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화이야기=고려외

국립중앙박물관 : 대고려 그 찬란한 도전 6

백련암 2019. 3. 14. 15:54

국립중앙박물관 : 대고려 그 찬란한 도전 6


修禪社 奴婢文書[수선사 노비문서]  :  보물 제 572-2호     시대 = 고려 1281년    소장 =  송광사 성보박물관

수선사(修禪社[지금의 송광사]) 주지였던 원오국사(圓悟國師) 천영(天英, 1215-1286)이 아버지인 양택춘(楊宅椿)에게 받은 노비와 그 자식을 수선사에 바쳤고,

이를 나라에서 공인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원오국사는 수선사에 봉안되었던 거란대장경을 관리하기 위해 자신이 상속받은 노비를 수선사에 예속시켰다.

문서 끝부분에 지원(至元) 18년이란 연호가 남아있어 문서가 작성된 연도(1281년)을 알 수 있다. 이 문서는 거란대장경의 전래 사실과 더불어,

승려이지만 속세의 부모에게 상속 받은 노비를 관리했던 모습, 사원이나 승려가 노비를 소유하기도 했던 당시 사회상을 보여주는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



깨달음의 수행 방법을 담은『원각경』 大方廣圓覺修多羅了意經[대방광원각수다라료의경] : 보물 제 753호   시대 = 고려 1357년

상수리 열매로 물들인 종ㅇ 위에 금니(金泥)로『大方廣圓覺修多羅了意經[대방광원각수다라료의경]』의 설법도를 그리고 경문(經文)을 적었다.

이어『文殊最上乘無生戒法[문수최상승무생계법]』의 경문을 적었으며, 뒷면에는  『法寶壇經[법보단경]』의 경문을 적어 세 경전을 하나로 엮었다.

1357년(공민왕 6) 계항(戒桁)을 위해  최적(崔迪)과 일장(一莊)이 김청(金淸), 계심(戒心)과 함께 발원하였다. 평민이 발원한 사경의 귀중한 자료이다.



깨달음의 수행 방법을 담은『원각경』 大方廣圓覺修多羅了意經[대방광원각수다라료의경]



국왕이 발원한『불공견삭신변진언경』佛空羅素神變眞言經 券十三[불공라소신변진언경 권13] : 국보 제 210호

푸른 감지와 표지의 장식, 역동적인 신장의 표현



국왕이 발원한『불공견삭신변진언경』佛空羅素神變眞言經 券十三[불공라소신변진언경 권13] : 국보 제 210호   시대 = 고려 1275년  감지에 금니와 은니

충렬왕 즉위 원년에 은자대장원(銀子大藏院)에서 만든 국왕 발원사경으로, 9미터가 넘는 본문은  "삼중대사(三重大師)"라는 승계를 지닌

승려 "안체[安諦]"가 필사했다.  경전내용은 관음보살의 변화신인 불공견삭관음보살[佛空羂索觀音菩薩]의 진언과 염송법, 화상법(畵像法) 등에 대한 것으로,

국가가 주도하여 대장경을 사경한 기념비적인 불사의 귀중한 사례이다. 사경의 바탕이되는 푸른 감지와 표지의 장식,

역동적인 신장의 표현, 마치 먹으로 쓴 듯 부드러우면서도 강건한 필획을 구현한 글씨에서 최고의 격식과 예술성을 볼 수 있다.



다양한 신중을 그린 화엄경 변상도 = 大方廣佛華嚴經神衆合部[대방광불화엄경신중합부] : 시대 = 고려 1350년

1350년(충정왕 2) 연안군부인(延安郡夫人) 이씨(李氏)가 돌아가신 남편 김석(金錫)과 부모님의 명복을 빌며 발원한 사경이다.

표지에 쓰인 제목은『大方廣佛華嚴經神衆合部[대방광불화엄경신중합부]』로, 감지의 앞면과 뒷면에 모두 경전을 필사했다.

