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남북도 = 心 산사 길없는길

전북 모악산 대원사

백련암 2017. 9. 13. 13:25

전북 모악산 대원사


대한불교 조계종 대원사 연혁

대원사(완주군 구이면 원기리 997번지)는 삼국유사 권제3 (보장봉로 보덕이암)조에

360년(백제 의자왕 20년)에 열반종 개산조 보덕스님의 제자 대원, 일승, 심정 등의 세분 고승께서 대원사를 창건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1130년(인종8년) 장엄스님(1090년~1141년)이 중창하고 이어서 1374년(공민왕23)에 나옹 혜근스님(1320~1141)이 중창하였으며

고려 시대 예술적인 작품으로는 경이로운 용각부도탑(지방문화재71호)이 있다.

조선시대에 들어서 1415년(태종15년)에 중창 흔적의 기록이 있으며 그 뒤 1597년(선조 30년)의 정유재란 때 대부분 건물이 불타 없어졌으나.

1606년 (선조 39) 진묵스님(1562~1633) 다시 중창하였고 대웅전 삼존불 (지방 문화제215호)은 전형적인 조선후기양식을 반영한

중요한 예술적 가치의 불상으로 1670년대 보해선사의 맥을 이은 스님들의 작품이다.

그 후 1733년(영조9년)에 천조스님이 중창하였고, 1886년 (고종23년)에는 금곡, 인오 스님과 함수 거사가 대웅전과 명부전을 개보수 하였으며

 칠성각을 새로 짓고, 내원암에 있던 염불당을 이곳으로 옮겨 오고 칠성탱화를 조성하였다.


근대에 들어와서 1943년 영호, 봉주, 덕운, 재묵 스님이 대웅전을 보수하고 경내의 석축을 쌓았고,

1951년 한국전쟁의 와중에서 빨치산 토벌을 이유로 작전상 염불당, 요사, 행랑 등 건물 3동을 소각하여 전소되었으며

1990년대에 월우, 진용스님이 산신각과  요사를 짓고 심검당과 범종각도 새로 지었다.

2001년 이후 명부전을 중건하고 대웅전 수미단과 어간문을 교체하고 고려시대 5층석탑을 해체 복원하였으며

향적당, 적묵당, 관촌 제 6탄약창 군법당을 신축하고 삼성각을 이전하여 응진전으로 개창하였으며

등반객을 위한 해우소를 건립하고 담장과 도량을 정비하여 제 10차 중창불사가 마무리되어 가고 있다.


대원사의 가람배치는 현문, 범종각, 명부전, 적묵당, 대웅전, 모악당, 웅진전, 심검당, 공양간과 향적당,

소적당, 부도전, 사리탑, 고려시대 5층 석탑, 조선시대 5층 석탑과 해우소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모악산 대원사는 동쪽 중턱 어머니 품속 같은 형태에 자리잡고 있으며 천하대복지 최길상 명당으로

어머니 절, 효의절, 발원을 이루는 절로 전국 각지에서 예를 갖추고 찾는 이가 끊이지 않는 창건 1350년의 유서깊은 기도처이며

매년 1월1일 (촛불기원 해맞이 타종제)가 열리고 4월 둘째 주 일요일에 열리는 (모악산진달래 화전축제)는

국민토종축제로 승화되어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다.



모악산 표지석



고은시인의 모악산 이란 시를 새겨 놓은 詩碑(시비)



전라북도 도립공원과 주변, 인근 안내도



일주문아닌 일주문역할을 하는 대원사 후문

모악산 정상을 가려면 대원사를 참배하고 이 곳으로 나가 오르면 된다.



일주문아닌 일주문역할을 하는 대원사 후문



대원사 경내

범종각, 그 옆으로 명부전이 있고 오층석탑도 함께있다.

아이들과 함께 모악산을 오르려 하였으나 전날 몸이 안 좋았던 관계로 다리에 힘이 빠져 같이 오르지는 못하고

 아이들이 산에 갔다 올 때까지 난 우리강아지와 이곳에 앉아서 기다리기로 하고 아이들만 오려 보냈다.



