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화이야기=고려외

2018년 석가탄신일을 기하여 상주 용흥사 괘불 특별전에서 1

백련암 2018. 6. 15. 22:48

2018년 석가탄신일을 기하여 상주 용흥사 괘불 특별전에서 1


中國名人肖像帖(중국명인초상첩)  : 중국 청나라      작가 = 미상


당나라 때의 인물들을 그린 화첩 가운데 안진경(顔眞卿, 709년 - 785년)과 맹교(孟郊, 751년 - 814년)의 초상이다.

17세기 초에 편찬된 백과사전인『三才圖會[삼재도회]』에 실린 삽화와 인물정보를 토대로 글과 그림을  완성한 것으로 추정된다.

안진경은 안녹산(安祿山, 703?년 - 757년)의 난 때 의병을 일으킨 충의 지사로, "안진경체"라 불리는 힘차고 살진 서체로도 유명하다.

맹교는 당 중기의 시인으로 빈곤한 생활 속에서 예스럽고도 고독한 시풍을 이룩했다.

두 그림 모두 관복 차림의 상반신 초상이며, 오른쪽 면에는 인물의 삶에 대한 글이 전서체로 쓰여 있다.



맹교 초상화(맹교초상화)

孟東野, 名郊 貧居苦吟詠, 與韓愈, 張籍等爲友, 更唱迭和, 愈詩有, 東野動驚俗, 天葩吐 奇芬之句. 年五十,

(맹동야, 명교 빈거고음영, 여한유, 장적등위우, 경창질화, 유시유, 동야동경속, 천파토 기분지구. 년오십,)

調凓陽尉, 間往於投金瀨及積水郊之傍, 徘徊賦詩, 曺務多廢, 令曰.  府以假尉代之, 而分其半, 卒謚貞曜先生

(조율양위, 간왕어투금뢰급적수교지방, 배회부시, 조무다폐, 영왈. 부이가위대지, 이분기반, 졸익정요선생)


맹동야(孟東野)의 이름은 교(郊)이다. 가난하게 살며 고심어린 시를 읊었고, 한유(韓愈, 768년-824년), 장적(張籍, 766? - 830?)과 서로

어울리며 시를 주고 받았다.   한유의 시에 "동야는 곧잘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하며, 천연의 꽃으로 기묘한 향기를 뽐낸다."라는 구절이 있다.

50세 때 율양위(凓陽尉)에 임명되었는데 금뢰(投金瀨)와 적수교(積水郊)를 왕래하며, 시를 지었다.

관아의 일은 모두 제쳐두고 부(府)에 보고하는 일은 가위(假尉)를 시켜 대신 하게 하고 봉급을 반씩 나누었다.

죽은 뒤의 시호는 정요선생(貞曜先生)이다.



顔晉卿 肖像畵(안진경 초상화)




顔眞卿爲平原太守, 祿山反, 獨倡義討之, 玄宗歎曰, 河北二十四郡, 無一忠臣耶. 及聞討賦喜曰, 朕不識顔眞卿何如人,

(안진경위평원태수, 록산반, 독창의토지, 현종탄왈, 하북이십사군, 무일충신야. 급문토부희왈, 짐불식안진경하여인,)

所爲乃如此, 四朝元老, 忠直孝友, 羽儀王室, 位太師, 封魯郡公. 史贊云, 雖千五百歲, 其英烈信如嚴霜赫曰, 可畏而仰哉

(소위내여차, 사조원노, 충직효우, 우의왕실, 위태사, 봉노군공. 사찬운, 수천오백세, 기영렬신여엄상혁왈, 가외이앙재)


안진경은 평원태수(平原太守)로 있을 때 안록산(安祿山, 703? - 757년)이 반란을 일으키자 홀로 의병을 일으켜 토벌하였다.

당(唐) 현종(玄宗, 재위 712년 -756년)이 탄식하기를 "하북(河北) 24군에 충신이 하나도 없는 것인가."라 하였는데

안진경이 적을 토벌한다는 말을 듣고 기뻐하여 "짐은 안진경이 어떤 사람인 줄도 몰랐는데 그 실행이 이와 같구나." 라고 말했다.

네 조정의 원로로서 충성과 곧음, 효성과 우애로 왕실을 도왔다.  태사(太師)에 임명되었고 노군(魯郡)에 책봉되었다.

사찬(史贊)에서는 "비록 1500년이 흘렀어도 그 영렬(英烈)은 참으로 매서운 서리가 태양에 빛나는 듯 하니 경외해 우러러 볼 만하도다."라고 하였다.



諸葛亮의 肖像(제갈량의 초상) : 시대 =  조선 후기       작가 =  미상


惟忠武侯,  識其大者, 仗義履仁, 卓然不舍, 方卧南陽, 若將終身, 三顧而起, 時哉屈伸, 難平者事, 不昧者幾,

(유충무후,  식기대자, 장의이인, 탁연불사, 방와남양, 약장종신, 삼고이기, 시재굴신, 난평자사, 불매자기,)

大綱卽得, 萬目乃隨, 我奉天討, 不震不悚, 維一其心, 而以時動, 噫侯此心, 萬世不冺, 遺像有嚴, 瞻者惟敬, 南軒張栻贊

(대강즉득, 만목내수, 아봉천토, 불진불송, 유일기심, 이상시동, 희후차심, 만세불민, 유상유엄, 첨자유경, 남헌장식찬)


충무후(忠武候, 제갈량의 시호)는 학식이 대단한 사람이다.  인의(仁義)를 몸소 행하였으며, 탁월한 뜻을 놓지 않았다.

