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화이야기=고려외

국립중앙박물관 : 대고려 그 찬란한 도전 1

백련암 2019. 2. 25. 23:44

국립중앙박물관 :  대고려 그 찬란한 도전 =  2018. 11. 14일



고려의 수도 개경

고려는 해상(海商) 세력 출신이 세운 나라답게 바깥세상을 향해 열려 있었습니다.

태조 왕건은 즉위 이듬해인 919년 송악산 남쪽 개경으로 도읍을 옮겼습니다.『고려사』에 따르면 13세기 전반 개경에는 10만 가구가 살았다고 합니다.

1가구당 구성원이 5명이라고 쳐도 50만 명이어서, 비슷한 시기 이탈리아 피렌체의 인구가 10만 명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도시 규모와 번성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개경은 많은 외국인이 드나드는 국제도시였습니다. 송(宋) · 거란(遼[요]) · 여진(金[금])과의 외교관계에 따른

공무역으로 다양한 물산이 유통되었고, · 서 여진과 탐라에서도 사절단을 보내왔습니다.

이들은 고려의 국가행사인 팔관회에도 참여하여 고려 황제의 장수를 빌고 예물을 바쳤습니다. 

개경에서 30리 떨어진 예성강변의 벽란도에는 조운선, 장삿배등 끊임없이 배들이 드나들었습니다.

기록상으로만 현종(顯宗) 대 (1010-1031)부터 13세기 말 충렬왕 대까지 260여년간, 120여 회에 걸쳐 약 5천 명의 송나라 상인이 다녀갔습니다.

그들이 가져온 물품은 비단과 자기, 약재, 악기, 서화(서화), 차 등 고급 생활용품과 서적, 예술품 등으로 다양했습니다.

송 상인이 교역하던 동남아시아, 인도, 서아시아의 물건도 고려에 들어왔습니다.



「황비창천[煌丕昌天]」이 쓰인 거울 煌丕昌天」銘銅鏡(명동경)  : 시대 = 고려  재질 = 청동

파도가 출렁이는 먼 바다로 배 한척이 나아가고 있다.  배 안에 표현된 인물은 새로운 세계로 거침없이 향하던 고려인의 모습을 떠오르게 한다.

바다는 다양한 물건이 오가는 교류의 길이지만 예상할 수없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

사람들은 청동 거울을 바다에 던져 넣거나  거울을 사용해 제사를 지내며 무사히 항해를 마칠 수 있도록 기원했다.

"밝게 빛나는 창성한 하늘"을 의미하는 글씨「황비창천[煌丕昌天]」이 거울에 써 있다. 


◎모든 이를 환영하다. 국제무역항 碧瀾渡(벽란도)

다양한 물산과 사람이 드나들었던 고려의 관문, 벽란도에 도착했습니다. 예성강 하구에 위치한 벽란도는 수도 개경으로 들어가기 위한 외항입니다.

개경과 가깝고 수심이 깊어 배가 지나다니기 쉬워, 무역항으로 크게 발전했습니다.

"코리아(Corea)"라는 이름을 세계에 널리 알렸을 만큼 벽란도에는 많은 외국인이 방문했습니다.



유리주자 : 琉璃製注子(유리제주자) = 개성부근 출토   재질 = 유리

개성의 외항인 벽란도는 낯선 용모의 외국인들에게도 열려 있었다.「고려사」에는 현종대인 1024년과 1025년, 1040년에만 약 100명의 대식국(大食國),

즉 아라비아 상인이 방문했다고 한다.「쌍화점[雙花店]」 을 비롯한 고려 가요에 회회(回回)아비가 운영하는 가게가 있었으며,

귀화한 무슬림이 고위 관직을 역임한 기록도 전한다. 개성 부근에서 출토된 이 주자의 정확한 용도는 알 수 없지만,

형태는 이슬람교의 예배의식에서 성수(聖水)를 담는 병과도 유사하다.

고려 무덤에 부장된 수입품으로, 개경의 일상공간과 외부 세계와의 교류를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사례이다.



 



 유리주자 : 琉璃製注子(유리제주자)



 

청자 주머니 모양 주전자



청자 주머니 모양 주전자 :  중국 9-10세기(월주요 추정),  개성부근 출토

가죽 물통은 말을 타고 광활한 지역을 이동하는 북방민족이 사용하던 생활 용기이다.

이 주자는 유목생활을 한 거란족이 썼던 가죽 용기를 모방해 만든 것으로, 물이나 술과 같은 액체를 담을 때 사용하였다.