종각과 명부전



절 뒤에 있는 오층석탑에서 내려다 본 종각의 모습



대원사 범종각



대원사 범종



경내에 있는 오층석탑  석탑 주변에는 배롱나무 꽃이 만개하고 있어 더욱 운치가 있어 보인다.




대원사에는 석가여래의 화신이라 일컬어지는 진묵 스님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들이 전하고 있다.

초의의순(草依意恂) 스님이 지은 『진묵조사유적고』에 보면 당시까지 전해지던 진묵스님의 이적(異蹟) 18가지가 수록되어 있다.

이는 단순히 사람들을 놀라게 하려는 신통술이 아니라 불도(佛道)를 깨우치지 못한 대중들에게 진리를 깨닫게 하려는 스님의 방편이었다.


다음의 두 이야기는 단편적이기는 하지만 진묵스님이 대원사에 머무를 때의 이러한 일화를 전하고 있다.


국수로 변한 바늘

진묵대사가 사미승이던 어느 무렵에 창원의 마상포(馬上浦)를 자주 지나가게 되었다.

이때 한 처녀가 스님을 훔쳐보며 자신도 모르게 사랑을 키워왔으나 이루어질 수 없음을 스스로 깨닫고, 아무에게도 발설하지 않은 채

홀로 내생을 기약하며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후에 이 처녀는 환생을 하여 기춘(奇春)이라는 이름의 남자로 태어나게 되었는데,

 전생의 원에 따라 전주 대원사(大元寺)에서 진묵대사를 다시 만날 수 있었다.

대사는 기춘이라는 아이를 시동으로 삼았는데, 신심이 지극하고 하는 일마다 영특하여 애지중지하며 지내게 되었다.

그런데 대사가 기춘을 편애한다는 말이 떠돌면서 대중들의 비난거리가 되고 말았다.

대사는 그러한 자신의 행동이 이락삼매행(離樂三昧行)임을 보여 주기 위해,

어느날 기춘을 시켜 국수로 대중공양을 하겠다는 것을 사중에 알렸다.

공양시간이 되어 사찰의 대중들이 모여들었지만, 공양간에서는 국수를 삶는 기척이 전혀 없었다.

이윽고 모든 대중들이 자리를 잡자 대사는 기춘에게 여러 개의 바늘을 주면서,

자신을 포함하여 그곳에 모인 모든 사람들의 발우에 바늘 한 개씩을 넣어 주도록 하였다.

발우 속의 바늘을 쳐다보며 영문을 몰라 하는 대중들에게 대사는 한마디 던지며 젓가락을 들었다.

“자, 이제 국수공양들 하시지요.”

어느새 대사의 발우에는 바늘이 가는 국수로 변해서 가득하였으나 다른 대중들의 발우에는 여전히 한 개의 바늘만 남아 있었다.



하대석에 부처님이 모셔져 있는 사사자 오층석탑










大雄殿(대웅전)



大院寺木造三世佛坐像(대원사목조삼세불좌상)  :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215호      시대 =  조선

완주 대원사 목조삼세불좌상(完州 大院寺 木造三世佛坐像)은 전라북도 완주군 대원사에 있는 불상이다.

2008년 8월 1일 전라북도의 유형문화재 제215호로 지정되었다.


이 불상은 석가모니불상과 아미타불상, 약사불상으로 이루어진 삼세불상으로 현재 모악산 대원사의 대웅전에 주불로 봉안되어 있다.

중앙의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왼쪽(향우)에는 약사불, 오른쪽(향좌)에는 아미타불이 봉안되어 있는데, 坐高는 116~130cm에 이른다.

 세 불상 모두 비교적 보존상태는 양호한 편이다.


삼세불이란 =  원래 과거, 현재, 미래를 상징하는 세 불상을 함께 일컫는 개념으로 인도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고

중국에서는 불상 유입 초기부터 유행하여 이미 북위시대의 운강석굴 등에서 보이기 시작하지만

초기에는 삼세불에 명확한 부처의 이름이 정해져 있지는 않았다.