앞면은 고려 시대에 가장 인기를 누렸던 보현보살의 서원「普賢 行願品[보현 행원품]」이고,  뒷면은「華嚴經[화엄경]」의 첫 번째 품인

『世主妙嚴品[세주묘엄품]』이다. 비로자나불의 설법 장면을 그린 변상도를 지나면 금강신, 신중신 등 39위(位) 신중의 행렬과 이들의 서원을 담은

게송(偈頌)이 있다.  모든 여래가 형상으로 나타난 곳에 따라 가며, 거하시는 곳을 항상 수호하겠다는 큰 서원을 세운 이들이다.



아미타경 변상도 = 佛說阿彌陀經變相圖[불설아미타경변상도]  :  시대 = 고려 1341년  감지에 금니와 은니   소장 = 영국 박물관

정토삼부경(淨土三部經)의 하나이자 정토신앙의 근본 경전인『阿彌陀經[아미타경]』을 필사한 사경(寫經)이다.

감지 위에 금니(金泥)로 아미타여래의 설법 장면과 연꽃에서 태어난 중생을 맞이하는 모습을 그렸고, 은니(銀泥)로 글씨를 썼다.

곳곳에 나무 여러 그루가 배치된 점이 독특하다. 경전 말미에는 비구 총고(聰古)의 발원문과 지정원년(至正元年, 1341)이라는 제작 연도가 남아 있다.

총고가 1340년 사경한『妙法蓮華經[묘법연화경]』이 일본의 사가현립박물관에 남아 있는 점으로 미루어,

비구 총고는 경전을 전문적으로 필사하는 사경승(寫經僧)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아미타경 변상도 = 佛說阿彌陀經變相圖[불설아미타경변상도]



부처와 보살을 모신 작은 집



부처와 보살을 모신 작은 집 = 金銅三尊佛龕[금동삼존불감]

불감(佛龕)은 "부처를 모신 작은 집"입니다. 불감은 개인이 사찰 이외의 장소에서 예불을 드릴 때 사용하였고, 바위 틈에 안치하거나 탑 안에 봉안하기도 했습니다.

정말 귀한 불감이 우리를 맞아줍니다. 고려의 사원 건축을 충실히 재현한 불당(佛堂) 형태의 감실에 삼존불이 봉안되어 있습니다.

두 어깨를 덮는 법의(法衣)를 입고 허리가 다소 긴 비례의 불상은 요나라 불상과도 유사합니다.

주변국과의 정치적 대립과 긴장 속에서도 문화적 교류를 이어나가며 고려가 이룬 숭고함이 이 작은 불감 안에 담겨있습니다.



부처와 보살을 모신 작은 집 = 金銅三尊佛龕[금동삼존불감]



부처와 보살을 모신 작은 집 = 金銅三尊佛龕[금동삼존불감]


사찰로 가는 길

사찰은 불상과 불화로 표현된 부처를 만낤 있는 신앙의 공간입니다. 신앙의 중심인 불상과 불화에도 고려 문화의 독자성과 다원성(多元性)이 나타납니다.

거대한 석불처럼 이전 시기나 같은 시기 중국의 것과는 다른 고려만의 독특한 불살이 조성되기도 하였고, 과거의 전통을 기반으로 하되

주변의 여러 왕조와 활발히 교섭하면서 새로운 요소가 선별적으로 수용되기도 하였습니다.

고려는 외교사절에 의한 공식관계뿐만 아니라, 상인이나 승려의 왕래 등 민간 차원의 빈번한 교류로 송의 새로운 불교문화를 받아들였고,

동시에 요(遼)와 같은 북방민족과는 정치적 대립과 긴장 관계 속에서 교섭을 이어갔습니다.

남송(南宋)과는 수도였던 절강성 항저우(杭州[항주]),무역항이었던 닝보(寧波[녕파])를 통해 민간 료류를 지속하였습니다.

원(元) 간섭기에는 티벳 라마불교가 유입되어 고려 왕실과 상류층의 불사(佛事)에 반영되었습니다.

고려 불상과 불화에 보이는 여러 외래 요소들과 그로 인한 변화 양상에서 당시 동아시아의 복잡다단한 정세와 고려인의 주체적인 성격을 엿볼 수 있습니다.