「고려사」에 요(遼) · 금(金) 같은 북방민족과의 도자 교류 기록은 거의 없지만, 고려시대 무덤 부장품을 통해 국제교류의 정황을 확인할 수 있다. 



고려의 중국어 교재 『老乞大[노걸대]』: 고려 16세기 인쇄

고려후기부터 역관(譯官)들이 사용한 중국어 학습 교재다. 고려상인 3명이 인삼 같은 고려의 특산물을 팔러 원나라 수도 대도(大都, 지금의 베이징)에 갔다가,

원나라 물건을 사서 다시 고려로 돌아오는 여정을 담았다. 음식주문이나 시장에서 흥정하는 법처럼 여행과 상업 활동에서 실제 겪을 만한 일들을 풍부하게 담고 있다.

이 『老乞大[노걸대]』는 조선시대 16세기에 다시 찍은 판본이다.


"예, 고려의 중국어 교재 『老乞大[노걸대]』



고려에 귀화한 劉志誠의 墓誌銘(유지성묘지명) :  시대 = 고려 1045년

중국 송(宋) 양주(楊州) 출신으로 고려에 귀화한 유지성(劉志誠, 972-1039)의 묘지명이다. 죽은 지6년 뒤에 다시 장사 지내면서 만든 이묘지명에는

장사랑(將仕郞), 조의태부(朝議太夫) 등의 관직명만 나열되어 있고 귀화한 시기나 동기는 기록하지 않았다.



      

福寧 宮主 王氏 墓誌銘(복녕궁주왕씨묘지명)  : 고려 1133년

고려 숙종(肅宗, 재위 1095- 1105)의 넷째 딸이자 예종(睿宗)의 친동생인 복녕궁주(福寧 宮主) 왕씨(王氏, 1096-1133)의 묘지명이다.

이 묘지명에서는 중국 송나라의 연호를 쓰면서도 복녕궁주을 "천자의 딸(天子之女[천자지여])" 이라고 표현하였다.

사대(事大) 외교의 형식 속에서도 스스로를 천자의 나라로 자부했음을 보여주는 예이다.


◎해동의 천자국, 大高麗(대고려)

고려는『고려사』나 금석문의 기록, 황실의 제도와 문서 양식, 관제, 팔관회와 같은 제천 의례에서 보듯 고려 중심의 독자적인 천하관을 지녔으며,

스스로 황제국가라 칭했습니다. 수도 개경을 "황도[皇都]"라 불렀고, 황제가 아니면 쓸 수없는 "天子"를 자칭했습니다.

고려 숙종(肅宗)의 딸 복녕궁주(福寧 宮主) 묘지명에서도 "천자의 딸"이라고 칭하는 등 강한 자주의식이 드러납니다.



김부식이 지은 삼국의 역사『三國史記[삼국사기]』 :  국보 제 322-1호,  시대 =  고려 1145년, 1573년 인쇄.  경주 玉山書院(옥산서원)

1145년(仁宗 23) 기부식(金富軾, 1075-1151)등이 고려 인종(인종, 재위 1122- 1146)의 명을 받아 편찬한 역사서이다.

군주의 정치 관련 기사인 본기(本紀), 신하들의 개인 전기인 열전(列傳), 통치제도나 문물 등을 분류한 지(志)와 연표로 구성된 기전체(紀傳體) 방식이다.

신라 · 고구려 · 백제 순으로 삼국의 정치 · 역사 · 경제 인물 등을 정리했다. 김부식은 역사적 사건을 기록하고 자신의 의견을 덧붙였는데,

현종(顯宗, 재위 1010-1031) 이후 고려의 왕이 신라왕실의 혈통을 이어받았음을 강조하여

고려 건국초기 지배층이 가졌던 고구려 게승 의식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開城全圖(개성전도)  :  시대 =  조선

개경을 그린 고려시대의 지도는 현존하지 않지만, 조선 후기에 제작한 여려 개성 지도에 고려시대 개경의 흔적이 남아 있다.

이 지도에는 개경을 둘러싼 외성(外城)과 내성(內城), 송악산과 그 아래 고려의 황궁터인 만월대(滿月臺), 고려 태조의 능인 현릉(顯陵)등이 표시되어 있다.

중요항구였던 벽란도도 예성강(禮成江)가에 표시되어 있다.




◎삼국을 계승하고

정사(正史)는 국가가 관여하여 만든 정식 역사시로, 당시 지배층이 자신들의 뿌리를 어떻게 인식했는지 알려줍니다.

고려는 고구려 · 백제 · 신라와 고려 통일의 역사를 정리하고, "삼국"이라는 제목으로 시작되는 역사서를 편찬하여 삼국계승인식을 드러냈습니다.