그러나 6세기에 이르러 노사나불ㆍ미륵불ㆍ아미타불로 구성된 삼세불이 나타나고 9세기에도 이러한 전통이 이어지다가

요대, 금대에 이르러 연등불ㆍ석가불ㆍ미륵불삼세불, 남송대에 비로자나불ㆍ아미타불ㆍ약사불의 삼세불,

원대에 석가불ㆍ약사불ㆍ아미타불로 구성된 삼세불이 유행하였다.

삼세불의 전통은 우리나라에도 전해져 고려 후기에는 석가불ㆍ미륵불ㆍ아미타불로 구성된 삼세불이 조성되었으며

(금강산 삼불암 마애삼세불입상), 조선시대에 이르면 석가불ㆍ약사불ㆍ아미타불로 구성된 삼세불상이 크게 유행하였다.

대원사 불상은 조선후기에 크게 유행했던 석가불ㆍ아미타불ㆍ약사불로 구성된 삼세불상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세 불상은 각기 수인만 다를 뿐 조각수법과 크기는 물론 상호 등이 서로 유사한 특징을 보여준다.

중앙의 석가모니불은 높이 130cm로서 좌우의 두 불상에 비하여 약 10여cm 가량 크지만 거의 비슷한 규모이다.

자세는 고개를 약간 숙였을 뿐 허리를 곧게 세우고 정면을 향하여 당당하게 결가부좌하였다.


얼굴은 이마부분이 각지게 표현되어 강직한 느낌을 주지만 턱 부분에 살이 많으면서도 둥글게 표현되어 부드러운 느낌을 준다.

여기에 오똑하면서도 도톰한 코와 미소를 띤 듯한 입술에 둥글면서도 군살을 두툼하게 표현한 턱 등은 양감이 풍부하여 부드러운 느낌을 준다.

螺髮(라발)의 머리에는 반원형의 중간계주(中間髻珠)와 원통형의 정상계주(頂上髻珠)가 표현되어 있으며 목에는 삼도가 뚜렷하다.

이러한 불상의 특징은 1635년 불갑사 대웅전 목조삼세불좌상, 1651년 신흥사 극락보전 아미타불상, 1656년 송광사 석가여래좌상,

고창 문수사 삼세불상 등 17세기 중반경의 불상과 유사한 특징을 보여주는 것이며,

특히 17세기 전․ 중반경 호남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조각승들의 특징적인 형태라 할 수 있다.


상체는 어깨가 둥글면서도 다소 살이 찐 듯한 모습이다. 하체는 무릎 폭이 넓어 안정된 좌세를 취하고 있는데,

착의법은 우견편단으로 입은 뒤 오른쪽 어깨에 대의 자락을 살짝 걸친 형태이며,

오른쪽의 대의 아래 옷자락을 넓게 U자형으로 왼쪽 내의 속으로 끼워 넣었다.

가슴에는 넓게 군의와 그것을 묶은 의대가 표현되었는데  군의의 윗부분이 지그재그를 이루며 수평을 이루고 있다.

수인은 오른손은 결가부좌한 무릎 위에 대어 항마촉지인을 취하고 있으며 왼손은 왼쪽무릎 위에 올려 엄지와 중지를 잡고 있다.

안정된 모습으로 결가부좌한 무릎 위로는 길게 대의자락이 흘러내리고 있는데,

양 무릎에는 가로 주름을 형성하고 중앙 부분에는 대의자락이 마치 나뭇잎처럼 넓게 펴져 내렸다.


좌우에 봉안된 아미타불과 약사불은 착의법과 수인이 약간 다를 뿐 석가모니불과 거의 유사한 양식을 띄고 있다.

석가모니가 우견편단의 착의법을 보여주고 있는 반면,

약사불과 아미타불은 오른쪽 팔을 돌아 내려온 대의자락을 복부 중간 부분에서 왼쪽 대의 아래로 끼워 넣은 형식의 통견식 착의법을 보여준다.

이러한 착의법은 조선후기 불상의 전형적인 착의법 중 하나로 17세기 불상에서도 흔히 볼 수 있다.

