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경기 = 心 마음의 길을 찾아서

2017. 4. 2. 수락산 학림사 2

백련암 2017. 4. 7. 02:07

수락산 학림사

서울시 노원구 상계동 1번지 수락산 남쪽 기슭에 자리 잡고 있는 천년고찰 학림사(鶴林寺)는 대한불교조계종 조계사(曹溪寺)의 말사로서

신라 문무왕 10년(671년)에 원효대사(元曉大師)가 창건했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이후 고려시대 까지 법등이 꾸준히 이어져 고려 공민왕 시기에 왕사인 나옹스님(1320~1376)에 의해 크게 번성하였다고 전합니다.


학림사(鶴林寺)의 유래는 산의 형세가 마치 학이 알을 품고 있는듯한 학포지란(鶴抱之卵)의 형국을 갖추고 있다는 데서 비롯되었다고

 전해오고 또한 불교적인 의미에서 본다면, 석가가 입멸(入滅)할 때 주변에 심어 있던 두 그루의 나무, 사라쌍수(娑羅雙樹)가  하얗게 말라 죽어

백학처럼 변해 그 숲을 "학림"이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때문에 "학림"은 불자들의 이상세계를 상징하기도 한다.

  서울 동쪽의 도심 속에서도 마치 대자연의 숲 속에 안겨 있는듯한 아늑함을 느낄 수 있는 사계절 빼어난 경관의 사찰입니다.


학림사(鶴林寺)는 옛부터 나한신앙(羅漢信仰)을 중심신앙으로 하는 나한도량으로 유명하며,

소장 문화유산으로는 서울시문화재자료 제32호로 지정된 석조약사여래좌상(石造藥師如坐像), 서울시유형문화재 제211호인 삼신불괘불도(三神佛掛佛圖)와

 서울시유형문화재 제336호인 석조약사여래삼불좌상 및 복장유물(石造藥師如來三佛坐像,服藏遺物) 등이 있습니다.



五百羅漢殿(오백나한전)

학림사 오백나한전(五百羅漢殿)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전각 이름을 적은 현판의 단아한 예서체 글씨이다.

안에는 소형의 오백나한상과 석가여래상과 좌우에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을 협시보살로 모시고 있는데 이는 조선 중엽 옥돌로 조성되었다.

오백나한상들은 재미나고 해학적인 모습을 하고 있다. 머리를 빗고 있는 모습, 등을 긁고 있는 모습 등

중생들의 갖가지 모습들을 그대로 대변해주며 해학적인 모습도 담고 있다.



五百羅漢殿 懸板(오백나한전 현판) 예서체로 쓴 현판이랍니다.



五百羅漢殿(오백나한전) 법당

석가모니 부처님의 전생으로서 수행하고 있을 때 이야기이다.

어느 날 오곡백과가 풍성한 들녘을 걷고 있을 때, 좁쌀이 소담스럽게 익은 사잇길을 걷다가 조밭에 영글어진 한 포기를 무심코 잡았을 때

좁쌀 3알이 손바닥으로 떨어졌다. 그 수행자는 좁쌀 3알을 훔친 과보로 축생인 소의 몸을 받았으며 한 농가에 3년동안 봉사해야 했다.

 3년이 다해갈 즈음 농부가 집으로 돌아와 보니 외양간에서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사람으로 환생한 소는 농부에게 자신이 과거에 좁쌀 3알을 훔친 과보로 소의 몸을 받은 이야기를 다 하고 돌보아준 농부에게 감사의 말을 전했다.

그리고 그 은덕으로 아주 중요한 얘기를 해주었다.

3일 후 이 마을에 도적 480명이 나타나 약탈하려 하니 480명분의 음식을 장만하여 대접하라고 일러주었다.

일러준 대로 농부는 480명의 음식을 장만하여 도적들이 침범하자 융숭히 대접했다. 놀란 480명의 도적은 그 연유를 묻게 되었고,

그 농부는  좁쌀 3알의 과보로 3년 동안 축생의 몸을 받아야 했던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좁쌀 3알로 3년 동안 축생의 몸이라구?"     "그렇다면 지금까지 우리가 지은 죄는 얼마나 크단 말인가."