남양(南陽)에 은거하여 한평생 마칠 것 같았으나, 삼고초려(三顧草廬)에 일어났으니, 나아갈 때가 되어서이다.

난을 평정하는 것은 큰일이고, 통찰해야 할 것은 기미(機微)이다. 큰 원칙을 이미 터득했다면, 작은 여러 일들은 따라온다.

"내가 하늘을 대신해 토벌하니, 놀라고 두려워하지 않는다. 오직 마음을 하나로 하여, 시대의 요청에 따라 움직인다."

아! 제갈무후의 이 마음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으리, 초상화에 엄숙함이 있으니, 바라보는 사람 공경심 일어나네

南軒(남헌) 張栻(장식) 지음



諸葛亮의 肖像(제갈량의 초상)

제갈량의 전신 입상이다. 초상에 가까운 섬세한 얼굴 표현, 흐트러짐 없는 필선과 채색이 돋보여, 도화서 화원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화면 위에는 남송의 성리학자 장식(張栻, 1133년 - 1180년)이 쓴 『諸葛武侯畵像贊[제갈무후화상찬』을 행서체로 써 놓았다.



諸葛武侯圖(제갈무후도)  :  시대 = 조선 1695년      작가 = 미상


촉한의 승상 제갈량(諸葛亮, 181년 - 234년 字는 孔明[공명])을 그렸다. 제갈량은 바위에 걸터앉아 있으며,

그 옆에 시동(侍童)이 깃털 부채를 들고 서 있다.

관건(綸巾)과 학창의(鶴氅衣), 깃털 부채는 제갈량의 상징으로 널리 알려진 차림새다.

제갈량은 삼국정립(三國鼎立)의 계책을 내어 유비(劉備, 161년 - 223년)의 촉한(蜀漢) 건국에 힘썼으며,

유비 사후 여섯 차례 위(魏) 정벌을 감행하던 중 오장원(五丈原)에서 숨을 거두었다.

나무 아래에 인물이 앉아있는 구도는 중국 명대의 절파(浙派) 화풍에서 유래한 것으로 추정된다.

국왕의 감상을 위한 그림으로서 청록의 진채로 섬세하게 채색하였다.

그림 위쪽에는 숙종(肅宗, 재위 1674년- 1720년)이 제갈량에 대한 존경을 담아 쓴 사언시(四言詩) 가 있다.

"함께 세상을 다스려 보지 못함이 안타깝다."는 구절에서 제갈량과 같은 충신을 얻고자 한 숙종의 의도를 읽을 수 있다.



諸葛武侯圖(제갈무후도)

丞相大名, 宇宙永垂, 樂道南陽, 平生自知,           先主三顧, 草廬日遲. 實感隆遇, 乃許駈馳,

(승상대명, 우주영수, 락도남양, 평생자지,           선주삼고, 초여일지. 실감륭우, 내허구치,)

灑落風雲, 情呂渴飢, 陋矣管樂, 伯仲呂伊,           夙夜匪躬, 期臻雍熙, 凜然仗義, 至六出祁

(쇄낙풍운, 정여갈기, 루의관락, 백중여이,           숙야비궁, 기진옹희, 름연장의, 지육출기)

八陳圖成, 妙妙奇奇, 神算莫測, 孰敢擬之,           五丈秋風, 漢鼎終移,悠悠千載, 烈士隕悲,

(팔진도성, 묘묘기기, 신산막측, 숙감의지,           오장추풍, 한정종이,유유천재, 열사운비,)

得君如彼, 事業大違, 匪曰才淺, 蓋不遇時,           易地則然, 太公同歸, 允矣先生, 萬世之師,

(득군여피, 사업대위, 비왈재천, 개불우시,           역지칙연, 태공동귀, 윤의선생, 만세지사,)

我用相感, 繪畫想思, 綸巾鶴氅, 彷佛風儀,           恨不同時, 天職共治, 惟將敬慕, 聊寓贊辭

(아용상감, 회화상사, 륜건학창, 방불풍의,           한불동시, 천직공치, 유장경모, 료우찬사)

乙亥仲夏上澣題(을해중하상한제)   *灑= 뿌릴 쇄, 씻다


승상의 위대한 명성은 우주에 영원히 드리웠다. 남양(南陽) 땅에서 유유자적하게 살면서, 평생을 그렇게 지낼 줄 알았다.

선주(先主)가 세 차례 찾아오니, 초가집의 해는 더디 지는 구나, 두터운 정성에 참으로 감격하여 한 몸을 바치기로 결정하였다.


바람과 구름이 상쾌하게 만나, 마음으로 서로를 갈구했다. 관중(管仲)과 악의(樂毅)도 하찮아 지고, 여상(呂尙)과 이윤(伊尹)에 견줄만하구나,

조석으로 온 힘다해, 태평성대 이루기를 바랐네, 늠름하게 의를 좇아, 여섯 차례 기산(祁山)으로 출병했네.


팔진도(八陳圖)완성되니, 기기묘묘하구나. 신묘한 계책 헤아릴 수 없으니, 누가 감히 견주겠는가?

오장원(五丈原)에 가을바람 부니, 한(漢)의 다스림이 끝내 옮겨갔다. 아득한 천 년의 세월은, 열사의 죽음을 슬퍼한다.


유비와 같은 임금 만나고도, 나라 일으킬 큰 꿈 어그러졌네. 재주가 짧음이 아니라, 무릇 때를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라.

입장 바꾸어보면 곧 그러하니, 태공망(太公望) 역시 같았으리라, 참으로 선생께서는 만세의 스승이시다.


나는 느낀 바가 있어, 그림으로 그려 선생을 생각한다. 관건(綸巾)에 학창의(鶴氅衣)로, 선생의 풍모를 따르고 싶다.