또한 수인은 두 불상이 서로 대칭적인 모습을 취하고 있어, 아미타불상은 오른손을 어깨높이로 올려 엄지와 중지를 맞대고,

왼손은 무릎 위에 대어 엄지와 중지를 맞댄 모습이며, 약사불은 오른손과 왼손의 형태가 반대로 되어 있다.


삼세불상은 17세기 불상의 특징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특히 석가모니의 오른쪽 어깨 위에 걸쳐진 대의 옷자락이 둥글게 아래로 쳐져 내려오다가  다시 올라가 오른쪽 팔꿈치 뒤로 넘겨진 모습은

1640년대 영철(靈哲) 등이 조성한 부안 개암사 대웅전 목조삼세불좌상과 친연성이 엿보인다.

또 양쪽 눈썹에서 코로 이어지는 선이 분명하고 코가 오똑한 점 등은 1649년 영철(靈哲) 등이 조성한 화계사 지장보살상 및

1652년 無染(무염) 등이 조성한 완주 정수사 목조 아미타삼존불상 중 아미타불상과 유사하다.

이외에 좌우 무릎에 가로 주름이 표현되고 중앙부분에 꽃잎처럼 옷자락을 넓게 펴지게 한 기법 등은

1654년 무염(無染) 등이 조성한 영광 불갑사 목조지장보살좌상과 매우 흡사하다.

<백과사전에서>



神衆檀(신중단)



문수스님 진영


충격! 문수스님 '소신공양' 가부좌 그대로


가부좌 '등신불' 모습 그대로           현대판 '등신불'이다.


지난달 31일 '소신공양'으로 '4대강사업'을 거부한 문수스님을 두고 하는 말이다.

'소신공양'은 부처에게 공양하기 위해 말 그대로 자신의 몸에 불을 사르는 것이다.

더군다나 공개된 문수스님의 모습은 처절하지만 흐트러지지 않은 모습에서 당시 절절한 심경을 느낄 수 있다.

게다가 휘발유를 마셔 몸 속까지 태운 것으로 보인다고 경찰은 밝혔다.


문수스님의 도반인 각운스님은 마지막 모습을 보고 "마지막까지 가부좌를 유지하려고 노력한 듯하다.

손을 부처님 모양으로 올리고, 자세를 바르게 했다. 얼굴에 미소까지 머금고 있었다"고 전했다.

인터넷언론 '민중의 소리'를 통해 공개된 모습은 지난 2일 경북 군위군 삼성병원 영안실에서 염을 하는 모습을 가족이 휴대전화로 찍은 것이다.

하지만 그 모습을 지면에 공개하기에는 너무 충격적이다.  주변 사람들의 전언은 문수스님의 결단이 즉흥적이 아니었음을 말해준다.


지보사 총무 견월스님은 "지난 3년 동안 두문불출하며 일종식(1일1식)으로 면벽 수련했다"고 말했고,

각운스님은 "일종식으로 속을 비웠고 휘발유를 마셔 내장까지 타들어가게 했다"고 밝혔다.

경찰 역시 "사람 몸 속까지 전부 타들어간 경우는 처음이고, 도인이 아니면 불가능하다"고 말할 정도다.


한편 4일 소신공양으로 입적한 문수스님의 영결식과 다비식이 경북 군위군 지보사에서 봉행됐다.

6일 지보사에서 초재를 시작으로 은해사와 해인사, 월정사, 개운사, 동화사를 거쳐 7월18일 해인사에서 스님의 49재를 회향할 예정이다.


스포츠 경향     강석봉기자    입력 : 2010.06.04 18:21:42,      수정 : 2010.06.04 18:2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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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5월 당시 이명박 정부의 4대강 사업을 반대하며 경북 군위군 위천 제방에서 소신공양(燒身供養)한 문수 스님.