480명의 도적들은 그길로 자신들의 죄과를 참회하고 수행을 하여 모두 아라한과(阿羅漢果)를 증득하였다.

그리고 대중들로부터 공양받을 수 있는 위치까지 오르게 되었다.



五百羅漢殿(오백나한전)

학림사 오백나한전(五百羅漢殿)에는  소형의 오백나한상과 석가여래상과 좌우에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을 협시보살로 모시고 

첫 번째 줄에는 16나한을 모시고 있는데  이는 조선 중엽 옥돌로 조성되었다.

오백나한상들은 재미나고 해학적인 모습을 하고 있다. 머리를 빗고 있는 모습, 등을 긁고 있는 모습 등

중생들의 갖가지 모습들을 그대로 대변해주며 해학적인 모습도 담고 있다.



鶴林寺 石造藥師如來三佛坐像(학림사 석조약사여래삼불좌상) :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 336호    시대 = 조선

약사여래상과 좌우에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이 유형문화재 제 336호

이 불상은 높이가 49-61㎝의 중소형불상으로, 불상은 머리를 약간 앞으로 내밀어 구부정한 자세를 취하고 변형편단우견(變形偏袒右肩)과

선정인을 취하고, 그 위에 화문으로 장식된 약합을 들고 있다. 불상의 바닥면에는 복장공이 있고, 내부에 복장이 들어있다.

조성기가 없어 제작 시기와 조각승을 밝힐 수 없지만 조선후기 불교조각사에서 개별 조각승의 양식적 특징을 잘 반영했다.



五百羅漢殿(오백나한전)

학림사 오백나한전(五百羅漢殿)에는  소형의 오백나한상과 석가여래상과 좌우에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을 협시보살로 모시고 있는데

이는 조선 중엽 옥돌로 조성되었다. 오백나한상들은 재미나고 해학적인 모습을 하고 있다. 머리를 빗고 있는 모습, 등을 긁고 있는 모습 등

중생들의 갖가지 모습들을 그대로 대변해주며 해학적인 모습도 담고 있다.



五百羅漢殿(오백나한전)

학림사 오백나한전(五百羅漢殿)에는  소형의 오백나한상을 모시고 있는데 이는 조선 중엽 옥돌로 조성되었다.

오백나한상들은 재미나고 해학적인 모습을 하고 있다. 머리를 빗고 있는 모습, 등을 긁고 있는 모습 등

중생들의 갖가지 모습들을 그대로 대변해주며 해학적인 모습도 담고 있다.



五百羅漢殿(오백나한전)

학림사 오백나한전(五百羅漢殿)에는  소형의 오백나한상을 모시고 있는데 이는 조선 중엽 옥돌로 조성되었다.

오백나한상들은 재미나고 해학적인 모습을 하고 있다. 머리를 빗고 있는 모습, 등을 긁고 있는 모습 등

중생들의 갖가지 모습들을 그대로 대변해주며 해학적인 모습도 담고 있다.





五百羅漢殿(오백나한전)

석가여래좌상과 협시로는 좌우에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이 모셔져 있다. 좌우로 인등탑이 있다,

학림사 오백나한전(五百羅漢殿)에는  소형의 오백나한상을 모시고 있는데 이는 조선 중엽 옥돌로 조성되었다.

오백나한상들은 재미나고 해학적인 모습을 하고 있다. 머리를 빗고 있는 모습, 등을 긁고 있는 모습 등

중생들의 갖가지 모습들을 그대로 대변해주며 해학적인 모습도 담고 있다.



五百羅漢殿(오백나한전)

석가여래좌상과 협시로는 좌우에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이 모셔져 있다. 좌우로 인등탑이 있다,

학림사 오백나한전(五百羅漢殿)에는  소형의 오백나한상을 모시고 있는데 이는 조선 중엽 옥돌로 조성되었다.

오백나한상들은 재미나고 해학적인 모습을 하고 있다. 머리를 빗고 있는 모습, 등을 긁고 있는 모습 등

중생들의 갖가지 모습들을 그대로 대변해주며 해학적인 모습도 담고 있다.



도림선사와 백락천의 벽화이야기

항주의 전망 산에 도림선사(道林禪師)라는 덕망 높은 이름난 고승이 살고 있었다. 도림선사(741~824)는 항상 산중의 나무 가지에 앉아서 좌선(坐禪)을 하고 있어서

 마치 새의 둥지처럼 보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조과선사(鳥?禪師)또는 작소선사라고들 하였다.