같은 시대에 태어나, 함께 세상을 다스려보지 못함이 안타깝기만 하다. 공경하고 사모하는 마음을, 이 글에 싣는다.

을해년(乙亥年, 1755년) 5월 상순에 짓다.



前出師表(전출사표)

臣亮言, 先帝創業未半, 而中道崩殂. 今天下三分, 益州疲敝, 此誠危急存亡之秋也...

      (신량언, 선제창업미반, 이중도붕조. 금천하삼분, 익주피폐(창), 차성위급존망지추타...)


전출사표 : 신 제갈량 아뢰옵니다. 선황제(昭烈皇帝(소열황제 劉備[유비], 재위 221년 - 223년)께서는 창업의 뜻을 미쳐 반도 이루지 못하신 채

 중도에 붕어(崩)하셨습니다.  지금 천하는 셋으로 나뉘어 있는데, 익주(益州)는 피폐하니 이는 실로 나라의 존망이 위급한 때입니다.

붕어(崩御)라쓰여있지 않고 붕조(崩殂)로 쓰여있음      = 죽을 조



後出師表(후출사표)

       後出師表 : 先帝慮, 漢賊不兩立, 王業不偏安, 故托臣以사賊也, 以先帝之明, 量臣之才, 故知臣伐,, 賊,, 才弱敵强也...

       (후출사표 : 선재여, 한적불량립, 왕업불편안, 고탁신이사적, 이선제지명, 얄신지재, 고지신벌, 적, 재약적강야...)


후출사표 : 선황제께서는 한(漢)과 역적(위[魏]를 말함)이 양립할 수 없으며, 왕업은 천하의 한 귀퉁이로만 안주할 수 없다고 생각하셨기에

신에게 역적의 토벌을 당부하셨습니다.

선황제께서 그 밝음으로 신의 재주를 헤아리셨으니, 역적을 벌함에 신의 재주가 얕고 역적은 강대함을 아셨습니다.


◆악비가 글씨를 쓴 「출사표」= 岳飛筆 出師表(악비필 출사표)  : 岳飛(악비, 1103년 - 1142년)   시대 = 중국남송 12세기

송의 명장 악비가 촉한의 승상 제갈량(諸葛亮, 181년 - 234년)의「전출사표」와「후출사표」를 쓴 서예작품의 탑본이다.

글씨를 쓴 악비는 금나라에 맞서 싸워 여러 차례 전공을 세웠지만 모함을 받아 처형당했으며,

사후에 복권되어 무목(武穆)이라는 시호를 받고  악왕(鄂王)으로 추봉되었다.


조선에서는 숙종 때 제갈량을 모신 사당인 평안도 영유(永柔) 와룡사(臥龍祠)에 악비를 합사하여 제갈량과 악비를 문 · 무를 대표하는

충의지사로 기렸다.

이 탑본첩은 중국 성도(成都) 무후사(武侯) 석각의 탑본으로 추정된다. 활달하면서도 굳센 필치가 돋보인다.



吳世昌 筆 出師表(오세창이 글씨를 쓴 「출사표」)  : 시대 = 조선 1923년,  작가 = 吳世昌(1864년 - 1953년)


22년 제갈량이 제 1차 북벌에 나설 때 후주(後主) 유선(劉禪, 재위223년- 263년)에게 올린「출사표」를 예사체로 쓴 병풍이다.

제갈량은 「출사표」에서 역적 위(魏)를 정벌하는 당위성을 설파하고 국가 운영에서 인사(人事)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특히 소열황제(昭烈皇帝) 유비(劉備, 161 - 223년)에게 받은 은혜에 보답하고 국가에 충성을 다하려는 마음이 절절하게 드러나 있다.


글씨를 쓴 위창(葦滄) 오세창은 역관 출신의 개화파 지식인으로,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의 한명으로 옥고를 치른 독립운동가였다.

부친 오경석(吳慶錫, 1831년 - 1879년)에 이어 서화수집과 글씨로 이름 높았으며,

 1918년 서화협회(書畵協會) 창립회원으로서 조선시대 서화전통을 근대로 잇는 가교 역할을 했다.



감로도(甘露圖) = 감로를 베풀어 아귀를 구함  : 시대 = 조선 1649년


감로도는 아귀도(餓鬼道)에 떨어진 영혼들을 구제하기 위해 의식을 베푸는 장면을 그린 불화이다.

조선시대에 성행한 우란분재(盂蘭盆齋), 수륙재(水陸齋), 천도재(薦度齋) 등 다양한 의식에 사용되었으며,

죽은 사람의 영혼이 극락에 가기를 기원하며 그려졌다.

상단에는 여러 부처님과 보살이 강림하는 장면을, 중단에는 아귀에게 시식(施食)의식을 행하는 장면을,

하단에는 현실속 갖가지 재난(災難)의 장면을 묘사하였다.

특히 감로도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아귀들과 시식단의 모습이다.

화면 중앙의 입에서 불을 뿜어내는 두 아귀는 천도 받아야할 고혼(孤魂)을 상징적으로 나타낸다.

오른편에는 감로를 받기 위해 발우를 들이대고 아우성을 치는 작은 아귀들의 모습도 보인다.

그 위로는 떡, 과일, 흰 쌀 등의 각종 공양물과 향완, 촛대 등잔 등 기물로 화려하게 장엄한 시식단이 있다.

흥미로운 점은 시식단이 실제로 차려진 제단이 아니라 병풍처럼 접었다 펼 수 있는 걸개그림이라는 점이다.

