맡아달라’는 동생의 말을 한쪽 귀로 흘리고 오히려 출가를 권유하였다. 
무엇하러 마을에서 농사를 짓고 사는가? 스님되어 절에서 살아보게. 이 절이 바로 극락일세. 
거듭되는 권유와 한달 남짓 절에 머물면서 느낀 매력때문에 셋째 외삼촌 용학도 마침내 자운(慈雲)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여

 ‘보경(寶瓊)’이라는 법명을 받았다. 

이어지는 아들들의 출가로 집안에 여자와 아이들만 남게 되자, 크게 상심한 외할머니 강씨(姜氏)가 직접 백련암으로 향했다. 
그러나 결과는 마찬가지.  오히려 두 아들의 권유에 못이겨 해인사에 눌러앉고 말았다. 

마지막으로 나선 사람은 수년동안 만주로 러시아로 떠돌아 다니다가 막 귀국한 일타스님의 둘째 외삼촌인 김용남(金容男·법명 靈泉)씨였다. 


해인사만 가면 함흥차사가 아닌 ‘해인차사’가 되니,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내 가서 백련암을 불태워 버리고라도 어머니와 형제들을 데리고 오리라.
”남은 가족들에게 다짐을 하며 집을 나선 천하한량 둘째 외삼촌이었지만 별 수가 없었다. 또 설득을 당하고 만 것이다. 
그리고는 고향으로 돌아가 남은 가족들에게 선언하였다.  요즘같은 험난한 세상에는 중이 되는 것이 최고로 좋습니다. 
옛사람들이 무릉도원 찾아갔듯이 우리 모두 해인사로 떠납시다.

1940년, 마침내 외가의 모든 식구들은 전 재산을 정리하고 해인사로 향하였다.  그때 법안스님의 장인 · 장모와 아들 둘도 함께 출가하였고, 
집안을 돌보던 머슴들 가족 6명도 따라서 출가함으로써 일타스님의 외가쪽 35명은 모두 출가자의 길을 걷게 된 것이다.

일타스님의 친가 식구는 모두 6명이었다. 
아버지 연안 김씨 봉수(鳳秀)와 추금스님의 맏딸인 어머니 김상남(金上男) 사이에서 

경희(敬喜) · 사열(思悅) · 사의(思義) · 명희(明喜)가 태어난 것이다. 

스님의 친가에서 처음으로 출가한 사람은 맏딸인 경희였다. 1940년 공주여자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유학을 가고자 하였으나

 어머니는 결혼할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오직 공부만 하고 싶어 외할아버지인 추금스님에게 가서 자문을 구했다.
그야, 스님이 되면 되지. 이 한마디에 아무도 모르게 출가하여 금강산 법기암에서 대원스님을 은사로 모시고 ‘응민(應敏)’이라는 법명을 받았다.

맏딸 다음으로 출가한 사람은 일타스님의 형인 사열, 곧 월현(月現)스님이다.
“해인사에 있는 팔만대장경을 공부하면 풍운조화를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외할아버지의 한 말씀에 팔만대장경을 배운다며 해인사로 출가하였다.
맏딸과 맏아들이 출가하고 친정식구들 모두가 해인사로 들어가자  일타스님의 어머니도 출가를 결심하였다. 
하지만 아직 초등학교 5학년에 재학중인 아들 사의(일타스님)가 걱정이었다. 
1941년, 어머니는 아들이 학교를 마칠 때까지 필요한 모든 물건을 마련한 다음 막내딸 명희(쾌성(快性)스님)를 데리고 문경 윤필암으로 들어갔다.

1942년 일타스님이 초등학교를 졸업하자 아버지(김봉수)는 수덕사 만공선사를 찾아가 출가하였고, 
사의(일타스님) 역시 외할아버지 추금스님의 손을 잡고 양산 통도사로 향했다. 

마침내 일타스님의 친가 · 외가 41명의 대가족이 모든 것을 버리고 출가의 길로 떠난 것이다.
세계적으로 희귀한 이 경이로운 숫자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분들 모두가 하나같이 ‘중노릇’을 아주 열심히 한 참된 수행자였다는 점이다. 

외할아버지인 추금스님이 비록 늦게 출가하였지만  젊은 수좌들의 귀감이 될만큼 열심히 정진하여 견성하였고,

말년에는 전라도 태고사 조실로 추대되어 후학들을 지도하다가 스스로 장작을 쌓고 불을 붙인 다음 올라가서 자화장을 하는 이적을 보이기도 했다.

큰외삼촌인 법안스님 또한 오직 발우 하나, 누더기 한 벌로 살면서 10여년 동안 용맹정진하였고, 35세가 넘자 해인사 백련암으로 옮겨

 9년 동안의 지장기도를 통해 오도를 하신 분으로,  1955년 서울 삼각산 도선사 석불 뒤의 바위에 앉아 입적하였다. 

둘째 외삼촌 영천스님은 속리산 경업대 토굴에서 7일동안 선정삼매에 들어 걸림없는 경지를 이루었고, 
셋째 외삼촌 보경스님은 세속에서도 살림을 잘 살았지만 출가 후에도 역시 살림을 잘 살아서 부산 감로사 창건 및 사찰 중건 등

많은 불사를 행하였고, 기도정진과 함께 선방살림을 맡아 수좌들을 돌보는 소임을 헌신적으로 행하였다. 

막내 외삼촌 진우스님은 전국의 선방을 전전하면서 도를 닦아  운봉(雲峰) · 경봉(鏡峰) · 전강(田岡)선사 등

여러 고승들로부터 정진력을 인정받았고  스스로 지은 오도송을 전국의 선방에 보내기도 하였다.

그리고 일타스님의 아버지 자응당(慈應堂) 법진스님은 1986년 입적하는 날까지 그야말로 ‘깜깜한 어둠속에서 만져보아도

스님’이라는 말을 들을만큼 묵묵하면서도 깊은 자비심을 품었던 분이다. 

누나 응민스님 역시 ‘중노릇’ 잘하여 만공선사로부터 ‘정진제일 수좌’로 인정을 받았을 뿐 아니라  평생동안 ‘비구니스님의 귀감’으로 살다가

 1984년 12월 15일에 7일간의 용맹정진을 마치고 앉은 채 입적했다.

 41명 스님들의 행적속에서 ‘정녕 무엇을 위하여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났는가’를 느낄 수 있다면 
그분들은 우리들 모두의 발심을 위해 영원히 영원히 타오르는 등불로 남을 것이다.

 

일타스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