백락천이 하루는 도림선사의 고명과 덕망을 듣고 ‘내가 한번 직접 시럼해 보리라’ 하며 마음을 먹고는

도림선사가 머물고 있는 과원사를 향해 수행원을 거느리고  찾아갔다. 도림선사는 청명한 날이면 경내에 있는 노송 위에 올라가 좌선을 하곤 하였다.

 마침 백낙천이 도림선사를 찾아간 날도 나무위에서 좌선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스님의 좌선하는 모습을 본 백낙천은 너무나도 위험하고 아슬아슬한 생각이 들었다.

“선사의 거처가 너무 위험한 것 아닙니까?” 이 말을 들은 선사가 아래를 내려다보고 말하였다.     “내가 볼 때에는 자네가 더 위험하네.”

“나는 벼슬이 이미 자사에 올라 강산을 진압하고, 또 이렇게 안전한 땅을 밟고 있거늘 도대체 무엇이 위험하다는 말이오?”

백낙천이 어이가 없다는 듯이 대꾸하자, 선사는 그가 학문과 벼슬에 대한 자만심이 대단한 것을 알고,

이 기회에 그의 교만함을 깨우쳐 주려고 생각하여 말하였다.

“티끌 같은 세상의 지식으로 교만한 마음만 늘어, 번뇌가 끝이 없고 탐욕의 불길이 쉬지 않으니, 어찌 위험하지 않겠는가!  

명리와 이해가 엇갈리는 속세가 더 위험한 곳이라는 것을 은연중에 알려 준 것이었다.

백낙천은 자신의 마음을 환히 꿰뚫어보는 듯한 눈매와 자기가 자사라는 벼슬에 있음을 알면서도 당당하게 할 말을 다하는 도림 선사의 기개에 그만 눌렸다. “제가 평생 좌우명으로 삼을 법문을 한 구절 들려주십시오.”

애초에 선사를 시험하고자 했던 오만 방자한 태도를 바꾸어, 공손하고 겸손한 자세로 가르침을 청하였다.

이에 도림선사는 다음과 같이 설하였다.

제악막작(諸惡莫作) ; 나쁜 짓을 하지 말고,    중선봉행(衆善奉行) ; 착한 일을 받들어 행하라.

자정기의(自淨基義) ; 자기의 마음을 맑게 하면,   시제불교(是諸佛敎) ; 이것이 곧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대단한 가르침을 기대했던 백낙천은 이 같은 대답에 실망하여 말했다. “그거야 삼척동자라도 다 아는 사실 아닙니까?”

백낙천이 신통치 않다는 듯이 말하자, 선사는 침착한 어조로 다시 말하였다.

“알기야 삼척동자도 다 아는 사실이지만 팔십 노인도 행하기는 어려운 일이지.” 이 말을 들은 백낙천은 비로소 깨달은 바가 있었다.

알고 있는 것만으로는 아무런 쓸모가 없으며 그 가르침을 실천하여 인격화하지 않으면 교만(驕慢)과 번뇌(煩惱)만이 더할 뿐,

진리의 길에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함을 깨달은 것입니다.


당대의 대문장가인 백낙천은 그 뒤로 도림선사에게 귀의하여 불법의 수행에 매진하였다고 합니다.

오늘날까지 사람의 심금을 울리는 백낙천의 명문 시구들은 이러한 지행합일(知行合一)의 깨달음에서 비롯된 것이라 생각 됩니다.


※당나라의 백낙천(白樂天)은 유명한 시인이요. 뛰어난 경륜을 지닌 정치가이기도 하였다. 그는 본래 학식과 견문이 두루 뛰어난 데에다

벼슬이 자사(刺史)에 까지 오르니 자못 우월감과 성취감에 충만해 있었다. 그가 항주(抗州)자사로 부임하였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오백나한전 內에 있는 이성계와 나한이야기 벽화

부처님 재세시 수행을 통해 아라한의 경지에 도달한 5백 명의 뛰어난 제자를 오백나한 또는 오백상수라고도 하며,

오백나한은 진리를 향해 깨달음을 추구해 가는 많은 수행자를 의미한다.