“문수 스님은 ‘4대강 사업을 즉각 중지ㆍ폐기하고 부정부패를 척결하라. 부자가 아닌 서민과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을 위하라’는 내용의 유서를 남기고

소신공양 했다.”면서 “스님의 소신공양은 뭇 생명을 구하고자하는 크나큰 서원이 담긴, 이 시대의 가장 거룩하고 숭고한 선택이었다.”


문수 스님은 2010년 5월 31일 오후 3시경 경북 군위읍 사직리 위천 제방에서 ‘이명박 정부의 4대강 개발 공사 반대’라는 유서를 남기고

온 몸에 휘발유를 뿌린 채 불을 붙여 소신했다.

스님은 소신 당시 손을 부처님 모습처럼 올리고, 자세를 가지런하게 했고 마지막 순간까지 얼굴에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고 전해졌다.



震默大祖師 之 眞影(진묵대조사지 진영)


조선 중기 고승인 진묵조사 일옥(1562~1633)은 만경헌 불거촌에서 태어났다. 7세때 전주의 봉서사에서 출가한 그는

불경을 한 번 읽으면 곧 암송하고 내용을 통달하였으므로 따로 스승을 두지 않았다고 한다.

특히 (능엄경)을 즐겨 읽었고 좌선삼매에 빠져 끼니를 잊는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으며, 선정의 높은 경지에서 유유자적하시며 중생을 제도 하였다.


법력이 높았던 그를 유학자들은 '비록 승려이지만 유림의 행동을 하였다'는 평을 하며 진도인이라 부른 것 처럼 폭넓게 학문에 전념하였다.

(성리대전)을 빌려 동구 밖에 나가기 전에 다 외웠다거나 신이한 풍수지리학과 공중을 날아다녔다는 등의 기행, 이적으로 석가의 소화신으로 추앙받았다.

암울했던 시대에 대한 고뇌가 기인으로서의 진묵조사의 행적이었다. 선의 경지에서는 당대에 같이 살았던 서산대사와 버금가는 선지식이라 할 수 있다.



大院寺木造三世佛坐像(대원사목조삼세불좌상) 중 석가모니불



大院寺木造三世佛坐像(대원사목조삼세불좌상) 中 阿彌陀佛[아미타불]

착의법과 수인이 약간 다를 뿐 석가모니불과 거의 유사한 양식을 띄고 있다.

아미타불상은 오른손을 어깨높이로 올려 엄지와 중지를 맞대고, 왼손은 무릎 위에 대어 엄지와 중지를 맞댄 모습이다.



大院寺木造三世佛坐像(대원사목조삼세불좌상) 中 藥師如來佛[약사여래불]

착의법과 수인이 약간 다를 뿐 석가모니불과 거의 유사한 양식을 띄고 있다.    약사불은 오른손과 왼손의 형태가 아미타불의 반대로 되어 있다.



大雄殿 懸板(대웅전 현판)



羅漢殿(나한전)



석가모니불과 좌우 보처의 불사는 아직 마무리가 되지 않았다.



아난존자와 나한들



아난존자와 나한들



가섭존자와 나한들



가섭존자와 나한들





三聖閣(삼성각)



三聖閣 懸板(삼성각 현판)



七星幀(칠성탱화)



山神圖(산신도) 山神檀(산신단)



獨聖圖(독성도)



寂默堂(적묵당) = 스님이 기도하시는 곳 같다.



冥府殿(명부전)



지장보살과 좌우보처인 무독귀왕과 도명존자



시왕들



시왕들

백중기도로 인하여 일부가 위폐들로 가리워 졌다.



대원사 오층석탑

탑에 대한 내용이 없다.



오래된 탑 같은 데 탑에 대한 역사를 표시해 놓은 글들이 없다.



벗꽃필 때 오면 이 탑이 정말 예쁘고 멋있다 사진도 잘 받는다.



母岳堂(모악당)

대원사는 660년(백제 의자왕20년)에 창건 되었으며, 칠성각은 1886년(고종23년) 금곡스님외 두분이 새로이  지었다고 대원사 연혁에 기록되어 있더군요.

현재 칠성각은 현판이 모악당으로 되어 있으며 외부인의 출입을 못하게 하고 있더군요.