-고려 사찰을 거닐 다.-

수천 개의 숯으로 만든 문은 과거로 들어가는 길입니다. "불감"을 재현한 통로를 지나 고려 불상과 불화를 만나는 본격적인 순례 여행이 시작됩니다.

고려 오백 년을 이끌어온 힘은 어디서 비롯되었을까요, 불상과 불화가 간직한 성스럽고 비밀스런 이야기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사찰 여행을 마치면 차 향기가 가득한 다점(茶店)이 여러분을 기다립니다.



金銅菩薩坐像(금동보살좌상)  :  고려 말 - 조선 초

둥글고 넓적한 얼굴은 편평한 편이나 튀어나온 눈꺼풀과 우뚝 선 예리한 콧날, 굳게 다문 입술은 근엄한 인상을 풍긴다.

가슴 윗부분과 하반신에는 화려한 장신구를 걸쳤다. 전반적인 모습은 고려 후기 보살상의 전형적인 형식을 계승했지만

자세와 신체 비례, 복잡하게 치장한 장식  등은 고려 말에서 조선 초로 이행하는 보살상의 시기적 변화 과정을 보여준다.



보살의 영락 장식 :  瓔珞裝飾[영락장식]  :  시대 = 고려 말 - 조선 초     양주시립회암사지박물관



金銅菩薩坐像(금동보살좌상) : 시대 = 고려 14세기     소장 = 일본 사가현 중요문화재,  후묘지[普明寺[보명사]

정교한 세부 묘사와 온몸에 걸친 화려한 장신구의 장식성이 돋보이는 금동보살상이다. 오른팔을 올리고 왼팔은 내려 각각 엄지와 중지를 맞댄,

아미타구품인(阿彌陀九品印) 가운데 중품하생인(中品下生印)을 취하였다.

굵은 장식이 달린 목걸이와 입체감 있게 도드라진 영락은 고려 후기 보살상의 특징이다. 이 상은 영락 장식을 함께 주조했지만,

영락을 따로 만든 후 상에 부착하기도 한다. 양주 회암사 터에서 출토된 장신구는 보살상을 장식했던 영락으로 보인다.



木造阿彌陀佛坐像(목조아미타불좌상) :  일본 헤이안(平安時代[평안시대]) 12세기      소장 = 일본 도쿄국립박물관

서방 정토를 다스리는 아미타여래에 대한 신앙은 중국과 고려, 일본에서 공통적으로 확인된다. 일본에서는 특히 헤이안시대(平安時代[평안시대],794-1185) 후기

정토종(淨土宗)의 확산으로 아미타당(阿彌陀堂)과 아미타상이 빈번하게 조성되었다. 아미타불좌상은 아마타불의 아홉 가지 수인 가운데

두 손을 배 앞에서 마주하여 엄지와 검지를 맞댄 상품상생인(上品上生印.  法界定印[법계정인])을 취하고 있다.

이 부처의 손 모양은 중생의 성품이 모두 다르기에 각 단계에 맞게 설법하여 정토왕생을 돕는 아미타불의 구제 방식을 보여준다.

고려시대 불상 중에서도 비숫한 수인을 취한 아미타불이 조성되어 동북아시아가 공유한 아미타 신앙과 도상을 확인할 수 있다.



      

木造阿彌陀佛坐像(목조아미타불좌상) :  일본 헤이안(平安時代[평안시대]) 12세기      소장 = 일본 도쿄국립박물관



      

木造大日如來坐像(목조대일여래좌상) : 일본 헤이안(平安時代[평안시대], 12세기     소장 = 일본 도쿄국립박물관

일본의 헤이안 시대(平安時代[평안시대],794-1185)는 중국에서 들어온 밀교(密敎)의 영향으로 밀교의 본존인 대일여래상이 활발하게 제작되었다.

왼손 검지를 세우고 이를 오른손으로 감싼 지권인(智拳印)의 수인은 고려시대 비로자나불의 수인(手印)과 동일하다.

그러나 일본의 대일여래가 머리를 높게 묶고 신체를 장엄한 보살의 모습인 점은 고려의 여래형 비로자나불과 다른 점이다.

두 불상모두 여러 목재를 결합하여 불상을 조각하는 분할조십기법(일본에서는 요세기즈쿠리[기목조[奇木造]라 함)으로 제작되었다.