이것은 현실적으로 공양물을 올릴 수 없는 곳이거나 그림으로서 실제 공양물을 대신할 수 있는 의식에 적용할 수 있었을 것이다. 



三藏菩薩圖(삼장보살)  :  시대 = 조선 18세기


하늘세계를 주관하는 천장보살(天藏菩薩), 지상세계를 주관하는 지지보살(持地菩薩), 명부세계를 주관하는 지장보살(地藏菩薩)의 모임을

그린 불화로, 수륙재의 중단(中壇) 의식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수륙재에 삼장보살도를 건 목적은 하늘, 지상, 명부세계의 신들과

권속들을 불러내 물과 육지에 떠도는 영혼들을 구제하고자 함이었다.

삼장보살에 대한 신앙은 경전에는 등장하지 않지만 의식에서의 수요로 인해 조선 후기에 성행하여 많은 작품이 제작될 수 있었다.



의식도량을 장엄하는 부처 =  南無寶勝如來圖(나무 보승여래도) : 시대 = 조선 후기


의식도량(儀式도장)을 수호하고 장엄하기 위해 사용하는 불화이다.

이 불환느 붉은색 방제란에 "나무보승여래(南無寶勝如來)"라고 적혀 있어 보승여래를 그린 것임을 알 수 있다.

오여래도(五如來圖) 또는 칠여래도(七如來圖) 세트로 제작되었다.

보승여래는 영혼들로 하여금 지옥을 벗어나게 하는 여래이다.

천도의식에서 오여래 혹은 칠여래의 이름과 진언을 외우면 그 위신력으로 영혼이 정토에 왕생한다고 한다.



     

南無寶勝如來圖(나무보승여래도),                                                                          南無離怖畏如來圖(이포외여래도)


의식도량을 장엄하는 부처 = 南無離怖畏如來圖(이포외여래도)  : 시대 = 조선 후기

의식도량(의식도량)을 수호하고 장엄하기 위해 사용하는 불화이다.

이 불화는 붉은색 방제란에 "이포외여래도(이포외여래도)"라는 명칭과 다섯 번째에 해당함을 나타내는 숫자가 있다.

이포외여래는 영혼이 모든 두려움에서 벗어나 열반의 즐거움을 얻게 하는 여래이며, 오여래도(오여래도) 또는 칠여래도(칠여래도)로 제작되었다.

붉은색 법의를 걸치고,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아 합장하고 있다.



의식도량으로 향하는 길을 여는 다섯 제왕 = 五方帝位圖(오방제위도) : 시대 = 조선 후기


동 · 서 · 남 · 북 · 중앙의 다섯 방위를 관장하는 제왕이다.

의식을 시작할 때 법회에 초청된 존재들이 막힘없이 올 수 있도록 도량으로 향하는 길(五路[오로])을 여는 역할을 하며,

오로단(五路壇) 의식에서 사용하였다.

오방제위는 제왕의 복식에 해와 달이 그려진 면류관(冕旒冠)을 쓰고 의자에 앉아 두 손으로 홀을 들고 정면향을 취한다.

각각의 존상은 도상과 형식에 차이가 없으며 단지 방제에 쓰여진 명칭과 복색으로만 구별할 수 있다.

이 그림은 방제가 없어 오제위 중 어떤 왕을 그린 것인지 정확히 알 수없지만 청색의 복식을 입어 동방의 제왕을 그렸음을 알 수 있다.



삼보를 나타내는 위패 = 三寶牌(삼보패)  :  시대 = 조선 18세기


삼보패는 부처나 보살의 이름 또는 발원 내용을 적어 불단에 봉안하는 불교의식구이다. "시방삼보자존[十方三寶自尊]"이라는 내용에서 볼 때

불교에서 숭배하는 대상인 삼보(三寶), 즉 불보(佛寶), 법보(法寶), 승보(僧寶)의 존명을  적어 모시기 위한 위패임을 알 수 있다.

사각형의 대좌 위에 연꽃잎과 연잎이 솟아 올라 펼쳐지고 그 위에 광배형의 위패가 우뚝 선 모습을 짜임새 있고 아름답게 구성하였다.

뒷면에는 암산으로 둘러싸인 전각과 산 사이사이에 봉황, 용, 호랑이 등을 조각하였다.



     

용무늬 촛대 = 木製龍文燭臺(목제용문촛대)  :  시대 =  조선


밤에 행하는 다양한 의식에 사용한 촛대이다. 불교의식이 이루어지는 장면을 표현한 감로도에서 재단에 촛불을 켠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이 촛대는 연꽃이 위로 향한 무늬로 장식된 둥근 받침, 원형의 기둥, 사각형의 받침으로 구성된 촛대이다.

기둥에는 상승하는 용과 여의주, 구름을 가득 조각하였는데 조각이 섬세하고 생동감이 있다.



     

용무늬 촛대 = 木製龍文燭臺(목제용문촛대) 



연꽃이 위로 향한 무늬로 장식된 둥근 용무늬 촛대 받침 



의식도량을 장엄하는 일곱 부처 寶勝如來圖(보승여래도)  :  시대 =  조선 후기


의식도량(儀式도장)을 수호하고 장엄하기 위해 사용하는 일곱부처를 그린 불화 중 보승여래도(寶勝如來圖)이다.

보승여래는 영혼들로 하여금 지옥을 벗어나게 하는 여래이다.

이 칠여래도는 세트로 제작되었으며, 보승여래· 광박신여래 · 이포외여래 · 감로왕여래가 남아있다.

칠여래도는 손에 든 지물과 법의 모양만이 다를 뿐 부처의 상호, 자세 등이 거의 같은 본을 대고 그린 듯 동알한 모습으로 표현되었다.