태조  이성계가 왕이 되기 전 함경도 함흥에서 아버지 환조의 상(喪)을 당하고 장사를 지내지 못하고 있던 중, 머슴이 산으로 나무를 하러 갔다가

두 스님이 산 아래를 내려다보며 『저기가 정말 명당자리군. 당대에 군왕이 나겠는데』『정말 그렇군요. 저 자리는 틀림없이 군왕이 날 자리입니다.』

하는 말을 지나치다가 듣고 와서 전하니 이성계는 바로 두 스님을 만나 뵙고 그 명당자리를 가르쳐 달라고 해서 아버지를 장사지내 모시었으니

그 곳이 바로 함흥의 정릉(定陵)이다. 이렇게 하여 이성계는 무학대사에게서 명당을 얻어 쓰고 그 뒤에  꿈을 해몽해주는 말씀을 듣고

왕이 될 예시를  받았다. 그리고 공덕을 쌓기 위해 석왕사라는 절을 짓고 오백나한을 모시기 위해 웅진전을 지었다.


그때 마침 함경도 길주에 있는 광적사가 병화(兵火)로 인하여 폐사가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방치 되어 있는 대장경 일부와 오백나한 상을

석왕사로 옮겨 모시기를 서원하고, 이 오백나한상을 길주에서 원산까지는 배로 모시고 난 뒤 원산으로부터 석왕사까지는 이성계가 직접 돌로 조성된

나한상을 한 분씩 한 분씩 정성껏  498분을 석왕사로 모시고 마지막으로 두 분 남은 나한상을 힘들고 지쳐서 한꺼번에 두 분을 모시었다.

다음날 아침에 기도를 모시고 나서 살펴보니 맨 나중에 모셔온 존상 한분이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를 않는 것이었다.

이성계가 놀라 사방을 두루 찾아보았으나 어느 곳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포기를 하고 잠이 들었는데

그날 밤 꿈에 사라진 존상이 나타나서 말하였다.

『그대가 그만큼 신심이 발하여 나한상을 하나씩 업어 봉안하더니 나만은 따로 업어가지 않고 덧붙여 업어가니 어찌 그렇게 성의가 부족할꼬.

나는 그런 푸 대접 받기 싫어 묘향산 비로암에 가 있을 테니 그리 알게』 깜짝 놀라 깨어보니 꿈이었다.

이성계가 곧 바로 묘향산 비로암으로 사람을 보내어 알아보니 그전에 없던 나한상이 한분 계시다는 것이 었다.

이성계는 크게 뉘우치고 비로암으로 가서 정중하게 참회하고 모셔 왔으나 그 이튿날 사라져버렸다.

그렇게 해서 다시 모셔 오기를 몇 번을 하였으나 소용이 없어 결국엔 명패만 모시게 되었다.

이로서 석왕사 응진전에 오백 나한가운데 한 분의 나한이 모자라는 것은 이러한 연유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성계는 오백 나한을 모셔 놓고 삼 년에 걸쳐 오백성재(五百聖齋)정성껏 올리니 과연 뒤에 조선을 건국(建國)하고 임금의 자리에 올랐다.



나한전과 반송 사이에 살짝 고개내민 코끼리상





오백나한전 현판의 글씨는 예서체라고 합니다.







설법전에서 바라본 600년된 반송나무



仙鶴(선학)이 들은 玄壁(현벽) 스님의 법문

현벽(玄壁) 스님은 중국 소주(蘇州) 오현(吳縣) 출신의 스님이다. 스님은 유수사(流水寺)에서 사방 넉 자밖에 되지 않는 작은 편상에서

한 번도 눕거나 기대는 일 없이 꼭 앉아서 법화경을 강설했다.

그가 경을 강설하자 사나운 짐승, 독한 벌레, 요망한 귀신, 악한 도둑 따위가 나타나서 여러 번 스님을 해치려 하엿으나,

스님은 조금도 대항하거나 미워하지 않고 태연하였으므로 아무도 그를 해치지 못하였다고 한다.


법화경을 스무 번이나 강설하였으므로 온 고을 사람들이 다 가서 들었는데,  하루는 홀연히 학 두 마리가 날아와서 스님 앞에 앉았다.