木造大日如來坐像(목조대일여래좌상)



♧신앙 의례와 불화

고려 왕조 전 시기에 걸쳐 연등회 · 팔관회와 같은 정기적 행사와, 왕실과 국가가 주도하거나 종파별로 개최되는 다양한 의례가 있었습니다.

어떤 의식이든, 그 기본은 공양 의례였습니다. 불, 보살, 나한 등에게 향, 꽃, 등(燈)의 공양을 올리기위해서는

도량을 깨끗이 하여 단(壇)을 가설하고 법식에 맞는 물품을 올린 후 의례의 존상(尊像)을 청했습니다.



水月觀音圖(수월관음도) : 시대 = 오대 10세기,  敦煌(둔황) 千佛洞(천불동)     소장 = 영국 박물관



水月觀音圖(수월관음도) : 시대 = 오대 10세기,  敦煌(둔황) 千佛洞(천불동)     소장 = 영국 박물관

둔황 천불동에서 발견된 관음보살도로, 물가에 면한 바위에 앉은 관세음보살을 그렸다. 대나무와 죽순이 자라는 암좌에 모습을 드러낸 관음보살은

아미타불의 화불이 있는 보관을 썼으며, 오른 손으로는 버드나무 가지를, 왼손으로는 작은 병을 들고 있다.

이러한 구성은 둔황 출토 관음보살도에 공통되어, 이 시기 수월관음도의 도상적 특징이 자리 잡았음을 알 수 있다.

상단에는 천개가 있으며 구름을 타고 내려오는 인물이 보인다. 관음보살의 아래로는 비단 탁의를 덮은 단(壇)에 향로와 기물이 놓여 있고,

손 향로를 든 관리 모습의 공양자를 그렸다.

 


      

水月觀音圖(수월관음도)

상단에는 천개가 있으며 구름을 타고 내려오는 인물이 보인다.

관음보살의 아래로는 비단 탁의를 덮은 단(壇)에 향로와 기물이 놓여 있고,  손 향로를 든 관리 모습의 공양자를 그렸다.



      

水月觀音도(수월관음도) :  敦煌(둔황) 千佛洞(천불동) 五代 또는 北宋(오대, 북송)     소장 = 영국 박물관

활짝핀 꽃으로 장엄한 천개가 있고 대나무가 자라는 관음의 정토는 갈지(之)자 형태로 구획된 수면 위에 도해되었다.

관음보살은 오른쪽 다리로 왼쪽 다리를 누른 자세로 앉아 있으며, 연봉우리 형태의 뚜껑이 있는 작은 금속병과 버드나무 가지를 들고 있다.

화면 하단에는 손 향로를 받쳐 든 승려와 관리 모습의 공양인과 시종이 있다. 불화의 명칭과 공양자의 이름을 적을 수있는 칸이 마련되었으나 여백으로

남아 있다. 방제를 적지 않은 불화는 일종의 레디메이드 형식으로, 동서 교류 상의 실크로드에 위치한 둔황은 지역 거주민 뿐 아니라

이동 중에 있는 많은 이들의 기원의 장소이기도 했다.



      

화면 하단에는 손 향로를 받쳐 든 승려와 관리 모습의 공양인과 시종이 있다.

불화의 명칭과 공양자의 이름을 적을 수있는 칸이 마련되었으나 여백으로 남아 있다.



大興寺  金銅觀音菩薩坐像(대흥사 금동관음보살좌상) : 보물 제 1547호   시대 = 고려 말 조선 초    소장 = 대흥사 성보박물관

한쪽 무릎을 세운 유희좌(遊戱坐)와 윤왕좌(輪王坐) 자세는 송대에 특히 성행한 형식으로, 고려시대에 수용되어 많은 작품이 남아 있다.