의식도량을 장엄하는 일곱 부처 廣博身如來圖(광박신여래도)  :  시대 = 조선 후기


의식도량(儀式道場)을 수호하고 장엄하기 위해 사용하는 일곱부처를 그린 불화 중 광박신여래도(廣博身如來圖)이다.

광박신여래는 아귀도에 빠진 영혼들의 목구멍을 넓혀 배고픔을 면해주는 여래이다.

같은 세트의 다른 여래들이 지물을 들고 있는 것에 반해, 광박신여래는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으고 아무런 지물도 들고 있지 않다.

화면 상단의 붉은색 방제란에는 "나무광박신여래[南無廣博身如來]"라는 명칭과 칠여래도 중 네번째에 해당함을 나타내는 숫자가 적혀 있다.



의식도량을 장엄하는 일곱 부처  離怖畏如來圖(이포외여래도)  :  시대 =  조선 18 - 19세기


의식도량(儀式道場)을 수호하고 장엄하기 위해 사용하는 일곱부처를 그린 불화 중 이포외여래도(離怖畏如來圖)이다.

이포외여래는 영혼이 모든 두려움에서 벗어나 열반의 즐거움을 얻게 하는 여래이다.

 붉은색 법의를 걸치고, 두 손을 가슴 앞에 두고 오른손으로 연꽃을 들고 있다.

화면 상단의 붉은색 방제란에는 "나무이포외여래(南無離怖畏如來)"라는 명칭과 칠여래도 중 다섯 번째에 해당함을 나타내는 숫자가 적혀 있다.



의식도량을 장엄하는 일곱 부처  甘露王如來圖(감로왕여래도)  :  시대 =  조선 18 - 19세기


의식도량(儀式道場)을 수호하고 장엄하기 위해 사용하는 일곱부처를 그린 불화 중 감로왕여래도(甘露王如來圖)이다.

감로왕여래는 영혼에게 감로의 맛을 얻게 하여 큰 깨달음을 주는 여래이다. 붉은색 법의를 걸치고,

두 손을 가슴 앞에 두어 오른손으로 연꽃을 들고 있는 모습이 같은 세트의 이포외여래도와 매우 유사하다.

그림의 가장 아랫부분에 화기가 일부 남아있어 칠여래도뿐 아니라 팔금강도, 사보살도도 함께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의식도량을 장엄하는 네 보살   四菩薩圖(사보살도)  :  시대 =  조선 18 - 19세기


야외 의식에서는 괘불과 함께 칠여래도, 팔금강도, 사보살도와 같은 소형 불화들이 걸린다.

사보살은 경물권보살(警物眷菩薩), 정업삭보살(定業索菩薩), 조복애보살(調伏愛菩薩), 군미어보살(君迷語菩薩)을 말한다.

각 보살은 서로 구분할 수 있는 도상적 특징이 밝혀져 있지 않아 명문이나 방제가 있어야 명칭을 알 수 있는데,

이 두 점의 사보살도는 방제가 없어 정확한 존명을 알 수 없다. 본래 네 보살이 한 세트로 조성되었을 것으로 보이나,

 현재는 두 보살만이 남아있다.



의식도량을 장엄하는 네 보살   四菩薩圖(사보살도)



現王圖(현왕도) = 閻羅大王(염라대왕 지옥의 다섯 번째 대왕 ) :  시대 = 조선 1806년


세상을 떠난 영혼은 3년에 걸쳐 총 열 명의 왕에게 심판을 받고 다음 생이 결정된다. 현왕도는 다섯 번째 왕인 염라왕을 그린 불화이다.

현왕이란 염라왕이 미래에 보현왕여래가 되리라는 수기를 받았다는 데서 유래한 명칭이다.

병풍을 배경으로 책상 앞에 앉은 중앙의 인물이 현왕이다. 경책이 올려진 통천관을 쓰고, 수염을 만지고 있다.

그 앞에 홀을 들고 있는 인물은 대륜성왕과 전륜성왕으로 현왕을 가장 가까이서 보필하는 인물이다.

그 뒤쪽으로는 책과 문서를 안고 있는 판관이 있으며, 인장함과 검을 든 두 동자가 있다.

화기에 의하면 1806년 4월. 용흥사 응향각(凝香閣)에 봉안하기 위해 새로 조성한 현왕도임을 알 수 있다.







金銅阿彌陀三尊像(금동아미타삼존상)  : 시대 = 고려 1333년


서방 극락정토를 관장하는 아미타불, 관음보살, 대세지보살의 삼존상이다.

양옆 두 보살상의 바닥판에 쓴 글에 따르면 1333년 장현(장현)과 부인 선씨(선씨)의 시주로 불상이 제작되었다.

불상 안에 넣었던 복장물(복장물) 조성 발원문에는 신분이 높은 사람부터 낮은 사람까지 다양한 계층의 많은 사람들이 기록되어 있다.


    

「정덕 십년」이 새겨진 지장보살 = 「正德 十年」銘 石造地藏菩薩 坐像  : 보물 1327호    시대 = 조선 1515년


지장보살은 지옥에서 고통 받고 있는 중생을 위하여 깨달음을 미룬 보살이다.

다른 보살상과 달리 민머리의 스님 모습이거나 머리에 두건을 쓴 모습으로 표현된다.

바위 모양 대좌 뒤의 명문을 통해 정덕 10년(1515년) 3월

김순손(金順孫) 부부 등의 시주로 절학(蓈學, 마다 절혹은 랑[낭])을 비롯한 승려가 조각하였음을 알 수 있다.