그리고 옆에 있는 못으로 가서 물을 떠다가 땅에 뿌리고 석가모니 옆 성승(聖僧)자리로 가 똑 바로 서서

까딱도 하지 않고 스님의 설법을 다 들은 다음에야 날아갔다.


학은 이렇게 1년을 하루도 쉬지 않고 법사의 설법을 열심히 들었다.

뿐만 아니라 법회가 끝난 다음 법사가 춤을 추라 하면 날개 죽지로 너울너울 춤을 추었는데,

발을 들썩 거리며 머리를 쳐들었다 수그렸다 하였다. 보는 사람들은 모두 신기해서 그저 감탄할 따름이었다.

나중에 현벽 스님이 어디서 어떻게 세상을 떠났는지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혹자는 학이 되어 하늘로 날아가 버렸다는 말도 하였다.



구정선사이야기 벽화

아주 옛날 비단행상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효성이 지극한 청년이 있었다.

어느 날 비단 짐을 짊어지고 강원도 대관령 고개를 넘어가다가 고갯마루에서 잠시 쉬고 잇던 그는 이상한 노스님을 만나게 되었다.

누더기를 입은 노스님은 길 옆 술숲에 서서, 한참 동안 꼼짝을 않는것이었다. 청년은 궁금했다.

"왜 저렇게 서 있을까?  소변을 보는 것도 아니고, 거참 이상한 노릇이네." 한참을 바라보던 청년은 궁금증을 견디지 못해, 노스님 곁으로 다가갔다.

"스님!  아까부터 여기서 무얼하고 계십니까?"   노스님은 청년이 재차 묻자, 얼굴에 자비로운 미소를 띠며 말을 했다.

"잠시 중생들에게 공양을 시키고 있는 중이라네."   "이렇게 꼼짝도 않고 서 있기만 한데,

중생들에게 공양을 시키다니 도무지 알 수가 없는 말이로군요. 어떤 중생들에게 무슨 공양을 베푸십니까?"

"옷 속에 잇는 이와 벼룩에게 피를 먹이고 있네."     "그런데 왜 그렇게 꼼짝도 않고 서 계십니까?"

"내가 움직이면 이나 벼룩이 피를 빨아먹는 데 불편할 것이 아닌가." 스님의 말을 들은 청년은 큰 감동을 받았다.


쳥년은 비단장수를 그만두고, 스님을 따라가 제자가 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청년은 스님의 뒤를 따라 오대산 동대 관음암에 도착하였다.

스님은 청년을 돌아보며 말했다.    "그대는 어인 일로 날 다라왔는고?"   "저는 비단을 팔아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비단장수입니다.

오늘 스님의 인자하신 용모와 자비행을 보고, 문득 저도 수도(修道)하고 싶은 생각이 일어나서 이렇게 쫓아왔습니다. 제발 제자로 받아주십시오."

청년은 간곡히 청햇다.  "네가 수도승이 되겠단 말이지, 그렇다면 시키는대로 무슨 일이든지 다 할 수 있겠느냐?"     "예"

쳥년의 결심이 굳은 것을 확인한 노스님은 그의 출가를 허락했다.


다음날 아침, 스님은 새로 들어온 행자(비단장수 청년)을 가까이 불렀다.  "오늘 중으로 부엌에 있는 저 큰 가마솥을 옮겨 새로 걸도록 해라."

청년은 흙을 파다 짚을 섞어 이긴 후 솥을 새로 걸었다.  한 낮이 기울어서야 일이 끝났다.

"스님, 솥을 다 걸었습니다."     "오냐, 알았다."     스님을 점검을 하시려는 듯 부엌에 들어가셨다.   

  "걸긴 잘 걸었다만, 이 아궁이엔 이 솥이 너무 커서 별로 필요치 않을 것 같으니, 저쪽 아궁이로 옮겨 걸도록해라."고 말씀하셨다.

청년은 한마디 불평도 없이 스님이 시킨 대로 솥을 떼어 옆 아궁이에 다시 걸기 시작했다.


솥을 다 걸고 부뚜막을 곱게 매흙칠 하고 있는데,  노스님이 기척도 없이 부엌에 나타나셨다.

"이 녀석아, 이걸 솥이라고 걸어 놓은 거야, 한쪽으로 틀어졌으니 다시 걸도록 하여라."