모악산 대원사입니다. 대원사는 신라 문무왕 10년(670)에 창건된 절로 조계종 금산사의 말사입니다.

대원사는 고구려에서 백제로 들어와 열반종을 보급한 보덕대사의 제자인 일승과 심정 그리고 대원스님이 지은 절이라고 합니다.

진묵도사도 머물러 수도했다는 대원사입니다.

대원사에는 많은 사상가나 철학자들이 방문한다고 합니다



母岳堂 懸板(모악당 현판)



母岳堂(모악당)



母岳堂(모악당)

모악당 문은 창호문이 아닌 비닐문이다. 세월의 흔적만 있다.



이 건물 뒤로 돌아가면 공양간과 요사채가 있다. 약15년 전에 이곳에서 하루밤 잔 적이있다.

당시에 지인과 함께 10여 명이 선원 선원장 스님과 함께 왔었다. 우연치 않게 그때 그 스님을 망월사에서 뵈었다.

그 후 간만에 왔는데 많이 변해있고 깨끗히 정리가 되어 있다. 당시에도 축제가 많았다.

화전축제, 어린이 그림축제, 사진축제 다양한 축제들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이 된다.



笑話堂(소화당)

기도도 접수받고, 스님이 이곳에서 그림도 그리기도 하시고...



笑話堂(소화당)



大院寺龍刻浮屠(대원사용각부도)  :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71호       시대 = 고려


부도는 승려의 무덤을 상징하여 그 유골이나 사리를 모시는 곳이다.

대원사 경내에는 동북쪽 4기와 계곡에 6기 등 총 10기의 부도가 있는데, 이 용각부도는 동북쪽에 있는 4기 중 3번째에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형태는 연꽃을 새긴 바닥돌 위에 배부른 원통모양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이다.

탑신은 맨 위에 구름을, 가운데에는 두 마리의 큰 용이 서로 휘어감으면서 여의주를 빼앗으려는 모습을,

맨 밑에는 연꽃을 새겨 장식하였다.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이 놓여 있는데 원래의 것이 아니다.

탑신 전체에 가득히 새긴 생동감 있는 조각수법으로 보아 고려시대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문화재청 사진 펌>

강아지와 기다리다 아들이 정상을 밟고 3시간만에 돌아와 그때서야 난 대웅전에 들어가 절(예불대참회)을하고 다른 전각을 돌며 절을하였다.

그리고 사진을 찍었는데 하도 재촉을 해 부도있는곳까지 가지를 못했다.

어디에 있는지 위치를 몰라 시간걸릴까봐 아쉽지만 그냥 내려왔다. 더구나 산타고 나서 배고프다해 밥먹일생각에 그냥내려온 것이다. 


震默大師浮屠(진묵대사부도)  :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08호


부도는 승려의 무덤을 상징하여 그 유골이나 사리를 모시는 곳이다.

이 부도는 봉서사내에 자리하고 있는 것으로, 조선시대의 승려인 진묵대사의 사리를 모시고 있다.

진묵대사는 이 절을 새단장한 후 이곳에 머물며 수행하다 일생을 마쳤다.


탑은 기단(基壇) 위로 둥근 탑신(塔身)을 올린 형태로 대부분의 부재가 8각을 이루고 있다. 2단으로 이루어진 기단은 대칭되는 구조를 하고 있으며,

 서로 맞닿는 곳에 각각 연꽃을 굵게 새겼다. 탑신의 몸돌은 아래·윗면이 약간 눌린 둥근 모습으로, 그 위로 뭉뚝한 지붕돌을 올리고 있다.

꼭대기에는 앙화(仰花;솟은 연꽃무늬 장식), 복발(覆鉢;엎어놓은 그릇모양 장식), 보주(寶珠;꽃봉오리 모양 장식)를 얹어 머리장식을 하고 있다.

각 부분의 양식과 장식이 형식적으로 흐르고 있는 전형적인 조선시대의 부도이다.