이 보살상은 결가부좌 상태에서 오른쪽 다리를 세우고, 왼팔에 체중을 실은채 머리와 상채를 곧게 세우고 있다. 이 상과 유사한 상이 강진 고성사에서도

발견되었다. 고려시대에 대외 해상무역이 활발히 이루어지면서, 바다와 인접한 해남 강진에 송대 윤왕좌보살상 도상(圖像)이 유입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水月觀音도(수월관음도) : 보물 제 1903호     시대 =  고려 14세기     소장 = 호림박물관

큰 원형 광배와 대나무를 배경으로 아름다운 기암절벽 위에 관음보살이 반가좌로 앉아 있고, 관음보살의 시선이 머무는 화면 아래쪽에는

선재동자가 보살을 향해 무릎을 살짝 구부리며 합당하고 서있다.  관음보살은 양손으로 흰색 염주를 쥐고 있는데, 이와 같은 도상(圖像)은

다른 수얼관음도에서는 거의 볼 수 없다.

푸른 대나무와 바위 · 정병 등의 배치나 수월관음과 선재동자의 시선이 만드는 공간감에서 고려 수월관음도의 조화로운 구성을 느낄 수 있다.



      

水月觀音圖(수월관음도)  : 시대 =  고려 14세기     소장 = 미국 메트로폴리탄박물관

수월관음도는 현재 남아 있는 고려불화 가운데 큰 비중을 차지한다. 암좌(巖座) 위에 앉아 옆을 바라보는 관음보살과 배례하는 선재동자를 그리는 전형적인

구성이 대부분인데, 이 수월관음도에서는 선재동자가 화면 오른쪽으로 비켜나고 대신 관음보살의 발치에 갖가지 공양물을 든 인물과 바다 괴물을 그린 것이 특징이다.

관을 쓴 용왕을 선두로 여인들과 관리들이 따르고, 뒤에서는 바다 괴물들이 보물을 나르고 있다.

통일신라 승려 의상(義湘)이 7일간 재계(齋戒)하자 불법을 수호하는 용천팔부(龍天八部) 시종이 수정 염주를 내주었고,

다시 7일간 재계하자 관음의 진신(眞身)을 만나게 되었다는『삼국유사』의 내용을 반영한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木造觀音菩薩坐像(목조관음보살좌상)  :  송나라     소장 = 영국박물관

당나라 양식을 계승한 남방의 송과 북방의 요나라 불상은 11세기 이후가 되면 각각 독자적인 특징을 보인다.

송대에는 관음보살은 반가좌(半跏坐)와 유희좌(遊戱坐) 윤왕좌(輪王坐) 등 다양한 자세를 취한 관음보살상이 제작되었다.

특히 해안가에 위치한 복건성과 절강성 지역에서는 보타락가산(補陀洛迦山)의 수월관음 신앙이 유행하여, 유희좌 혹은 윤왕좌를 취한 관음보살상이 많이

조성되었다. 이 상처럼 암좌 위에 앉아 한쪽 무릎을 세우고 다른 발은 대좌 아래로 편하게 내린 유희좌는 북송대 이래

수월관음상의 보편적인 자세로 정착되었으며,  암좌가 없는 경우라도 대개 수월관음상으로 간주된다.



長谷寺 金銅藥師佛坐像(장곡사 금동약사불좌상) : 보물 제 337호    시대 =  고려 1346년

약사불은 갖가지 질병을 고쳐주고 재난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부처이다. 이 약사불상은 균형잡힌 신체표현과 뛰어난 조형성을 보여주는 고려 후기의 대표적인

금동불이다.  왼손에 위로 불룩 솟은 약그릇을 들고 있는데, 뚜껑이 아니라 약이나 음식 같은 내용물을 나타낸 것이다.

이러한 도상(圖像)은 통일신라 후기의 전통을 계승한 것이다. 이 상의 복장(腹藏)에서 다수의 발원문과 직물이 확인되었다.

발원문에는 승려 백운(白雲)의 이름과 함께  천여 명의 이름이 적혀있다. 1346년에 백운의 주도로 수많은 사람들이 시주하여 불상을 조성했음을 알 수 있다.


◎고려 사원을 거닐 때 만났던 장곡사 약사불을 기억하시나요?

우아한 자태에 오른 손에는 약기(藥器)를 들고 있었습니다. 가득 담긴 것은 어떤 병이든 고칠 수 있는 약이었을 수도 있고

고려인들의 공양이었을 수도 있습니다.