노스님은 짚고 있던 석장으로 솥을 밀어 내려 앉혀 놓았다. 청년이 보기엔 전혀 틀어진 곳이 없었지만,

스님께서 다시 하라는 분부를 받았으므로,  그는 불평 한마디 없이 새로 솥을 걸었다. 그렇게 솥을 옮겨 걸고 허물어 다시 걸기를 9번을 반복했다.

드디어 노스님 청년의 굳은 결심과 구도심을 인정했다. 그러고는 솥을 9번 고쳐 걸었다는 뜻에서, 구정(九鼎)이란 법명을 내렸다.


법명을 받은 구정 스님은 그 길로 고향의 어머님께 달려가 자초지종을 말씀드렸다.

아들의 이야기를 다 들은 노모는 아들의 손을 꼭 잡고는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큰 스님이 되라고 격겨했다.

그 길로 집을 떠나 산으로 돌아온 구정 스님은 뒷날 크게 명성을 떨친 구정선사가 되었고, 

스님의 수행은 오늘에도 입산 출가자들의 귀감이 되고 있다.



법을 받는 육조(六祖) 慧能大師(혜능대사)

혜능대사(慧能大師)는 중국 당나라 때의 사람으로 속성(俗姓)은 노(盧)가였으며 어려서 부친을 여의고 땔나무를 팔아 홀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다.

하루는 시장에 나무를 팔러 나갔다가 한 손님이 금강경 외우는 소리를 듣고 홀연히 마음이 밝아졌다.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  마땅히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낼지니라.".


혜능은 어머니를 하직하고 손님이 일러주는 데로 황매산의 홍인대사를 찾아뵙고 예배드렸다.  “너는 어디에서 왔으며 나에게 무엇을 구하려고 하느냐?”

"저는 영남 신주사람인데 오직 부처되는 법을 구하고자 할 뿐입니다."     “영남사람은 오랑캐인데 어떻게 부처가 될 수 있단 말이냐?”

“사람에게는 비록 남과 북이 있으나 불성에는 남과 북이 없습니다.   오랑캐인 저와 스님은 다르지만 부처의 성품에 무슨 차별이 있겠습니까?”

홍인대사는 법기(法器)임을 곧 알아보았지만 대중을 따라 일하게 하였다.

노 행자로 불린 혜능은 후원에서 장작을 패고 힘이 부족하여 돌을 짊어지고  방아를 찧었다.


여덟달이 지난 어느 날 홍인대사는 자신의 의발(衣鉢)을 전할 사람을 찾기 위하여 제자들에게 각자 깨달은 진리를 게송으로 지어내라고 하였다.

그때에 대중들로 부터 인정을 받고 있던 신수는 고심 끝에 게송을 지어 대중이 잘 다니는 곳의 벽에 이름을 밝히지 않고 붙여 놓았다.

身是菩提樹(신시보리수)   몸은 깨달음의 나무요.       心如明鏡臺(심여명경대)   마음은 밝은 거울과 같네.

時時勤拂拭(시시근불식)   부지런히 털고 닦아,        勿使惹塵埃(물사약진애)   티끌이 없도록 하리.


홍인대사는 신수가 지은 것임을 바로 알아보고, 그에게 아직 깨달음에 이르지 못했으니 더욱 수행에 힘쓰라고 하였다.

방아를 찧던 혜능은 한 사미승이 이 게송 외우는 소리를 듣고 나서 자기가 부르는 것을 그 게송 옆에 써 달라고 부탁하였다.


菩提本無樹(보리본무수)   깨달음에는 본래 나무가 없고    明鏡亦非臺(명경역비대)   거울 또한 받침대가 없네

本來一無物(본래일무물)   본래 한 물건도 없거늘         何處惹塵埃(하처야진애)   어느 곳에 티끌이 일어나리요.

신수보다 탁월한 게송을 보고 대중들은 감탄하였다.


홍인대사가 이를 보고는 주변의 해(害)가 있을까 두려워 신발로 문질러 지워버렸다.  “이것 또한 아직 깨닫지 못한 글이니 모두들 돌아가거라.”