<문화재청 사진 펌>




사랑폭포와 사랑바위

먼 옛날 이곳 선녀폭포에서는 보름달이 뜨면 선녀들이 내려와 목욕을 즐기며, 수왕사 약수를 마시고, 모악산의 신선대에서 신선들과 어울리곤 하였는데,

어느 날 폭포곁을 지나던 나무꾼이 선녀들의 아리따운 자태에 넋을 잃고, 그 모습을 잊지 못해 병을 얻고 말았다.

선녀들의 모습을 한 번만 보고 죽는게 소원이었던 나무꾼은 보름달이 뜨자 폭포를 찾아와 선녀들을 지켜보던 중, 뜻밖에 한 선녀와 눈이 마주치게 되었다.

이들 두 남녀가 대원사 백자골 숲에서 사랑을 속삭이며 입 맞추는 순간 난데없이 뇌성벽력이 요란하게 울렸고 두 남녀는 점점 돌로 굳어지고 말았다.

돌이 된 두 남녀의 모습이 마치 떨어질 줄 모르고 열열한 사랑을 속삭이는 듯하다 해서 "사랑바위"라 부르며,

 여기에 지성을 드리면 사랑이 이루어진다고 전해진다.









金良順 善德碑(김양순 선덕비)


김양순 할머니는 1896년 전북 순창에서 태어나서 일제강점기에 숱한 참상을 경험하신 분입니다. 

젊은 시절, 모든 사람들을 잘 살게 해달라는 원력(願力)을 세우시고, 수행할 곳을 찾아서 전국을 주유하다가 37세에 모악산 아래 마을에 왔습니다.

이곳에 와서, 현재의 천일암 터에 자리를 잡고 초근목피하면서 수행을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면서 건물을 지어 ‘동곡사’라고 이름하였는데, 동곡東谷(동골)의 의미는 ‘모악산 선도의 계곡은 동쪽에 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입니다.

할머니는 영안이 열린 분으로 늘 세상 사람들이 모두 잘 살게 해달라고 기도하였습니다.

사람들이 동곡사에 시주한 쌀로 밥을 지어서 궁핍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고 돈도 주었습니다. 근처 마을 사람들은 춘궁기에 할머니의 도움을 받았고,

 6․25 전쟁 중에는 쫓기는 사람들을 숨겨 주었습니다. 또한 정신적 병으로 고생하는 많은 사람들을 고쳐 주기도 하였습니다.


할머니는 “모악산에서 3성 7현이 나온다. 마지막 성인이 출현하면 새로운 법이 세상에 알려질 것이고,

 전 세계에서 오색(五色) 인종이 모악산에 몰려들게 될 것이다.

그러면 민족통일이 이루어지고 인류평화가 이루어질 것이며, 앞으로 때가 되면 하늘에서 돌들이 날아와 성을 쌓고,

 황금빛 기와가 덮인 궁궐이 지어질것이다.”라는 예언을 자주하였다고 합니다.

천황바위에서 1,000일 수행 중에 ‘이 곳은 진인眞人이 날 터이니 이 터를 잘 지켜라’라는 내용의 메시지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 후 할머니는 숱한 어려움과 함께 동곡사가 철거 되려 할 때, 목숨을 걸고 동곡사를 지켰습니다.

<비문>


그리고 1980년(84세) 여름, 청년 이승헌 총장님이 수행을 위해 모악산 동곡사를 찾아옵니다. 김양순 할머니는 한 눈에 총장님의 뜻을 알고,

 수행에 매진할 수 있도록 극진한 정성으로 보필하였습니다. 할머니는 서기 1987년 음력2월28일, 91세의 나이로 입적하셨습니다.

 묘지는 천일암 가까운 곳에 있습니다.


김양순 할머니 선덕비는 일지 이승헌 총장님이 인근 지역의 사람들과 뜻을 모아 할머니의 선덕과 정성을 기리기 위해 모악산 입구에 세우신 비입니다.

모악산에 오르기 전에 김양순 할머니의 아름다운 마음과 뜻을 생각하면서 마음의 준비를 하시고 참배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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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각형으로 되어 있는 선덕비



저녁노을  돌아오면서 자동차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