마르티니의《新中國地圖帖[신중국지도첩]》에 실린 한반도 :  네델란드 1655년 동판화

이탈리아 출신 예수회 선교사인 마르티니(1614-1661)는 1643년부터 1650년까지 중국에 머물면서 중국의 지리와 역사를 연구했다.

마르티니가 만든 지도에는 한국이 반도로 분명하게 묘사되어 있으며, "COREA"라는 지명도 기재되어 있다.

나라 이름 외에 "Pinggan(평안)"과 같은 행정구역을 중국어 발음으로 표시하였다.



<타나르와 중국전도> 속의 한반도  :  시대 = 프랑스 1732년

프랑스의 지도 제작자 당빌(1697-1782)이 만든 동아시아 지도이다. 당빌은 청 제국의 지도첩인<皇輿全覽圖[황여전람도]>를 바탕으로 한

중국 지도와 <조선도>에 일본 지도를 첨가해 이 지도를 만들었다. 동해안의 여백에 한반도 지역 명칭 여러 개를 표시했는데, 그 중 하나가

 "고려국"을 나타내는 "KAOLIKOUE"이다.   또한 고려에서 유래한 코리아를 써서 "ROYAUME DE COREE"로 표기하기도 했고,

 제작 당시의 국가 명칭인 조선을 중국어 발음으로 읽어 "TCHAO-SIEN"이라는 명칭도 기재했다.



승려 일연이 지은 삼국의 역사 『三國遺事[삼국유사]』권 4 · 5  : 보물 제 419-3호, 시대 = 고려 1281년, 14세기 인쇄

김부식이 편찬한『삼국사기』와 더불어 삼국의 역사를 알려주는 귀중한 기록 유산이다. 『삼국사기』가 왕명을 받아 유교사관에 입각해 편찬한 역사서라면,

『三國遺事[삼국유사]』는 승려 일연(一然, 1206-1289)이 당시 전해오던 전설과 신화, 풍속, 종교등『삼국사기』에서는 다루지 않은 사건과 기록을 폭 넓게 담아냈다.

 이 책에는 삼국의 역사뿐만 아니라 단군신화, 부여, 삼한, 가야, 후백제의 이야기까지 담겨 있으며, 고승들의 행적이나 효를 행한 사람들,

신이(神異)한 불교 전승에 이르기까지 폭 넓게 수록했다. 단군에 대해 기록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역사서이다.



역대 왕명과 연호를 정리한 연표 = 歷代年表[역대년표]  : 보물 제 734-20호  시대 = 고려 1278년.    소장 = 해인사

중국의 역대 왕조와 우리나라 삼국 및 고려의 역대 왕명과 연호를 새긴 목판이다.

고려 충렬왕(忠烈王) 2년(1276년)까지 여러 왕들의 재위 기간이 비교적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다.

마지막에는 "해동제국년(海東諸國)"이라고 하여 신라 · 발해 · 궁예가 세운 마진(摩震)과 일본의 연호를 적었다.

『三國遺事[삼국유사]』의 저자인 일연이 머물렀던 경산(慶山) 인흥사(仁興社)에서 판각한 것으로 일연과 그의 문도에 의해 찬술된 것으로 본다.

3단으로 구분하고 각 단에 순차적으로 역대 왕명과 연호를 정리하였다.



이승휴가 쓴 역사 서사시 『帝王韻紀[제왕운기]』: 보물 제 1091-1호,     시대 = 고려 1287년 이후 인쇄

고려 후기의 문신 이승휴(李承休, 1224-1300)가 1287년에 저술하였다. 역사적 사건을 소재로 삼아 쓴 시를 모은 형식으로, 상 · 하 2권으로 엮였다.

상권에 중국의 역사를 읊은 친언고시(七言古詩)를, 하권에는 단군시기부터 충렬왕(忠烈王)대까지 우리나라의 역사를  읊은

칠언고시와 오언고시(五言古詩)를, 수록하였다.

중국과 우리나라의 역사를 구분한 체재는 고려의 전통과 역사적 유구함을 드러내기 위한 고민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당시 고려인에게 중요하게 인식되지 않았던 발해를 고려 역사의 일부로 설정함으로써 역사 인식의 폭이 넓어진 면 역시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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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코리아 (Goryeo, Corea)

오늘날 우리나라를 가리키는 영문 명칭 "코리아"라는 호칭은 '고려인이 사는 나라', '고려인의 땅'이라는 의미에서 유래 했습니다.

고려를 방문한 외국인들은 각자 자기 나라 언어에 맞추어 고려를 불렀고, 시간이 지나 고려는 "코리아"라는 이름으로 기록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