그리고는 은밀히 방앗간으로 혜능을 찾아가서 말하였다. “쌀은 다 찧었느냐?” (공부는 다 되었는가 하는 뜻)

“이미 찧은 지는 오래 되었으나 키질을 못하였습니다.” (공부는 다 되었으나 아직 인가를 못 받았다는 뜻)

홍인대사는 지팡이로 방아를 세 번 치고는 말없이 돌아갔다.

혜능이 그 뜻을 알아차리고 그날 밤 삼경에 스승을 찾아뵈었다. 오조홍인대사는 병풍으로 가려놓고 금강경을 설법하신 후,

달마대사로부터 받은 가사(袈裟)와 발우(鉢盂)를 전하며 제 육조로 인가하였다.

그리하여 육조 혜능대사는 중국에 선종(禪宗)을 크게 일으키며 76세로 입적할 때까지 조계산을 중심으로 교화활동을 하였다.



조리와 속리이야기<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의 전생이야기>








石造彌勒佛立像(석조미륵불입상)

미륵불은 미래불로 전각 밖에 따로 모시는 경우가 대부분이며, 시무외인 또는 여원인 등의 수인을 취하고 있습니다.

미륵불은 보살의 몸으로 도솔천에서 머물다가 미래에 석가모니불에 이어 중생을 구제한다는 미래의 부처



石造彌勒佛立像(석조미륵불입상)







설법전에서 바라본 석조이륵불입상



三聖閣(삼성각)

산신(山神) · 칠성(七星) · 독성(獨聖)님을 모신 곳으로 사찰에 따라 각각 따로 모시기도 합니다.

이러한 삼성각은 우리나라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독특한 전각으로서

불교 밖에서 하근(下根)중생들을 위해 유입된 신들을 모셨기 때문에 전(殿)이라 하지 않고 각(閣)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三聖閣(삼성각)

삼성각은 정면 1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내부에는 1985년에 조성한 산신탱화, 칠성탱화, 독성탱화가 모셔져 있다.



七星撑(칠성탱)

일반적으로 칠성은 북두칠성을 말하는데 별나라의 주군(主君)으로 인간의 수명을 담당한다고 하며



치정광여래불을 중앙으로 좌우보처인 일광 월광보살과 칠불 그리고 7명의 칠원성군이 있다.



중앙에 계신 熾盛光如來佛 좌우보처로 日光 · 月光菩薩이 서 계시다.

치성광여래 부처님으로 천체(하늘의 별을 통칭)를 주관하시는 분이십니다.(칠성당에 모셔져 있음 칠성불이라고도 함)

치성광여래께서 손에 들고 계시는 것은 금륜이며 그것은 곧 전륜성왕이 갖출 7가지 보배가운데 하나인 것입니다.

금륜은 윤보라고도 하며 전륜성왕이 굴리면 여러 작은 왕들이 전륜성왕 앞에 조아릴 정도로 전륜성왕의 위엄을 상징하는 것인데

이것을 치성광여래께서 손에 가지고 계심은 부처님의 위엄이 전륜성왕과 같기 때문입니다.



山神檀(산신단)

산신은 일반적으로 불교와 관계가 없는 토착신으로서, 불교가 이 땅에 뿌리내리는 토착화 과정에서 호법신중(護法神衆)으로 불교에 흡수되었습니다.



獨聖檀(독성단)

나반존자(那畔尊者)라고도 부르는 독성은 십이인연의 이치를 홀로 깨달아서 성인의 위치에 올라 말세 중생에게 복을 내린다고 합니다.



삼성각 옆에 있는 삼층석탑


삼성각 옆에 바위 위에 모셔져 있는 소형의 삼층석탑이다. 작지만 작아보이지 않는 석탑이다.



아들을 찾기 위해 발을 씻어 주는 良介和尙(양개화상)의 어머니

동산(洞山) 양개화상(良介和尙, 807년~869년)은 중국 당나라의 고승이며 조동종(曹洞宗)의 개조(開祖)이다.

양개화상의 어머니는 일찍이 아들 셋을 낳았는데 둘째 아들인 양개화상이 중이 되겠다고 어려서 출가를 한 것이다.

남편마저 일찍 죽자 출가한 아들을 보고 싶은 어머니는 매일 눈물로 세월을 보냈다.