金銅 半跏思惟像(금동 반가사유상)  :  보물 331호     시대 = 삼국시대 7세기


얼굴, 몸통, 팔 등 신체를 극도로 가늘고 길게 표현한 반가사유상이다. 머리에는 보관 장식을 연결했던 구멍이 남아있고,

머리에는 보관 장식을 연결했던 구멍이 남아있고, 어깨부터 다리 아래까지 걸친 장신구는 긴 신체를 더욱 강조한다.

연화대좌 아래의 네모난 대좌는 한반도의 영향을 받은 일본 반가사유상에도 많이 남아 있는 대좌 모양이다.


金銅 菩薩 立像(금동 보살 입상)  :  보물 제 333호     시대 = 삼국시대 6세기



일본 =  四睡圖(四睡圖) 넷이 졸다  :  시대 = 푸데야 도칸(筆谷等觀[필곡등관], 1875년 -1950년) 20세기 초


후데야 도칸은 훗카이도(北海道[북해도]) 출신의 일본화가로서 도쿄미술학교 졸업생이다.

하시모토 가호(橋本雅邦[교본아방], 1835년 - 1908년), 요코야마 다이칸(橫山大觀[횡산대관], 1868년 - 1958년) 등을 사사했고,

풍경화는 물론 불교와 도교 관련 화제를 그린 가작(佳作)을 많이 남겼다.

이 작품은 제작연도와 출품이력이 미상이나 수묵 위주의 담백한 묘사법이 뛰어난 그의 가작 중 하나다.

이 그림은 당대(唐代,618년 - 907년)의 선승(禪僧)인 풍간(豊干)과 한산(寒山), 습득(拾得)이 호랑이와 함께 잠든 모습을 묘사한 사수도(四睡圖)이다.

한산과 습득이 호랑이를 팔베개로 삼아 잠에 빠져 있고 풍간은 손에 염주를 쥔 채 호랑이에게 등을 기대어 졸고 있다.

사수도는 선종(禪宗)의 궁극적인 깨달음의 경지를 보여주는 화제로서,

 가마쿠라(염창[鎌倉])시대(1185년 - 1333년) 중국에서 일본으로 수입된 주제이다.

호랑이의 온화한 얼굴 표정에서는 맹수(맹수)로서의 특징이 전혀 드러나지 않아 이상화된 신령한 동물로서 묘사되었음을 알 수 있다.


四睡圖(四睡圖) 넷이 졸다 



牧童(목동) : 사꾸마 데쓰엔(佐久鐵園[좌구철원], 1850년 - 1921년)   시대 =  20세기 초


이 그림은 인간의 본성을 회복하는 과정을 소를 찾는 것에 비유한 선종(禪宗) 화제인 심우도(尋牛圖)로 생각된다.

심우도는 선을 닦는 동자가 본성이라는 소를 찾기 위해 산중을 헤매다 마침내 도를 깨닫게 된다는 내용으로,

선의 수행 단계를 소와 동자에 비유하여 도해한 것이다.  심우도는 총 10단계로 구성되는데,

이 그림은 동자가 소의 고삐를 잡아 끌어 당기는 것으로 보아 소를 얻는 4번째 단계인 "득우[得牛]"로 여겨진다.

소는 "참한 성품"을 상징하고 소를 찾는 일은 "성품을 닦는 일"로 비유되는데, 소를 얻는다는 것은 곧 자기 자신을 알아가는 것이 된다.

사쿠마 데쓰엔은 대대로 센다이번(仙台藩[선태번]) 전속 화가였던 집안에서 태어나

신문사의 편집자, 인쇄업 등을 거쳐 40살 무렵부터 창작활동을 시작했다.

아버지로부터 중국 그림과 한학(漢學)을 배웠고, 1897년에는 중국을 1년 동안 유람한 뒤 귀국하여

『支那歷代名畫論評[지아역대명화론평]』『鐵園畫談[철원화담』등을 간행 하기도 했다.

일본미술협회에서 연이어 상을 받고 일본 미술협회 고문을 역임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했다.



<도카이도의 53개 역참(東海圖 53次[동해도 53차> 니혼바시 日本橋(일본교)

우타가와 히로시게(歌川廣重[가천광중], 1797년 - 1858년)   에도시대(江戶[강호]時代) 19세기


니혼바시(日本橋[일본교])에는 에도(江戶[강호])에서 출발해 교(京[경] 현재의 교툐)를 향해 가는 도카이도 여정의 출발점이다.

현재의 도쿄도(東京都[동경도]) 주오구(中央區[중앙구])에 소재한다. 화면의 정중앙에 위치한 니혼바시에는 참근교대(參勤交代[삼근교대])를

위해 에도를 출발하는 다이묘(대명[大名])의 행렬이 다리를 건너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또한 화면 좌측에는 물고기가 가득 든 들것을 짊어진 사람들이 하루의 장사를 시작하기 위해 길을 재촉하는 모습도 볼 수 있다.

아침을 시작하는 일상생활의 활기가 느껴지는 니혼바시를 잘 묘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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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카이도(東海圖[동해도]) 속 "다리가 있는 풍경"

우타가나 히로시게(歌川廣重[가천광중], 1797년 - 1858년)가 도카이도를 묘사한 판화시리즈인 <도카이도의 53개 역참(東海圖 53次[동해도 53차>에는 

강이나 냇가에 설치된 다리가 등장하는 장면이 다수 있다. 이는 도카이도가 지나는 지역들이 대부분 바다에 면해 있어

크고 작은 강의 하구나 하류를 가로질러가야 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큰 강의 경우는 배로 건넜으나 중 · 소 하천의 경우에는 다리를 이용한 도강(渡江)이 일반적이었다.