몇 년을 눈물로 지내다 보니 결국 양쪽 눈마저 멀어 버렸다. 그러나 단 한번이라도 아들 양개를 만나고 싶은 마음만은 도저히 버릴 수 가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많이 왕래하는 강가 길목을 지나가는 모든 스님들의 발을 씻어 주기로 했다.

양개의 왼발은 발가락이 6개였기 때문에 눈이 안 보여도 왼발만 만져 보면 아들을 쉽게 찾을 수 잇으리라 생각한 것이다.

몇 년이 지나갔다. 그러나 기다리는 아들을 만날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허름한 옷을 입은 한 스님이 나타났다.

양개의 어머니는 매일 하던대로 그 스님의 발을 씻었다.

그런데 그 스님은 오른발만 내밀고 왼발은 상처가 있어서 물에 넣을 수가 없다고 하며 끝까지 내밀지 않았다. 그리고는 어디론가 가 버렸다.

옆에서 이광경을 보던 사람들이 "바로 그 사람이 아들인 듯한데 왜 잡지 않았는가?" 하고 물었다.

그러자 "나도 그가 내 아들인 줄 압니다. 그러나 아들의 결심이 오로지 불도를 닦고 해탈하여 모든 중생을 구제하는 큰 뜻을 품고 있음을 안 이상,

사사로운 모정으로 그를 잡을 수 없어서 그냥 보낸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한편 양개화상도 그가 어머니인 줄 알았지만 마음을 거두어 道를 생각하고 뜻을 거두고 되돌아간 것이다.

눈앞의 무상한 모자의 정보다는 도(道)를 닦아서 대오 해탈의 경지에 올라, 어머니뿐만이 아니라 모든 중생을 고해에서 구해내고

불과(佛果)에 오르게 하는 것이 더 큰 효도라고 생각한 것이다. 



대웅전 옆으로 작은 삼층석탑이 있다.  작지만 웬지 오래된 느낌이 든다.



삼층석탑



梵鐘閣(범종각)

범종각에는 범종을 비롯해 법고, 목어, 운판 등 불교의 법전사물을 함께 설치하기도 한다.

이들은 중생의 교화를 상징하는 불구로 예불의식 때쓰인다.



梵鐘閣(범종각)

이번 초파일 행사에 쓰시려나 다시 재정비하기 위해 이곳에 있는 두루미(학)이겠다.



설법전 밑 종무실 계시판에 붙어있는 글들이다.



마음에 와닿는 글... 그러기에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하는 글이다.



    

나옹선사의 글



용굴암 가는 길에 놓여있는 이정표와 표지석  용굴암 명성황후가 칠일간 기도올린 곳 이란다.



등산로 입구에서 본 학림사





浮屠(부도)

학림사가는 길목에 약사전 가기 직전에 있는 대추모양의 부도 2기이다. 부도 뒤편으로 쓰레기들이 있는것으로 보아 관리가 안되는 것으로 보인다.

이 부도는 조선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원래는 이곳에 있던 것이 아니었을 것이란다.

네모난 기단(基壇) 위에 있는 이들 부도의 주인은 아쉽게도 누군지 알 수는 없으나 전형적인 조선시대 양식을 따르고 있으며,

그 중 1기에 "상궁연화(尙宮蓮華)" 라는 명문이 흐리게 남아 있어 학림사와 인연있던 궁궐의 상궁의 묘탑(墓塔)임을 알게 해준다.

통상적으로 부도는 스님들의 유골이나 사리를 안치하는 것으로 알고 있으나

상궁연화(尙宮蓮華)라는 글씨 덕분에 그 부도의 주인이 상궁(尙宮)임을 알 수 있으며,

학림사 스님 말씀에 의하면 옛날 많은 상궁들이 생을 마치게 되면 바로 학림사 밑에 위치한 화장터에서 화장을 했다고 합니다.



대추모양의 부도 2기이다. 부도의 뒷모습

그 중 1기에 "상궁연화(尙宮蓮華)" 라는 명문이 흐리게 남아 있어 학림사와 인연있던 궁궐의 상궁의 묘탑(墓塔)임을 알게 해준다.

학림사 스님 말씀에 의하면 옛날 많은 상궁들이 생을 마치게 되면 바로 학림사 밑에 위치한 화장터에서 화장을 했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