이때 이용된 다리들이 도카이도의 명물(名物)이 되어 <도카이도의 53개 역참(東海圖 53次[동해도 53차>에 묘사되었다.

도카이도에 있었던 다리의 개수는 151개에 이르렀는데, 그 중 대부분은 돌로 만든 석교(石橋)였다. 다리의 길이는 90cm 정도의 매우 짧은 것부터

약 45m에 이르는 비교적 긴 것까지 그 종류가 다양했다. 『東海道分間延繪圖[동해도분간연회도]』라는 책에 이 다리들이 종류별로 구분되어

그림으로 수록되어 있다. 같은 다리라 하더라도 우키요에 제작시기나 화가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묘사되어 감상의 즐거움이 있다.


<도카이도의 53개 역참(東海圖 53次[동해도 53차> 호도가야(保土亇谷[보토죽곡]) 심마치바시(新町橋[신정교])

우타가와 히로시게(歌川廣重[가천광중], 1797년 - 1858년)   에도시대(江戶[강호]時代) 19세기



호도가야(保土亇谷[보토죽곡])는 도카이도의 4번째 역참이며, 현재의 가나가와현(神奈川縣[신나천현]), 요코하마시(橫浜市[횡빈시])

호도가야구에 소재했다. 화면 오른쪽 아래 묘사된 다리는 가타비라가와(帷子川[유자천])를 건너기 위해 만들어진 신마치바시(新町橋[신정교]) 다.

다리 건너편 길 양쪽으로 숙소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일본 전국 각지의 다이묘들은 자신의 영지와 에도를 왕복하는 참근교대를 할 때

 "혼진(本陳[본진])"이라는 곳에서 숙박 했는데, 에도를 떠난 후 들리는 첫 혼진이 바로 이 호도가야에 설치되어 있었다.


<도카이도의 53개 역참(東海圖 53次[동해도 53차> 후지사와(藤澤[등택])

우타가와 히로시게(歌川廣重[가천광중], 1797년 - 1858년)   에도시대(江戶[강호]時代) 19세기


후지사와(藤澤)는 도카이도의 6번째 역참이며, 현재의 가나기와현(神奈川縣[신나천현]) 후지사와시에 소재했다.

후지사와는 시종(時宗)의 총본산인 조조코사(淸淨光寺[청정광사]) 앞 번화가로 시작해 도카이도의 역참으로 발전했다.

화면 상단 언덕배기에 자리한 조조코사를 볼 수 있는데, 이 절은 시종의 개소 잇펜쇼닌(一遍上人[일편상인], 1239년 - 1289년)이 수행을 위해

전국을 여행했던 탓에 "료코사(旅行社[여행사])"라고도 불렸다. 후지사와는 도카이도와 에노시마(江丿島[강별도])로 가는 길의 분기점 이기도

 했는데, 화면 왼쪽의 큰 도리이(鳥居[조거])는 이곳에서 약 5km 떨어진 에노시마 변재천(弁財天[변재천])의 입구를 나타낸다.



<도카이도의 53개 역참(東海圖 53次[동해도 53차> 가케가와(掛川[괘천]) 오이케바시(大池橋[대지교])

우타가와 히로시게(歌川廣重[가천광중], 1797년 - 1858년)   에도시대(江戶[강호]時代) 19세기


가케가와(掛川[괘천])는 도카이도의 26번째 역참이며, 현재의 시즈오카현(靜岡縣[정강현]) 가케가와시 중심부에 소재했다.

이 장면은 가케가와 역참 바로 앞의 시오이가와(塩井川[염정천])에 놓인 다리인 오이케바시(大池橋[대지교]) 주변의 풍경을 묘사한 것이다.

화면 오른 쪽 상단의 산은 불과 관련한 재앙을 막아주는 신을 모신 신사가 있는 아키바야마(秋葉山[추엽산])산이다.

에도시대 사람들은 빈번한 화재로 고통을 받았기 때문에 이 신사에 대한 신앙이 성행했다.

오이케바시 다리를 건너는 스님에게 예를 표하는 여행객의 묘사가 재미있다.



<도카이도의 53개 역참(東海圖 53次[동해도 53차> 요시다(吉田[길전]) 도요가와바시(豊川橋[풍천교])

우타가와 히로시게(歌川廣重[가천광중], 1797년 - 1858년)   에도시대(江戶[강호]時代) 19세기

요시다(吉田[길전])는 도카이도의 34번째 역참이며, 현재의 아이치현(愛知縣[애지현]) 도요하시시(豊橋市[풍교시])중심부에 소재했다.

화면 좌측의 도요카와바시(豊川橋[풍천교])는 길이가 218m나 되는 다리로 에도에서 교토로 가는 길에 있는 4대 다리 중 하나였다.

화면 오른쪽 하단에는 커다란 잉어 치미를 얹은 요시다성(吉田城[길전성])이 보인다.


<도카이도의 53개 역참(東海圖 53次[동해도 53차> 오카자키(岡崎[강기]) 야하기노하시(失矧之橋[실신지교])

 우타가와 히로시게(歌川廣重[가천광중], 1797년 - 1858년)   에도시대(江戶[강호]時代) 19세기


오카자키(岡崎[강기])는 도카이도의 38번째 역참이며, 현재의 아이치현(愛知縣[애지현]) 오카자키시 중심부에 소재했다.

오카자키는 야하기가와(失矧川[실신천]) 수운의 기지로, 니시미카와(西三河[서삼하]) 지역의 경제, 문화, 교통의 중심지로서 번영했다.

야하기가와에 만들어진 도카이도에서 제일 긴 다리인 길이 370m의 야하기노하시(失矧之橋[실신지교]) 위로 다이묘 행렬이 지나가고 있다.

다리 건너 낮은편에 에도 막부 제 1대 쇼군인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덕천가강], 1543년 - 1616년) 가 태어난 오카자키성(岡崎城[강기성])이 보인다.



<도카이도의 53개 역참(東海圖 53次[동해도 53차> 욧카이치(四日市[사일시]) 미에가와(三重川[삼중천])

 우타가와 히로시게(歌川廣重[가천광중], 1797년 - 1858년)   에도시대(江戶[강호]時代) 19세기


욧카이치(四日市[사일시])는 도카이도의 43번째 역참이며, 현재의 미에현(三重縣[삼중현]) 욧카이치시에 소재했다.

이 장면은 욧카이치 역참 근처를 흐르는 미에가와(삼중천[三重川])의 모습을 묘사한 것이다.

판을이어붙여 만든 간단한 다리 위로 맞바람을 맞으며 걸어가는 행인과 반대편의 강풍에 날아가는 모자를 잡으려 애쓰는 행인의 묘사가 재미있다.

바람에 흔들리는 버드나무 가지와 냇가 갈대의 모습에서 바람이 얼마나 강한지 알 수 있다.



<도카이도의 53개 역참(東海圖 53次[동해도 53차> 게이시(경사[京師]) 산조오하시(三條大橋[삼조대교])

 우타가와 히로시게(歌川廣重[가천광중], 1797년 - 1858년)   에도시대(江戶[강호]時代) 19세기


게이시(京師[경사])는 교토(京都[경도])를 가리키는 말이다. 가모가와(賀茂川[하무천])를  가르는 산조오하시(三條大橋[삼조대교])

다리는 약 500km에 달하는 도카이도의 여정이 곧 끝난다는 표식이었다.

다리 뒤로 가까이는 히가시야마(東山[동산]) 산이 있고 멀리는 갈색으로 묘사된 히에이잔(比叡山[비예산]) 산이 있다.

히가시야마 산의 중턱에는 알아보기 쉽지 않지만 현재도 관광 명소로 유명한 기요미즈사(淸水寺[청수사])가 보인다.

유유히 흐르는 가모가와와 산조오하시 다리 위로 지나가는 사람들을 통해 에도의 니혼바시와는 다른 교토의 온화한 활기를 느낄 수 있다.



두 귀병 = 黑釉 梅花文 兩耳甁(흑유 매화문 양이병) 원나라 13세기 후반 ~ 14세기   吉州窯(길주가마)


江西省  吉州窯(강서성 길주요)

장시성(江西省[길서성]) 지안 시 (吉安市[길안시]) 용허 진(永和鎭[영화진])에 위치한다.

지안은 옛 길주(吉州)에 속하여 길주요라고 부른다. 당나라 말에 도자기를 제작하기 시작해서 남송 때에 흥성했고 원대에는 쇠퇴했다.

북송대에 청백자를 주로 제작했고 남송대에는 백지흑화(白地黑花. 백지 바탕에 흑유로 문양을 장식하는 기법) 자기의 발전이 두드러진다.



유두무늬 항아리 = 黑釉 露胎 乳頭文 壺(흑유 로태 유두문 호) 七里鎭窯(칠리진가마)


七里鎭窯(칠리진요)

교통이 편리하고 자토와 자원이 풍부한 장시 성 간저우 시에 위치한다. 만당오대(晩唐五代)부터 시작되었고,

남송부터 원대에 주로 갈유와 흑유자기를 제작하였다. 칠리진요 자기는 기형이 다양하고, 유색이 풍부하며 조형이 수려하다.

신안해저선에서도 칠리진요에서 제작한 흑유와 갈유자기가 발견되었는데 푸젠 성의 홍당요(洪塘窯)에 비해 태토가 무거운 것이 특징이다.



연꽃잎무늬 작은 주전자 = 雜釉 印花 蓮瓣文 小注子(잡유 인화 연판문 소주자)

德化窯(덕화가마)  元나라 13세기 후반 ~ 14세기 전반



순례 처험을 위한 그림 = 라자스탄, 19세기

순례를 하기에 가장 상서로운 시기의 시작을 알리기 위해, 카르티크 푸르니마(보름달) 축제 기간 동안 자이나교 사원에 걸었던 그림이다.

성지 순례를 가지 못하는 신도들은 이 그림을 보면서 성지를 방문할 때 얻는 공덕을 쌓았다.

그림의 중앙에는 9개의 구획으로 나누어진 방형의 공간이 있는데, 여기에는 붉은색으로 탄트라를 써 넣었다.

그 위쪽에 한 신도를 중심으로 자이나교의 8가지 상서로운 상징물을 배치했다.

오른쪽 붉은색 바탕 위에는 흰색의 자이나교 사원이 그려져 있다.

그림의 나머지 부분은 왕공 귀족이 지나를 숭배하는 장면과 감실 안에 앉거나 서 있는 지나의 모습으로 채웠다.



피츠바이 : 슈나 숭배를 위한 벽걸이 그림  = 라자스탄 19세기

가을의 보름달 아래 열리는 샤라트 푸르니마 축제를 주제로 한 피츠바이(의례용 걸개 그림)이다.

화면 중앙에 크리슈나의 또 다른 모습인 스리나트지를 향해 열렬한 숭배자인 소치는 여인들이 춤을 추고 있고,

별이 빛나는 밤하늘에는 신들이 날고 있다.

그림의 양측과 위쪽 가장자리에 마련된 27개의 방형 구획에는 특정 계절과 축제에 행하는 스리나트지 숭배 장면이 담겨 있다.



피츠바이 상단 부분도



피츠바이 하단 부분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